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유흥가의 질척대는 사랑
정인(情人)을 따라 자살한 기생 금성월…칭송 받는 그 정조 뒤에는 조선 도회지의 퇴폐적 성문화가
▣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18세기 조선의 한양 땅에서 재능도 출중하고 미모도 겨룰 상대가 없는 기생 금성월(錦城月)이 자살했다. 그 시대 최고의 기생으로 그를 첫손가락으로 꼽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누구나 이 기생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했다. 그러나 기생은 몹시 도도해 평범한 남자는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그를 어떤 명문가 출신의 젊은이가 독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번 만나기만 해도 소원이 없겠다던 기생을 독차지하게 된 그 젊은 양반은 이 여인을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여러 시문에서 비슷한 사건 언급
그런데 호사다마라 했던가. 이 남자가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 사형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갑작스런 변고를 앞에 두고 기생은 가야 할 길을 선택해야 했다. 그때 기생이 이렇게 말했다.
“낭군이 죽게 되었으니 나도 따라 죽어야지요. 아니 내가 먼저 죽어서 낭군에게 내 죽음을 알리겠습니다. 왜냐고요? 천하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만큼 낭군은 저를 사랑해주었지요. 그런 낭군의 사랑에 저도 천하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행동으로 보답하렵니다.”
그런 말을 남기고 금성월은 남자가 처형되기 전에 먼저 검으로 자신을 찔러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것이 금성월이란 기생의 흔치 않은 자살 사건의 개요다. <추재기이>(秋齋紀異·조선 순조 때 문인인 추재 조수삼이 지은 글)는 이 특이한 자살 사건을 마지막 이야기로 배치했다. 사건의 개요만 놓고 보면, 돈 많은 남자와 미모의 기생이 벌인 비극적 종말의 사랑으로 넘겨버릴 이야기이다. 그런 사연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쉽게 접할 수 없는 흥미로운 사건이 될 법은 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렇게 간단히 이해하고 넘어갈 성질이 아니라고 나는 판단한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이 사건은 헛된 소문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가공(架空)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벌어진 사건에 바탕을 둔 실화이다. 비슷한 내용의 사건이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엽에 쓰인 시문에서 다뤄진 점에 비춰 대체로 영조나 정조 연간에 발생한 사건으로 추정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범곡기문>(凡谷記聞)이란 책에 실린 사건이다. 그 내용이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 인용돼 있다.
우선 이 책에는 금성월이 면성월(綿城月)이란 이름으로 돼 있는데, 금(錦)자가 획이 유사한 면(綿)자로 잘못 쓰인 데 불과하다. 이 책에는 금성월이 전라도 무안 기생으로 밝혀져 있다.
그가 선상기(選上妓)로 뽑혀 서울에 올라와 내의원에 소속됐는데 명성이 자자했다고 하며, 뒤에는 기적(妓籍)에서 빠져나와 누군가에게 시집갔다고 기록해놓았다. 그 나머지 사연은 조수삼이 기록한 것과 대동소이하다.
지방의 기생이 이렇게 서울로 올라와 내의원 침선비(針線婢)로 이름을 걸고, 명성을 얻은 뒤에 돈 많고 지체가 높은 귀족의 소실로 들어앉는 것은 선상기에게는 흔한 코스였다. 물론 금성월도 그중 하나였다.
그처럼 주목받는 최고의 기생이 자살한 사건은 당시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널리 유포됐고, 사대부들 사이에 이 이야기를 기록한 이가 여럿이었다. 이야기가 서로 다른 것은 동일한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시각에서 기록한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사건이 시선을 끌었을까?
화류계 여성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의리를 지켰다는 점이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연으로 받아들여졌음이 분명하다. 수많은 야담에서 거듭 이야기되듯이, 기생이 한 남자에게만 사랑을 바치는 순결함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미모의 기생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금전의 문제와 직결된다. 곧, 돈으로 사랑을 사는 것이었다. 금성월의 남자도 천금으로 이 여자의 환심을 산 것이다.
