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선의 비주류 인생_01

醉月 2009. 8. 31. 00:15

조선 후기 뒷골목의 건달과 스타들

▣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한국의 옛 문화와 문학을 연구하다 보니 한국인이 과거에 이뤄놓은 다양한 학문과 예술의 결과물을 만나게 된다. 흥미롭고도 풍부한 결과물과 해후하고서 느끼는 행복은 남다른 데가 있다. 다양한 고전과의 만남의 끝은 어딜까? 그 종착지는 아무래도 인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유물이고 책이고 제도고 간에 결국에는 사람이 엮어가는 삶을 보조하는 위치에 있을 뿐이다. 그런 보조물 덕분에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렇고 저런 삶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 관심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나의 문제로까지 연장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다. 삶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 이야기는 공허할 것만 같다.

삐끼·거지·기둥서방…

 

 

그런데 인간의 이야기라지만 인간마다 발산하는 향기와 품격, 인생과 가치의 간격이 너무도 크다. 한자리에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간격이 크기도 하다. 오랫동안 필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관심을 삼은 대상은 대체로 당대를 휘잡았던 주류 인생이었다. 관료와 무인, 귀족과 학자 따위의, 신분이 높고 학식이 풍부하며 부유하고 명성을 누린 이들이 그 중심에 있다. 사정이 그렇게 된 까닭이야 자명하다. 현실의 권력이 그들의 수중에 있었고, 남겨진 사료는 대체로 그들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당연히 그들의 의도와 의식을 중심에 놓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멋지게 꾸밀 수 있는 힘있는 수단을 장악한 존재이다.

 

필자는 몇 년전부터 주류 인생에서 비주류 인생으로 관심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각 분야에서 전문가로 발돋움한 10명의 인물을 조명해 <조선의 프로페셔널>을 내게 되었다. 필자만이 아니라 최근 들어서는 학계나 출판계에서도 하층의 문화와 인물을 조명하려는 시도가 적잖이 이뤄지고 있다.

 

이 저술을 준비하면서 많은 자료를 뒤적이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꽤 많은 기록들이 사회의 하층을 구성하는 갑남을녀의 삶에까지 관심을 표시한 덕분에 옛 문화가 상층의 귀족적 문화만은 아니었음을, 하층에도 흥미롭고 귀중한 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기록의 대표 격이 바로 조수삼의 <추재기이>(秋齋紀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을 화두 삼아서 조선 후기를 살아간 비주류 인생의 생생한 모습을 재구성하고, 현재와 연결해보는 것. 매력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추재기이>는 19세기 전반기에 나온 독특한 빛깔의 책이다. 한 시대의 대표적 시인인 조수삼(趙秀三·1762~1849)이 노년에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썼다. 71명의 특정한 인물이 보인 범상치 않은 인생 궤적을 시로 읊고 그 궤적의 구체적인 내용을 간결히 주석처럼 산문으로 쓴 형식을 취했다. 그러므로 시집이면서 동시에 산문집이다. 71편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고 독립돼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통일성을 이룬다.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고 있는 창작 정신이 저작의 통일성을 지탱하고 있다. 그 정신이 이 저작의 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그 정신을 이해하려면, 이 저작에서 주목한 인간이 어떤 종류인가를 보면 된다.

 

한마디로 비주류 인생을 주목했다. 사회의 그늘진 구석에서 힘겹지만 당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중심을 이룬다. 거의 대부분이 신분을 파악하기 어렵거나 신분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평민 이하의 사람들로 구성됐다.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인물은 시장바닥에서 살아가는 시정의 인간들인데 그들의 캐릭터가 독특하다. 도둑, 강도, 삐끼, 기둥서방, 거지, 방랑객, 방랑시인, 역사, 골동품 수집가, 술장수 따위가 여기에 속한다. 또 예술가라고 부를 인물이 다수 등장하는데 고급 예술가가 아니라 대체로 시장에서 공연하는 유랑 연예인이다. 그 면면을 보면, 닭 우는 소리를 잘하는 계노인(鷄老人), 소설을 낭독하는 전기수(傳奇?), 해금 켜는 노인, 구기(口技)에 능한 박뱁새 형제, 음담패설 애호가, 만석중놀이의 명인 탁반두(卓斑頭), 원숭이 재주꾼 따위이다. 정통 예술가 축에 끼이지 못하는 비주류 예술가들이다.

 

이 밖에도 기생방 주변에 빌붙어 사는 조방꾼 부류들과 나무나 팔고 구걸하러 다니는 몰락한 양반, 시를 쓰는 노비나 도둑의 아내 등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절름발이, 장님, 벙어리 등의 장애인이 영위하는 힘겨운 삶을 묘사한 사연이 눈길을 끈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추재기이>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다수가 사회의 주류에 끼이기 어려운 소수자이다.

조수삼은 의도적으로 사회의 마이너리티에 주목해 그들의 삶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묘사된 인물 가운데 주류에 속할 만한 인물은 한 사람도 없다. 양반으로 보이는 사람이 한둘 있으나 그들조차 나무를 팔거나 구걸하며 도시의 뒷골목에서 근근이 연명하는 존재로 나온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의 그늘진 응달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런 음지에서 살아갈망정 인간으로서 가치를 발산하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포착했다. 남다른 시선으로 자신이 사는 시대의 인간군상에서 새롭게 인간을 발견하고 그들의 인생을 색다른 시선으로 해석했다. 조수삼은 오랫동안 지식인들이 주목하지 못했던 음지의 인물이 보여준 인생의 가치를 역사의 표면으로 부각시켰다.

