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성인이라 부르게 된 서막(徐邈)의 고사
술은 유양(有釀), 견랑(牽郞), 유하(流霞), 황교(黃嬌), 감파(甘波), 천유(天乳), 방의(芳蟻)․향나(香糯), 초우화(椒雨花), 함향왕(含香王), 삼유(三酉), 옥우(玉友), 홍우(紅友), 광약(狂藥), 국생(麯生), 국수재(麯秀才), 배중물(杯中物), 황탕(黃湯), 복수(福水), 순료(醇醪), 서(醑), 옥액(玉液), 경장(瓊漿) 등 별칭이 많이 있다.
이러한 명칭은 대부분 술의 효능에 초점을 맞추어 만들어졌는데, 이외에도 ‘성인(聖人)’, ‘청주종사(靑州從事)’와 ‘평원독우(平原督郵)’ 등의 별칭이 있다.
이중 ‘성인’이란 별칭은 바로 조조(曹操)의 수하에 있던 서막(徐邈)이란 인물과 관련이 있고, 또한 조조의 금주령과도 관련이 있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주(周)나라에 <주고(酒誥)>가 있은 이래, 한(漢), 후조(後趙), 북위(北魏), 원(元), 명(明), 청(淸) 시기에 금주령이 있었다. 원대가 유독 금주령이 심했지만, 대부분의 왕조에서는 정치적인 상황과 흉작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시행한 경우를 제외하면 금주령을 반포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이는 곧 술이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조조는 중원을 제패하려는 포부를 지녔기에 군량미를 절약하려는 의도로 금주령을 내린다. 그런데 서막이 금주령을 어기게 되면서 ‘성인(聖人)’이 곧 술의 별칭으로 사용된 아름다운 고사가 전한다.
조조가 원소(袁紹)를 격파하고, 북쪽으로 오환(烏桓: 漢代 동쪽 오랑캐의 하나)을 정복하고, 하삭(河朔·황하 북쪽의 땅)을 평정한 이후, 서막의 명성을 듣고 승상군모연(丞相軍謀掾)으로 불렀고, 얼마 뒤엔 외지로 ‘임시태수(試守)’의 자격으로 봉고(奉高)현령이 되었다.
얼마간의 경험을 쌓은 뒤 승상부로 돌아와 동조의령사(東曹議令事)가 되었다. 건안(建安)18년(213년)에 조조는 위공(魏公)이 된 뒤에 서막을 상서령(尙書令)에 임명하였다.
조조가 금주령을 반포하였지만 서막은 금령에 상관하지 않고 아무도 몰래 술을 마시곤 대취하였다. 교사(校事) 조달(趙達)이 상서령(尙書令)으로 조사를 나왔는데, 서막은 술에 취해 ‘성인에 빠졌소(中聖人)’라고 대답했다. 조달이 이 일을 조조에게 보고했고, 조조는 조달의 보고를 듣고 매우 화가 났다.
이때 도료(度遼)장군 선우보(鮮于輔)가 앞으로 나와서, “평소 술에 욕심을 내는 술꾼들이 항상 청주(淸酒)를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이라고 은밀히 말합니다. 제가 볼 때 서막은 본성이 평소 근면하여 제법 세속에 물들지 않고 결백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오늘 술에 취한 행동과 말은 우발적인 사건일 것입니다.”라고 변호했다.
서막은 이로써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후 농서(隴西)태수와 남안(南安)태수가 되었다.
이후 조비(曹丕)가 위 문제(文帝)가 된 뒤에 서막은 초국상(譙國相), 음평(陰平)과 안평(安平)태수와 영천전농중랑장(潁川典農中郞將)을 역임했는데, 뛰어난 치적으로 명성이 알려져서 관내후(關內侯)란 작위에 봉해졌다.
