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빼어난 자연환경을 두르고 있는 섬입니다. 채도가 다른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빛깔과 고운 모래사장, 화산이 빚어낸 독특한 해안 지형, 한라산과 억새가 물결치는 오름…. 제주야말로 여행의 욕망을 넘어서 ‘그곳에서 살기’를 꿈꾸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두 세대 이전 쯤으로 시간의 태엽을 감는다면 제주는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이었습니다. 온통 화산석 돌밭으로 이뤄진 땅에서는 농사는 언감생심이었고, 근해에서의 고기잡이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섬의 풍경이야 지금과 마찬가지였겠지만, 배고팠던 시절에 밥과 바꿀 수 없는 풍경이 무슨 대수였겠습니까. 먹고사는 일이 그 자체로 고행일 따름이었던 그 시절의 한복판으로 걸어들어가는 도보 여행길이 새로 열렸습니다. 제주의 가장 아름다운 구간을 관통하는 올레길이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길. 남루했으되 따스했던 섬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서 걷는 길. 그 길이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입니다.
# 제주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늦게 당도한 곳 제주를 통틀어 그동안 가장 소외됐던 곳을 꼽으라면 섬 동북쪽의 김녕과 월정 일대다. 세련된 카페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는 월정리 해변은 이즈음 제주에서 가장 ‘뜨거운’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쪽에는 웬만해선 관광객들이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 어디서든 다 볼 수 있는 바다 외에는 이쪽에는 이렇다 할 비경이나 관광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제주시와 서귀포, 성산 일출봉, 산방산 등의 내로라하는 제주의 명소들이 온통 관광객들로 북적일 때도 이쪽 마을은 고요했다. 하루 종일 파도소리만 드나드는 바다와 주황색 혹은 초록색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있는 바닷가 집들의 나른함, 구릉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밭담이 그려내는 평화로움…. 이것이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김녕과 월정 일대 마을이 가진 풍경의 거의 전부다. 하루가 다르게 자본을 무기로 건너온 외지인들이 점령해가고 있는, 그래서 삶의 방식부터 섬의 풍경까지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는 제주에서 여태 여행자들에게 발견되지 못했다는 건 어쩌면 한편으로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소외됐다는 건 곧 그만큼 오래전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제주의 모습이 온통 도심에서 옮겨온 듯한 카페와 쾌적하고 세련된 숙소들로 가득찬 공간이 아니라면, 김녕과 월정 일대는 지금껏 소외됐다는 것 하나로도 충분히 찾아갈 이유로 삼을 수 있다. 오래전 제주 사람들의 눈물겨운 삶의 방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고, 그 흔적이 마을 곳곳에 성성하게 남아있으며, 제주 해안마을의 적요한 풍경의 일상이 또 거기 있기 때문이다.
# 풍경 대신 ‘삶의 이야기’가 안내하는 길 김녕과 월정 일대를 돌아보는 여정을 안내하는 건 사람과 풍경을 가로지르고 지나는 새로 난 도보길이다. 제주관광공사는 지난 주말 김녕과 월정마을 일대의 마을과 해안을 둘러보는 ‘지질트레일’을 열었다. 제주가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된 이후 ‘지질트레일’로는 세 번째로 놓인 길이다. 앞서 만들어진 두 개의 지질트레일은 모두 화산지형이 빚어내는 이국적인 풍경을 주목하는 길이었다. 2010년 개통된 ‘수월봉 지질트레일’이 그랬고, 이어 지난 4월 놓인 ‘산방산·용머리 지질트레일’도 그랬다. 이 두 길 위에서 지질은 그저 경관으로 해독될 뿐이다. 그러나 이번에 선보이는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은 앞서 놓인 두 개의 도보코스와는 사뭇 다르다. 이 길이 관통하는 건 ‘제주 사람들의 삶’이다. 그 길은 수만 년 전 화산 분출 시기의 이야기부터 거친 지질을 제주 사람들이 어떻게 이겨내고 자신들의 삶을 지켜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길이 반갑고 소중한 건 ‘빼어난 경관’에만 머물던 제주의 가치를 섬 사람들의 삶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데 있다. 또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길잡이가 돼서 안내하는 이 길 위에서는 여행자와 여행지 주민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지속 가능한 제주 여행의 새로운 형태’의 가능성을 만나게 될 수도 있겠다. # ‘작은 것들’ 앞에서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보다
김녕·월정 일대에 지질트레일 코스가 놓인 것도 바로 이 ‘빌레’ 때문이다. 수만 년 전 이쪽 해안으로 흘러내린 용암이 핵심 지질명소인 동굴과 긴 돌담을 만들어냈다. 제주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이유의 절반쯤은 이쪽 지형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레일 코스는 지질의 모습과, 이런 지형이 섬 사람들의 삶에 끼친 이야기를 찾아간다.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코스의 전체 거리는 14.6㎞ 남짓. 