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 오옥진씨
생기잃은 나무에 문명의 魂 새기다
꿈 새기는 장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철재 오옥진씨가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각자 작품을 만들고 있다. 각자를 위해 조각은 물론 서예와 한학까지 연마한 그는 “나무에 글씨를 새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
樂天知命 和光同塵 오옥진씨의 각자 작품 ‘낙천지명(樂天知命) 화광동진(和光同塵)’. 천명을 즐기고 빛을 감추고 세속에 섞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
목판(木板)에 글씨를 새기는 공예를 각자(刻字)라 하고, 그러한 기능을 가진 장인을 각수(刻手), 또는 각자장(刻字匠)이라 한다. 각자는 정서각(正書刻)과 반서각(反書刻)이 있다. 정서각은 공공건물이나 사찰 또는 재실에 거는 현판 등 글자를 목판에 그대로 새기는 것이고, 반서각은 인쇄하기 위하여 글자를 뒤집어 새기는 것을 말한다. 즉, 생기 잃은 나무에 전통 방식으로 살아 있는 문명의 혼을 새겨 넣는 작업인 셈이다. 나무에 꿈을 새기는 예술이다. 중요성이 인정돼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이번에 만난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철재 오옥진(75)씨다.
봄기운이 꿈틀대는 지난 주말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오씨의 공방을 찾았다. ‘낙천지명(樂天知命?천명을 즐기고) 화광동진(和光同塵?빛을 감추고 세속에 섞인다)’이란 글씨를 새기고 있었다. 반평생 나무를 껴안고 살아온 예인답게 한 자리에서 굳은 듯 글을 새기는 모습이 거룩하기까지 했다. 곧 있을 전시회에 낼 작품이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기에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힘들지 않습니다. 나무에 글을 새기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각자 작업은 크게 치목(治木), 배자(配字), 각자(刻字) 등 세 가지 공정으로 나뉜다. 치목은 인쇄나 작품용으로 쓰이는 돌배나무, 현판용으로 쓰이는 은행나무?피나무 등 용도에 맞게 나무를 고르는 과정을 뜻한다. 요즘은 수입목도 많이 사용한다. 나무를 정하면 바닷물에 담가 건조과정을 거친다. 건조는 온도나 습도의 변화에 나무 형태가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치목 과정을 거친 나무는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표면을 고른 다음 글씨를 늘어놓는다. 이를 ‘배자’라 한다. 비교적 간단한 배자 과정이 끝나면 작업의 하이라이트인 ‘각자’ 과정에 돌입한다. 칼과 끌, 망치 등을 사용해야 하는 이 과정은 글씨의 맛과 특징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봄기운이 꿈틀대는 지난 주말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오씨의 공방을 찾았다. ‘낙천지명(樂天知命?천명을 즐기고) 화광동진(和光同塵?빛을 감추고 세속에 섞인다)’이란 글씨를 새기고 있었다. 반평생 나무를 껴안고 살아온 예인답게 한 자리에서 굳은 듯 글을 새기는 모습이 거룩하기까지 했다. 곧 있을 전시회에 낼 작품이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기에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힘들지 않습니다. 나무에 글을 새기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각자 작업은 크게 치목(治木), 배자(配字), 각자(刻字) 등 세 가지 공정으로 나뉜다. 치목은 인쇄나 작품용으로 쓰이는 돌배나무, 현판용으로 쓰이는 은행나무?피나무 등 용도에 맞게 나무를 고르는 과정을 뜻한다. 요즘은 수입목도 많이 사용한다. 나무를 정하면 바닷물에 담가 건조과정을 거친다. 건조는 온도나 습도의 변화에 나무 형태가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치목 과정을 거친 나무는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표면을 고른 다음 글씨를 늘어놓는다. 이를 ‘배자’라 한다. 비교적 간단한 배자 과정이 끝나면 작업의 하이라이트인 ‘각자’ 과정에 돌입한다. 칼과 끌, 망치 등을 사용해야 하는 이 과정은 글씨의 맛과 특징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예인의 손길 오옥진씨가 끌과 망치를 이용해 각자 작업을 하고 있다. |
각자 도구들 오옥진씨가 사용하는 다양한 각자 도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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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 필통 오옥진씨가 가훈의 내용을 담은 필통을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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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씨가 나무와 인연을 맺게 된 건 1950년대 말 군생활을 마친 뒤 당시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있던 국립중앙직업보도원의 목공예과를 1기로 졸업하면서부터다. 조선시대 말기 면암 최익현 선생과 가깝게 지냈던 증조부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아이들을 위한 학습용 서책을 만들기 위해 각자를 했고, 이것이 가문에 면면히 이어져 각자장 오씨의 토양이 된 것이다.
60년대 기업체 등에서 목공예 일을 하다 70년 서각을 하던 신학균 선생을 만나 본격적인 각자의 길에 들어선 오옥진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 한창 물이 오른 그는 단순히 주어진 글씨만을 새기는 일에서 벗어나 일중 김충현 선생에게서 서예를, 청명 임창순 선생에게서 한문을 익혀 자신만의 독특한 각자세계를 이루게 된다.
오씨는 자신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해 목판에 새긴 조선시대 서울 그림지도인 ‘수선전도’(국립민속박물관 소장)와 79년 돌배나무를 책판의 재료로 써서 만든 ‘훈민정음 영인본’(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을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꼽는다. 또한 90년 말 경복궁 복원공사 때 지어진 자선당 등 6개의 현판작업과 2006년 10월 현판식을 한 조계사의 일주문 현판작업도 잊지 못할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60년대 기업체 등에서 목공예 일을 하다 70년 서각을 하던 신학균 선생을 만나 본격적인 각자의 길에 들어선 오옥진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 한창 물이 오른 그는 단순히 주어진 글씨만을 새기는 일에서 벗어나 일중 김충현 선생에게서 서예를, 청명 임창순 선생에게서 한문을 익혀 자신만의 독특한 각자세계를 이루게 된다.
