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두륜산 대흥사

醉月 2011. 1. 13. 08:55

두륜산 대흥사

아홉 굽이 봄(春) 긴 골짜기에서 꽃비를 맞다

‘뱁새가깊은 숲속에 둥지를 짓는다 해도 나뭇가지 하나를 넘지 않는다(巢於深林不過一枝)’ 했습니다. 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말로, 천하를 맡아 달라는 요(堯) 임금의 청에 대한 허유(許由)의 답입니다. 가히 절대 자유의 경지에 노닌 사람에게서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말이겠지요. 이런 경지는 부러워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 가장 커다란 꽃, 봄산. 그리고 그 거대한 꽃망울의 암술인 듯한 대흥사.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은 개별적 미의 총합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사진은 대흥사 대웅보전 일대. 전면의 누각이 침계루이고 그 뒤로 보이는 건물이 대웅전이다.


이 땅의 남쪽 끝 해남의 두륜산 대흥사를 찾았습니다. 가는 길마다 벚꽃이 한창이었습니다. 꽃 그림자를 밟으며, 때로는 흩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이것도 ‘소요유(逍遙遊)’려니 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 침계루 벽면에 걸린 등. 초파일을 기다라는 불자들의 마음을 담고 있는 듯하다.
대흥사 하면 일지암(一枝庵)과 초의 스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옥을 짓고 살며 ‘풀로 옷을 삼는다’는 뜻의 ‘초의(草衣)’로 이름 짓고, 40년간 참선으로 일관한 그 ‘빛나는 남루’ 앞에서 나의 소요유는 뱁새와도 비교할 바가 못 됐습니다.

초의 스님이 둥지로 삼았던 일지(一枝)는 말 그대로 ‘하나의 가지’가 아닙니다. 깊은 숲을 볼 줄 알았던 빼어난 안목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숲’과 ‘가지’는 하나입니다. 그에게서 선(禪)과 차(茶)가 하나(禪茶一如)였듯이 말입니다. 


‘禪茶一如’였듯, 초의에게 ‘숲과 가지’는 하나


▲ 대웅보전 뒤 산기슭에서 바라본 천불전과 표충사 일원.


또한 초의 스님이 이룬 사람의 숲은 당대 최고의 높이를 보여줍니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위당 신관호, 소치 허유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특히 동갑이었던 추사와의 교분은 인간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보여 줍니다. 스님은 9년에 걸친 추사의 제주도 유배 동안 다섯 차례나 방문한 바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님도 답장도 보고 싶지 않으나 차(茶)만은 보내달라는 반 협박(?)투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초의 스님의 고매한 인격을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고절한 인품의 향기와 넓고도 깊은 숲의 푸르름으로 하여 아름다운 곳. 대흥사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나는 그 숲을 맘껏 탐하기로 했습니다. 뱁새의 지족(知足)은 분명 내 몫이 아님을 잘 아는지라, 공연한 도인놀음도 관심 저편으로 밀쳐버렸습니다. 

대흥사의 들머리는 장춘동(長春洞)입니다. 우리말로 풀면 ‘긴 봄 골’이 되겠지요. 두륜산에서부터 길게 흘러내리는 골짜기의 시린 기운이, 봄조차도 오래 머물렀다 가게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대흥사는 예로부터 ‘십리 숲길’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 숲길은 ‘구림구곡(九林九曲)’으로 불렸습니다. 아홉 번 굽이도는 숲이라는 말이겠지요. 실제로 그 길을 따르다 보면 대웅보전까지 여덟 번 물을 건너게 되는데(물론 다리로), 아홉 번 굽이가 틀림없는 셈입니다. ‘구림구교(九林九橋)’라는 별칭은 그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천불전 옆 요사채 앞 돌계단 위에 떨어진 동백꽃잎의 붉은 눈물. 봄의 절정


초록의 동굴 같은 대흥사 숲길을 제대로 느끼려면 찻길을 버리고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 옳습니다. 매표소에서 찻길 오른쪽으로 ‘걸어서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면 됩니다. 반대로 절을 나서며 이 길을 걷고자 하면 피안교를 지나 왼쪽으로 ‘산책로’라는 안내판이 길을 일러 줍니다.

