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폭력도 때로는 靈藥, "분노도 病을 물리칠수 있다네”
20년을 금실 좋게 살아온 부인이 2년 전부터 두통을 앓아오더니 한 달 전부터는 아예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버렸기 때문이다.
“허허, 이거야 정녕 큰일이 아닌가? 용하다는 의원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젓고 백약이 듣지 않으니, 원…!”
그때 대문을 밀치고 거나하게 취한 주정뱅이가 들어왔다.
“이 사람 여광. 자네 한숨에 대문 밖 오동나무가 흔들리네.”
허구한 날 술에 절어 비틀거리고 다니는 돌팔이 의원인 희동(希董)이었다. 여광은 회동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는 언사가 경박하고 행동이 진중하지 못했다. 희동은 여광에게 다가오며 묻지도 않은 말을 너저분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회남자(淮南子)의 본경훈(本經訓)에 이런 말이 나와 있는데 한번 들어보게.”
인간의 본성은 밖에서 침범을 당하면 크게 분노하고, 분노하면 피가 몰리고, 피가 몰리면 기가 격해지고, 기가 격해지면 성을 내고, 성을 내면 때로 병까지 몰아낸다. 기쁨과 노여움은 음양의 기에 작용하여 심신의 병을 만든다. 양이 강한 사람은 기뻐함이 크고, 음이 강한 사람은 분노함이 크다.
“특히 분노는 인체에 커다란 생리적 변화를 일으켜 기혈을 막아 큰 병을 가져오게도 하지만, 때로 격한 분노는 기혈의 막힘을 뚫어 병을 퇴치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네. 고로 분노는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병을 물리치는 약이 되는 법일세.”
“그러니까 병자 앞에서 춤이라도 춰 분노하게 만들란 말인가?”
“자네 부인의 병은 칠정(七情·喜怒憂思恐驚悲)의 변화에 의해 생긴 것일세. 그러니 백약이 통하지 않을 수밖에. 경기 일으킨 아이에게 젖 물리고 어르는 꼴이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듣기 싫으니 썩 물러가게.”
“자고로 냇가에서 잃은 신발은 냇가에서 찾아야지. 호미 들고 산에 가봐야 냇가에서 잃은 신발을 찾을 수 있겠나?”
말인즉 일리가 있어 여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부인을 살리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우선 부인의 옆방에 술상을 차리게. 그리고 기분 좋게 술을 마시는 거네. 젊고 목청 좋은 창기를 불러놓고 ‘상전가(桑田歌)’를 부르면서 마시면 금상첨화요, 병든 여편네 빨리 데려가 달라고 염라대왕에게 축수(祝手)를 올리면 그게 또 최고의 명약이 될 것이네. 천하제일 명의 희동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여광은 별로 미더워하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명의는 무슨? 돌팔이에 주정뱅이 주제에.’
평소 같았으면 당장 호통을 쳐서 내쫓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에 여광은 술상을 보도록 했다.
여광의 부인은 잠을 청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달아난 잠을 쉽게 붙잡아 오지 못했다. 두통은 더 심해졌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쇠사슬로 머리를 꽉 조이는 것 같은 지긋지긋한 통증을 벌써 보름째 겪고 있다. 옆방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그녀의 날카로워진 신경을 더욱 자극했다.
‘아픈 사람 옆에 두고 뭐가 저리도 즐겁단 말인가?’
돌팔이 의원인 희동은 비단장수보다 더 큰 목소리로 술을 마시며 떠들었다.
“하하, 이 사람아. 자고로 병든 사람이 집안에 있으면 찾는 손님은 줄어들고 대신 귀신 발걸음이 잦아지는 법일세. 내가 장담하건대 자네 부인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네. 요즘 자네 눈초리가 예전 같지 않고 밑으로 처진 게 결코 예삿일이 아니야. 틀림없이 열흘 안으로 부인과 사별하게 될 것이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게.”
‘사별…! 그럼 내가 이대로 죽는단 말인가?’
여광의 부인은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죽게 된다는 말에 두통 따위는 저만큼 뒷전으로 밀려났다. 긴장으로 입안이 바싹 마르고 말아쥔 손에 땀이 배었다. 그녀의 복창을 긁는 희동의 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죽고 사는 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어차피 명이 다한 사람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한 자네는 미리 후취(後娶·후실) 자리라도 봐 둬야지.”
“아무리 그렇기로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 후실을 알아볼 수야 없지 않은가? 무덤에 흙이라도 마른 뒤라면 모를까.”
듣고 있던 여광의 부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제도 여광은 그녀에게 백년해로를 해야 한다며 펄펄 끓는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지 않았던가?
‘흙 빨리 마르라고 부채질할 사람이군.’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숨이 가빠왔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믿어왔던 남편의 속내에 저런 생각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땀이 차고 맥이 풀렸다. 희동은 뚜쟁이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열을 올렸다.
“동창(董菖) 영감이라면 자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네.”
“그분이야 학식이 높고 인품이 고매하신 분 아니신가.”
“그 집안에 잠시 나가있던 보물이 다시 돌아왔다네. 출가했던 셋째딸이 작년에 일어난 장강의 범람에 남편과 시가의 식구들을 모두 잃고 지금 홀몸이 돼 친정으로 돌아와 있네. 자네만 괜찮다면 내가 한번 인연을 만들어 봄세. 일이 잘만 되면 자네는 가만 앉아서 굴러온 복을 줍는 것일세.”
“집안에 사람을 들이는 일인데 그래도 길흉은 가려야지.”
“그건 걱정 말게. 내가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있어 상을 좀 봐뒀네. 얼굴의 틀이 바른 것은 타고난 심성이 곱다는 것이고, 이마가 정갈하고 이목구비의 선이 또렷한 것은 총기와 문아(文雅)를 겸비한 귀한 상일세. 특히 뼈가 곧고 살집이 적당하면서 피부가 맑고 밝아서 몸을 스스로 귀하게 만들 것이네. 그런 여자는 복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지. 거기다 걸음걸이가 정정하고 둔부가 튼실해서 밤낮으로 자네를 즐겁게 해주고 한 해를 걸러 아이를 생산해 낼 걸세.”
희동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여자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광의 부인은 눈을 감고 숨을 고르려고 애를 썼다. 폭발하려는 분노를 진정시키지 않으면 미쳐 날뛸 것 같았다. 저런 주정뱅이를 당장 발로 차 내쫓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 처자, 올해 나이는 몇이라고 하던가?”
“올해 서른이라니까 아홉수에 걸린 액운도 넘긴 셈이지. 자네가 새로 맞으면 틀림없이 현모양처로 홍복을 줄 것이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지.”
“길게 생각할게 뭐 있어. 그만한 여자라면 가보라도 팔아서 당장 데려와 안방에 앉혀놓게. 그럼 아마 집안 분위기가 확 바뀔 것이네. 대문을 드나드는 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득실대던 잡귀들은 그날로 다 없어져. 옛말에 오는 복을 잡지 않으면 곧 흉이 되어 돌아온다고 했네.”
“알았네. 그럼 자네 말대로 하겠네.”
“이 사람, 정말 잘 생각했네. 자고로 사내와 다르게 여자를 고를 때는 좋은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여자를 데려와 앉혀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앞으로 자네 집안에서 웃음이 끊기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네.”
“이번 일을 자네가 성사시켜주면 내 잊지 않고 보은을 함세.”
옆방에서 듣고 있던 여광의 부인은 분노로 가슴이 콱 막혔다.
‘사내는 혼인할 때와 아내가 죽는 날 웃는다고 하더니…!’
너무 분해서 다리에 힘이 빠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악을 쓰고 싶었지만 소리는 넘어오지 않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숨이 콱 막히고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뭉클뭉클 치솟아 올랐다.
‘세상에 믿을 놈은 아무도 없어.’
혼미해진 의식에 매달려 그녀가 부르짖은 소리 없는 절규였다.
여광의 부인은 사흘 후 깨어났다.
머리가 아주 맑고 천근 같았던 몸도 가벼워졌으며, 기분까지 매우 좋았다. 꿈인가 싶어 머리를 몇 번 흔들어 보았지만 그녀를 그토록 괴롭게 했던 두통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시간을 거꾸로 돌려갔다.
‘내가 죽으면 동창 영감 댁에 혼담을 넣겠다고 했겠다.’
기운을 되찾게 되자 남편에 대한 원망이 증오로 변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데 여광이 들어왔다. 두 명의 하녀는 잘 차려진 밥상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여광은 상머리에 앉아 그녀에게 젓가락을 들려주며 사랑이 가득한 미소로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돌팔이라고 여겼던 희동이 명의라는 사실을 이제 인정하기로 했소. 침 한 대, 약 한 첩 쓰지 않고 부인의 병을 이렇게 말끔하게 고쳐 놓았으니 말이오.”
여광의 부인은 믿어지지 않아 남편에게 되물었다.
“그럼 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일부러…?”
“희동의 말로 부인의 병은 비장(脾臟)이 손상을 입어 얻은 것이라고 하더이다. 비장이 인간의 칠정에 의해 주관되고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소.”
여광은 해설피 웃는 부인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희동이 이런 말을 하더이다. 웃는 사람은 눈 꼬리에 주름이 잡히지만, 우는 사람은 비장에 큰 주름이 잡히는 법이니 항상 웃음을 잃지 말라고. 인간에게 웃음보다 더 좋은 영약은 없다면서.”
작가의 변
마시려 하니 비파소리 말 위에서 들려오네 (欲飮琵琶馬上催)
흠뻑 취해 모래사장에 누운들 웃지는 마소 (醉臥沙場君莫笑)
일찍이 전쟁터에 나가 그 몇이나 살아 왔던고 (古來征戰幾人回)
한나라 기인 왕한(王翰)이 술에 취해 춤추며 읊었던 노래가 기나긴 역사의 숨결에 실려 호방한 기상과 대쪽 같은 절조, 그리고 풍류에 젖은 술 냄새를 전해온다.
인생백년을 결코 한탄하지 않고, 명리와 영화를 초개처럼 여기며 살다간 수많은 기인과 광객(狂客)들. 시퍼런 칼날에 목이 꺾일지언정 결코 기개의 붓을 놓지 않았고, 아첨으로 얻은 영화보다 고난의 술잔을 더 사랑했던 그들의 초연한 삶을 되밟아보고자 한다.
독자 제현의 애독을 부탁드리며…! 이상남(李相南) 배상(拜上) /무협·만화작가
소주에 살던 유곤(劉昆)은 절강성 명주에 있는 흑룡채에서 녹림의 일원이 되고자 배맹(拜盟)의 엄숙한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유곤이 녹림에 투신하고자 결심한 이유는 세습호족인 구문외(邱文嵬)의 가혹한 수탈에 더 이상 삶의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짐승처럼 피땀 흘려 농사를 지어봐야 도조와 각종 세금으로 착취당하고 나면 당장 끼니 걱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녹림에 투신해 탐관오리들을 단죄하고 호족들을 척결해 협의를 세우리라.’
배맹 의식은 흑룡채를 세운 대원(大猿)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졌다. 팔척 거구에 몸에 털이 많고 각이 선 얼굴에서 풍기는 대원의 인상은 매우 흉포했다. 웬만한 사람은 그가 눈을 부라리는 것만 봐도 기가 꺾여 오금을 펴지 못할 정도다. 거기에다 36근의 청룡언월도를 젓가락처럼 다루는 그의 괴력에는 바위도 통째로 잘린다. 그뿐인가, 원숭이 같은 몸놀림은 몇 길 담도 훌쩍훌쩍 뛰어넘는다.
배맹의 첫 순서는 문신이다. 유곤의 양팔에 ‘生不宋皇帝 死不畏閻羅王’이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살아서는 송 황제를 두려워 않고, 죽어서는 염라대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식은 말을 죽여 왼쪽 귀를 자른 다음 피를 그릇에 받아 체맹(締盟)의 서약서를 쓰고, 그 피를 마시며 대원을 향해 서약서를 읽는 삽혈( 血 )로 이어졌다.
“이 유곤은 앞으로 흑룡채의 형제들과 어떠한 역경에도 생사고락을 함께할 것이며, 죽을 때까지 의를 행하고, 부귀와 영화를 공평히 나눌 것을 삼가 천지신명께 맹세하나이다. 만약 이를 어기면 신께서 저를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대원은 유곤에게 유편복이란 별명을 붙어 주는 것으로 배맹의 의식을 끝냈다.
유곤에게 맡겨진 임무는 ‘찰구자’였다. 동료가 도둑질을 할 때 밖에서 경계를 맡는 임무다. 집안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수의 역할은 대원이 가장 신임하는 삼조호리(三條狐狸·세 마리의 여우와 살쾡이)가 맡았다. 일은 눈깜빡할 사이에 끝났다. 노부부의 외침이 비명으로 바뀌고, 곧바로 삼조호리가 담을 넘어 유유히 사라졌다. 유곤의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녹림에 몸을 담은 것은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단죄하고 진정한 의협을 행하려 했던 것.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녹림의 협의는 흑룡채에 없다. 고작 유수(遊手·소매치기와 불량배)들의 소굴일 뿐.’
오늘 진 노인의 집에서 도둑질한 안신로(安身爐)라는 물건만 해도 그렇다. 호박농과 요벽(瑤碧·옥의 일종)으로 만든 안신로는 한서를 막아주고 사기를 퇴치해 준다 하여 동관이 궁중어용품(宮中御用品)으로 이미 명시해 둔 물건이다.
‘궁중어용품을 도둑맞은 진 노인은 참수를 당하겠지.’
안신로를 들고 좋아하는 대원의 모습과 참수의 칼날을 기다리는 진 노인의 참담한 모습이 동시에 유곤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다음날 유곤은 손발이 형틀에 묶여 치도곤을 치르고 있었다. 엉덩이 살이 뜯겨지는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멱첩아(覓貼兒·소매치기)로 이름난 장오(長烏)가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노부부의 주머니를 털려는 것을 보고 소리쳐 막았기 때문이다.
장오는 그 자리에서 붙잡혀 관아에 넘겨졌다.
“배맹의 먹물도 아직 안 말랐는데 형제를 배신해.”
대원의 분노에 유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이것은 결코 협의가 아니오. 나는 협의를 행하기 위해 배명의 결의를 했지 도둑질을 하고 양민을 괴롭히려고 흑룡채에 투신한 것이 아니오.”
“오호…! 그러니까 협객 소리를 듣고 싶으시다.”
대원은 유곤의 목덜미를 무지막지하게 짓이겼다.
“요즘 같은 세상에 협객은 무슨 얼어죽을 협객이야. 도둑질은 다 똑같지.”
유곤의 비명에 발악이 섞여 흑룡채를 울렸다.
“제발 안신로를 돌려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진 노인은 동관에게 참수를 당하게 될 것이오.”
“살려두면 관가에 밀고하고도 남을 놈이군. 너 같은 놈은 미리 싹을 잘라 버려야 잠자리가 편하다.”
대원이 유곤의 머리를 짓밟으려고 발을 들어올렸을 때,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도(盜)에도 지켜야 할 도(道)가 있는데, 너는 인간의 마지막 도리마저 저버렸으니 오늘 이 비호(飛虎)가 그 죗값을 치르도록 하겠다.”
‘비호…?’
유곤은 살점이 뜯겨 나간 아픔도 잊고 비호의 모습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비호라면 신출귀몰한 도둑이자 협객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몸놀림이 날개 달린 호랑이처럼 빠르고 민첩해 사람들은 비호라고 불렀다. 그는 탐관오리의 집을 털어 굶주린 백성의 배를 채워주었고, 부정한 일을 보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침이 없다고 한다.
비호는 칼을 가슴에 품고 팔짱을 낀 당당한 자세였다. 대원은 어깨를 건들거리며 비호에게 다가왔다.
“네가 비호라는 놈이냐? 그렇지 않아도 만나면 요절을 내려고 했었다. 혼자 협객인 양 건방을 떨고 다니는 꼴이 내 비위를 뒤틀리게 했거든. 그건 그렇고, 우선 네놈이 지껄이고 다니는 도둑의 도(道)라는 게 뭔지 한번 들어보자.”
비호는 차분한 음성에 강건한 힘을 실어 말했다.
“도둑질할 집안에 있는 보물들을 미리 헤아려 훔쳐올 물건을 정해 놓는 것, 이를 도둑의 성(聖)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그 집안에 들어가는 것은 용(勇)이라 하고, 도망칠 때 반드시 맨 뒤에 서는 것은 의(義)라 하며, 일을 도모할 시기와 들어가고 나올 길을 정해 놓는 것은 지(智)라 한다. 마지막으로 도둑질한 물건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인(仁)이라 한다.”
“말 하나는 아주 그럴싸하게 잘 지어냈군, 그래.”
“무식한 네가 몰라서 그렇지, 원래 도척이 남긴 말로 ‘여씨춘추(呂氏春秋)’ 당무편(當務篇)에 나와 있다.”
대원은 옆에 세워진 청룡언월도를 움켜잡았다.
“다 지껄였으면 네놈의 적을 지옥 명부에 올려주마.”
“진 노인의 집에서 훔친 안신로를 내놓아라.”
대원은 공중으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시퍼런 청룡언월도로 비호의 머리를 겨냥하고 내리쳤다.
“감히 이 대원의 밥그릇을 내놓으라고 겁박해.”
살벌한 칼바람을 동반한 대원의 청룡언월도를 피해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비호가 칼을 뽑았다.
“그 안신로에 진 노인 일가의 목숨이 걸려 있다. 여하한 경우에도 인간의 생사와 연관된 물건은 손대지 않는 게 도리.”
대원의 머리 위에서 비호의 칼날이 번뜩였다. 그의 몸놀림은 정말 귀신 같았다. 바람처럼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대원을 엄밀하게 압박하는 솜씨에 유곤은 혀를 내둘렀다. 마치 하얀 그림자가 칼을 휘두르며 춤을 추는 듯보였다.
대원은 정신없이 비호의 칼을 막으며 물러서기에 급급해했다.
“물건을 훔치더라도 덕(德)과 예(禮), 그리고 정(正)을 벗어나면 그것 또한 죄를 더하는 것이다.
물건은 훔치되 사람은 절대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은 덕이요.”
그 말끝에 대원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경조사로 많은 사람이 기뻐하거나 슬픔에 빠져 있을 때를 피하는 것은 예이고…!”
그 말이 끝났을 때 비호의 목을 도려낼 듯 칼바람을 일으키던 대원의 청룡언월도가 뭉턱 잘려나갔다.
“훔쳐도 될 사람의 물건과 그러지 않아야 할 사람의 물건을 잘 구분해야 정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 말끝에 생사가 갈렸다. 대원의 가슴에 깊이 박힌 비호의 시퍼런 칼날을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아직도 형틀에 사지가 묶여 있는 유곤은 비로소 그가 찾고자 했던 진정한 협객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암울한 역사의 그늘에서 양민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들을 날 선 칼로 단죄하고, 무너진 인륜과 도덕을 협의의 붉은 피로 일으켜 세우려 했던 대도(大盜) 비호. 죄업과 선업은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통념의 벽을 등진 채, 그는 도(盜)를 도(道)로 승화시켜 거대한 협객의 족적을 남겼다.
도둑이나 녹림(綠林)의 비적들을 지칭하는 말과 그들만의 은어는 매우 다양했다.
향마(響馬·말을 타고 종을 울리고 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에서 두포서절(물건을 바꿔치기하는 좀도둑)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에 비해 재주가 뛰어난 도둑을 조백(調白)이라 칭했으며,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물건을 취하는 신기를 지닌 사람을 하팔동(下八洞)이라 했다. 하팔동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상팔동(上八洞)으로 구별했다.
강도끼리 인사하는 것을 전불(剪拂)이라 했고, 토장(討帳)은 약탈을 얼마만큼 했는지 묻는 말로 통용됐다.
타파자(舵把子), 타야(舵爺), 노요(老搖) 등은 녹림의 두목을 가리키는 존칭이었다. 염탐을 하는 사람은 안선(眼線) 또는 수객(水客)이라고 했고, 주변 경계를 맡는 도둑패는 ‘찰구자’로, 또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수(首)로 불렸다.