오씨는 자신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해 목판에 새긴 조선시대 서울 그림지도인 ‘수선전도’(국립민속박물관 소장)와 79년 돌배나무를 책판의 재료로 써서 만든 ‘훈민정음 영인본’(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을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꼽는다. 또한 90년 말 경복궁 복원공사 때 지어진 자선당 등 6개의 현판작업과 2006년 10월 현판식을 한 조계사의 일주문 현판작업도 잊지 못할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세상 떠난 아들과 다정했던 모습 각자의 길을 함께 걸어오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아들과 작업을 하고 있는 오옥진(오른쪽)씨 부자의 다정했던 1990년대 중반 모습. |
각자인들의 모임인 ‘철재각연’을 조직해 80년 첫 철재각연전을 개최한 이후 매년 자신과 제자, 회원들의 작품을 한데 묶어 전시활동을 해온 오씨는 국내 전시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작가들과도 교류하는 전시회를 통해 한국전통의 각자를 세계에 선보이고 있다.
훈민가 ‘아버님 날 낳으시고’로 시작되는 훈민가 작품. |
萬物新 오옥진씨의 각자 작품 ‘만물신(萬物新)’. 모든 것이 새롭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
반평생 즐거운 마음으로 나무와 싸워 왔다고 자부하는 오옥진씨는 요즘, 지난해 화마로 잿더미가 된 숭례문의 현판 복원을 위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숭례문 현판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게 쉽지 않은 작업”이라면서도 구슬땀을 흘리는 그를 보면 왠지 믿음이 생긴다.
남은 삶도 사람의 혼을 나무에 새기는 각자 작업에 바치고 싶다는 노대가의 은은한 미소 속에 전통 각자에 대한 자신감이 뚝뚝 묻어난다.
남은 삶도 사람의 혼을 나무에 새기는 각자 작업에 바치고 싶다는 노대가의 은은한 미소 속에 전통 각자에 대한 자신감이 뚝뚝 묻어난다.
범종과 함께 반백년… '한국의 소리'를 품다
무형문화재 화각장 이재만 씨
“왕들이 죽으면 궁중에서 소장품을 같이 묻어주는데 금속 유물은 출토되지만 화각공예는 쇠뿔이어서 부패해 버리기 때문에 남아 있는 유물이 많지 않아요. 그나마 남아 있는 유물들도 프랑스나 일본 쪽으로 넘어가 있는 게 많아서 서둘러 재현해 내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이씨가 국내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던 전통제련방식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건 2004년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서양문물이 밀려오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다가 일제 침략 이후 완전히 명맥이 끊긴 우리 고유의 전통 철 제작방식을 복원한 것이다. 쇠에 미쳐 부상을 마다하지 않고 생계조차 팽개친 채 외길을 달려온 지 20년 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충남 당진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씨는 어린시절 외양간에서 쇠죽을 끓이고 남은 숯으로 쇠못을 달궈 망치로 두들기며 놀았다. 만들고 그리는 데 소질이 있었던 이씨는 1984년 당시 ‘계간미술’에 실린 문화재전문위원 이종석의 글 ‘비법을 잃고 장구화한 장도’를 접한 뒤 전통제철 방식으로 검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모래밭에서 채취해낸 사철(沙鐵). 아무런 자료도 기술도 전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홀로 대장간을 차려놓고 동분서주했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아이 낳는 일도 포기했다. 생계는 아내가 해결했다. 온몸에는 철편이 튀어 옻오른 것처럼 상처가 자욱하고, 이빨이 통째로 나간 적도, 실명 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이 너무너무, 사무칠 정도로 재미있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거듭 말한다.
“이 칼날을 불빛에 비춰 보세요. 노을이 보이죠? 여기는 맑은 하늘이고 저기는 지평선입니다. 어떻게 연마하느냐에 따라 대추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문양들이 보입니다. 지금은 일본의 명장들이 이 분야에선 독보적이지요. 우리가 백제시대에 일본에 전수했던 이런 기막힌 칼을 만드는 능력을 이제는 우리가 되찾을 수 있습니다. 차갑고 빛나기만 하는 건 현대강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명검은 습한 듯 부드럽고 강한 느낌을 줍니다. 그 검의 날에 어룽대는 무늬는 바로 우리 선조의 기상이요 혼백입니다.”
◇이은철 도검장이 만들어낸 도검들. 이은철씨는 애호가의 요청이 쇄도해도 지금까지 자신이 만든 검을 팔지 않았다. 일차적으로는 아직도 마음에 드는 검을 만들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이긴 하지만, 도인이나 법사의 신검으로 내놓을 수는 있어도 개인 수집가에게 파는 건 어쩐지 탐탁지 않아서다. 몸은 비록 상처투성이이지만, 자신의 일에서 무한한 기쁨을 느끼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주철장 원광식씨
장인의 손길 완성된 종의 소리를 점검하고 있는 원광식 주철장. 같은 방법으로 같은 모양의 종을 만들어도 모든 종의 소리는 다르다. |
50년 한길 원광식씨가 범종 거푸집에 쇳물을 붓는 작업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이 쇳물에 한쪽 눈을 잃었다. |
야외 용해로에선 쇳물을 녹이는 풍로소리가 요란하고, 주물공장 안에서는 때아닌 목탁소리가 드높다. 쇳물을 운반할 용기가 레일을 타고 용해로에 다가가자, 커다란 쇠갈고리가 용해로를 들어올려 시뻘건 쇳물을 들이붓는다. 다시 서서히 공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용기 속의 쇳물은 이제 마지막 거처로 옮겨갈 차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鑄鐵匠·쇠를 녹여서 각종 기물을 만드는 장인) 원광식(67)씨가 쇳물과 사람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다. 그가 1년여에 걸쳐 만들어 놓은 범종의 거푸집 속으로 붉은 쇳물이 용암처럼 흘러들기 시작하자, 절정에 오른 목탁소리가 뜨거운 거푸집을 휘감아 돈다. 이제 이틀 후쯤 거푸집을 해체하고 열흘 가량 마무리 잔손질을 하는 일만 남았다. 과연 새 범종은 맑고 긴 여운을 지닌 아늑한 ‘한국의 소리’를 제대로 품고 나올까.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鑄鐵匠·쇠를 녹여서 각종 기물을 만드는 장인) 원광식(67)씨가 쇳물과 사람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다. 그가 1년여에 걸쳐 만들어 놓은 범종의 거푸집 속으로 붉은 쇳물이 용암처럼 흘러들기 시작하자, 절정에 오른 목탁소리가 뜨거운 거푸집을 휘감아 돈다. 이제 이틀 후쯤 거푸집을 해체하고 열흘 가량 마무리 잔손질을 하는 일만 남았다. 과연 새 범종은 맑고 긴 여운을 지닌 아늑한 ‘한국의 소리’를 제대로 품고 나올까.
