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을 물리치는 주술사들
출처 : http://jungmin.hanyang.ac.kr/
지난 호 두두리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주술로 귀신을 물리치는 승려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겠다. 시기는 역시 진평왕대에서 출발한다.
『삼국유사』 권 4, 「의해(義解)」 첫머리의 원광(圓光) 법사와, 권 5 「신주(神呪)」의 밀본(密本), 혜통(惠通), 명랑(明朗) 법사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토착신앙 체계 속에 속한 귀신 집단과 진언(眞言) 주술을 익혀 이들을 퇴치하는 승려들의 대결은 흥미롭다.
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났던 걸까? 이들이 부렸다는 신주(神呪)는 어떤 것이었나?
삼기산의 여우 귀신
먼저 살펴 볼 「원광서학(圓光西學)」조의 전승은 갈래가 복잡하다. 일연은 당나라 『속고승전(續高僧傳)』 기사와 동경 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효(貞孝)의 집에 전하던 고본(古本) 『수이전(殊異傳)』, 그리고 『삼국사기』 열전 「귀산(貴山)」조의 기록을 나란히 실었다. 각각의 전승은 성씨마저 박씨와 설씨로 서로 당착이 있고, 관련 내용도 착오가 적지 않다. 이 가운데 고본 『수이전』의 기사가 유독 눈길을 끈다. 단락별로 끊어 읽어 음미해 본다.
법사는 속성이 설씨(薛氏)니 왕경(王京) 사람이다. 처음에 승려가 되어 불법을 배웠다. 나이 30세에 고요히 지내며 도를 닦으려는 생각으로 혼자 삼기산(三岐山)에 살았다. 4년 뒤에 한 비구가 와서 그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데에 따로 암자를 짓고, 2년을 살았다. 사람됨이 굳세고 사나웠고, 주술을 즐겨 닦았다. 법사가 밤중에 혼자 앉아 불경을 외우는데, 홀연 신(神)의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수행이 참으로 훌륭하다! 무릇 수행하는 자가 비록 많다 하나 법대로 하는 자는 아주 드물다. 이제 이웃에 있는 비구를 보니, 서둘러 주술을 닦았으나 얻은 것 없이 시끄러운 소리로 다른 이의 정념(靜念)만 괴롭힌다. 머무는 곳은 내 가는 길을 막아, 매번 오갈 적에 악한 마음이 일어나곤 한다. 법사는 날 위해 말을 고해 그로 하여금 옮겨가게끔 하라. 만약 오래 머문다면 내가 갑자기 죄업을 짓게 될까 걱정이다.”
원광이 승려가 되어 도를 닦을 결심으로 들어간 삼기산은 경주시 안강읍 서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그는 이곳에서 4년간 수행했다. 그때 다시 한 비구가 이웃에 이사 와서 2년간 주술(呪術)을 열심히 익혔다. 그러니까 원광의 삼기산 수행은 6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원광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의 목소리와 교통한다. 신은 법사의 송경(誦經) 수행과 이웃 승려의 주술(呪術) 수행을 견주며, 송경 수행이 바르고 주술 수행은 시끄러워 다른 이의 정념(靜念)을 깨뜨리기만 할 뿐 보람은 없으리라고 말했다. 특히 그의 주술은 신의 심기를 건드려 악심(惡心)을 불러일으키므로, 살인의 죄업(罪業)을 짓지 않도록 그에게 거처를 옮기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다. 귀신을 물리치는 주술이 신의 입장에서 가증스러웠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신은 원광법사의 송경에 대해서는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불경을 외우며 정념(靜念)을 기르는 수행이 바르고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이어지는 다음 단락이다.
다음 날 법사가 가서 고했다. “내가 어제 밤에 신의 말을 들었소. 비구는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소.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남은 재앙이 있을 것이오.” 비구가 대답했다.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에게 현혹되는가? 법사는 어찌 여우 귀신의 말을 근심하는가?” 그날 밤 신이 또 와서 말했다. “앞서 내가 고한 일을 비구가 어떻게 대답하던가?” 법사는 신이 성을 낼까 걱정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마침내 말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만약 세게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신이 말했다. “내가 이미 다 들었다. 법사가 어찌 더 말하겠는가. 다만 가만히 내가 하는 것을 보도록 하라.” 마침내 작별하고 떠나갔다. 밤중에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이튿날 살펴보니 산이 무너져서 비구가 있던 암자를 메워 버렸다.
원광과 이웃 비구와의 대화다. 원광의 전언에 대한 비구의 대답은 단호하고 결연하다. 비구는 신의 정체가 여우 귀신임을 이미 알고 있었고, 원광이 마귀에게 현혹되었다고 단언했다. 비구의 언표에 귀신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반면 원광은 여전히 일방적으로 신의 목소리에 압도되어 있다. 한번 더 말할 기회를 청했으나 신은 이를 묵살하고, 대번에 산을 무너뜨려 암자를 메워 비구를 죽여 버렸다. 신의 위력은 더없이 막강했고, 비구의 주술은 그 위력 앞에 맥도 못 추고 무너졌다.
신이 또 와서 말했다. “법사가 보니 어떻던가?” 법사가 대답했다. “보고는 몹시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신이 말했다. “내 나이가 3천 살에 가깝다. 신술(神術)이 가장 성대하니, 이것은 작은 일이다. 어찌 족히 놀라겠는가? 장래의 일은 모르는 것이 없고, 천하의 일은 통달치 않은 것이 없다. 이제 생각해보니, 법사가 다만 이곳에서 지낸다면 비록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행실은 있겠으나, 남을 이롭게 하는 보람은 없을 것이다. 현세에서 높은 이름을 날리지 못하고, 미래에 훌륭한 결과를 얻지도 못할 것이다. 어찌 중국에서 불법을 익혀 동해에서 무리의 미혹함을 인도하지 않는가?” 법사가 대답했다.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래의 소원입니다. 바다와 육지가 멀리 가로막힌 지라 능히 스스로 교통하지 못할 뿐입니다.” 신은 중국으로 가는 방법을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법사는 그 말대로 해서 중국으로 가서, 11년간 머물면서 삼장(三藏)에 널리 통하고, 아울러 유학도 배웠다. 진평왕 22년 경신(600)(『삼국사』에는 이듬해인 신유년에 왔다고 했다)에 법사가 장차 짐을 꾸려 동쪽으로 돌아오니, 중국에 조빙(朝聘) 온 사신을 따라 환국하였다.
