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작 창공 열전
환자에 대한 긍휼, 시대를 초월한 명의의 조건
우리 집에서는 간혹 딸아이가 체하면 아내가 소독한 바늘로 아이의 손가락 끝을 톡 떠준다. ‘아얏’ 하며 아이가 엄살을 부리고 바늘로 뜬 자리에 검은 피가 몇 방울 맺히면, 아이의 체기가 내려간다.
영화 ‘마더’를 보면 김혜자씨가 연기한 ‘엄마’는 ‘수지침’을 놓아 푼돈을 번다. 비록 불법 유사 의료행위지만 오랫동안 가깝게 지낸 동네 사람들은 ‘엄마’의 수지침 효과를 신뢰한다. 가벼운 병치레로 병원에 갈 형편도 안 되는데다, ‘엄마’의 솜씨가 좋고 비용도 저렴하니 동네 사람들은 몰래 소매를 걷고 바지도 내린다.
오랜 세월 침을 놓은 그녀는 비장의 침 자리를 알고 있다. 일종의 히든카드다. 허벅지 어떤 지점에 침을 놓으면 인간의 고뇌와 무거운 짐 덩어리 같은 고통, 안 좋은 기억이 모조리 잊힌다. ‘엄마’는 순식간에 두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살인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는 ‘엄마’는 영화 말미에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그 자리를 찾아 침을 놓은 뒤 관광버스 안에서 막춤을 춘다.
체하면 약국으로 달려가 소화제를 먹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약물로 치료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이러한 행위는 미신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들어오기 전 한의학이 있었다. 침과 뜸 탕약을 주로 쓴다. 권위 있는 한의사도 있지만, 이른바 ‘돌팔이’로 불리며 침을 놓는 사람도 있다. 가정에서 간단히 손가락을 바늘로 뜨는 것도 일종의 의술이라면 의술이다. 한의학은 오랜 세월을 우리와 함께했으니 그만큼 널리 퍼지는 건 당연하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지 않으면 불안한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고민과 고통의 기억을 잊게 해주는 ‘허벅지 침 자리’까지는 몰라도, 체했을 때 손가락 끝을 침으로 뜨면 효과가 있다는 그런 기억은 너도나도 있다. 이런 의술은 시대를 초월한다. 인간의 몸은 음식 등의 영향으로 겉모습이 변할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첨단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중학생 딸아이의 손가락이나 옛날 양귀비의 손가락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사소한 집안 처방에까지 영향력을 미친 한의학의 원류는 편작과 창공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명의
사마천은 ‘편작 창공 열전’을 다 쓰고 나서 이렇게 총평했다. ‘여자는 아름답든 못생겼든 궁궐 안에 있기만 하면 질투를 받고, 선비는 어질든 어리석든 조정에 들어가기만 하면 의심을 받는다. 그래서 편작은 뛰어난 의술 때문에 화를 입었고, 창공은 자취를 감추고 숨어 살았어도 형벌을 받은 것이다. 그는 제영이 조정에 글을 올려 사정을 아뢴 뒤에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노자도 ‘아름답고 좋은 것은 상서롭지 못한 그릇이다’고 했다. 이는 편작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창공 같은 사람도 이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악착같이 추구하는 사회에서 사마천은 노자의 말을 빌려 의사로서 신적인 경지에 오른 편작과 창공의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사마천은 역사학자이기에 편작과 창공의 의술보다는 그 의술을 통한 인생을 본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편작은 그의 재능을 시샘하는 이에 의해 암살되고, 창공 역시 형벌을 받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인간사는 질병의 역사이기도 하다. 질병과 치료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 편작과 창공은 이러한 인간사에 등장해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시기와 모함이라는 질병에 희생됐다고 볼 수 있다.
편작과 창공은 동양의학, 즉 한의학의 원류로서 존재한다. 그들이 집필한 책이나 시술방법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건 없지만 한의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황제내경’은 바로 이들의 의료방법을 집대성한 책이다. 한의학은 우리의 몸을 소우주로 보고, 인체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간주하며, 안색과 진맥으로 만병을 살핀다. 한의학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물 건너온 서양의학과 공존하며 전통을 이어왔다.