한번은 조비가 수레를 타고 순행하면서 허창(許昌)으로 왔다가 서막에게 “최근엔 성인에 빠지지 않소?”라고 물었다. 서막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전에 자반(子反)은 곡양(谷陽)에서 죽었고, 어숙(御叔)은 술을 마셔서 처벌을 받았습니다. 저는 저들처럼 술을 좋아하지만 자제할 수가 없어서 항상 성인에 빠집니다. 그런데 몸에 큰 혹을 가진 사람은 추한 것으로 이름이 전하지만, 저는 술에 취한 것 때문에 폐하께서 알게 되었습니다.”
조비가 이 말을 듣고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헛된 명성이 아니군!”이라고 하고, 즉시 서막을 승진시키라고 명령하여 무군대장군막부군사(撫軍大將軍幕府軍師)가 되었다.
이 ‘성인에 빠졌다(中聖人)’란 말은 이후 당(唐)의 이백에 의해 빛을 발하게 된다. 이백은 그의 시 <달빛 아래에서 홀로 술을 마시다(月下獨酌)>에서, “…내가 들으니 濁酒는 聖人에 견주고, 또한 淸酒는 賢人에 견준다고 말하는데, 賢聖과 같은 술을 이미 내가 마셨으니, 구태여 神仙을 추구할 필요가 있으랴!…(…己聞淸比聖, 復道濁比賢. 賢聖旣已飮, 何必求神仙.…)”하였고, 또한 <맹호연에게(贈孟浩然)>에서 “…달에 취하여 자주 술에 빠졌고, 꽃에 빠져서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네.…(…醉月頻中聖, 迷花不事君.…)”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聖人’은 더욱 문인의 시구에서 술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쓰이게 되었다.
사실 한(漢)나라 시기는 지금의 증류주와 같은 양조기술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성인을 의미하는 ‘청주(淸酒)’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청주나 소주와 같이 알콜도수가 높은 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막걸리와 같은 종류로서 곡류가 가라앉은 맑은 술을 의미하고 탁주는 바로 일반적인 탁한 술로 진한 차(茶)빛깔을 낸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금주령에 반박하는 당시 지식인의 주장이 논리적이고 이채롭다. 조조가 하(夏)와 상(商)나라가 모두 술로 인해 망했기에 ‘마땅히 왕조를 망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금주를 엄격히 시행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공융(孔融)은 이렇게 반박한다.
“서언왕(徐偃王)은 인의를 행하여 망했는데, 지금은 명령을 내려 인의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연나라 쾌(噲)는 사직을 양보하여 잃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명령을 내려 겸양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노(魯)나라는 유가로 인해 손상을 당했지만 지금은 명령을 내려 문학을 포기하도록 하지 않고, 하·상은 부인으로 인해 천하를 잃었지만 지금은 명령을 내려 결혼을 끊지 않습니다. 그런데 술을 오직 급한 일로 여기는 것은 아마도 곡식을 아끼는 것일 뿐이지 왕조를 망하는 것으로 경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금주령을 제정하려는 재상의 주장에 대해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전개한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나아가 공융의 “하·상은 부인으로 인해 천하를 잃었지만 지금은 명령을 내려 결혼을 끊지 않습니다”라는 표현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 간옹(簡雍)의 고사를 소개한다.
촉(蜀)의 유비도 정권을 수립한 뒤에 힘을 다해 나라를 다스려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 일찍이 금주령을 내렸다. 그는 민간이 사사로이 술을 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사사로이 술을 저장하는 옹기를 일률적으로 몰수하고, 사사로이 저장한 자는 형벌에 처하도록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유비의 수하에 간옹(簡雍)이라는 종사(從事: 관직명)가 있었는데, 유비의 처사에 반대하면서도 직접 간하지는 않았다.
어느날 간옹은 유비와 함께 외출했다가 길 위에서 남녀 두 사람이 함께 가는 것을 보고서, 간옹이 유비에게 “저 두 사람은 간통하려 할 것인데, 당신은 왜 저들을 잡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유비가 알아듣지 못하고 “자네는 저들이 그러한 일을 하려는 것을 어찌 아시오?”라고 물으니, 간옹이 “그들 몸에는 모두 생식기를 가지고 있는데, 생식기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간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니, 이것은 집안에 저장해놓은 술을 담는 그릇은 반드시 술을 담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유비가 이 말을 듣고 껄껄 크게 웃고서 사사로이 술을 담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해지했다.