종으로 태어날 쇳물 김해 ‘시민의 종’을 만드는 데 사용된 쇳물. 범종을 만드는 쇳물은 통상 동(銅)과 주석을 8:2의 비율로 녹인다. |
수덕사종 제작시절 1970년부터 3년간 수덕사에서 기거하며 당시로서는 건국 이래 가장 큰 4t짜리 수덕사종을 만들던 시절, 원광식씨(왼쪽)가 원담 스님 등과 함께 종 제작과정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
원씨가 ‘성종사’(충북 진천군 덕산면 합목리)에서 21t짜리 김해 ‘시민의 종’ 주물 작업을 지휘하는 날, 김해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부산 지역 각 사찰 스님들까지 80여명이 올라와 현장을 지켜보았다. 국내의 웬만한 범종은 모두 이곳에서 제작했을 정도로 주철장 원씨는 이 분야의 독보적인 장인이다. 마지막 여분의 쇳물 보충작업까지 마친 뒤 손님들이 전세버스를 타고 공장 마당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겨우 말을 붙일 짬이 생긴다.
“만족은 없어. 이러다 가는 것뿐이지. 내가 못하면 다음 세대 애들이 허고, 또 허고…. 아는 것도 없어요. 배우는 것뿐이지, 얼마나 배우느냐가 문제지….”
삼대에 걸쳐 종을 제작해 온 장인 집안 출신으로 17살 때부터 50여년 동안 범종을 만들어 온 원씨. 팔촌 형 원국진씨 밑에서 혹독하게 기술을 배우다가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21살 때 쇳물이 폭발해 한쪽 눈을 잃었다. 1년여의 방황 끝에 충남 수덕사 범종 제작에 매달려 3년 만에 완성해낸다.
이후 그가 달려온 외길 인생은 범종 소리의 맑고 긴 맥놀이에 사로잡힌 세월이었다. 지금까지 서울 보신각종과 낙산사 동종 등을 복원했고, 신라의 성덕대왕 신종이나 상원사 동종을 만들어낸 전통적인 범종 제작방식인 밀랍주조기법을 재현해 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종도 천년이 넘어가면 수명이 끝나. 우선 고려나 신라 시대의 깨진 종들을 복원해내는 게 급하고, 그 뒤에 내 작품 하나 만들고 싶어. 지금까지 수많은 종을 만들어 왔지만 아직도 내 맘에 드는 건 없어.”
“만족은 없어. 이러다 가는 것뿐이지. 내가 못하면 다음 세대 애들이 허고, 또 허고…. 아는 것도 없어요. 배우는 것뿐이지, 얼마나 배우느냐가 문제지….”
삼대에 걸쳐 종을 제작해 온 장인 집안 출신으로 17살 때부터 50여년 동안 범종을 만들어 온 원씨. 팔촌 형 원국진씨 밑에서 혹독하게 기술을 배우다가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21살 때 쇳물이 폭발해 한쪽 눈을 잃었다. 1년여의 방황 끝에 충남 수덕사 범종 제작에 매달려 3년 만에 완성해낸다.
이후 그가 달려온 외길 인생은 범종 소리의 맑고 긴 맥놀이에 사로잡힌 세월이었다. 지금까지 서울 보신각종과 낙산사 동종 등을 복원했고, 신라의 성덕대왕 신종이나 상원사 동종을 만들어낸 전통적인 범종 제작방식인 밀랍주조기법을 재현해 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종도 천년이 넘어가면 수명이 끝나. 우선 고려나 신라 시대의 깨진 종들을 복원해내는 게 급하고, 그 뒤에 내 작품 하나 만들고 싶어. 지금까지 수많은 종을 만들어 왔지만 아직도 내 맘에 드는 건 없어.”
정성껏 다듬기 거푸집을 해체한 뒤 종의 표면을 망치와 끌을 사용해 다듬고 있다. 김해 ‘시민의 종’은 은행잎과 가야토기의 기마상을 새겨 넣었다. |
종 박물관 원광식씨가 150여점의 종을 기증해 2005년 9월 충북 진천읍 장관리에 개관한 종박물관 내부. |
틈날 때마다 사재를 들여 만든 범종 150여점을 ‘종 박물관’에 기증했던 그는 이제 무당방울이나 쇠방울 같은, 쇠로 만들어 소리가 나는 모든 물건을 수집해 ‘소리박물관’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주물공장 뒤편에는 그가 노년을 보내는 아담한 집이 서 있는데, 지붕 위에 범종을 올려놓았다. 앞마당에도 크고 작은 범종 서너 개가 매달려 있다.
원씨는 바깥 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고 이 집에 칩거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마당에 나와 종을 친다고 했다. ‘성종사’는 공장 이름이지만, 먼 곳에 사는 어떤 이에게는 ‘원광식 주지’가 거처하는 사찰명으로 들릴 법도 하다.
원씨는 바깥 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고 이 집에 칩거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마당에 나와 종을 친다고 했다. ‘성종사’는 공장 이름이지만, 먼 곳에 사는 어떤 이에게는 ‘원광식 주지’가 거처하는 사찰명으로 들릴 법도 하다.