세 번째 단락에서 신의 목소리는 긍지에 가득 차서, 아예 노골적으로 법사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나선다. 그의 나이는 3천살에 가깝고, 신술(神術)은 가공할 경지에 이르렀다. 모르는 일이 없고, 못하는 일이 없다. 그는 자신의 신통력으로 법사의 미래를 예언하고, 중국 유학을 적극 권한다. 신의 말 속에서 적어도 겉으로 원광을 위해주는 척 하면서 자신의 터전인 삼기산에서 불승의 무리를 몰아내려는 속셈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불법을 제대로 익혀 와서 미혹한 중생을 제도할 것을 적극 권한다. 자신의 말대로 미래의 일을 다 알 수 있었던 때문이다. 귀신은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으로 가는 길이 백제에 가로막혀 있던 상황에서 특별한 신분도 아니었던 원광에게 중국 가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원광은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589년부터 600년까지 11년간 중국에서 유학했다. 그는 중국 체류 중에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을 함께 익힌 후 귀국했다.
법사가 신에게 사례하려고 전에 머물던 삼기산의 절에 이르렀다. 밤중에 신이 또한 와서 그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바다와 육지의 길 사이에서 오고 감이 어떠하던가?” 대답하였다. “신의 크나큰 은혜를 입사와 평안하게 도착하였습니다.” 신(원광?)이 말했다. “저 또한 신에게 계율을 주겠습니다.[吾亦授戒於神]” 인하여 내생에도 계속 서로를 구제해주자는 약속을 맺었다. 또 청하여 말했다. “신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말했다. “법사가 만약 내 모습이 보고 싶거든 새벽에 동녘 하늘가를 바라보아라.” 법사가 다음날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꿰뚫고 하늘 가에 닿아 있었다. 그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했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는가?” 대답하였다. “보니 몹시 기이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세속에서는 비장산(臂長山)으로 불렀다. 신이 말했다. “비록 이러한 몸을 지녔어도 무상(無常)의 해(害)를 면치는 못할 터. 그런 까닭에 내가 얼마 못가 그 산마루에 몸을 버릴 것이니, 법사는 와서 길이 떠나는 넋을 전송해 주게나.” 약속한 날을 기다려 가서보니, 옻칠한 것처럼 검은 늙은 여우 한마리가 있었는데, 다만 쉴 새 없이 헐떡이다가 얼마 후 죽고 말았다.
원광이 귀국 후에 바로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삼기산의 옛 암자였다. 자신에게 중국 유학을 권하고 방법을 일러주어,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해준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는 목적에서였다. 원광은 신의 은혜로 자신이 무사하게 중국에 갔다가 배움을 이뤄 돌아올 수 있었음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감사를 표하는 원광의 인사에 대한 신의 대답 대목은 문맥이 엉켜있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 또한 신에게 계율을 준다.[吾亦授戒於神]”가 된다. 신이 신에게 계율을 준다는 것이 되니 당착이다. 여러 번역들은 원문의 ‘신(神)’자가 ‘사(師)’자의 오기로 보아, “나 또한 법사에게 계율을 주겠다”로 해석했다. 하지만 신이 불승에게 계율을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깨달음을 얻은 원광이 불교에 우호적인 신에게 계율을 준다고 보아야 문맥이 순조롭다. 그래야 그 다음 “인하여 생생(生生)에 서로를 건져주자는 약속을 맺었다”는 말과 매끄럽게 연결된다. 신은 신의 방식으로 이미 원광을 건져 주었고, 원광은 신에게 계율을 주어 신을 무상(無常)에서 건져 그 은혜에 보답한 셈이다. 이 부분의 원문은 원광의 대답 이후 신의 말이 한 단락 누락되고, 원광의 말이 신의 말로 잘못 연결된 것으로 보아야 순조롭다.
생생상제(生生相濟)의 맹약을 맺은 뒤, 원광은 대뜸 신에게 참 모습을 보여 줄 것을 청한다. 법사는 이튿날 새벽 동쪽 하늘에 치솟은 팔뚝으로 자신의 존재를 처음 드러낸다. 팔뚝은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의 전신은 바로 삼기산 그 자체였다고 말한 것이나 같다. 자신이 그 지역 전체를 지배해온 실질적인 지배자임을 드러낸 셈이다. 하지만 이미 원광의 계율을 받은 신은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일이 없던 자신의 권능을 거두고, 이처럼 강한 몸을 지녔음에도 무상(無常)의 해(害)를 면할 수 없음을 시인한 채 제 몸을 스스로 버린다. 신은 내세에도 원광이 자신을 건져 주리라는 약속을 믿은 것이다. 이제 신은 완전히 불법의 체계 속으로 들어와 순치되었다. 마지막에 드러난 신의 실체는 가쁜 숨을 내쉬는 옻칠처럼 검은 늙은 여우 한 마리였다. 원광의 법력은 3천년 동안 권위를 누려온 그 막강한 신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거두고 불법의 계율을 받아 윤회의 사슬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만들 정도였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오자, 신라의 임금과 신하가 공경하고 중히 여겨 스승으로 삼으니, 항상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강론하였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늘 변경을 침략하므로 왕이 이를 몹시 근심하여, 수나라(당나라라고 해야 옳다)에 군대를 청하려고, 법사에게 부탁하여 걸병표(乞兵表)를 짓게 했다. 황제가 보고 30만의 군사로 몸소 고구려를 쳤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학에도 두루 통했음을 알았다. 누린 해 84세로 입적하니,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지냈다.
