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천하를 뒤흔든 여걸 여치[呂雉]

醉月 2009. 8. 30. 10:50

천하를 뒤흔든 여걸 여치(呂雉)

 

 

 

들어가는 말
중국 역사상 여자의 몸으로 황제에 오르거나 그에 버금가는 대권(大權)을 휘두른 인물을 꼽자면 대체로 3명을 들 수 있다. 한고조 유방의 부인이자 아들을 대신해 권력을 휘두른 여후(呂后 여태후),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이자 주(周)나라를 세운 측천무후(則天武后), 청나라 함풍제의 부인인 서태후(西太后)가 바로 그들이다. 측천무후가 직접 나라를 세워 황제를 칭했다면 여태후나 서태후는 형식상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대신 막후에서 실권을 행사했다.

여치의 출신 배경
여태후의 본명은 여치(呂雉 기원전 180년 사망)이며 한고조 유방(劉邦)이 미천할 때 결혼한 부인이다. 고조의 뒤를 이어 서한(西漢)의 제 2대 황제가 되는 효혜제(孝惠帝) 유영(劉盈 기원 210-188)과 노원(魯元) 공주를 낳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여치의 부친인 여공(呂公)은 탕군(碭郡) 선보현(單父縣)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의 가문과 배경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사료에 기재된 내용이 부실하고 그의 성이 여(呂) 씨인 점에 착안해 그가 진시황 초기에 재상을 지내다 숙청당한 여불위(呂不韋)의 일족일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심지어 일본의 어느 학자는 그가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여불위는 진시황이 왕위에 오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과 커다란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의 핍박에 의해 자살하자 많은 여(呂) 씨들이 이에 대해 불만을 갖거나 원한을 품었을 것이다.

실제로 진나라 말기 반진(反秦) 투쟁에 나선 인물들을 조사해보면 여 씨 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반란에 가담했다. 원래 여불위의 봉지가 낙양(洛陽)이었기 때문에 여불위가 자살한 후 남아있던 그의 일족들은 낙양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여치의 부친 여공도 이때 정치적인 숙청을 피하기 위해 패현으로 은닉한 것으로 보인다. 또 반진 투쟁에 가담한 거의 모든 여 씨들은 초한(楚漢)전쟁의 와중에 유방 진영에 가담했다. 결국 여공은 여불위의 친아들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여불위와 가까운 일족이라고 볼 수 있다.

냉혹한 승부사
그렇다면 왜 여공은 가문이나 배경 등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유방에게 아끼던 딸을 주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하자면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진나라에서 여불위가 숙청된 후 진나라에 반감을 품게 된 여 씨 일족은 일찍부터 진나라에 대한 복수를 준비했고 진승 등의 반란이 발생하자 반진 투쟁의 선봉에 섰다. 여 씨 세력 중 유력한 인물이었던 여공은 호방한 성품의 유방을 보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장래의 지도자감으로 여겨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위로 삼은 것이다.

또 여치 본인도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나고 성격이 굳세고 과감할 뿐만 아니라 권력욕과 승부욕이 매우 강해 유방과의 혼인을 반대하지 않았다. 유방이 늘 무리의 주도권을 틀어쥐고 남에게 넘겨주지 않는 강력한 리더십과 포용력이 있었다면 여치는 유방보다 한술 더 떠 한신과 같은 개국 공신들을 냉정하게 숙청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인물은 철저히 싹을 잘라버리는 냉혹한 승부사의 기질을 지녔다.

여치가 유방과 혼인한 이후 유방을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유방에게 헌신한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권력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여치는 나이도 많고 처자식까지 딸린 유방에게 시집을 가고, 유방에게 체포령이 떨어져 도망 다닐 때는 남편 대신 감옥에 들어간 적도 있으며, 망(芒)․탕(碭) 소택지로 도망간 유방을 위해 어린 아이들을 안고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가 하면, 유방이 팽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는 항우에게 포로로 잡혀 3년 10개월 동안 시아버지를 모시고 고생한 적도 있다. 특히 여치는 유방에 필적할 만큼 인간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조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유방은 비록 위선일지라도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재들을 포용하고 감싸 자기편으로 만드는 리더십을 보여준 반면 여치는 우선 편을 가른 후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될 만한 인물은 철저히 제거하고 약자에겐 냉혹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여치 생전에 유방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녀의 의지를 꺾지 못했고 수십 년간 전쟁터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공신들조차 그녀 앞에서는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 한신을 제거하는 여치 
ⓒ 삽화 권미영

정적(政敵) 제거에 나서는 여치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치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개국공신들에 대한 제거이다. 유방의 통일 전쟁 와중에 가장 큰 적수였던 항우(項羽)가 사라진 후 여치의 시선은 내부로 향했고 특히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나 한(漢)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한 초왕(楚王) 한신(韓信), 양왕(梁王) 팽월(彭越),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 등을 우선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다.

한신(韓信)을 제거하다
위 세 명의 공신들 중 유방이나 여치가 가장 두려워한 인물은 역시 한신이었다. 때문에 한 고조(高祖) 6년인 기원전 201년 유방은 진평(陳平)의 계략을 이용해 남쪽으로 순행(巡行)을 나간다는 구실로 초왕 한신을 유인했다. 한신이 아무 준비 없이 황제 일행을 맞다 사로잡히자 장안으로 끌고간 후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켰다.

하지만 유방은 한신이 세운 공이 워낙 큰 데다 뚜렷한 명분도 없이 그를 죽일 경우 각지에 분봉(分封)된 이성(異姓)의 제후 왕들 및 여러 공신들이 반발할까 두려워 함부로 죽이진 못했다.
그러다 고조 11년(기원전 196년) 대(代)나라의 상국(相國 재상에 해당)으로 북방 변경의 군사지휘권을 책임지고 있던 진희(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이 직접 대군(大軍)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다. 이때 한신은 유방이 자신을 시기한다는 것을 알고는 병을 핑계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장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 한신의 사인(舍人) 한 사람이 그에게 죄를 지었는데 벌이 두려운 나머지 동생을 시켜 한신이 반란을 획책했다고 고변하게 했다.

호시탐탐 한신을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여치가 이 소식을 듣고는 한신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한신을 몰래 불러내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치밀하고 완벽한 성격의 여치는 한신이 혹 자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까 우려해 한신과 절친한 승상 소하(蕭何)를 끌어들였다. 여치는 소하를 한신에게 보내 거짓으로 고조황제가 진희를 죽이고 개선했으니 몸에 병이 있더라도 억지로라도 와서 축하잔치에 참가하라고 전달했다.