춘추전국시대의 전설적인 의사 편작과 창공은 현대의학과는 먼 거리에 있다. 그 먼 거리는 신비한 안개에 휩싸여있다. 자동차 보닛을 열 듯 환자의 몸을 열어 과학적으로 진단·처방하고, 수술하고 회복시키는 현대의학과 한의학은 기본 개념이 다르다. 유능한 의사는 인간의 몸을 굳이 열지 않아도 환자를 ‘척 보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안다. 이러한 경험이 자료로 축적되고, 그 경험을 공부한 의사들에 의한 환자 치료율이 높다면, 그래서 시대에 따라 변하는 질병에 대처할 수 있다면, 칼과 망치를 들고 환자의 몸을 열어 시술하는 외과수술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편작은 당대 외과수술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든 사람이다(편작 이전에 중국에도 외과수술 전문가인 유부라는 의사가 있었다).
죽은 태자를 살린다?
고대 중국 발해군 막읍에 진월인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마을 여관의 관리인으로 일하던 어느 날 장상군이라는 비범한 인물이 투숙했다. 장상군은 진월인이 비록 여관의 관리인으로 있지만, 보통 인물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봤다. 어느 날 장상군이 진월인에게, 비밀스럽게 전해오는 의술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자신은 늙어 쓸모없게 됐으니 전수해주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단, 다른 이에게 알려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진월인이 조건을 따르겠다고 다짐하자, 장상군은 품 안에서 약을 꺼내 진월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약을 땅에 떨어지지 않는 물에 타서 마신 뒤 30일이 지나면 반드시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오.”
‘땅에 떨어지지 않는 물’ 즉 새벽 이슬을 받아 약을 복용하면 사물을 훤하게 보는 능력을 얻는다는 얘기다. 사마천은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전해오는 의서를 모두 꺼내 진월인에게 주고 장상군은 홀연히 사라졌다. 아마도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다. 진월인은 장상군의 말대로 약을 먹은 지 30일이 지나자 담장 너머 저편에 숨어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러한 능력으로 사람을 보니, 오장 속 질병의 뿌리가 훤히 보였으므로 겉으로는 맥을 짚어보는 것으로 구실을 삼는 척만 했다. 그는 의원이 되어 제나라에 머물기도 하고 조나라에 머물기도 했는데, 조나라에 있을 때 편작으로 일컬어졌다.’
진월인에서 편작이라는 의사로 탄생하는 과정은 고대 전설과도 흡사하다. 이후 편작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의술을 펼치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는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알려진 괵나라에서의 일화다. 괵나라 태자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태자 교육을 담당하는 중서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작은 중서자를 통해 태자의 병세를 듣고, 아직 입관을 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다. 편작이 보기에 태자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이 태자를 살려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때 중서자가 중국 전설시대의 유명한 의사 유부 이야기를 한다. 유부는 편작과 더불어 중국 의술의 양대 산맥이다. 유부는 외과수술 전문이었던 반면, 편작은 사람 몸에 절대 칼을 대지 않았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중서자는 죽은 자를 살린다는 편작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옛날 유부라는 명의가 있었는데 병을 치료할 때 탕액, 예쇄, 참석, 교인, 안올, 독위를 쓰지 않고 옷을 풀어헤쳐 잠시 진찰해보는 것만으로 질병의 징후를 보았고, 오장에 있는 수혈의 모양에 따라 피부를 가르고 살을 열어 막힌 맥을 통하게 하고 끊어진 힘줄을 잇고, 첫수와 뇌수를 누르고, 고황과 횡격막을 바로하고, 장과 위를 깨끗이 씻어내고, 오장도 씻어 정기를 다스리고 신체를 바꾸어놓았다고 합니다. 선생의 의술이 이러하다면 태자를 살려낼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이 할 수 없으면서 태자를 살리려고 한다면 말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왕을 위협하는 의사
유부는 약을 쓰지 않고 침도 경락안마도 뜸도 뜨지 않고 오로지 환부를 열어 신장이면 신장, 심장이면 심장, 심지어 뇌도 깔끔하게 씻어내고 잘라내서 제자리에 같다 놓고 다시 봉합한다. 그러면 죽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난다는 것이다. 현대의학이다. 암에 걸리면 악성종양을 떼어내고, 회복시킨다. 맹장수술에서부터 간이식, 심장이식술까지 이어진다.
