문화&사상

조선의 비주류 인생_04

醉月 2009. 9. 17. 08:49

일지매, 한국에서 거듭나다

송나라 ‘아래야 도둑’에서 시작해 한·일로 번진 일지매 설화…한국에서만 민중적 영웅의 모습으로 변화

▣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요사이 한 방송사에서 <일지매>를 방영하고 있다. 곱상하게 생긴 배우 이준기가 민중의 편에 서서 부패한 관리와 부자를 응징함으로써 억눌린 대중의 한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 퓨전사극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15년 전에는 장동건이 주연한 <일지매>가 텔레비전 사극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도둑의 배역치고는 곱상한 미남 배우가 주역으로 나오는 것은 고우영의 연작만화 <일지매>의 영향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춘향전>만큼은 아니지만, 이렇게 일정한 가격을 두고 소설과 영화, 연극과 텔레비전 사극 등 다양한 매체로 변신을 거듭하는 대표적 고전물 가운데 <일지매>도 빠지지 않는다. 일지매는 20세기 한국인에게 어필한 대표적인 고전 인물 캐릭터의 하나다.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이야기 속의 인물에 불과할까

누구에게나 춘향과 홍길동처럼 친숙하게 다가오는 인물이기 때문에 일지매가 어떠한 성격의 인물이며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를 시시콜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적어도 수십 년 동안, 아니 200여 년 동안 일지매의 형상은 사람들에게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이 유명한 캐릭터가 처음 본격적으로 등장한 문헌이 바로 조수삼의 <추재기이>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일지매는 도둑 가운데서 협객이다. 탐관오리가 밖에서 부정하게 모은 재물을 훔쳐서 생계도 꾸리지 못하고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늘 나누어주었다. 처마를 날아다니고 벽에 붙어다닌 그는 날래기가 귀신과도 같았다. 그래서 도둑을 맞은 집에서는 어떤 도둑이 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제 손으로 붉은 종이에 매화 한 가지를 새겨서 표시를 해놓았다. 다른 자에게 혐의를 옮기지 않으려는 심사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지매의 성격을 요약하면 위 기록과 거의 동일할 것이다. 이렇게 뼈대만 남아 있는 것이 20세기로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버전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이야기의 원전이다. 이 뼈대를 다시 추리면, 부패한 관리의 재물을 훔쳐서 가난한 민중을 도와주는 의적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훔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매화 한 가지를 그려놓고 사라지는 신출귀몰하고 대범한 태도가 일지매라는 캐릭터의 매력이다.

 

조수삼이 밝혔듯이 일지매의 사연은 당시에 조선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의로운 도둑 설화였다. 비슷한 시기의 학자인 홍길주(洪吉周)의 <수여방필>(睡餘放筆)이란 책에서 ‘대도 일지매가 이완(李浣) 대장 시절의 대도라느니 장붕익(張鵬翼) 대장 시절의 대도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민간에 떠돈다’고 기록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완은 효종, 장붕익은 숙종 때의 유명한 대장으로, 조선 후기 무인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이 희대의 도둑을 명성이 드높은 포도대장과 맞대결시켰기에 더욱 흥미를 돋우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일지매를 역사상 실존한 대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실제로 1716년(숙종 42년)에 형조판서 민진후(閔鎭厚)가 국왕에게 일지매란 도적을 옥에서 풀어줄 것을 진언하는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일지매가 실존 인물이거나 아니면 일지매를 사칭한 인물이 있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일지매는 늦어도 19세기 초반에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다. 홍길주가 어떤 패기(稗記)에서도 이 이야기를 본 일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으므로 소설이나 야담으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지매는 18·19세기 조선에서 유행한 이야기 속의 인물에 불과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시선을 이웃나라로 돌려보고, 이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식적인 사실이지만, 대도와 의적은 동서고금을 통해 이야기 문학에 널리 퍼져 있다. 그 가운데 일지매와 비슷한 이야기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필자를 비롯해 국문학자인 서신혜와 중문학자인 최용철 교수가 논문을 발표해 밝히기도 했다. 이 문제는 일지매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꽤 중요하므로 더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 송나라 때 지어진 야사에는 ‘내가 왔다 간다’는 표지를 남기고 도둑질하는 ‘아래야(我來也) 도둑’이 등장한다. 일지매는 매화를 그려서 남겼지만 이 도둑은 글씨를 남겨서 자신이 도둑질한 것임을 밝혔다. 심숙(沈俶)이란 작가가 쓴 <해사>(諧史)에 실려 전하는 이 사연은 조선에서 널리 읽힌 <설부>(說郛)와 <서호지여>(西湖志餘) 등의 책에 재수록돼 있으므로, 조선에서도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리라. 19세기의 저명한 화가인 장한종(張漢宗)이 엮은 야담집 <어수신화>(禦睡新話)에 ‘내가 왔다 간다’고 밝힌 괴도(怪盜), 곧 아래적(我來賊)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아래야’ 설화를 조선풍 이야기로 충실하게 번안한 것이다.