소하가 누구인가? 나라의 재상이자 일찍부터 한신의 그릇을 알아보고 유방에게 크게 중용하도록 천거한 인물이다. 때문에 한신은 평소 그에 대해 늘 존경과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소하가 이렇게 직접 자신의 집에까지 찾아와 자신을 위하는 듯 거짓말을 하자 한신은 아무런 의심없이 장안궁(長安宮)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한신의 최후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가 궁 안에 들어가자마자 여치의 사주를 받은 군사들에 의해 포박되었고 정상적인 법률 절차도 없이 즉각 참수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하의 영웅 한신은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여치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한신의 삼족(三族)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팽월(彭越)의 억울한 죽음
한편 초한전쟁 와중에 한(漢)과 초(楚) 사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고비 때마다 한군(漢軍)을 도와 항우를 꺾는데 큰 공을 세웠던 팽월 역시 여후에게 속아 죽임을 당했다.
유방이 진희를 토벌할 때 팽월의 양(梁)나라에서 군사를 징벌한 적이 있다. 당연히 자신을 따라 나설 줄 알았던 팽월이 병을 핑계 대며 부하 장수를 보내자 유방은 크게 화를 내며 사람을 보내 책망했다. 양왕 팽월이 두려움을 느껴 직접 유방을 찾아가 사죄하고자 했으나 휘하 장수 호첩(扈輒)이 만류하며 훗날을 도모하자고 했다. 그런데 이때 양나라의 태복(太僕)이 죄를 짓고 낙양으로 도망가 팽월과 호첩이 모반을 꾀했다고 고변했다.

유방은 팽월을 낙양으로 잡아들여 직접 심문했다. 조사 결과 비록 군사를 준비한 형세가 있긴 하지만 뚜렷하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볼 수는 없었다. 또 그의 공이 워낙 컸기 때문에 유방은 팽월을 서인(庶人)으로 강등해 멀리 촉(蜀)땅으로 유배시켰다. 팽월로서는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촉 지방은 자신과는 아무 연고도 없는 궁벽한 곳이었다.

팽월이 서쪽으로 유배 가던 도중 마침 중간에서 낙양으로 가던 여후(呂后)를 만났다. 팽월은 여후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작위나 봉토는 필요 없으니 부디 고향인 창읍(昌邑)으로 돌아갈 수 있게만 해달라고 간청했다. 뜻밖에도 여후는 흔쾌히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허락하고는 팽월을 데리고 낙양으로 되돌아왔다. 낙양에 있던 유방이 팽월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의아해하자 여후가 말했다.

“팽왕(彭王)은 장사입니다. 지금 그를 촉으로 가게 하시면 이는 스스로 후환을 남기는 것이니 차라리 그를 죽여 없애는 것만 못합니다. 그래서 신첩이 삼가 그와 함께 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팽월의 반란을 고발하게 하고 형식적인 심사 과정을 거쳐 사형에 처한 후 삼족을 멸했다.
  경포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정에서는 경포를 정벌하기 한다. 병이 깊어 직접 출병하기 어려웠던 고조 유방이 태자인 유영에게 군사를 이끌게 하자, 여후는 아들 유영이 위험에 처할 것이 염려돼 과시심 강한 유방을 부추겨 대신 전투에 나가게 한다. 이 싸움에서 유방은 화살을 맞아 병이 깊어졌고, 결국 이때문에 숨을 거두게 된다.ⓒ 삽화 권미영

 

경포의 반란
이성(異姓) 제후들을 경계하고 추후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위협하기 위해 유방은 팽월의 살을 젓으로 담가 제후들에게 하사했다. 이때 회남왕 경포는 마침 사냥 중이었는데 조정의 사자가 가져온 팽월의 육장(肉醬)을 보고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신의 죽음에 이어 팽월까지 비참하게 죽음에 이르자 경포는 다음 차례가 곧 자신임을 직감했다. 이후 경포는 조정의 동정에 촉각을 기울이며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나섰다.

그런데 이때 경포가 총애하던 후궁이 하나 있었는데 병이 들어 의원에게 병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 의원의 집이 공교롭게도 중대부(中大夫) 분혁(賁赫)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었다. 분혁은 후궁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에 후한 예물을 보낸 후 의원의 집에 찾아가 함께 술을 마셨다. 이 말을 들은 경포는 분혁이 자신의 애첩에게 딴 마음을 품은 것으로 오해해 질투심이 치밀어 올랐고 급기야 분혁을 잡아 죽이고자 했다.

그러자 분혁은 장안으로 도망쳤고, 한 조정에 회남왕 경포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변했다. 조정에서는 회의 끝에 대군을 보내 경포를 주살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때 고조 유방은 병이 깊어 직접 출병하기에는 힘든 상태였다. 대신 태자인 유영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게 하여 회남왕 경포를 정벌하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여후의 오빠 여석지(呂釋之)를 찾아가 충고했다.
“태자가 군대를 이끌고 공을 세우더라도 지위가 더 올라갈 수 없고 만약 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이로 인해 화를 당하게 됩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여후에게 이 사실을 아뢰어 황상께 재고를 청하지 않습니까? 빨리 여후께 달려가 황상을 찾아뵙고 ‘경포는 천하의 맹장으로 용병술이 뛰어납니다. 지금 제장(諸將)들은 모두 폐하의 옛 신하들인데 태자더러 이들을 거느리게 하신다면 양에게 이리를 이끌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제대로 부릴 수 없습니다. 또한 경포가 이런 소문을 듣는다면 북을 울리며 서쪽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황상이 비록 병이 있다 해도 수레에 누워 치료를 받으면서 나아가신다면 제장들이 온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황상께서 비록 고생스러울지라도 처자를 위해 떨쳐 일어나셔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여후는 잘못하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위험에 처할 것을 염려해 고조를 찾아가 울면서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과시심 강한 유방을 부추겼다. 고조 유방은 “나도 사실 그 녀석을 보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여겼소.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야만 하겠소.”라고 말했다.
결국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유방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한편 회남왕 경포는 평소 부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장담했다.
“황상은 이미 늙고 병들어 분명 이곳까지 오지 못할 것이오. 그렇다면 제장에게 지휘를 맡길 것이 뻔한데 나는 지금까지 제장들 중 오직 회음후 한신과 양왕 팽월만을 걱정했소. 지금 그들이 이미 죽고 없으니 나머지는 두려울 게 없소.”

고조 12년(기원전 195년) 10월, 고조와 경포의 군사가 기현 서쪽에서 조우했다. 잘 조련된 경포의 군사들이 비록 용맹하긴 했으나 황제가 직접 참여한 전투라 한나라 군사들의 사기가 높았다. 전세는 금새 경포에게 불리해졌고 그는 결국 한 군의 추격을 받다 비참하게 죽었다.

한편 이 싸움에서 고조는 날아온 화살에 맞아 병이 더 깊어졌고 결국 이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다. 결과적으로 상산사호의 건의를 받아들인 여후는 경포의 반란을 이용해 남편의 명을 재촉한 대신 아들과 자신의 권력을 지킬 수 있었다.

여기서 왜 여후가 유방을 충동해 전투에 나아가게 했는지 이해하자면 유방의 후계구도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조 유방의 여덟 아들
유방에게는 모두 8명의 아들이 있었다. 맏이는 유방이 젊었을 때 조(曹) 씨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이다. 사료에는 그냥 조희(曹姬)라고만 기록된 조씨 부인은 순박한 성품을 지녀 유방이 자신을 버리고 여치와 혼인하려 하자 스스로 조용히 물러났다. 유비(劉肥)는 서한 시대 여러 제후 왕들 중 자손이 가장 번창했다.

둘째는 여치의 아들이자 훗날 효혜제가 되는 유영(劉盈)이고, 셋째는 척부인의 아들로 유방의 총애를 독차지한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이다. 넷째는 박희(薄姬 훗날의 박태후)의 아들인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이다. 다섯째는 양왕(梁王) 유회(劉恢)인데 여태후 집권 시기에 조왕(趙王)으로 옮겨졌다. 여섯째는 회양(淮陽王) 유우(劉友)로 역시 여태후 집권 시기에 조왕으로 옮겨졌다. 일곱째는 회남왕 유장(劉長)이고 여덟째는 연왕 유건(劉建)이다.

