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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내남면 안심리 암각화, 일명 여우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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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문헌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고고학의 발달로 문헌자료의 부족함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오늘은 구전설화 한 토막과 암각화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접근을 해보자.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을 타고 경주를 막 지나면 오른 쪽으로 제법 넓은 들이 나타난다. 그 들이 끝나는 지점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경주시 내남면 안심리 소재) 가 있다. 필자는 이 암각화를 1999년 답사했다. 당시 마을 주민에게 이 바위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대답이 참 낯설었다. 그 바위를 '여우바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 바위를 여우바위라고 부르는 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연결고리를 황해도에서 채록된 구전설화에서 찾았다. 그 구전설화에는 단군과 기자의 탄생 이야기가 담겨있다. '옛날 밥나무에서 밥을 따 먹고 옷나무에서 옷을 따 입던 시절, 하늘에서 사람이 하나 떨어졌다. 한데 그의 남근이 예순 다섯 발은 될 정도로 길었다. 그래서 동물들이 모두 마다했는데 곰이 굴속에 있다가 그 남근을 맞이하여 단군을 낳았고, 그 후 여우가 받아서 기자(箕子)를 낳았다고 한다'. 필자는 문헌으로 전달되지 않은 민족사의 비밀을 이 구전설화와 안심리 여우바위가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전설화를 단군신화와 연결하여 생각해보자.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곰이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고,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여우가 만나서 기자가 탄생했다. 이는 단군의 무리와 기자의 무리가 어느 정도 혈연적으로 연결되는 측면도 있지만, 두 집단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우라는 단서를 통해서 우리는 기자조선이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난하 동쪽에 있었던 고죽국(孤竹國)이 바로 여우를 토템으로 한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그 지역에서 기자일족의 것으로 보이는 '기후(箕侯)'라는 이름이 새겨진 청동유물도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기자가 동쪽(고죽국)으로 왔을 때 단군세력들은 그보다 더 동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상고사를 이해할 때는 기자조선보다 먼저 동으로 이동한 세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그들이 진인(辰人)으로 후에 진국이나 숙신으로 나타나는 세력으로 본다. 아무튼 우리는 고죽국의 여우토템이 황해도 구전설화나 안심리 여우바위에 그 흔적을 남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죽국은 여우를 사자로 하는 농업신을 토템으로 하던 부족이었다. 이들 고죽국 사람들과 기자무리가 결합했던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먼저 들어왔던 단군조선의 후손들이 섞여 살면서 전한 이야기가 바로 황해도 구전설화일 것이다. 또한 뒤늦게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왔던 조선의 무리 중 여우를 농업신으로 여겼던 사람들이 경주 안심리 암각화를 조각했을 것이다. 이들 안심리 암각화를 조성했던 일단의 무리가 일본으로 건너간 흔적이 바로 일본 전역에 퍼져 있는 이나리신사(古麓稻荷神社)이다. 이나리 신앙은 농업과 관계가 있고 여우가 상징 동물인데 일본 전역에 분포한다. 신사의 외부에는 이나리신사의 상징인 여우 조각 두 개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여우토템의 이동 흔적이다.
두 길로 이동한 신어(神漁) 한반도에서 만나다 '쌍어문'문화 수로왕 이전에 환웅족 루트타고 한반도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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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문 |
|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왕과 허황옥이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 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이옵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가야를 개국한 수로왕은 외국에서 온 처녀와 국제결혼을 한 것이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아유타국, 즉 아요디아(Ayodhia)는 갠지스강 중류에 흐르는 사라유 강변에 자리 잡은 고대 도시로 코살라국의 수도였다. 수로왕의 국제결혼 기록을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아유타국을 아요디아와 공개적으로 처음 연결시킨 사람은 아동문학가인 이종기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김수로왕릉의 정문에 그려진 쌍어문(雙魚紋)이다. 쌍어문은 탑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보고 있는 그림을 말한다(사진1). 이종기는 1977년 인도의 아요디아를 방문해서 수많은 건물에 새겨진 쌍어문을 발견하고 탐방기를 썼다. 그를 이어 가야의 문장과도 같은 쌍어문을 집요하게 추적한 사람은 고고학자인 김병모이다. 그는 유라시아 문명사에 나타나는 신어사상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는 코살라국이 쿠샨왕조의 침입으로 붕괴되자 아요디아에 살던 왕족 중 일부가 지금의 사천(四川)성 안악(安岳)지역으로 이주했다고 보았다. 안악 지역에 지금도 허(許)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성촌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청동제 유물이나 한대의 벽돌에도 쌍어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후한서'에 따르면 안악에 살던 허 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후한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한 후 양자강 하류의 무창(武昌)으로 강제이주 당한다. 허황옥은 그들의 정착지인 무창 지방을 떠나 바다를 건너 한반도 김해의 가락국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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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앙소문화권에서 출토된 채도(채색도자기)의 쌍어문. 수메르문명의 물의 신 엔키는 바빌로니아의 신 에아로 이어지는데 이 신화에 나오는 사제인 물고기 신인(神人)들이 쌍어문의 기원이다. |
| 그렇다면 아요디아가 쌍어문의 발상지인가? 김병모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신어사상을 믿는 사람들의 이동루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처음에 앗시리아(기원전 2700년)에서 발생해 페르시아를 지나 스키타이에게 전달되었고, 이것이 간다라 지방을 거쳐 인도로 들어와 아요디아에 이르렀고 다시 동진하여 중국 운남성에 도달했다. 이것이 무창을 거쳐서 가야에 도착했다. 과연 신어사상은 김병모의 주장처럼 남방루트를 통해서만 한반도에 이르렀을까? 그렇지 않다. 그가 주장하는 시기보다 훨씬 오래 전에 북방루트를 통해서 한반도로 전해온 신어사상이 있다. 그 비밀은 김병모도 지적한 '떡시루에 북어 두 마리를 걸쳐 놓는 우리의 고사 풍습도 신어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신어사상은 김병모가 주장하는 것 보다 훨씬 이른 기원전 5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했다. 쌍어문 도안은 기원전 5000년대의 메소포타미아의 우바이드 문화의 채도(채색한 토기)에 나타나고, 그 후 이 문양은 중국 중원지역으로 이동하여 앙소문화 채도에 나타난다(사진2). 앙소채도에 나타나는 쌍어문은 후에 갑골문의 정할 정(貞)자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서아시아에 전승되듯이 물고기가 신의 사자로서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쌍어문 문화는 필자가 환웅족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의 이동루트를 타고 한반도까지 들어온다. 즉 칠성신앙과 관련된 무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 새와 배를 타고 하늘나라 오가다 고대인들 가까운 거리에 하늘나라 있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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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00년대 초, 옛 수메르인 마을에 지구라트를 짓고 있는 모습을 담은 진흙으로 만든 도장. 하늘의 신들이 '천상의 배'를 타고 하강하고 있다. |