 

20세기 들어 더 큰 독자 확보

흥미롭게도 도둑이 자신의 존재를 밝힌다는 이야기는 일본에서 ‘지라이야’(自來也)로 둔갑한다. 에도시대의 독본이나 가부키 등에 등장하는 괴도로 지라이야가 유행했다. 메이지시대 일본에서 <지라이야 설화>(自來也說話)가 출판돼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만화와 게임으로도 만들어져 국내에도 많은 애호가를 확보하고 있다.

 

송나라 때 시작된 ‘아래야’ 도둑 이야기는 이렇게 장구한 기간에 걸쳐 동아시아 삼국에서 괴도 이야기로서 널리 전파되었던 것이다. 한편, 아래야 도적은 본래 의적의 성격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아래야 도둑 이야기는 명말 소설가인 능몽초(凌濛初)가 편찬한 단편소설집 <이각박안경기>(二刻拍案驚奇)에 ‘난룡’(嬾龍)이란 신투(神偸·귀신 같은 도둑) 이야기로 발전한다. 그 단편소설의 제목은 “귀신 같은 도둑이 일지매에 흥을 붙이고, 협객의 도적은 삼매경을 자주 희롱한다네”이다. 일지매의 본명이 난룡이다. 소설에는 일지매가 “하루 종일도 잠잘 수 있고 변화무쌍하기가 용과도 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난룡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르는 곳마다 물건을 손에 넣기만 하면 곧 벽에다 일지매를 그려놓았다. 검은 곳에는 희게 그렸고, 분칠한 벽에는 숯으로 검게 그렸다.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일지매라고도 불렀다”고 묘사했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아무리 방비를 잘해도 물건을 감쪽같이 훔쳐냈다. 대단히 신사적인 괴도로서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이 여유 있게 재물을 훔쳤다. 그리하여 그는 “귀신처럼 출몰하고 비바람처럼 오가기에 참으로 천하에 짝이 없는 솜씨로 인간 세상 제일가는 도적”으로 묘사되었다.

 

일지매는 도둑질을 할 때 원칙을 세웠다. 부녀자를 강간하지 않고, 선량한 사람이나 우환이 있는 집안은 들어가지 않으며, 남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빈궁한 사람에게 재물을 베푸는 원칙이었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원칙은 수전노와 불의한 부자를 골탕 먹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의적으로 소문이 났다.

 

그런 점을 보면, 그는 먹고살기 위해 도둑질하는 생계형 도둑이 아니라 도둑질을 하나의 유희로 하는 사람이었다.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그의 모습과 도둑질하는 천부적 재능을 묘사한 것을 보면, 서양의 괴도 루팡과도 견주어볼 만한 존재다. 우리가 지금 각종 매체의 일지매 극에서 확인하는 내용은 이 단편소설에서 묘사된 일지매와 유사하다.