특이한 점은 평소 여색을 밝혔던 유방의 성격 탓인지 여덟 아들의 생모가 전부 달랐다. 이중 첫아들을 낳은 조 씨 부인은 유방이 세력을 얻기 전에 함께 살았던 여인으로 유방이 여치와 혼인한 후 스스로 집을 떠났기 때문에 유방의 정실(正室) 부인은 여치가 된다. 그후 유방이 산동(山東)에서 봉기를 일으킬 무렵 미색이 뛰어난 여인을 새로 첩으로 얻으니 이 여인이 바로 척(戚) 부인이다. 나머지 여인들은 유방이 한왕(漢王)이 된 후 얻은 후궁들이다.

 
유방의 총애를 받던 척 부인은 유방에게 유영(여후의 아들) 대신 자신의 아들 유의를 태자로 삼아달라 애원한다. 이에 유방은 태자교체를 시도하지만,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주창과 손숙통은 충언으로 태자 폐위를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유방은 고집을 더 피울 수 없었지만, 태자 교체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삽화 권미영
척 부인의 야망
유방은 여러 여인 중 척(戚) 부인을 가장 총애했다. 척 부인은 이를 이용해 유방을 따라 출정(出征)에 나설 때마다 밤낮으로 울고 불면서 여의를 태자로 삼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유방 역시 태자인 유영의 성격이 너무 유순해 자신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격이나 외모에서 자신을 쏙 빼닮은 여의를 더 총애해 태자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유영이 태자가 된 이후 큰 허물이 없었고 여후의 질투심이 강해 유방으로서도 후일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방은 여의가 10세 되던 해에 도성에서 가까운 조왕(趙王)에 봉했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아들을 곁에 두고 지켜보기 위해 봉국이 아닌 도성에 머물 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었다.

한편, 여후는 나이가 들면서 미모가 점차 시들어졌고 유방이 동쪽으로 출정을 떠날 때마다 늘 장안에 머물러야 했기에 유방과의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그런데 여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 것은 척 부인이 유방의 총애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기 위해 압력을 넣었다는 점이다.

태자를 교체하려는 고조와 반대하는 중신들
평소 늘 자기주장을 그대로 관철해왔던 고조가 조정에서 태자 교체문제를 거론하자 뜻밖에도 거의 모든 대신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왜냐하면, 유영이 태자로 책봉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태자의 행실에 큰 잘못이 없는데다가 갑자기 특별한 명분도 없이 태자를 폐위(廢位)하면 황실의 위엄이 떨어지는 동시에 민심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 어사대부 주창(周昌)의 반대
태자 교체 문제에 대해 소신에 따라 강력하게 고조의 뜻에 반대한 인물 중 어사대부(御史大夫) 주창(周昌)이 있었다. 그는 평소 성품이 워낙 강직해 설사 황제라 할지라도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 힘써 간쟁했기 때문에 거만한 유방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태자 폐위 문제에 반대하며 주창이 크게 화가 난 표정으로 고조에게 간언하자 고조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주창은 “신의 입으로는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신은 그, 그,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시려 해도 신은 그, 그 조서를 받들 수가 없습니다”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말을 더듬을 정도로 정색하며 반대하는 주창의 모습을 본 고조는 그냥 크게 웃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후가 몰래 이 대화를 엿듣다가 조회가 끝나고서 주창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치사(致謝)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태자는 아마 폐위되었을 것이오.”

한편, 고조는 태자 교체에 실패하게 되면 자신의 사후 조왕의 생명을 온전히 부지하지 못할까 우려했다. 그러자 황제의 인장인 부새(符璽)를 담당하는 어사인 조요(趙堯)가 조왕을 위해 여후와 태자, 신하들이 존경하는 인물을 조나라의 상국(相國)으로 삼도록 건의했다. 고조가 누가 그 적임인지 묻자 조요는 어사대부 주창을 천거했다. 이에 고조는 주창을 조나라 상국(相國)으로 삼아 만일의 경우 조왕을 보호하게 했다. 또 주창을 천거한 조요를 대신 어사대부에 임명했다. 조요는 나중에 이 일 때문에 여후의 공격을 받았다.

(2) 숙손통(叔孫通)의 간언
고조가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후 병이 더욱 심해졌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고조는 살아생전에 태자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이번에는 고조의 결심이 워낙 굳어 평소 잘 따르던 장량(張良)의 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장량은 병을 핑계를 대면서 업무를 보지 않으며 자신의 불만을 표현했다.

이때 서한 초기 의례(儀禮)를 정리한 유학자 출신의 숙손통이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옛날에 진헌공(晉獻公)은 총애하던 여희(驪姬) 때문에 세자(世子)를 폐한 후 여희 소생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웠습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나라는 큰 혼란을 겪었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진시황(秦始皇)은 일찍이 부소(扶蘇)를 태자로 확정 짓지 않은 까닭에 간신 조고(趙高)가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앞세워 마침내 제사가 끊어졌습니다. 이는 폐하께서도 직접 보신 일입니다. 지금 태자가 어질고 효성스러운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며 여후와 폐하께서는 고생을 함께하셨는데 어찌 이를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만약 반드시 적자(嫡子)를 폐하고 서자(庶子)를 세우고자 하신다면 원컨대 신을 먼저 죽여주시기 바랍니다.”
숙손통이 전례(前例)를 거론하며 목숨을 걸고 강력하게 간언하자 궁색해진 고조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됐소이다. 이제 더 이상은 말하지 마시오. 내가 잠시 희언(戱言)을 했을 뿐이오.”
하지만 숙손통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태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한번 흔들리면 천하가 진동합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천하의 근본을 가지고 희언을 하십니까?”
당시 이처럼 태자 폐위에 반대하는 신하들이 많았고 그들의 반대하는 명분이 뚜렷했기 때문에 고조로서도 더는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태자 교체 문제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절조를 지키며 유방의 부름을 한사코 거절하던 상산사호가 태자를 따랐다. 평소 상산사호를 존경하던 유방은 이 모습을 보며 태자를 폐위하려던 생각을 바꾼다. 사실 이는 상산사호를 이용해 태자를 지키려던 장량의 계책이었다.ⓒ 삽화 권미영
고조의 분노와 위험에 처한 번쾌(樊噲)
지금 남아 있는 사료 중에 이 시기의 치열했던 후계자 다툼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고조의 분노를 산 번쾌(樊噲)가 죽을 뻔한 일이다. 번쾌는 원래 고조 유방의 동서이자 여후의 동생인 여수(呂嬃)의 남편이다.

고조 말년에 병이 심할 때 어떤 사람이 번쾌를 미워해 다음과 같이 고변했다. “번쾌가 여 씨들과 결탁해 사당(私黨)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황상께서 안가(晏駕 군왕의 죽음을 뜻한다)하시면 군사를 일으켜 조왕(趙王)의 친속들을 죽인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태자를 교체하는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던 고조가 이 말을 듣자 크게 노해 진평(陳平)에게 강후(絳侯) 주발(周勃)을 부르게 한 뒤 병상에서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진평은 속히 수레를 달려 주발과 함께 번쾌의 군영에 가서 주발로 하여금 번쾌를 대신해 군사를 거느리게 하라. 군영에 도착하는 즉시 번쾌의 머리를 베도록 하라.”