기생 세계에서 흔치 않은 일
조수삼이 시에서 읊은, 나뭇가지와 돌로 동해 바다를 메우려는 정위조(精衛鳥)처럼 그 남자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여자에게 정성을 기울였다. 이 바닥에서는 금전 관계가 끝나면 사랑도 식어가는 것이 욕먹을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기생이 인간적 의리를 지킨다는 것은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금성월은 남들이 손가락질하지도 않을 텐데 남자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자살을 택했다. “나를 향한 낭군의 애정은 천하에 비교할 자가 없다. 그러니 낭군에 대한 이 몸의 보답도 마땅히 천하에 비교할 이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야!”라면서 죽음을 택했다. 더욱이 남자가 죽은 뒤에 죽지 않고 먼저 죽음으로써 자신의 보답하는 마음을 그 남자가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세상에는 사랑 때문에 죽고 사는 일이 시대를 막론하고 비일비재하지만 기생의 세계에서 그의 행동은 돌출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금성월을 사랑을 물질로 계산하지 않고 의리를 지키는 여인이라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그의 행동을 예찬했다.
<범곡기문>에는 기생으로 추정되는 서화방(書畵舫) 노씨(盧氏)라는 여인이 그를 애도하면서 예찬한 시를 실어놓았는데
이 시에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기방에서 미모를 뽐내던 묘령의 여인을(曲院無雙擅妙齡)
부호가 재산을 기울여 차지하였네.(豪家傾産貯)
천금으로 즐기면서 머리가 희었거늘(千金行樂頭霜白)
한 칼에 은혜 갚아 목에서 검푸른 피를 쏟았네.(一劍酬恩頸血靑)
“이 첩은 몸으로 대의를 지키고자 했을 뿐(只顧妾身存大義)
남편이 형벌 받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何關夫婿被常刑)
꽃다운 명성이 가을 하늘에 달과 함께 걸려서(芳名竝掛秋天月)
부정하게 사랑하는 남녀를 비춰 꿈을 깨게 하려네.(留照桑間喚夢醒)
이 시에는 묘령의 기생이 머리가 허옇도록 애정을 나눈 것처럼 묘사됐다. 어쨌든 서화방 노씨는 금성월의 자살에서 남녀 사이의 사랑의 의리라는 덕목을 찾아냈고, 그 덕목을 높이 평가해 가볍게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는 청춘남녀의 경망한 행동을 각성시키려고 했다. 조수삼이 “당시 사람들이 모두들 열녀(烈女)라고 칭찬했다”고 평가한 것도 노씨의 의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주와 섹스로 자살하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금성월 사건의 내용과 그를 두고 내린 사람들의 평가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금성월의 자살 사건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그 증거로 이옥이 지은 <의협심이 있는 기생>(俠娼紀聞)이란 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옥이 묘사한 사건은 금성월 사건과 동일하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옥이 묘사한 사건은 1755년에 노론이 소론을 정권에서 몰아낸 을해옥사(乙亥獄事)를 정치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도도하기 짝이 없는 한양 최고의 기생이 있었다.
그는 존귀하고 부유할 뿐만 아니라 풍채가 좋고, 세상에 명성을 떨치며,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자만을 상대했다.
최고의 남자들만을 상대한 고급 기생이었다. 당연히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1755년 을해옥사가 발생했을 때 기생의 손님 하나가 사건에 연루돼 집안이 풍비박산됐고,
그 자신은 좋은 벼슬 자리에서 쫓겨나 제주도 소속 노비로 전락해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기생은 가까운 벗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를 위해 속히 행장을 꾸려주세요. 그 사람과는 하룻밤을 같이 지낸 평범한 벗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러한 일을 한 지 마침 10년인데 그 사이에 친밀하게 지낸 자가 100명에 가깝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모두가 육식을 하고 비단옷을 입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한 번도 궁핍을 겪지 않았더군요. 지금 아무개는 곧 제주도에서 굶어죽게 되었답니다. 소첩의 남자가 굶어죽는다는 것은 제 수치입니다.