다 같은 도둑질이라도 결과가 다 같지는 않다. 명의 왕도곤(汪道昆)은 수호전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구(帶鉤·혁대를 잠그는 쇠붙이)를 훔친 좀도둑은 사형을 당하고,
나라를 훔친 큰 도둑은 부귀를 누리며 그 도둑의 집에는 인과 의가 남는다.”
대구를 훔친 도둑이 사형을 당해 마땅하다면, 나라를 훔치고 백성을 병화에 몰아넣은 큰 도둑은 더욱 엄혹한 형벌로 다스림이 마땅하건만, 역사의 도량은 약자에게 혹독한 칼날을 휘둘렀고 승자에게는 머리 조아려 황제라 칭하며 만백성의 어버이로 숭앙케 했다. 역사란 칼의 양면과 같고 양과 독사가 함께 마시는 물과 같은 것이 아니랴.
횃불이 담겨 있는 것 같은 눈동자는 끝없는 투쟁심으로 이글거리고, 콧날은 굴강한 의지로 솟아 있으며, 굳게 다문 입술은 이 사람이 얼마나 냉철한 결단력을 지닌 인물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악어의 인내와 사자의 기개를 지녔고, 여우의 교활함과 호랑이의 용맹을 겸비했으며, 대붕의 야망을 짊어진 강건한 어깨를 지닌 눈앞의 이 인물. 그는 칭기즈칸이었다. 세계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이룩한 피의 정복자이자, 인종과 종교 그리고 문화를 달콤한 혀로 아우르고 유린한 치세의 달인.
팟…! 칭기즈칸은 구처기를 맞아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그가 앉아 있는 탁자 앞에 꽂는 것으로 첫 인사를 대신했다.
“묻겠노라. 불사의 도(道)는 정말 존재하는가?”
구처기는 미소를 머금고 넌지시 물었다.
“죽음이 그리 두려우시오이까?”
“내가 묻는 말에 답하라.”
“무릇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고, 끝남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존재하는 법이오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부여된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면 혹 대답이 될지…?”
콰악! 칼자루를 움켜잡은 칭기즈칸의 손에 지렁이 같은 힘줄이 꿈틀거리며 완강한 힘이 실렸다.
“내가 얻고자 하는 불사의 도란 없다는 말인가?”
구처기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 미소는 대륙을 호령하고 유린한 칭기즈칸의 분노를 다독이고 있었다.
“대저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이오이까? 비록 어미의 모태를 빌려 태어났지만 생명의 뿌리는 궁극적으로 자연에 맥을 두고 있으며, 장구한 역사에 비하면 한낱 세월의 부산물이요, 조물주의 피조물에 불과하오이다. 도라는 것 또한 인간이 마음으로 추구하는 것일 뿐, 형상을 얻는 것이 아니지요. 심신의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고, 자연의 순리를 거역치 않으며, 정·신·기를 바로 하면 비록 불사의 도를 손안에 잡을 수 없을 것이나,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어 삶과 죽음의 영속에서 초연해질 수 있을 것이옵니다.”
척…! 칭기즈칸은 탁자에 박힌 칼을 뽑았다.
“마단양(馬丹陽·전진7도인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도를 배우는 것은 하나에 전념하는 것이니, 곧 사람마다 신선이 될 수 있다고. 그리고 그대 또한 만물을 구제하고 살아 있는 것을 이롭게 하면, 공(功)이 이루어져 불사의 신선이 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오나 대칸께서 얻고자 하는 도는 없습니다.”
구처기를 쏘아보는 칭기즈칸의 눈빛이 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명령을 거역했던 호라즘(서역의 이슬람제국·중심도시는 사마르칸드)의 왕, 무하마드에게 가해졌던 일벌백계의 칼날이 다시 춤을 추게 될 것 같은 긴박한 순간이었다. 칭기즈칸은 그러나 끓어오르는 충동에 결코 자신을 경망되게 내던지지는 않고 구처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계속해 보라.”
“그러나 또한, 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유(萬有)이며 무유(無有)여야 하고, 태어나면서 쌓인 업의 종자를 씻어 없애는 것이며, 보고도 보지 않는 것이며, 듣고도 듣지 않는 것이요, 채우고도 비워두는 것입니다. 모든 악을 경계하고 참되이 육신을 닦으면 행동이 두루 원만해지고, 비로소 심신이 깨끗해지는 것. 그 청정함으로 도를 안고 죽는 것이옵니다.”
“도를 안고 죽으라…?”
칭기즈칸은 구처기의 말을 으깨어 삼켰다.
척. 칭기즈칸의 손에 들린 시퍼런 칼이 구처기의 목에 올려졌다. 중앙아시아 강국들을 파죽지세로 무너뜨렸듯이, 그가 마음만 먹으면 구처기의 목에 구멍이 뚫릴 판이다.
“다시 한번 묻겠다. 불사의 도란 없느냐?”
구처기는 거인의 모습 뒤에 감춰진 초라한 몸부림을 찾아냈다. 삶의 막장에서 한 가닥 생명의 오랏줄을 붙잡고 남모르게 바동거리는 그 모습은 인간미마저 느끼게 했다. 구처기는 칭기즈칸이 사력을 다해 붙잡고 있는 희망의 지푸라기를 단숨에 잘라버렸다.
“없소이다.”
칭기즈칸의 동공에 광기가 이글거렸다.
“목이 날아가도 말인가?”
“대칸께서 ‘아이에게 칼을 주지 말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권력을 주지 말라’고 하셨듯, 조물주는 인간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소이다. 그것은 제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오라 조물주만이 소유한 권능이오이다.”
그 말을 끝으로 구처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해탈과 피안의 언덕이 보이는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처럼, 그는 삶과 죽음을 초연한 모습으로 대륙의 정복자에게 무위자연의 도리를 일깨우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힌두쿠시 산록의 밤바람은 차다. 칭기즈칸과 구처기는 덧없이 흘러가는 밤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저 구름처럼 정녕 덧없는 것이란 말인가? 칼을 들어 천하를 정복한들 무슨 소용이랴. 죽어 등에 짊어질 땅덩이는 다 똑같을 것인데. 지금까지 두려우면 하지 않았고, 일단 했으면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았거늘, 죽음은 두렵도다.”
칭기즈칸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그늘이 잔주름에 스며들었다. 잘려지고 난도질당한 불사의 꿈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절대자의 모습은 끝없이 공허해 보였다.
“비록 불사의 도를 구하지는 못하오나, 삶을 남보다 오래 지키는 방도는 있사옵니다.”
칭기즈칸의 눈에 꺼졌던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
“장생의 도는 가능하다는 말인가?”
“천지자연이 무한한 것은 때묻지 않고 무구하기 때문이옵니다. 밖으로 복된 행위를 닦고 안으로는 정신을 견고히 하며,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비우시고 마음을 맑게 하소서.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은 물을 맑게 하는 것과 같고, 기를 기르는 것은 아이를 기르는 것과 같사옵니다. 만약 무심무위(無心無爲)의 이치를 행하신다면, 쉬이 시들지 않고 날로 청정한 삶을 영위하실 것이옵니다.”
칭기즈칸은 구처기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정녕 그대를 하늘이 내게 내려준 사람으로 여기겠노라. 짐은 이제부터 그대를 진정한 사(師)로 여기고 잊지 않을 것이니, 그대 또한 항상 내 곁에서 가르침을 주기 바라노라.”
구처기는 고개를 숙였다.
“인간에게 진정한 스승은 바로 이 광활한 대자연에 있사옵니다. 자연의 생성소멸과 진화하고 화육하는 이치를 보고 깨달으시오면 그것이 곧 참된 공부라 할 수 있지요. 자연을 바라보는 혜안과 형안을 지니시고, 마음으로 깨우치고 받아들이는 큰 도량을 지니소서. 도란 결코 크고 광대한 것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오이다. 하찮은 날짐승의 날갯짓에도 배우고 담아두어야 할 자연의 순행과 진리가 거기에 있사오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야 고작 대칸께서 어두운 밤길을 가는 데 등불을 밝히는 것이 전부일 것…!”
칭기즈칸은 구처기의 가르침에 감복했다.
사생활의 금욕과 절제에서부터 몽골 민족의 악습과 폐단에 이르기까지 구처기의 모든 교시를 기록으로 남겨 치세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로 인해 그는 다양한 민족의 종교와 사상을 포용하고, 대제국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부족한 지식은 지혜로 극복했고, 짧은 학문은 따뜻한 인간의 가슴으로 메웠다. 아마도 그런 어우름은 그가 대자연의 생성과 화육, 순행과 질서 속에서 깨우친 공존의 법도였을 게다. 부족한 만큼만 채우고, 채울 만큼 다시 비워두는 것이 자연의 순리인 것이니…!
구처기와 칭기즈칸의 만남. 그것은 어쩌면 숙명이나 인연이 아니라 정략이란 화분 속에서 자라난 한 줄기 독초였는지도 모른다. 정치적 수완이 탁월했던 구처기는 교단의 쇠퇴를 막고자 금나라와 송나라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고, 역사의 거친 소용돌이를 헤치며 칭기즈칸의 부름에는 선뜻 응했다. 그는 그 후 칭기즈칸의 절대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면세의 특권과 도교에 대한 총관할권을 얻어냈고,
전진교는 이를 바탕으로 중 흥기를 맞게 된다.
■발문
영생을 꿈꾸는 것은 죽음이란 족쇄를 차고 태어난 인간에겐 숙명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어떤 명검의 칼날에도 꺾이지 않는 영웅의 목도 결국 세월에는 꺾이게 마련이기에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제도 세월을 붙잡아 두기 위해 불사의 영약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박랑사의 철퇴는 피했으나 흐르는 세월에는 목을 내맡기고 말았다.
‘석명(釋名)’이 석장유(釋長幼)편에서 이르기를, “늙어도 죽지 않는 것이 곧 신선이다(老而不死曰仙)”라고 했다. 그렇다면 죽음과 맞싸워 장생을 누리는 인간은 신선이나 다를 바 없다는 풀이도 가능하다. 이 때문일까. 불사의 욕망과 신선사상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속에 영생을 추구하는 행법과 연금술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특히 피비린내나는 권력의 아귀다툼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패권을 움켜잡은 제왕들은 영생불사의 묘법을 찾기에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조물주는 진시황제 사후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영생불사의 비밀이 담긴 보따리를 인간에게 내려주지 않고 있다. 여기 ‘포박자(抱朴子)’에 실린 장생비결의 한 구절을 옮긴다.
“장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선(善)을 쌓고 공을 세우며, 사물에 대해 자비심을 갖고 자신을 용서하듯이 남을 용서하고, 어진 마음이 곤충에까지 미쳐야 한다. 남의 행운을 함께 즐거워하고 남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며, 손으로 산 것을 해치지 않고 입으로 재앙이 될 일을 권하지 않는다. 거만하지 않고 아첨하지 않으며, 남을 모략하지 않아야 한다.”
장생의 비결은 선업을 쌓는 데 있다는 귀띔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춘추시대 정(鄭)나라 무공(繆公)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태가 빼어나고 행실이 방정했던 그녀는 무공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런 하희에게 훗날 거센 치맛바람을 휘날리게 만드는 운명의 밤이 찾아온다. 다음은 나이 15살에 맞이한 그 은밀한 밤의 한 자락이다.
“눈을 떠보거라.”
하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그녀의 침대 옆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잘 차려입은 우의로도 감추지 못하는 강건한 체격과 관옥 같은 얼굴로 하희의 눈을 부시게 했다.
“누…누구세요?”
“참으로 아름다운 자태와 미색을 타고났구나. 네 미질(美質)을 사랑하고 중히 여겨 영원히 늙지 않고 평생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줄 것이니 어서 일어나 옷을 벗거라.”
하희는 거역할 수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부름을 받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희는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낯선 사내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눈부신 하희의 몸매는 어둠에서 더 빛났다. 하얀 피부는 광채를 머금고 있었고, 나비의 인분처럼 화사한 색채를 뽐냈다. 가는 목덜미에서 갸름한 어깨로 이어진 선에는 때이른 관능이 넘쳐났고, 풍만하고 탄력이 넘치는 가슴은 도저히 15살 소녀의 육체로 여겨지지 않았다. 잘록한 허리는 세류의 풍정을 두르고 있고 팽팽한 아랫배에는 윤기가 농밀했다. 이런 자태를 두고 편약경홍(翩若驚鴻)이요 영요추국(榮曜秋菊)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희가 침대에 눕자 남자가 알몸으로 올라왔다.
“지금부터 너를 위해 흡정도기라는 선인들의 방중비술(房中秘術)를 가르쳐 줄 것이다. 이를 잘 배워 행하면 지열지락의 도취경을 맛볼 수 있고, 양기를 취해서 음기를 보충하면 영원히 늙지 않고 젊음과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니라.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머릿속에 깊이 새기고 행동을 기억해 두었다가 밤낮으로 비법을 닦고 연마하거라.”
남자의 손과 입술은 명필의 손에 들린 붓이 되어 하희의 몸을 구석구석 탐닉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몸에는 정·기·신이 있다. 이것이 생명의 근원이고 성의 뿌리니라. 그 정·기·신이 성적인 작용을 일으키게 되면 원기로 바뀌게 되고, 정신과 육체에 강한 힘을 갖도록 만든다. 그 강한 힘은 다시 양기를 발생시키니,
그 생성된 양기를 교접을 통해 흡취하는 것이 바로 흡정도기니라.”
“으음…!”
하희는 다리를 꼬며 신음했다. 남자의 손과 입술이 닿은 곳에서 정염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온몸의 세포가 원초적인 욕망에 팔딱팔딱 뛰고, 실핏줄을 타고 전해진 희열은 피를 펄펄 끓게 만들었다.
“흡정도기의 최대 목적은 양질의 양기를 최대한으로 흡취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의 몸 구석구석에 제멋대로 퍼져 있는 원기를 한 곳으로 끌어모아 양기로 바꾸는 작업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사내라는 동물은 매우 충동적이니라. 원래 양이 지닌 성질 자체가 피동적인 음의 기질과 달리 왕성한 활동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충동적이고 왕성한 활동력을 지닌 상대의 본능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펴라. 오로지 한 가지 생각과 하나의 목적만을 지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사냥개처럼 너를 물고, 뜯고, 죽이고 싶어서 눈에 불을 켜고 날뛰도록 최대한 자극해라. 더 이상 상대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비로소 문을 열어주고 포획의 단계를 준비하는 것이다.”
남자는 하희를 황홀경으로 몰아넣었다.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둔덕을 향하는 그의 손길에 하희는 녹아 내렸다. 그가 유순한 강아지처럼 가슴을 핥고 깨물자 음란한 육욕에 빠져 방자하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교접이 시작되면, 경박하게 허리를 흔들거나 엉덩이를 들썩여 상대보다 앞질러 가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외려 네 음정(陰精)을 상대에게 빼앗기게 되고, 기와 혈이 고갈되면서 생명의 원천인 물줄기가 점점 허약해져 온갖 병마를 부르게 되고 종래에는 말라버린 우물처럼 될 것이니라. 몸을 뜨겁게 달구어 사내를 받아들이되, 이성은 항상 차갑게 식혀 두고 상대가 진입하면 숨을 깊이 마셔 아랫배에 이르게 하고, 상대가 나가면 슬그머니 내뱉어라. 그렇게 흡(吸)과 토(吐)를 반복하면 사내의 양기는 더욱 견고해지는 법이다.”
하희의 머릿속은 난잡한 환상들로 채워졌다. 사내를 끌어안고 그 건장한 힘을 소유하고 싶은 갈망에 몸부림쳤다.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뜨거운 애욕이 요원의 불길로 변해 무섭게 번져 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남자가 하는 말을 머리에 새겨 두려 애를 썼다.
“이제 포화상태에 이른 양기를 취해 양음(養陰·양기를 기름)의 단계에 들어야 한다. 남자에게 양질의 양기를 허락 없이 얻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소 훌륭한 그릇, 즉 명기(名器)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 악기가 좋아야 천래의 묘음을 연주할 수 있듯이, 그릇이 좋아야 양질의 양기를 마음먹은 대로 퍼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명기라 함은 심천(深淺)이나 광협(廣狹) 등의 형상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산이 꼭 높기 때문에 존귀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듯이 여자의 그릇도 마찬가지다. 열려 있지만 닫혀 있는 것처럼 항상 긴축해 있음이 좋고, 부드러운 가운데 신축작용이 왕성하면 금상첨화다. 사내를 받아들일 때는 마치 용의 비늘이 움직이고 솔개가 날개를 치듯 수축시켜라. 그러면 상대는 황홀경에 빠져 미친 듯 날뛰고 발광하게 될 것이니라.”
하희는 불끈 치솟은 남자의 건장한 힘에 정복당했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싱싱한 충격이었으며, 성숙한 여자라는 징표를 새겨준 충격과 환희의 고통이었다. 하희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갈매기처럼 격조 있는 신음을 흘렸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보조를 맞췄다.
“이제 몇 가지 금기를 알려 주겠다. 교합을 할 때 눈을 뜨고 상대를 바라보거나 불을 밝게 켜놓고 정사를 벌이면 어지러운 증세가 생기고 청맹과니가 될 우려가 있으니 삼가라. 춥고 덥고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큰 비가 내리는 날은 천지자연의 기가 바르지 못하니 반드시 피할 것이며, 술에 취했거나 음식을 많이 섭취했을 때, 그리고 걱정이나 노여움, 두려움, 기쁨으로 감정이 정상의 궤를 벗어난 날도 삼가야 한다. 사찰이나 무덤이 있는 장소를 피하고, 병중이나 병후 등으로 기의 순환작용이 원활치 못할 때는 음양이 조화를 이룰 수 없으므로 피함이 당연하다.”
하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로 도리질만 쳤다.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가 네 몸 안에서 용감무쌍한 전사가 되어 흉포하게 날뛰도록 만들어야 한다. 장수가 적진을 무너뜨리듯 힘차게 도리깨질을 하도록 격려하고, 용문의 잉어가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듯 위아래로 요동치게 코앓음을 흘려라. 갈매기가 너울을 타고 노닐 듯 방아를 찧을 때마다 들고 나는 것을 도울 것이며, 큰 바위가 바닷물에 잠기는 것처럼 네 몸 안으로 깊이 들어오도록 이끌면 필시 상대는 하루도 너를 멀리하지 못할 것이니라.”
하희는 닭이 홰를 칠 때까지 남자에게 온몸을 내맡기고 황홀한 상태에서 흡정도기를 배웠다. 30가지에 이르는 체위에서부터 회춘법과 도인술(導引術)에 이르기까지 모두 습득했다.
“훌륭하구나. 앞으로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남자와 교접을 맺게 되면 너 또한 서왕모(西王母)처럼 영원히 늙지 않고, 쾌락의 묘미를 맛보며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네가 아름답고 선택받은 여자이기에 주는 것이니라.”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하희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온 몸이 얼얼하고 땀이 흥건했지만 용이 여의주를 얻은 것처럼 황홀한 기분에 오래도록 취해 있었다. 영원히 늙지 않고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니 어찌 기쁘고 즐겁지 않으랴. 운명의 거칠고 뜨거운 회오리가 휩쓸고 간 그날 밤 이후, 사내의 그림자만 보아도 부끄러움으로 볼을 곱게 붉히던 청순한 소녀 하희는 희대의 요부로 표변했다.
48살이 되던 해에도 여전히 20살의 미색을 자랑하던 하희. 그가 말 많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팽조(彭祖)의 도인행기(導引行氣)를 습득한 초(楚)나라 대부 굴무(屈巫)를 만난 뒤였다.
■ 발문
성적 욕구란 무엇인가. 동·서양의 어느 전문가들에게 들어보더라도 식욕이나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빼놓을 수 없는 본능의 하나다. 종족 보존의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선가(仙家)에선 이 또한 장생에 이르는 길로 꼽는다. 완전한 음양화합으로 참다운 쾌락을 얻고, 그 쾌락으로 생명의 환희를 끌어내고, 그 환희로 원기를 북돋아 장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다만 감각적 쾌락만을 꾀한다면 삶을 보양하기는커녕 정기를 고갈케 하고 심신을 손상시켜 죽음에 이르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성욕을 술법으로 다루는 방중술의 함정이다.
