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선의 비주류 인생_03

醉月 2009. 9. 10. 08:24

늙은 나무꾼의 노래

▣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경제나 인권, 문화를 비롯해 모든 것이 양반 사대부 중심으로 짜인 나라 조선에서 천민들도 문학을 하겠다고 나섰다.

양반이 독점하는 한시라는 고상한 문학을 넘보는 천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불손하면서도 재주 있는 천민을 대표하는 존재가 바로 홍세태(洪世泰)였다.

시를 잘해 노비를 벗어나 벼슬까지 지낸 전설적인 시인이다.

그의 뒤를 이어 정조 무렵에는 이단전(李丹佃)과 정초부(鄭樵夫)가 등장해 일세를 풍미했다.

그 가운데 이단전의 드라마틱한 삶은 필자가 이미 <조선의 프로페셔널>에서 자세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정초부는 어떠한 삶을 영위했고, 그의 문학은 어떠했을까?

 

 

주인이 책 읽는 소리를 외우다

정조 시대를 풍미했던 정초부란 시인은 경기 양평(당시엔 양근) 사람이었다. 성이 정(鄭)씨이고 나무를 해서 한양 시장에다 파는 직업을 가져서 정초부라고 불렸다. 초부는 나무꾼을 뜻하는 한자말이니 정초부는 ‘정씨 나무꾼’이다. 그의 성은 정(丁)씨로도 알려졌다. 천민이니 정(鄭)씨면 어떻고 정(丁)씨면 어떻겠는가? 그는 사람들이 성명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초부로 불리면 그만이라는 투였다. 이름은 봉(鳳)이었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유식하고 무식하고를 가릴 것 없이 그가 시인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한 시대의 명사였다고 한다.

 

그는 생김새가 몹시 고괴(古怪)했다. 그런데 김윤명(金胤明)이란 사람은 “예스런 선비의 멋진 용모를 가졌고 수염이 아름답고 흉금이 툭 터져 구김살이 없다”는 전혀 상반된 인상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다지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조수삼은 <추재기이>에서 정초부를 스물두 번째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는데, 정초부는 본래 천민으로 명문가인 여씨 집안의 가노(家奴)였다. 주인이 누구인지는 기록하는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다. 정승을 지낸 여성제(呂聖齊)의 가노라고 밝힌 데도 있고, 참판을 지낸 여춘영(呂春永)의 종이라고 한 데도 있다. 또 승지 여만영(呂萬永)의 가노라고도, 여춘영의 아들인 여동식(呂東植)의 종이라고도 했다. 기록한 시기에 따라 집안의 대표자가 달라진 것일 뿐,

명문가 여씨 집의 종 신분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나무나 하던 종이 어째서 시인이 되었을까? 정초부는 어렸을 때 날마다 낮에는 나뭇짐을 해오고 밤에는 주인을 모시고 잤는데, 곁에서 주인이 독서하는 소리를 듣고 바로 외워버렸다. 그런 그를 주인이 기특하게 여겨 자제들과 함께 글을 읽도록 했다. 그는 학업 성취가 빨랐다. 특히 과거시험에 필요한 과시(科詩)를 잘 지어 주인집 자제들이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것은 <삼명시화>에는 나오는 사연이다. 시인으로 명성이 높아서 그에 얽힌 사연을 기록한 시화와 야사가 이처럼 제법 많다. 그에 관한 소문이 당시에는 상당히 떠돌았다. 황윤석도 변재민(邊載岷)이란 아이로부터 비슷한 소문을 듣고서 기록에 남겼다. 양근 땅 나무꾼이 본래는 종인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그 주인을 위해 과거 시험장에 두 번이나 들어가 대신 글을 써줘서 급제를 시켰으며, 그 대가로 주인이 양인(良人)으로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이 따위 기록을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사실은 정초부가 그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주인집에서는 그를 더 이상 종으로 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양식 있는 여씨 집안에서 시 잘 짓는 나무꾼으로 경기 일대에 명성이 자자한 사람을 종으로 부리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던 이단전도 시로 이름이 나자 주인이 자유롭게 살도록 양인으로 해준 사례가 있지 않은가?

