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화해자’ 살라딘이여 다시 한번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한 정문에 들어서니 고풍스런 박물관 건물이 나타난다. 마리관에 들리니, 탈 카즐에서 출토된 기원전 16세기(청동기 말엽)의 채도와 10세기께 중국 당삼채가 놓여있다. 로마관에서는 눈에 익숙한 새머리 모양 물병 등의 로마 유리그릇들을 볼 수 있었다. 또 비잔틴관에는 ‘중국에서 온 다마스커스 비단’(83년)‘중국에서 온 한(漢)-다마스커스 비단’(103년)등의 설명을 붙인 비단 유물들도 선보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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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분열위기서 아이유브왕조 건국
3차 원정온 십자군 2만명 전멸시키고
적장 사자왕 리처드 두 번이나 구해
동서양 모두가 추앙하는 평화주의자
앞서 들른 아즘궁 박물관은 18세기 오스만 제국의 옛 총독 관저 자리로,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열탕·냉탕 뒤섞은 터키식 목욕탕, 지름 150㎝나 되는 구리 식판, 신랑·신부를 돋보이도록 만든 바닥을 20㎝나 높인 신발 등이 옛 생활문화를 생생히 보여준다. 구리 세공과 대롱불기 유리 그릇 제작, 각종 식물 무늬를 새긴 다마스쿠스 비단 같은 특산품 생산과정도 지켜보았다.
이곳 관광 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살라딘 영묘 참배다. 오후 3시께, 뜨거운 햇볕 속에서도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다. 여성들은 검정 이바(겉옷)로 온몸을 가려 죽은 이에게 경의를 표한다. 시내 살라딘 광장에는 말 타고 달리는 모습을 굳힌 동상이 우뚝하다. 살라딘은 이슬람 역사상 드물게, 어찌 보면 유일하게, 동서양에서 위인으로 추앙받는다. 서구와 이슬람 세계 사이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1095~1291)의 대립 관계를 슬기롭게 타개한 업적 때문이다. 두 세계 사이의 이른바 ‘문명충돌’이 아직도 계속된다는 지금 많은 이들이 그의 ‘재림’을 바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그의 무덤은 문명간 화해와 어울림을 상징하는 성소인 셈이다.
살라딘(본명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1137~1193)은 이라크 티그리트의 쿠르드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4살에 군에 입대해 승승장구하면서 1169년 이집트 파티마 조의 재상에 오른다. 정국 혼란을 틈타 왕조를 전복하고 북아프리카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지역을 망라한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다. 국교를 시아파에서 수니파로 바꾸고 분열 위기의 이슬람 세계를 재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재위 1169~93)
예루살렘 탈환 뒤 살육·파괴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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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결정적 운명은 십자군 8차 원정 중 가장 대규모였던 3차 원정(1189~92)과 함께했다. 최고 통치자 술탄에 앞서 용·지·덕을 겸비한 무장으로서 영국 사자왕 리처드가 이끈 십자군과 맞선 것이다.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 2만명을 물 없는 곳으로 유인해 고립시켜 일격에 전멸시켰고, 아르수트 전투에서는 패하고도 전열을 재빨리 정비해 승전고를 올렸다. 유리한 전황임에도 패전한 적장에게 손을 내밀어 평화협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무모한 리처드가 야파 전투를 벌여 반격하다 낙마한 신세가 되자, “고귀한 사람은 그렇게 땅에서 싸우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자기 말 두 필을 보냈다. 심지어 리처드가 열병에 걸리자 위로편지와 약, 얼음을 구해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성지 탈환’을 명분 삼은 십자군은 1차 원정에서 40일간 예루살렘을 포위해 이틀간 점령한 뒤 무슬림들을 가차 없이 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한다. 무슬림들과 함께 싸운 유대인들은 십자군 입성 뒤 장로의 지시를 받고 예배당에 모여 예배했는데, 이때 십자군은 그들을 포위하고 불질러 타죽게 한다. 지난 2000년, 꼭 900년 만에 로마 교황은 이때 비행을 사죄하는 칙령을 발표한 바 있다. 반면 살라딘은 88년만에 빼앗긴 예루살렘을 도로 찾은 뒤 일체의 살육과 파괴를 금지하고, 포로들은 몸값만 받고 풀어주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교회를 돌려주었다. 그 뒤 700년 동안 예루살렘 길 위에는 피 한 방울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살라딘은 리처드와 평화협정을 맺고 석 달 뒤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다른 곳에서 숨졌으나, 마드라사(신학교) 자리였던 이곳에 안장했다. 술탄이자 개선 장군이었건만 그의 금고에는 약간의 은 부스러기밖에 없어, 가족과 친구들이 돈을 거둬 장례비를 마련했다고 전한다. 평소 “재물 대하기를 모래같이 하는 사람도 있다”며 부와 영화를 경멸하고 근면과 소박함을 신념 삼은 그였다. 그 신념답게 무덤도 소박하다. 나무관은 입구 오른쪽에 있고, 왼쪽엔 1898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기증한 대리석 빈 관이 놓여 있다. 십자군 지휘관들조차도 ‘고귀한 적’이라고 일컬으며 존경했다는 살라딘은 단테의 〈신곡〉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희대의 위인들과 ‘최소한의 벌을 받는 고결한 이교도’로 등장하기도 한다.