유부가 이미 고대 중국에서 외과의로서 이룬 경지다. 그런데 왜 이러한 ‘기술’이 전해지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바로 편작 때문이다. 중국 의술의 본류로서 편작과 그 계열의 의술을 펼친 무명 의사들의 인체와 질병에 대한 이론을 집대성한 책이 바로 한나라 때 편찬된 ‘황제내경’이다. 이 책은 오늘날 한의대 교재로 사용된다. 만약 중국인들이 유부의 이론을 집대성해 ‘황제외경’과 같은 외과서를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한의학은 그 위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서양의 의학은 과학이다. 자료를 모아 실험하고 그 결과를 공유해 약을 만들어 환자에게 처방한다. 그 모든 데이터가 쌓이고 쌓여 후대에 전해지고 발전한다. 새로운 질병이 출현하면 그 질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과거의 데이터에 기초해 분석하고 연구한다. 암 정복과 같은 대단한 연구결과를 발표하면, 당사자는 ‘천재’ 소리를 듣고 노벨상을 받는다.
반면 동양의 의학은 대단히 개인적이다. 물론 각종 의서를 통해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돼 있지만, 편작이라는 인물을 통해 알 수 있듯 개인의 능력에 따라 환자의 생명이 좌지우지된다. 편작 정도 되는 한의사가 우리나라에 10명만 있다면, 그리고 그 제자들이 활동한다면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은 세계 최고가 된다. 그런데 편작 이후에 창공 정도가 그 이름을 남긴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노벨상과는 비교가 안 되는 신비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편작의 대를 이은 의사가 창공이라면 유부의 제자쯤 되는 인물이 바로 화타다. 화타의 외과수술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전쟁이 잦은 춘추전국시대에 왕의 몸을 여는 것은 두렵고 불안한 일이다. ‘삼국지’를 보면 화타 이야기가 나온다. 화타가 조조의 두통을 치료한답시고 두개골을 열고 뇌를 꺼내 깨끗하게 한 다음에 다시 넣겠다고 했을 때, 늘 암살 위험에 시달리던 조조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중국 대륙을 통일하겠다는 일념으로 격무에 시달린 조조. 편두통을 달고 살았던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아니 내 두개골을 열었다가 안 닫으면 난 뭐야? 죽는 거야? 이런 무엄한 놈이 있나. 저 놈 죽여버려.’
이런 식이다. 그에 비하면 편작의 의술은 안전한 편이다. 몸속 질병을 침과 약으로 다스리니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제후들은 그를 신뢰했다. 예로부터 의사는 마음먹기에 따라 군왕의 목숨을 좌지우지한다. 왕의 독살도 의사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다.
맘만 먹으면 독약을 보약으로 위장할 수 있으니.
살 만한 사람만 살린다
유부는 현재 중국 의술의 지류로 전설로나마 존재한다. 하지만 편작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유부의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니 중서자가 편작에게 유부 같은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라면 죽은 태자를 살려내겠다는 장담 같은 건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편작은 유부와 차별화된 내과적인 소견을 이야기한다. 이 말에 중국 의술의 본령이 담겨 있다. 유부의 의술이 과학이라면 편작의 의술은 철학에 가깝다.
“당신이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대나무 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좁은 틈으로 무늬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환자의 맥을 짚고 안색을 살피고 목소리를 듣고 몸의 상태를 살펴보는 등의 일을 하지 않고도 어느 부위에 질병이 있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환자의 양에 관한 증상을 진찰하면 음에 관한 증상을 알 수 있습니다. 환자의 음에 관한 증상을 진찰하면 양에 관한 증상을 알 수 있습니다. 몸속의 병은 겉으로 나타나므로 천리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경우가 아주 많으며,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제 말을 진실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안으로 들어가 태자를 살펴보십시오. 태자의 귀에서는 소리가 나고 코는 벌름거리고 있을 것이며, 양쪽 넓적다리를 타고 음부에 이르러 아직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편작은 전술했듯 신비한 약을 먹고 사물을 투시하는 능력을 가졌다. 심지어 환자의 상태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가 죽지 않았음을 안다. 현대의학에서는 이런 진단이 불가능하다. 최첨단 장비를 동원해 종일 촬영하고, 혈액검사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는 데만도 며칠이 걸린다. 그런데 편작은 이야기만 듣고 관 속에 곧 들어갈 사람을 살려낸다. 태자의 병명은 ‘시궐(尸厥)’, 피가 위로 올라가 환자가 가사상태에 빠진 것이다. 한의학 전문용어가 많아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시궐이라는 병의 증세에 대해 편작은 이렇게 설명한다.
