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혀’로 영혼 달랜 ‘페르시아 이태백’
» 이란 최고의 시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하피즈의 영묘. 공원처럼 개방돼 있어 밤에도 참배객들이 몰린다. |
이란의 옛 시성 하피즈가 자신의 시에 내린 자평이다. 그의 시야말로 당대 언어의 고갱이를 알알이 주워담고 샛별처럼 어둠을 비춰준다는 뜻이리라. 자화자찬 같지만, 시성다운 호기이자 자신감의 표현 같기도 하다. 이제 그의 호기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이란 사람들이 시라즈에서 우선 찾는 곳은 왕릉, 사원, 박물관이 아니라 위대한 두 시인의 영묘다. 현인을 추념하는 참배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인의 묘, 시비 앞에서 시인의 영혼을 불러내어 대화하면서 삶의 길을 찾고 축복을 기원한다. 그 두 시인은 바로 이곳 출신의 사디와 하피즈다. 특히 하피즈는 뭇별 같은 이란 시인들 가운데 최고로 추앙받는다. 집집마다 경전과 하피즈 시집만큼은 으레 갖췄다고 할 정도로 성인에 버금가는 시인이다.
호슈크강 북안에 자리잡은 서정시인 사디(1207께~1291, 본명 무슬리프 븐 압둘라)의 영묘부터 찾았다. 돔형 입구를 지나 대리석관이 놓인 묘실에 들어섰다. 벽은 모자이크 타일 장식이 화려하다. 장미 무늬를 두른 쪽빛 타일 판에 9행시 ‘과수원’(부스탄, 1257)을 비롯한 몇몇 시편이 오롯이 새겨졌다. 사디는 30년 동안 방랑한 수피즘 탁발 시인이다. 만년 ‘과수원’ 등의 운율시와 산문·운문을 섞은 〈장미정원〉(굴리스탄, 1258) 등의 명작을 남겼다.
여기서 차로 15분 거리에 시성 하피즈(1324께~1389, 본명은 샴숫 딘)의 영묘가 있다. ‘하피즈’는 이슬람에서 ‘경전을 암송한 사람’이란 뜻의 존칭이다. 정문에 들어서니 뜰 한가운데에 여덟 개 원주가 떠받치는 돔형 팔각정이 보인다. 그 바닥에 놓인 대리석관에 참배객들이 너나없이 살포시 손을 대고 쓰다듬곤 한다. 어떤 이는 시인의 시집을 들고 와서 관을 마주한 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기도 했다. 그들의 얼굴에 죽은 자와의 어떤 교감이 서려 있는 듯싶다. 역대 많은 시인들도 이 묘당 곁에 묻히고 싶어했으나 지금까지 10여명만이 그 행운을 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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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는 내 가슴에, 술은 내 손에, 연인은 내 곁에…군주도 노예일뿐”
술과 사랑으로 빚어낸 서정연시로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 구현
집마다 시집·영묘엔 참배 행렬 괴테도 흠모할 만큼 서구에 영향
하피즈는 몽골제국의 일부인 일한국 시대(1258~1353) 말기에 태어나 15세기 초 티무르제국 지배기까지 약 50년 동안의 난세에 시를 썼다. 그의 삶과 활동을 지탱케 한 이념적 바탕은 당대를 풍미한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이다. 수피즘은 신비 체험을 통해 자기를 소멸(파나)함으로써 ‘신과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그 과정은 회개와 참회로 시작해 단념, 포기, 금욕, 절제, 청빈, 신탁, 사랑, 만족 등 연쇄적 상승단계(마깜)를 거쳐 최종적인 ‘신과의 합일’ 단계에 이른다. 수피즘은 13세기 이론적으로 체계화해 활발한 종교사회 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물론 그 중심 무대는 시종 이란이었다.