무형문화재 화각장 이재만 씨
쇠뿔 캔버스에 藝魂 불어넣으면 십장생이 살아있는 듯
◇무형문화재 109호 화각장 이재만씨가 자신이 만든 화각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이씨는 화각공예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기를 희망했다. |
소라는 동물이 살아서는 가없는 노동으로 인간을 위해 봉사하다가 죽어서도 사지육신 남김없이 다시 인간에게 바치는 헌신적인 존재인 건 알지만, 뿔까지 요긴하게 활용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화각’(華角)의 캔버스가 바로 쇠뿔이다.
◇이재만 화각장은 목기 제작까지 자신이 직접 담당하고 있다. 그의 부친은 소문난 대목장이었다. |
쇠뿔을 삶아 얇고 투명하게 펴서 자른 뒤 뒷면에 오방색과 간색으로 봉황이나 용, 모란, 십장생 등의 전통 그림이나 문양을 넣어 공예품을 장식하는 예술이 화각이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웬만한 머릿장 하나 장식하려면 400여장의 ‘캔버스’가 필요하니, 소 200마리가 동원되는 셈이다. 이처럼 재료도 귀하고 공정이 까다로운 작업이어서 화각공예품은 예로부터 왕실과 귀족층에서나 소장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이 화각공예 기술을 지니고 있는 ‘화각장’(華角匠)은 무형문화재 109호로 지정된 이재만(59)씨가 유일하다.
◇애기 사층장(四層欌) ◇화형합(花形盒) |
“왕들이 죽으면 궁중에서 소장품을 같이 묻어주는데 금속 유물은 출토되지만 화각공예는 쇠뿔이어서 부패해 버리기 때문에 남아 있는 유물이 많지 않아요. 그나마 남아 있는 유물들도 프랑스나 일본 쪽으로 넘어가 있는 게 많아서 서둘러 재현해 내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이재만 화각장이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왼쪽)◇작업실에서 이재만 화각장이 불편한 손으로 목기를 다듬고 있다.(오른쪽) |
◇삼층장 일부분. |
비 내리는 날,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 지하 공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화각장 이재만씨가 형광등 불빛 아래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객이 찾아들자 잠시 손놀림을 멈춘 그는 “나라에서 시키는 건 아니지만 사비를 들여 외국 박물관까지 찾아가 자료를 어렵게 얻어와 비용이 충당되는 대로 짬짬이 재현한다”며 “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전승지원비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하는 고교생이었던 그는 1966년 친구의 소개로 고(故) 음일천 선생을 만났다. 그는 당시 선생 노부부가 화각을 하는 모습을 보고 “노인네가 쪼그려 앉아 작업하는 모양이 너무 안타까워서 배운다기보다도 도와주고 싶은 동정심에서” 화각 일을 시작했다.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하는 고교생이었던 그는 1966년 친구의 소개로 고(故) 음일천 선생을 만났다. 그는 당시 선생 노부부가 화각을 하는 모습을 보고 “노인네가 쪼그려 앉아 작업하는 모양이 너무 안타까워서 배운다기보다도 도와주고 싶은 동정심에서” 화각 일을 시작했다.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 지하 공방에 널려 있는 목공예품들.
전통제철 도검장 이은철씨 잃어버린 ‘백제신검’ 불 속에서 부활하다수공으로 도검을 만드는 기술은 본디 우리가 지녔던 뛰어난 능력이었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지 오래다. 국내에는 제철소에서 제련된 현대강으로 도검을 만드는 도검장(刀劍匠) 10여명만 존재할 뿐이다. 그나마 현대강이 아닌, 전통방식으로 철을 제련해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를 쓰지 않고 인력으로만 검을 만들 수 있는 이는 이은철(52)씨밖에 없다. 그를 단순한 ‘도검장’이 아니라 ‘전통제철 도검장’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다. |
◇이은철 도검장이 숯불 가마에서 달궈진 철괴를 꺼내어 두드리기 시작하자 불꽃이 부채살처럼 퍼지고 있다. 이은철씨의 몸은 ‘옻 오른 것처럼’ 불꽃이 만들어낸 상처로 자욱하다. |
“현대강은 코크스(cokes)로 제련하기 때문에 전통강에 비해 인과 황의 함유율이 10배나 높습니다. 전통철은 숯으로 녹여내 화학적으로 깨끗해서 녹이 더디게 슬지요. 전통강으로 만든 칼에는 다양한 무늬들이 나타납니다. 현대강은 압연으로 빼내기 때문에 칼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어서 공예적 가치가 없습니다.”
경기도 여주의 농가 주택을 ‘대장간’으로 개조해 10여년째 이곳에서 쇠와 불을 다루며 외길을 걸어온 이은철씨.
그는 일행이 찾아가자 머리에 질끈 수건을 동여매고 전기로 돌리는 송풍기 대신 손풀무로 바람을 넣어가며 숯불을 피워 철을 제련해 내기 시작했다. 바깥에서는 땡볕이 쏟아져 내리는데 불 가까이서 손풀무질을 하는 그의 얼굴은 쉼없이 솟아나는 땀방울로 비 맞은 사람처럼 번질거린다.
◇(왼쪽)강철을 만들기 위해 철괴를 접어 두드리고 있다.
◇(오른쪽)가마에서 1차로 녹여낸 철을 바구니에 담아 옮기는 중이다.
