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32

醉月 2010. 11. 29. 08:42
페르시아 향기 한반도 전해준 ‘생명의 과일’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32> 석류의 고향, 시르쿠흐(사자산)
» 석류의 고향 시르쿠흐(사자산)로 가는 길. 사막 지대 특유의 황량한 산들과 그 아래 짙푸른 석류나무 숲이 대조적이다. 계절이 일러 석류가 붉게 여물진 않았지만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시라즈의 꽉 짜인 일정을 소화하고 이란 고원 언저리의 야즈드를 향해 아침 일찍 출발했다. 자그로스 산맥의 첩첩연봉들을 멀리하면서 차는 동북쪽으로 달렸다. 산맥에서 흘러내린 고루추강이 사막 땅을 적시며 찻길과 나란히 흐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두 시간쯤 달려 시라즈 동북방으로 130㎞ 떨어진 고도 파사르가데에 도착했다.

‘페르시아인의 본영’이란 뜻의 파사르가데는 세계 첫 통일제국이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첫 왕도다.

기원전 539년 왕조를 세운 키로스대왕은 메디아군을 격파한 이곳에 왕궁을 지었다. 간선도로에서 6㎞ 가량 들어가니 널따란 평지 한가운데 피라미드 형으로 돌 기단을 쌓은 무덤이 우뚝 서 있다. 사방이 11m쯤 되는 이 네모꼴 무덤은 바로 키로스 대왕의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죽음을 불결하다고 여겨 주검을 신성한 흙 속에 파묻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얹었다고 한다. 7세기 이슬람군 침입 때만 해도 무덤은 솔로몬 어머니의 것으로 알려져 왔으므로 이슬람군의 파괴를 면했다고 한다.

왕도 터는 둘레가 3100m나 된다. 두 궁전과 조로아스터교 신전, 솔로몬 감옥, 창고 등의 웅대하고 화려한 건축 유적들이 고즈넉이 남아있었다. ‘만국의 문’에 들어서니 8개 방이 딸린 중앙홀이 나타났다. 천장을 떠받치던 지름 80~90㎝, 높이 16m나 되는 돌기둥 잔해들이 눈에 띈다.

여기서 3시간쯤 달려 한 마을을 지나는데, 부근의 큰 나무 그늘이 쉼터라고 하기에 찾아갔다. 나무는 신화에나 나올 법한 거목 사이프러스다. 듣던 바대로 몇 백년 수령을 헤아리는 나무 밑둥치는 어른의 세 아름은 실히 되고 키는 30m가 넘었다. 우거진 잎새가 던지는 그늘도 지름이 20m나 된다. 뙤약볕 사막에서 길손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면서도 대가 한푼 안 받는 너그러움, 오늘 그 음덕을 먼저 누린 이들은 우리가 아닌 집시들이다. 알록달록한 옷차림의 집시들이 그늘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가가자 호기심에 찬 조무래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해발 2500m 독수리 머리 닮은 마을 한시간 동안 걸어도 석류의 숲
기원전 3세기 한무제 때 중국에 전래 8세기께 통일신라로 건너와
유리·은제 그릇의 무늬 등 사산조 페르시아 영향 아로새겨져


일가족 혹은 몇 가족이 무리지어 떠도는 이 방랑족은 원래 히말라야 산맥 기슭에 살던 인도계 인종의 하층민으로 9세기께부터 역사에 나타났다. 점차 서방으로 이동해 14~15세기 유럽 각지에 모습을 드러낸다. 쓰는 말은 산스크리트계 언어와 비슷했으나, 지금은 마구 뒤섞여 분간이 어렵다. 유럽에서는 스스로를 ‘롬’이라고 하여 그들 말을 로마니어라고 한다. 집시는 영국인들이 만든 타칭이다. 이집트에서 온 사람들로 잘못 알고 ‘이집션’이라고 불렀는데, 어두음이 말소되면서 ‘집션’, 즉 집시가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보헤미안’이라고도 한다. 사실 집시의 역사나 명칭은 이설이 너무 많다.