3차 십자군전쟁을 다룬 영화 〈천상의 왕국〉(킹덤 오브 헤븐)에서 살라딘 역을 맡은 시리아 배우 가산 마스오드는 살라딘을 아랍, 무슬림들의 자부심과 위엄을 지켜준 영웅이자 문명, 국가간 대화를 주창한 평화주의자로 평가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세상은 전쟁과 광신자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대화를 통해 함께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고 고백했다. 이것이 바로 감독 리들리 스콧이 영화를 제작한 의도라고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아메리카-이슬람위원회로부터 ‘균형 잡힌 훌륭한 영화’란 호평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을 욕되게 하는 망령이 사라진 것만은 아니었다. 1920년 7월, 시리아가 프랑스의 위임통치 아래 들자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프랑스 점령군 사령관 앙리 구로는 먼저 살라딘 무덤을 찾아가 “살라딘이여, 우리는 돌아왔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이슬람 전체를 기독교가 지배한다는 의미”라고 선언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비슷한 망령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장담할 증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오늘의 비극이다.
단테 ‘신곡’에선 ‘고결한 이교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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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나 이라크 전쟁을 기독교-이슬람 문명간의 불가피한 ‘충돌’로 왜곡하면서 원인을 십자군 전쟁에서 찾는 이들이 있다.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사실 이 전쟁은 ‘성지 탈환’이란 종교적 열광을 방편으로 내건 전쟁이다. 그 본질은 신흥 유럽과 아랍-이슬람 세계가 지중해 일원의 패권과 이권을 놓고 다툰 전쟁이지, 오래도록 공생공영해 온 두 종교나 문명 간의 대립·충돌은 결코 아니었다.
아직도 우리네 학계나 여론은 이슬람교를 폭력의 종교로 오도하면서 ‘충돌론’을 금과옥조처럼 맹신하는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최근 일각에서 유럽 중심 주의를 비판하면서 십자군 전쟁의 재조명을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원로 서양사학자 한 분은 얼마 전 발표한 글에서 지적했다. “서유럽 성직자와 귀족들이 합작해 엮은 성지 탈환 전쟁ㅡ십자군 원정ㅡ이란 곧 동방 이슬람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우월에 대한 서유럽의 질투와 갈망이 빚은 발작이다.” 되새겨 볼 만한 성찰이다.
마지막 날 저녁, 현지 안내원은 일행을 집에 초대했다. 그는 팔미라의 유목민 가정 출신으로 한때 캐나다로 이주해 그곳 여인과 결혼했으나 아이 갖기를 거부해 이혼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대가족제를 선호하는 아랍인들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로 용납될 수 없다. 손수 음식상을 차려 환대하는 그와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호텔에 돌아오니 저녁상에 난데없는 쌀밥과 쌈배추가 있었다. 한국인 기호를 헤아려 호텔 쪽에서 특별히 차진 이집트 수입쌀과 배추를 구해 준 것이다. 이게 바로 아랍 특유의 손님 대접이고 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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