“대체로 양기가 음기 속으로 흘러들어가 위를 움직이고, 경맥(양의 맥)과 낙맥(음의 맥)을 얽어 막히게 하고, 한편으로는 삼초(육부의 하나로 상초, 중초, 하초를 말한다. 상초는 위장의 윗부분으로 호흡이나 혈맥 등에 관여하고, 중초는 위장 부위로 음식물 소화를 담당하고, 하초는 위장 아랫부분으로 배설을 담당한다)와 방광까지 내려갑니다. 이 때문에 양맥은 아래로 내려가고, 음맥은 다투듯이 위로 치달아 양기와 음기가 만나는 곳이 막혀 통하지 않게 됩니다. 이 음맥은 위로 올라가고 양맥은 안을 향해서 내려갑니다. 양맥은 안으로 내려가 고동치지만 일어설 줄 모르고, 음맥은 밖으로 올라가 끊어져서 음의 역할을 못합니다. 음기가 파괴되고 양기가 끊겨 혈색이 사라지고 맥이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몸이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양기가 음기 속으로 들어가 오장을 누르는 자는 살지만, 음기가 양기 속으로 들어가 오장을 누르는 자는 죽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은 모두 오장의 기가 몸속에서 거꾸로 치솟을 때 갑자기 일어나는 것입니다. 훌륭한 의사는 이것을 치료하지만 서툰 의사는 의심하여 믿지 않습니다.”
양기, 음기, 양맥, 음맥, 삼초, 낙맥 등에 대한 완전한 이해 없이는 편작의 설명은 쇠귀에 경 읽기다. 기와 맥은 또 한 권의 책으로 설명해야 하는 일이니, 편작의 설명을 다 이해하겠다는 욕심은 버려야겠다. 단 음기와 양기의 부조화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정도로 ‘시궐’이라는 병을 조금 이해한다. 하여간 병인을 잘 알고 있는 편작은 침과 약으로 태자를 치료해서 벌떡 일어나게 만든다.
곧 관 속에 들어갈 사람이 살아난 이 유명한 일화는 그보다 더 유명한 편작의 “나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지는 못한다. 나는 스스로 살 수 있는 사람을 일어날 수 있도록 할 뿐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서양의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철학을 산파에 비유하고, 또 자신은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 뿐이라고 한 것과 상통한다. 편작이 보기에 환자가 살 수 있을 때 의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 때 앎이 가능한 것처럼.
명의도 못 고치는 불치병
명의 편작도 못 고치는 질병이 여섯 가지 있다. ‘성인으로 하여금 질병의 징후를 미리 알게 하여 훌륭한 의사에게 일찍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질병은 치유될 수 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병이 많은 것이고, 의사들이 걱정하는 것은 병을 치료할 방법이 적은 것이다. 그래서 고칠 수 없는 여섯 가지 병이 있다. 교만 방자하여 병의 원리를 논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불치병이고, 몸을 가벼이 여기고 재물이 아까워 병을 치료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 불치병이다. 입고 먹는 것을 적절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세 번째 불치병이며, 음과 양이 함께 있어 오장의 기가 불안정한 것이 네 번째 불치병이다. 몸이 극도로 허약하여 약을 먹을 수 없는 것은 다섯 번째 불치병이다.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것이 여섯 번째 불치병이다. 이러한 것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치료하기 매우 어렵다.’
편작은 질병과 건강을 둘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태극 문양의 음과 양처럼 둘이 아니라 하나다. 세상에 완전한 음도 완전한 양도 없다. 음과 양은 서로 어울려 있다. 둘이 각방을 쓰는 순간 사단이 난다. 질병과 건강, 여자와 남자, 산과 바다, 달과 해 모두 마찬가지다. 어떤 질병은 평생을 친구처럼 사귀어야 한다. 병이 생기면 칼을 들고 환부를 싹둑 도려내는 개념과 다르다. 편작의 질병에 대한 ‘여섯 가지 잠언’은 질병과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생의 고난을 피하는 여섯 가지 방법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이렇게 말이다.