신학과 문학에 소질이 남달랐던 교사 출신의 하피즈가 시성의 자리를 굳히게 된데는 ‘가잘’이란 서정 연시(연애시) 갈래에 수피즘을 완벽하게 구현한 데서 비롯한다. 그의 시는 한 편이 7~14행인 가잘 569편과 루바이아(4행시) 42편, 카시다(애도시) 몇 편이 전하는데, 전통 운율을 따라 시의 ‘음악성’을 살리면서도 꾸밈없는 표현으로 심오한 사상을 주입해 심금을 울린다. 한 시편 속에서 주제의 일치보다 사상의 연속성을 관철시킨다. 흔히들 ‘신비의 혀’니 ‘언어에 관한 최고의 음악가’니 하는 찬사가 따라붙는다.
그의 가잘은 사랑과 술이 불가분의 모티브다. “하피즈여, 그대 눈에서 눈물의 씨가 철철 뿌려지니, 아마 이 새 같은 연인은 나의 덫 속에 있을지어다”, “그대 사랑의 외침이 간밤에 내 마음을 울리나니, 하피즈 가슴속의 공간은 그 메아리로 가득하다”고 절절한 사랑을 고백한다. 사랑의 꺼짐을 염려해 “오, 불 밝히는 궁정처럼 연인의 애정이 스며 있는 집, 신이여, 시대의 재난으로 그 집 폐허로 만들지 마소서”라고 애절하게 기도한다. 이런 시인의 연모는 인간에 대한 감성적 연모라기보다, 신(알라)에 대한 이성적 연모라는 평가가 더 적절하다. 특히 수피인 시인에게 술은 ‘자기소멸’, ‘신과의 합일’에 이르게 하는 무아지경의 상징이자 영적인 촉발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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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장미는 내 가슴에, 술은 내 손에, 연인도 내 곁에 있으니, 그런 날엔 세상의 군주도 나에겐 한낱 노예일 뿐”, “나의 종단(수피즘)에선 술이 허용되거늘, 장미 같은 몸매 당신 얼굴 없이 술 마시는 건 금기라네”라고 노래한다. “신은 창세기 때부터 술 이외의 선물은 주지 않았고”, “내 존재의 토대는 취하면서 쌓여 갔으며”, “슬픔의 약은 술”이며, 또한 잠시드(페르시아 전설의 왕)처럼 술잔을 통해 세상사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피즈의 가잘에서 술은 차원 높은 은유를 바닥에 깔곤 한다.
시인은 술을 ‘신의 이슬’로, ‘빛’으로, ‘불타는 루비’로, ‘이성의 집’으로 여기면서 취함에서 깨달음을 얻고, 술잔에서 연인의 얼굴을 보며, 취한 눈에서 기쁨을 찾는다.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싸끼(술 따라주는 자)는 신의 뜻을 전달하는 자로 둔갑하며 그와 교감한다. 요컨대, 하피즈에게 술은 저질스런 주색, 주벽 개념이 아니다. 중국의 시선 이태백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사실 이태백의 조상은 페르시아어권 안의 쇄엽(碎葉: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토크막)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600여년 시차를 뒀음에도 두 시인은 경력이나 영적 경지에서 동병상련, 막상막하, 피장파장이다. 그렇게도 닮은꼴일 수 없다. 술 한 말 시 백 편의 주선들이니까.
시성의 큰 그릇에는 심원한 인생관과 세계관도 나타난다. “인생의 역(수피즘의 상승단계)에서 기쁨과 평안은 순간, 낙타 방울은 가마 문을 닫으라 하네, 또 다른 역을 향해”라고 끊임없는 수양을 독려한다. 한편으로는 “이기심 때문에 모든 일 구경에 오명만 남기니”라고 이기심을 꾸짖는다. “하피즈여, 세상의 정원에서 가을바람에 괴로워 마라, 이성적으로 따져 가시 없는 장미가 어디 있더냐”고 고진감래의 인생철학을 설교하기도 한다. “난 가난을 존경하며 재물의 만족을 원치 않나니, 왕께 여쭈어라, 하루 세끼는 신이 주신다고”라며 시인은 청빈을 떳떳해한다. 한편으로는 “무덤 속의 한줌 흙, 고대광실이 하늘을 찌른들 무슨 소용인가”, “정신이 온전하든 취했든, 모든 이는 연인의 추종자, 모든 곳은 사랑의 집, 이슬람 사원이든 유대교회든 신은 어디에나 있다”며 수피즘의 이념, 만민평등과 무차별의 정신을 역설한다.