조서를 받든 두 사람이 상의해보니 번쾌는 황제의 오랜 친구이자 친인척으로 친하면서 귀한 존재이니 만약 그를 잘못 건드릴 경우 나중에 어떤 후환이 생길지 몰랐다. 지금은 황제가 화가 나서 저렇게 말하지만 언제 또 마음이 바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꾀 많은 진평이 아이디어를 냈다. 일단 번쾌를 체포해 도성에 끌고 간 후 고조에게 직접 처리하게 하도록 했다. 명령을 집행하는 시간도 벌고 번쾌를 죽였다는 책임도 미룰 수 있는 방법이었다. 진평은 곧장 번쾌의 군영으로 달려가 번쾌를 포박한 후 주발로 하여금 대신 군사들을 거느리게 하고는 번쾌를 압송했다. 그런데 진평이 장안으로 돌아오던 중 고조의 붕어소식이 들렸다.

진평은 번쾌의 아내인 여수가 혹시라도 자신을 참소(讒訴)할까 두려워 미리 말을 달려 번쾌를 압송하는 수레보다 먼저 궁궐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남들의 눈에 띠도록 아주 슬프게 곡을 했다. 그러면서 여후를 찾아뵙고 자신이 궁궐 내부에 머물며 숙위(宿衛)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여후가 이를 허락했다. 나중에 번쾌의 소식을 들은 여수가 여후에게 진평을 참소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번쾌는 장안에 도착한 즉시 사면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태자를 위한 장량의 계책
비록 대신들의 반대로 태자 폐위를 막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함을 느낀 여후는 고민 끝에 고조 유방의 책사인 유후(留侯) 장량(張良)을 떠올렸다. 여후는 비밀리에 오빠인 여석지를 보내 협박 반 애원 반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자 장량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생각해보니 천하에는 황상(皇上)이 마음대로 불러올 수 없었던 사람이 넷이 있습니다. 이들은 연로(年老)한데 모두들 황상이 자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긴다고 여기는 까닭에 상산(商山)에 은거해 절조를 지키며 한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상께서는 이들을 존경하십니다. 지금 금옥(金玉)과 비단을 아끼지 않고 태자에게 직접 편지를 쓰게 해 공손한 말을 하며 사람을 시켜 편안한 수레를 보내 간곡히 청하신다면 그들이 의당 올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귀빈으로 대우하고 수시로 태자를 따라 조회에 참석하게 하여 황상께서 보게 하시면 반드시 기이하게 여겨 연유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황상께서 이들 4명이 현자(賢者)임을 알게 되어 태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에 여후는 장량의 충고에 따라 사람을 보내 공손한 말과 후한 예물로 이들 4인을 맞아왔다. 여기서 장량이 말한 4명의 노인을 상산사호(商山四皓)라 칭하는데 바로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각리(角里)선생이 그들이다. 이들은 황후와 태자가 직접 나서 공손하게 예를 갖출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후하게 대접하자 기꺼이 태자부(太子府)로 들어왔다.

상산사호를 보고 마음을 바꾼 고조
겉으로는 비록 신하들의 반대에 따르는 척 했지만 고조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태자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정에서 연회가 열려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태자가 황제를 모시는데 그 뒤를 상산사호가 따랐다. 이들은 모두 80이 넘어 수염과 눈썹까지 모두 희었고 아주 위엄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인물들이 궁금해진 고조가 이들이 누군지 묻자 상산사호가 앞으로 나서며 각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이들이 상산사호임을 알게 된 고조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내가 공들을 찾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내가 부를 때는 피해서 달아나더니만 지금은 어찌하여 내 아이를 따르는가?”

상산사호가 입을 모아 대답했다. “폐하께서 선비를 업신여기고 욕을 잘하시는 까닭에 신들은 의리상 치욕을 당할 수 없다는 두려운 마음에 숨은 것입니다. 하지만 신들이 듣자하니 태자가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선비를 아끼고 사랑하기에 천하에 태자를 위해 죽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오게 된 것입니다.”

고조가 감탄하면서 “번거롭겠지만 공들이 끝까지 태자를 잘 보살펴주기 바라오.”라고 당부했다. 상산사호가 축수(祝壽)를 마치고 물러가자 고조는 곧 척 부인을 불러 말했다. “짐은 끝까지 태자를 바꾸고자 했으나 저들 4인의 보필로 태자의 우익(羽翼)이 이미 만들어졌으니 이젠 태자를 바꾸기가 어렵겠소. 여후는 진정 그대의 주인이오.”

흐느껴 우는 척부인을 뒤로 하고 고조가 자리를 뜨자 술자리가 끝났다. 결국 상산사호를 이용한 장량의 계책이 고조의 고집을 꺾고 태자를 지켰다.
 
ⓒ 삽화 권미영
고조의 죽음과 여후의 음모
고조 12년(기원전 195년) 4월 25일 고조가 장락궁(長樂宮)에서 붕어(崩御)했다. 하지만 여후는 4일이 지나도록 발상(發喪)하지 않았다. 본래 기라성같이 쟁쟁한 고조의 명신(名臣)들이 어린 황제와 자신을 무시할까 근심한 여후는 심복들과 더불어 이들을 아예 몰살시킬 계획을 꾸몄다.

여후는 심이기(審食其 여 씨 집안의 집사 출신으로 여치의 정부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최측근 인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장(諸將)들이 전에는 황제와 같은 평민이었는데 지금은 북면(北面)하여 신하가 되었으니 이들은 항상 불만을 품고 있소. 그런데 지금 어린 황제를 섬기게 되었으니 그들을 멸족(滅族)하지 않으면 천하가 어지럽게 될 것이오.”

어떤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는 장군 역상(酈商)에게 알려주자 역상이 심이기를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내가 듣건대 황제께서 이미 붕어하신지 4일이 지나도록 발상을 하지 않고 제장들을 죽이려 한다는데 그리하면 천하가 위태로워질 것이오. 지금 진평과 관영(灌嬰)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형양을 수비하고 있고 번쾌와 주발이 20만 군사를 이끌고 연(燕)과 대(代) 땅을 평정했소. 이들이 황제께서 붕어하여 제장들이 모두 주살(誅殺)당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반드시 군사를 연합해 관중(關中)을 칠 것이오. 대신들이 안에서 모반하고 제후들이 밖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 될 것이오.”

심이기가 급히 궁에 들어가 여후에게 이 말을 전하자 여후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4월 28일 드디어 발상하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 사례에서 보다시피 여후는 웬만한 남자보다도 성격이 강하고 모질었다. 특히 자신의 적을 제거하는 데는 추호의 자비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많은 대신들이 자연스레 여후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후의 잔혹한 복수
무사히 장례를 치르고 아들인 태자가 황제로 즉위하자 여후는 곧 태후(太后)가 되었다. 여태후는 고조 살아생전에 자신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던 척 부인과 조왕 여의를 몹시 미워했다. 이들에 대한 질투심과 복수심에 불탄 여후는 우선 척 부인을 궁궐 내에 있는 영항(永巷)에 감금한 후 조왕을 불러오게 했다. 자식을 먼저 죽여 척 부인에게 복수하기 위한 잔인한 계략이었다.