참으로 교묘한 설법이다. 서로 다치지 않고서 상대를 설득시키는 것이 최고의 화술이 아니겠는가? 공융은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지만(물론 이것이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은 아님) 간옹은 죽임을 면했으니, 상대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하여튼 술 생각이 나는 이 계절, 나도 한번 ‘성인에 빠져볼까나!
이중 ‘성인’이란 별칭은 바로 조조(曹操)의 수하에 있던 서막(徐邈)이란 인물과 관련이 있고, 또한 조조의 금주령과도 관련이 있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주(周)나라에 <주고(酒誥)>가 있은 이래, 한(漢), 후조(後趙), 북위(北魏), 원(元), 명(明), 청(淸) 시기에 금주령이 있었다. 원대가 유독 금주령이 심했지만, 대부분의 왕조에서는 정치적인 상황과 흉작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시행한 경우를 제외하면 금주령을 반포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이는 곧 술이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조조는 중원을 제패하려는 포부를 지녔기에 군량미를 절약하려는 의도로 금주령을 내린다. 그런데 서막이 금주령을 어기게 되면서 ‘성인(聖人)’이 곧 술의 별칭으로 사용된 아름다운 고사가 전한다.
조조가 원소(袁紹)를 격파하고, 북쪽으로 오환(烏桓: 漢代 동쪽 오랑캐의 하나)을 정복하고, 하삭(河朔·황하 북쪽의 땅)을 평정한 이후, 서막의 명성을 듣고 승상군모연(丞相軍謀掾)으로 불렀고, 얼마 뒤엔 외지로 ‘임시태수(試守)’의 자격으로 봉고(奉高)현령이 되었다.
얼마간의 경험을 쌓은 뒤 승상부로 돌아와 동조의령사(東曹議令事)가 되었다. 건안(建安)18년(213년)에 조조는 위공(魏公)이 된 뒤에 서막을 상서령(尙書令)에 임명하였다.
조조가 금주령을 반포하였지만 서막은 금령에 상관하지 않고 아무도 몰래 술을 마시곤 대취하였다. 교사(校事) 조달(趙達)이 상서령(尙書令)으로 조사를 나왔는데, 서막은 술에 취해 ‘성인에 빠졌소(中聖人)’라고 대답했다. 조달이 이 일을 조조에게 보고했고, 조조는 조달의 보고를 듣고 매우 화가 났다.
이때 도료(度遼)장군 선우보(鮮于輔)가 앞으로 나와서, “평소 술에 욕심을 내는 술꾼들이 항상 청주(淸酒)를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이라고 은밀히 말합니다. 제가 볼 때 서막은 본성이 평소 근면하여 제법 세속에 물들지 않고 결백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오늘 술에 취한 행동과 말은 우발적인 사건일 것입니다.”라고 변호했다.
서막은 이로써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후 농서(隴西)태수와 남안(南安)태수가 되었다.
이후 조비(曹丕)가 위 문제(文帝)가 된 뒤에 서막은 초국상(譙國相), 음평(陰平)과 안평(安平)태수와 영천전농중랑장(潁川典農中郞將)을 역임했는데, 뛰어난 치적으로 명성이 알려져서 관내후(關內侯)란 작위에 봉해졌다.
한번은 조비가 수레를 타고 순행하면서 허창(許昌)으로 왔다가 서막에게 “최근엔 성인에 빠지지 않소?”라고 물었다. 서막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전에 자반(子反)은 곡양(谷陽)에서 죽었고, 어숙(御叔)은 술을 마셔서 처벌을 받았습니다. 저는 저들처럼 술을 좋아하지만 자제할 수가 없어서 항상 성인에 빠집니다. 그런데 몸에 큰 혹을 가진 사람은 추한 것으로 이름이 전하지만, 저는 술에 취한 것 때문에 폐하께서 알게 되었습니다.”
조비가 이 말을 듣고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헛된 명성이 아니군!”이라고 하고, 즉시 서막을 승진시키라고 명령하여 무군대장군막부군사(撫軍大將軍幕府軍師)가 되었다.