충남 당진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씨는 어린시절 외양간에서 쇠죽을 끓이고 남은 숯으로 쇠못을 달궈 망치로 두들기며 놀았다. 만들고 그리는 데 소질이 있었던 이씨는 1984년 당시 ‘계간미술’에 실린 문화재전문위원 이종석의 글 ‘비법을 잃고 장구화한 장도’를 접한 뒤 전통제철 방식으로 검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이 칼날을 불빛에 비춰 보세요. 노을이 보이죠? 여기는 맑은 하늘이고 저기는 지평선입니다. 어떻게 연마하느냐에 따라 대추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문양들이 보입니다. 지금은 일본의 명장들이 이 분야에선 독보적이지요. 우리가 백제시대에 일본에 전수했던 이런 기막힌 칼을 만드는 능력을 이제는 우리가 되찾을 수 있습니다. 차갑고 빛나기만 하는 건 현대강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명검은 습한 듯 부드럽고 강한 느낌을 줍니다. 그 검의 날에 어룽대는 무늬는 바로 우리 선조의 기상이요 혼백입니다.”
막상 해보니 하면 할수록 어렵고 까다로웠다. 타 분야는 분업화돼 있지만 화각 일은 쇠뿔을 삶고 펴고 자르는 일은 물론 돌가루로 안료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소목 짜는 일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배워서 혼자 다 해야 했다. 더욱이 그에게 성한 손가락이라고는 오른손 엄지와 소지 두 개뿐이었다. 한 살 때 화로를 잘못 짚어 왼손은 손가락 다섯 개 전부를, 오른손은 검지와 약지 중지가 뭉툭하게 잘려나갔다.
“이 길을 걸어온 데는 어머니의 힘이 컸지요. 10여년 동안 선생 집에 보내 수발을 들게 하면서 집에 다니러오면 하룻밤도 재우지 않고 다시 가라고 엄하게 대하셨습니다.”
5남매 중 막내였던 그의 장애가 안타까워 눈물로 살았던 어머니는 자식의 성공을 보지 못한 채 1974년 세상을 떠났다. 동아공예대전 준비를 하던 그는 어머니가 작고하는 바람에 미완성인 채로 출품을 했고, 어머니 상을 치르고 난 뒤 입상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제 어머니의 바람대로 매년 해외 전시만 두 차례 이상 치러내는, 대한민국이 인증하는 화각공예의 마지막 계승자로 살고 있다.
화각장 이재만은 말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작품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정부가 제대로 지원해 주면 좋겠다”고 거듭 말했다.
“이 길을 걸어온 데는 어머니의 힘이 컸지요. 10여년 동안 선생 집에 보내 수발을 들게 하면서 집에 다니러오면 하룻밤도 재우지 않고 다시 가라고 엄하게 대하셨습니다.”
5남매 중 막내였던 그의 장애가 안타까워 눈물로 살았던 어머니는 자식의 성공을 보지 못한 채 1974년 세상을 떠났다. 동아공예대전 준비를 하던 그는 어머니가 작고하는 바람에 미완성인 채로 출품을 했고, 어머니 상을 치르고 난 뒤 입상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제 어머니의 바람대로 매년 해외 전시만 두 차례 이상 치러내는, 대한민국이 인증하는 화각공예의 마지막 계승자로 살고 있다.
화각장 이재만은 말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작품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정부가 제대로 지원해 주면 좋겠다”고 거듭 말했다.
무형문화재 소목장 심용식 씨
과학과 예술의 합작… ‘한옥의 얼굴’ 窓戶를 만들다
“집이 사람이라면 창호는 얼굴입니다.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얼굴이고 가장 변화무쌍한 것이 얼굴이지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대목이 건축의 구조 부분을 담당한다면 소목은 수장과 장식 부분을 담당한다. 소목 분야는 공포를 만드는 장인, 나간과 닫집, 장엄장식 등을 만드는 분야들로 다양하게 분화돼 있다. 하지만 지금 다른 소목 분야는 그 기능이 거의 단절되거나 사라지고 가구장과 창호장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소목장 심용식(58)씨는 소목 일 중에서도 전통 창호(窓戶) 제작에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창호란 말 그대로 통풍과 채광이 목적인 창(窓)과 방들을 연결하는 호(戶)를 일컫는다. 경주 불국사, 순천 송광사, 청도 운문사 등 전국 큰 법당의 창호들은 모두 심씨의 손을 거쳤다. 런던의 대영박물관 내에 지어진 한옥 ‘사랑방’의 창호도 그의 작품이고, 프랑스 고암미술관 창호도 그의 손을 거쳤다. 특히 ‘꽃살문 창호 제작의 귀재’로 통하는 그는 눈곱재기창, 머름창, 팔각창, 불발기문, 소슬모란무늬문, 격자문 등 수백 가지 창호를 다 만들어 봤다.
추운 겨울 방 안 공기의 손실을 최대한 막으면서 안과 밖을 연결해 주는 ‘눈곱재기창’이나, 필요에 따라 부위별로 다른 두께의 창호지를 발라 채광을 조절하는 ‘불발기문’처럼 오래전부터 내려온 우리네 다양한 창호들은 과학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아름다운 전통문화의 상징으로 각광받고 있다.
“제가 목수의 길을 선택한 데에는 거창한 명분이 없습니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수덕사에 드나들며 전통문살과 단청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곤 했지요. 40여년 동안 묵묵히 나뭇결을 쓰다듬고 있으려니, 어느 날 사람들이 저를 장인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7세 되던 해부터 10여년 동안 지역의 큰 목수였던 조찬형(인간문화재 소목장) 선생에게서 전통창호 제작법을 전수받았다. 톱밥가루 속에 파묻힌 끝에 수덕사에 첫 작품을 걸었고, 이후 이광규 최영한 신영훈 선생을 만나 목재 고르는 법, 연장 다루는 법 등 문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과 실습뿐 아니라 장인의 자세와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안목을 배우며 내공을 쌓았다.