하지만 여태후의 사자가 세 번이나 조나라에 찾아갔으나 조왕을 소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고조가 생전에 조나라 상국으로 임명한 주창(周昌)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다시피 주창은 일찍이 태자 폐위 문제에 반대해 고조의 뜻을 꺽은 적이 있다. 때문에 천하의 여치도 주창에 대해서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주창은 여후가 보낸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황제(高皇帝 고조)께서 내게 조왕을 맡기셨는데 조왕은 아직 나이가 어립니다. 듣자하니 태후께서 척 부인을 매우 미워하여 조왕을 불러 주살하려 하신다니 나는 감히 조왕을 보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조왕은 병이 들어 조칙을 받들 수 없소이다.”

그러나 호락호락 물러설 여태후가 아니었다. 강직하지만 고지식한 인물인 주창은 여치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여태후는 방법을 바꿔 우선 주창을 장안으로 소환했다. 주창으로서는 신하된 도리로 군주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장안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주창이 장안에 도달하자 태후는 다시 사람을 보내 조왕을 불러들였다. 자신을 지켜주던 버팀목이 사라진 나이 어린 조왕은 별 수 없이 장안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조왕이 장안에 도착하기도 전에 뜻밖에도 황제가 직접 동생을 마중 나왔다. 평소 성품이 인자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던 혜제는 모친인 태후의 분노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동생을 살리기 위해 직접 궁을 나서 패상(覇上)에까지 나와 조왕을 맞이한 후 함께 궁궐로 돌아왔다. 이후 혜제는 조왕과 함께 기거하며 음식도 함께 나눠먹었다. 때문에 호시탐탐 조왕의 목숨을 노리던 여태후도 손 쓸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가 언제나 동생과 함께 할 순 없었다.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12월 혜제가 새벽에 사냥을 나섰다. 당시 조왕은 12살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없었다. 조왕이 혼자 있다는 말을 들은 태후가 사람을 시켜 조왕에게 독주를 먹였다. 혜제가 사냥에서 돌아와 보니 동생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분이 가시지 않은 태후는 척 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두 눈을 뽑았으며 귀를 태워 벙어리로 만들고는 돼지우리에 집어놓고 ‘사람돼지(人彘)’라고 부르게 했다. 며칠 후 혜제를 불러 이 모습을 보여주자 혜제는 처음에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척 부인이라고 알려주자 깜짝 놀란 혜제는 울음을 터뜨렸다. 전에 고조의 총애를 받으며 아름답기 그지없었던 척 부인이 짐승만도 못한 처참한 몰골로 변한 것을 본 그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병이 생긴 혜제는 그 후 약 1년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당시 혜제의 나이 겨우 17세였다.

혜제는 나중에 태후에게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저는 태후의 아들로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후 혜제는 하루 종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조정의 모든 권력은 태후가 장악했다.

고조의 후궁들에 대한 여태후의 이런 잔혹한 복수에 대해 『사기』 「외척세가(外戚世家)」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후가 만년에 이르러 미색이 쇠하고 총애를 잃자 척 부인이 총애를 입었다. 척 부인의 아들 유여의가 수차례에 걸쳐 거의 태자를 대신할 뻔 했다. 고조가 붕어한 후 여후는 척 씨를 멸하고 조왕 유여의를 주살했다. 고조의 후궁 중 유독 고조의 총애를 입지 못하고 소원했던 사람만이 근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 삽화 권미영
여태후의 마수와 위험에 처한 유비(劉肥)
혜제 2년(기원전 193년) 고조의 큰아들이자 혜제의 이복형인 제왕(齊王) 유비(劉肥)가 도성에 입조(入朝)했다. 태후를 모시고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는데 황제가 민간의 예절을 적용해 형인 유비에게 상석(上席)을 양보했다. 당시에는 황실의 법도가 엄하지 않았고 가까운 친척들이 모이는 경우 일반 백성들처럼 연장자를 우선하는 것이 허물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약한 아들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심이 유난히 강했던 여태후는 이 모습을 보고 유비를 죽이려 했다. 혹시라도 혜제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가장 유력한 다음 황제 후보가 제왕 유비였기 때문이다.

태후는 미리 독주(毒酒)를 따라놓고 제왕에게 축수(祝壽)를 내린 후 술을 마시게 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유비가 일어나 술잔을 들어 마시려하자 태후의 불순한 의도를 눈치 챈 혜제가 형과 함께 일어나며 술잔을 빼앗았다. 깜짝 놀란 태후가 급히 일어나 어쩔 수 없이 술잔을 뒤엎어버렸다.

제왕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술에 취한 척 하면서 몰래 연회자리를 빠져나왔다. 나중에야 자신이 마시려던 술이 독주임을 알게 된 제왕은 혹여 자신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까 두려워졌다. 이때 제나라의 내사(內史)인 사(士)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태후께는 오직 황상과 노원공주만 있습니다. 현재 대왕께서는 70여 성을 갖고 계시지만 노원공주는 몇 개의 성만을 식읍(食邑)으로 갖고 있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군(郡) 하나를 떼어 태후에게 바치고 공주의 식읍으로 삼게 하신다면 태후도 반드시 기뻐하실 겁니다.”

이에 제왕은 성양군(城陽郡)을 통째로 들어 태후에게 바치고 공주를 높여 왕태후로 존칭했다. 사실 촌수로 따지자면 노원공주가 손아래 누이에 해당하지만 태후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이렇게 아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연 태후는 이 제안을 매우 기뻐하며 순순히 받아들였다. 덕분에 제왕은 무사히 연회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승상이 된 조참과 무위(無爲)의 다스림
혜제 2년(기원전 193년) 한 나라의 개국공신이자 오랫동안 승상을 역임했던 소하(蕭何)가 병이 들었다. 혜제가 직접 그를 문병하며 다음 승상을 누구로 정할지 묻자 소하가 대답했다.
“신하를 아는 것은 군주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평소 소하와 조참의 사이가 나쁜 것을 알고 있던 혜제가 “조참(曹參)은 어떻소?”라고 묻자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황상께서 그를 찾아내셨으니 신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소하는 얼마 후 사망했다.

원래 소하와 조참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수많은 신료들 중에서 죽기 전에 소하가 추천한 인물은 조참이 유일했다. 이후 새로 승상이 된 조참은 이전에 고조 시대에 소하가 정한 것들을 하나도 바꾸지 않았으며 법령과 제도 역시 모두 예전 그대로 사용했다.

또 관리를 선발할 때는 글재주나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보다는 질박하고 어눌하지만 중후한 사람을 뽑았다. 반면 언행과 일처리가 각박하거나 헛된 명성만 구하는 사람은 곧바로 관직에서 쫓아냈다. 그러면서 관리들이나 손님들이 할 말이 있어 자신을 찾아오면 늘 진한 술을 대접하면서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또한 남의 작은 허물을 보면 모두 덮어주고 문제로 삼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승상부(丞相府)에서는 전과는 달리 별로 할 일이 없어졌다.

한편, 혜제는 조참의 이런 처사가 자신이 어리다고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조참의 아들인 중대부 조줄(曹窋)을 조용히 불러 부친에게 연유를 물어보게 했다.

조줄이 집에 돌아와 조참에게 이런 말을 꺼내자 조참은 다짜고짜 채찍을 들어 200대를 때렸다. 그러고는 “이는 네가 말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조참이 급히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조현하자 혜제는 이는 자신이 시킨 일이라며 아들을 심하게 때린 조참의 행동을 나무랐다. 그러자 조참이 물었다.