1. 교만 방자하여 개뿔도 모르면서 저 잘난 척만 하면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결국 소통이 부재하게 된다. 벽과 같은 인간이 되어 누가 뭐라고 좋은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불치병 중에서도 아주 심각하다. 이 세상에 저 혼자인 양 주위에 산성과 같은 벽을 친다. 이런 사람의 불치병은 하도 위중해서 그 누구도 치료할 수 없어 보인다. 그래서 결국 사망한다.
2. 베토벤처럼 36시간 동안 밥 안 먹고 잠 안 자고 작곡을 하면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겠지만 병이 든다. 당연한 이치다. 자신의 몸을 가벼이 여기면 안 된다. 건강이 있어야 행복도 있다. 하지만 자기 한 몸 희생해서 걸작을 쓰거나 봉사를 하면 위대한 인물이 된다. 인류사회를 위해 제 한 몸 희생했다는 좋은 말도 듣는다. 재물이 아까워 병을 치료하지 않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
3. 여름이건 겨울이건 노출을 일삼는 세상이다. 제 몸 병드는 줄 모르고 노출하고, 먹지 않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 다이어트 한답시고 음식을 제멋대로 조절하는 행위는 질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먹고 입는 것을 적절히 하지 않는 행동의 부작용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옷을 잘 입고 잘 먹는 것은 질병예방의 중요한 조건이다. 내 말이 아니라, 편작 선생의 말씀이다.
4. 서로 다른 걸 인정해야 한다. 음이 양을 보고 틀렸다고 하면 끝이다. 양이 음을 보고 틀렸다고 하면 사망이다. 서로 다른 존재니까. 너는 음, 나는 양, 너는 북, 나는 남, 너는 여자, 나는 남자로 우리는 서로 달라 아름답고 사랑한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너 음이야? 이런 XX, 죽어라’ 한다면, 몸의 음과 양이 그리하면 불치병이다. 편작도 못 고친다. 일부 정치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어도 듣지 않는다. 들을 귀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귀가 없는 자들은 듣지 못하니 가망없는 불치병 환자들이다.
5. 에이즈에 걸린 매직 존슨은 강한 체력으로 농구장을 누비던 강인한 사람이다. 그는 몸이 워낙 건강해서 어떤 약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매직 존슨은 에이즈에 걸렸는데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 몸이 허약하면 현대의학으로도 치료하기 힘들다. 병도 튼튼한 몸에 깃들어야 고칠 수 있다. 노인성 질병의 경우 때때로 몸의 허약함 때문에 약을 쓰지 못한다. 하여간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몸이 건강해야 한다. 이걸 굳이 우리 사회에 비교하면,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 건강한 시민의식, 환경보호 활동 등이 사회의 건강 척도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혹시 불치병에 걸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6. 편작이 살던 시대와 달리 현대인은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적절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맹장이 터졌는데 한의원을 찾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편작이 무당이라고 지칭한, 헛다리를 짚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편작이 말한 여섯 가지 불치병을 마음에 잘 담아두면,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에 통용됐던 개념을 지금의 실정에 맞게 번역하면 잘살 수 있다. 이것이 마음의 예방의학이다.
천재 편작의 이름이 온 중국에 퍼진다. 그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으로서 어떤 지역에 부인병이 창궐하면 산부인과 의사로, 어떤 나라에서 노인을 귀하게 여기면 노인질병 전문의로, 어떤 나라에서 어린아이를 사랑하면 소아과 의사로, 그 지역 풍토에 맞춰 진료 과목을 바꾼 천재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허무하다. 진나라 의학 행정의 최고 담당자인 태의령 이혜라는 자가 자객을 보내 죽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술이 자신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의원의 최고 경지, 심의(心醫)
편작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두 의사를 떠올렸다. 한 분은 조선 선조시대의 명의이자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이고, 또 한 분은 이 시대의 성자 장기려 박사다. 이 두 분이 우리나라 동서양의학계에서 많은 명의와 더불어 빛나고 있다. 허준에게서는 동양의학의 전통과 신기에 가까운 치료술을, 장기려 박사에게서는 뛰어난 의술과 더불어 힘없고 가난한 환자들을 돌본 착한 마음을 보았다.