| 고대 국가를 세운 왕들은 대개 천신의 자손들이라 지상의 과업을 마치면 하늘로 돌아간다. 옥편(玉鞭)을 남기고 승천한 주몽이 그런 경우다. 죽어서 돌아가는 곳은 하늘뿐이 아니다. 황천도 있고 서천도 있다. 고대인들의 하늘나라와 저승에 대해서 알아보자. 신석기 시대가 되면 인류는 다양한 신들을 창조(?) 한다. 하늘과 땅의 신, 그리고 그 둘의 교합으로 신들이 탄생한다. 그래서 그들 신들이 거주하는 하늘나라가 생겼다. 우리민족에게도 단군신화의 형성기에 '하늘'에 대한 신앙이 생겼으며 그 하늘에는 하늘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고대인들의 하늘나라에 대한 생각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순진했다. 현대인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듯이 하늘은 평평한 지구의 위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둥근 지구의 360도 모든 방향의 위쪽이 하늘이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구를 평면으로 인식한 고대인들은 하늘나라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유라시아 대륙을 비롯해 전지구적으로 나타나는 우주수(宇宙樹·우주나무) 개념이다. 고대인들은 신들이 우주 중심에 있는 신목(神木)을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관념적인 나무라 해도 나무를 타고 하늘나라에 오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하늘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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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목을 통해서나 새를 타고 하늘을 오갈 수 있다는 관념을 도상화한 신라왕관. 경주 서봉총 출토. |
| 또 다른 근거를 들어보자.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 한전의 변진(弁辰)조에는 "큰 새의 깃으로 장사를 치르는데 그 의미는 죽은 자로 하여금 날아오르게 하고자 함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갈 때 새처럼 날아간다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도 있었다. 그들은 바(ba)로 불리는 영혼이 새의 형상을 하고 하늘나라로 간다고 생각했다. 이는 고대인들이 하늘나라가 새가 날아서 갈 수 있는 곳에 있다고 생각했음을 말한다. 신목을 통해서나 새를 타고 하늘을 오갈 수 있다는 관념을 도상화한 것이 바로 신라왕관이다. 하늘나라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또 있다. 기원전 3000년대 초, 키쉬의 옛 수메르인 마을에 지구라트를 짓고 있는 모습을 담은 인장(진흙으로 만든 도장)을 보면, 하늘의 신들이 '천상의 배'를 타고 하강하고 있다(사진2). 배를 타고 하강할 수 있는 거리에 하늘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이 자료는 또한 최근에도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UFO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고대 신들은 UFO나 비행체와 같은 탈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천상을 오갔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우리선조에게도 있었다. 하늘의 별을 알처럼 파놓은 경남 함안군 함안읍 도항리 고인돌에도 천선(天船)이 새겨져 있다. 저승은 어떤가.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저승인 황천(黃泉)은 지하에 있었다. 그러다 불교가 들어오자 서쪽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바뀐다. '바리데기'를 비롯한 우리 무속신화에 나오는 서천서역국은 황천수(黃泉水) 건너편에 있다. 물론 죽은 자의 영혼이 그 황천수를 건널 때도 배를 탔다. 그리스 신화에도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다주는 카론이라는 뱃사공이 나온다. 고대인들은 하늘나라도 저승도 배를 타고 이동했다. 오늘날과 같은 비행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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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오의 다리는 왜 세개일까 동지·춘추분·하지의 태양이 뜨는 3개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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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장난감 책 '칠교도보'에 있는 그림 속의 삼신산. |
| 삼족오(三足烏) 하면 우리는 고구려를 떠올린다. 대중매체에서는 삼족오를 마치 고구려의 문장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삼족오를 고구려만의 독특한 문화로 보기는 어렵다. 삼족오는 기원전 4000년경 중원의 앙소문화에도 나타나고 일본의 고분들과 신사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족오에 등장하는 까마귀는 왜 다리가 3개일까? 여기에 대한 해명이 아직 미흡한 것이 학술계의 사정이다. 3이라는 숫자를 생각하면 먼저 단군신화가 떠오른다. 단군신화를 보면 3과 관련한 내용이 이상할 정도로 많다. 먼저 삼위 태백(三危 太白) , 천부인 3개, 환웅이 끌고 온 무리 3000명과 풍백·우사·운사 3인, 삼칠일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민족은 3수를 유난히 좋아한다. 내기를 해도 세 번 해야 성이 차고, 술자리 지각생은 '후래자삼배(後來者三杯)'라고 하여 술을 세 잔 연거푸 마신 후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심지어 한국인의 국민적 놀이(?)인 고스톱에서도 3점이 기본 점수이다. 이는 우리가 무의식 중에 3을 완성이나 가득참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3수는 삼신신앙에 그대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삼신할머니라고 부르는 이 신은 아기를 점지하고 낳고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삼신은 세 명의 신으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삼신상에 밥과 국이 항상 세 그릇 차려져 있는 것이 좋은 증거다. 그러나 3수는 세계 문화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숫자이기도 하다. 삼신만 해도 그렇다. 그리스 신화에는 운명을 결정하는 3명의 여신이 있다. 힌두교에는 브라흐마·비슈누·시바의 3신이 있다. 기독교에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3신이 존재하며, 불교는 3존불 형태로 3수를 수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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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역포구 무진리에서 출토된 옛 장식품. 삼족오 문양으로 장식돼 있다. |