‘흡정도기(吸精道氣)’를 완성한 춘추시대 하희의 삶은 어떠했는가. 하희는 청순한 이면의 어두운 본성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눈으로는 남자의 가슴을 꿰뚫어보고, 코로 남자의 속내를 맡아냈으며, 달콤한 입술은 사내를 유혹하는 촉수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복오빠인 공자 만(蠻)과 근친상간을 맺으면서 음란한 치맛자락을 요란하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밤마다 애욕의 땀방울을 쏟아내며 정욕을 불태우기를 1년여. 하희는 만의 정기를 고갈시켜 저승바닥에 팽개쳤다. 다음 상대는 또 다른 이복오빠인 이(夷)와 자(子)였다. 두 사람의 침대를 바쁘게 오르내리며 하희는 열심히 흡정도기를 갈고 닦았다. 그녀의 현란한 요분질에 이성을 잃고 쾌락에 빠진 형제는 결국 칼부림까지 나누게 된다.
육욕의 향연이 계속될수록 하희는 아름다워졌고 몸매는 탄력을 더해갔다. 그 후 진(陳)의 대부 하어숙(夏御叔)과의 혼인을 시작으로 세 명의 남편과 두 명의 왕을 복상사라는 배에 태워 구만리 황천길로 배웅하며 눈물을 쏟았다. 당대 사람들은 “하희는 세 번씩이나 젊어졌다”고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경이 넘었습니다. 그만 침소에 드시지요.”
무휼은 잔을 들며 자책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예양(豫讓)의 눈에는 살아 있는 이 무휼이 죽은 지백보다 못해 보인단 말인가? 왜 내가 베푼 호의는 거절하고 죽은 지백을 위해 복수를 하겠다고 나와 맞서는 것인가.”
“예양이 아니라도 세상에 인재는 많습니다.”
“말이라고 해서 다 명마가 될 수 없고, 여자라고 해서 다 열녀가 되는 것은 아니네. 나는 그의 신의와 대쪽 같은 기개를 존중하고 아까워하는 것일세.”
무휼의 얼굴은 격한 감정으로 달아올랐다.
“그래서 그를 더욱 얻고 싶은 것이다. 한번 신의를 맺으면 절대 변절치 않고, 의를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까지 버리는 기개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달기와 포사가 아름답다고 한들 어찌 의를 지키기 위해 흘린 사나이의 피보다 아름다우리.”
무휼의 말은 맹담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성심을 다해 모시는 사람의 심중에 저리 깊게 자리잡은 예양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만약 예양이 또다시 주공을 해하려 한다면 이번에는 이 맹담이 결코 그를 살려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지백을 위해 복수하려는 것처럼, 저는 주공의 안위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휼은 맹담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술을 마셨다.
“예양이라면 이 적교(赤橋)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지 않겠나? 내가 성중에 머무를 때보다 접근하기가 훨씬 쉬운데.”
무휼은 말에 올라 새로 완공된 적교를 건너며 뒤를 따르는 맹담에게 물었다. 맹담은 무휼의 주위를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의 물샐 틈 없는 진용을 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가 오늘 지백의 복수를 할 기회로 여기고 있을 것이기에, 저 또한 그를 맞을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병사들은 모두 예양의 얼굴을 알고 있는 자들로 배치했고, 사람들 틈에도 제가 가장 믿는 수하들을 골라 잠복시켜 놓았습니다.”
“예양이 그것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보는가?”
히이잉…! 무휼이 타고 있던 말이 앞발을 치켜들고 울부짖으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뜻하지 않는 변고에 맹담은 놀라 안색이 변했다. 맹담은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주공을 철저히 보호하라. 그리고 수상한 자를 모두 잡아 대령해라.”
마상에 앉아 있는 무휼은 외려 태연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반색을 띤 얼굴로 말했다.
“예양이 온 것이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의기만으로 짐승까지 두렵게 만들 수 있겠는가? 과연 예양이로다.”
“꿇어라, 어서.”
잠시 후 한 노인이 병사들에게 끌려와 맹담의 앞에 무릎이 꿇려졌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노인의 몰골은 매우 초라했다.
“행색이 수상한 늙은이라 잡아 왔습니다.”
맹담은 칼을 뽑아 들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고개를 들어라.”
노인이 고개를 들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문둥이처럼 수염과 눈썹이 하나도 없고, 얼굴은 누런 진물이 흐르는 종기로 더덕더덕했다. 그 끔찍한 모습에 맹담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병을 앓고 있는가?”
노인은 듣기 거북하고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이 골수에 미쳐 생긴 병이오.”
노인은 지팡이에서 섬뜩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비호처럼 맹담을 향해 몸을 솟구치며 칼을 휘둘렀다.
“열녀는 평생 한 지아비만을 섬기고 무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분을 위해 죽는 법. 주군은 목 없는 원혼이 돼 구천을 떠돌거늘, 아직 복수의 칼에 원수의 피를 묻히지 못했으니 어찌 한이 골수에 미치지 않으리.”
포악하게 내리긋는 칼날에 맹담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맹담은 어깨를 감싸쥐고 물러서며 외쳤다.
“자객이다. 어서 저자를 죽여라.”
칼과 창을 든 무사들이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노인을 공격해 왔다. 노인도 지체 없이 칼날을 번뜩이며 무사들 사이를 헤집고 들었다. 한과 복수의 일념이 실린 노인의 칼날에 피가 튀고 비명이 줄을 이었다.
“무휼. 오늘 당신의 목을 베지 못하면 내가 칼을 물고 죽겠다. 이 예양은 결코 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않기로 맹세했으니.”
무휼은 이미 노인으로 변장한 사람이 예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렇듯 자신을 죽음의 수렁에 내던지고 복수의 차가운 불꽃으로 몸을 태울 수 있는 의기를 지닌 사람은 예양뿐이다.
“어차피 죽으면 한줌 부토가 될 몸뚱이. 기꺼이 내 살점을 내어줄 테니 대신 당신의 목을 달라.”
예양은 결코 물러섬이 없었다. 적의 칼날에 살을 내어주고 목을 취했다. 의기를 붉은 피로 적시며 오로지 무휼의 목을 베기 위해 다가섰다. 옆구리에 적의 창이 박히자 예양의 칼은 본능적으로 적의 목을 꿰뚫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옆구리에 박힌 창을 뽑아 무휼을 향해 내던지며 외쳤다.
“신이시여. 이 예양이 한을 풀게 해주소서.”
예양이 던진 창이 허공을 가르며 무휼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가 던진 창은 무휼의 앞을 막고 있던 병사의 가슴에 박혔다. 지켜보던 무휼의 낯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활을 가져오너라.”
병사가 재빨리 활과 화살을 무휼에게 건넸다. 화살을 먹인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복수의 칼날을 번뜩이고 있는 예양을 겨냥했다.
“지백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얼굴을 저리 흉측하게 망가뜨리고 목소리까지 변케 만들었는가?”
피융…! 시위를 떠난 화살이 예양의 허벅지에 깊숙이 박혔다. 예양은 다리 부러진 호랑이처럼 무릎이 꺾였다. 그러나 그는 분연히 칼을 들고 일어섰다.
“무휼. 내려와 내 칼을 받아라.”
퍼억…! 또 하나의 화살이 예양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예양은 심하게 몸을 비틀거렸다. 의기는 꺾이지 않았으되, 만신창이가 된 육신은 더 이상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예양은 이를 악물고 오른손의 칼을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순간 수많은 병사들의 창검이 사방에서 예양의 몸을 꿰뚫듯 날아들었다.
“멈춰라.”
무휼의 외침에 병사들은 뒤로 물러섰다. 예양은 칼에 몸을 의지하고 말에 앉은 무휼을 쏘아보았다.
무휼은 화살을 먹인 시위를 당기며 물었다.
“나를 위해 충성을 맹세한다면 한 번 더 너를 살려주마. 나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고 이 혼란한 중원의 역사를 이끌어 볼 생각은 없느냐?”
예양은 결코 복수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나를 살려준 것은 당신의 덕이요, 복수를 하는 것은 나의 신의다.
무사의 신의란 죽음 앞에서 꺾이지 않고 일신의 영화와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정녕 살기를 거부하고 죽기를 바란단 말인가?”
“한 가지 부탁을 들어 달라.”
무휼은 활을 거두며 목소리에 정을 실어 보냈다.
“말해 보라.”
“죽음은 두렵지 않다. 다만 내가 죽으면 지백의 복수를 해줄 사람이 없어 그것이 한스러울 뿐. 하여 부탁하니 당신의 옷을 벗어 달라. 비록 목을 베지 못했으나 옷이라도 베어 복수의 의미로 삼겠다.”
무휼은 잠자코 예양을 바라보다 옷을 벗었다. 무휼이 자신을 향해 옷을 벗어 던지자 예양이 비호처럼 몸을 솟구치며 칼을 휘둘렀다. 예양의 칼날에 옷자락이 헤아릴 수 없이 베어졌다. 한과 복수의 응어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예양은 이윽고 넝마조각으로 변한 옷을 펼쳐 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공…! 이 예양, 비록 성심을 다했으나 능력이 부족하여 원수의 목을 베지 못했사옵니다. 원수의 옷을 벤 것으로 복수를 대신하오니 받아주시옵소서.”
그 말을 끝으로 예양은 목숨을 끊었다. 무휼은 천근으로 짓눌린 마음을 돌려세우며 맹담에게 명했다.
“예양의 시체를 거두어 후히 장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비록 적이었으나 그는 진정한 무사였다. 목숨을 바쳐 신의와 절조를 지키고 몸으로 실천한…!”
예양은 그렇게 죽었다. 적국의 푸른 하늘에 의기의 붉은 피를 뿌리고 장렬하게 산화했다.
그 후 사람들은 예양이 죽은 다리를 예양교(豫讓橋)라 부르며 그 기개를 오래도록 기렸다.
■ 발문
‘무사는 기(氣)를 중시하고 자신의 생명을 가벼이 여긴다.’
역사적으로 협의가 한껏 부양되고 무사를 식객으로 배양하던 풍조가 흥성하던 전국시대의 무사들이 신조로 삼았던 말이다. 그들은 주인을 위해 맹목적인 충성으로 무장했으며, 복수앞에서는 선악을 구분하지 않았고 생사도 도외시했다.
예양의 비장한 죽음도 당시의 사회풍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치욕스럽게 연명하기보다 죽어 의로운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는 영웅주의가 자살에 가까운 죽음까지 흔쾌히 극복하게 했다.
복수의 대명사격인 자객 예양. 그 복수심에는 지백의 시신에 대한 조무휼의 참혹한 대접이 기름을 끼얹는 촉매로 작용했다. 무휼은 지백의 해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삼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요강으로 사용했다. 그 소문을 전해 들은 예양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죽어 욕됨이 유골에까지 미쳤는데 어찌 복수를 하지 않겠는가.
예양은 성과 이름을 바꾸고 궁중으로 들어가 내시가 돼 복수의 기회를 노렸으나 실패하고 무휼에게 붙잡혔다. 무휼은 예양의 의기를 높이 여겨 살려보냈다. 치욕스럽게 살아 돌아온 예양은 복수심을 더욱 불태웠다. 그는 수염과 눈썹을 밀어 문둥병 환자로 변장하고 진양성으로 잠입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가 목소리를 듣고 알아보자 이번에는 숯불을 삼켜 목소리를 바꾸고 성에 잠입했다. 그는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무휼의 옷을 벤 것으로 협의와 기개를 지켰다.
그렇다면 무휼은 어떻게 되었는가. 무휼은 예양이 벤 옷을 나중에 펼쳐 보았고, 예양의 칼에 베어진 옷에서는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무휼은 그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날로 무휼은 병을 얻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백리해(百里奚)는 부인 두씨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태어나면서 가난을 업으로 물려받았던 백리해가 나이 서른이 돼서야 맞은 아내다. 하루하루 끼니 걱정에 시름을 덜 날이 없건만 아내는 지금까지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갓 돌을 넘긴 아들을 등에 업고 날품을 팔면서도 아내는 미소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험한 세상인데, 부인 혼자 어떻게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겠다는 것이오?”
“서방님께서 존귀한 자리에 올라 높은 뜻을 펼치고, 저희 모자를 잊지 않겠다는 약조만 해 주신다면 소첩은 어떤 고초도 이겨낼 것입니다.”
“내가 설사 상국(相國)의 자리에 오른다한들 어찌 처자식을 버려두고 부귀와 영달을 취하겠소.”
부인 두씨는 남편과 굳게 약조하고 길 떠날 남편을 위해 밥상을 푸짐하게 차리기로 했다. 어렵게 암탉 한 마리를 잡았다. 그러나 막상 불을 지필 나무가 없었다. 두씨는 대문의 빗장을 뽑아 닭을 삶고 밥을 지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백리해가 이별을 고하자 두씨는 아들을 안고 감춰두었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후일 귀하게 되더라도 소첩을 잊지 마소서.”
남편을 떠나보낸 두씨는 길쌈과 날품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연명해 갔다. 손톱이 닳고 손바닥에 못이 박이도록 일을 했다.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열심히 일한 덕에 두씨의 손을 빌리려는 사람은 날로 많아졌다. 그러나 정작 두씨가 기다리는 남편 소식은 3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마음을 굳게 먹고 묵묵히 아들을 키우며 남편이 소식을 전해 올 날을 기다렸다. 그녀는 남편의 학식과 고매한 인품에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다만 시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니 때가 이르면 틀림없이 한 나라의 동량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늘은 가혹했다. 5년이나 계속된 흉년으로 사람들은 하나둘씩 고향을 등졌고,
일거리를 잃은 두씨도 더 이상 집을 지키고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집을 떠나면 어디서 서방님을 기다린단 말인가? 하늘은 참으로 무심하시구나.”
두씨는 결국 아들 시(視)를 데리고 정든 고향을 등져야 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근근이 주린 배를 채우고 아들을 키웠다. 그러면서도 남편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두었다. 달빛이 처량하게 창문으로 스며드는 밤이면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루가 여삼추라 하더니, 벌써 십 년이 흘렀구나.
하늘이 무심치 않고 부부 인연이 변치 않는다면 언젠가는 서방님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또 몇 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 전국시대 참혹한 병화의 말발굽에 차이며 그녀의 기약 없는 방랑생활은 계속됐다.
한편 아내와 작별한 백리해는 제(齊)나라에서 청운의 꿈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누구도 양공(襄公)에게 그를 천거하는 사람이 없어 나이 사십이 되도록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걸식으로 세월을 탕진했다. 낙양에서는 주왕(周王)의 아들 퇴(頹)에게 의탁하며 소를 기르기도 했다. 한때 처자 생각에 고향을 찾기도 했으나 아내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다시 아내를 찾아 천하를 떠돌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우공(虞公)의 천거를 받아 중대부(中大夫)가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공이 나라를 진(晋)나라에 빼앗기게 되자 그는 진국(秦國)으로 시집가는 백희(伯姬)의 추종관에 임명됐다. 추종관이란 다른 나라로 시집가는 공주를 따라가 그 나라에 정착해 사는 관원이다. 백리해는 하늘을 우러러 한탄했다.
“나를 알아주는 주인을 아직 만나지 못해 높은 뜻을 펼 수 없으니 한스럽기 그지없구나.
이제 다 늙어 추종관으로 내몰리니 일신의 욕됨이 어찌 가볍다 하리.”
결국 백리해는 백희를 호송하던 도중에 초(楚)나라로 도망쳤다. 진(秦)의 목공(穆公)이 추종자의 명단에 백리해의 이름만 올라 있고 사람이 보이지 않아 묻자, 공손지가 대답했다.
“백리해는 현인이옵니다. 우공이 간할 수 없는 위인임을 알고 한번도 간하지 않았으니 지혜롭고, 우공을 따라 진(晋)에 갔으나 그의 신하가 되지 않았으니 충신입니다. 경세의 재주를 지녔으나 지금까지는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오니 그를 데려와 중용하시면 필시 나라의 근간을 세울 것입니다.”
공손지의 말을 들은 목공은 도망친 백리해를 수소문했다. 백리해는 남해에 있는 초왕의 목장에서 목마자로 말을 키우고 있었다. 목공은 초왕에게 사신과 양피를 보내 백리해를 죄인의 명목으로 진나라로 압송하겠다는 뜻을 전한 뒤 그를 진국으로 데려왔다.
백리해의 부인 두씨도 아들 시와 함께 천하를 정처 없이 떠돌다가 진나라에 들어왔다. 살림은 여전히 궁핍했다. 남의 빨래를 해주고 받은 대가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장성한 아들 시는 사냥을 하고 씨름판에서 뒹굴면서 두씨의 속을 썩였다. 어느 날 두씨는 남편 백리해가 진나라 상국이 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가슴이 뛰었다. 30년 만에 접한 남편의 소식에 빨래감을 팽개치고 남편을 만나기 위해 달려갔다. 두씨는 퇴궐 중인 백리해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두씨는 그러나 남편이 앞을 지나자 고개를 숙여 피했다.
‘지금 이런 모습으로 서방님의 앞에 나타난다면 위명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 이제야 때를 만나 높은 뜻을 펼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두씨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에 대한 모든 것을 잊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들 시에게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궁궐에서 세탁부를 구한다는 방이 나붙었다. 두씨는 자원해 궁에 들어갔다. 상국이 된 남편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두씨는 열심히 빨래를 해서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토록 그리던 남편의 모습을 대할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하루는 백리해가 당상에 앉아 있고, 악사들이 낭하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두씨가 보게 됐다. 두씨는 궁중의 하녀를 붙잡고 부탁했다.
“이 늙은이가 미천하지만 악(樂)에 대해 들은 바가 많으니 저 낭하에서 한 곡만 연주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이 늙은이의 소원이오.”
하녀는 두씨를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에게 데려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악사는 두씨에게 물었다.
“당신이 배운 음악은 무엇인가?”
“거문고도 타고 노래도 좀 부릅니다.”
악사는 거문고를 내주며 두씨에게 한 곡 타보라고 했다. 두씨는 거문고를 안고 연주를 했다. 두씨의 연주는 청아한 가운데 격조가 있고, 깊은 애조까지 담겨 듣는이들을 모두 심취시켰다. 그녀의 탄주에 감탄한 악사들이 이번에는 두씨에게 부탁했다.
“당신의 기예는 우리가 감히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오.
내가 상국께 고할 것이니 당상에 올라 상국을 위해 노래를 한 곡 불러보지 않겠소?”
“그래 주시겠습니까!”
악사가 고하자 백리해는 허락했다. 두씨는 백리해가 앉아 있는 당상 뒤편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 가까이서 남편 모습을 대하자 30년을 기다려온 인고의 세월이 격정과 증오로 뒤섞여 눈물을 자아냈다.
백리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 해를 보며 나직이 탄식하는 소리가 두씨의 귀에 들려왔다.
“30년, 각고의 노력 끝에 상국의 자리에 올랐으나 헤어진 처자식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 진정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렇게 당상의 자리에 앉아 있으나 가시방석이요, 산해진미가 좁쌀밥만 못하구나.”
두씨는 목이 메었다. 남편은 30년 전의 약조를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시름에 젖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작별할 때 알을 품은 암탉을 잡아 빗장으로 불을 지펴 삶고 끓여 눈물로 상을 차렸소. 오늘날 상국의 자리에 오르니 그때의 일을 정녕 잊으셨는가? 아버지는 산해진미로 배부르나 아들은 굶주리고, 지아비는 비단옷을 자랑하나 아내는 궁중에서 빨래를 한다네. 아서라, 지키지 못한 그날의 맹세가 허망스레 잦는구나.”
노래를 듣던 백리해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노래의 가사가 자신이 부인과 이별하던 그때를 그리고 있지 않는가? 백리해는 노래를 부르는 두씨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며 노래를 부르는 노파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부둥켜안으며 섧게 울었다.
■ 발문
장창화미(張敞畵眉)란, 한나라 장창이란 사람이 아내를 위해 눈썹을 그려줬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는 부인을 끔찍이 사랑했다. 조정에서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아내의 얼굴을 보기 위해 말을 몰아 집으로 향했다. 마부에게 빨리 달리라고 채근하는 것은 예사였고, 때로는 자신도 마부 옆에 앉아 부채로 말의 엉덩이를 쳐서 빨리 달리도록 했다고 한다.
