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의 시작은 늘 소란스럽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꽃이 가장 먼저 피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리듯, 단풍도 가장 먼저 불타오르는 설악으로 행락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악의 단풍은 그 화려한 색감보다 북새통을 이룬 주차전쟁이나 앞사람과 발맞춰 오른 산행으로 기억되곤 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다 감수하고라도 우리 땅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설악의 단풍이 충분히 아름답긴 합니다. 설악으로 떠나는 ‘호젓한’ 가을 여행을 제안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풀숲에 피어난 가을 꽃도 보고, 간혹 파란 가을하늘도 올려다보면서 누리는 그런 여행입니다. 이런 여행의 요령이란 단순합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기만 하면 됩니다. 욕심껏 다가서지 말고 뒤로 물러서면 여정은 훨씬 더 느긋해집니다. 여기다가 묵은 길과 오래된 마을을 끼워넣었습니다. 저물어가는 계절과 뒤로 물러선 공간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선사하는 건 호젓함과 평화로움이었습니다.
# 가슴 철렁한 가을, 단풍 찾아 옛 고개 넘다 먼저, 가을을 노래한 한 시인의 짧은 시 한 편부터.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마음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정희성 시인의 ‘가을날’ 전문>. 저무는 가을날에 문득 가슴 철렁함을 느끼는 게 어디 시인뿐일까. 중년 이상의 나이라면 붉은 단풍잎과 지는 나뭇잎 앞에서 무심하게 흘려보낸 시간의 흐름과 마주친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를 가늠하다 보면 이런 생각에 가닿기도 한다. 앞으로 이렇게 더 몇 번의 가을을, 붉게 물든 단풍을, 긴 그림자의 코스모스를 더 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정도면 가을 단풍여행의 이유로 삼기에 충분하다. 단풍의 출발은 늘 그렇듯 설악이다. 대청봉에서 내려와 중청과 소청 일대를 기웃거리던 단풍이 지난 주말의 찬비로 계곡을 따라 맹렬하게 내려오고 있다. 이번 주말쯤이면 단풍보다 더 현란한 형형색색의 등산복 차림의 행락객들이 설악산을 가득 채우리라. 흥겨운 행락의 틈에 슬쩍 끼어드는 것도 좋겠지만, 이번 가을에는 이런 소란스러움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첫 단풍을 호젓하게 만나보자. 고즈넉한 가을 숲을 제 발자국 소리만 이끌고 걷다가, 간혹 단풍나무 붉은 그늘 아래서 쉬기도 하면서 여유있게 떠나는, 그런 여행을 해보자는 얘기다. 호젓한 단풍을 찾아가는 길이라면 찾아들어가는 길부터가 그래야겠다. 설악의 단풍을 찾아가는 행락 차량들은 줄을 지어 미시령 고갯길 아래 터널로 빨려들어간다. 미시령터널로 들어가면 거대한 설악을 관통하는 데 고작 5분 남짓이다. 터널이 압축해내는 건 거리(距離)뿐만이 아니다. 터널은 설악을 만난다는 두근거림도 산 너머의 동해바다를 본다는 기대도 함께 삼켜버린다. 목적지에 미처 ‘생각’이 당도하기도 전에 눈깜빡할 새에 산 이쪽에서 저쪽으로 ‘몸’이 순간 이동을 하는 셈이다. 그에 비해 미시령 옛길은 어떤가. 미시령 터널이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이 고갯길은 단풍철이면 하루 8000대가 넘는 차량들로 가득찼었다. 미시령을 넘을 때면 누구나 고갯마루 정상의 미시령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망원경 몇 대가 설치된 주차장 끝에 서면 속초 일대와 함께 동해바다가 펼쳐졌다. 여행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맞이하는 속초의 바다 풍경은 감격에 가까웠다. 하지만 2006년 터널이 뚫리고 난 뒤 ‘7번군도’란 이름을 달고 물러앉은 옛길은 단풍철이 시작된 이즈음에도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주말에는 그나마 추억을 되짚어 찾아들어온 차량을 간간이 만날 수 있지만, 평일이라면 길은 한산하다 못해 적요하다. 고갯길을 다 넘어갈 때까지 단 한 대의 차도 마주치지 않는 것쯤은 예사다. 터널 개통과 함께 상인들이 모두 떠나면서 미시령 정상의 휴게소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휴게소 건물은 쇠락하다 못해 무너져가고 있다. ‘붕괴위험’이란 붉은 글씨의 팻말을 달고 엎드린 채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휴게소 건물 앞에서의 느낌은, 시인이 저무는 가을 코스모스 앞에서 느낀 ‘가슴철렁함’과 좀 닮은 듯하다. 익숙한 것은 다 옛것이 되고, 옛것은 뒤로 물러앉아 하나 둘 허물어져가고 있으니 말이다. 