계류와 나란히 또는 출렁다리로 계곡을 건너기도 하는 이 길은 동백, 소나무, 왕벚나무, 편백, 삼나무, 서어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대나무, 배롱나무 등 남도에서 자라는 대부분의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걸을 수 있습니다. 30분 정도 걸리는 이 길을 만약 혼자 걷는다면, 우리네 일상이 단 30분 정도도 온전한 자기만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혹 함께 걷고 싶은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필시 그 사람은 가장 편하거나 소중한 그 누군가일 테지요.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나는 거의 하루를 다 바친 시간과 얼마간의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 대흥사의 주불전인 대웅보전.

 

대웅보전의 편액은 원교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귀양살이 할 때 쓴 것이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 가면서 이 글씨를 보고 힐난했다가,

귀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때는 잘 못 알아봤다' 털어놨다는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글씨다.


대흥사 숲길의 그윽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풍정은 두륜산(703m)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 분위기는 두륜산의 본디 이름인 ‘한듬’이라는 말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국토의 최남단에 불쑥 솟아 있어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된 모양인데, 후에 한자와 섞어 ‘대듬’이라 부르다가 나중에는 대둔(大芚)이라고 바뀌었습니다.

물론 절 이름도 ‘한듬절’에서 ‘대둔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중국 곤륜산이 백두산으로 흐르고 그 맥이 이곳까지 뻗었다 하여 백두산과 곤륜산에서 한자씩 따서 두륜산(頭崙山)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일제 때 지명을 새로 고치면서 륜(崙) 자를 륜(輪)으로 바꾸고 절 이름도 대흥사로 바꾸었습니다. 일제로서는 곤륜산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발상이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는 절 이름을 ‘대둔사’로 되돌렸는데, 사람들 입에 쉽게 붙지 못하고 혼동을 일으켜 지금은 다시 대흥사로 부르기로 명토 박았습니다.


서산대사가 의발을 전한 절


▲ 대흥사 사천왕문의 동자상. 대흥사는 두륜산을 호법신장인 사천왕으로 삼기 때문에 사천왕상을 모시지 않는다 한다.


‘한듬’ 혹은 ‘대듬’으로 불린 두륜산의 풍광은 서산 대사의 말에 잘 표현돼 있습니다.

“(두륜산은) 기화이초가 항상 아름답게 피어 있고 옷감과 먹을 것이 끊이지 않는다. 내가 보건대 두륜산은 모든 것이 다 잘 될 만한 곳이다. 북으로 월출산이 이어져 있고 동의 천관산과 서의 선은산이 홀연히 마주 솟아 있다.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니 이곳은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을 땅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도 모자랐던지 서산 스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의발을 이곳 대흥사에 전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제자인 사명당 유정은 스승의 임종 후 사리는 묘향산 보현사에, 영골은 금강산 유점사에, 금란가사와 발우는 이곳 대흥사에 봉안하였습니다. 사산평(四山評)으로 널리 알려졌듯이 서산 스님의 묘향산 사랑은 유별난 데가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 사랑의 궁극처는 두륜산이었는가 봅니다.

큰 인물의 덕화는 큰 나무의 그것과 같아서 후세에 미치는 바가 두루 큽니다. 서산 스님의 문도 가운데 13대종사와 13대강백이 이곳 대흥사에서 배출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배불(排佛)이라는 시대적 흐름마저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서산 스님의 덕은 넓고도 높았습니다. 짧은 지면에 13대종사와 13대강백을 일일이 거명할 수 없지만, 그 중 한 사람 초의 스님은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대흥사는 창건 시기와 창건주도 정확히 전해오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서산 스님의 의발이 전해지고부터 선교(禪敎)의 총본산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13대 종사인 초의 스님에 이르러 다시 크게 일어났습니다. 초의 스님은 서산 스님의 유지를 이어 선(禪)과 교(敎)가 둘 아님을 주장했고, 동다송(東茶頌) 같은 명저를 지어 끊어져 가던 차문화의 맥을 이었습니다.