마지막 단락은 원광을 군신이 모두 공경하여 스승으로 삼았고, 그가 대승경전을 강의 했다는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불법과 함께 익힌 유술(儒術)을 발휘해 중국에 보내는 걸병표(乞兵表)를 지어 국가적 문제 해결에도 앞장 섰다. 그가 84세로 묻혔다는 명활성 서쪽은 바로 안강면의 서남쪽 골짝이니, 다름 아닌 삼기산 금곡사(金谷寺)라고 일연은 뒷글에서 부연했다.
원광과 삼기산 여우 귀신과의 관계는 불교가 토착신앙을 포섭하여 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제 4, 「탑상」의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는 보천(寶川) 태자가 울진국(蔚珍國)의 탱천굴(撑天窟)에 머물며 밤낮으로 『수구다라니경(隨求陀羅尼經)』을 외우자, 굴신(窟神)이 나타나 “내가 굴의 신이 된 지가 이미 2천년입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수구다라니경』의 참된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보살계를 받기 청합니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보인다. 계를 받은 이튿날 굴은 형체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또「심지계조(心志繼祖)」조에도 진표율사의 간자(簡子)를 전수받은 심지가 중악(中岳)으로 돌아오자 그곳의 산신(山神)이 두 선자(仙子)를 데리고 나와 바위 위에 심지를 앉히고, 자신들은 바위 아래 엎드려 정계(正戒)를 받는 내용이 보인다. 이런 장면들은 원광이 여우 귀신에게 계를 주어 불법에 귀의케 하는 장면과 동일한 의미로 읽힌다. 불교는 점차 토착신앙을 포섭시키며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해 나갔던 것이다.
정리한다. 원광법사는 삼기산 여우 귀신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을 이루었다. 그는 돌아와 삼기산 여우 귀신에게 계율을 주어 그로 하여금 육신의 허물을 벗고 윤회의 고리를 잇게 해주었다. 초기 단계에서 귀신의 권능은 주술승을 압도할만큼 막강했다. 또 지난 호에 살핀 바, 두두리의 리더였던 길달(吉達)이 자신을 배반하고 여우로 변해 달아나자 비형랑은 두두리를 시켜 그를 잡아 죽인다. 이로 보면 토착 신앙의 신격을 여우의 화신으로 보는 인식이 당대 신라인에게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원광은 삼기산에 다시 묻혔다. 절 이름은 금곡사다. 이 절 이름을 잠깐 기억해 두자.
퇴마사(退魔師) 밀본의 주술
『삼국유사』 권 5, 「신주(神呪)」 편에는 신통한 주술로 귀신들을 물리치는 퇴마사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밀본(密本)과 혜통(惠通) 등 밀교 계통의 승려가 바로 그들이다. 먼저 읽을 것은 「밀본최사(密本摧邪)」, 즉 밀본이 삿된 귀신을 꺾는 이야기다.
선덕왕 덕만(德曼)이 병에 걸려 오래 끌었다. 흥륜사의 승려 법척(法惕)이 부름에 응해 병시중을 들었는데, 오래 되어도 효험이 없었다. 이때 밀본법사란 이가 덕행으로 나라에 소문이 났다. 좌우에서 그로 대신할 것을 청하므로, 왕이 맞아 궐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밀본이 거처 바깥에 있으면서 『약사경(藥師經)』을 읽었다. 한 차례 다 읽자 지니고 있던 고리가 여섯 개 달린 지팡이가 침실 안으로 들어가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을 찔러 뜰 아래로 거꾸러뜨렸다. 왕의 병이 그제야 나았다. 이때 밀본의 정수리 위로 오색의 신비한 광채가 뻗쳤다. 보던 자가 모두 놀랐다.
밀본(密本)은 이름 그대로 밀교(密敎)를 근본으로 하는 승려다. 『약사경』을 한 차례 외우자 그가 짚고 있던 육환장 지팡이가 왕의 침소 안으로 날아들어가 단숨에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을 찔러 죽였다. 늙은 여우는 여왕의 몸속에 들어가 육신을 병들게 한 귀신이고, 법척은 말 그대로 밀교의 교법을 두려워한[惕] 엉터리 승려다. 법척은 왕을 병들게 한 여우 귀신을 못 보았거나, 그와 한통속인 인물이었다. 그것이 밀본의 독경으로 단번에 퇴치된 것이다. 다시 이어지는 단락이다.
또 승상 김양도(金良圖)가 아이 적에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뻣뻣해져서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매번 보니 한 큰 귀신이 여러 작은 귀신을 이끌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무릇 소반에 먹을 것이 있으면 모두 씹어 맛을 보았다. 무당이 와서 제사지내면 무리로 모여 다투어 욕을 보였다. 양도가 비록 그만두게 하려 했으나 입을 열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법류사(法流寺)의 이름 모를 승려를 청해 와서 경을 읽게 했다.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 철퇴로 승려의 머리를 치게 하자, 땅에 거꾸러져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뒤에 사람을 보내 밀본을 청하였다. 심부름꾼이 돌아와 말했다. “밀본 법사께서 우리 청을 받아들여 곧 오시겠답니다.” 여러 귀신들이 이 말을 듣더니 모두 낯빛을 잃었다. 작은 귀신이 말했다. “법사가 오면 불리할 테니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큰 귀신이 업신여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무슨 해가 있겠느냐?” 잠시 후 사방에서 큰 힘센 신장이 모두 쇠갑옷에 긴 창을 들고 와서 여러 귀신들을 붙잡더니 묶어서 가버렸다. 그 다음에는 무수한 천신(天神)들이 빙 둘러서서 예를 갖추며 기다렸다. 잠시 후 밀본이 이르러 경전을 펼치기도 전에 그 병이 바로 나아, 말이 통하고 몸이 풀려 그 일을 자세히 말했다. 김양도는 이로 인해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일생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흥륜사 오당(吳堂)의 주불(主佛)인 미타존상과 좌우 보살을 조성했고, 아울러 건물을 금화(金畵)로 가득 채웠다. 밀본은 일찍이 금곡사에 머물렀다.