| 그렇다면 삼족오의 다리는 왜 3개일까? 중국문헌에는 '삼족오의 다리가 3개인 것은 양수가 1에서 시작되어 3에서 완성되기 때문에 태양 속에 삼족오가 있다'고 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삼신사상, 즉 천(天) 지(地) 인(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삼족오의 다리가 3개인 것은 태양의 운행과 관련하여 생겨났다. 태양은 동지에서 시작하여 춘분·추분·하지를 거쳐 다시 동지해가 뜨는 자리로 온다. 삼족오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위태백의 삼위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새인 까마귀를 형상화한 것이다. '중문대사전'에 보면 "삼위는 이적(夷狄)이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삼위산이 중국의 북방에 살던 사람들의 신산(神山)이라는 말이다. 우리 조상을 포함한 북방민족들은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했다. 태양숭배 의식과 삼위산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 신성한 도시의 동쪽에 삼신산이 있을 때 삼신산의 제일 오른 쪽 봉우리에서 태양이 솟을 때가 동지이다. 중앙의 제일 높은 산에 태양이 솟아오를 때는 춘분과 추분, 그리고 왼쪽 봉우리에서 태양이 솟으면 하지가 된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보면 태양은 끝없이 세 봉우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이 모습을 상징적으로 도상화하면 태양새인 까마귀 한 마리에 세 발(세 봉우리)이 달린 것으로 상징화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삼족오가 탄생한 것이다. | 풍수지리와 서역인이 지키는 괘릉 늪지에 만든 신라 왕릉, 중국식 풍수사상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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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외동면 괘릉리에 있는 신라 왕의 무덤 괘릉. 땅과 관련해 현재의 풍수사상과는 현격히 다른 사고의 체계가 당시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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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어려운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살아오는 과정에서 많은 사유를 했다. 그 중에서도 땅에 대한 생각은 각별했다.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인류는 대지를 어머니 여신으로 생각했다. 생명을 낳는 어머니로서 땅에 대한 생각은 후대로 오면서 더 고차원적인 관념으로 변한다. 노자가 "계곡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것을 검은 암컷이라고 한다. 검은 암컷의 문을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한다"고 했을 때 '검은 암컷의 문'은 바로 여신의 자궁을 관념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지의 여신은 우리나라 산 속의 여기저기에 어머니 여신의 자궁으로 묘사되어 있다. 조상들은 그곳에 기도를 하며 자식 낳기를 빌었다. 그러한 관념이 풍수사상과 결합하면 '지령(地靈)이 뭉쳐 있는 지점에서 인물이 탄생한다'는 사고를 낳는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풍수사상은 대부분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전통적인 지리 관념이 있었다. 하나의 부족이 이동하여 수도를 정할 때 경제적·군사적으로 호조건을 갖춘 지역을 선택한다든지, 수도 주변의 특정한 지역(예컨대 소도·蘇塗)을 신성시한다든지, 산천을 숭배한 것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 고유의 지리관념은 중국의 풍수사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가령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예로 들어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경주의 진산(鎭山)은 경주 분지의 남쪽에 있는 나지막한 산인 낭산(狼山)이다. 하지만 신라의 왕성은 그 산을 의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왕성인 반월성도 남천의 물이 쳐들어오는 형국이다. 후대의 풍수관점으로 보면 길지가 아니다.
중국의 풍수사상을 받아들인 선조들은 명당에 무덤을 마련해야 본인은 물론 후손이 발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새로 탄생한 대통령의 생가와 그 조상의 무덤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터를 보기 위해서다.
과연 그러한 생각은 옳은 것일까? 특별한 신라 왕릉 하나를 조명해 보며 그 해답을 찾아보자. 경주시내에서 울산으로 가는 국도를 타고 불국사역을 지나면 외동면 괘릉리가 나온다. 그곳에 사적 26호인 괘릉이 있다. 이 괘릉이란 이름이 만들어진 연유를 보면 신라만의 장묘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능이 조성된 곳은 원래 물이 고여 있던 늪지였다고 한다. 무덤방을 조성한 후 물이 차오르자 관을 돌 위에 걸쳐놓고 흙을 쌓았다. 그래서 '걸 괘(掛)'자를 붙여 '괘릉'이라 하였다 한다. 왕릉은 명당 중의 명당일 텐데, 굳이 물이 고이는 늪지에 왕릉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식 풍수관념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그것은 신라인들의 무덤에 대한 사고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생각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류는 특별한 소수가 창안한 사상체계를 마치 영원한 진리인 것처럼 믿는 경향이 있다. 풍수사상만 해도 그렇다. 동서양의 문명사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풍수사상을 맹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풍수사상을 신봉하지 않는 서양이 물질적 풍요를 이룬 것만 보아도 그렇다. 여러 사상을 존중하되 그 사상의 노예가 되어선 안 될 일이다. |
절 만(卍)자의 기원과 전파 선사시대부터 전세계서 사용…태양·창조주의 힘·생명 등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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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의 가슴에 선명하게 그려진 절 만(卍) 자. |
| 아미타불의 가슴에 卍(만)자가 있다. 사찰에 가면 새 을(乙)자를 엇갈려놓은 듯한 卍자를 많이 볼 수 있다. 이 글씨를 보면 사람들은 절을 연상한다.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사찰 표시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광지도나 도로 표지판에 절을 표시할 때 卍자를 사용한다. 卍자는 부처님의 가슴이나 손발에도 새겨져 있다. 그런 卍를 우리는 속칭 절 '만'자라고 한다. 학계에서는 卍자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卍자가 인도에서 기원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卍자는 십자와 마찬가지로 선사시대부터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이 卍자의 의미와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자. 공간적으로 卍자는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 세계에서 사용하던 기호이다. 卍은 아리아인들이 인도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인더스강 하류 지방 문명에 나타난다. 그 후 인도에서는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모두에서 卍자를 길상문으로 사용했다. 서아시아와 지중해 지역에서도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卍자를 도자기에 그려 넣었다. 기원전 8세기께 그리스 도자기에도 卍자가 나타난다. 또한 卍자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중부 유럽, 서유럽, 북유럽과 기독교 이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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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북부 사마라에서 출토된 기원전 5000년께의 도자기. 한 가운데 절 만(卍) 자의 형상이 또렷하다. |