 

김홍도의 <도강도>에 적힌 절창

정초부가 종에서 양인으로 신분이 변동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는 양인이 된 이후로도 전처럼 나무를 해서 배와 지게를 이용해 서울 동대문으로 들여와 팔았다.

어떤 기록에는 그가 남에게 고용되어 나무를 해다 팔았다고도 했다.

정조 당시에는 한강의 뚝섬에서 동대문 주변까지 땔감을 실어오는 이가 많아 큰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한강의 수운을 이용해 경기 일대에서 땔감을 한양으로 공급했다. 정초부도 많은 나무꾼 중 하나였다.

그에게는 나무꾼 생활에서 지어진 시가 있다.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翰墨餘生老採樵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 쓸쓸하여라. 滿肩秋色動蕭蕭

동풍이 장안 대로로 이 몸을 떠다밀어 東風吹送長安路
새벽녘에 걸어가네 동대문 제이교(第二橋)를. 曉踏靑門第二橋

새벽에 지게를 지고 나무 팔러 동대문으로 들어오는 나무꾼의 고단한 삶이 서정적으로 그려진 시다.

쓸쓸하고 맑고 고고한 정취가 소품의 그림처럼 담겨진 시다. 격조가 높은 시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나무꾼의 생활은 다음 시에서 더 멋지게 묘사되었다.

 

동호(東湖)의 봄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러 東湖春水碧於藍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비! 白鳥分明見兩三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柔櫓一聲飛去盡
노을진 산빛만이 강물 밑에 가득하다. 夕陽山色滿空潭

동호는 지금 서울 옥수동 주변의 한강이다. 나무를 해서 한 배 가득 싣고 오가다 봄직한 풍경이다.

번역으로는 시의 맛이 다소 떨어지는데 이 시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명작이다.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서정시의 하나로 꼽을 만큼 유명한 시이고, 정초부라는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이 시가 당시 사람들의 미감에 적중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 김홍도가 그린 <도강도>(渡江圖)란 그림이 있다.

넓은 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린 산수화다. 한강 어디쯤을 묘사한 듯한 이 그림에 붙어 있는 화제(畵題)가 다름 아닌 위 시다.

물론 그림에는 시의 작자를 정초부로 밝혀놓지 않아서 김홍도의 시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당연히 정초부의 작품이다.

 

사대부들이 다투어 만나다

두 수의 시만 봐도 시를 짓는 솜씨가 녹록지 않다. 그는 지식을 뽐내는 시를 짓는 대신 정감이 넘치는 시를 지었다. 공부가 깊지 않기 때문에 지식을 뽐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평이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자연스럽고도 생생하다. 신분이 종이라고 해서 독설과 비판이 담겨 있다고 예상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그런 신분과 처지를 속으로 참고 견디는 자세가 나타난다.

그의 명성을 세상에 알린 또 다른 시가 바로 그런 삶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그가 언젠가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관아에 가서 쌀을 꾸려고 했다. 그러나 관아의 호적대장에 그의 이름이 없었다. 종이라서 누락된 것일까? 쌀을 꾸지 못하고 서글피 주변에 있는 다락에 올라가 시를 읊었다.

 

산새는 옛날부터 산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마는 山禽舊識山人面
관아의 호적에는 아예 들 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 郡藉今無野老名
큰 창고에 쌓인 쌀을 한 톨도 나눠 갖기 어려워라 一粒難分太倉粟
강가 다락에 홀로 올라 보니 저녁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네. 江樓獨倚暮烟生