승상 김양도의 어릴 적 일화를 소개한 밀본법사의 두 번째 이적 장면이다. 질병이 귀신의 장난이라고 믿었던 신라인의 생각이 잘 나타난다. 청을 받아 불경을 외던 법류사의 승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에게 철퇴를 맞아 피를 토하고 죽었다. 앞서 법척이 여우를 어쩌지 못했던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귀신이 승려를 죽이는 힘을 발휘했다. 앞서 삼기산의 여우 귀신에게도 주술을 익히던 승려가 해를 당한 적이 있다.
하지만 밀본의 등장으로 상황은 말끔히 종료된다. 거들먹거리던 귀신들은 밀본이 나타나기도 전에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힘센 신장들에게 붙들려 갔고, 밀본은 천신들이 미리 와서 호위하고 있는 가운데 도착하였다. 귀신이 잡혀가고, 밀본이 도착하면서 김양도의 병은 말끔하게 나았다.
흥륜사는 신라 왕실의 원찰이었다. 밀본은 그곳의 명망 높던 승려 법척을 독경으로 죽여버렸다. 그런데 막상 밀본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은 김양도는 그 보답을 다른 절도 아닌 하필 흥륜사의 부처님과 보살을 빚어 안치함으로써 갚았다. 이 일 이후 흥륜사가 밀본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음을 시사한다.
끝에서 일연은 무심히 지나가는 말로, 그가 한동안 금곡사에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금곡사가 어딘가? 바로 앞서 원광이 여우 귀신과 만나 그의 도움을 받았고, 죽어 부도가 세워진 삼기산의 금곡사가 아닌가? 참으로 묘한 여운을 남기는 언술이다. 원광은 여우 귀신의 도움을 받아 불법을 이뤘다. 또 주술을 익히던 승려가 여우 귀신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이제 상황은 역전되어, 그곳 출신의 밀본이 여우 귀신을 죽이고 송경하던 승려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금곡사란 공간의 이 미묘한 겹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밀본이 원광의 법맥을 이었다는 암시로 보아야 할까? 여우 귀신과 원광이 세상을 뜬 후, 이 지역이 마침내 주술하는 승려들의 차지가 되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까? 여러 정황으로 보아 후자 쪽으로 읽힌다.
다시 이어지는 한 조목은 김유신이 가깝게 지내던 한 늙은 거사가 김유신의 친척 수천(秀天)의 질병을 낫우려고 갔다가 중악(中岳)에서 온 승려 인혜사(因惠師)와 신통력을 다퉈 압승을 거두는 얘기다. 대개 이런 이야기는 이 시기에 이르러 독경(讀經) 하는 일반 종단의 승려와 밀교승 사이에 갑자기 신통력을 둘러싼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어느 한쪽이 차츰 우위를 점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교룡이 혜통에게 항복한 이야기
이어지는 「혜통항룡(惠通降龍)」조는 밀교의 승려 혜통이 주술을 통해 드러낸 이적들을 소개한다. 처음 그는 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그 뼈를 동산에다 내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뼈가 간 곳이 없었다. 핏자국을 따라 가 보니 뼈는 옛 굴로 되돌아가 새끼 다섯 마리를 감싸 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죽어서도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의 놀라운 사랑에 충격을 받은 그는 그 길로 속세를 버려 출가했다. 이름도 수달 어미의 은혜를 보고 감통했다는 의미에서 혜통(惠通)이라 지었다.
이를 이어 그의 당나라 유학 당시의 일이 그려진다.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무외(無畏) 삼장(三藏)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무외 삼장은 오랑캐에게 불법을 가르쳐줄 수 없다며 가르침을 거부했다. 3년을 부지런히 섬겼어도 삼장은 빗장을 열지 않았다. 분통이 터진 혜통은 불화로를 머리 위에 얹어버렸다. 잠깐만에 우레 소리를 내며 정수리가 찢어졌다. 삼장이 이 소리를 듣고 나와 보고는 화로를 치우고 터진 상처를 만지며 신주(神呪)를 외워 상처를 낫게 했다. 정수리에 터졌다가 봉합된 상처가 임금 왕(王)자 모양으로 남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왕화상(王和尙)이라 불렀다. 삼장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비로소 그에게 신주(神呪)의 인결(印訣)을 전수해 주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간다.
이때 당나라 왕실의 공주가 병에 걸렸다. 고종이 삼장에게 구해줄 것을 청했다. 삼장은 혜통을 자기 대신 천거했다. 혜통이 명을 받고서 따로 거처하며, 흰 콩 한 말을 은그릇 가운데 담고서 주문을 외우니, 흰 갑옷 입은 신병(神兵)으로 변해 병마를 몰아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또 검은 콩 한 말을 금그릇에 담고 주문을 외우자, 검은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했다. 두 빛깔로 하여금 합쳐서 내쫓게 하자, 홀연 교룡이 달아나 버렸다. 병도 마침내 나았다.
삼장에게서 받은 신주의 인결은 주문으로 귀신을 퇴치하는 주술이다. 그 방법은 흰 콩과 검은 콩을 금은의 그릇에 담고서 주문을 외워 콩알을 갑옷 입은 신병(神兵)으로 변화시켜 귀신과 맞싸우게 하는 것이다. 공주의 몸에 들어간 교룡은 힘이 막강했던지, 흰 색 콩알이 변화한 신병 군단만으로는 퇴치할 수가 없었고, 검은 콩 군단이 가세한 뒤에야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혜통의 법력은 이때만 해도 단숨에 귀신을 제압할 정도는 못되었던 셈이다.
이어지는 단락의 내용이 흥미롭다.