| 그렇다면 이렇게 광범위하게 사용된 卍자의 상징은 동일했을까? 일반적으로 아리안족은 卍자를 태양 및 천공신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태양원반과 함께 그렸다. 같은 인도-아리아인의 종교인 힌두교에서 卍은 생명, 운동, 행복, 행운을 나타낸다. 자이나교에서 卍은 천지의 창조주이며 신적인 힘을 나타낸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부처의 심오한 깨달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윤회를 나타내기도 한다. 중국에서 卍은 '길상만덕(吉祥萬德)'의 모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의 지속, 생명의 무한한 소생을 나타낸다. 한국에서도 卍자는 부처님의 만덕(萬德)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卍은 풍요와 비의 상징이었다. 고대 근동의 셈족은 卍자를 태양의 부수물들과 함께 그리기도 했지만, 여신 아스타르테의 음부의 삼각 부분에도 그린 것으로 보아 여성의 생산력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켈트족에게 卍은 행운의 상징이었으며 벼락신과 함께 그렸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卍자는 길상문으로 태양, 창조주의 힘, 여성의 생산력, 비와 관련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최초의 卍자는 어디에서 발생했으며, 발생 당시의 상징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고고학적으로 卍자의 원형이 발견되는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卍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엔키(Enki) 신앙과 관련하여 발생했다. 대지의 신이자 지하에 있는 생명수를 관장하며 인류를 창조하기도 한 엔키는 바빌로니아 신화에서는 에아(Ea)로 불렸다. 그런데 기원전 5000년께 만들어진 도자기의 바닥에 엔키(에아)와 관련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을 보면 卍자가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나타나 있다. 卍자는 생명수에서 자아 내지는 영원한 생명 활동을 상징한다. 인도에서 卍자를 갠지스 강의 성수를 담는 항아리의 봉인으로서 사용하는 것에서 卍자의 원형적 의미를 읽을 수 있다. | 신라금관에 숨어있는 남녀 조상신 3·4단 出자형 장식, 직계 조상과의 관계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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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몽골 출루우트 강변의 암각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중간단계인 동석기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
| 신라금관에 숨어 있는 상징은 어머니 조상과 아버지 조상, 그리고 생명의 나무이다. 오늘은 조금 색다른 각도에서 신라 금관을 이해해 보기로 한다. 신라인들은 유라시아의 샤머니즘을 한반도로 가져와 찬란한 금관으로 꽃피웠다. 금관은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하지만 금관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완성된 곳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바닷가에 자리 잡은 신라에서였다. 영국의 금관은 화려하고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했지만 신라금관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중국은 아예 금관을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라금관이 장례용 부장품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금관은 영혼이 가야 할 상징세계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여왕이 금관을 쓰고 대관식을 거행한 것은 고증의 측면에서는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신라금관은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이 가지고 있던 상징 코드를 모두 담아낸 걸작이다. 그 주요 구성 요소는 나무·사슴뿔·새·곡옥이다. 여기서 새는 죽은 이의 영혼을 생명의 원향인 생명나무로 실어 가는 역할을 한다. 나무는 생명나무로 흔히 우주수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 원형적 이미지는 생명의 모신(母神)나무이다. 그리고 사슴뿔은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는 초목과 동일시되는 것으로 남성 신을 상징한다. 그리고 동물 태아 모양을 하고 있는 곡옥은 생명의 씨앗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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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기원전 200년께 이집트의 관(棺)에 그려진 그림. |
| 필자는 신라금관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출루우트 암각화에서 찾았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북쪽으로 700㎞쯤 가면 출루우트 강이 있는데, 그곳에 선사시대의 암각화가 있다(그림1). 최대 기원전 30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암각화에서 우리는 신라금관을 만든 원형적인 사고를 읽을 수 있다. 소련 고고학자 노브고라도바의 설명을 보자. '오른쪽 맨 위의 그림을 보면 머리에 뿔 같은 것이 자라고 있다. 이 그림에서 다리 사이에 보이는 커다란 물체는 막 태어난 아이를 나타낸다. 머리에 자란 것은 사슴뿔이다. 이 뿔 달린 그림에는 씨족의 두 조상- 어머니·여(女)조상 그리고 아버지·사슴 -인 씨족의 장(長)에 대한 보편적인 이데아가 표현되었다.'(그림1 오른쪽 상단, 머리에 큰 사슴뿔을 이고 있는 사람에 대한 설명) 출루우트 암각화에서 우리는 신라금관의 조형 요소 중 두 가지, 즉 사슴뿔과 출(出)자형 나무 장식의 의미를 이해하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금관에 표현된 녹각형 장식, 즉 사슴뿔 장식은 부계 조상을 상징하며 여러 단으로 구성된 출(出)자형 장식은 모계 조상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1 왼쪽 하단, 뒤집어진 출자형 그림에 주목) 이렇게 주장하면 여러 대를 이어서 표현한 암각화의 도상과 여러 단으로 구성된 나무 장식이 어떻게 동일한 상징을 담고 있는가 하고 의심할 것이다. 그것은 후대로 오면서 어머니 조상들을 단계적으로 표현한 도상이 어머니 여신 나무와 결합한 사실로 해소할 수 있다. 어머니 조상, 즉 모신(母神)이 생명의 나무로 표현된 예는 이집트의 관에서 볼 수 있다(사진1).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신라금관의 출자형 장식이 금관에 따라 왜 3단 혹은 4단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직계 조상(왕)으로부터 몇 대를 계승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 첨성대는 천문관측대인가 선덕여왕 즉위 기념하고 권위 과시하는 상징물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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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첨성대(국보 제3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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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는 과연 그 이름대로 천문관측대일까? 첨성대는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등극하면서 이반하는 민심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상징물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성 우위의 이데올로기가 힘을 발하는 상황에서 여왕 불가론은 충분히 제기 될 수 있었다. 신라 승려 안홍이나 당나라 태종이 신라왕은 여왕이기에 이웃나라의 침범을 받는다고 말한 것도 당시로서는 당연한 상황인식일 수 있다.
선덕여왕 또한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장이 당에서 귀국하기 전에 만난 신인(神人)도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소…본국에 돌아가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할 것이오'라고 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이 가지고 온 이러한 논리를 수용하여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한다.
기존 견해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첨성대의 상징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주류학설은 과학계에서 주장하는 천문대설이다. 다음으로 24절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세운 규표(圭表)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은 첨성대의 구조에 주목한다. 기단위에 돌로 쌓은 27단과 그 위에 놓인 정(井)자석 단을 합하면 28단이 되는데, 이는 하늘의 기본 별자리 수 28수(宿)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진에서 보듯이 돌로 쌓은 단을 한단 씩 세어서 27단으로 본다면 정(井)자 모양의 단도 2단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단의 수가 29단이 된다.