하피즈의 시는 아랍 세계와 서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독일 문호 괴테는 그를 ‘대적할 자가 없는 시인’이라고 극찬하면서 은유나 상징어 등 시적 소재들을 본받아 서정 연시집 〈서동시집〉(1818)을 펴냈다. 이 시집에는 괴테와 연인 마리아네 사이에 오간 편지가 실렸는데, 그중에는 하피즈 시집 〈디반〉의 장과 페이지, 시행의 숫자를 언급한 암호편지도 들어 있어 그 감응력을 짐작하게 한다. 철학자 니체도 ‘하피즈에게’란 송시를 썼다. 그의 시집은 300여년 전 서구에서 처음 번역한 이래 지금까지 수십 종의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유엔도 그의 가잘 50편을 엄선해 책으로 펴낸 바 있다.
묘당에 곁달린 차이하네(찻집)에 들렀다. 참배객들은 삼삼오오 차를 마시고 물담배도 피우며 다리쉼을 한다. 가끔 시낭송모임이나 추념식 등도 열린다고 한다. 한마디로, 역사 속에 사라진 망자의 으쓱한 무덤이 아니라, 지금 산 사람과 대화하고 교유하는 삶의 현장이었다. 위인은 육체적으로 한번 죽을 뿐,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또 한번의 죽음을 당하지는 않는 법이다.
글·사진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3천년 전 조로아스터’에 뿌리둔 이슬람문학 대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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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문학은 이란 문학은 아랍, 인도, 터키 등을 아우르는 이슬람 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이다. 고대 페르시아 문명의 월등한 유산과 실크로드 문화 산물을 이어받은 이란인들은 글짓기에 탁월해 오마르 하이얌, 하피즈, 피르다우시 등의 세계적 시인들을 배출했다. 7세기 아랍인의 정복 뒤 아랍 글자와 어휘들이 이란어에 스며들었지만, 그들은 아랍문학까지 포용하면서 이슬람 문학사의 주류를 형성했다. 튀르크 제국을 비롯해 중근세 이슬람 세계의 궁정 문인들은 이란어 작품을 짓는 것이 필수였다.
이란 문학의 뿌리는 3천여년 전 조로아스터 경전 등의 고대 페르시아 운문, 문헌집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뒤이어 4~5세기 사산조 이란에서 창조된 여러 기록물들은 이슬람문화가 태동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저 유명한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는 바로 사산조 문학이 낳은 산물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시를 바탕으로 한 이란 문학사의 본류는 9세기 중앙아시아 부하라에서 일어난 사만왕조 때를 기점으로 본다. 수피즘 교단의 신비적 영향을 받은 이 왕조 치하의 이란 동부에서는 10세기 루다키와 아브 슈크르 등의 서정시 선구자들이 나왔다. 11세기엔 지금도 애송되는 4행 시집 〈루바이야트〉의 지은이 오마르 하이얌이, 13세기엔 신비시의 대가 루미가 나타났다.
몽골 침입으로 이란 북동부가 쑥대밭이 되자 13세기부터 문학의 새 중심으로 떠오른 곳이 남부 시라즈다. 사랑의 시 ‘가잘’과 2행 대구체의 낭만시 ‘마스나위’는 시라즈 출신 사디와 하피즈를 통해 여문 이란의 독창적 장르다. 하지만 시라즈에서 꽃피운 이란문학의 본거지는 16~17세기 동쪽의 인도로 옮겨간다. 궁정에서 터키어를 주로 썼던 사파비 왕조가 종교시 외의 문학 후원을 외면하자 우르피, 칼림, 사이브 등 많은 이란 시인들이 조국을 등진 채 인도 무굴제국의 궁정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세기까지 가잘, 마스나위 같은 이란 특유의 장르는 오히려 인도에서 애송되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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