용은 혜통이 자신을 쫓아낸 것을 원망하여 본국의 문잉림(文仍林)으로 와서 목숨을 해치는 것이 더욱 독랄하였다. 이때 정공(鄭恭)이 당나라에 사신 왔다가 혜통을 보고서 말했다. “스님이 쫓아낸 독룡이 본국으로 돌아와 해악이 심합니다. 속히 가서 이를 없애주십시오.” 이에 정공과 함께 인덕(麟德) 2년 을축년(665)에 환국하여 이를 쫓아냈다. 용은 또 정공을 원망하여, 버들에 의탁하여 정씨의 문 밖에서 살았다. 정공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다만 나무가 무성한 것을 감상하며 몹시 아꼈다. 신문왕이 세상을 뜨고 효소왕이 즉위함에 미쳐 산릉을 보수하고 장사 지내는 길을 닦았다. 정씨의 버드나무가 길을 막자, 담당한 관리가 이를 베려 하였다. 정공이 성을 내며 말했다. “내 머리를 벨 망정, 이 나무는 못 벤다.” 왕이 크게 노하여 법 집행을 맡은 관리에게 명하였다. “정공이 왕화상의 신술(神術)을 믿고, 장차 불손한 일을 꾸미려고 왕의 명령을 업신여겨 거역하였다. 내 머리를 베라 했다니 마땅히 원하는 데로 따라주어라.” 그리고는 그를 죽여버리고 그 집을 파묻었다.
혜통의 신주로 인해 쫓겨난 교룡의 복수전을 그린 대목이다. 교룡은 신라로 건너와 문잉림(文仍林)에 근거지를 정했다. 그리고는 작정하고 사람들의 목숨을 해쳤다. 문잉림은 어떤 곳인가? 문잉림은 『삼국유사』 권 4, 「탑상」 중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에 한번 더 나온다. 부처가 세상을 뜬 후 1백년 만에 태어난 인도의 아육왕이 불상을 주조하려다가 실패하고,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배에 실어 온 세계를 두루 다녔으나 모두 실패했다. 마지막에 황금과 철을 실은 배가 신라에 닿았고, 진흥왕이 마침내 이를 주조하여 불상을 완성했으니, 이것이 바로 황룡사의 장륙존상이다. 어디서도 성공하지 못한 불상 주조를 단번에 성공한 장소가 바로 문잉림이었다. 실로 영험 높은 거룩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 혜통에게 쫓겨난 교룡이 하필 문잉림에 자리 잡고 사람을 해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신라 불교에 대한 정면 도전이요, 성소(聖所)에 대한 훼손이었다.
혜통은 사신 왔던 정공을 통해 독룡의 문잉림 준동 소식을 들었다. 정공이 독룡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정공과 함께 급거 귀국한 혜통은 다시 독룡을 문잉림에서 쫓아냈다. 복수의 칼끝이 이번에는 정공에게 겨누어졌다. 교룡은 이제 버드나무 귀신이 되어 정공의 마음을 끌었고, 넘치는 고집을 부리게 만들어 그의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 독룡의 복수는 집요했고, 술법은 갈수록 교묘해졌다. 결과적으로 불똥은 다시 혜통에게 튀었다.
조정의 의논이, 왕화상이 정공과 몹시 가까워 꺼려함이 있을 것이므로 마땅히 이를 먼저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군사를 불러 잡아오게 했다. 혜통은 왕망사(王望寺)에 있었다. 군사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고 사기 병을 들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주사를 갈아 붓을 적시며 외쳤다. “내가 하는 것을 보아라.” 그리고는 병 목에 일획을 그으며 말했다. “너희는 마땅히 각자의 목을 보아라.” 살펴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었으므로 서로 보며 경악하였다. 또 외쳐 말했다. “만약 병 목을 자르면 마땅히 너희의 목도 떨어지겠지? 어떠냐?” 그 무리가 달아나 붉은 목으로 왕에게 나아갔다. 왕이 말했다. “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능히 도모하겠는가?” 그리고는 놓아 두었다. 왕녀가 갑자기 병이 나자, 혜통을 불러 치료하게 했다. 병이 낫자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혜통이 인하여 정공이 독룡의 더럽힘을 입어 나라의 형벌을 지나치게 받았음을 말했다. 왕이 듣고 마음으로 뉘우쳐 정공의 처자를 면해주고, 혜통을 임명하여 국사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교룡의 획책은 수포로 돌아갔다. 왕화상 혜통이 왕명조차 거부하는 모습을 취한 것은 뜻밖이다. 그는 이 또한 교룡의 장난임을 알았던 셈이다. 어쨌거나 교룡은 정공을 죽임으로써, 자신을 고자질해 문잉림에서 다시 쫓겨나게 한 복수에 성공했다. 혜통은 독룡을 징치하는 대신 왕녀의 병을 낫게 하여 대치 국면을 해소한 후, 왕의 뉘우침을 이끌어내서 정공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이제 혜통은 국사의 지위로 승격되었다. 신라에서 비로소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용이 정공에게 원수를 갚고는 기장산(機張山)으로 가서 웅신(熊神)이 되었다. 참혹한 독이 자심했으므로 백성들이 몹시 근심하였다. 혜통이 산속으로 가서 용을 타일러 불살계(不殺戒)를 주자, 신의 해악이 그쳤다. 이에 앞서 신문왕(神文王)이 등창이 나서 혜통에게 살펴줄 것을 청했다. 혜통이 와서 주문을 외자 즉시 나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폐하께서 예전 재상의 신분이 되어, 착한 사람 신충(信忠)을 잘못 처결해서 종으로 삼았으므로, 신충이 원망을 품어 생을 거듭하면서도 보복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악창도 신충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마땅히 신충을 위해 절을 세워 명복을 빌어 풀어주십시오.” 왕이 깊이 그렇게 여겨 절을 세워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 하였다. 절이 이루어지자 공중에서 외쳐 말했다. “왕이 절을 세워주어 고통을 벗고 하늘에 태어나니, 원망이 이미 풀렸다(어떤 본은 이 일이 진표율사의 전 가운데 실려 있는데, 잘못이다).” 그 외친 곳을 인하여 절원당(折怨堂)을 세우니, 건물이 절과 함께 지금도 남아있다.