또한 남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 위가 각각 12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12달과 24절기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방식대로 셈한 28단에 기단 1단을 더하면 29가 나오는데 이는 한 달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사진에서 보듯이 몸체를 세는 방식으로 세면 기단도 2단이다. 따라서 첨성대는 기단석부터 돌을 한 단씩 세면 총 31단이 된다. 이 설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의 수미산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란 설이 있다. 이 설은 첨성대를 제석천이 지배하는 33천의 도리천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첨성대 자체의 31단에 하늘과 땅을 더하면 33이라는 수가 나온다는 것을 든다. 이 또한 무리한 해석이다.
최근에는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즉위를 기념하고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첨성대는 우물을 형상화한 것인데, 그 우물은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탄생한 우물로써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조상이 탄생한 우물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또한 첨성대의 중앙에 난 창문은 선덕여왕 자신이 석가족의 후예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을 상징하는 창문이라는 것이다.
선덕여왕이 재임 중 조성한 두 가지 거대한 상징 구조물인 황룡사 9층탑과 첨성대는 당시 신라주민들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던 두 측면, 즉 불교와 토속 신앙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두 상징물을 통해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한 것이다. 즉, 첨성대는 성스러운 인물이 탄생한 우물을 형상화했으며, 그 우물형태의 첨성대에서 하늘의 뜻을 살피고자 했다. 당시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토속신앙의 핵심은 지하 생명수에 관한 신앙과 칠성신앙이었다. 첨성대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연결하는 제단성격의 구조물이다. 첨성대 주변이 당시에 비두(飛斗· 북두칠성)거리였던 것도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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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에서 쫓겨난 호랑이 산신으로 부활 이주민 환웅과 요동·한반도 문화의 결합으로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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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직지사의 산신탱화 속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 |
| 오늘은 경인년(庚寅年)이 시작하는 날이다. 경인년은 호랑이 중에서도 백호(白虎)의 해다. 무언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한해가 될 것 같다. 호랑이는 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한 동물이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산신을 모시는데 산신의 사자로 호랑이가 등장한다. 호랑이 해를 맞아 호랑이가 어떻게 산신이 되었으며 한국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호랑이는 한민족의 기원신화인 단군신화에 처음 등장한다. 외부에서 이주해온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 터를 잡고 신정을 펼칠 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 살고 있었다. 이들 곰과 호랑이는 환웅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환웅이 쑥과 마늘을 주며 100일 기도를 하라고 한다. 곰은 3·7일(21일)을 잘 참아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해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환단고기'는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는 사해 밖으로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민족의 초기 공동체인 단군조선에서 호랑이 부족은 소외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한반도에 살던 조상들은 호랑이를 산신으로 숭배하며 살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반도의 고대신앙에서 곰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호랑이가 차지하는 그것이 훨씬 크다. 왜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공간적인 이동과 관련이 있다. 단군조선의 초기 무대는 중국 동북지역에 있는 요하(遼河) 서쪽으로 추정된다. 그곳은 최근 주목 받고 있는 홍산문화 지역이다. 홍산문화 유적지에서는 곰 턱뼈, 흙으로 만든 곰 아래턱, 옥으로 만든 곰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으며, 옥으로 만든 호랑이 장식도 출토되었다. 단군신화의 무대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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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권에서 출토된 옥호랑이 상 |
| 둘은 호랑이를 숭배한 사람들이 시베리아 동부지역과 그 남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인 것과 관련이 있다. 홍산문화 지역인 요서를 기점으로 해서 동쪽 지역 사람들이 호랑이를 많이 숭배했다. 중국문헌인 '산해경' 대황동경에는 '동쪽에 있는 군자국 사람들은 범이나 호랑이를 부린다(使虎豹)'고 했다. 또한 '삼국지'의 '위지동이전' 예(濊)전에는 '호랑이에게 제를 올리고 신으로 여긴다'고 했다. 이는 요동지역과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숭배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한국의 산신도에 보이는 산신의 이미지가 만주 에벤키족에 남아 있다. 그들은 숲의 혼령을 모신다. 이 숲의 혼령은 사냥에 행운을 주는 존재이다. 힝간 에벤키족은 이 혼령을 창백한 얼굴빛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회색 수염 및 무척 긴 속눈썹을 가진 거대한 노인으로 상상했다. 그는 긴 다리에 개를 타고 다니는데, 바라라히족신화에서는 그가 호랑이를 타고 다닌다. 그렇다면 한국의 호랑이 산신신앙의 문화사적 배경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단군신화에서 단군은 아사달산의 산신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단군이 호랑이와 직접 관련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호랑이 산신은 두 가지 문화사적 흐름의 결합일 것이다. 하나는 동북지역과 한반도의 독자적인 호랑이 신앙 흐름이며, 다른 하나는 요서지역에서 태동하여 한반도로 들어온 단군조선의 산신신앙이다. 이들이 결합하여 호랑이와 산신이 결합한 호랑이 산신신앙을 낳았다. 즉 고조선계의 산신신앙과 한반도에 자생하던 호랑이 신앙이 결합하여 한국의 호랑이 산신이 탄생한 것이다. |
신라왕도 편두를 했을까? 목숨까지 위협한 두개골 성형… 종교적 이유로 행해졌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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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중앙아메리카에서 출토된 마야 문명의 모자상. 아기가 편두를 하고 있다. |
| '삼국지' 한전에 보면, '아이를 낳으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평평한 머리를 만들었으며 지금의 진한 사람들은 모두 편두(褊頭)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왜 진한 사람들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기이한 풍습인 편두를 했을까? 편두라는 것은 아기가 태어났을 때 인위적으로 두상을 조작하여 위쪽을 좁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어린이의 두개골이 연약하다고는 하나 돌로 머리를 눌러서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사진1 참고). 뿐만 아니라 말 못하는 어린이의 입장에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편두를 만드는 과정에 아이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김해 예안리 고분에서 발굴된 4세기 때의 편두 중 5~6세의 어린이의 두개골은 후두부가 열려 있었다. 이는 앞이마를 누른 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정수리에서 뒤통수에 이르는 이음새가 열려 사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명의 위험이 따름에도 아이의 두상을 강제로 변형시키려 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두개골 성형을 한 셈인데, 그들은 편두형의 머리를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당시의 관점에서는 편두를 한 머리가 아름답게 보였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단순히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만 편두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용보다 더 중요한 종교적 이유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해답을 예안리에서 출토된 여성 인골에서 찾을 수 있다. 예안리에서 출토된 편두는 여성 인골에만 국한되어 있었으며, 여성이라고 다 편두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고고학계에서는 일종의 무당과 같은 특수 신분의 여성들만이 편두를 했을 것으로 본다. 예안리에서는 여성의 편두만 나왔지만 편두를 여성들만 했던 것은 아니다. 경주에 있는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상(사진2)을 자세히 보자. 이 인물의 모습은 편두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다. 금령총이 6세기에 조성된 것이니까 적어도 당시까지는 신라인들이 편두에 관해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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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경주 금령총에서 나온 신라 기마인물상. 편두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다. |