백리해가 현인으로 사록에 이름을 남긴 데는 장창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부인 두씨의 용기 있는 믿음과 내조가 크게 작용했다. 남편의 학식과 재능을 굳게 믿었던 두씨는 형편이 가난하여 처자식을 두고 타국으로 나갈 수 없었던 백리해가 편한 마음으로 출사 길에 오르도록 힘을 얹고 믿음을 주었다. 나아가 혹독한 세파에 결코 주저앉지 않고 30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다린 끝에 아름다운 재회를 맞게 된다.
백리해가 절치부심, 상국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일신의 영달을 노린 결과라기보다 두씨와 맺은 약조를 한시도 잊지 않고 되새김질한 공덕으로 봐야 하리라.
목공은 훗날 백리해가 처자식과 상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좁쌀 천 종(鍾)과 금백 한 차를 선물로 하사했다. 또한 활쏘기와 사냥으로 무예를 연마한 백리해의 아들 시를 군의 대부로 삼았다. 시는 타고난 용맹과 뛰어난 무예로 연이어 타국을 정벌한 공로가 인정돼 장군이 되었으며, 서걸술(西乞術), 건병(蹇丙)과 더불어 진나라의 삼수(三帥)로 이름을 드높였다.
이 모두 오로지 남편의 입신양명을 위해 반평생을 헌신한 두씨가 온몸으로 일궈낸 값진 영화가 아니랴.
순절의 忠士 방효유, 십족을 멸해도 그의 절개는 꺾지 못했다
연왕(燕王·훗날의 영락제)은 책사 도연(道衍)의 당부를 떠올리며 대전을 나섰다. 그는 도연의 진언대로 방효유를 회유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방효유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참다 못한 연왕은 방효유를 옥에서 끌어내 직접 만나기로 결심했다. 더불어 당대의 대학자인 그에게 즉위의 조칙(詔勅)을 기초하도록 명령을 내릴 생각이다. 연왕의 뜻대로만 일이 처리된다면 정난(靖難)의 변으로 조카의 황위를 찬탈한 연왕은 그 당위성과 정통성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일단 도연의 당부대로 그를 한번 더 회유해 보겠다. 그러나 만약 끝까지 내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지금은 당근보다 채찍이 우선이고 붓보다 칼을 들어야 할 시기다.’
연왕은 붓보다 칼이 강하다고 믿는 인물이다. 끝까지 회유되지 않는다면 칼을 휘둘러 저들의 오만한 자존심을 꺾어버리고 자신의 방식대로 순치시킬 것이다. 압제도 칼날도 때로 치세의 근간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연왕 앞에 방효유가 끌려왔다. 연왕은 상복 차림의 방효유를 보고 발끈했다.
‘감히 내 앞에서 상복을 입었겠다.’
방효유는 연왕에게 아무런 예를 취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더니, 곧이어 땅을 치고 대성통곡하며 죽은 선황제를 위해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연왕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누르고 층계를 내려와 방효유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선생, 과히 상심하지 마시오. 나는 다만 주공이 성왕(成王)을 보필한 고사를 따르려 하는 것뿐이오.”
연왕은 옛날 주나라의 주공이 조카 성왕을 도와 선정을 베푼 사실을 들어 자신의 군색한 입장을 변명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날선 눈빛을 세우고 신랄하게 반박했다.
“그렇다면 성왕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오이까?”
“스스로 분사(焚死)했소이다.”
“성왕이 붕어하셨다면 어찌하여 그분의 장자께오서 대위에 오르시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장자가 대위를 잇는 것은 만천하가 알고 있는 계승의 법도이거늘, 설마 그것을 모르지는 않으실 터인데.”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계승의 법도보다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천하를 이끌어 갈 강력한 지도력이 우선으로 고려돼야 마땅하지 않겠소.”
“그렇더라도 응당 성왕의 아우님이 대위를 잇도록 하심이 도리가 아니오이까.”
연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호전적인 성격대로라면 당장 방효유의 목을 쳤을 것이나 도연의 당부를 생각해 노기를 가라앉히고 회유의 손길을 거듭 내밀었다.
“선생께서 즉위의 조칙을 기초해 준다면 앞으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인과 의를 토대로 왕도를 정립하고 태평의 장을 열도록 노력하겠소.”
연왕은 지필묵을 방효유 앞에 대령시켰다. 방효유는 다시 한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다가 붓을 들었다. 이어 몇 자를 힘찬 필치로 써 내린 다음 붓을 팽개치며 외쳤다.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내 손으로 조칙을 기초하여 선황제께 배역의 죄를 범할 수는 없소.”
연왕은 방효유가 쓴 글을 가져오도록 했다.
연적찬위(燕賊纂位·역도 연이 제위를 찬탈하다)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연왕의 두 눈에 분노와 살기가 요동쳤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이성으로 억누르려 하지 않았다. 얻을 수 없다면 철저하게 싹을 자르고 뿌리를 뽑아 후환거리를 없앰이 마땅하다. 연왕의 불 같은 호통이 방효유의 머리에 떨어졌다.
“이런 오만무례한 부유(腐儒·썩은 선비)를 보았는가? 네가 정녕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구나.”
방효유는 호통에 굴하지 않고 눈빛을 세웠다.
“이 자리에서 목이 잘리고 뼈가 부러지더라도 조칙의 초는 하지 않을 것이오. 지금까지 이 방효유는 제자들에게 의는 큰 것이고 목숨은 작은 것이라고 가르쳤소이다. 그러하거늘 어찌 죽음이 두려워 불의와 몸을 섞겠소.”
연왕의 두 주먹에 불끈 힘이 실렸다. 회천(回天)의 대업을 완성한 그에게 지금 두려운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거부하는 자는 죽이고, 따르는 무리에게는 밥그릇을 던져주면 된다.
“네 죄가 구족(九族)에 미쳐도 말인가?”
“구족이 아니라 십족을 참수한다 해도 내 뜻을 꺾지는 못할 것이오. 선비의 붓은 결코 무도한 칼날에 베이거나 꺾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셨소이까?”
연왕의 추상 같은 호령이 살 바람을 일으켰다.
“그 입을 닥치지 못하겠느냐.”
방효유는 절개 곧은 시선으로 쏘아보며 대꾸했다.
“내 말이 귀에 거슬리거든 혀를 자르고 입을 찢으시구려. 죽음이 두려워 바른 말을 아끼는 사람은 결코 아니오니.”
연왕의 두 눈에 핏발이 새겨졌다.
“오냐,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마.”
연왕은 방효유의 입을 귀밑까지 찢으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다. 도연의 당부도 더 이상 연왕의 포악한 근성을 다독이지 못했다. 참혹한 피의 숙청이 시작됐다. 극도로 분노한 연왕은 방효유의 입을 양쪽 귀밑까지 찢어놓았고, 방효유는 부릅뜬 눈으로 연왕을 쏘아보며 입이 찢기는 고통을 참아냈다. 이어 연왕은 방효유의 일가친척을 모조리 잡아들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팔십이 넘은 노인에서부터 갓 태어난 아이까지 방효유의 혈족은 모두 형장으로 끌려나왔다. 이어 방효유가 보는 앞에서 한 사람씩 참살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부인 정씨가 방효유의 앞에 끌려나왔다. 정씨는 입이 찢긴 남편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연왕을 향해 차분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아비를 섬기는 아낙으로 지아비의 고결한 뜻을 따르는 것은 삼종지덕의 근본이라 했으니, 오늘 도적의 칼에 죽은들 어찌 지아비를 원망하리. 다만 청강의 푸름이 훗날 욕되이 전해질까 두려울 뿐이로다.”
듣는 사람을 숙연케 하는 곧은 절개로 남편의 의를 받들고 정씨는 방효유가 보는 앞에서 참수됐다. 뒤미처 방효유의 아들과 형제들이 끌려나왔다. 서슬퍼런 칼날에 차례로 목이 베이면서도 누구 한 사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를 뜬눈으로 지켜보면서도 방효유는 선비의 기개와 굴강한 의분을 거두지 않았다. 피의 숙청은 밤새 계속됐다. 이미 포악한 근성을 스스럼없이 드러낸 연왕은 방효유의 구족을 모두 참살했다. 그것으로 분을 삭일 수 없었던 연왕은 방효유의 문하생과 친구들을 모두 잡아들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네 말대로 십족을 참수할 것이다.”
십족이 어디에 있겠는가. 당시 관례로 친족의 4대와 외족의 3대, 그리고 처족의 2대를 합해 구족이라 일컬었다. 연왕은 방효유의 친구와 문하생들을 모두 잡아들여 이를 십족으로 규정하고 목을 벴다. 그로 인해 방효유와 연좌돼 참수된 사람이 무려 847명에 이르렀으며, 유배의 길에 오른 사람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하늘도 두려워 숨을 죽이고 날짐승도 슬피 울며 날개를 접었다는 그날의 숙청을 두고 후세의 사가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진시황도 잔인했지만 죄인을 다스릴 때는 삼족을 멸했다. 그런데 영락제는 십족을 참수했으니 그 잔인함은 진시황을 능가함이 아니겠는가?”
부귀와 영화를 마다하고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방효유. 그는 취보문(聚寶門) 밖으로 끌려가 참수의 칼날에 최후를 맞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절명시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실려 전해온다.
“하늘이 난리를 내리시니 어찌 그 연유를 알소냐/ 간신이 흉계로 나라를 농락하는구나/ 충신 분(憤)을 발(發)하여 피눈물 함께 흐른다/ 이제 군(君)에 순(殉)하고자 하니 또 무엇을 바라랴/ 오호통재라, 무릇 나의 잘못은 아니거늘.”
방효유. 자는 희직(希直) 또는 희고(希古)라 하였으며 호는 정학(正學)이다. 절강성(浙江省) 해현 출신으로 일찍이 대학자 송렴(宋濂) 문하에서 수학했다. 뛰어난 학문과 곧은 절개로 홍유의 반열에 올라 명망을 얻었다. 비록 정난의 변에 비참한 말로를 맞았으나 역사는 순절(殉節)의 충사(忠士)로 그를 손꼽고 있다.
■ 발문
연왕 주체. 정난의 변으로 황제의 위를 찬탈하고 대제국의 기반을 굳건하게 다졌던 그는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려에서 공녀로 건너간 석비(碩妃) 소생이다. 일찍이 사람들은 연왕을 말할 때, 주원장의 자질을 가장 많이 이어받아 지용을 지닌 인물로 평가했다. 학문은 물론이요 용맹 과감한 기상으로 북벌에도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주원장도 생전에 연왕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방계 소생이란 벽에 부딪혀 포기했다.
연왕이 회천의 대계를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직접적인 도화선으로 작용한 것은 당시 남경 황실에서 추진된 제왕에 대한 삭번(削藩:변방 권력을 약화시켜 중앙 권력을 강화함)의 계획이다. 어린 황제를 보필하던 황자징(黃子澄)과 제태(齊泰) 등 많은 대신들은 지나치게 세력이 강한 황제의 숙부들을 제거해 후환의 불씨를 없애려 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목표에는 북경의 장룡으로 불리는 연왕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을 외면하고 연왕을 제국의 통치자로 선택했으며, 결국 ‘10족’이 참수되는 참화까지 빚어냈다.
연왕이 폭압만을 내세워 황제의 보위에 오른 것은 아니다. 건문제와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남경으로 행군하는 도중 병사 한 명이 병으로 쓰러졌을 때의 일이다. 연왕은 병사를 말에 태우고 낙오하지 않도록 격려했다. 그것을 보고 부하 장수가 옳지 못한 처사라고 말하자 연왕은 이렇게 꾸짖었다.
“사람과 말 중 어느 목숨이 더 중요한가?
방효유의 10족 참수와는 별개로 연왕의 또 다른 모습을 비추는 삽화가 아닐 수 없다.
조자건의 칠보시, “일곱 걸음만에 詩를 짓는다면 살려주마”
형님 조비(曹丕)는 부친(조조·曹操)을 따라 적벽대전에서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남정길에 올라 여기에 없다.
마음만 먹으면 형수이자 과거의 연인이었던 견복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만나서는 안 된다. 자건은 달빛을 밟으며 어제 견복이 자신에게 보낸 사연을 떠올렸다.
“못에서는 새로 연잎이 피어나고 이 가슴에는 사모의 불길이 꺼지지 않아 노래를 지어 보냅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요, 되돌릴 수 없는 인연이기에 그리움은 깊어지고 이별의 아픔은 더하리라.
‘어찌하여 하늘은 우리에게 인연을 맺게 해놓고 함께 원앙의 정을 나눌 수 없도록 갈라놓았는가?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다한들 담 하나가 구만리 길이요, 연모의 정이 깊다한들 형제의 뿌리보다 더 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자건의 눈에 금봉루에서 한 여자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긴 옷자락을 끌며 자건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자건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토록 절실하게 만나고 싶어했던 여인 견복이 틀림없다.
달빛에 드러난 고운 자태는 하얀 박꽃처럼 처연함을 두르고 있다. 이미 인연이 갈라놓은 두 사람은 숙명처럼 다시 만났다. 견복은 자건과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자건이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자 견복은 젖먹이처럼 안기며 울먹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을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둘은 바쁘게 상대의 옷깃을 열었다. 너무 오랫동안 막아둔 그리움이 거친 격랑의 너울로 두 사람을 휘감았다.
서로의 옷을 벗기며 익숙한 냄새를 맡느라 가쁜 숨을 내쉬었다. 견복의 육체는 여전히 매혹적이고 관능이 넘쳐났다.
나무뿌리처럼 하얀 목덜미는 시들지 않은 고운 미태를 간직했고, 풍염한 젖가슴은 농익은 염기로 자건의 손길을 부르고 있다. 둘은 들짐승처럼 뒤엉켜 서로를 핥고 더듬었다.
온몸을 욕망의 불꽃으로 태우며 상대를 더 깊이 받아들이고 소유하려고 몸부림쳤다. 견복은 자건이 봇물처럼 쏟아내는 정욕을 아낌없이 받아들이며 속삭였다.
“우리 아들 예(叡)가 얼마나 잘 자라고 있는지 당신은 모르시죠? 크면서 점점 당신을 닮아가요.
자건은 묘한 희열을 느꼈다. 형님이 자기 자식이라고 믿는 아이는 견복과 자건 사이에서 잉태된 비밀의 씨앗이다.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자건은 수컷의 우월감으로 어깨에 힘이 절로 실렸다.
‘그래 내가 형님에게 빼앗긴 것은 별로 없다.’
자건은 척추가 부러질 정도로 견복을 끌어안았다. 격렬하고 난폭한 힘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욕망을 삼켰다.
견복은 소리내어 흐느꼈다. 격정에 못 이겨 울고 열망의 환희에 자지러졌다. 무한정 타오르는 욕념에 콧소리까지 흘렸다.
“행복해요.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어요.”
조조가 건안 25년 정월 숨을 거두었다. 당시 자건은 세자가 된 조비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도성을 떠나 자신의 영지로 내려와 있었다. 조조의 죽음은 자건에게 시련과 절망의 암울한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 자건이 장례식에 참석하려 하자 정의 형제가 막아섰다.
“가지 마소서. 가시면 죽사옵니다.”
“죽음이 두렵기로 어찌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말라고 막아서는 것인가? 설혹 형님의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응당 아버님이 마지막 가시는 길을 옆에서 지키고 왕생극락을 빌어야 할 것이네.”
“이대로 주군을 사지로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정히 가시려거든 저희 형제의 목을 베고 가소서.”
자건은 정의 형제의 뜻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여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 살아 남을 방법이 있다면 살아야지. 황제도 죽으면 산 개만 못한 법이니까. 진흙탕 위에 몸을 누이고 풀뿌리와 이끼로 연명할지라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번에 형님의 칼을 피한다 해도 언제 죽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형님은 더 철저하게 내 목을 조여올 테니까.’
그 해 10월. 조비는 헌제(獻帝)를 폐하고 황제의 대위에 올랐다. 국호를 위(魏)로 고치고 낙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견복은 황후가 됐으며 아들 예는 황태자로 책봉됐다.
“황후께서도 몸단장을 곱게 해 두시구려. 오늘은 자건 아우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아름답게 보여야 하지 않겠소.
견복은 조비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은 조비가 황제로 즉위한 축하연이 열리는 날이다. 당연히 자건도 축하연에 초대됐다.
‘기어코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견복은 눈을 감았다. 이제 마지막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조비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건을 죽이려 할 것이다. 견복은 눈을 감고 자건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기억 속으로 잠시 빠져들었다.
“성수만세(聖壽萬世)…!”
황제의 권좌에 앉은 조비를 향해 자건은 축하인사를 올렸다. 조비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옆에 있는 견복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자건, 우리 형제가 서로 미워하고 반목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하늘도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너를 죽이면 사람들은 동생을 죽인 악독한 인간이라고 내게 손가락질을 하겠지?”
“저를 죽여 형님이 편할 수 있다면 그리하소서.”
조비는 자건을 쏘아보며 술잔을 들었다. 그의 굽힘 없는 당당함에 비위가 뒤틀렸다.
녀석은 붓을 가까이한 사람답지 않게 눈빛에 힘이 있고 의기는 강건하다. 조비는 자건이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견복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네게 죄를 묻겠다. 자식 된 몸으로 선제의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고, 군(君)으로 다스림에 소홀하고 주색을 탐한 죄는 죽어 마땅하다.”
자건은 고개를 들어 조비의 옆에 앉아 있는 견복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여자의 창백한 얼굴에 드리워진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를 대하자 심근을 도려내는 것 같은 통렬한 아픔이 일어났다.
“지금은 법이 타락하여 행하는 사람에 따라 가벼움과 무거움이 다르고, 받는 사람에 따라 크고 작음이 결정되는 세상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야 고작 내려진 법에 목을 맡기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조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견복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자건의 아들일 거라는 시녀들의 숙덕임을 생각하자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그러나 그는 심중의 분노를 억누르고 끓는 살기를 근엄한 표정에 감추었다.
“네 죄는 국법으로 엄히 다스려야 마땅하지만 최근 황실에 흉사가 잦았고 그로 인해 백성과 태후마마의 상심이 크신지라, 짐이 이를 감안하여 특별히 소명의 기회를 주고자 한다. 너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과인하고 문재가 뛰어나 선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지금부터 내가 일곱 걸음을 떼어놓을 동안에 시를 한 수 지어보아라. 네 천재성이라면 일곱 걸음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자건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견복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지금 이 만남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하늘이 맺어준 잠시의 인연으로 후회 없이 사랑했고, 뜨거운 정열을 불태웠던 여인이다.
조비는 날 선 칼을 뽑아들고 자건을 겁박했다.
“시를 완성하지 못하면 이 칼로 네 목을 베겠다.”
조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자건은 눈을 감고 시를 읊었다.
“콩대를 태워 콩을 삶으니(煮豆燃豆 )
콩이 가마솥 안에서 우는구나(豆在釜中泣)
본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本是同根生)
서로 들볶는 것이 어찌 그리 심한지(相煎何太 急).”
자건이 시를 다 읊은 것과 조비가 마지막 칠보를 내디딘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 시가 그 유명한 조자건의 칠보시(七步詩)다.
■ 발문
견복의 빼어난 자태는 삼국 시대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달에는 항아가 있고 하북(河北)에는 견일녀(甄逸女)가 있다”라고 입을 모을 정도였다. 그녀와 처음 운우의 정을 나누던 날 조자건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머릿결은 비에 젖은 까마귀의 깃털이요, 눈썹은 아미산 위로 떠오르는 초승달을 닮았도다. 두 눈은 어린 사슴처럼 수줍게 반짝이고, 마늘쪽 같은 콧날의 선은 우미하구나. 아침 이슬을 머금은 앵두 같은 입술에는 정염이 가득하며, 두 뺨은 막 껍질을 벗겨놓은 복숭아와 같도다. 탐스럽고 팽팽한 젖가슴의 융기는 구름을 두른 설산의 아름다움이요, 잘록한 허리는 꽃을 희롱하는 말벌의 그것이로다.”
그 절색의 미인을 만나 사랑을 불태웠던 자건은 최염(崔琰)의 배신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견복을 친형의 반려자로 떠나보내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다. 그 후 견복을 신부로 맞은 친형 조비는 그녀가 낳은 아들이 자건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복수의 무자비한 칼을 휘두른다.