교룡은 다시 기장산의 웅신으로 변했다. 혜통은 용에게 불살계(不殺戒)를 주어 그를 법제자로 만들었다. 그제서야 신의 해악이 그쳤다. 묘한 순환의 고리다. 처음 삼기산의 여우 귀신은 주술승을 죽였다. 그런데 혜통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교룡과 웅신으로 표현된 신의 존재가 주술승인 혜통에게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원광이 삼기산 여우 귀신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 진평왕 11년(589)이고, 효소왕의 즉위 직후 정공이 버드나무 귀신에 씌워 왕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692년이니, 원광과 혜통의 사이에는 1백년의 시간이 가로 놓여 있는 셈이다. 일연은 끝에서 다시 효소왕 이전 혜통이 신문왕의 병을 고쳐주고, 신충봉성사를 창건케 한 일을 부연했다. 이 이야기는 진표율사의 전승으로도 알려졌던 듯하다.
여기서 드러나는 인식은 이렇다. 첫째, 모든 질병은 귀신의 장난이다. 둘째, 귀신을 물리치거나 사람이 억울하게 죽으면 그 귀신이 반드시 복수한다. 셋째, 귀신은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해서 사물에 깃들기도 하고, 터를 잡아 신적 존재가 되어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넷째, 단지 불법의 힘으로만 그 질긴 원한과 복수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귀신은 계를 받아 불법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고, 임금은 절을 세워 원망을 씻어준다.
국난을 막아낸 명랑의 문두루 비법
끝으로 살필 인물은 명랑(明朗) 법사다. 그는 밀본과 혜통의 사이에 놓인 인물이다. 「혜통항룡」조의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에 앞서 밀본의 뒤에 고승 명랑이 있었다. 그는 용궁에 들어가 신인(神印)을 얻었다(범어로는 문두루(文豆婁)라 하는데, 여기서는 신인이라 했다). 처음으로 신유림(神遊林)(지금의 천왕사다)을 세워 여러 번 이웃 나라의 침략을 물리쳤다. 이제 화상이 무외(無畏)의 정수를 전하며 속세를 두루 다니면서 사람을 구하고 만물을 감화시켰다. 아울러 타고난 총명함으로 절을 세우고 원한을 풀어주었다. 밀교의 교화가 이에 크게 진작되었다. 천마산의 총지암(總持嵓)과 모악산의 주석원(呪錫院) 등이 모두 그 유파의 후예이다.
일연은 어째서 혜통의 이야기 끝에다가 그보다 세대가 훨씬 앞서는 명랑의 이야기를 슬쩍 끼워 넣었을까. 순서로 보면 밀본-명랑-혜통인데, 『삼국유사』의 기술은 밀본-혜통-명랑의 순서다. 명랑은 그야말로 신인종(神印宗)의 창시자다. 그는 신인(神印) 즉 문두루 비법으로 국난을 물리쳤다. 밀본이나 혜통이 귀신을 퇴치해 질병을 고치고 해악을 제거한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다. 그는 곳곳에서 중생을 제도하고, 절을 세워 원한을 풀어주어, 밀교의 종파를 신라에 크게 성행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이제 이야기는 다시 「명랑신인(明朗神印)」조의 내용으로 넘어간다.
『금광사본기(金光寺本記)』를 살펴보니 이렇게 적혀 있다. “법사는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로 들어가 도를 배웠다. 돌아올 때 바다 용의 요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천냥(혹 천근이라고도 한다)을 시주받았다. 땅속으로 몰래 가서 자기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하니 광채가 몹시 특이했다. 인하여 이름을 금광사라 하였다(승전(僧傳)에는 금우사(金羽寺)라 하였는데 잘못이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고, 자가 국육(國育)이다.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한다. 소판(蘇判) 무림(茂林)의 자식 김씨(金氏)이니 바로 자장(慈藏)의 누이다. 세 아들은 맏이가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둘째는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어머니가 푸른 빛의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고서 임신하였다.
명랑은 원광처럼 당나라 유학승이었다. 귀국할 때 용왕이 그를 용궁으로 모셔가서 비법을 청했을 정도로 법력이 대단했다. 그는 자기 집 우물 속에서 솟아나오는 이적을 보이며 귀국을 알렸다.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금광사를 지었다. 일연이 알려주는 그의 집안은 한마디로 대단하다. 어머니는 자장법사의 누이요, 3형제는 모두 대덕을 일컬은 큰 스님들이었다. 명랑은 용의 여의주 같은 푸른 구슬을 삼키고 낳은 특별한 아들이었다. 이어지는 다음 대목은 이렇다.
선덕왕 원년(632)에 당나라로 들어가 정관(貞觀) 9년 을미(635)에 돌아왔다. 총장(總長) 원년 무진(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큰 군사를 이끌고 신라와 합력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뒤에 남은 군대가 백제에 머물면서 장차 신라를 습격하여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인이 이를 깨달아 군대를 내어 이를 막았다. 고종이 듣고 크게 진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이를 치려고 하였다. 문무왕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하여 비법을 베풀어 이를 물리쳤다(일이 「문무왕전(文武王傳)」에 있다). 이로 인하여 신인종의 시조가 되었다.
명랑은 632년에서 635년 까지 3년간 당나라에 유학했다. 원광의 유학이 589년부터 600년까지였으니, 30년의 상거가 있다. 그는 밀교의 신인비법(神印秘法)을 배워 와 당나라 대군을 물리쳐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신인은 범어로 문두루(文豆婁)라고 부르는 신술이다. 이 문두루 비법이 대체 어떤 것이었길래 당나라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정작 문두루 비법에 관한 내용은 『삼국유사』 제 2, 「기이」편의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조에 실려 있다.