| 그렇다면 과연 초기의 신라왕들도 편두를 했을까? 이종호는 신라의 왕들도 편두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비문'에 '편두거매금(遍頭居寐錦)'이라는 글귀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 비문에 나오는 편두는 두상을 납작하게 하는 편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삭발한 머리를 말한다. 비문의 편두(遍頭)는 '삼국지' 한조의 편두( 褊頭)와 글자도 다르다. 비문의 해당 구절은 "게다가 성(姓)마다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매금(왕)과 같은 존귀한 분이 삭발하기도 하였다(加以姓參釋種 遍削也 頭居寐錦)"라고 해석 하여야 한다. 이는 신분과 계층에 구애됨이 없이 많은 백성이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왕까지도 머리를 깎은 분이 있다는 말을 전한 것이다. 실제로 법흥왕과 진흥왕은 말년에 머리를 삭발했다. 이와 같이 이종호는 삭발한다는 의미를 가진 편두를 머리를 변형시키는 편두로 잘못 이해했다. 따라서 그가 든 증거로는 신라왕이 편두를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야지역에서 4세기께까지 편두풍습이 있었다는 것과 신라인들이 6세기께까지 편두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라왕들은 고깔형 관모로 편두가 가지고 있었던 상징을 흡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칠지도는 진왕 후손에게 보낸 백제의 선물 마한지역의 '칠성신앙' 담겨있는 神物, 칠지도 마한 진왕의 후예인 왜국 지배자들에게 보여준 백제측의 친선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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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고고학계에서 첨예하게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유물로 칠지도(七枝刀·사진)가 있다.
칠지도는 1874년 일본 나라 현 텐리시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에서 발견되었다. 그 칼에는 '칠지도(七支刀)'라는 명문과 함께 칼을 만든 내력이 적혀있었다. 일본 쪽에서는 그것을 백제왕이 만들어 일본왕에게 헌상했다고 하고, 한국 측에서는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칠지도의 제작 동기를 색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자.
이른바 '헌상설'은 호시노 히사시(星野恒)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신공황후 49년(369)년에 왜가 가야의 일곱 나라를 정복하여 백제에 주었더니, 3년 후에 사례하는 뜻에서 백제가 사신을 보내 칠지도와 칠자경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광복 후 북한의 학자 김석형은 칠지도는 4~5세기에 백제가 강성했을 때 백제왕이 황제의 입장에서 일본에 있던 백제계 분국(分國)의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하사설'이다.
칠지도는 '신공황후 52년 조'에 보이는 칠자경(七子鏡)과 연계해 해석할 필요가 있다.
학계에서 대체로 수긍하듯이 근초고왕대(346~375)의 백제는 최전성기였다.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였을뿐 아니라 남으로는 가야지역과 마한 소국에 대한 지배를 확대해 나갔다. 헌상설의 배경이 된 역사적 상황은 이러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왜국의 지배자들은 백제 지역에 있던 마한 월지국의 진왕(辰王)과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던 사람들로 추정된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도 '일본을 정복한 기마 정복민족의 지도자는 3세기 중 삼한을 지배한 진왕의 후손'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정은 그 후의 역사기록에서 끊임없이 자신들이 마치 삼한에 연고권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데서 엿볼 수 있다.
'일본서기'는 오진(應神)왕 3년(392)에 왜의 주도로 백제 아신왕을 즉위시켰다고 하며, 유랴쿠(雄略)왕 21년(476)에는 구마나리(웅천 또는 공주)를 문주왕에게 주어 백제를 다시 일으켰다고도 한다.
또한 '송서' 왜인전을 보면 왜왕이 한반도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제나라(479~502) 황제는 왜왕(倭王)에게 '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군제군사 진동대장군'을 제수하기도 한다. 당시 왜왕들이 진왕의 후예였다는 것은 칠지도와 칠자경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앞서 연제한 글들에서 여러 번 주장했듯이 고조선계로 한반도에 선주했던 집단들은 칠성신앙을 주 신앙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삼한의 주도세력은 마한 월지국의 진왕이었다. 이 진왕세력의 주도신앙은 칠성신앙이었다. 칠지도와 칠자경은 바로 이 칠성신앙과 관련하여 제작한 신기(神器)였다.
이도학은 칠지도가 종교적 의기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충분이 일리 있는 주장이다. 칠자경(七子鏡)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七子'는 칠성의 아들임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칠지도는 당시 왜 왕실의 종교적 정서, 즉 자신들은 칠성(북극성)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칠지도는 백제에서 왜 왕실과 선린관계를 의식하고 만들어 보낸 의기로 볼 수 있다. 일본은 7세기 초 천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 하는데 이 또한 '천황대제는 북극성'이라는 관념과 연결된다.
| 칠층 피라미드 장군총의 비밀 3·7 數 관념 구조화…한민족 정신문화 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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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장군총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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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에서 수(數)는 세계를 이해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민족은 처음부터 3과 7수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3·7관념은 민족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면서 여러 흔적을 남겼다. 고구려의 문화유산이자 세계의 문화유산인 장군총도 바로 3·7관념을 반영하여 축조했다. 장군총이 갖는 상징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진에서 보듯 장군총의 맨 아래 계단을 상대석으로 보면 장군총은 3개씩의 계단을 가진 7층 구조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단군신화에서부터 등장하는 3·7 개념을 구조화한 것이다. 단군신화에 보면 웅녀는 환웅이 준 마늘 20개와 쑥 한 단을 먹고 굴에서 3·7일(21일)만에 사람이 되어 소원을 성취한다. 그런데 장군총의 구조도 3·7구조, 21계단으로 꾸몄다. 이로 보아 장군총은 단군 이래의 정신문화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속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3·7일 동안 금줄을 달아서 외인의 출입을 금했다든지,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3·7자 주문(呪文) 같은 것은 한민족이 이어온 3·7문화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7일 동안 금줄을 다는 것은 이 기간이 무사히 지나야 아이가 비로소 제대로 사람 꼴을 갖춘다고 하는 측면에서 일종의 변화의 완성과 관계가 있다. 동학의 주문도 그것을 암송하여 깨달음을 얻어서 변화를 완성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웅녀가 곰에서 사람으로 변화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수행에 있어서도 3·7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경덕왕 시기의 진표율사는 금산수에 있는 순제법사의 명으로 경덕왕 19년에 변산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서 미륵상 앞에서 3년 동안 계법을 구했으나 수기(受記)를 받지 못한다. 그러자 그는 다시 발원한 후 3·7일간 수행하였더니 지장보살이 가사와 바릿대를 준다. 다시 수행한지 3·7일 만에 천안통을 얻어서 도솔천 무리들이 오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3과 7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을 담고 있을까? 먼저 3수는 세계문화사에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삼계설, 즉 천상과 지상과 지하 세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7은 하늘의 중심에 있는 별인 칠성과 관련된 수이다.