“좋은 나무를 찾느라 발걸음 내딛지 않은 곳이 없고 오랜 세월 나무를 만지면서 축적한 감각을 손이 기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계보다는 수작업을 고집해왔습니다. 문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집 크기, 바람세, 빛의 양뿐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성향까지 고려해야 하는 섬세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는 수백 가지 전통창호의 명맥을 잇는 것은 물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창호를 창작해왔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2006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소목장(창호제작)으로 선정되고, 2008년에는 ‘서울전통예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소목장 40여년 동안 쌓아온 전통창호에 대한 모든 것을 한자리에 집약시켜 보여주는 ‘청원산방’을 북촌 한옥마을(종로구 계동)에 열고 일반인들에게 창호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소목장 심용식의 야심작들은 상설전시공간인 청원산방 외에도 남산한옥마을 전통공예관에서 열리는 ‘小木-나뭇결에 깃든 멋’ 전(21일까지)에서도 둘러볼 수 있다.
◇40여년 동안 나무와 씨름해온 소목장 심용식씨가 자신의 호를 딴 맑고 둥근 ‘청원산방’(淸圓山房)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
◇꽃완자문 너머로 바라보는 청원산방 마당. |
◇(왼쪽)소목장 심용식씨는 “나무의 꿈을 이루어주는 사람”을 꿈꾼다. ◇(오른쪽)동산 위에 달이 뜬 모양의 청원산방 달아자살문. |
“제가 목수의 길을 선택한 데에는 거창한 명분이 없습니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수덕사에 드나들며 전통문살과 단청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곤 했지요. 40여년 동안 묵묵히 나뭇결을 쓰다듬고 있으려니, 어느 날 사람들이 저를 장인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산가지를 놓은 모양으로 문살을 짜 만든 숫대살문. |
“좋은 나무를 찾느라 발걸음 내딛지 않은 곳이 없고 오랜 세월 나무를 만지면서 축적한 감각을 손이 기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계보다는 수작업을 고집해왔습니다. 문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집 크기, 바람세, 빛의 양뿐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성향까지 고려해야 하는 섬세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왼쪽)꽃완자문. 청원산방에는 소박한 세살문 안쪽에 화사한 꽃완자문을 두었다. ◇(오른쪽)눈곱재기창. 문이나 창에 달린 아주 작은 창을 일컫는 흥미로운 명칭으로, 때로는 벽에 따로 달기도 한다. |
‘향온주’ 무형문화재 박 현 숙 씨
“통상 한국인들은 술을 약주(藥酒)로 취급해왔습니다.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술은 본디 상약(上藥) 중에서도 상약이지요. 한두 잔 마시면 효능이 번개처럼 빠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마시면 크게 독하고, 크게 열(熱)하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하고 간이 붓는다고 경고합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임금에게나 올리던 귀한 술 ‘향온주’(香?酒)를 빚는 서울시무형문화재 제9호 기능보유자 박현숙(57)씨는 “우리네 술은 전통적으로 ‘약’(藥)의 개념으로 빚어졌다”고 말한다.
일찍이 친정어머니 어깨 너머로 술 빚는 법을 배웠던 박씨는 향온주 1대 기능보유자 정해중씨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향온주 빚는 법을 배우다가 정씨가 작고한 뒤 서울시무형문화재 9호 2대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향온주는 인현왕후의 기력을 보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고 박씨는 전한다.
“인현왕후가 궁에서 사가로 쫓겨나 냉방에서 엄청나게 고생하는 바람에 환궁을 해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아파 가마를 탈 기력이 없었답니다. 상궁들이 고민 끝에 내의원에서 향온주를 가지고 나와 세 수저를 입에 넣어주니 반짝 기력을 차려 그 기운으로 입궁할 수 있었다네요. 향온주는 알코올 도수가 40%라고 하지만 다른 술에 비해 굉장히 부드럽고, 술기운이 반짝 올랐다가 사라져 숙취로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일이 없습니다.”
향온주는 녹두를 섞어 만든 누룩으로 빚는다는 점이 다른 술 제조법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박씨는 같은 쌀 한 가마니로 다른 술을 10병 빚는다면, 향온주는 5병밖에 빚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녹두가 알코올 성분을 희석시켜 버리기 때문인데, 이런 저효율을 감수하며 녹두를 쓰는 이유는 옛날 시골에서 농약 중독자에게 제일 먼저 녹두를 갈아 먹이던 것처럼 녹두가 해독작용에 탁월한 데다, 술의 향기까지 좋게 하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부터 만날 술을 접할 수밖에 없었던 왕들의 건강을 위해 내의원의 특별한 감독 아래 향온주를 빚었다는 것이다. 향온주는 누룩과 밑술, 덧술, 그리고 발효과정을 거친 후 열을 가해 증류하여 최종 술을 얻는다. 누룩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향온주를 얻기까지 보통 6개월 정도 소요된다.
“지난 8월 영국 한국문화원에 가서 향온주 시음회를 했습니다. 유럽에서는 발암물질을 염려해 위스키 같은 유색 술보다도 백색주의 인기가 높은데, 연투명의 향온주를 맛본 영국인들이 서울까지 전화해서 부쳐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주세법 때문에 지하로 스며들었던 술 문화로 인해 기록들이 많이 사라져 안타까워요. 대체로 궁중 술이 모두 향온주로 알려져 있지만 종묘대제 때 사용하는 울창주 같은 다양한 궁중 술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제대로 집대성하는 게 큰 숙제지요.”
강릉 출신인 박현숙씨는 정작 본인은 술을 못 마신다. 한두 수저 넘길 수는 있지만 대부분 혀로 맛만 보고 맹물로 헹군 뒤 뱉어내는데 술을 만든 재료나 맛은 혀끝에 대기만 해도 민감하게 파악한다고 자부한다.
이즈음 외국 관광객들에게 막걸리가 뜬다는데, 우리네 궁중 술의 대표격인 향온주 같은 술이야말로 국가에서 전승 발전을 위해 정책적으로 지원한다면 국가적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박씨는 안타까워한다. 아직 향온주는 서울 북촌마을 시음회에서나 맛볼 수 있지만 빠르면 내년 설날 전후로 시판도 이루어질 전망이다.