총장(總長) 원년 무진(668)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김인문(金仁問), 김흠순(金欽純) 등과 함께 평양에 이르러, 당나라 군대와 회동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고장왕(高藏王)을 붙잡아 환국하였다. 이때 당나라 유병(游兵)의 여러 장병이 진(鎭)에 머물며 장차 우리나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왕이 이를 깨닫고 군사를 내었다. 이듬해 고종이 사람을 시켜 김인문 등을 불러 꾸짖어 말했다. “네가 우리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는데, 이를 해치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에 감옥에 가두고 군사 50만을 훈련시켜 설방(薛邦)을 원수로 삼아 신라를 정벌코자 하였다. 이때 의상(義相) 스님이 서학(西學)을 배우려고 당나라로 들어왔다가 김인문을 찾아보니 김인문이 이 일을 알려 주었다. 의상이 동쪽으로 돌아와 임금께 알렸다. 왕이 몹시 걱정하여 군신들을 모아 방어할 계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金天尊)이 아뢰었다. “근자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해주고 왔답니다. 청하여 물어 보시지요.” 명랑이 아뢰어 말했다. “낭산(狼山)의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는데, 이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고 도량을 베풀면 됩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내친 김에 신라까지 넘보던 당나라의 속셈을 문무왕은 선제 기습 공격으로 막았다. 당나라가 배은망덕이라며 발끈 했을 것은 불보듯 환하다. 즉각 50만 대군이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문무왕에게 각간 김천존이 제시한 해결책이란 것이 명랑법사의 비법이었다. 명랑은 왕의 다급한 자문에 낭산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지어 법도량을 베풀면 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신이 노니는 숲 신유림은 말 그대로 여우나 늑대[狼]와 같은 재래신앙의 신들이 위세를 떨치던 신라의 성소(聖所)였다. 명랑은 이 재래신앙의 본거지에 사천왕사를 세워 신인(神印)의 법도량을 세울 것을 주문한 것이다. 다급했던 왕은 두 말 않고 그의 말을 따랐다. 더욱이 명랑은 바다 용왕까지 그에게 비법을 전수받아 사례로 황금 1천냥을 시주했다는 인물이 아닌가. 사정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때 정주(貞州)의 사자가 달려와 보고했다. “무수한 당나라 군대가 우리 지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 왕이 명랑을 불러 말했다. “일이 이미 코앞에 닥쳤으니 어찌 해야 하오?” 명랑이 말했다. “채색 비단을 가지고 임시로 만들면 됩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절을 조성하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었다. 유가(瑜珈)에 밝은 승려 12명을 데리고 명랑을 상수(上首)로 삼아 문두루의 비밀법을 베풀었다. 이때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서로 맞붙지도 않았는데, 바람과 파도가 성난 듯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다. 뒤에 고쳐 절을 세워 사천왕사라 이름하였다. 이제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국사에는 크게 개창한 것은 조로(調露) 원년 기묘(679)년이었다고 했다). 후년 신미년(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파견하여 또한 5만명의 군사로 쳐들어 왔다. 또 그 비법을 행하니 배가 앞서와 같이 가라앉았다.
문두루 비법의 실체와 위력이 비로소 드러난다. 문두루 비법을 베풀려면 사천왕도량과 오방신상이 필요하고, 비법을 수행할 12명의 유가승(瑜伽僧)이 요구되었다. 여기서 문두루 비법의 문헌 근거와 구체적 방법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문두루는 범어 Mūdra를 중국 동진 시대에 음역한 것이다. 밀교의 결인(訣印)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진(東晉) 시대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가 번역한 『대관정신주경(大灌頂神呪經)』 12권 중 일곱 번째 경전인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혹은 『천제석소문관정복마대신주경(天帝釋所問灌頂伏魔大神呪經)』이라고도 한다)에 그 구체적 방법이 나온다. 정수리에 물을 붓고 주술을 베풀어 마귀를 항복시켜 꼼짝 못하게 하는 신주(神呪)가 바로 문두루 비법인 셈인데, 소의(所依) 경전인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4부 대중이 사악한 귀신에 의해 두려움에 처하게 되면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대신을 존념(存念)한다. 단차아가(亶遮阿加), 마가기두(摩呵祇斗), 이도열라(移兜涅羅), 마하가니(摩訶加尼), 오달라내(烏呾羅嬭) 등으로 불리는 이들 5방대신 들은 각각 7만의 귀신을 거느리며 대선지법(大仙之法)을 행하여 국가나 사람을 환난과 재액으로부터 건져준다. 문두루법은 말세에 불제자들이 재액이나 위난을 당했을 때 오방신장과 그 권속의 이름을 둥근 나무 위에 써붙여 놓고 정해진 주술을 외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위 명랑의 기사를 보면, 명랑은 먼저 채색 비단으로 임시 절을 만들었다고 했다.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에서 동방은 청색, 남방은 적색, 서방은 백색, 북방은 흑색, 그리고 중앙은 황색으로 나타낸다고 한 언급으로 보아, 방위에 따라 비단의 빛깔을 달리하여 오방대신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다.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었다고 한 것도 정확히 일치한다. 실제 주술의 시행은 유가승 12명이 동원되었다. 유가(瑜珈)는 범어 요가(Yoga)의 취음으로 육체와 정신의 통합을 이루기 위한 밀교의 수행법을 말한다. 요컨대 유가승은 밀교 계통의 신인종 승려를 일컫는다. 문두루 비법은 둥근 나무에 신들의 이름을 써놓고, 방위에 따라 주문을 외우며 일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된 대단히 장엄하고 거창한 의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단석(壇席)이 일연 당시에도 남아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의식은 중앙에 높게 설단하고 단 위에서 방위에 따라 진언을 베푸는 방식이었던 듯하다.