허준의 일대기는 국가의 난과 연결되어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고난의 시기에 우리 의학계에 큰 별로 떠올랐다. 허준은 1539년 김포 양천에서 허론의 서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경상도우수사를 지낸 무과 출신이고, 아버지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지만, 허준은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으로서 의사의 길을 걸었다.
유의태의 제자로 의술을 배우고, 내의원 의관으로 왕자의 병을 고쳐 이름을 알렸다. 이후 선조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서 중국 의학서인 ‘찬도맥결’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찬도방론맥결집성’을 펴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의주로 피난할 때, ‘어의’로서 임금을 호송하고 신하들의 질병을 치료해 전란 중에 그 이름이 더욱 빛났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맞아 전투를 했다면, 허준은 조정의 건강을 돌보면서 질병과 싸운 것이다.
궁으로 돌아온 선조 임금은 허준을 정3품 당상관에 임명한다. 이후 1596년에 선조의 명으로 내의원 의관들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했으나,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잠시 동의보감 저술이 중단된다. 그 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단독으로 ‘동의보감’을 편집하게 하고, 내방의서 500권을 고증하게 했다.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은 어의로서 또 내의원으로서 모든 업무를 보면서 이루어낸 집념과 열정의 산물이다.
‘동의보감’은 1610년인 광해군 2년에 완성됐다. ‘동의보감’은 당대의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임상의학 백과전서다. 내경, 외경, 잡병, 탕액, 침구 모두 5편으로 구성됐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의학 수준을 동아시아에 널리 알린 책이기도 하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출판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허준은 ‘동의보감’ 외에도 여러 한방서를 한글로 출판했다. 1601년에는 세조 때 편찬한 ‘구급방’을 ‘언해구급방’으로, 임원준의 ‘창진집’을 ‘두창집요’로 이름을 바꾸어 한글로 간행했다. 1612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해 ‘신찬벽온방’ 1권과 ‘벽역신방’ 1권을 편집해 내의원에서 간행했다. 1615년에 세상을 떠난 허준은 당시 의사로서는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군과 보국의 지위를 가졌다.
오늘날 허준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데는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이 크게 기여했다. 의학서 ‘동의보감’이 전문가들의 책이라면, 소설 ‘동의보감’은 허준이라는 의사의 일생을 통해 질병과도 같은 인간사를 한 인간이 어떻게 치료하고 돌보아주는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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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출판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편집장이 원고를 검토하라고 편집부 직원에게 넘겼다. 그날 퇴근을 하는데 ‘동의보감’ 원고를 읽고 있던 직원이 꼼짝도 않고 원고를 보고 있었다. 그 직원은 이야기에 빠져 퇴근하는 것도 잊고 밤을 새워 원고를 읽었다. 편집장은 다음날 아침, 직원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책이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올 것이라 직감했고, 결국 그렇게 됐다. 물론 원고를 검토한 직원을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의 흡입력, 다시 말해 허준이라는 인물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이 소설을 보면 ‘심의(心醫)’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편작이 치료할 때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여덟 가지 의원 중에 그 제일을 심의로 친다. 심의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늘 마음이 편안케 하는 인격을 지닌 인물로 병자가 그 의원의 눈빛만 보고도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경지에 있다. 그건 의원이 병자에 대해 진실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있고서야 가능한 품격이다.’
‘병자에 대해 진실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의사 중에 장기려 박사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슈바이처’ ‘사랑의 의사’ ‘무소유의 삶’ 등 장기려 박사를 꾸미는 수식어는 수도 없이 많다.
장기려 박사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 사이에서 작은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송도고보와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백병원의 백인제 박사에게 의사로 단련됐다. 당시 병원에 입원 중이던 춘원 이광수가 장기려 박사를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얘기가 있다. 지강유철이 쓴 장기려 박사 평전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해 여러 정황이 비슷한 것은 사실이지만, 안빈은 소설가가 창조한 인물이라며 선생은 소문을 부인한다.
“장기려가 있으면 수술을 맡길 텐데”
장기려 박사는 1940년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 시절 김일성의 병을 치료했다는 소문도 있다. 역시 평전에 따르면 장기려 박사는 1988년에 쓴 글에서 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김일성을 세 번 만난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다.