◇서울무형문화재 9호 박현숙씨가 향온주 재료를 모아놓고 북촌마을에서 술 빚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
일찍이 친정어머니 어깨 너머로 술 빚는 법을 배웠던 박씨는 향온주 1대 기능보유자 정해중씨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향온주 빚는 법을 배우다가 정씨가 작고한 뒤 서울시무형문화재 9호 2대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향온주는 인현왕후의 기력을 보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고 박씨는 전한다.
“인현왕후가 궁에서 사가로 쫓겨나 냉방에서 엄청나게 고생하는 바람에 환궁을 해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아파 가마를 탈 기력이 없었답니다. 상궁들이 고민 끝에 내의원에서 향온주를 가지고 나와 세 수저를 입에 넣어주니 반짝 기력을 차려 그 기운으로 입궁할 수 있었다네요. 향온주는 알코올 도수가 40%라고 하지만 다른 술에 비해 굉장히 부드럽고, 술기운이 반짝 올랐다가 사라져 숙취로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일이 없습니다.”
향온주는 녹두를 섞어 만든 누룩으로 빚는다는 점이 다른 술 제조법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박씨는 같은 쌀 한 가마니로 다른 술을 10병 빚는다면, 향온주는 5병밖에 빚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녹두가 알코올 성분을 희석시켜 버리기 때문인데, 이런 저효율을 감수하며 녹두를 쓰는 이유는 옛날 시골에서 농약 중독자에게 제일 먼저 녹두를 갈아 먹이던 것처럼 녹두가 해독작용에 탁월한 데다, 술의 향기까지 좋게 하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부터 만날 술을 접할 수밖에 없었던 왕들의 건강을 위해 내의원의 특별한 감독 아래 향온주를 빚었다는 것이다. 향온주는 누룩과 밑술, 덧술, 그리고 발효과정을 거친 후 열을 가해 증류하여 최종 술을 얻는다. 누룩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향온주를 얻기까지 보통 6개월 정도 소요된다.
“지난 8월 영국 한국문화원에 가서 향온주 시음회를 했습니다. 유럽에서는 발암물질을 염려해 위스키 같은 유색 술보다도 백색주의 인기가 높은데, 연투명의 향온주를 맛본 영국인들이 서울까지 전화해서 부쳐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주세법 때문에 지하로 스며들었던 술 문화로 인해 기록들이 많이 사라져 안타까워요. 대체로 궁중 술이 모두 향온주로 알려져 있지만 종묘대제 때 사용하는 울창주 같은 다양한 궁중 술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제대로 집대성하는 게 큰 숙제지요.”
강릉 출신인 박현숙씨는 정작 본인은 술을 못 마신다. 한두 수저 넘길 수는 있지만 대부분 혀로 맛만 보고 맹물로 헹군 뒤 뱉어내는데 술을 만든 재료나 맛은 혀끝에 대기만 해도 민감하게 파악한다고 자부한다.
이즈음 외국 관광객들에게 막걸리가 뜬다는데, 우리네 궁중 술의 대표격인 향온주 같은 술이야말로 국가에서 전승 발전을 위해 정책적으로 지원한다면 국가적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박씨는 안타까워한다. 아직 향온주는 서울 북촌마을 시음회에서나 맛볼 수 있지만 빠르면 내년 설날 전후로 시판도 이루어질 전망이다.
■향온주 담그는 순서
무형문화재 악기장 김복곤씨
① 향온주 누룩 만들기. 보통 누룩은 밀을 분쇄해서 만들지만 향온누룩은 밀과 녹두, 보리를 넣어 만든다. 녹두는 해독 역할을, 보리는 간 기능 보강 역할을 한다. |
② 백설기와 누룩을 물과 함께 버무려 밑술을 만든다. |
③ 밥과 누룩을 버무린 후 밑술에 첨가하면 덧술이 된다. 덧술은 열두 번까지 더할 수 있다. |
④ 왼쪽은 밑술, 오른쪽은 덧술. 덧술은 100일간 숙성시키면 청주처럼 맑아진다. |
⑤ 마지막 증류 과정을 거치고 있는 향온주. 향온주는 다른 술에 비해 부드럽고 반짝 취했다가 금방 깨어나 숙취가 없다. |
⑥ 숙성시킨 덧술을 증류하면 맑은 향온주가 된다. |
오묘한 가얏고 소리 12현에 혼을 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붙잡은 일이었습니다. 열다섯 살 나이에 시골에서 함께 상경한 친구들이 먹고살기 위해 중국집이나 양복점으로 흩어지던 시절이었지요. 좋아서 재미있게 배웠더라면 손에 흉터도 많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마지못해 반신반의하면서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까지 나온 뒤에서야 내가 하는 일이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지키는 얼마나 값진 일인지 깨닫게 된 거지요.”
1969년 전북 임실에서 초등학교만 마치고 무작정 상경한 이래 40년째 가야금 만들기에 매달려온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8호 악기장 김복곤(54)씨. 도대체 가야금의 어떤 매력이 이렇게 외길을 달려오게 했는지 묻자, 그는 묻는 사람이 당황할 정도로 솔직하게 답변한다.
상경 후 김광주의 문하에 들어가 현악기 제작 기능을 전수받기 시작한 뒤 김광칠 김광주 최태진의 뒤를 이어 2002년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그는 국수무늬 기법을 새롭게 복원하여 가야금 울림통의 성능을 개선한 악기장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오동나무 공명반에 명주실로 꼬아서 만든 12줄을 세로로 매어 줄마다 안족(雁足)을 받쳐놓고 손가락으로 뜯어서 소리를 내는 가야금은 정악을 연주하는 정악가야금과 이를 축소한 산조가야금으로 구분된다. 흔히 사용하는 보통 가야금은 요즘 한 달 정도면 만들어내지만 제대로 하자면 오래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다. 울림통만 해도 눈과 비를 맞혀가며 10년 정도 말린 오동나무를 쓰면 좋고, 30년 50년 말린 오동나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김씨는 우리도 가까운 일본처럼 능력 있는 사업가가 나무 보관업을 해서 1년짜리부터 5년, 10년, 20년, 50년까지 말린 나무들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진다면 좋겠다고 특별히 소망했다. 서양의 바이올린이나 첼로 명기들은 50년 이상 건조된 나무들을 쓴다고 했다. 그는 오동나무 중에서도 나이테를 일자로 가지런히 하여 만든 악기가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는 결론에 이르러 최고의 명기라는 국수무늬 울림통을 재현할 수 있었다.