우리 민속에서 칠성은 생명을 주관하는 별이다. 무덤에 칠성판을 놓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하는 것은 바로 생명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칠성신앙의 뿌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신석기 문화와 관련 있을 개연성이 높다. 7이라는 숫자는 각종 수메르 신화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성수(聖數)로 사용된다. 저명한 종교학자인 엘리아데도 하늘을 중층 구조로 보는 사유 체계 특히 7층으로 구별하는 관습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보이는 것이라 지적했다. 이때 하늘을 7층으로 구분하는 사유도 북두칠성의 일곱 별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군총은 바로 유라시아 문명사에 보이는 세계산 혹은 세계수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즉 3·7구조로 된 장군총은 천상과 지상과 지하를 수직으로 잇고 있으며, 그 천상의 정점에 북두칠성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무덤을 통해서 피장자는 세계의 중심 통로를 통해 생명의 고향인 북두칠성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 북쪽에 신전을 만들고 파라오의 조각상을 만들어 북쪽으로 세우고 그의 눈이 북극성을 향하도록 했다. 이는 북극성에 파라오의 형제가 머물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방의 파라오인 고구려 왕도 북극성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
머리에 나뭇가지를 달고 청동기에 나타난 사람 그는 풍요로운 대지·생명을 주관한 木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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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대전서 출토된 청동 의례용품 |
| 대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청동으로 만든 의례용품(사진1)에서 우리는 조상들의 농업생산에 관한 의식을 읽을 수 있다.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종자가 어떻게 전래되었으며, 어떤 원리에 의해서 자라는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청동기의 한쪽 면에는 갈라진 나뭇가지에 새가 두 마리 앉아 있고, 다른 쪽에는 벌거벗은 남자가 쟁기로 밭을 갈고 있다(사진2). 여기서 나뭇가지에 앉은 두 마리 새는 우리 민속의 솟대를 표현한 것이다. 솟대의 발생은 우주수(단군신화의 신단수·神檀樹)와 하늘새의 결합에서 비롯되었다. 우주수는 북아시아의 샤머니즘에서 삼계, 즉 하늘·지상·지하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하늘새 또한 이 삼계를 넘나드는 신령한 짐승이다. 이 하늘새는 족장이나 샤먼과 천신을 연결해주는 사자(使者)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들이 천계로 오를 때나 지상으로 하강할 때 운반체로서도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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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밭가는 남자 |
| 일반적으로 청동의례용품에 그려진 이 새는 파종의 시기를 알리는 전령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새는 농경에 필요한 종자가 어떻게 전래됐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날아온 새이기도 하다. 농경이 확산되면서 씨앗의 전래 방법이 설명돼야 했는데, 이때 새가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씨앗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그 해답은 조로아스터교의 성전(聖典)인 '아베스타' 송가에 나오는 세상의 모든 씨를 모은 '신령스런 나무(聖樹)'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나무에는 새가 앉아 있는데, 나무에 앉아 있는 새는 그 가지를 벗기거나 떨어진 씨를 모아 하늘로 운반한다. 그러면 그 씨는 비와 함께 땅에 떨어져 새로운 식물이 돼 자라난다. 그렇다면 벌거벗고 쟁기를 가는 남자는 어떤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까? 그는 신단수(神檀樹) 신의 아들이다. 인물의 머리를 자세히 보자. 뒤통수에서 뒤로 길게 두 가닥이 뻗어있다. 이 두 가닥에 대해 학계는 아직 통일된 견해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절풍으로 보는 사람, 단순히 두 가닥의 긴 머리장식으로 보는 사람, 깃털로 보는 사람 등 다양하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을 나뭇가지로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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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머리에 뿔 달린 인물 |
| 청동기의 부분 사진(사진3)을 자세히 보면 가지가 하나로 나와서 두 줄기로 갈라져 있다. 이를 나뭇가지로 보는 이유는, 남자인 이 인물은 생명을 주관하는 인물로 농경의례에서 대지의 풍요를 기원하며 밭을 가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곡물 혹은 나무의 생명력과 동일시되는 인물이다. 그가 봄에 밭을 가는 의례를 행함으로써 대지에 생명의 에너지가 뿌려진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밭을 갈고 있다. 즉 그는 목신(木神)이요 부활의 신이다. 그래서 목신의 상징으로 머리에 나뭇가지가 자라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보충해줄 자료가 있다. 내몽골 음산암각화에는 머리에 나뭇가지가 솟은 신인(神人)이 표현되어 있다(사진2). 음산 지역은 한반도로 문화가 전파되는 길목이다. 최근에는 경주시 석장동 암각화와 내몽골 암각화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대전 괴정동에서 머리에 나무가 자라는 신인(神人)의 모습을 표현한 청동기가 출현하게 된 배경도 음산 지역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추래암 암각화는 생명이 출입하는 곳 영혼의 안내자, 오리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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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경북 달성군 현풍에서 나온 말모양 토기 |
| 고대 유라시아 샤머니즘의 세계에서는 영혼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고 믿었다. 우리나라 건국신화의 주인공 대부분도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그들은 무었을 타고 내려왔을까? 말과 오리를 타고 내려온 조상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4세기부터 6세기에 조성된 신라인의 무덤과 암각화에는 조상들의 생명관이 담겨 있다. 당시 신라 무덤에서는 동물모양 토기가 발견되는데 그 대부분이 말(사진1)과 오리이다. 오리형 토기는 대구에서 함안에 이르는 낙동강 하류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이는 이들 지역에서 오리를 신성한 새로 여겼음을 말한다. 이 지역에서 오리를 신성한 새로 여긴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다. 하나는 오리가 물새로서 벼농사와 관련된 물을 몰고 오는 새라는 점이다. 오리가 물새로 인식된 것은 시베리아를 비롯한 북아시아의 오랜 전통이다. 구석기시대에 맘모스의 뼈로 오리를 조각한 것이 있다. 이를 천둥새라 하는데, 그것은 구석기인들이 오리가 비를 몰고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오리를 영혼의 운반체(運搬體)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은 오리를 타고 이승과 저승을 오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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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속리산 법주사 추래암의 암각화 |