맨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보건부 부국장 이성숙과 소련 고문관을 따라서다. 두 번째 만남은 1948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를 지낸 김용범의 수술 경과를 알아보기 위해 김일성 주석이 선생을 불러 성사됐다. 세 번째는 김용범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이날은 서로 대화는 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김일성은 머리 뒤의 혹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수술을 못 맡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기려가 있으면 수술을 맡길 텐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러한 김일성과의 인연으로 월남한 장기려 박사는 여러 고초를 겪었다.
장기려 박사는 1950년 12월 처자를 두고 차남 장가용과 함께 월남했다. 1951년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무료진료소 ‘복음병원’을 세워 의료행위를 사랑과 봉사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이는 장기려라는 의사의 평생 사명이 되었다. 장기려는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고, 1975년 청십자의료원을 설립해 직접 환자들을 진료했다. 장미회(간질환자 치료모임)를창설하고 부산 생명의전화를 설립했으며, 장애자재활협회 부산지부 창립에도 맨 앞자리에 나가 일을 처리했다.
그의 의술은 병의 치료를 넘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의 마음까지 돌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헌신적인 의료 활동에 대해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 1995년 인도주의 실천의사상이 주어졌다.
인생의 말년에는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숨이 멎는 순간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봉사해 성자로 불렸다. 1995년 12월25일 성탄절에 세상을 떠났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으니 천국으로 가셨을 거라 짐작된다. 묘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있다. 사후인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으며,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바보처럼 산 성자
춘원 이광수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을 당시 담당 레지던트였던 장기려 박사를 가리켜 “당신은 바보 아니면 성자”라고 했다고 한다. 장기려 박사는 당신을 바보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했고, 그 행위는 성자와 같으니 춘원의 이 말은 장기려 박사의 일생을 잘 정리한 빛나는 표현이다.
또한 장기려 박사를 추억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장기려 박사는 월남 후 독신으로 수도자적인 삶을 살았다. 고행의 길을 걸어 수행하는 신부나 스님이 아닌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건강한 의사가 반평생 독신으로 살긴 힘들다. 하지만 선생은 사랑의 심지가 매우 굳었다. 인간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예의를 본능과 일상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장기려 박사의 아내 김봉숙은 희생과 절대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선생은 ‘내 아내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1950년 12월 월남한 이후로 북에 두고 온 아내를 마음에 담고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하고 그 결심을 지켰다. 장기려 박사에게 구애하던 간호사가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찾아와 유혹해도, 미국에서 여생을 편하게 지내자는 부자의 청혼도 장기려 박사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그는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사람이다.
편작과 더불어 창공에 대해서도 사마천은 길게 서술한다. 창공은 주로 자신의 의료 경험을 왕에게 이야기했다. 창공의 의료행위에 감탄한 왕이 혹시 그대와 같은 의사도 실수할 때가 있느냐고 묻자 창공은 이렇게 답한다. “제가 환자를 치료할 때는 반드시 먼저 맥을 짚어본 뒤에 치료합니다. 맥이 순조로운 사람은 치료할 수 있고, 거스르는 사람은 치료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이 맥을 정밀하게 짚어볼 수 없는 상태일 때는 생사를 단정 짓는 일과 치료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데 있어 때때로 실수를 합니다. 저도 완벽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창공 역시 마음을 이야기한다. 고대 중국의 의료기술과 21세기 현대의학은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질병도 인간의 문명과 더불어 꾸준하게 발전한다. 암이나 에이즈가 완전히 정복되면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또 다른 질병이 출현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질병을 다루는 인간은 과연 그만큼 성숙할까? 편작과 창공을 통해, 허준과 장기려 박사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신기에 가까운 의료행위보다는 인간을 귀하게 여기고, 질병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아닌가 싶다. 간혹 병원에 가면 매우 실망스러운 의사들을 볼 때가 있다. 워낙 많은 환자를 보니 그렇겠지만,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의사들이 소신을 갖고 진료할 때 질병 투성이인 우리 사회가 조금은 건강해질 것이다.
● 1961년 서울 출생
●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로 등단
● 저서 : 시집 ‘딸기’, 소설 ‘바다와 커피’, 산문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불경이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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