▲ (左)천불전 안의 경주 옥돌로 조성한 천불상. (右)가허루에서 본 천불전. 가허루 편액은 창암 이삼만의 글씨고, 천불전 편액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이미 말했듯이 대흥사의 정확한 창건 내력은 알 길이 없습니다. 대흥사의 창건 등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는 죽미기, 만일암고기, 북암기가 있습니다. 이들 중 만일암고기는 426년(백제 구이신왕 7) 정관존자가 산내 암자인 만일암을 창건하고 이름 모를 비구가 중건하였다 하고, 죽미기는 544년(신라 진흥왕 5) 아도화상 창건설과 자장 스님과 도선 스님의 중건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823년(순조 23)에 간행된 대둔사지는 앞선 기록들을 검토하면서 근거 없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마라난타에 의해 백제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신라의 아도화상이 백제의 절을 세웠을 리가 없는 등의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한편 대둔사지의 자료를 조사했던 아함 화상의 주장은 신라 말 창건인데, 현재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의 조성 연대가 통일신라 말로 추정되는 만큼 최소한 통일신라 말 이전에 창건된 절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름 없는 스님이 초라한 암자로 창건했건, 유명한 고승이 창건했건, 그런 것들은 내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서산 스님의 안목과 초의 스님의 중흥, 그리고 현재의 아름다운 숲만으로도 대흥사는 보배로운 절입니다. 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모두가 이 절을 거쳐 간 역대 조사의 현현으로 느낍니다.

대흥사의 가람 배치는 크게 네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금당천 건너 북쪽의 대웅보전 영역과 남쪽 둔덕의 천불전, 서산 스님의 사당인 표충사(表忠祠), 그리고 현재 선원으로 쓰이는 대광명전 영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크게 보면 금당천의 남북 두 영역으로 볼 수도 있는데, 두 공간을 이어주는 다리는 심진교(尋眞橋)입니다.


▲ 대흥사의 또다른 보물인 들머리의 십리 숲길. 아홉 번 굽이도는 숲이라 하여 '구림구곡'으로 불린다.


그런데 대웅전에서 침계루를 지나 심진교를 건너면 남원 영역으로, 둔덕이 석축으로 시야를 가리는데, 바로 그곳에 절묘하게 구부러진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그 나무로 하여 제법 높은 그 석축이 주는 폐쇄감이 상당히 누그러집니다. 나무 한 그루도 허투루 심지 않은 옛 스님들 안목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현존하는 대흥사의 문화재는 응진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북미륵암의 마애불(보물 제4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등이 있고, 표충사 일원이 기념물 제19호로, 대흥사 일원이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는 이런 보물들보다 대흥사의 숲과 두륜산의 신록이 더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숲 예찬이 과하다고 나무라실지 모르겠지만, 긴 봄(長春) 십리 숲길과 산벚꽃 고운 두륜산 자락에서 나는 분에 넘치는 안복(眼福)을 누렸습니다.

대흥사에서 숙식

대흥사의 템플스테이는 한국 최고라고 할 만하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이름이 ‘새벽숲길’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영혼의 피난’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문의 전화 061-534-5502).
현재 ‘새벽숲길’은 매월 셋째 주 금~일까지 진행하지만, 조만간 매주 상시체제로 전환할 예정이라고 한다. 시간이 맞지 않아 ‘새벽숲길’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사찰은 늘 열려 있다. 종무소나 포교국에 사전에 연락하고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면 템플스테이가 가능하다.
남도 어디건 그렇듯이 해남 일대도 먹을거리를 풍부하다. 절 입구에 대규모의 집단시설 지구가 있어 휴가 시즌이 아니라면 숙식에 어려움은 없다. 해남시에서 운영하는 유스호스텔(061-533-0170) 외에 여관이 다수이고, 조용한 분위기를 원하면 숲속민박(061-535-4972) 같은 곳을 이용하면 된다.
향토음식을 즐기려면 남도음식축제 제2회 대상을 받았다는 전주식당, 분위기 있는 곳을 원하면 레이크하우스(061-534-1771), 싸고 맛깔스런 집을 찾으려면 한오백년식당(061-534-5633)에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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