새로 반듯한 길이 놓이면서 쓸모를 잃고 버려지긴 했으되 미시령의 굽이굽이 고갯길이 보여주는 장쾌한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그러니 쓸모 잃은 길이 쓸쓸하기만 한 건 아닌 것이 옛길의 아름다움을 호젓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 ‘설악산의 끝’ 그리고 ‘금강산의 시작’ 설악의 단풍을 보겠다면 행락객들의 인파를 피할 도리가 없다. 진입로에 길게 늘어선 차량들의 물결로 설악산에 접근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산에 들어선다 해도 단풍이 가장 붉게 물든다는 천불동계곡은 물론이고, 수렴동계곡이나 십이선녀탕, 주전골 일대도 죄다 단풍놀이 나선 행락객들로 아예 북새통이다. 이름난 단풍 코스 거의 대부분 구간에서는 앞서가는 사람의 보폭에 맞춰 길게 줄을 서듯 산행을 해야 할 정도다. 설악의 단풍은 그만한 불편함을 감수할 정도로 화려하긴 하지만, 이래서야 도무지 가을의 정취를 느낄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설악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 보자. 미시령의 고갯길이 가르는 설악의 북쪽, 그러니까 미시령 휴게소를 끼고 있는 북설악에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당당한 산세를 자랑하는 신선봉이다. 신선봉은 설악의 북쪽 끝이면서 금강산 1만2000개의 봉우리가 시작된다는 남쪽의 제1봉이기도 하다. 신선봉은 출입통제 구간이지만 그 아래 능선의 성인대까지는 호젓한 숲길을 밟아 오를 수 있다. 성인대란 이름은 설악 쪽으로 내민 암봉 끝에 불상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해발고도는 645m로 설악의 이름난 봉우리에 감히 비할 바가 못 되고, 미시령 정상 높이보다도 200m쯤 낮다. 그럼에도 이곳은 울산바위를 비롯해 북설악 일대의 전경과 신선봉, 그리고 동해바다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특급 전망대다. 설악의 가을과 단풍을 물러서서 호젓하게 감상하기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 게다가 성인대로 오르는 산길은 단풍철에도 붐비는 법이 없다. 산 자체는 매혹적이지만, 지척에 설악산을 놔두고서 이곳까지 찾아드는 사람이 드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간간이 산길에서 마주치는 등산객들은 고즈넉함을 찾아온 이들이다. 성인대로 오르는 길은 절집 화암사에서 시작한다. 우선 절집 화암사 구경부터. 화암사로 드는 길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게 ‘금강(金剛)’이란 이름이다. 금강산의 첫 봉우리인 신선봉 아래 있다고 해서 일주문에 ‘금강산문’이라 새겼고, 선방에도 ‘금강산 화암사’의 현판을 내걸었다. 대웅전 마당 끝에 팔각지붕으로 우뚝 세워둔 종루는 금강산의 가을 이름인 ‘풍악(楓嶽)’을 써서 ‘풍악제일루’를 이름으로 삼았다. 절집의 내력을 적은 옛 문서에도 절집 이름 앞에는 꼭 ‘금강산’이란 이름이 들어갔다. 그렇다면 화암사를 끼고 있는 성인대도 금강산의 남쪽 자락인 셈이니 거기서 설악을 바라보면 ‘금강에서 설악을 보는’ 셈이다. # 성인대에서 울산바위의 압도와 마주하다 화암사에서 성인대까지는 원점회귀의 산행코스가 잘 다듬어져 있다. 절집에서 출발해 먼저 성인대에 올랐다가 수바위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거리가 4.1㎞ 남짓이다. 뒷짐 지고 가을꽃을 감상하며 여유있게 오른대도 2시간이면 넉넉하다. 원점회귀 산행이니 시계 방향으로도 또 반대 방향으로도 오를 수 있지만, 시계 반대 방향으로 길게 올랐다가 짧게 내려오는 코스가 한결 힘이 덜 든다. 길은 간명하다. 화암사로 드는 금강교 앞에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숲길을 찾아가면 된다. 설악의 단풍만은 못해도 이제 잎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화암사 주변의 단풍도 예사롭지 않다. 지난 주말 찬비가 내렸으니 지금쯤이면 참나무들과 뒤섞인 단풍나무들이 이파리를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으리라. 성인대까지는 잔돌이 깔린 부드러운 흙길이다. 숨을 골라야 하는 제법 가파른 구간이 짧게 있긴 하지만, 거칠지는 않다. 설악의 대청봉은 말할 것도 없고, 천불동이며 수렴동까지 단풍을 보러갈 때의 수고에 비한다면 절반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숲길이 끝나고 제법 굵은 암봉의 무리로 이뤄진 성인대에 당도하면 몸을 날려버릴 듯한 바람이 먼저 마중 나온다. 특히 비가 내리고 맑아지는 이튿날이면 똑바로 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바람이 거세다. 그 바람 속에서 낙타바위 쪽으로 다가가면서 본 울산바위는 더욱 압도적이었다. 창처럼 일어선 거대한 바위들로 병풍을 세운 듯한 모습에 으르렁거리는 바람소리까지 합쳐지니 울산바위는 마치 거대한 산짐승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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