어쨌건 오늘날 180만~400만을 헤아리는 집시들의 역사가 인종차별로 얼룩진 수난사임은 분명하다. 15세기 말 스페인은 집시들의 유랑을 금한답시고 추방과 종신형에 처하는가 하면 귀를 자르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 뒤 유럽에서는 얼토당토않은 단속법이나 처벌법을 걸어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집시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울분과 애환을 특유의 정열적이고도 흥겨운 춤과 노래로 승화시켜 세계 음악·무용사의 한 페이지를 수놓았다. 저 구성진 스페인 플라멩코에는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셈이다. 우리는 바로 지금 그들과 함께 있다. 멜론을 나눠 먹으며 기념사진도 찍었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저으며 바래다주던 그들 모습이 선하다.

» 마을 어귀를 지키는 독수리 머리 모양의 산 봉우리가 이채로운 시르쿠흐 기슭의 독수리 마을.

» 파사르가데를 지난 뒤 한 마을에서 만난 집시 가족이 취재진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불모의 사막지대다. 햇볕도 한결 뜨겁다. 옛 대상들이 머물던 사라이(숙소)의 잔해만이 군데군데 보였다. 사막을 꿰뚫는 수로공사를 하느라 이곳저곳 파헤친 자리가 드러났다. 아직 묻지 못한 굵직한 수도관이 손길을 기다리며 모래 바닥에 누워있다. 자금난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황막한 사막을 개조하려는 현지인들의 의지만은 가상스럽다.

한 시간쯤 달리자 길 좌우에 듬성듬성 나무숲이 보였다. 고불고불한 산길을 한참 달려 해발 2500m에 달하는 정상을 넘어서자 나무숲은 온통 산을 뒤덮었다. 대부분 한창 물 오른 짙푸른 석류나무였다. 하산에만 30여분이 걸렸다. 산은 바로 석류의 원산지 시르 쿠흐였다. 페르시아어로 ‘시르’는 사자고, ‘쿠흐’는 산이니 ‘사자산’이 된다. 기슭에는 독수리 마을이란 이름의 오붓한 마을이 있다. 독수리 머리 모양의 산봉우리가 어귀를 지키고 서있다고 해서 붙였다고 한다. 마을 중심을 지나는 큰길 한가운데 이 고장이 석류의 고향임을 알리는 커다란 석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긴 타원형 잎사귀를 가진 2~3m 높이의 석류나무는 무성한 가지마다 노르끄레한 석류가 덜 익은 채로 몇 개씩 달려있었다.

한 시간 동안 새콤달콤한 맛을 풍기는 석류들의 숲속을 거닐었다. 오랜 경작사를 자랑하는 석류는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 그려졌으며 성서에도 여러 번 나오는 과일이다. 페르시아에서는 ‘생명의 과일’, ‘지혜의 과일’로 알려져 왔다. 건강과 병 치료에 유효한 여러 성분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와 양귀비가 즐겨 먹었다고 한다. 최근 이란 지역 중년여성들이 갱년기 장애를 거의 겪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석류는 ‘갱년기 여성에게 제2의 생명을 준다’는 평판 속에 더욱 주목되고 있다. 게다가 씨를 담뿍 품은 석류는 다산을 상징한다 해서 예로부터 여성 복식 무늬로 인기가 높았다. 씨는 식용뿐 아니라 설사, 이질, 복통 등을 다스리는 수렴제로, 껍질은 염료나 구충제, 마른나무는 목재로, 버릴 것 없이 쓰인다.

이 때문에 석류는 급속히 각지로 퍼졌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3세기 한무제 사신으로 대하(박트리아,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갔던 장건이 현지의 페르시아산 석류를 가져와 보급시켰다. 한반도에는 8세기께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 복식 유물에서도 석류무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석류는 우리와 이란과의 유대를 맺어준 고마운 매개체다. 석류를 매만지는 순간 문득 시공을 초월한 두 지역의 교류상이 떠올랐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나온 몇몇 사산계 유물이 교류상을 실증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1959년 경북 칠곡군 송림사 5층 전탑 내부의 금동제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사리병(높이 7㎝) 넣은 유리그릇을 들 수 있다. 7세기 초로 추정되는 이 쪽빛 유리그릇에 사산계 무늬의 특징인 환문(고리무늬)이 확인됐다. 주로 5~6세기 고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리기구들이 후기 로마·유리계에 속한 것이라면, 7세기 유리제품은 사산계에 속한 것이 많다. 동서문명교류의 흐름 속에서 고신라와 통일신라 문화가 보여준 상이성과 그 변모를 상징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국립경주박물관에는 황룡사 목탑터 사리구멍에서 나온 은제그릇 ‘화수대금문금구(花樹對禽文金具:꽃나무를 사이에 두고 짐승이 마주보는 무늬의 꾸미개)’와 경주 일대에서 나온 ‘입수쌍조문석조유물(立樹雙鳥文石造遺物, 나무를 사이에 두고 두 마리 새가 마주한 석조유물)’이 소장되어 있는데, 연구 결과 두 유물은 모두 사산계 특유의 무늬를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나무를 사이에 두고 새가 마주보는 이른바 대칭무늬와 바깥에 원주대를 만들고 안에 진주를 촘촘히 박아 넣는 연주문(聯珠紋)이 그것이다.