“폐하께서 스스로 살피시기에 성대한 무력 면에서 고조 황제와 비교하시면 어떻습니까?”
“내 감히 어찌 선제(先帝)를 바라볼 수 있겠소.”
조참이 다시 물었다.
“그럼 폐하께서 보시기에 신과 소하 중 누가 더 현명합니까?”
“아마도 그대가 소하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오.”

조참이 말했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고조 황제와 소하가 천하를 평정하면서 법령을 밝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폐하께서 팔짱을 끼고 편안히 쉬시고 저 조참 등도 맡은 바 직분만을 지키며 그대로 준수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혜제가 감탄하며 말했다. “훌륭한 말씀이오.”
이렇게 조참이 승상이 된 지 3년이 지나자 백성들이 모두 그의 공덕을 칭송했다.
 
▲ 여태후는 아들 효혜제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시중 장벽강은 좌승상 진평에게 황제에게 장성한 아들이 없으니 태후가 대신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며 이를 해결할 계책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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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혜제의 죽음
효제 4년(기원전 191년) 혜제가 20살이 되자 관례(冠禮)를 치르고 황후(皇后)를 세웠다. 자식에 대한 집착과 권력욕이 남달랐던 여태후는 노원공주의 딸인 장(張) 씨를 황후로 삼았다. 말하자면 자신의 아들과 외손녀를 혼인시킨 것이다.

효제 5년(기원전 190년) 조참이 사망했다. 사마천은 조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상국(相國) 조참은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 회음후 한신과 같았다. 한신이 패망한 후 열후(列侯) 가운데 성공을 거둔 사람이 제법 있었지만 오직 조참만이 명성을 떨쳤다. 조참은 한나라의 상국이 된 후 청정무위(淸淨無爲)의 치도(治道)에 부합하고자 했다. 백성들이 모두 진나라의 잔혹한 통치를 받은 직후라 조참이 그들에게 휴식을 주며 무위(無爲)로 다스리자 천하가 입을 모아 그의 공덕을 칭송했다.”

효제 6년(기원전 189년) 왕릉(王陵)을 우승상, 진평(陳平)을 좌승상으로 삼았다. 제왕 유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유양(劉襄)이 뒤를 이었다. 이 해에 장량(張良)이 사망했다.

혜제 7년(기원전 188년) 8월 모친에게 실망해 주색에 빠져 지내던 효혜제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애초 여태후는 효제와 황후 사이에 후사가 없자 다른 사람이 낳은 자식을 데려다 기르면서 그 어미를 죽이고 태자로 삼게 했다.

하지만 태후는 발상기간임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여태후의 속셈을 몰라 불안해하는데 시중(侍中) 장벽강(張辟疆 장량의 아들)이 좌승상 진평(陳平)에게 태후가 눈물을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는 황제에게 장성한 아들이 없으니 태후가 대신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승상께서 여태(呂台 여택의 아들), 여산(呂産 여택의 아들), 여록(呂祿 여석지의 아들)을 장군으로 제수해 수도방위를 책임지는 남북군(南北軍)을 통솔하게 하고 아울러 여 씨 일족을 입궁시켜 조정 일을 보게 한다면 태후가 안심하여 대신들이 화를 면할 수 있을 겁니다.”

승상 진평이 비록 썩 내키진 않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어 장벽강의 계책을 따르자 태후가 기뻐하며 비로소 울기 시작했다. 여 씨 일족이 조정 권력을 장악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9월에 혜제를 안장하고 데려다 기른 아이를 황제(少帝 劉恭)로 삼았다.

하지만 실질적인 조정의 명령은 모두 여태후에게서 나왔다.

여태후의 권력 강화책-여 씨를 왕으로
여태후는 단순히 어린 황제를 도와 수렴첨정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황제의 대권을 모두 행사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그녀의 권력욕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여태후는 자신의 사후까지 권력을 유지하고 조정 대신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친정인 여 씨 일족을 끌어들여 왕(王)으로 삼고자 했다. 그녀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하나뿐인 아들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유 씨 중에는 더 이상 자신이 믿을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어리거나 나약할 경우 외척(外戚)이 권력을 장악하는 황제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고후(高后 여태후) 원년인 기원전 187년, 여태후가 우승상인 왕릉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자 왕릉은 다음과 같이 반대했다.

“고제(高帝)께서는 일찍이 백마(白馬)를 잡아 대신들과 맹세하셨습니다. ‘앞으로 유 씨가 아니면서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여 씨를 왕으로 세우신다면 이 약속을 어기는 것입니다.”

심기가 불쾌해진 태후가 이번에는 좌승상 진평(陳平)과 태위(太尉) 주발(周勃)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이들은 태후의 뜻에 영합해 태후가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고 있으니 자신의 일족을 왕으로 책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태후가 기뻐하며 조회를 마치자 왕릉이 진평과 주발을 나무라면서 말했다.

“처음 고제와 피를 바르며 맹약할 때 그대들은 그곳에 없었는가? 지금 고제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태후가 여 씨의 자제를 왕으로 삼고자 하는데 그대들은 태후의 사욕(私慾)을 용인하여 그 뜻에 영합해 맹약을 위배하려 하는가? 그렇게 하고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계신 고제를 뵐 수 있겠는가?”

그러자 진평과 주발이 대답했다. “지금 조정에서 직접 나서 질책하고 간언하는 것은 우리가 당신만 못합니다. 하지만 사직을 보전하고 유 씨의 후손을 안정시키는 일은 당신이 우리만 못할 겁니다.” 이 말에 왕릉도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
 
▲ 조왕 유우가 굶어죽다 후궁을 총애하던 유우에게 화가 난 여 왕후가 태후를 찾아가 유우가 여씨를 몰살시킬 것이라고 모함한다. 여태후는 즉시 유우를 장안으로 소환해 관저에 감금시킨 후, 아랫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지 못하게 하여 굶겨 죽였다. 조왕이 죽자, 여태후는 곧 그의 왕위를 박탈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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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후의 독재
같은 해 11월 여태후는 왕릉의 승상 직책을 빼앗고 대신 실권 없는 명예직인 태부(太傅)에 임명했다. 태후가 자신을 기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릉은 실망하여 병을 핑계대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여태후는 새로 진평을 우승상에 임명하고 자신의 심복인 심이기(審食其)를 좌승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심이기는 실제 승상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줄곧 여태후를 시종하는 일을 맡았다. 심이기가 태후의 총애를 받으며 나라 일을 좌우지하자 많은 대신들이 일을 처리할 때 그를 통해 결정을 받았다.

여태후는 여 씨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이미 사망한 자신의 부친 여공(呂公)을 선왕(宣王)으로 추증하고 큰오빠인 여택(呂澤)을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했다.

또한 뛰어난 정치 감각을 지닌 여태후는 반대 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먼저 유 씨인 혜제의 아들들(실제로는 혜제의 후사가 아니다)을 왕으로 삼은 후 여택의 큰아들 여태(呂台)를 여왕(呂王)으로 삼았다. 또 건성후(建成侯)로 있던 둘째오빠 여석지가 죽자 작은 아들인 여록(呂祿)에게 작위를 계승하게 했다. 이로써 서한 역사상 최초의 여 씨 왕이 등장했다.