제가 그를 따라가겠어요.”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그 기생은 가진 재물을 털어 바다를 건넜다.
제주도에 이르러 최상으로 화려하고 융숭하게 그를 대접했다. 기생은 그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리가 다시는 북쪽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은 정해진 이치예요. 굴욕적으로 사느니 차라리 즐기다 죽는 것이 낫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렵니까?”
둘은 의기투합했다. 기생과 남자는 날마다 소주를 잔뜩 마셔 취하고, 취하면 곧 동침했다. 소주를 많이 마시고 섹스를 과다하게 하는 행위는 옛날에 자살하는 방법의 하나로 이용됐다. 이들은 밤이고 낮이고 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병들어 죽었다. 기생은 남자를 후하게 장사를 지내고 자신도 술을 통음(痛飮)하고 한바탕 통곡한 뒤에 절명했다. 두 사람이 함께 죽은 해괴한 사연이 서울에 전해지자 기생의 옛 남자들이 금전을 갹출해 주검을 운구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
세부적인 사연은 다른 구석이 없지 않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비슷하므로 동일한 사건이 전한 사람에 따라 바뀐 것으로 추정한다. 이옥이 전한 사건이 구체적이면서도 자세한 것으로 보아, 애초 사건은 17세기 중반에 발생했으나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얼개가 단순해지고 사건의 성격도 달라진 상태에서 조수삼이 이를 <추재기이>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옥이 전한 사연은 최고의 기생이 곤경에 처한 옛 고객과 생사를 같이한다는 이야기다. 이 기생의 행위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금전적 가치로 우정을 계산하는 세인들의 가식적 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타락한 세상에서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보여준 의리와 협객의 정신을 찾아내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옥은 “오로지 금전과 재물만을 뒤좇는 세상의 기생들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으리오?”라며 개탄했고, “어떻게 하면 그가 남긴 분단장과 향기를 얻어다 시교(市交)를 일삼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 맛을 선보게 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노릇이다. 아!”라며 탄식했다. 그래서 이옥은 이 기생을 ‘협창’(俠娼)이라고 했다. 창기(娼妓)로서, 의협심을 지닌 협객(俠客)의 면모를 지녔다는 말이다.
전에 없는 기괴함과 파격성
주제 면에서는 이옥과 조수삼이 묘사한 기생에게는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반면에 이옥의 묘사에서는 색다른 시선이 보인다. 18세기 서울이란 대도회지의 기방에서 벌어지는 퇴폐적 성문화와 세기말적 풍조가 느껴진다. 미모를 무기로 기생이 가문의 명예와 부귀를 손아귀에 쥔 남자를 쥐락펴락하고, 의리라는 이름으로 “소첩의 남자가 굶어죽는다는 것은 제 수치”라며 술과 섹스로 인생을 파괴하는 행동이 그런 모습의 일면이다. 조수삼이 “임이 죗값을 치르기에 앞서 먼저 사랑에 보답하려/ 향기 피어나는 뜨거운 피를 원앙금침에 뿌리네”라며 묘사한 부분에서도 이옥이 묘사한 기생의 격정이 엿보인다. 이들의 사랑과 의리는 전에 보지 못하던 기괴함과 파격성을 보여준다.
18세기에는 조선을 비롯해 일본이나 중국의 기방에서 기생과 남자가 가로막힌 사랑의 돌파구로 동반자살을 택하는 일이 가끔씩 벌어진다.
때로는 그런 행동이 봉건적인 열녀(烈女)라는 관념으로 윤색되기도 하고, 협객이란 이름으로 부풀려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금성월의 사연은 그런 동반자살의 요소도 일부 지니고 있다.
소박하고 낭만적인 사랑과는 다른 도회지 시정인의 사랑의 한 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금성월의 사랑과 자살 사건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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