이 ‘성인에 빠졌다(中聖人)’란 말은 이후 당(唐)의 이백에 의해 빛을 발하게 된다. 이백은 그의 시 <달빛 아래에서 홀로 술을 마시다(月下獨酌)>에서, “…내가 들으니 濁酒는 聖人에 견주고, 또한 淸酒는 賢人에 견준다고 말하는데, 賢聖과 같은 술을 이미 내가 마셨으니, 구태여 神仙을 추구할 필요가 있으랴!…(…己聞淸比聖, 復道濁比賢. 賢聖旣已飮, 何必求神仙.…)”하였고, 또한 <맹호연에게(贈孟浩然)>에서 “…달에 취하여 자주 술에 빠졌고, 꽃에 빠져서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네.…(…醉月頻中聖, 迷花不事君.…)”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聖人’은 더욱 문인의 시구에서 술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쓰이게 되었다.
사실 한(漢)나라 시기는 지금의 증류주와 같은 양조기술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성인을 의미하는 ‘청주(淸酒)’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청주나 소주와 같이 알콜도수가 높은 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막걸리와 같은 종류로서 곡류가 가라앉은 맑은 술을 의미하고 탁주는 바로 일반적인 탁한 술로 진한 차(茶)빛깔을 낸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금주령에 반박하는 당시 지식인의 주장이 논리적이고 이채롭다. 조조가 하(夏)와 상(商)나라가 모두 술로 인해 망했기에 ‘마땅히 왕조를 망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금주를 엄격히 시행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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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공융(孔融)은 이렇게 반박한다.
“서언왕(徐偃王)은 인의를 행하여 망했는데, 지금은 명령을 내려 인의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연나라 쾌(噲)는 사직을 양보하여 잃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명령을 내려 겸양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노(魯)나라는 유가로 인해 손상을 당했지만 지금은 명령을 내려 문학을 포기하도록 하지 않고, 하·상은 부인으로 인해 천하를 잃었지만 지금은 명령을 내려 결혼을 끊지 않습니다. 그런데 술을 오직 급한 일로 여기는 것은 아마도 곡식을 아끼는 것일 뿐이지 왕조를 망하는 것으로 경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금주령을 제정하려는 재상의 주장에 대해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전개한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나아가 공융의 “하·상은 부인으로 인해 천하를 잃었지만 지금은 명령을 내려 결혼을 끊지 않습니다”라는 표현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 간옹(簡雍)의 고사를 소개한다.
촉(蜀)의 유비도 정권을 수립한 뒤에 힘을 다해 나라를 다스려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 일찍이 금주령을 내렸다. 그는 민간이 사사로이 술을 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사사로이 술을 저장하는 옹기를 일률적으로 몰수하고, 사사로이 저장한 자는 형벌에 처하도록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유비의 수하에 간옹(簡雍)이라는 종사(從事: 관직명)가 있었는데, 유비의 처사에 반대하면서도 직접 간하지는 않았다.
어느날 간옹은 유비와 함께 외출했다가 길 위에서 남녀 두 사람이 함께 가는 것을 보고서, 간옹이 유비에게 “저 두 사람은 간통하려 할 것인데, 당신은 왜 저들을 잡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유비가 알아듣지 못하고 “자네는 저들이 그러한 일을 하려는 것을 어찌 아시오?”라고 물으니, 간옹이 “그들 몸에는 모두 생식기를 가지고 있는데, 생식기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간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니, 이것은 집안에 저장해놓은 술을 담는 그릇은 반드시 술을 담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유비가 이 말을 듣고 껄껄 크게 웃고서 사사로이 술을 담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해지했다.
참으로 교묘한 설법이다. 서로 다치지 않고서 상대를 설득시키는 것이 최고의 화술이 아니겠는가? 공융은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지만(물론 이것이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은 아님) 간옹은 죽임을 면했으니, 상대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하여튼 술 생각이 나는 이 계절, 나도 한번 ‘성인에 빠져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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