고후 2년(기원전 186년) 여왕에 임명된지 얼마 되지 않아 여태가 사망하자 아들인 여가(呂嘉)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이 해에 제왕 유양의 동생인 유장(劉章)을 주허후(朱虛侯)로 삼고 장안으로 불러 숙위하게 하고 여록(呂祿)의 딸을 시집보냈다.

고후 4년(기원전 184년) 여태후의 여동생 여수(呂嬃)를 후(侯)에 봉하고 여수의 아들 여타(呂他) 등 다른 여 씨들을 후(侯)에 봉했다. 중국 역사상 여인의 몸으로 후(侯)에 봉해진 것은 여수가 처음이다. 당시 여수의 전횡이 아주 심해 대신들이 모두 그녀를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여태후 황제를 교체하다
원래 혜제의 정비(正妃)인 장(張) 황후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이를 걱정한 여태후가 황후에게 거짓으로 임신한 척 시키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데려다 길러 태자로 삼았다. 아울러 증거를 없애기 위해 아이의 생모를 죽여 버렸다. 혜제가 사망한 후 태자가 황위를 이었는데 나중에 어린 황제가 자신의 출생비밀을 알고는 장 황후를 원망하며 말했다.

“황후는 어찌하여 내 어머니를 죽이고 나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는가? 내가 지금은 아직 어리지만 성장하면 반드시 이를 바로 잡을 것이다.”

태후가 이 말을 듣고는 황제가 변란(變亂)을 일으킬까 두려워 궁궐 내부의 감옥에 해당하는 영항(永巷)에 몰래 감금했다. 그리고 외부에는 황제가 중병(重病)에 걸렸다고 하면서 대신들이 황제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아울러 지금 황제가 병이 깊고 정신이 혼미해 제위(帝位)를 잇고 종묘 제사를 받들 수 없다는 구실로 멋대로 폐위시켰다. 여태후는 또 후환을 없애기 위해 어린 황제를 몰래 죽였다.

그리고는 또 다른 혜제의 아들인 항산왕(恒山王) 유의(劉義)를 세워 황제로 삼았다. 물론 실권은 여전히 여태후에게 있었다. 이 해에 군사를 주관하는 태위(太尉)직을 신설해 강후 주발을 임명했다. 고후 6년 여왕인 여가가 교만방자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여태(呂台)의 동생인 여산(呂産 여태후의 조카)을 여왕으로 삼았다.

잇따른 조왕(趙王)의 비극 1-유우(劉友)가 굶어죽다
고후 7년(기원전 181년) 정월 조왕(趙王)으로 있던 유우(劉友 유방의 여섯째 아들)가 여 씨 왕후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후궁을 총애하자 여 왕후가 태후를 찾아와 “조왕이 태후가 돌아가신 후에는 자신이 반드시 여 씨를 몰살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모함했다. 화가 난 여태후가 조왕을 장안으로 소환해 관저에 감금시킨 후 아랫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지 못하게 하여 굶겨 죽였다.

이때 유우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여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여 씨 일족이 전권을 휘두르니 유 씨가 위태롭구나.
왕후를 협박하고 강제로 여 씨의 딸을 왕비로 주었네.
왕비가 질투하여 나를 모함하니
참언하는 여자가 나라를 어지럽게 하건만 황상께선 깨닫지 못하시네.
내게는 충신이 없단 말인가? 어찌하여 나라를 잃어버렸는가?
황야에서 자결하나니 푸른 하늘이 시비를 가려주리라.
아아! 후회막급이로다. 차라리 진작 자결할 것을.
왕이 되어 굶어죽다니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기리요?
여 씨가 천리(天理)를 끊었으니 하늘이 이 원수를 갚아주길 바라노라.”

조왕이 사망하자 여태후는 그의 왕위를 박탈해 평민의 예식으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 불제를 지내고 돌아오던 여태후에게 검은 개처럼 생긴 괴물이 달려들어 태후의 겨드랑이를 툭 치고 사라진 이후 태후는 겨드랑이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고, 갈수록 병세가 위독해졌다. 자신이 죽은 후 후환이 두려워진 태후는 조왕 여록에게 북군을, 여왕 여산에게 남군을 통솔하라고 지시한다. 
ⓒ 삽화 권미영
잇따른 조왕의 비극 2-유회(劉恢)의 자살
이 해에 일식이 발생하여 대낮에도 날이 어둡자 태후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기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여태후는 양왕(梁王)으로 있던 유회(劉恢 고조의 다섯째 아들)를 옮겨 새로 조왕으로 삼고 여왕(呂王)인 여산을 대신 양왕으로 삼았다. 조왕이 된 유회는 봉국을 옮겨 조왕이 되긴 했지만 태후에 의해 강제로 여산(呂産)의 딸을 왕후로 맞아야 했다.

그런데 여(呂) 왕후를 수행한 관원들은 모두 여 씨 일족으로 왕국의 전권을 행사하면서 조왕을 감시했다. 또 유회가 총애하던 후궁이 있었으나 왕후가 몰래 독살해버렸다. 그러자 조왕 유회 역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지어 악공(樂工)에게 부르게 했다. 나중에는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다 목숨을 끊어버렸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여태후는 조왕이 한낱 여자 문제 때문에 종묘제사에 대한 소중한 의무를 저버렸다며 후대(後代)의 왕위계승권을 취소시켜 버렸다. 즉, 원래 왕이 죽으면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그 아들을 세워 왕위를 이어받게 하는데 이마저도 취소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척 부인 소생의 유여의, 유우, 유회 등 고조 유방의 친아들 3명이 공교롭게도 조왕으로 있으면서 불행한 죽음을 당했다.

이 해 가을 여태후가 척박한 변방에 위치한 대왕(代王) 유항(劉恒 고조의 넷째 아들)에게 사자를 보내 조왕(趙王)에 봉하려 했으나 대왕이 이를 사양했다.

세 명의 여 씨가 왕이 되다
이처럼 고조의 아들들이 모두 조왕(趙王)이 되길 사양하자 여태후는 신하들의 간청에 못이기는 척하면서 여록(呂祿 둘째오빠인 여석지의 아들)을 새로 조왕에 봉했다.
같은 해 9월 연왕(燕王)으로 있던 유건(劉建 고조의 막내아들)이 사망하자 태후는 사람을 보내 그의 후손을 모두 죽이고 봉국을 취소시켜 버렸다. 고후 8년(기원전 180년) 여태(呂台)의 아들 여통(呂通)을 연왕(燕王)으로 삼고 여통의 동생 여장(呂莊)을 동평후(東平侯)에 봉했다.
이로써 여 씨 일족은 여왕(呂王) 여산(呂産), 조왕 여록(呂祿), 연왕(燕王) 여통(呂通) 등 3명의 왕을 배출했다.

여태후의 최후
고후 8년(기원전 180년) 3월 여태후가 재앙을 없애기 위한 제례(祭禮)의 일종인 불제(祓除)를 지내고 돌아오던 길에 검은 개처럼 생긴 괴물을 보았다. 그 괴물은 태후의 겨드랑이를 툭 치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점을 쳐보니 억울하게 독살당한 조왕 유여의(劉如意)가 귀신이 되어 재앙을 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태후는 겨드랑이에 통증이 오는 병이 생겼다.