| 시베리아 대평원에 있는 사하공화국의 야쿠트(Yakut)족도 오리를 운반체로 생각한다. 그들의 의례장소에는 커다란 신수(神樹)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긴 소나무 장대가 있는데, 그 위에 물오리 아홉 마리가 하늘로 비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말모양 토기는 어떤가? 그것은 박혁거세 탄생신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백마가 가져온 알에서 태어났다. 박혁거세 신화에 등장하는 말은 유라시아 유목민족의 백마 숭배와 맥을 같이 한다. 신라 김씨 왕족의 조상인 김일제와 혈연적으로 연결된 사카족의 암각화에도 말이 자손을 가져다 준다는 생각을 담은 것이 있다. 중국 학자 왕빙화는 그 암각화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곳에는 '말을 통한 자손 기원 그림'이 있다. 사람은 실제 사람과 같은 크기고 그림 속 9명의 여성이 나체로 마주보고 있는 말 두 마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한 명의 나체인 남자를 바라보며 춤을 추고 있다." 그런데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마당에 있는 추래암에도 말을 통해 자손을 얻는다는 생각을 담은 암각화(사진2)가 있다. 이 암각화의 이야기는 위쪽과 아래쪽을 나누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우선 위쪽 가장 왼쪽의 인물이 오른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 손짓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사제의 옆에는 말이 없다. 이로 보아 이 사제는 하늘을 향해 자신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고 읽을 수 있다. 즉 하늘에서 말이 새로운 생명을 싣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말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그림에는 말과 사제가 함께 보인다. 이 그림은 천상에서 내려온 말이 사제에게 도착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 정확하지 않은 그림 다음의 것을 보면, 사제 옆에 말이 공손히 앉아 있고 사제는 동자를 도포자락으로 받아들고 있다. 천상에서 온 새 생명일 것이다. 반대로 아래 그림 세 폭은 영혼을 하늘로 보내거나 동자를 실어다 주고 천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추래암 암각화는 기자신앙(祈子信仰)과 영혼을 하늘로 보내는 의식을 표현한 암각화임을 알 수 있다. |
황금보검에 보이는 삼태극의 비밀 '세개의 태양' 기원은 홍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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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황금장식보검(사진 위·가운데는 삼태극 부분)과 중국 홍산문화권에서 출토된 '곰머리 세 구멍' 모양의 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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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경주국립박물관에서는 '황금보검을 해부하다'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을 열고 있다. 6세기 초 신라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1973년 대릉원 동쪽의 계림로를 새로 내는 공사 중에 많은 신라 무덤이 노출됐다. 이 가운데 계림로 14호묘라고 이름 붙여진 무덤에서 황금으로 장식된 보검이 출토됐다. 이 황금보검은 서쪽의 먼 나라에서 제작되어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황금보검은 어디에서 만들어져 수입된 것일까?
보검의 생산지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여러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다. 먼저 보검장식에 주목해보자. 보검의 황금판에 박혀있는 붉은색을 띤 보석을 지금까지는 마노(瑪瑙)로 알고 있었는데 과학적인 분석을 한 결과 석류석(石榴石)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카자흐스탄 보로보 무덤에서 나온 검 장식편에도 석류석이 박혀 있다. 이와 같이 석류석과 유리를 금판에 박아 장식한 유물은 흑해 북동부 아조프해 연안의 타간로크에서도 발견됐다.
다음으로 황금보검의 형식에 주목해보자. 황금보검과 비슷한 보검은 앞에서 말한 보로보 무덤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중국 신장성 키질 천불동 69호 석굴벽화에 비슷한 검을 찬 인물화가 있고,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에도 유사한 모양의 단검을 찬 사람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 유물은 제작기법이나 비슷한 유물의 분포로 보아 흑해 연안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지역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제작지를 좀 더 추정해볼 수는 있다.
황금보검을 누가 만들었을까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바로 보검에 장식된 세 개의 삼태극무늬이다. 위에서 말한 황금보검과 유사한 검들에는 삼태극 도안이 없다. 보검의 전체적인 디자인이나 기법이 매우 세련되고 정교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장식보검에 삼태극무늬를 디자인한 장인은 그 디자인에 매우 익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개의 삼태극무늬 안에 꽃봉오리와 세 잎 무늬, 때로는 사람의 머리나 동물머리 형상을 박아 넣는 것은 켈트인들이 즐겨 사용한 무늬로 일반적으로 '켈트파'라 한다.
그렇다면 황금보검의 제작자로 켈트인을 지목해 볼 수 있다. 켈트인들이 태극무늬를 사용한 고고학적 흔적은 기원전 2세기께 유물에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장식보검을 만든 켈트 장인은 어디에 살았을까? 켈트인의 본거지는 중부 유럽이다. 이들 중 동으로 이주하여 흑해 서쪽의 트라키아 지방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발 앞서 그리스·로마 문화를 받아들인 로마화된 켈트인이었다.
이들 켈트족에게 삼태극은 부지런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달리는 태양을 상징했다. 동양에서 삼태극은 상나라 시대의 청동기나 옥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삼태극의 기원은 그보다도 훨씬 빠른 신석기시대의 홍산문화로 볼 수 있다. 필자는 홍산문화 옥기에 보이는 삼공기가 바로 장식보검에 보이는 세 개 태극의 원형이라고 본다. 홍산인들이 만든 삼공기는 바로 세 개의 태양을 도상화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황금보검은 흑해 북동부에 거주하던 트라키아 장인이 제작한 것이 중앙아시아 스텝지대와 중국을 거쳐 신라로 전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요서지역의 홍산문화에서 발생한 세 개의 태양문이 어떻게 서쪽으로 전파돼 켈트인들이 사용하게 됐는지를 밝히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