출발지점으로 되돌아오는 전체 코스를 다 걷는 데 4시간 30분쯤이 걸린다. 이 중 절반 정도는 해안길을 따라 걷고, 나머지 절반은 해안을 내려다보는 마을의 골목과 밭담의 구릉을 지난다. 이 길을 걷겠다면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 한 가지. 길 위에서 ‘훌륭한 경관’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길에서 만나는 풍경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그 길에서 만나는 마을과 바다가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제주의 다른 풍경에다 대면 우위에 있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이 길을 걷겠다면 작은 것들, 이를 테면 성근 돌담이 빚어내는 조형미와 바다와 어우러지는 낮은 지붕의 파스텔톤의 색감, 오래된 집의 담 아래 물결치는 억새, 골목에 나앉은 등굽은 할망들의 투박한 제주 사투리 따위를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또 귀를 기울이는 게 가장 훌륭하게 즐기는 요령이다. # 빌레왓에서 초인적인 노동을 보다
돌을 깨는 건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몇 해 농사를 짓고 지력을 잃거나 흙이 모자라면 다시 바위를 깨서 땅을 깊게 했다. 흙을 담은 밭과 주변의 널찍한 바위의 높이 차이를 보면 바위를 얼마나 깊게 깨냈는지가 짐작이 되는데, 가장 깊은 곳의 높이 차는 2m가 넘어 보였다. 그나마 이렇게 일궈낸 밭에 쉴 새 없이 모래까지 날아드니 콩이나 당근 말고는 잘 자라지도 않았다. 고작 몇 줌의 농산물을 얻기 위한 노동이 이리도 고됐다. 가파른 지형을 계단식으로 일궈낸 육지의 다랑논도 여기다 대면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였다. 빌레왓에서 깨뜨린 돌은 그대로 밭담이 돼서 세워졌다. 제주의 밭담은 어디서나 흔하지만, 이쪽의 밭담은 생김새부터 좀 다르다. 다른 곳의 밭담은 촘촘하게 쌓여서 돌과 돌 사이의 공간이 좁은 편인데, 이곳 빌레왓 일대의 밭담은 바위와 바위 사이로 주먹이 들고 날 만큼 공간이 크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다른 곳의 밭담은 저 스스로 쪼개지고 풍화돼 둥글게 마모된 돌을 쓰는데, 이쪽의 밭담은 일부러 깨낸 불규칙한 단면의 돌을 써서 세우기 때문이다. 성글게 공간이 비어진 채 밭과 밭을 구분하며 서있는 김녕 빌레왓의 밭담은 독특한 미감을 보여준다. # 용암이 빚은 동굴, 그리고 바다에서 솟는 물 김녕, 월정 일대는 또 동굴의 땅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짧은 지질 이야기 한토막. 수만 년 전 제주의 화산에서 솟구친 뜨거운 용암이 바다로 흘러내렸다. 먼저 흘러나온 것은 묽은 용암이었다. 이게 먼저 바다에 닿아 지표면부터 식어 굳어져서 ‘빌레’를 이뤘고, 그 아래로 채 식지 않은 진득한 용암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용암이 다 빠져나간 자리가 그대로 동굴이 됐고, 동굴은 그대로 지하수의 물길이 됐다. 육지의 투수층을 통과한 수정같이 맑은 물이 동굴을 따라 흘러 바닷가에서 솟았다. 김녕 사람들에게 그 물은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동굴이 마을 안쪽에서 허물어지면서 동굴 속을 흐르는 물은 그대로 샘이 됐다. 샘은 전복의 내장을 일컫는 제주 사투리 ‘게읏’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데, 땅이 푹 꺼져 동굴에 닿는 부분이 마치 전복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굴을 지나 바다쪽에서 솟는 물은 가둬져 물맞이를 하는 명소가 됐다. 제주에서는 백중날에 물맞이 풍습이 있었는데, 폭포나 하천에서 물을 맞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김녕 일대의 해안가에는 하천이 없어 주민들은 궁여지책으로 돌을 쌓아 바닷가에서 솟는 물을 허파 형태의 돌을 쌓아 가둬놓고, 한쪽은 남자가 다른 쪽은 여자들이 물맞이를 했다. 월정리 밭담 아래엔 제주의 동굴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꼽히는 당처물동굴과 용천동굴이 있다. 발견 당시부터 엄격하게 출입이 통제된 이 두 동굴은 몇 장의 사진만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두 동굴 모두 용암동굴인데 표면에 쌓인 모래의 석회성분이 비에 녹아 만들어진 석주와 석순을 마치 장식처럼 드리우고 있다. 기기묘묘한 석순이 드리워진 동굴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동굴을 공개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커녕 문을 열어준대도 절대 들어가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다.
# 관광객의 명소, 그리고 여행자의 명소 김녕에서 시작한 지질트레일 코스는 마을과 밭담을 따라 월정마을의 해안까지 갔다가 해안도로를 끼고 다시 김녕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월정해안은 이즈음 제주를 찾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목적지다. 순백의 백사장과 코발트빛 바다를 끼고 있는 아늑한 월정해안은, 눈 밝은 이가 여기에 ‘바다가 될’이란 자그마한 카페를 열면서 외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정도였다면 좋았으련만, 삽시간에 여행자들 사이에서 명소로 떠오르면서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외지인들이 해안 땅을 하나 둘 사들여 세련된 카페와 지중해풍의 펜션들을 짓기 시작했다. 고즈넉한 해변이 카페촌을 방불케 할 정도로 번잡해지자, 맨 처음 이곳에 카페를 차렸던 주인은 가게를 팔고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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