군수가 듣고서 설마 저런 천한 자가 시를 지었으랴, 하고 불러다가 다른 제목을 주어 지어보라 했다. 정초부가 바로 시를 지어내자 군수가 깜짝 놀라 크게 칭찬하고 쌀을 하사한 뒤 그 사실을 널리 알렸다. 그로부터 정초부의 이름이 세상에 두루 퍼졌고, 사대부들이 다투어 정초부와 시를 주고받고 싶어했다고 한다. 울분을 드러내기보다는 인내하고 삭이는 자세가 보이는 시인데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끌어당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정초부는 양근의 명사 반열에 끼이게 되었다. 그가 주로 머문 월계협(月溪峽)은 현재의 팔당대교 부근 협곡이다. 교통의 요지였던 이곳을 지나는 사대부들은 정초부를 떠올리고 그를 만나보고 싶어했다. <병세집>(幷世集)에서는 그를 아예 월계초부(月溪樵夫)라고 불렀다. 또 다른 기록에는 수청탄(水靑灘)에 사는 나무꾼이라 하여 수청초부(水靑樵夫)로 부르기도 했다. 수청(水靑)이라면 우리말 물푸레의 한역일 것이다. 물푸레여울은 팔당대교 부근에 있었다. 어쨌든 그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이 지역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신광수라면 당대의 명사로서 유명한 시인인데 그가 여주를 가기 위해 월계를 지날 때 “여기에는 노비 정봉이란 사람이 시를 잘한다”며 만나려 했다. 나무하러 떠나서 만나지 못하자 몹시 아쉬워하며 “아침에는 나무 팔아 배 위에서 쌀을 얻고, 가을에는 나무에 기대 산 속의 종소리를 읊네”라는 시를 써서 나중에라도 꼭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그처럼 정초부는 많은 사대부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대상이 되었다. 지금의 서울 동숭동에 있는 이유수(李惟秀)의 정원에서 윤급과 남유용, 유언호 등이 포함된 13명의 정승·판서들이 시회를 열었을 때도 초빙되어 시를 주고받았다. 이 성대한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어떤 화가가 <동원아집도>(東園雅集圖)란 그림까지 그렸다.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이 이 그림에 기문을 써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와 표정을 묘사했다. 그 가운데 패랭이를 쓰고 도롱이를 입고 구부정하게 대청 아래에 서서 시를 바치는 사람이 바로 수청초부 정일(鄭逸)이라고 밝혔다. 아마도 너무도 현격한 신분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런 자세로 그렸으리라. 그림이 현존하지 않아 생생한 장면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가 한양 명사들의 모임에까지 초빙될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정계의 실력자인 김종수(金鍾秀)는 그와 주고받은 시집을 <백우초창시권>(伯愚樵唱詩卷)으로 만들기도 했다. 노비였던 자가 그만큼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성장했다.

 

그만의 시집 전해지지 못해

그가 남긴 작품은 많은 시선집에 실려 전한다. <병세집>에도 18세기 최고의 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11수가 실려 전한다. 그는 그만의 시집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집은 널리 퍼지지 않았고, 더욱이 간행되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집을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남종현(南鍾鉉)이란 순조 연간의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시를 외우고 있었기에 그의 시집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다 겨우 80여 수의 시가 수록된 <초부시권>(樵夫詩卷)을 얻어 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명성보다는 작품이 좋지 않아 실망스러웠다고 했다. 조수삼 역시 앞에 보여준 두 편의 시를 인용하면서 “이런 수준의 작품이 많지마는 안타깝게도 그 전집이 전해오지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그의 시가 최고 수준이 아니라 해도 좋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못한 노비 신분으로서 그만한 성취도 대단하다. 조수삼은 “동호의 봄 물결은 지금도 푸르건만/ 그 누가 기억하랴? 시인 정초부를”이라며 전설로 남은 그의 명성을 회고했다. 또 정약용의 아들이자 저명한 시인인 정학연과 함께 지은 시에서는 “오백년 문명이 영조 정조 때에 꽃피웠으니/ 나무꾼과 농사짓는 여인네까지 시를 잘 짓네”라고 했다.

그 주에서 나무꾼은 바로 정초부이고, 여인네는 여주에 사는 김씨 아낙임을 밝혔다.

그처럼 정초부는 영·정조 시대 융성한 문화의 한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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