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중년 이상의 나이라면 20년 전쯤 보령과 합쳐진 ‘대천’이란 지명으로 더 익숙한 곳입니다. 보령 혹은 대천이란 지명에서는 느릿느릿 곡선 구간을 달리던 장항선 열차와 그 열차가 가닿던 바다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보령에는 바다 말고도 빼어난 가을 명소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은행나무로 마을 전체가 숲이 돼버린 곳이 있고, 일찌감치 날아온 철새들이 수면을 딛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습지가 있으며, 핏빛 단풍이 뜨겁게 달궈진 계곡도, 억새가 물결치고 있는 산정도 있습니다. 허물어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텅 비어버린 옛 절터의 쓸쓸한 정취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가을이 절정으로 치닫는 이즈음은 단풍 명소마다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행락객들로 북적입니다. 가을의 명소로 이름 좀 났다는 곳의 길 양편은 여지없이 행락 차량의 트로트 가락과 먹거리 좌판의 기름 냄새가 나눠 점령하고 있습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행락객들 틈에 섞이는 것도 마뜩잖지만, 이런 곳들로 떠난 가을 여행은 도무지 생각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저무는 계절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건 호젓함인 듯합니다. 낙엽 깔린 인적 드문 숲길이나 철새 날아오르는 습지의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비로소 생각이 자리 잡을 틈이 있으니 그렇습니다. 사실 가을은 계절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인 셈입니다. 주위 풍경이 가을색으로 물들면 도심 공원의 오솔길에서도 훌륭한 풍경을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보령으로 떠나는 여정도 사실 가닿는 목적지는 ‘가을’입니다. 여기 소개하는 곳들에서는 가을이 데려온 것을 만날 수 있고, 가을이 지나가는 걸 색깔로 알 수 있습니다. 가을이 데려온 노란 은행나무와 붉은 단풍, 흰 솜털의 억새와 차가운 물빛이 거기 있습니다. 누구든 그곳에 데려가고 싶어서 가을비 속에서 담아온 풍경이지만, 풍경과 생각이 어우러지는 호젓한 여행을 꿈꾸고 있다면 꼭 이곳이 아니라도 상관없을 듯합니다. 지금 우리 땅 곳곳에 스며든 가을이 숨 막히는 아름다움으로 지나가고 있으니까요.
# 노란빛으로 환하다…청라 은행마을 ‘청라 은행마을’.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의 장밭마을을 그렇게 부른다. 청라면사무소부터 청라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와 파출소, 농협, 우체국까지 다 거느린 라원리의 원모루마을을 제치고, 감히 손바닥만 한 장밭마을이 ‘청라’란 이름을 가져가게 된 건 오로지 은행나무 때문이다. 마을에서 자라는 은행나무만 3000그루를 헤아린다. 이곳의 은행나무는 가로수로 세워둔 은행나무처럼 경관이 목적이 아니라, 순전히 열매의 소출을 위해 마을 주민들이 심어 기른 것들이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한그루 한그루마다 임자가 다 있다. 본래 장밭마을은 이름대로 긴밭(長田)이 있던 마을이었다. 은행 수확이 ‘제법 돈 되는 일’이었던 시절 주민들은 밭 이곳저곳에다 은행나무를 심었다. 잘 자란 은행나무의 밑동 옆에 올라온 여린 가지를 꺾어다가 밭둑 옆에, 마당 안에다 심었다. 느럭번덕지, 당살미, 문안고랑, 윗장밭…. 이런 정겨운 지명의 밭둑에서 은행나무가 자랐다. 그러다 물길을 막은 명대저수지가 들어서 천변의 밭이 모두 논으로 개간되면서 밭을 지키던 은행나무들이 너른 논두렁이나 마을에 서게 됐고, 지금의 은행나무 마을의 풍경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꺼번에 조밀하게 심은 것이 아니라 형편대로 가지를 꺾어다가 꺾꽂이로 이곳저곳에 심어 길렀으니 이곳의 은행나무는 숫자에 비해 압도적인 경관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넓은 들판과 마을 이곳저곳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은행나무의 풍경이 오히려 더 푸근하고 정감 있다. 장밭마을 은행나무의 중심이라면 단연 신경섭 전통가옥이다. 고택의 돌담을 끼고 집을 둘러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이 온통 노란빛으로 환한 곳이다. 집 한 채가 담 밖과 담 안쪽에 거느리고 있는 은행나무의 숫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고택의 안채는 문을 닫아 걸었지만, 아예 대문이 없어 너른 마당까지는 사람들이 무시로 드나든다. 떨어진 은행잎으로 노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마당을 들어서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탄성을 지른다. 마당을 향해 놓인 고택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잘 익은 가을볕이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맛이 그만이다.