“500년 전에 나온 ‘악학궤범’을 보면 오동나무도 밑동에서부터 7·8자 윗부분이 더욱 좋다 했는데, 사람도 나이가 들면 허리가 굽듯 나무도 자라면서 가지 영향을 받아 허리가 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이테가 굽지 않고 뻗은 게 맑은 소리를 낸다는 심증으로 서울대 음향연구소 등에 의뢰해 연구한 결과 나무 무늬가 국수무늬처럼 일자로 뻗은 게 맑은 소리를 내더군요. 뭘 모르는 사람들이 나이테에 옹이가 생겨 만들어지는 용무늬가 좋다는 말을 하는데, 옹이란 나무가 늙어서 물을 빨아들이는 관을 막아 죽게 만드는 흔적일 뿐입니다.”
음악을 잘 아는 이가 우연히 길 가다 초가에서 잠을 잤는데 새벽녘에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 따라가보았더니 초동이 아궁이에서 오동나무를 때는 소리였다. 그래서 오동나무 겉 표면을 인두로 지져 시커멓게 태운 뒤 솔질을 하여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옛 이야기를 전하는 김복곤씨.
그는 ‘악학궤범’에 그림과 규격까지 상세히 나와 있는 80여종의 옛 악기들 중 20여종만 남아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악학궤범의 모든 악기를 복원해서 박물관에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수요가 충분치 않아 악기를 만드는 것보다 파는 걱정을 하는 데 시간을 더 빼앗기는 처지이고 보면,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쉽지 않은 염원인 것 같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우연히 악기 제작에 뛰어들었다가 40년 외길을 달려왔다는 악기장 김복곤씨. 그는 “500년 전에 쓰였던 악기들이 60여종이나 사라졌다”며 “지금도 도면이 상세히 남아 있는 그 악기들을 모두 복원해 박물관에 보존하고 싶다”고 말했다. |
상경 후 김광주의 문하에 들어가 현악기 제작 기능을 전수받기 시작한 뒤 김광칠 김광주 최태진의 뒤를 이어 2002년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그는 국수무늬 기법을 새롭게 복원하여 가야금 울림통의 성능을 개선한 악기장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오동나무 공명반에 명주실로 꼬아서 만든 12줄을 세로로 매어 줄마다 안족(雁足)을 받쳐놓고 손가락으로 뜯어서 소리를 내는 가야금은 정악을 연주하는 정악가야금과 이를 축소한 산조가야금으로 구분된다. 흔히 사용하는 보통 가야금은 요즘 한 달 정도면 만들어내지만 제대로 하자면 오래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다. 울림통만 해도 눈과 비를 맞혀가며 10년 정도 말린 오동나무를 쓰면 좋고, 30년 50년 말린 오동나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김씨는 우리도 가까운 일본처럼 능력 있는 사업가가 나무 보관업을 해서 1년짜리부터 5년, 10년, 20년, 50년까지 말린 나무들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진다면 좋겠다고 특별히 소망했다. 서양의 바이올린이나 첼로 명기들은 50년 이상 건조된 나무들을 쓴다고 했다. 그는 오동나무 중에서도 나이테를 일자로 가지런히 하여 만든 악기가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는 결론에 이르러 최고의 명기라는 국수무늬 울림통을 재현할 수 있었다.
“500년 전에 나온 ‘악학궤범’을 보면 오동나무도 밑동에서부터 7·8자 윗부분이 더욱 좋다 했는데, 사람도 나이가 들면 허리가 굽듯 나무도 자라면서 가지 영향을 받아 허리가 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이테가 굽지 않고 뻗은 게 맑은 소리를 낸다는 심증으로 서울대 음향연구소 등에 의뢰해 연구한 결과 나무 무늬가 국수무늬처럼 일자로 뻗은 게 맑은 소리를 내더군요. 뭘 모르는 사람들이 나이테에 옹이가 생겨 만들어지는 용무늬가 좋다는 말을 하는데, 옹이란 나무가 늙어서 물을 빨아들이는 관을 막아 죽게 만드는 흔적일 뿐입니다.”
음악을 잘 아는 이가 우연히 길 가다 초가에서 잠을 잤는데 새벽녘에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 따라가보았더니 초동이 아궁이에서 오동나무를 때는 소리였다. 그래서 오동나무 겉 표면을 인두로 지져 시커멓게 태운 뒤 솔질을 하여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옛 이야기를 전하는 김복곤씨.
그는 ‘악학궤범’에 그림과 규격까지 상세히 나와 있는 80여종의 옛 악기들 중 20여종만 남아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악학궤범의 모든 악기를 복원해서 박물관에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수요가 충분치 않아 악기를 만드는 것보다 파는 걱정을 하는 데 시간을 더 빼앗기는 처지이고 보면,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쉽지 않은 염원인 것 같다.
■가야금 만드는 순서
① 울림통 표면을 사포로 닦아내고 있다. |
② 12줄 명주실을 고이는 안족(雁足:기러기발)을 탄다. |
③ 김복곤 악기장이 옥 장식으로 자신의 표식을 넣고 있다. |
④ 가야금줄을 거는 데 활용할 ‘부들’을 ‘봉미’의 구멍에 넣는 작업. |
⑤ 부들에 가야금 줄을 맨다. |
⑥ 가야금 틀에 줄을 고정시키고 있다. |
⑦ 돌궤에 줄을 넣는다. |
⑧ 완성된 안족을 줄 밑에 괴고 있다. |
⑨ 완성된 가야금의 줄들을 최종 점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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