견복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고 자건은 오지로 유배를 보낸다. 견복의 죽음으로 삶의 희망과 의지를 모두 잃은 자건은 술로 세월을 탕진한다.
어느 날 자건이 바닷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아름다운 여신이 나타나 안개 속에서 춤을 추었다. 자건의 눈에는 춤을 추고 있는 여신이 꿈에 그리던 견복으로 비쳐졌다. 그는 춤을 추고 있는 견복을 보며 두 사람의 사랑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시를 지었다.
그때 그 시가 낙신부(洛神賦)다. 원제는 감견부(感甄賦)였으나 조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조예가 ‘낙신부’로 개명했다. 자건은 천하를 떠돌다가 41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이미 서른을 넘긴 자신에 비해 열여덟 연비는 싱싱하고 청초한 얼굴에 풋풋한 향내를 풍겼다. 특히 매혹적인 것은 입술이었다. 한껏 이슬을 머금은 붉은 꽃봉오리처럼 도톰한 입술은 사내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어린 것이 입술만으로도 사내를 여럿 녹이겠구나.’
저 관능적인 입술로 새살거리며 교태를 부리면 철심석장(鐵心石腸)을 지닌 사내라도 넋을 빼앗기리라. 정수는 연비의 손을 잡고 언니처럼 따뜻한 말로 접근했다.
“여자로 태어나 한 사내를 지아비로 섬기는 것 또한 핏줄로 맺어진 인연 못지않게 깊은 인연이 아니겠느냐? 너를 대하니 꼭 피를 나눈 자매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구나. 친자매처럼 성심을 모아 대왕을 잘 보필해서 선정을 베풀고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꾸나.”
어린 연비는 정수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왕궁은 온갖 모략과 시기의 칼날이 번뜩이는 곳이다. 한 남자의 사랑과 총애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치열한 암투에 언제 어떻게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 살아 남으려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이나 왕의 절대적인 총애를 든든한 방패로 삼아야 한다.
“이끌어만 주신다면 소첩 신명을 다해 친 혈육처럼 모시고 따를 것이옵니다. 아는 게 박하고 재주가 천하오니 많은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정수는 연비의 어깨를 친근하게 다독였다.
“너는 젊고 고운 데다 행실이 방정하니 대왕께서도 틀림없이 가까이 두고 총애하실 것이다. 한 가지 일러줄 테니 명심했다가 대왕을 모실 때 잊지 않도록 하거라.”
“말씀하시옵소서.”
“대왕께서는 여자를 가까이하실 때 콧김과 입김이 풍기는 것을 매우 꺼리고 불쾌해하시니 대왕을 모실 때는
‘고것 참, 볼수록 곱고 교태가 흐르는구나.’
젊은 연비를 품에 안은 회왕은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다. 갓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싱싱하고 탄력이 넘치는 연비의 육체는 회왕에게 생명의 환희를 새삼 일깨우게 했다.
특히 연비의 도톰하게 다물린 입술은 요염한 관능을 자아내며 회왕의 욕망에 뜨거운 풀무질을 했다. 토라진 듯 삐쭉이면 깨물어 주고 싶고, 수줍게 새살대면 애간장이 녹아 내렸다. 마음대로 물어뜯고 삼키고 싶은 갈망에 회왕의 숨결은 가빠졌다. 회왕이 성급하게 입술을 삼키려하자 연비는 숨을 멈추고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향합처럼 회왕의 거친 욕망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새벽닭이 홰를 칠 때까지 숨가쁘게 육체의 유희에 몸을 불살랐다.
“요즘 용안이 많이 수척해지셨사옵니다.”
정수는 회왕을 향해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가벼운 원망이 서린 정수의 말에 회왕은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회왕에게 정수는 현숙한 처첩이자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지혜로운 인생의 조력자다. 비록 육체적인 매력은 많이 시들었지만 회왕이 가장 믿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여자는 정수뿐이다.
“연비는 마음에 드시던가요?”
정수의 물음에 회왕은 말을 돌렸다.
“짐이 복이 많은 모양이야. 이 나이에 그렇게 젊고 고운 아이를 가까이 두게 됐으니. 한데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 연비가 짐을 대할 때마다 항상 코와 입을 손으로 가리는 버릇이 있는데 어인 일인지 모르겠구나.”
정수는 회왕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너무 노여워하시지 마옵소서. 대왕의 옥체에서 풍기는 악취가 너무 심해서 그러는 것이라 하오니.”
정수의 말에 회왕은 불 같은 분노를 드러냈다.
“저런 발칙한 계집이 있나?”
회왕은 연비의 코를 자르고 평생 마구간 옆에 방을 들이고 생활하도록 가혹한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연비를 제거한 정수는 회왕의 총애를 밤낮으로 독차지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이번에도 새파란 계집이라….’
정수는 새로 궁에 들어왔다는 숙비(叔妃)의 소식을 접하고 밥상을 물렸다. 연비를 내쫓고 지난 일년 동안 웃음을 잃지 않았던 얼굴에 다시 그늘이 드리워졌다. 사내의 눈길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찾게 마련이다.
정수는 화장을 지웠다. 수더분하고 편안하게 보이는 아낙의 모습으로 숙비를 맞을 생각이다. 사람은 첫 대면이 중요하다. 상대가 각을 세우고 경계심을 품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낮춰 접근해야 한다.
“정말 다행이야. 달기나 포사처럼 나라를 망칠 여자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숙비를 보니 마음을 놓아도 되겠어.”
얼굴에 포근한 미소를 머금고, 입으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숙비를 맞은 정수의 가슴에는 차갑게 날을 세운 비수가 감추어져 있었다.
‘어디서 요물 하나를 불러들였구나.’
숙비의 미려한 자태에 정수는 분노가 치밀었다.
백여우의 화신이 이러할까? 맑고 수려한 눈매에 콧날은 바르되 높지 않아 보기 좋았고, 풍만한 가슴과 잘 묶어놓은 실타래 같은 허리는 오묘한 선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탄력이 느껴지는 살집과 흰 피부는 눈이 부실 지경이다. 특별히 음탕하거나 육감적인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도 선정적 매력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다. 이런 여자는 죄악의 화신이며 동시에 신성한 미의 정령임에 분명하다.
정수는 넉넉한 웃음에 날 선 비수를 감추고 품에서 향낭(香囊)을 꺼내 숙비의 손에 꼭 쥐어주며 다정한 어투로 당부했다.
“조정향(助情香)이라는 귀한 향이야. 대왕을 가까이 모실 때 꼭 패용하도록 해. 밤에는 남자의 정욕을 돕고, 사랑을 뜻대로 이룰 수 있게 해주는 효험이 있다는데 숙비에게 특별히 주는 거야.”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숙비 또한 연비가 그랬던 것처럼 정수의 자상한 보살핌에 감격의 눈물을 지었다. 살바람이 가득한 왕궁에서 그녀가 앞으로 믿고 의지할 사람은 정수뿐이라고 생각했다.
회왕은 숙비의 알몸을 대하자 숨이 콱 막혔다.
하얀 살결은 불빛 아래 이양한 색채로 회왕의 눈길을 가두고, 호랑나비의 인분(비늘가루)처럼 반짝이는 화려한 관능은 사내의 말초신경을 뜨겁게 달구었다.
“너를 얻은 것을 어찌 몇 백 리 땅을 얻은 것에 비하겠느냐. 너를 영원히 곁에 두고 인생의 참맛을 함께 즐길 것이니라.”
숙비는 회왕의 목을 끌어안고 교성을 자아냈다.
“성은에 소첩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회왕은 거칠고 난폭한 손길로 숙비의 풍만한 젖가슴을 으스러져라 쥐어잡고 뜨거운 입술로 귓불을 깨물며 번식작업을 서둘렀다. 음욕이 봇물처럼 터졌다. 행여 누군가 떼어놓을세라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몸부림을 쳤다. 숙비의 하얀 몸뚱이가 사내의 타액으로 번질거렸다. 회왕은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황소처럼 가쁜 숨을 내쉬며 들고남에 온힘을 쏟아냈다.
정수는 오랜만에 회왕과 정원을 걷고 있었다.
“대왕께서 소첩은 영영 잊은 줄 알았사옵니다.”
“허허…! 거 무슨 당찮은 말인가?”
“숙비를 총애하시느라 소첩의 침소에 발길을 끊으신 지 달포를 넘었사온데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그대가 짐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여자라면 숙비는 화로 같은 존재일세. 우물은 사시사철 필요하지만 화로는 겨울 한 철이 지나면 쓸모가 없는 법. 너무 서운해하지 말도록…!”
“걱정 마옵소서. 숙비를 시기하지는 않사오니.”
회왕은 향낭 하나를 정수에게 내밀며 물었다.
“숙비가 짐을 맞을 때마다 이 향낭을 가까이 두거나 몸에 패용하는데 무슨 향인지 알겠는가?”
회왕이 건넨 향낭은 정수가 숙비를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준 조정향이 든 향낭이었다.
“이 향은 월족(越族)의 여자들이 미친개를 쫓기 위해 차고 다닌다는 추견향(追犬香)이옵니다.”
회왕은 부르르 몸을 떨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지금 미친개를 쫓는 향이라고 했느냐?”
“소첩, 송구하옵고 죄스럽사옵니다.”
“그렇다면 짐이 미친개로 보였다는 말인가?”
분노로 눈에 핏발을 돋은 회왕을 바라보며 정수는 비로소 미소를 머금었다.
■ 발문
모계 씨족사회가 해체돼 부계중심사회로 향하는 과도기에 여자들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출가한 것이 아니라 무력에 의한 강압적인 혼인을 한 예가 많았는데 이를 겁탈혼(劫奪婚)이라 했다.
겁탈혼은 세 가지 경우로 크게 나뉜다. 첫째는 같은 씨족의 여자를 겁탈해 아내로 삼는 것이며, 둘째는 부락 간의 전쟁에서 상대 씨족 부락의 부녀자를 약탈해 전리품으로 삼은 후 자기 씨족 부락의 남자에게 분배하여 아내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이 권력과 무력을 이용해 부녀자를 약탈해 첩으로 삼는 경우로 특히 전국시대에 활발하게 자행됐다.
송나라 재상 화부독은 길거리에서 공부가의 아내를 만나게 되는데 그 아름다움에 눈이 뒤집혀 공부가를 죽이고 그 아내를 첩으로 삼았고, 노장공은 당씨 집안의 미부인을 보고 유부녀임에도 겁탈해 첩으로 곁에 두었으며, 식나라를 멸한 초왕은 식왕의 아내 규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취했다.
또한 초나라의 공자 재는 대사마의 처첩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대사마를 죽이고 그 처첩과 재산을 몰수했으며, 한문제의 생모 박희(薄姬)는 본래 위왕 표(豹)의 여자였는데 한신(韓信)의 포로가 되어 한고조의 여자가 됐다.
이렇듯 약자의 여자를 마음대로 수탈하고, 전리품처럼 쟁취하던 겁탈혼은 한조의 역사 발전과 더불어 점점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 후로도 세력이 강한 자는 약한 상대에게 여자를 바치도록 끊임없이 협박했고 처첩들은 숙명적으로 자신들끼리 싸움을 벌여야 했다. 약탈혼(掠奪婚), 양전혼(佯戰婚)이라고도 하는 겁탈혼은 고대 씨족부락의 외혼제(外婚制)의 유속(遺俗)이기도 하다.
바위에 앉아 연연한 노을을 바라보는 혜제(惠帝)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들짐승보다 나을 게 없지 않은가. ‘팔왕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친정에 나섰다가 장방(張方)에게 패해 시졸(侍卒) 몇 명만을 데리고 도망쳐 며칠째 구차하게 연명하고 있다.
“실로 인간의 삶이라는 게 한낱 물거품과 같고 황제의 권좌는 일장춘몽과 다를 게 없구나. 영고성쇠가 이리 허망하고 부질없는 줄 일찍이 알았다면 부귀권세를 위해 피를 나눈 형제와 아귀다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로다.”
식량도 이제 동이 났다. 몸은 지치고 가야 할 길은 너무 멀다. 사방에서는 역도의 장수들이 포위망을 시시각각 좁혀오고 있다는 절망적인 보고뿐이다.
“멀지 않는 곳에 산장이 있사오니 오늘 밤은 그곳에서 이슬을 피하시옵소서. 저희가 안내하겠사옵니다.”
시졸들의 채근에 혜제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래 가자꾸나. 아직 살아서 얼굴을 봐야 할 사람이 너무 많지 않으냐? 아우 예(乂)도 봐야 하고, 양현지(羊玄之)도 만나봐야지.”
“이슬이 차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혜제 일행이 산장에 도착하자 노인 한 명이 대문을 활짝 열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행을 맞았다. 혜제는 더럭 의심이 생겼다.
“노인장은 내가 누군지 아는가?”
“며칠 전부터 이 황산에 여의주를 잃은 황룡이 길을 잃고 늑대의 무리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사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용도 물 밖에 나오면 개미에게 물어뜯기는 법이라 하였사옵니다. 며칠 이곳에 머무르시오면 곧 물을 만나게 될 것이오니 그저 심사를 편히 하시고 존체를 보중하옵소서.”
“역적 성도왕과 내통한 자는 아니렷다?”
“그렇다한들 이제 와서 어쩌시겠사옵니까? 며칠 더 살기 위해 초나라의 성왕(成王)처럼 곰의 앞발바닥을 삶아 오라고 하시겠습니까?”
“요망한 늙은이로구나.”
뒤에 있던 시졸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혜제는 시졸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입가에 넉넉한 미소를 머금고 수염을 쓰다듬는 노인의 기개가 사뭇 범상치 않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오늘 노인장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으리다.”
혜제는 깜짝 놀랐다. 내실에는 이미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돼 있지 않는가? 거느린 시졸의 숫자까지 정확히 맞춰 준비했는지 어느 한 가지 부족하거나 남는 것이 없었다. 노인이 술잔을 채워 주자 혜제가 물었다.
“만약 짐이 하늘의 버림을 받지 않고 낙양으로 돌아가게 되면 노인장을 잊지 않고 후히 보답할 것이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이 늙은이는 오늘의 인연에 만족할 뿐이옵니다.”
“바라는 게 없다는 말씀이신가?”
“자고로 영화나 권세는 모두가 큰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한 줄기 물과 같은 것이온데 이 늙은이가 망령되이 무엇을 바라겠사옵니까? 개펄의 게도 자기 몸집에 맞는 구멍을 파는 지혜가 있는 법이옵니다. 이 늙은이는 산지기로 살다 죽는 것이 더없는 복이옵니다.”
“개펄의 게라…?”
혜제는 노인의 말을 곱씹으며 술잔을 비웠다.
“완(婉)아, 여기 술이 비었구나.”
노인의 말이 끝나자 말쑥하게 단장한 여자가 술을 들고 노인에게 다가왔다.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피부가 백옥 같은 미녀였다. 혜제는 그녀의 몽환적인 아름다움에 한동안 넋을 잃고 말을 잇지 못했다.
“절색이로다. 진정 빼어난 자태로고…!”
노인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혜제를 바라보았다.
“이 늙은이의 성은 구( )이옵고 나이 육십이 넘었사오나 타고난 복이 척박하여 슬하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고 핏줄이란 오직 이 못난 여식뿐이옵니다.”
혜제는 노인의 손을 잡고 간청했다.
“짐이 오늘 노인장을 만나 은혜를 입었는데 또 이렇게 귀한 인연으로 그대의 딸을 만났으니 평생 곁에 두고자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혜제의 말에 딸이 머리를 조아리며 답을 대신했다.
“소녀 감히 무례한 청이 있사옵니다.”
“말해보거라.”
“만약 소녀의 세 가지 청을 들어주신다면 기꺼이 폐하를 모시고 시침(侍寢)할 것이옵니다.”
“그 세 가지 청이라는 게 무엇이냐?”
“첫째 소녀를 사숙비의 죽음으로 비어 있는 숙비(淑妃)로 봉하여 주시옵고, 둘째 폐하께서 붕어하시더라도 소첩은 불문에 출가하지 않고 이 산장으로 돌아와도 된다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마지막으로 닷새에 한 번씩 어떤 일이 있어도 소첩의 처소를 찾아주겠다고 약조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소녀는 성심을 다해 폐하를 모시겠나이다.”
실로 당돌하기 이를 데 없는 청이었으나, 혜제는 그 자리에서 굳게 약조하고 새로 숙비로 맞은 구씨의 딸과 함께 침소에 들었다.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나긋나긋하게 휘감기는 구숙비의 젊고 싱싱한 육체를 끌어안고 혜제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막장에 던져진 맹수처럼 욕망을 태우고 정열을 불살랐다. 시시각각으로 목을 조여오는 적의 칼날 앞에서 구숙비를 끌어안고 육체의 쾌락과 정신의 환락에 매달린 그의 모습은 비장하고 처절하게 느껴졌다.
‘하늘이 과연 나에게 내일이란 시간을 부여할 것인가? 지금의 내 처지가 실로 망막하기만 하구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목숨이기에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몸부림은 더 절박하고 간절한 것이리라.
“아뢰옵니다. 역적의 수장 견수(牽秀)가 군사 수천을 이끌고 산장을 완전히 포위했사옵니다.”
구숙비와 황홀한 유희를 즐기던 혜제는 이 청천벽력 같은 보고에 사색이 됐다. 지금 혜제의 주위에 병사는 한 명도 없고 시졸 몇 명이 고작이다. 혜제는 비통한 얼굴로 구숙비의 손을 꼭 잡았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평생 너를 옆에 두어도 시간이 아까울 것인데 이렇게 헤어져야 하다니.
어찌 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단 말이냐?”
구숙비는 옷깃을 여미며 침착하게 말했다.
“폐하, 두려워하지 마시옵소서. 소녀가 곁에 있는 이상 누구도 폐하를 해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구숙비는 혜제를 안심시킨 다음 갑옷을 입고 장창을 들더니 훌쩍 말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순식간에 500여명에 달하는 장졸들이 무기를 들고 산장으로 몰려들었다. 구숙비는 장창을 치켜들고 늠연하게 장졸들을 향해 외쳤다.
“적장 견수는 내가 상대하겠다. 너희는 역도의 군사들을 한 명도 살려보내지 마라.”
장졸들을 데리고 비호처럼 산장을 빠져 나가는 구숙비를 보며 혜제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 참,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진정 아닐 것이고. 저 아이의 기상이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맹장과 같지 않은가?”
“견수가 누구냐? 썩 나와서 나와 겨뤄보자.”
구숙비의 외침에 견수는 눈을 부라렸다.
“어디서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계집이…!”
견수는 말을 몰아 한 발굽에 구숙비를 집어삼킬 듯한 사나운 기세로 덮쳐왔다. 그러나 구숙비는 현란하게 창을 놀려 견수의 포악한 공격을 막고, 능란한 몸놀림과 창술로 견수를 압박해갔다.
두 사람이 교봉(交鋒)한 지 10여합이 지나자 구숙비의 창은 예기를 번뜩이며 견수의 빈틈을 찾아 실뱀처럼 움직이는데 창 끝에 실린 힘이 살바람을 일으켰고, 견수는 손놀림이 어지러워지면서 구숙비의 공격을 막고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견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계집, 너는 누구냐?” “나는 폐하를 지아비로 모신 숙비 구완이다.
오늘 너희 역도들이 폐하를 해하고자 하는데 내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느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숙비의 창날이 견수의 투구 끈을 끊어 놓았다. 견수는 기겁하여 말머리를 돌리며 외쳤다.
“퇴각하라.”
견수는 살아 남은 병사 수십명만을 데리고 겨우 황산을 벗어나 목숨을 구했다.
혜제는 산장으로 무사히 돌아온 구숙비를 맞으며 맹세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숙비는 하늘이 짐에게 내려 준 여인이로다.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숙비를 내 생명의 한 부분처럼 귀히 여기고 보은을 다할 것이니라.”
구완.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황제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고 숙비가 된 여걸.
그러나 곧 이은 혜제의 죽음과 더불어 그녀는 역사에 묻히고 만다.