명나라 말엽에는 <환희원가>(歡喜寃家)란 단편 백화소설집이 출현하는데 여기에도 대도 일지매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아래야’ 도둑의 모습과 유사하고 난룡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추재기이>에 나오는 일지매와 중국 소설에 나오는 일지매는 어떠한 관련성이 있을까? 일지매라는 이름과 행동의 유사함으로 놓고 볼 때, 일정한 영향관계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국 소설에 나온 내용을 배경과 일부 디테일만 바꾸어 조선판으로 감상했다고 보기에 망설여지는 대목도 적지 않다. <추재기이>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은 채 뼈대만 있어서 과연 어느 정도 유사한지는 미지수다. 조수삼이 그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추재기이>의 기록 방식이 간략한 줄거리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테일의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현재로선 중국의 일방적 영향을 받은 야담이라고 추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더욱이 당대 사람들이 일지매 이야기를 조선에서 일어난 실화로 알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것이 구전으로 유포되면서 중국에서 들어온 소설과 결합해 전형적 일지매 이야기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의적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민중의 심리에 편승해 인조나 숙종, 영조 때의 실화로 널리 퍼졌다. 설사 중국 문학 속 일지매를 수용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중국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은 현재까지도 거의 망각되었다. 지금 대다수 한국인은 그것을 한국적 풍토에서 발생한 한국의 이야기로 알고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국적을 중국 것으로 돌리는 건 난센스다.

 

조선 후기에 널리 유포된 일지매 이야기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사라지기는커녕 더 큰 독자를 확보했다. 20세기 초의 양상만 봐도 그렇다. <일사유사>를 편찬한 장지연은 1916년 5월16일 <매일신보>에 영조 때의 포도대장인 장지항과 관련한 의적 이야기를 수록했다. 장지항은 바로 장붕익의 손자다. 이 신문에는 감옥에 갇힌 일지매가 탈출해 장지항의 집에 나타나 매화를 그려놓고 가서 옥에서 풀려나게 되었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한편, 장지연은 누군가가 이 일지매의 정체를 ‘갈건거사’(葛巾居士)로 본다는 이설도 소개했다. 민생을 도탄에 빠트리는 관리라는 도둑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서너 끼를 굶주리다 배고픔에 남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이 잡혀가는 것을 개탄한 갈건거사가 그 주인공이다. 내가 보기에는 갈건거사를 일지매로 보는 것은 일지매를 의적의 대명사로 간주하던 당시 사람들의 심리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이렇게 의협심을 지닌 사람이 일지매로 둔갑하는 것을 보면, 일지매를 보는 민중의 시선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중·일에서 보이지 않는 민중성

장지연은 기사의 뒷부분에서 일지매의 성격을 이렇게 말했다.

“일지매는 밤마다 부호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훔쳐냈지만, 빈한한 집에는 한 번도 침입하지 않았다. 때때로 얻은 돈과 비단으로 빈궁한 사람을 구제하였을 뿐 조금도 스스로 취하지 않았다. 그는 늘 가난한 선비의 행색을 하고 다녔다. 민첩하여 몇 길 담장도 훌쩍 뛰어넘었다. 그가 촌락을 돌아다닐 때에는 민가에 걸식하며 고생을 두루 맛보았다. 뒤에는 법망에 걸려 죽임을 당했다.”

 

일지매가 완전히 민중적 영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가난한 선비의 행색을 하고 다니고 걸식하며 민중의 고생을 체험하는 모습은 민중과 고통을 나누는 감동적 형상이다. 갈수록 의로운 도둑에서 민중적 영웅의 모습으로 변화돼가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중국이나 일본의 일지매에서는 이런 정도의 민중성이 보이지 않는다. 조수삼에게서는 불우한 영웅의 모습을 띠던 일지매가 한국적 민중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모습은 요사이 방영되는 <일지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체제 전복까지도 서슴없이 토로하는 현대의 일지매에는 현대 한국 민중의 정치적 욕망까지도 투사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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