 

“지붕 아래 속닥이는 이야기”

이렇게 이 저술은 사회의 헤게모니를 쥔 부류의 반대편에서 기구하게 살아가는 장애인과 떠돌이 예술가, 시장 사람들, 인생에서 실패한 망나니와 같은 비주류 인간을 주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들을 비하하거나 냉소적으로 보지 않고 연민과 동정, 찬탄과 긍정의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하층의 인물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한 저작은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조선시대 문학이 다뤄보지 못한 다양한 인간군상과 따뜻한 휴머니즘을 이 저술에서 맛볼 수 있다. 하류 인생을 다양하고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렸다는 점만으로도 <추재기이>는 새로운 문학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주류 인생을 비롯해 다양한 부류의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 저작은 한둘이 아니다. 평민에 관심을 기울인 저술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저술들 가운데서도 <추재기이>는 선명한 주제의식과 태도 때문에 민중적 성격이 두드러진 문학으로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 조수삼의 <추재기이>. 조선 후기 비주류 인물들을 뛰어난 입담으로 그려내었다.

저자인 조수삼은 젊어서부터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이 저술을 쓰기 오래전인 1794년에도 <연상소해>(聯床小諧)란 야담집을 지었다. 그 서문에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자라서는 사방을 떠돌았기 때문에 날마다 보고 듣고 기록하여 남긴 것이 모두가 근거 없거나 불경스러운 이야기로서 지붕 아래 속닥거리는 것일 뿐이다”라고 밝혔다. 자신이 기록한 글이 무게 있고 엄숙하고 진지한 담론임을 과시하려 하지 않았다. 겸손한 태도로 자기 저술의 가치를 낮춰 말했다. 그러나 실은 저술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회적 소수자의 인생을 이야기의 대상으로 떠올렸고, 그럼으로써 당시 하층 사회의 일면을 보여준 것으로 이 책의 특색을 제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예외도 적지 않지만, <추재기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 시대의 명사들이다. 다시 말하면, 귀족사회의 명사가 아니라 시장 바닥의 명사로서 당시에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비주류 계열의 명물들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민간 예술가는, 현대의 용어로 치면, 대중적 스타에 속하는 인물도 적지 않다.

 

국문학자이자 서울대 교수였던 이명선은 몇몇 인물들을 거론하면서 이들을 “한 시대의 명물(名物)”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그의 지적처럼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당시에는 유명세를 치른 인물이다. 의적 일지매나 제주 기녀 만덕, 거지 달문, 음악가 김성기 등이 여러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인물이다.

 

바로 그 사실이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귀족사회의 명사는 다양한 기록에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에 일반 백성들의 입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은 기록에 등장할 가능성이 낮다. 기록물은 보수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런 보수적 권력을 뚫고 비주류 인생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학계에서 아직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지만,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71명 가운데 동시대 저작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을 제법 찾을 수 있다. 조수삼은 간결하게 그 인물들의 모습을 포착하는 데 그쳤지만 다른 기록물에서는 상세하게 다룬 경우도 있다. 또 동일한 인물은 아니지만 비슷한 관심사와 비슷한 인물에 주목한 사례도 적지 않다.

 

그렇게 보면 <추재기이>에 실린 인물을 바탕으로 하여 200∼300년 전 시장과 골목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저명인사가 누구이고 그들의 활동 양상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예능인이라면 현재의 대중 스타와 비슷한 인물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작업에 들어가는 길목으로 <추재기이>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텍스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다양한 방증(傍證) 자료를 이용해 당시 시정 사회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이다.

필자가 이번 연재를 통해서 해보려는 작업이 바로 이것이다. <추재기이>는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다른 많은 저작과 교류함으로써 새롭게 읽히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한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귀족사회만이 아니라 200∼300년 전 하층 사회의 생생한 모습을 일부나마 복원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일지매 이야기의 원본

평민의 인생을 담은 대표적인 저술로 인정을 받아 <추재기이>는 지어진 뒤에 널리 읽혔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평민들의 삶을 주목한 여러 저작에 일부 내용이 뽑혀 들어갔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이 책은 관심을 끌었다. 그 속에 나오는 일지매 이야기는 일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설로, 만화로, 영화로, 드라마로 각색되고 있다. 이 인기 있는 이야기의 원본이 다름 아닌 <추재기이>이다.

<추재기이>는 1930년대 조수삼의 문집 <추재집>(秋齋集)이 간행될 때 그 속에 포함됐다. 오랫동안 이 책은 문집에 수록된 채로 읽혔을 뿐, 단행본으로는 그다지 널리 유포되지 않았고, 주로 학계에서 널리 인정을 받았다. <조선문학사>를 지었고 자진해 월북한 이명선은 이 책을 높이 평가해 1940년대 후반 등사본을 만들어 대학에서 강독 교재로 사용한 일도 있다. 그 이후 야담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쓴 연구논문도 몇 편 있고, 내용의 일부를 뽑아 번역한 것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완역본도 1종이 있다.

19세기 문학서 가운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편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단순한 번역으로 만족했을 뿐이지 그 시대와 교감할 수 있는 텍스트로 선보이지 못했다. 필자는 <추재기이>의 내용을 바탕으로 조선후기 비주류 인물의 특별한 행적을 복원하려 시도한다. 그럼으로써 종이 위에서만 빛을 발하는 옛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어느 시장 어느 골목에서 만날 법한 인물로 재탄생시켜보려고 한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