■ 발문
서진(西晉)의 혜제는 원래 무능하고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위인이었다. 황태자 시절 흉년이 들고 호족들의 착취에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에 그런 바보천치 같은 놈들이 있나?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을 것이지 왜 굶어 죽는단 말인가?”
이 얼마나 어리석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말인가?
어느 날 무제가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위관(衛瓘)이 술에 취한 척하고 무제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옥좌를 만지며 말했다.
“이 자리를 부디 소중하게 생각하시옵소서. 아무에게나 함부로 내어주면 절대 안 되옵니다. 호랑이가 앉아야 할 자리를 어리석은 노루가 차지한다면 사나운 늑대들이 눈빛을 세우게 될 것이옵니다.”
무제도 태자의 무능함을 익히 알고 있어 위관의 말뜻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흘러가는 술주정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무제는 대소 신료들을 불러 태자에게 정치에 관한 문제를 출제하도록 했다. 신료들이 출제한 문제가 태자의 처소에 당도했다. 이를 본 태자비 가남풍(賈南風)이 서둘러 다른 사람에게 답안을 작성하도록 해서 올렸다.
답안을 본 무제와 신료들은 새삼 태자의 학문과 정치적 식견에 탄복하여 그 재능을 더 이상 문제삼지 못했다. 결국 혜제는 가남풍의 뛰어난 수완 덕분에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위관의 염려대로 무제가 죽고 태자가 황제의 보위에 오르자 무능한 노루를 두고 여덟 마리의 늑대들이 일제히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게 되니, 골육상잔의 비극으로 사서에 남은 팔왕의 난은 예정된 것이었다고 할까.
황궁에 부는 뜨거운 바람, “오랜만에 쓸만한 애를 데려왔구나” | ||
땀을 뻘뻘 흘리며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는 맹준(孟俊)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용하다는 점쟁이 오도자(吳道子)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평생 남의 집 종살이나 하면서 옹색하게 살 팔자를 타고난 놈인데, 곧 귀인을 만날 운이 서려 있으니 그것 참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우물 밑 개구리(井底之蛙)가 꽃가마에 올라 봉황을 타게 될 거라니?”
맹준도 오도자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버렸다.
‘자기 죽을 날도 모르는 늙은이가 뭘 안다고…?’
자신이 생각해도 별로 희망이 없는 삶이다. 남들처럼 글을 깨우친 것도 아니고 집안 살림이 넉넉하거나 돈 버는 재주가 비상한 것도 아니다. 대장간에서 힘들게 일한 대가로 받은 쥐꼬리만한 품삯으로 하루하루 홀어머니와 입에 풀칠하면서 살아가기도 버겁다.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그이지만 타고난 용모만은 아주 빼어났다. 관옥 같은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힌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맹준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도성의 외곽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집은 매우 허름했다. 가난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그에게 가장 큰 소원이라면 덩그런 집 한 채 마련해 어머니를 편히 모시는 것이다.
‘죽도록 일해봐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맹준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웬 노파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노파는 다짜고짜 맹준의 팔을 잡아끌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이보게 젊은이 늙은이를 좀 도와주게.”
“뭘 도와달라는 것이오?”
“내 딸이 병들어 백약이 무효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네. 그런데 점쟁이가 말하기를 성의 남쪽에 나이가 젊고 이목이 수려한 청년이 있을 것이니 그를 데려와 사흘 밤낮을 함께 재우면 왕성한 양기를 받아 병이 낫는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네. 이 늙은이의 딱한 처지를 생각해서 딸을 살려주면 후히 보답할 것이네.”
맹준은 언뜻 오도자의 말을 떠올렸다.
‘그 점쟁이도 내가 곧 꽃가마에 올라 봉황을 타게 될 운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도자가 말한 귀인이 바로 이 노파란 말인가?’
노파는 맹준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끌어 길가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태웠다. 맹준이 마차에 오르자 마부는 창을 내린 다음 질풍처럼 내달았다.
맹준이 도착한 곳은 화려한 전각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맹준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래등 같은 건물들을 쳐다보며 노파에게 물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요?”
노파는 애원하던 태도를 바꿔 쌀쌀하게 말했다.
“이곳은 천상이다. 지금부터 쓸데없는 것은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라. 우선 목욕을 깨끗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조용히 기다려라. 절대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맹준은 노파가 시키는 대로 다른 여인의 안내를 받아 향수를 섞은 물에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진수성찬이 준비된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과 술로 배를 채우며 맹준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큰 환대를 받았는데 만약 노파의 딸이 병에서 낫지 않고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냥 옆에 누워 있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고 했다는데, 그 점쟁이의 말도 너무 황당한 것 같고.’
맹준이 상을 물리자 낯선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그를 화려한 방으로 데리고 가며 단단히 일렀다.
“앞으로 만나게 될 분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시다. 그분이 묻는 말 이외에는 절대 다른 것을 묻거나 쓸데없는 말을 해서도 안 된다. 단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맹준이 들어선 방은 침실이었다. 은은한 향기가 가득하고 휘황한 촛불이 사방에 밝혀져 있는 호사스러운 침대에는 여인이 누워 있었다. 나이는 35∼36세쯤 되었으며 키는 작고 피부는 검었으며 쭉 째진 눈매는 표독스러워 보였다.
‘아무리 봐도 병자 같지 않은데…?’
여인은 맹준의 겁먹은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발이 저리구나. 옷을 벗고 들어와 좀 주물러라.”
맹준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여인이 시키는 대로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속살이 훤히 비치는 여인의 엷은 속옷을 들추고 다리를 주물렀다.
“그래. 이제야 기분이 좀 좋아지는구나.”
여인은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키며 맹준의 손을 허벅지로 이끌었다. 몸이 금방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맹준의 목을 끌어안고 신음하며 두 다리를 비비꼬았다. 이어 다급하게 옷을 벗으며 젖먹이에게 젖을 물리듯 맹준의 입술에 젖가슴을 내밀었다.
마침내 젊은 피가 용솟음쳤다. 맹준은 불끈 치솟은 힘으로 여인을 마음껏 유린했다. 비록 행위는 어설펐지만 팔팔한 힘으로 여인을 황홀경으로 이끌었다. 여인은 맹준이 지속적으로 뿜어내는 싱싱한 자극에 자글자글 끓어올랐다. 금방 숨이 넘어갈 듯한 야릇한 꼴로 앓는 소리를 내며 맹준의 등을 할퀴고 쥐어뜯었다.
한 차례 열락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여인은 탁자 위에 있는 술을 가져와 맹준에게 한잔 권하고 자신도 마셨다.
술을 마신 맹준은 온몸이 뜨거워지고 피의 순환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자율신경이 팔딱거리고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눈앞에 있는 표독스러운 여자가 선녀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맹준은 강렬한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여인을 다시 힘껏 끌어안았다. 성난 황소처럼 포악하게 날뛰는 맹준에게 얼얼해지도록 몸을 내맡기고 여인은 매우 만족해했다.
“귀여운 것. 오랜만에 쓸 만한 애를 데려왔구나.”
또다시 뜨거운 육체의 향연이 시작됐다. 두 사람은 뱀처럼 뒤엉켜 가파른 욕망의 언덕을 오르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여인의 욕정은 끝이 없었다.
맹준이 일을 치르고 힘없이 늘어지면 술을 권해 원기를 회복하도록 만들어 놓고 성의 노리개로 삼았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쾌락의 잠자리가 계속됐다.
‘이곳에 온 지 벌써 사흘이 지났구나. 어머님이 몹시 걱정을 하고 계실 텐데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지난 사흘 동안 맹준은 낮에는 방에 갇혀 잠을 잤으며, 밤에는 여인에게 불려가 날이 밝을 때까지 육체의 열락을 즐겼다. 이곳이 어디고, 여인이 누구인지 매우 궁금했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이러다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창문을 열고 달을 바라보고 있던 맹준의 눈에 자신이 타고 왔던 마차가 빠르게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미소년이 내렸다.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건장한 체구에 귀공자의 품위를 풍겼다.
‘저 친구도 나처럼 끌려온 모양이군. 그렇다면 오늘 밤부터 나를 대신해 저 친구를 불러들여 노리개로 삼을지 모른다.’
그때 그를 처음 만났던 노파가 들어왔다.
노파는 맹준의 품에 보따리 하나를 안겨주었다.
“네놈은 보기 드물게 운이 좋은 놈이구나. 이곳에 들어왔다가 살아서 나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데. 한 가지 명심해야 한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입을 잘못 놀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네놈의 목이 날아갈 것이니.”
“명…명심하겠사옵니다.”
“조용히 기다리면 다시 너를 데리러 갈 것이다.”
“언제 말이옵니까?”
“그분의 병이 재발되면 부를 것이다.”
맹준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차에 실려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지난 사흘이 꿈처럼 여겨졌다. 노파가 준 보따리를 풀어보니 비단 옷과 황금이 들어있었다. 맹준이 평생을 편히 먹고 즐겨도 될 만한 액수였다.
‘그 여인이 누구기에 나 같은 놈에게 이렇게 많은 황금을 준단 말인가? 오도자의 말대로 내가 정말 귀인을 만났던 모양이군.’
맹준이 어찌 꿈에라도 생각했으랴. 그가 사흘 동안 끌어안고 욕정을 불태웠던 여자가 다름 아닌 황후 가남풍(賈南風)이었다는 사실을.
이렇듯 가남풍은 얼굴이 잘생긴 소년들을 수없이 수레에 태워 궁중으로 데려와 간음을 일삼고 서슴없이 죽여 없앴다. 아마 자신의 추한 소문이 세상에 퍼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리라. 그런 가남풍이 위험을 무릅쓰고 맹준을 살려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성적인 만족감이 그만큼 컸던 것일까.
■발문
가남풍. 서진(西晉) 혜제(惠帝)의 황후인 그녀는 음란하고 방자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고량진미로 배를 불리고 붉은비단으로 몸을 감았으며 금은보화로 치장하고 권력의 묘미를 만끽했다.
혜제와의 부부관계가 시원치 않았던 그녀는 궁중에 드나드는 사나이로 얼굴이 반반한 자가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사내를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여 음욕을 채웠다.
태의(太醫) 진거(陳據)는 기골이 장대하고 외모가 헌출하여 가남풍의 눈에 띄었다.
진맥을 빙자해 진거를 침실로 불러들인 가남풍은 음탕한 짓을 일삼았다. 밤마다 진거를 침상에 눕게 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을 치렀다.
이마저 시들해지자 가남풍은 눈길을 밖으로 돌렸다. 어느 날 가남풍은 내시에게 명을 내려 이목이 수려한 사나이를 소녀로 위장시켜 데려오게 하여 침실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이 사나이는 외양과는 다르게 성적인 발육이 그다지 변변하지 못해 가남풍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가남풍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자 분개한 나머지 소년에게 옷을 입게 한 다음 후원으로 끌고 가 한칼에 죽이고 시신을 땅에 묻게 했다.
가남풍이 젊은 소년들을 궁중으로 끌어들여 육체의 쾌락을 즐길 때 항상 술을 먹였다고 한다.
그 술에는 북방의 이민족들이 사용하는 음약(淫藥)이 들어 있어 소년들의 정욕을 한껏 끌어올렸다.
서진 황궁 안에서 부는 뜨거운 바람에 관한 이야기는 오래지 않아 백성들의 귀에까지 전해졌고, 거리에는 가남풍과의 하룻밤 밀회를 자랑삼아 늘어놓은 소년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꼭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말에 비유하면 그는 한혈(汗血)이요, 새에 비유하면 능히 홍곡(鴻鵠)이거늘 어찌 그대는 내 손으로 혜강을 죽이라 강요하는가?”
붉게 취기가 오른 사마소를 보며 심복인 종회(鍾會)는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혜강은 죽림의 와룡으로 불립니다. 그가 물을 만나게 간과하시면 훗날 왕조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릴 것이옵니다. 그는 유교를 배척하고 노장을 신봉하는가 하면, 허무맹랑한 신선사상과 양생론에 빠져 있는 주정뱅이에 미치광이이옵니다. 이 기회에 혜강을 제거하고 죽림칠현을 분산시키지 않으시오면 미풍양속이 문란해지고 흑과 백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부디 일벌백계의 도로 다스려 치세의 근본으로 삼으소서.”
“그를 구명하려는 태학생이 삼천에 이른다지?”
“그렇다고 하옵니다.”
사마소의 날 선 눈빛이 종회의 얼굴을 찔러갔다.
“이것만은 명심하라.”
사마소는 술상을 뒤엎으며 섬뜩한 말을 쏟아냈다.
“훗날 그대를 죽이라고 상소하는 자가 있다면 오늘처럼 술을 마시며 괴로워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아첨으로 얻은 영화는 결국 누군가의 혀끝에 몰락하는 게 세상의 진리라면 진리이니까.”
종회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자신이 혜강의 죄를 마음대로 날조한 사실이 밝혀지면 사마소의 말대로 목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혜강의 사후까지 완벽하게 대비해 두었으니까.’
혜강. 자는 숙야(叔夜)이며 안휘성 숙현 출생이자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 위의 왕족과 결혼하여 중산대부까지 올랐으나 법과 규율을 무시했고 눈에 보이는 세속의 명리를 좇기보다 자유로운 방탕을 원했다.
혜강은 지금 옥중에서 죽림칠현의 동지인 산도에게 절교서(絶交書)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여안(呂安) 사건에서 불효자를 변호한 죄인으로 몰린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종회는 갖가지 죄를 날조해 혜강을 죽음의 수렁으로 밀어넣었다. 혜강은 차분하게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제비가 어찌 박쥐와 어울릴 수 있으리오. 탕무(湯武)를 부정하고 주공을 경망스럽게 만든 자들과 예를 논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짓…!’
이렇게 시작된 절교서에는 완적과 자신을 비유하며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고 신중하게 처신하지 못한 자신의 처세에 대한 회한도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탁주 한 잔에 거문고 한 곡이면 그것으로 원이 없다(濁酒一杯 彈琴一曲 志願畢)”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혜강은 형장에 끌려 나왔다.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태학생들과 구경꾼들이 형장으로 끌려 나오는 혜강을 보며 통곡했다. 그러나 정작 혜강은 의연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처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내 나이 마흔. 비록 길지 않은 세월이었지만 후회 없이 살다 가노라. 권세의 노예가 되어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저 불쌍한 위정자들을 통렬하게 비웃으며 즐겁고 자유롭게 살지 않았는가?”
혜강은 그렇게 살아왔다. 술을 즐기고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으면서 신선의 세계를 동경했다. 사마소의 끈질긴 회유에도 자신의 절의를 지켰으며 선약(仙藥)을 찾아 험한 산중을 헤매며 탈속을 꿈꾸었다. 악을 싫어하는 의지가 남보다 강했고,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흐르듯이 자유로운 삶을 사랑했다. 개성의 해방을 추구한 인문주의자라 할 수 있다.
혜강은 아들을 불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들의 어깨를 부여잡은 혜강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자신의 삶에 미련은 없지만 아들의 장성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주지 못한 아비로서의 잘못은 깊은 회한으로 가슴을 옥죄었다.
“너만은 이 아비처럼 살지 말아라. 탈속의 자유를 얻기란 험한 바다에 내 몸뚱이를 홀로 내던지는 것보다 힘들고 험하다. 부디 너는 세속과 타협하고 비굴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내가 죽더라도 산도가 계시니 너를 잘 보살펴 줄 것이다.”
산도는 그가 절교장을 보낸 사람이다. 같은 죽림의 동지이지만 혜강과 달리 사마씨 밑에서 출세가도를 걸어온 인물이다. 그런 산도에게 아들을 의지케 한다는 것은 혜강 스스로 박해를 불렀던 자신의 삶을 아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들이 물러가자 혜강은 옆에 있는 집행관을 불러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광릉산(廣陵散)’이나 한 곡조 속시원하게 탄주하고 죽게 해 주시게.
이 혜강에게 남은 것이라야 고작 술과 거문고가 전부 아닌가.”
광릉산은 혜강이 화양정(華陽亭)에 머물면서 어느 노인에게서 전수받은 곡이다. 혜강은 고인(古人)이라고 자신을 밝혔던 노인을 떠올리며 천천히 거문고를 탄주하기 시작했다.
굵은 저음으로 음률은 시작됐다. 느리지만 결코 잔잔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굵고 깊은 비장함이 숨어 있는 듯한 음률의 파장이 넓게 퍼져 나갔다. 이어 억눌린 슬픔을 쥐어짜듯 가녀리지만 청아한 음률로 바뀌었다.
어두운 구름이 드리우듯 비통함과 애절함이 사람들의 가슴에 젖어들었다.
이 곡은 제나라의 자객 섭정이 한나라의 협루(俠累)를 척살한 고사를 주제로 한 곡이다. 협루를 살해한 섭정은 자신의 얼굴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스스로 눈꺼풀과 코, 귀를 자르고 얼굴을 으깬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면 가족들이 해를 입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섭정은 한나라의 간신을 죽여 역사에 의기를 남겼으나, 나는 간신의 농간에 이렇게 앉아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구나.’
혜강의 손놀림이 현란하게 빨라지며 거문고의 현이 한꺼번에 울부짖음을 토했다. 흡사 팔척 거구의 섭정이 칼을 들고 협루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음률이 솟구치고 다시 격렬하게 무너져 내린다.
잔잔하던 물길이 광풍에 광란하듯 고저와 장단이 급박하게 이어졌다. 혜강은 섭정의 의로운 칼날에 간신 협루의 목이 잘리고 피가 솟구치는 모습을 떠올렸다.
곡이 빨라진다.
거칠고 빠르며 격하고 장렬하다.
황하의 거센 물줄기가 거칠 것 없이 덮쳐오는 것 같다.
거대하면서도 제멋대로 넘실거리며 춤을 추는 것 같은 환상적인 음률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날 고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음을 다루는데 단순하게 손가락의 숙련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고작 기술에 지나고 않는다고, 마음으로 음을 터득하고 감정을 이입해야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 있노라고…!’
거문고를 탄주하는 혜강의 모습은 입적을 앞둔 고승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죽음 앞에서 저렇듯 탈속한 자세로 앉아 거문고의 음률에 몰입해 있는 모습에서는 경외감까지 느껴졌다.
혜강의 손가락이 거문고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때로는 세찬 파도가 밀려와 바위를 때리듯 격렬하다가, 곧이어 잔잔한 애조를 담고 귓가를 간질이며 호소하듯 이어지는 거문고의 음률에 취해 사람들은 눈물을 자아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문고는 혜강의 생명이자 분신이다. 그는 지금까지 갈고 닦아온 ‘광릉산’을 거문고의 음률에 실어 이승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있다. 그 비장한 음률은 장송곡처럼 형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오늘에야 비로소 알겠구나. 광릉산에 담긴 그 비장함과 애통한 사연을 음률에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를. 인생이란 이래서 오묘한 것인가? 죽음 앞에서 죽음의 참의미를 깨치게 되니.’
긴 여운을 남기고 혜강의 손이 멈춰졌다. 곡이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혜강은 거문고를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오늘 이렇게 죽어도 여한은 없다. 그러나 ‘광릉산’아, 너는 이후로 세상에서 사라지게 됐으니 그것이 참으로 원통하구나.”
혜강은 그렇게 죽었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임과 동시에 술과 거문고를 목숨보다 사랑했던 인물. 그는 뛰어난 음악가임과 동시에 문학자였으며, 권력의 끈질긴 회유를 뿌리친 절의의 묵객이었다. 때로는 허무주의 색채를 띠기도 했지만 그것은 추악한 정치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광릉산은 혜강의 염려와 달리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혜강이 죽은 후 더 많은 악사들이 광릉산을 탄주했으며 ‘신기비보(神奇秘譜)’에 수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발문
죽림칠현의 행적에서 술에 얽힌 이야기를 빼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술 중독으로 건강을 해친 유령(劉伶)은 기갈이 심해지자 부인더러 술을 구해 오라고 했다.
그러나 부인은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유령은 이제 술을 안 마시겠다고 신명께 약속하고 금주의식을 치르기 위해 술상을 차리라고 했다.
술과 고기를 앞에 놓고 기도하기를 “하늘이 유령을 태어나게 하실 적에 술로 이름을 날리게 하셨으니 한번 마시면 10말이요, 해장술로 5말입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제 집사람의 말을 삼가 듣지 마소서” 하고는 술과 고기를 가져다 먹고 만취했다.