# 일찍 날아온 청둥오리떼를 만나다 청라마을에서 나와 청라초등학교 앞의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면 청천저수지가 있다. 청라면 서쪽에 있는, 대천 일대와 남포면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큰 저수지다. 황룡천을 흘러내린 물이 여기 담겼다가 보령 시내를 관통해 바다로 간다. 청천저수지의 습지에는 지금 일찌감치 날아든 겨울 철새인 청둥오리들이 모여 수런거리고 있다. 오리들이 버드나무와 삭은 물풀 사이에서 물을 박차고 올라 가을의 대기 속을 날아가는 모습에서 이제 가을의 끝도 머지않았음이 느껴진다. 가을로 가득한 저수지의 물가에 다가서니 인기척에 놀란 청둥오리들이 수변 단풍을 그림자처럼 드리운 물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푸드덕 날아갔다. 겨울의 초입에 당도한 것 같은 이런 풍경을 보려면 저수지를 감고 도는 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는 게 좋겠다. 저수지를 끼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은 물가의 야트막한 언덕에 세워진 화암서원을 지난다. 흐르고 고이는 물의 모습에서도 학문하는 자세를 되돌아봤다던가. 서원의 자리에서 옛 선비의 정신을 본다. 화암서원은 400여 년 전에 세워졌는데,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 등 이곳 출신 다섯 선비를 봉안하고 있다. 본래 서원은 수몰지역의 물가에 있었는데, 청천저수지가 축조되면서 1959년 지금의 자리로 물러앉았다. 화암서원을 지나서 길은 줄곧 저수지를 끼고 보령 아산병원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다시 은행나무가 길게 늘어선 36번 국도로 올라서면 의평리와 향천리 쪽에서 저수지 수변 습지를 만난다. 초록의 기운이 남은 버드나무와 머리를 풀어헤친 갈대숲이 가득한 습지에는 나무 덱 산책로와 벤치가 설치돼 있었다. 삭은 줄풀 사이로 무리를 이룬 오리떼들이 수면 위를 유유하게 오갔다. 마침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이었는데 저수지를 따라가면서 만나는 수변의 풍경이 선명한 채도의 그림처럼 차창 안으로 들어왔다. 무르익은 가을날의 목적지로도 손색이 없지만, 가을 청둥오리떼들이 더 날아드는 초겨울 무렵이라면 지금보다 더 근사한 그림을 보여줄 것 같았다. #‘핏빛단풍’성주산, ‘억새파도’오서산 보령에서 성주터널을 지날 때 왜 일본 소설 ‘설국(雪國)’의 첫 문장이 문득 떠올랐던 것일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그건 아마 터널의 이쪽과 저쪽에서 절정의 가을이 보여주는 경관이 너무 달라서였을 것이었다. 성주터널 이쪽의 무게중심은 단연 바다다. 대천해변과 무창포의 부드러운 해안선을 가진 수평의 바다가 이쪽에 있다. 마침 찬비가 내린 날이어서 가을 바다는 무채색이었다. 그러나 터널 너머의 성주 땅은 촉촉한 비로 더 선명해진 붉은 단풍의 세상이었다. 성주터널을 넘어서 찾아간 성주산 휴양림의 단풍은 마치 풀무를 불어넣은 아궁이 속의 숯불처럼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올해 이쪽의 단풍색은 유난히 더 붉었다. 가을비 때문에, 무채색의 바다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성주산 단풍의 뜨거움은 아는 이들만 안다. 그걸 아는 이들이 해마다 ‘성주산 단풍축제’를 연다. 말이 축제지 딱 하루 동안 지역 주민들끼리 즐기는 ‘동네 행사’에 가깝다. 한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성주산의 이름을 축제에 걸어놓고는 정작 성주산과 마주 보는 옥마산 아래 청소년수련관에서 축제를 연다는 것이다. 그러니 축제장에는 성주산 단풍은 없다. 진짜 성주산 단풍은 성주산의 화장골 깊숙이 자리 잡은 휴양림에 있다. 성주산의 이름은 ‘성인(聖)이 사는(住) 산’이란 뜻이다. 그 이름대로 성주산 아래는 모란꽃 형상을 한 여덟 곳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진다. 휴양림이 들어선 화장골도 그중 한 곳이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단풍만큼은 화장골이 명당 중의 명당이다. 사실 단풍나무의 크기나 수효로만 본다면 화장골은 내장산이며 선운사 같은 이름난 단풍 명소에다 대면 부끄러울 정도다. 하지만 당단풍나무의 붉은 색감만큼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게다가 성주산 휴양림은 단풍이 절정일 때도 좀처럼 붐비는 법이 없다. 북적이는 인파와 빠른 트로트 가락 대신 성주산 화장골에는 차분하고 고요하게 가을의 빛을 즐기는 사람들만 드문드문 찾아든다. 성주산 북쪽의 오서산도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산이다. 높이로 보면 서해 연안의 산 중에서 가장 높다. 오서산이 보여주는 가을은 억새다. 가을이면 9분 능선 윗부분의 억새가 물결처럼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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