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24

醉月 2010. 5. 24. 08:39

치마주름 외벽의 카라 왕궁, 건축가 지혜가…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24> 불교 전파의 서쪽 끝, 메르브

투르크메니스탄 마리에서 동쪽으로 30㎞ 떨어진 메르브 유적지 안에 있는 키즈 카라 왕궁 모습. 6세기께 흙으로 건축한 궁전으로 높이 15미터의 벽을 수직으로 주름 잡듯 쌓아 만들었다. 함께 한 현지 관광안내인은 자신의 선조들이 재료를 절약하고, 태양의 복사열을 막으려고 고안한 건축물이라고 칭찬을 거듭했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도 부하라를 떠나 서남 방향으로 1시간 반쯤 달리니 투르크메니스탄 접경이다. 여기까지는 자라프샨 강이 한복판을 흐르는 오아시스 농경지대여서 면화와 옥수수 밭이 눈길이 모자라게 펼쳐진다. 갖가지 과일이며 채소들이 푸르싱싱하게 무르익고 있다. 저 멀리 시리아부터 중국 장안까지 사막을 가로지르는 오아시스 육로 연변에서는 이 구간이 가장 기름진 곳 같다. 그러나 국경 지대에 다가가니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서슬 퍼런 철조망이 두 갈래로 남북 어디론가 아득히 뻗어간다. 5리는 족히 될 그 사이 완충지역에는 잡초만이 엉켜 있다.

 

태양 복사열 막으려 주름잡듯 쌓은 벽 이색적
세계문화유산 메르브, 110m 높이 성벽 오르니 도시 전체가 한눈에
유물 보려 박물관 들르니, 눈에 익은 맷돌 물레가 반겨

 

삼엄한 두 나라 국경지대를 통과하는 데 네 시간이나 걸렸다. 투르크메니스탄 국경초소에서는 일행 중 한 명만 수속이 남았는데도, 점심시간이라고 창구를 덜컥 닫는 바람에 또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 입국 수속을 마치곤 늦춰진 갈 길을 재촉했다. 40분 달리니 아무다리야 강이 나타났다.

아무다리야는 역사의 풍상 속에서 물굽이만큼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강의 물길이 바뀐 내력은 지금도 수수께끼다. 1221년 몽골군이 하류의 우르켄치를 공략할 때 둑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물길이 서쪽 카스피해로 바뀌었다가 16세기 다시 아랄해로 되돌려졌다는 설이 전해온다. 사막 속 우즈보이에 기다란 하상(河床)의 흔적이 남은 점으로 미루어 물길이 바뀐 것은 사실인 것 같다.

15분쯤 달려서 투르크멘아바드(옛 아무르)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마리에 도착한 것은 밤 9시께다. 인구 8만의 마리는 200년 역사를 지닌, 아담한 공업도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30㎞ 떨어져서 그 유명한 메르브 유적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메르브는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잇는 중계지점에 자리잡아 2500여년간 번영해왔다. 11~12세기 터키계 셀주크 시대에는 수도로서 ‘고귀한 메르브’란 존칭까지 받을 정도로 이슬람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그러나 1220년과 21년 몽골군의 무자비한 유린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몽골군은 성문을 열면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6일 동안 22만명을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마리 박물관에서 본 봉수병, 물레, 맷돌(왼쪽부터). 박물관 안내인이 물레질을 직접 보여 주기도 했다(가운데 사진). 이곳은 사막 가운데 자리잡은 곳이지만, 농경문화를 위주로 사는 곳이라 우리 것과 닮은 유물들이 많이 발견돼 왠지 도시 곳곳과 사람들이 낯설지만은 않은 느낌이 든다.



메르브는 ‘떠도는 도시’란 별칭도 갖고 있다. 역대 도시가 한 곳에 층층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조대마다 인근에 새 터를 잡고 도성을 형성하곤 했다. 그래서 다양한 시대의 성터가 성벽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성벽 전체의 길이는 무려 230㎞에 달한다. 그 드넓은 부지에 고대부터 중세까지 5개의 조대가 번갈아 자리잡았다.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6~4세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조 때의 도넛형 성벽이 남은 에르크 카라다. 당시 메르브는 ‘마르키아나’로 불렀다. 원래 이 성벽은 높이가 110m나 되는, 가장 높고 웅장한 성벽으로서 지금도 위에 올라서면 메르브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에 있는 게오르 카라 성벽은 기원전 알렉산더 제국이 분열된 뒤 생겨난 세레우코스 시대의 유적이다. 기원후 사산조 시대(3~7세기)까지 근 천년 동안 지탱해 온 고성이다.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주목되는 것은 여러 점의 불교 관련 유물이다. 1961년 두 차례 발굴 끝에 불두와 사리탑, 카로슈티어(서북 인도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쓰인 고대문자)로 씌어진 불경을 넣은 항아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듣는 순간,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사실 이곳을 굳이 찾아온 데는 메르브가 유명한 고도라는 매력도 있었지만, 일찍부터 불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현지에서 확인하게 되면 이곳이야말로 불교 전파의 서단이 될 것이라는 학문적 기대에 부풀어 왔기 때문이다. 당장 현지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유적 답사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어서 어길 수는 없었다.