송림사 사리함 속 유리그릇은 사산조 페르시아로부터 전래되고, 황룡사 사리함 속 은제꾸미개와 석조유물은 사산계 조각기법을 받아들인 창작품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에서 온 석류와 유리 제품, 무늬 유입은 당시 한반도~페르시아 교류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역사의 파노라마를 그리며 현장을 누비는 답사 길은 자못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때는 2005년 8월 8일(월요일) 오후 5시부터 6시 사이. 시르 쿠흐산 너머 뉘엿거리는 여름해를 등지고 40㎞를 더 달려 조로아스터교 성지인 야즈드에 이르렀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 시라즈 동북쪽에 기원전 6세기 세워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첫 도읍인 파사르가데 왕궁 터. 돌기둥 잔해들만 남았다.

 


아랍~중국~한반도~일본까지 문명 소통자 구실

» 경북 칠곡 송림사 5층 전탑 내부에서 발견된 금동제 사리함 안에 있던 이란풍 유리그릇으로, 고리무늬가 사산조의 전형적 특징이다.

사산조 이란문화의 자취
이른바 ‘호풍(胡風)’으로 불렸던 사산조 이란(224~651)의 문화가 실크로드 교류사에 남긴 자취는 넓고도 깊다.

연주문 장식, 색조 회화, 동물 조각 등의 시각예술과 먹거리, 음주 가무 등의 생활 풍속에까지 6~7세기 동아시아 문명권의 첨단 유행은 상당부분 사산조의 산물이다. 또 아랍 제국은 사산조의 문화를 태반으로 성장했으며 중국에 전해진 사산조의 회화, 조각, 장식은 동아시아 예술의 유력한 전범이 되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을 휩쓴 서역의 노래와 춤, 음주 풍속 또한 사산조 이란인들이 들여온 것이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라는 일본 나라의 쇼소인(정창원)에 소장된 7~8세기께의 칠호병, 녹유리병, 비파 등의 이란계 유물은 극동 섬나라까지 이란 문물이 밀려들었음을 보여준다.

파미르고원과 사막 너머 수만리 서쪽에 있는 이역 문화가 이렇듯 동아시아에서 대유행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271년 파르티아를 몰아낸 사산조 이란은 내내 중국 왕조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사산조는 일찍이 5~6세기 북위와 수차례 사신을 주고 받았으며 바닷길로 중국 상선단이 유프라테스강까지 내왕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런 밀접한 교류관계는 당시 실크로드 교역의 주인공이던 이란계 상업민족 소그드인의 활약과 이란계 유목민들이 세운 서역 도시국가들이 교역을 중개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실크로드 물류의 소통을 위해서는 그들과 한 뿌리였던 사산조와의 우호 관계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 때문에 7세기 중엽 사산조가 아랍군에게 멸망당했을 때 다수의 왕족과 장인들이 신장성과 중국의 장안 등으로 망명하면서 이란 문화는 더욱 동쪽으로 퍼지게 된다. 쿠처와 장안 곳곳에 이란인 정착촌이 생겨났고, 그들의 의식주 풍습과 특유의 음악, 춤, 장식 문양 등은 후대까지 막대한 자장을 형성했다.

간다라에서 발흥한 불교 예술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진하는 과정에서도 화려하고 세련된 사산조 장식과 회화 미술의 세례를 받았다. 키질 석굴의 마름모꼴 문양과 청신한 회화적 색채는 그 단적인 사례다. 고대 페르시아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파르티아의 헬레니즘 전파에 뒤이어 사산조 이란문화의 동전으로 다시 한번 문명교류의 대명을 수행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