문두루의 위력은 경악할만 했다. 난데없는 바람과 파도가 당나라 50만 대군을 실은 배를 일제히 침몰시켜 몰살시켰다. 이듬해에 다시 쳐들어온 5만의 당군 역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물에 가라앉았다. 이어지는 기사는 당나라 황제의 반응이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이 김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다. 고종이 박문준을 불러서 말했다. “너희 나라에 무슨 밀법(密法)이 있길래, 두 번이나 큰 군대를 내었는데 살아 돌아온 자가 없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 등이 상국에 온지 십여 년이나 되어 본국의 일을 모릅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을 들었을 뿐입니다. 상국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 3국을 하나로 통일하였으므로,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 남쪽에 천왕사를 새로 창건하여 황제의 수명이 만세토록 이어지기를 축원하는 법석을 늘 연다고 합니다.” 고종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이에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 절을 살펴보게 하였다. 왕이 당나라 사신이 올 것이란 소식을 먼저 듣고, 이 절을 보여주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따로 그 남쪽에 새 절을 짓고서 기다렸다. 사신이 도착해서 말했다. “반드시 먼저 황제께 축수하는 장소인 천왕사에서 향을 올리겠소.” 그래서 새로 지은 절로 안내해 보였다. 그 사신이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이는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 그러면서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이 황금 1천냥을 주니, 사신이 돌아가 아뢰었다. “신라가 천왕사를 창건하여 새 절에서 황제께 축수하였을 뿐입니다.” 당나라 사신의 말을 인하여 이름을 망덕사(望德寺)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태는 겨우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당나라 사신 악붕귀의 이름은 『삼국유사』 「탑상」의 「천룡사(天龍寺)」조에 한번 더 나온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이란 책에 천룡사 터를 두고 중국 사신 악붕귀가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풍수지리적 언급이 그것이다. 이로 보면 악붕귀는 단지 사천왕사만 살피고 간 것이 아니라, 신라의 여러 사찰을 두루 살폈던 것이 분명하다.
『삼국유사』 제 5 「의해(義解)」의 「이혜동진(二惠同塵)」에도 명랑의 일화 한 단락이 보인다. 신인종의 조사 명랑이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한 후 낙성회를 열었을 때, 고승들이 다 모였는데 혜공(惠空) 스님만 오지 않자, 명랑이 향을 피우고 경건하게 기도했다. 조금 뒤에 혜공이 큰 비 속에 옷도 젖지 않은 채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명랑의 신술은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낳았다.
명랑의 문두루 비법은 신라를 이어 고려조까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호국 불교의 상징적 주술로 자리잡았다. 「명랑신인」의 끝에는 고려 태조가 건국할 때에도 해적이 침범하자 안혜(安惠)와 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과 대연(大緣)을 청해 문두루 법으로 해적을 물리쳐 진압한 일을 적고 있다.
고려 문종 28년(1074) 7월에도 동경 사천왕사에서 번병을 물리치고자 27일 간 문두루 도량이 개설되었고, 이후로도 문두루 도량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설행되었다. 이규보(李奎報)도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 39에 「동경금강사문두루도량문(同京金剛寺文豆婁道場文)」을 남긴 바 있다. 금강사가 앞서 명랑이 창건한 절 이름과 동일한 것도 음미할만 하다. 그 내용은 신인(神印)의 더없이 큰 공덕으로 신통한 감응을 빌어 병기를 거두고 외적의 침입을 물리쳐 사직을 장구히 하고 중흥의 경사를 이룰 수 있기를 발원한 것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 하자. 신라는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 이후, 진흥왕의 치세로 이어지는 동안 국왕과 왕비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을만큼 급격한 불교적 쏠림이 전국가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누구나 암자를 짓고 들어앉아 염불을 외우고 주술을 익히며 성불의 열망을 염원하는 종교적 신성이 온 나라에 편만하였다. 원광이 만난 삼기산의 여우 귀신 이야기는 새롭게 일어난 불교가 재래 신앙과 조화를 이루며 어떻게 불교 쪽으로 견인되어갔는지 잘 보여주는 예화다.
하지만 신주편의 세 고승 밀본과 혜통, 그리고 명랑 세 승려의 이야기는 밀교의 주술 신앙이 곧이어 신라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중심 교리의 하나로 세력을 얻어가던 과정을 설명한다. 여기에도 계통이 있었다. 밀본과 혜통은 귀신을 몰아내는 축귀(逐鬼)와 병을 치유하는 치병(治病)의 이적을 보였고, 명랑은 외적을 물리치는 문두루 비법을 선보였다. 시기상으로 명랑이 밀본의 다음 시기임에도 혜통의 뒤쪽에 명랑의 이야기를 배치한 것은 이 두 갈래 신주승의 계보가 있음을 보이기 위함인 듯하다.
조선초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매월당사유록(梅月堂四遊錄)』에 실린 「천왕사 터는 이제 인가가 되었다. 天王寺址今爲人家」란 시에서 명랑의 문두루 비법을 이렇게 노래했다.
문두루의 비법은 서역에서 나왔나니 文豆婁法出西天
신인종의 근원은 명랑에게서 전해졌네. 神印宗源自朗傳
명신(明信)의 한 기약을 비록 환득(幻得) 한다 해도 明信一期雖幻得
이 일로 변경 안정 가능할지 모르겠네. 不知玆事可安邊
3구의 명신(明信)은 『좌전』에 나오는 말로, 마음을 쏟아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는 경주의 사천왕사터를 찾았다가 이미 인가로 변해버린 절터에서 문두루 비법과 명랑의 신인종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폐허조차 찾을 길 없는 허망한 옛 자취 앞에서 과연 문두루 비법을 오늘에 다시 얻는다 해도 변경을 안정시키는데 무슨 힘이 있겠느냐며 안타까운 탄식을 토하고 말았다.
당나라 50만 대군을 물귀신으로 만들었다던 문두루 비법이 행해졌던 낭산 자락의 사천왕사지는 오늘날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신유림(神遊林)의 신들은 이제 떠나고 없다. 명랑이 주술을 펼치던 제단의 흔적도 찾을 길이 없다. 그렇다고 그때의 그 신화가 말짱한 거짓말이었다고 말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 뜨겁게 달아올랐던 불국토의 열망이 허망한 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통을 잇는 사람들 (0) | 2009.09.15 |
---|---|
조선의 비주류 인생_03 (0) | 2009.09.10 |
조선의 비주류 인생_02 (0) | 2009.09.04 |
조선의 비주류 인생_01 (0) | 2009.08.31 |
천하를 뒤흔든 여걸 여치[呂雉] (0) | 2009.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