7월 중순 태후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후환이 두려워진 태후는 조왕 여록을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해 북군(北軍)을 통솔하게 하고 여왕 여산(呂産)에게는 남군(南軍)을 통솔하게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고제(高帝)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여러 대신들과 유 씨가 아니면서 왕이 되는 자가 있으면 천하가 함께 그를 토벌한다고 맹약했었다. 지금 여 씨가 왕이 되었으나 대신들이 마음속으로 불평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죽으면 황제는 나이가 어리니 아마 대신들이 난을 일으킬 것이다. 너희들은 반드시 병권을 장악해 황궁을 지키되 나의 장례는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압당하지 말아야 한다.”

이 당시 남군과 북군은 각각 황궁인 미앙궁(未央宮)과 도성인 장안성 수비를 전담하는 병력이었다. 남군은 미앙궁을 비롯한 장안성 내 궁궐에 대한 수비를 전담하는 정예 병력인 위사(衛士)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남군이라고 부른 까닭은 위사들이 장안성의 남쪽에 위치한 미앙궁에 주둔했기 때문이다. 남군의 총책임자는 위위(衛尉)이다.

한편 북군은 도성인 장안성의 수비와 치안을 전담했다. 북군이라고 한 이유는 군대가 성 북쪽에 주둔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총책임자인 중위(中尉)의 지휘를 받아 장안성을 지켰고 유사시에는 황제의 명령을 좇아 전투에 참가했다.
즉, 여태후는 궁궐과 수도 방위를 책임진 남군과 북군의 총책임자로 조카인 여록과 여산을 임명해 혹 있을지도 모를 반란을 막고자 한 것이다.

신사(辛巳)일 여태후가 서거하자 유조(遺詔)에 따라 제후왕에게는 각각 황금 1000근을 하사하고 다른 신하들도 품계에 따라 금을 하사했으며 대 사면령을 내렸다. 또 여왕 여산을 상국(相國)으로 삼고 여록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여태후가 안장된 후에는 좌승상 심이기가 황제를 보좌하는 태부(太傅)로 임명되었다.
 
▲ 제왕 유양의 황제 복위 전략 
여태후 사망으로 유양의 동생 주허후 유장은 형인 유양에게 황제에 오르기를 권유한다. 동생의 말을 들은 유양은 황제등위를 위한 전략을 짜고 군사를 일으킨다. 평소 여씨의 전횡에 반감을 가진 관영마저 제왕 유양과 그 외의 제후들에게 여 씨의 토벌을 제안한다.ⓒ 삽화 권미영
유장(劉章)의 활약과 제왕(齊王)의 봉기
여태후 사망 직후 대신들의 반란을 의식한 여 씨 일족이 권력을 전횡하며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군사들에 대한 영향력이 큰 백전노장 주발(周勃), 관영(灌嬰) 등이 두려워 머뭇거리고 있었다.

당시 고조의 큰아들인 유비(劉肥)의 둘째 아들이자 제왕(齊王) 유양(劉襄)의 동생인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이 장안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평소 담이 세고 기개가 뚜렷하여 여 씨 일족마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아내가 여록의 딸이었기 때문에 유장은 아내를 통해 여 씨 일족의 반란계획을 사전에 입수할 수 있었다.

그는 급히 형인 제왕 유양(劉襄)에게 사람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해 여 씨 일족을 주살하고 황제에 오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궁궐에 남아 다른 대신들과 안에서 호응하기로 했다.

동생의 비밀 연락을 받은 제왕 유양은 장인인 사균(駟鈞), 낭중령(郎中令) 축오(祝午), 중위(中尉) 위발(魏勃) 등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키고자 했다. 하지만 제나라 승상인 소평(召平)이 따르지 않았다. 당시 각 제후국의 승상은 보통 조정에서 왕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 파견한 인물이 많았다. 제왕이 사람을 보내 승상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눈치 챈 소평이 도리어 모반을 일으켜 왕궁을 포위해버렸다. 그러자 중위 위발(魏勃)이 거짓으로 제왕을 배반하고 승상을 돕는 척하면서 군사들을 빼앗아 승상부를 포위했다. 결국 소평이 자살한 후에야 제왕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었다.

한편, 유양은 제나라 군사들만으로는 힘이 부족하다고 여겨 제나라 동쪽에 있던 낭야왕 유택(劉澤)을 끌어들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유양은 축오를 유택에게 보내 마치 제나라를 들어 유택의 휘하에 들어갈 듯이 하면서 유택을 제나라로 초대했다. 유택이 이 말을 곧이 믿고 제왕에게 가자 제나라에서 유택을 억류시키고 군대를 빼앗았다. 유양은 두 나라의 군사를 총 동원해 서쪽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억류된 유택이 꾀를 내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대왕(大王)은 고황제의 적장손(嫡長孫)이니 응당 황제로 세워져야 하오. 하지만 지금 여러 대신들이 의심하면서 누구를 세울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소. 나 유택은 유 씨 중 가장 나이가 많소. 그러니 대왕이 나를 여기에 억류해 아무 일도 못하게 하는 것은 나를 장안으로 보내 후일을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유양은 이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겨 많은 수레를 준비해 유택을 장안으로 보냈다.

유택이 떠난 후 제왕 유양은 여러 제후국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하신 후 자제들을 왕으로 봉하셨다. 그러나 혜제께서 서거하자 태후가 정권을 잡고 모든 일에 여 씨 일족의 말을 들으며 제멋대로 황제를 폐하고 옹립시켰다. 또 계속해서 3명의 조왕(趙王)을 살해하고 양(梁), 조(趙), 연(燕)을 멸하여 여 씨 일족을 왕으로 삼았으며 제나라를 넷으로 분할했다. 지금 태후가 서거하고 황제는 나이가 어려 천하를 다스릴 수 없으니 마땅히 대신과 제후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여 씨 일족이 제멋대로 자신들의 관직을 높이고 병사를 모아 위세를 강화하며 열후와 충신들을 협박하고 조서를 거짓으로 전해 천하를 호령하니 종묘사직이 위태롭기 그지없다. 과인은 병사를 이끌고 도성에 들어가 부당하게 왕이 된 자들을 주살하고자 한다.”

머뭇거리는 여 씨들
제왕 유양이 여 씨를 제거하기 위해 거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상국(相國) 여산 등이 회의를 열었다. 조정에서는 초한전쟁 당시 항우를 추격해 죽인 적이 있는 관영(灌嬰)을 파견해 제왕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 하지만 평소 여 씨들의 전횡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관영은 군대가 형양(滎陽)에 이르자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머물면서 제왕과 다른 제후들에게 사신을 보내 서로 연합하여 여 씨가 반란을 일으키길 기다렸다가 함께 여 씨를 토벌하자고 제안했다. 제왕이 이 말을 듣고는 군대를 돌려 서쪽 경계지역으로 물러나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원래 여록(呂祿)과 여산(呂産)은 안으로는 군권을 쥔 주발과 기개가 뛰어난 유장 등을 두려워했고 밖으로는 제와 초나라 병사들을 두려워했다. 또 장군 관영이 여 씨를 배반할까 두려워 그를 출전시켜 제나라와 싸우게 한 후 혼란한 틈을 노려 관중에서 난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관영이 제나라와 밀약을 맺고 싸우지 않자 여록과 여산은 차일피일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각각 군사를 이끌고 남군과 북군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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