이 시대를 이은 고성 유적으로는 이슬람 초기의 대·소 키즈 카라가 있다. 대 키즈 카라는 왕궁인데, 구조상 두 가지 특징이 선명하다. 하나는 둥근 천장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 주름벽이다. 벽을 수직으로 주름 잡듯 쌓은 것이 퍽 이색적인데, 재료를 절약하고 태양의 복사열을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고도의 건축적 지혜라 아니할 수 없다. 이어 들른 곳은 메르브 고성의 심장부인 술탄 카라다. 가장 번영했던 중세 셀주크 시대의 수도가 남긴 어마어마한 유적들이 눈길을 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성기를 구가한 술탄 산자르(1118~1157)의 묘당이다. 산자르 시대는 강역이 아제르바이잔까지 아우르고, 수만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만도 8개나 있었으며, 당대 최고 수준의 천문대도 있었다. 성왕으로 추앙된 산자르였지만 그 또한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전설에는 그가 천국에 가서 절색의 처녀를 만났는데, 매혹된 그에게 만지지 말것,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지 말 것, 노크 없이 방에 들어오지 말 것 등 세 가지 계율을 주문했으나, 그는 그 어느 것도 지키지 못해,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묘당의 지하에 누워 있다고 한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역사박물관에서 본 불상. 둘러볼 곳이 더 있지만, 서둘러 게오르 카라 유지 서남쪽의 불두 발굴지로 향했다. 세월의 풍진 속에 가라앉은 나지막한 흙담 기슭의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현장에 도착했다. 펑퍼짐한 지면에 높이 10m 가량의 사다리꼴 흙더미가 나타난다. 원래 절터였는데, 유물을 꺼내고 도로 묻었다고 한다. 한달음으로 흙더미 꼭대기에 올라가 여기가 바로 불교 전파의 서단이라는 마음의 푯말을 박아놓았다. 오후 마리 박물관에 들러 출토된 유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박물관에서는 불두말고도 몇 가지 흥미있는 유물을 발견했다. 2층 직물관에 전시된 물레와 3천여년 전 맷돌은 우리 것과 너무나 닮았다. 사막 속 오아시스지만 농경을 위주로 한 고장이라서 우리 농경문화와는 엇비슷하다. 이것이 바로 문명의 보편성이다. 봉수병(鳳首甁: 새머리 모양의 물병)은 우리네 경주 98호 남분에서 출토된 4세기 후반의 봉수병과 조형기법, 크기가 신통하게도 같다. 다만 색깔에서 전자는 연한 갈색이고 후자는 연한 푸른색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 유리물병은 전형적인 후기 로마 유리병에 속한다. 중국, 일본에서는 유사품이 발견되지 않아 어떻게 신라까지 전래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학계의 의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유사품을 발견해 전파의 중간고리를 찾아냈다. 앞으로 전파 통로를 추적할 단서를 잡은 셈이어서 일행을 흐뭇하게 했다.

볼거리 많은 메르브에서의 하루는 역사의 ‘시간여행’치고는 턱없이 짧다. 그러나 그 짧음에 비해서 얻은 것이 적지 않다는 데 위안을 받으며 다음 목적지인 수도 아슈하바트로 향했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불교가 서방포교 실패한 까닭은

유일신 종교관과 배치
정서적 장벽 극복못해

인도에서 발흥한 불교의 동쪽 끝 전파지가 한반도와 일본이라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그렇다면 옛 실크로드에서 불교가 전파된 서쪽 끝은 어디일까. 당장 명확한 근거를 찾기 어렵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까지도 불법이 전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3세기 독실한 불자였던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이 이집트, 그리스, 북아프리카, 시리아 등에 포교단을 보낸 사실이 역사서에 전하며, 앞서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경략 뒤 인도 북부 간다라 지방의 시르캅 등에 그리스인들이 출입한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2세기 후한 시대에 20여년간 인도 불경 번역에 몰두한 고승 안세고가 안식국(페르시아) 왕자 출신이었다는 기록이 고승전 관련 문헌에 보여 나름대로 서방 지역 포교가 진척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포교의 성과를 명확히 입증하는 유적은 현재 그다지 많지 않으며 조사도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 메르브의 게오르 카라 유지 정도가 그나마 가장 뚜렷한 고고학적 근거를 지닌 불교 전파의 서쪽 끝 거점으로 인정되고 있다. 사실 중앙아시아 불교 유적 가운데서는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을 필두로 우즈베키스탄 남부의 테르메즈,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의 여러 석굴, 사원들이 더 유명하다. 불교 전파 경로에서 서쪽이 아니라, 초원길에 인접한 불교 전파의 최북단에 해당하는 곳인데, 아프간 바미안에서 본격화한 간다라 양식의 석굴사원, 일반사원, 탑신이 높은 스투파 등의 걸작들이 남아 있다. 테르메즈의 카라테페, 파야즈 테페 등과 키르기스스탄의 아크베심 유적은 잘 알려져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 분쟁지역에 자리잡아 답사는 쉽지 않은 편이지만, 이들 유적의 존재로 미뤄 이슬람 발흥 전까지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불교가 나름대로 기반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불교가 서방 포교에서 동방의 중국, 한국처럼 성공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학계에서는 본질적으로 진리를 찾는 철학적 종교인 불교가 강력한 유일신 신앙의 발흥지였던 서아시아 사람들의 정서적 장벽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서아시아 쪽은 고대 페르시아 시절부터 이원론적 체계를 지닌 배화교의 강력한 카리스마 아래 놓였으며, 곧 기독교의 유일신 교리가 전파됐을 뿐 아니라, 기원후 7세기부터는 거의 전 지역이 배타적인 이슬람교 일색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절대자를 숭배하는 이들 종교는 한결같이 긴밀한 정치적 군사 체제와 연계되어 세력을 넓혀갔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 정치 세력화보다 대중구원과 진리 탐구에 치중한 인도의 불교는 포교의 틈새를 넓히지 못하고, 발상지에서조차 힌두교에 밀려 축출되는 운명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