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선시(禪詩)감상_05

醉月 2011. 1. 13. 08:53

발길따라

 

無端逐步到溪邊 流水冷冷自說禪

遇物遇緣眞體現 何論空劫未生前

한가이 걸음따라 시냇가 이르러니
냉냉이 흐르는 물이 선(禪)을 얘기하누나
사물을 만날 때마다 참모습 나타나니
하필 공겁(空劫)소식 논할까?
출전 :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

 

석양(遇吟一)

斜陽空寺裡 抱膝打閑眠(사양공사리 포슬타한면)

蕭蕭驚覺了 霜葉滿階前(소소경각료 상엽만계전)
저녁노을 텅 빈 절에
무릎 안고 한가히 자누나
쓸쓸해 깨어보니
벌써 물든 잎새가
뜨락에 가득하네


은자의 삶(偶吟二)
暄暄寧似默 攘攘不如眠
永夜空山月 光明一枕前

떠드는 것이 침묵만 못함이요
허둥대는 것이 잠자는 것만 못하리라
밤새도록 텅 빈 산에 달이여
나의 베개 앞에 비취느냐!


미친듯이(偶吟四)

那山幽寂處 寄我枕雲眠


如得其中趣 放狂十路前

어느 산중이 깊은 적멸궁이냐
내 그 산에 들어가 구름 벼개삼아 잠자리
그 가운데 참으로 취흥만 얻는다면
큰길 앞에 서서 미친 듯 노래 부르리


경허 성우(鏡虛 惺牛)(1846~1912)

 

빈 손에...

空手把鋤頭

步行騎水牛
人從橋上過
橋流水不流

빈 손에 호미자루를 잡고
걷다가 때론 물소를 탄다
사람이 다리 위를 좇아 지나가는데
다리가 흘러가고 도리어 물은 흐르지 않네

傅大士 (467~569) : 이름은 흡(翕), 자(字)는 玄風.
24세에 계정당(稽停塘)에서 인도승려 숭두타(嵩頭陀)를 만나 佛道에 뜻을 두고 송산의 쌍도수 사이에 암자를 짓고 스스로 이름하여 쌍수림하당래해탈선혜대사(雙樹林下當來解脫善慧大士)라 하였다. 낮에는 품을 팔고 밤에는 大法을 연설하여 이렇게 하기 7년, 소문이 사방에 떨쳐 천하의 명승들이 모였다. 547년 단식분신공양(斷食焚身供養)할 서원을 세웠다가 제자들의 만류로 그만 두고 제자 열아홉 명이 대신 몸을 태웠다. 548년 송산정(松山頂)에 가서 칠불전(七佛殿)에 참배하고 태건 1년 4월에 입적. 나이 73세. 경(經)을 넣어 두는 전륜장(轉輪藏)을 만들었으므로 후세에 전륜장 가운데 사(師)의 상(像)을 모셨다.

 

한 잎 조각배는(偶書)

飄然一葉泛風濤  萬抗千搖浪轉高
本自舟中無一物  陽候惱殺也從勞
한 잎 조각배는 바다 위를 떠가는데

천만 번 흔들리면서 파도는 더욱 높네
본시 이 배 안에는 아무것도 없거니
뭣 때문에 물결은 저리 사납게 일고 있는가.

원감충지 (圓鑑沖止, 1226∼1292)
고려시대 승려로 시호는 원감국사(圓鑑)국사. 19세에 문과(文科)에 장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일본에 사신(使臣)으로 갔다 왔다. 선원사 원오(圓悟)에게 법을 받고 41세에 김해(金海) 감로사(甘露寺)에 있다가 원오국사가 입적하매 그의 뒤를 이어 조계(曹溪) 제6세가 되었다.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북경(北京)으로 청하여 빈주(賓主)의 예로 맞고 금란가사와 백불(白拂)을 선사하기도 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18년에 입적, 그 때 세수 67세 였다.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身在海中休覓水

日行嶺上莫尋山
鶯吟燕語皆相似
莫問前三與後三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물찾기를 쉬고
매일 산 위를 다니면서 산을 찾지 말지어다
꾀꼬리 울음과 제비 지저귐이 서로 비슷하니
前三과 더불어 後三은 묻지 말지어다

 

야보 도천(冶父 道川)
생몰 연대 미상. 남송대(南宋代) 스님. 속성은 적(狄)씨. 곤산(崑山)출신. 금강반야경송(金剛般若經頌)을 지음

 

흰 연뿌리 싹이 없어도...