유령은 집안일을 전혀 돌보지 않고,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술을 마시며 하인에게는 가래를 메고 따르게 하여 만약 자기가 죽거든 바로 그 자리에서 묻으라고 했다. 또한 술 먹으면 옷을 홀랑 벗고 나신이 되는 유령은 그 행동을 누군가 꾸짖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지를 거처로 삼고 집을 속옷으로 삼고 있는데 당신들은 어찌 내 속옷까지 들어왔소?”
평소 글을 쓰지 않았고 남긴 것도 별로 없는 유령이지만, 유일하게 남긴 글은 술을 칭송하는 주덕송(酒德頌)이다.
완함의 집안은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일족이 모이면 큰 옹기그릇에 술을 넣고 죽 둘러앉아 마셨는데, 그때 돼지들이 달려들어 같이 마셔도 괘념치 않았다고 한다.
평소 관직에 관심이 없던 완적은 보병교위의 자리가 비자 그 관아의 주방에 수백 곡(斛)의 술이 저장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보병교위를 맡겠다고 자청했다. 관청에 들어가 처음 한 일은 유령과 함께 실컷 술을 마시는 일이었다.
“제발 가지 마옵소서. 하늘의 분노를 살까 심히 두렵사옵니다. 예로부터 군왕이 인간 도리를 다하지 않으면 인의와 도덕이 무너지고 믿음이 가벼워져 예의가 조롱을 당하고 아첨과 시기하는 자들이 득세한다 하였사옵니다.”
양공이 버럭 화를 냈다.
“무슨 말을 입에 담는 것이오?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오.”
왕희는 옷자락을 붙잡고 더욱 간절하게 애원했다.
“하늘이 보고 있사옵고 땅이 아옵니다. 대왕께서 사냥을 빙자해 축구(祝邱)에 있는 누이동생 문강(文姜)을 만난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온데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시려 하시옵니까? 소첩 차마 입에 담기도 두렵사옵니다.”
“미쳤구려, 미쳤어.”
“소첩이 박색하여 그러신다면 차라리 다른 비(妃)를 맞아들이소서. 축구에는 이제 거동하지 마소서. 인륜을 저버리면 민심이 돌아서게 되고 결국 망국의 한을 면치 못하실 것입니다.”
양공의 얼굴이 붉어졌다. 방탕한 삶에 익숙해진 양공이지만 동생 문강과의 음란한 관계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다.
“그 입을 닫지 못할까. 다시 내 앞에서 망발을 늘어놓으면 그대의 목이 날아감은 물론이고, 주(周)나라에 유혈의 바람이 불 것이니 명심, 또 명심하도록…!”
찬바람을 일으키며 말에 오르는 양공을 보며 왕희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지금까지 굳게 움켜잡고 있던 한 가닥 희망의 끈을 이제는 놓아 버릴 때다.
“실로 금수만도 못하구나. 어찌 피를 나눈 남매가 살을 섞으며 즐거워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운명이 박복한 탓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구나. 결코 하늘이 오래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천륜을 저버린 패륜을…!”
왕희와 양공의 혼인은 정략적인 요소가 많았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양공과 문강의 행각은 문강의 남편인 노국(魯國) 환공(桓公)에게 발각됐고, 당황한 양공은 팽생(彭生)을 시켜 환공을 무참히 살해해 입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세상 비밀이란 한 겹을 덮으면 두 겹이 벗겨진다고 했다. 소문이 입을 타고 널리 전해졌고 다급해진 양공은 미봉책으로 주나라의 왕희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다.
송나라 출신인 첫 부인은 양공과 함께 지나치게 색을 탐하다 요절한 터였다.
왕희는 성정이 정숙하고 도덕을 중시했다. 그런 그녀가 패륜을 알게 된 것은 혼인한 지 두 달이 지나서다. 백주에 짐승처럼 뒤엉켜 음욕을 불사르는 두 사람을 목도한 왕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느꼈다. 왕희는 잠자리를 거부하며 마음의 빗장을 걸어잠갔다.
‘세상에 반딧불이보다 많은 게 여잔데 하필 피붙이란 말인가? 진정 두렵고 끔찍한 일이로구나. 차라리 내 손으로 두 사람을 죽여 조상께 욕이 미치지 않게 할 수 있으면 그 길을 마다하지 않으련만…!’
왕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입을 막아버려야겠어.”
시종인 맹양(孟陽)과 더불어 사냥터로 향하는 양공은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놓고 문강과 쾌락을 나누려면 귀찮은 걸림돌인 왕희를 제거해야 편하다. 맹양은 맹목적인 충성심을 강한 어조로 드러냈다.
“이 맹양에게 맡겨주십시오.”
“여자라는 존재가 도대체 뭔가? 남자들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인데 사사건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아서다니 분통이 터지는군. 민심 운운하면서 자꾸 훈계하려 드는 것도 비위에 거슬리고. 자고로 암탉이 울어 날이 밝는 법이 없다고 했는데.”
“좋은 계략이 있으니 심려 놓으소서.”
“일이 잘못되면 팽생처럼 목이 날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주나라에 시빗거리를 주지 않고 하찮은 백성들이 입방아를 찧지 못하도록 철저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버려.”
“감쪽같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뱀이 병아리를 삼키듯 소리소문없이 말입니다.”
양공은 힘껏 말의 엉덩이에 채찍을 가했다.
“그래야지. 평생 나와 함께 영화를 누리려면…!”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왕희가 제거된다고 생각되자 양공은 절로 흥이 생겼다. 마음은 벌써 사랑하는 동생 문강과 뜨거운 육체의 향연을 준비하느라 한껏 들떠 있었다.
왕희는 눈에 띄게 얼굴이 수척해졌다. 날로 한숨이 늘고 바깥출입도 일절 하지 않았다.
궁인들과 얼굴을 대하는 것도 부끄러워 낯을 돌렸다. 남편의 패륜이 입에 담을 수 없을 지경이니 어디 마음놓고 얼굴 둘 곳인들 있겠는가.
“오늘 운세가 참으로 사나우십니다. 목마른 용이 불길에 갇히고, 그물을 피한 물고기가 물 밖에 오르는 격으로 곳곳에 흉이 도사리고 있사오니 각별히 몸조심을 하셔야 하옵니다.”
왕희가 양공과 혼인할 때 주나라에서 추종관으로 따라온 나이든 매복자의 말을 왕희는 귓전으로 흘렸다.
“지아비가 금수보다 못한 패륜아인데 운세를 짚어 뭘 하겠어요? 이렇게 하늘을 쳐다보는 것도 두려워하면서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행복하겠지요.”
그때 궁녀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백호차이옵니다.”
왕희는 백호차를 즐겨 마셨다.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진귀한 차로 눈과 정신을 맑게 하고 피로를 풀어주는 효과가 탁월하다.
찻잔을 왕희의 앞에 내려놓는 궁녀를 바라보는 매복자의 눈초리가 매섭게 좁혀졌다. 궁녀의 표정이 잔뜩 긴장된 데다 손끝을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려보시옵소서.”
차를 마시려는 왕희를 막아서며 매복자가 은침을 꺼내 찻잔에 넣었다. 금세 까맣게 변한 은침을 보며 왕희는 놀랐고 궁녀는 사색이 됐다. 매복자는 추상 같은 호령으로 바들바들 떠는 궁녀를 추궁했다.
“누구 사주를 받고 독을 넣었느냐?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겨 저자거리에 내걸릴 것이니라.”
궁녀는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살려주십시오.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네년이 온전하게 죽기 싫은 모양이구나.”
“소녀는 다만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매복자의 추궁이 궁녀의 애원을 삼켰다.
“이년이 좋은 말은 아니 듣겠구나.”
보고 있던 왕희가 참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지었다.
“그냥 돌려보내세요. 그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일이야 다 위에서 꾸미고, 잘못되면 힘없고 무고한 아이들만 죽어나가는 게 왕실의 법도인 것을.”
“하오나 세상에 알려 배후를 밝히고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왕희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의 죄를 물을 수 있겠어요? 저들이 법을 만들고 행하기를 낮과 밤이 바뀌 듯하는데. 공연히 일을 크게 만들어 봐야 애꿎은 목숨들만 다칠 거예요.”
왕희는 사색이 된 궁녀를 살려보내며 탄식했다.
“천하의 법도란 이치가 우선이요, 힘은 그다음이라 했거늘. 어찌하여 이 나라는 힘이 이치를 짓밟고 패륜이 사람의 눈을 가리는가?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도 민심이 돌아섰는데 지아비가 아내를 독살하려 했다는 소문까지 더해진다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 손가락질을 하겠어요.”
매복자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왕희에게 간청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주나라로 돌아가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이곳에 더 이상 머물렀다가는 언제 누구 손에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왕희의 아름다운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양공과 혼인하던 날 감추지 못했던 행복한 미소는 백일을 채우기도 전에 눈물과 한숨이 되어 그녀의 가슴에 검붉은 울혈로 자리잡았다.
“어디로 가자는 말인가요? 출가하면 지아비를 따르는 것이 여자가 지켜야 할 본분의 으뜸이라 했는데. 살아서 제국의 아내가 되었으니 죽어서도 제국의 귀신이 되어야 함은 극히 당연한 일. 죽어 원통한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 내 발로 이곳을 떠나지는 않겠어요.”
그날 이후, 왕희는 처소의 이름을 참회원(懺悔院)으로 바꾸고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끊었고, 그로부터 일년 후 병을 얻어 끝내 세상을 떠났다. 꽃가마를 타고 제국에 시집온 지 불과 일년여만에 추악한 이승과의 인연에서 등을 돌린 것이다.
■발문
문강은 제나라 희공(僖公)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 피부는 가을 물처럼 맑았으며 자태는 부용 같았다. 꽃이 말을 하듯, 옥에서 향기가 나듯 빼어난 미색을 갖췄으며 지식이 해박하여 입을 열면 글이 되고 시가 되었다. 문강은 어렸을 때부터 두 살 위의 오빠인 세자 제아(諸兒)와 함께 자랐다.
문강과 제아는 모두 타고난 성품이 음란하고 도덕과 인륜을 경시했으며 일찍부터 육체적인 쾌락에 눈을 떴다. 문강의 현란한 미색과 빼어난 몸매에 넋을 빼앗긴 제아는 끝내 근친상간의 패륜에 몸을 내던지게 된다.
천성이 음탕하고 육체적인 쾌락에 맛을 들인 문강은 더욱 적극적으로 제아를 침실로 끌어들여 금수의 행각을 일삼았다. 그 후 두 사람은 각자 혼인하여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천성을 떨쳐낼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뜨겁게 패륜의 불을 지핀다. 남편인 노국 환공과 함께 친정을 방문했던 문강은 제나라 양공이 된 오빠와 그동안 닫아뒀던 정열의 문을 다시 열고 날이 밝는 줄도 모르고 욕망을 채우다가 끝내 남편에게 들키고야 말았다.
소문을 두려워한 양공이 택한 응급처방은 개과천선이 아니라 환공 살해였다. 그리하여 환공이 죽자 노국에서 공론이 일었고 문강은 궁여지책으로 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국경지역의 산장에 머물게 되었다.
양공은 부인 왕희가 죽은 이후 사냥을 핑계로 더욱 거리낌없이 문강을 찾아 육욕을 불살랐다. 결국 두 사람의 패륜은 하늘이 내린 철퇴를 맞아 양공의 비참한 죽음과 함께 결말을 맺게 된다. 양공의 사주를 받아 환공을 살해한 뒤 토사구팽됐던 팽생의 원혼이 돼지로 나타나 양공을 죽음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내 너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늘씬한 키에 우아한 자태는 엷은 구름에 가려진 달을 보는 것 같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침노을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희고, 가까이 보면 갓 피어난 연꽃처럼 어여쁘다.
섬세한 듯하면서도 알맞은 붉은 입술에는 윤기가 돋보이고 희고 가지런한 치아는 사뭇 선명하다. 연연한 자태, 고요한 몸가짐, 유순한 미색에 정애가 넘친다.
“이 아이는 신의 선택을 받고 태어나 무궁한 조화를 창조할 것입니다. 열살 때 하늘을 손으로 만지는 꿈을 세 번이나 꾼 것이나, 하늘에서 뻗어내린 석종유(石鐘乳·종유석)를 빨아먹는 꿈을 꾼 것은 감히 제 입으로 풀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과거 요 임금은 하늘에 오르는 꿈을 꾸었고, 탕왕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핥는 꿈을 꾸었다고 하니 따님의 꿈은 대길과 대귀(大貴)를 뜻하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점쟁이는 등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는 정말 귀인이 될 것입니다. 키는 크고 이마가 넓으며 광대뼈는 높은 듯하면서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대길의 상이요, 또한 눈에 정기가 충만하고 흑백이 또렷하며 음색은 아침에 봉황이 우는 것처럼 맑고 깨끗하니 그 귀함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런 등수가 그 해 겨울 간택을 받아 파란 많은 황궁에 들어가게 된다.
후한(後漢) 영원(永元) 8년. 서기로는 96년이 되던 해다. 황제인 화제(和帝)는 화난 얼굴로 황후의 거처인 장추궁(長秋宮)을 나와 자신의 거처인 장덕궁(章德宮)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이 변했어. 황후가 된 이후로…!”
음씨(陰氏)는 권문세가 출신으로 빼어난 미색과 총명을 두루 갖추고 서화에도 능해 화제의 총애를 독차지한 끝에 황후로 책봉됐다.
“요즘은 두 눈에 교만이 가득하고, 입만 열면 짐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는군. 이 모두가 외척의 세도가 너무 강해졌기 때문이겠지.”
운명이었을까? 황후에 대한 불만을 안고 장덕궁으로 향하던 화제가 등수와 만나게 된 것은 조물주가 점지해 둔 필연이었을 게다.
화제의 눈에 비친 등수는 황후와 완연하게 다른 매력을 지녔다. 황후가 아담하고 오목조목하면서 영롱한 미의 소유자라면, 등수에게선 옥을 깎아 놓은 듯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등수라 하옵니다.”
“참으로 곱고 우아하구나. 짐이 그 동안 장추궁의 도화에 취해 벽담에 핀 화중군자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구나.”
“부끄러울 뿐이옵니다.”
화제는 등수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몸가짐에 기분이 좋아졌다. 황제의 권위까지 무시하는 황후의 태도에 질린 화제는 눈길조차 마주하지 못하는 등수를 보며 모처럼 되찾은 사내의 우월감으로 어깨에 힘이 실렸다.
‘그래 꼭 황후가 아니라도 여자는 많다.’
화제는 등수를 꼭 끌어안았다. 황후와의 관계가 오로지 욕망을 쏟아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면 등수와 새로 갖는 관계는 탐미적인 유희였다. 둘은 절규하며 갈망을 채웠다. 부드러운 피부와 탄력. 아직 젖내를 풍기는 것 같은 풋풋한 몸매, 화제는 등수와 함께 격정의 늪으로 깊이 빠져들며 거친 숨결을 토했다.
욕망이 포효했다. 화제는 광기까지 드러내며 미친 듯 날뛰었다. 수컷의 완력으로 등수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학대했다. 욕망의 불꽃이 하염없이 타올랐다. 쾌락이 온몸의 신경세포를 펄펄 뛰게 만들었다.
등수는 무녀 같았다. 그녀의 뜨거운 늪에 빠지면 어떤 사내도 영혼을 채집당하고 말 것이다. 그녀의 몸에서는 신비한 마력이 넘쳐났고, 화제는 마치 음탕한 여신의 품에 안긴 듯 그 신비한 미궁으로 주저없이 빠져들어 혼신으로 정욕의 불을 지폈다.
그 열락의 밤을 지새운 후 화제는 등수를 귀인으로 삼고 구룡문(九龍門) 안에 있는 가덕궁(嘉德宮)에 머물게 했다.
“등귀인(鄧貴人)은 키가 크고 자태가 달의 항아와 같아 군계일학에 비유될 만하니 저희는 폐하께 얼굴 보이기가 심히 부끄럽군요. 요즘은 매일 밤 가덕궁에 출입을 하신다지요?”
내궁에서 큰 잔치가 열리던 날이다.
비빈들이 잔을 들어 황후의 음덕을 칭송하는 자리에서 음황후는 등수를 싸늘한 눈길로 바라보며 비꼬았다.
등수는 황후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칫 황후의 눈밖에 나면 어떤 비극을 초래할지 모른다. 등수는 황후의 앞에 달려나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소녀는 오직 폐하와 황후의 덕을 입어 이렇게 과분한 복을 누리고 있사오니 넓으신 마음으로 헤아려주시옵소서. 만약 신첩이 불경한 생각을 품는다면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옵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등수를 보며 음황후는 더 이상 분노를 드러내지 못했다.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등수를 잘못 건드리면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디 두고 보자, 요망한 것. 오늘은 그냥 넘어갔지만 너를 결코 살려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황후의 시샘에 살기가 묻어났다.
등수의 등장으로 황제가 처소에 발을 끊은 지 벌써 석달이 넘었다. 황후는 조바심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황제가 등수를 끌어안고 있을 것을 생각하자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더욱이 아직까지 황제의 아이를 낳지 못한 그녀가 아닌가?
‘만약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한 그 요망한 계집이 나보다 먼저 아들을 낳는다면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 계집을 없애버리지 않고는 단 하루도 편히 살지 못하겠구나.’
황후는 등수를 저주할 계획을 세우고 은밀하게 측근을 불러 무고(巫蠱)를 찾도록 했다.
무고란, 옛부터 비밀리에 전해 내려온 극악한 독술이다. 독을 지닌 지네나 독충들을 밀실에서 키우며 매일 뜻하는 바를 빌게 되면 독충이 신통력을 얻어 저주하는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이다. 한 무제(武帝) 때는 태자와 위황후(衛皇后)도 무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누구도 무고를 기르지 못하도록 엄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질투에 넋이 나간 황후에게 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등수에게 빼앗긴 황제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는 친정에 은밀한 장소를 마련하고 무당을 불러 무고를 기르며 등수를 죽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저주가 효력을 보인 것일까? 등수는 원인 모를 병을 얻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화제가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명의를 불러 진맥케 했으나 등수의 병은 깊어져 나중에는 사람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황후의 친정에 무당이 기숙을 하며 등귀인이 폐하의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저주하는 무고를 키운다고 하오니 비밀리에 조사하여 진상을 밝히소서.”
“그게 사실이냐?”
“사안이 중차대하옵니다. 부디 일을 처리하는데 신중을 기하시옵소서. 만약 일이 잘못되면 무고한 생명이 죽음을 당할 뿐 아니라 황실은 커다란 혼란을 겪을 것이옵니다.”
화제는 신속하고 비밀스럽게 진상을 파악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황후의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황후의 친정 식솔인 등봉(鄧奉), 등의(鄧毅), 음보(陰輔) 등이 줄줄이 투옥되면서 황후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등봉 등의 음보는 모두 고문을 당해 옥중에서 죽었으며, 황후의 부친인 음강(陰綱)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밖의 가솔들은 모두 유배됐다. 황후 음씨도 사건의 주동자로 폐위됐으니 그때 황후의 나이 겨우 23살이었다. 황후는 일년 후 자결했다.
그 후, 등수는 더욱 황제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겸손을 잃지 않아 영원14년 문무대신의 한결같은 주청으로 황후로 책봉됐다. 음황후의 무고가 엉뚱한 효과를 낸 것일까, 아니면 예전에 꾼 길몽 덕분일까.
■발문
등수는 한나라 광무제를 보좌한 등훈(鄧訓)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비범한 면모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가 다섯 살 때의 일이다.
할머니는 등수를 매우 아끼고 사랑해 손수 머리를 잘라주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가위로 그녀의 이마를 찔러 피가 흘렀다.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지만 어린 등수는 아프다는 한마디 없이 머리를 다 자를 때까지 기다렸다. 나중에 사람들이 물었다.
“아팠을 텐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
“제가 아프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할머니께서 저를 사랑해서 머리를 잘라주겠다고 하셨는데 제가 아프다고 하면 얼마나 난처하시겠어요.”
그녀는 어려서부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었다. 그녀가 황궁에서 총애를 받을 때 죽음의 위기가 닥쳤다. 황제가 병으로 의식을 잃고 자리에 눕게 되자 황후가 그녀를 없애고자 했다. 그때 등수는 측근인 조옥을 불렀다.
“길은 하나뿐이다. 내가 죽어야 내 가족이 죽음을 면할 수 있다. 죽어서 황제의 쾌유를 빌면 그 동안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 되고, 황후의 원한을 벗어나 가문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등수의 결심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조옥은 죽음을 각오하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기뻐하시옵소서. 방금 장덕궁에서 전갈이 왔는데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셨다 하옵니다. 며칠만 요양하시면 쾌차하실 것이라 합니다.”
“오, 그것이 사실이냐? 하늘이 도우셨구나.”
정말 하늘이 도왔을까? 조옥이 거짓으로 아뢴 그 이튿날 황제는 정신을 되찾았고 등수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니….
“네 이름이 무엇이냐?
원나라 출신 늙은 여관의 질문에 왕완(王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무호가 원나라 군에 함락되면서 왕완은 시부모와 남편을 잔학한 칼날에 잃었다. 그리고 수백명의 여자들과 함께 남경의 원나라 진영으로 끌려왔다.
그녀의 시련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타고난 미태와 정온한 품위를 지닌 왕완은 성 안에서 벌어지는 승전 연회에 나가 바얀의 시중을 들 네 여자 가운데 하나로 뽑혔다. 늙은 여관은 빼어난 자태에 매우 흡족해했다.
“곧 연회가 시작될 것이니 몸단장을 곱게 해 두어라. 특히 장군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말고 즐거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만약 눈물을 흘리거나 인상을 찡그려 연회를 망치게 되면 너희 목이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왕완은 여관의 당부에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하늘이 참으로 무심하시구나. 오랑캐에게 부모와 남편을 잃었거늘, 이제 그 원수들이 벌이는 술자리에 나가 노리개가 되란 말인가?’
날이 저물자 연회가 성대하게 펼쳐졌다.
왕완은 다른 세 여자와 함께 바얀의 좌우에 섰다. 풍악이 고조되고 무희들의 춤사위가 연회장의 분위기를 돋우었지만, 왕완은 죽은 남편과 시부모 생각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지켜보던 늙은 여관이 눈짓을 보냈지만 왕완은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노여움을 사 적장의 손에 죽으리라.’
왕완은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 바얀과 얼굴을 마주치기 싫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흥취가 적당히 오른 바얀의 눈에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왕완이 들어왔다. 바얀은 꽃처럼 고운 자태에 눈이 번쩍 뜨였다.
“너 같은 미녀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구나. 달이 아무리 밝아도 너보다 밝지는 못하고, 꽃이 아름답기로 네 자태에는 미치지 못하겠구나. 정녕 일색이로다. 나를 향해 똑바로 서거라.”
왕완은 마지못해 바얀을 향해 바로 섰다.
“왜 눈물을 흘리느냐?”
왕완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피했다.
“올해 나이가 몇이냐?”
바얀의 계속되는 질문에도 왕완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바얀은 얼굴에 노기를 담고 왕완에게 다가왔다. 이어 손으로 그녀의 턱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말이 말 같지 않으냐?”
왕완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날 선 눈빛으로 바얀을 쏘아보다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저는 천한 백성의 평범한 아낙으로 장군의 군사에게 시부모와 남편을 잃었사옵니다. 하온데 어떻게 이 술자리에서 흥을 돋울 수 있겠사옵니까? 목이 꺾일지언정 그럴 수 없으니 어서 제 목을 치소서.”
바얀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이것이 너희들이 말하는 한족의 절개요 지조라는 것이더냐? 우습구나. 너처럼 하찮은 계집 따위가 이 바얀을 향해 눈빛을 세우다니. 내 너의 그 잘난 절개를 짓밟은 다음 목을 쳐주마.”
왕완은 차분한 눈길로 바얀을 바라보며 말했다.
“장군의 칼이 천하를 유린할 정도로 강할지 모르지만, 그 칼로 여인의 정절만은 쉽게 짓밟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왕완은 옆에 있는 기둥을 향해 머리를 부딪쳐갔다.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바얀도 놀랐다. 지금까지 전장을 누비며 천하를 유린하고 호령했지만 이렇게 빼어난 미색과 꺾이지 않는 지조를 지닌 여자는 처음 본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옆에서 지켜보던 늙은 여관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왕완을 끌어안고 막았다. 왕완은 미친 듯 악을 쓰며 몸부림쳤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는 쑥대처럼 헝클어졌고 화사하게 단장한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바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어야 마땅한 법.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계집을 만났구나. 기다려라. 너를 이 바얀의 방식대로 길들이겠다. 한번 길들면 오직 주인만 모시는 야생마처럼 네 너를 그렇게 길들이고 소유할 것이다.”
바얀은 왕완을 가장 화려한 거처로 옮기도록 배려했다. 비단 옷으로 치장시키고 끼니마다 진수성찬을 올리게 했다. 황비도 구경하기 힘든 과일들이 식탁 위에 쌓이고 손 씻을 물까지 항상 대령케 했다. 왕완은 그러나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밤낮으로 눈물만 흘렸다. 게다가 엄중한 감시 탓에 번번이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다.
‘이대로 여기 갇혀 있다가는 언제 오랑캐에게 몸을 짓밟히게 될지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이튿날 왕완은 비단옷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다음 바얀에게 만나줄 것을 청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바얀의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했다. 왕완은 구름을 헤치고 나온 달덩이 같았다. 바얀은 왕완의 손을 잡고 따뜻한 정을 보냈다.
“이제야 마음의 결정을 내린 모양이구나.”
한껏 들떠 있는 바얀의 손을 뿌리치고 왕완은 무릎을 꿇으며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장군께서 이 미천한 몸을 소실로 들이시려는 것은 저를 한평생 옆에 두고자 하심이 아니옵니까?”
바얀은 왕완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물론이니라. 너를 평생 내 곁에 둘 것이다.”
왕완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바얀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장한 표정으로 간청했다.
“저는 시부모와 남편을 잃은 박복한 계집이옵니다. 지아비를 섬긴 아녀자의 몸으로 졸지에 상을 당했으면 응당 그 비통함을 하늘에 고하는 상례를 올리고 곡을 해야 하는 것이 이 민족의 예법이온데 이렇게 끌려와 아직까지 상복도 입지 못하고 상례를 올리지 못했으니 어찌 인간이라 하겠사옵니까? 장군께서 진정으로 저를 원하신다면 인간의 도리를 다하게 한 다음 모시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얀은 왕완의 정숙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에서 대쪽 같은 의지를 느꼈다. 절개 곧은 선비의 붓끝이나 진배없어 보였다.
‘이것이 대륙을 지배해온 한족의 기질인가? 일개 아녀자의 의지가 이러한데 붓을 든 지자와 칼을 잡은 무사의 호연지기는 보지 않고도 능히 가늠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쿠빌라이께서 이런 민족성을 일찍부터 알고 계셨기에 살상을 되도록 금하라 하셨던가?’
바얀은 목소리에 한껏 인간의 정을 실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느냐?”
“제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 상례를 마치고 도리를 다한 연후에 불러 주신다면 장군의 시침을 들겠사옵니다.”
“만약 거절한다면…?”
“밤낮으로 증오하면서 죽을 방법을 찾겠지요.”
“돌아오겠다고 한 말을 믿어도 되겠느냐?”
“장군께서 허락하신다 해도 절대 저 혼자 보내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붙여 감시할 것 아니옵니까. 저를 믿지 마시고 휘하의 군사들을 믿으소서.”
왕완의 말에 바얀은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다. 정히 그렇다면 집으로 보내주겠다. 그러나 상복을 벗게 되면 지금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함은 물론 오직 이 바얀의 여자로만 살아야 한다. 잘 길든 야생마처럼. 약속을 어길 시에는 네 삼족이 목이 잘려 산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
바얀은 왕완에게 군사와 시녀들을 붙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왕완은 상복을 입고 비통한 마음으로 상례를 준비했다. 바얀이 보낸 군사와 시녀들은 밤낮으로 왕완의 옆에 붙어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상례가 끝날 때까지는 오랑캐들을 이 땅에서 물러가게 하시겠지.’
왕완은 빌고 또 빌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던가.
그러나 하늘은 무심한 법이다. 왕완의 간절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남송은 더더욱 백척간두의 지경에 몰렸고, 남편을 잃은 순간 왕완의 가슴에 새겨졌던 절망의 그림자는 결국 핏빛으로 변해 쳥풍령 절벽 아래 혈화(血花)를 그려내고 말았다.
남송의 멸망을 재촉한 무호의 결전. 그 승부로 남송의 민초들에게 닥친 참화가 어찌 왕완의 비극에서 그쳤으랴만….
■발문
여자는 자색이 너무 뛰어나도 화를 부른다고 했다. 동서양의 역사를 되돌아봐도 한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 미녀들은 실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자기 육신마저 불태우며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기 일쑤였다.
왕완도 미색이 빼어나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여인이다. 상례가 끝나자 왕완은 어쩔 수 없이 군사들을 따라 길을 나서게 된다. 시부모와 남편을 죽인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혀야 한다는 절망적인 현실에 마음은 천근의 무게로 발길을 더디게 했다.
왕완 일행이 승산(山乘山)에 이르렀을 때다. 험하고 높은 재를 넘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왕완은 모진 결심을 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지아비를 죽게 한 오랑캐의 수장과 살을 섞을 수는 없다.’
왕완은 감시의 눈이 잠시 소홀해진 틈을 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그리고 험한 절벽의 바위에 피로 글을 썼다. 나중에 놀란 군사들이 달려오자 왕완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가 죽자 바위에 피로 쓴 글자가 더욱 붉게 변했다. 붉은 피가 깊이 스며든 탓이었을까.
그 이후로 비가 내리면 핏자국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흡사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왕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원나라 지치(至治) 연간에 그녀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승산의 재에 정각을 세우고 왕완의 맑은 넋을 위로하고자 재의 이름을 청풍령(淸風嶺)이라 부르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무엇인가 깜짝 놀랄 선물을 해야겠는데…!’
정화(鄭和)의 남해원정이나, 안남토벌(安南討伐)의 막중대사도 접어두고 영락제는 한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영락제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영락제의 얼굴은 사랑하는 여자에게 줄 선물을 떠올리며 환하게 밝아졌다.
건청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수많은 학자들과 왕족들이 초대됐다. 해진(海縉)과 도연(道衍)을 비롯해서 ‘영락대전(永樂大典)’의 편찬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와 종신들이 모인 자리다. 영락제는 방효유의 참살로 빚어진 유림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 ‘영락대전’의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동안 ‘칙찬서(勅撰書)’를 편찬하느라 경들의 노고가 많았소. 개국이 창칼로 이뤄졌다면 치세의 기조는 학문이 돼야 함은 경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부디 이 나라 학문을 기조하고 정립하는 데 더욱 힘써주시오.”
“신명을 다해 받들어 봉행하겠나이다.”
술이 몇 순배 돌아 연회 분위기가 고조되자 영락제는 가까이에 있는 도연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자리에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대학자들이 모였는데 각자 시를 한 수씩 지어 후세에 남기게 함이 어떻겠는가?”
“하오시면 폐하께서 시제를 내려주시옵소서.”
영락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짐이 총애하는 현비(顯妃)를 위해 시를 지어보도록 함이 어떻겠는가? 그동안 현비에게 변변한 선물 하나 못했는데 오늘 경들이 짐을 대신해 가장 귀한 선물을 하는 게?”
현비는 조선에서 뽑혀온 다섯 명의 공녀 중 권집중(權執中)의 딸이다. 정온하면서 유순한 언행과 청초하고 순결한 자태를 보고 영락제는 그 자리에서 현인비(顯仁妃)에 봉했다. 그것은 대명 황실의 통념을 깬 파격적인 책봉이었다. 조선에서 온 공녀를 즉석에서 황후 다음 서열에 봉한 것에는 그 미색도 한몫했겠지만 생모의 고국인 조선을 그리워하는 영락제의 속마음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영락제가 시제를 제시하자 연회에 참석한 학자들과 왕족들은 앞을 다투어 현비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그중에서 영헌왕(寧獻王) 주권(朱權)이 지은 시가 영락제의 마음을 가장 흡족하게 만들었다.
‘홀연히 하늘 밖에서 들려오는 옥퉁소 소리여.
나 홀로 꽃그늘을 거닐면서 듣노라.
삼십육궁에 가을색이 완연한데.
달빛이 남김없이 밝히도다.
금붕어 노니는 창가에 찬 기운이 짙어가고,
아득히 구름은 날아서 달빛에 감도는구나.
밤은 깊어 삼경인데,
미인의 퉁소 소리는 그칠 줄을 모르도다.’
현비는 절세의 미녀였을 뿐 아니라 옥퉁소의 명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방효유의 ‘10족’을 참살했던 영락제. 그러한 그도 총애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남자였다.
영락 5년 7월. 서황후(徐皇后)가 세상을 떠났다.
서황후는 황후로서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녀의 오빠인 서휘조(徐輝祖)는 정난의 변 당시 남경성에서 최후까지 영락제와 공방전을 벌였던 인물이다.
영락제에게 생포를 당한 후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눈빛을 세웠다. 분개한 영락제는 한때 서휘조를 참살하려 했지만 그가 개국공신인 서달(徐達)의 아들이요, 자신의 처남이기에 목숨만은 부지케 했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영락제는 자연 서황후의 처소에 발을 끊고 오로지 현비만을 총애했다.
서황후가 죽었지만 영락제는 새로 황후를 봉하지 않았다. 대신 현비에게 육궁(六宮)을 관장하게 했다. 한낱 공녀로 끌려간 조선의 여인이 대명제국의 실질적인 제2인자가 된 것이다.
“얼마나 조대가(曹大家)의 ‘여계(女誡)’에 깊이 빠져 있기에 짐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으신가?”
밤늦은 시간에 처소를 불쑥 찾아 온 영락제를 맞으며 현비는 몸가짐을 바로 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녀는 조대가가 남긴 여계를 가까이 두고 육궁을 다스리고 황제를 보필하는 지침으로 삼았다. 조대가는 한대(漢代)의 여인으로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의 여동생이자,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를 완성한 반소(班昭)의 또 다른 호칭이다.
“황공하옵니다. 오늘은 안 오시는 줄 알고…!”
영락제는 현비의 손을 잡고 침실로 향했다.
“반소는 ‘고금인물론’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따져 역사적으로 상·중·하로 삼등분했다고 하는데 설명을 해주겠는가?”
현비는 성급하게 옷을 벗기는 영락제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유순한 자태로 사내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착하기만 하고 악한 짓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을 상지(上智)라 하였고, 착한 짓도 하고 악한 짓도 한 사람을 중인(中人)이라 하여 제나라의 환공(桓公)을 그 대표적인 인물로 꼽았으며…!”
영락제가 슬그머니 자신을 함몰시키기 시작했다. 현기증이 일어날 때까지 억센 힘으로 현비의 몸을 누르고 또 짓눌렀다. 고금인물론은 더 이상 침상 위에 머무를 수 없었다. 환공이 무엇이고 중인이 그 무엇이랴. 마침내 패잔병처럼 축 늘어진 영락제.
현비는 그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쁜 짓만 하고 착한 일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하우(下愚)라고 해서 걸주(桀紂)나 오왕부차(吳王夫差) 같은 사람을 꼽았어요.”
“그럼 짐은 어디에 속하는가?”
“소첩이 세 치 혀로 어찌 폐하를 평하리까? 다만 소첩은 폐하께서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되시도록 신명을 다해 보필할 것이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모든 것은 소첩이 부덕하고 부족한 소치가 될 것이옵니다.”
영락제는 현비의 토실한 젖가슴을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 거칠고 황량한 미소를 머금고…!
“짐은 결코 역사에 성군으로 기록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태평성대를 피로 일궈낸 피의 정복자가 되기를 원할 뿐. 어쩌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륙의 역사가 짐에게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비는 영락제의 메마른 가슴으로 깊이 안겨들었다. 가뭄에 갈라터진 땅에 빗물이 스며들듯이.
“손에 피를 묻히시더라도 가슴은 항상 따뜻한 정으로 채우소서.
소첩을 사랑하는 지금 이 넓은 마음과 아량으로 백성과 신하들을 사랑하소서.”
“이…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현비전의 궁녀는 여귀진(呂貴眞)이 은밀하게 내놓은 진귀한 보석들을 보며 심장이 뛰었다. 여귀진은 현비와 함께 조선에서 뽑혀온 공녀 출신으로 현비와는 연적 관계다. 여귀진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어 궁녀의 손에 쥐어주며 추악한 음모에 끌어들였다.
“여기 한쪽에 기울어가는 해가 있고, 또 다른 곳에 떠오르는 달이 있다. 너는 어디를 선택하겠느냐?
기울어가는 해는 현비고, 떠오르는 달은 나다.”
“소…소녀는 그저 무섭기만 하옵니다.”
“너는 내가 준 그 약을 현비의 음식에 타서 먹게 하면 된다. 나는 이미 조선 출신의 내관인 김득(金得)과 김량(金良)에게 뒷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마무리하도록 손을 써놓았다. 개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 법. 너는 현비를 위해 충성을 다했지만 네가 현비에게 받은 것은 무엇이더냐?”
궁녀는 현비의 극진한 보살핌과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물질적인 풍족은 한 번도 누리지 못했다. 몸소 검박한 생활을 실천해 육궁을 다스리는 덕목으로 삼았던 현비가 사치와 낭비를 철저히 막았기 때문이다. 눈앞의 보물에 눈이 먼 궁녀는 마침내 현비를 독살하는 음모의 하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날은 영락제가 태묘에 제를 올리기 위해 궁을 비웠다.
밤늦은 시간까지 현비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조대가의 ‘천문지’를 읽으며 궁녀를 불렀다.
“향편차(香片茶)를 갖다 주겠느냐?”
기회만 엿보던 궁녀는 향편차에 독약을 타 현비에게 올렸다. 평소 신임하던 몸종이 올리는 차라 현비는 의심 없이 차를 마셨고, 그것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궁녀가 여귀진의 처소로 달려가 현비의 죽음을 고하자 그녀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아주 잘했다. 이제 황상 폐하의 사랑은 내 것이 될 것이다. 황제의 품에 안겨 세상의 모든 기쁨과 영화를 누릴 것이다.”
현비. 조선의 공녀로 뽑혀와 광활한 대륙의 주인인 영락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격동기의 황실을 이끌던 여인. 그 돌연한 죽음은 영락제의 심부에 박힌 포악성에 다시 불을 지폈으니….
■발문
현비의 비참한 죽음은 음모의 한 축을 담당했던 태감 김득에 의해 태묘에서 제를 올리던 영락제에게 곧바로 전해졌다. 영락제는 총애하던 현비의 죽음에 대로했다. 그리하여 추상과 같은 명이 떨어졌다.
“내가 제를 마치는 즉시 현비에게 갈 것이니라. 그때까지 누구도 현비의 처소에 들지 못하게 할 것이며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라.”
현비전에 도착한 영락제는 총애하던 현비의 비참한 죽음을 대하자 불 같은 분노를 드러냈다. 방효유의 10족을 참살했던 그 살기로 명을 내려 음모자를 색출해 갔다. 독약의 출처를 추궁해 은장이가 체포되고 주모자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영락제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은장이를 위시해서 김량과 김득, 그리고 궁녀를 잔혹하게 참살했다.
마지막으로 현비를 모살한 여귀진이 영락제의 앞에 무릎이 꿇려졌다. 영락제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여귀진에게 쇠를 불에 달구어 단근질하도록 명령했다. 자신이 기대하던 영화 대신 낙형(烙刑·단근질)을 받은 여귀진. 인과응보란 세상의 눈에는 공평한 것이지만 당사자가 겪기에는 참기 힘든 것이다. 살이 타들어 가는 악취와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 영락제는 그러나 이런 형장의 모습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죽은 현비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광활한 사막지대로 친정에 나서면서까지 항상 곁에 두었던 현비. 그녀는 권력다툼과 살육의 피바람에 지친 영락제에게 새 생명의 자양분을 제공해주던 여인이었다. 그러했기에 현비의 죽음은 영락제에게는 물론이요, 명나라의 앞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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