白藕未萌非隱的
紅花出水不當陽
遊人莫用傳消息
自有淸風遞遠香


흰 연뿌리 싹이 없어도 숨겨진 것이 아니요
붉은 꽃 물 밖에 나와도 밝음이 아니라네
구경하는 사람 소식 전할 일 없으니
맑은 바람에 향기 절로 전한다오

                          - 頌古 聯珠通集 中에서

 

 

지공화상께 드림, 다섯(呈似指空五)

飢食困來眠 無心萬境閑

但衣本分事 隋處守現成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거니
마음이 비어 있어 어딜 가나 넉넉하네
이렇듯 본래 마음 잃지 않으면
그 어느 곳인들 극락 아니리


백운 경한 (白雲景閑) 1299~1375
고려스님으로 전북 고부출신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원(元)에 들어가 10여 년동안 머물면서 지공(指空)에게 법을 묻고 석옥 청공(石屋淸珙)에게서 임제종의 선법을 전수받은 뒤 귀국했다. 신광사(神光寺)․흥성사(興聖寺)에서 종풍을 선양하다가 김포 포망산 고산암(孤山庵)에 은거하다가 천녕(川寧)취암사(鷲巖寺)에서 입적하셨다. 저서로는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과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불조직지심체요철(佛祖直指心體要節) 2권이 있다.


 

허공을 찢어서(自讚四)

打破虛空出骨 閃電光中作窟

有人問我家風 此外更無別物

허공을 찢어서 뼈다귀 꺼내 들고
번갯불 저 빛 속에 주거지를 마련하네
누군가가 내 가풍을 묻는다면
이 밖에 또다시 특별한 것은 전혀 없네.

나옹혜근 (懶翁 惠勤)(1320˜1376)
고려스님으로 영해(寧海)출신이다. 속성은 아(牙)씨, 이름은 원혜(元惠), 헌호는 강월헌(江月軒)
20세에 이웃의 친구가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를 어른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자, 비통한 생각을 품고 바로 공덕산(功德山) 묘적암(妙寂庵)의 요연법명(了然法明)에게 출가함. 이후 명산대찰을 편력하다가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4년간 수도한 끝에 깨달음을 얻음. 28세에 원(元) 연경 법원사(法原寺)에서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에게 2년간 배운 뒤, 호남지방을 편력하며 정자사(淨慈寺) 처림(處林)과 무주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원장(千巖元長)등에게 참학. 다시 지공에게 돌아와 그 법을 이어받음.
도행(道行)이 황제에게까지 알려져 광제선사(廣濟禪寺) 주지로 있으면서 설법함.
39세에 귀국하여 오대산(五臺山) 상두암(象頭庵) 에 머물고, 42세에 왕명으로 내전에서 설법했으며, 신광사(神光寺) 주지로 있었음.
52세에 왕사가 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總攝 勤修本智 重興組風 福國祐世 普濟尊者)에 봉해짐.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이를 중수하고, 57세에 문수회(文殊會)를 개최함. 왕명으로 밀성(密城, 密陽)의 영원사(營原寺)로 옮겨가다가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이색(李穡)이 비문을 지음.
저서로는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 및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각 1권이 있음.

 

 

達磨贊(달마찬)_서산대사 휴정 (1520~1604)
剪雲爲白衲

割水作靑眸
滿腹懷珠玉
神光射牛斗

蘆泛淸波上
輕風拂拂來
胡僧雙碧眼
千佛一塵埃

저 흰구름을 잘라서 흰 장삼을 만들고
저 쪽빛 물을 베어서 푸른 눈동자를 그려 넣었는가
그 어른 배는 주옥을 가득 품었겠지
신령스런 광명이 북두칠성까지 비쳐 갔으리

갈대 타고 깨끗한 물에 띄우니
경쾌한 바람 불어 옷깃 떨치며 소림굴에 이르도다
호승은 두 눈이 푸른데
천불이 찾아와도 하나의 티끌일 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