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지니처럼… 충성스러운 흑인 노예, 곤륜노(崑崙奴)
-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안되는 일을 곁에서 척척 처리해주는 동물과 사람 또는 기계에 대해 예전부터 환상을 품어왔다. 그런 환상이 문학예술 작품에서는 충실한 하인과 요정으로 표현되었고, 기술로는 로봇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알라딘과 요술램프’에 등장하는 ‘지니’란 캐릭터는 그런 인간의 욕구를 잘 보여준 작품이고 최근에는 ‘아이언맨(Iron Man)’과 같은 영화를 통해 그 환상을 극대화하고 있다. 현실에서도 각국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로봇 개발을 위해 한창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에서도 ‘지니’와 같은 인물 형상이 존재하는데 그가 바로 ‘곤륜노(崑崙奴)’이다.
‘곤륜노’에 얽힌 이야기는 중국 고전 문학에 종종 등장하곤 한다. 당(唐)대 배형의 ‘곤륜노’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고 송대에는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실려 있으며 명대에는 양신어(梁辰魚)가 ‘홍초(紅?)’란 잡극으로, 매정조(梅鼎祚)가 ‘곤륜노’란 잡극으로 이야기를 다루었다. 지금도 경극 예술가들 중 흑인 ‘곤륜노’를 연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唐)대 전기소설 작가 배형作 - 배형(裴金刑·나고 죽은 해를 알 수 없음)은 당대의 유명한 전기소설 작가로서 ‘전기(傳奇)’ 3권을 지었다. 전기소설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초기 소설을 일컫는 말이다. 그중에 ‘곤륜노(崑崙奴)’ ‘배항(裴航)’ ‘섭은낭(?隱娘)’은 후에 널리 알려졌다. ‘곤륜노’는 남녀간의 애정을 다루었지만 일종의 무협소설로 볼 수 있다.
당 대종(代宗·재위 762~779년) 대력(大歷) 연간에 귀족의 자제인 최생(崔生)은 궁중의 경호원직을 맡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고위 관직에 있었고 당시 권력 실세인 일품(一品)과 막역한 사이였다. 일품이 아프다는 말에 최생은 아버지의 명을 받고 병문안을 위해 일품의 집을 찾았다. 일품은 최생의 행동거지가 맘에 들어 시녀들 중 붉은 옷을 입은 시녀에게 최생을 대접하게 하였다. 그러나 부끄럼이 많은 최생은 당황해하며 급히 자리를 뜨려 하였다. 그때 붉은 옷의 시녀(紅?女)가 최생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즉 세 손가락을 펴고 손바닥을 세 번 뒤집은 다음 가슴의 거울을 가리킨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최생은 일품 집에서의 일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시녀가 한 수신호 속에 담긴 뜻을 곰곰이 생각하느라 식음을 전폐하였다. 곤륜 노예 마륵(摩勒)이 그 이유를 물었고 최생은 마륵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마륵은 어려운 일도 아니니 일을 잘 처리해 주겠노라 장담을 하였다. 우선 그는 최생에게 그녀의 손짓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 주었다. 즉 손가락 3개는 일품 댁에 10명의 기녀가 있는데 그녀가 그중 셋째라는 의미이고, 손바닥을 3번 뒤집은 것은 15일 뒤에 보름달이 거울처럼 둥글 때를 가리킨다면서 그날 최생을 만나고 싶다는 뜻임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일품의 집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 있고 맹견을 풀어 지키니 누구도 접근할 수 없지만 마륵 자신만큼은 걱정이 없다며 자신이 사전에 맹견을 처리하겠다고 장담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마륵은 약속시간 전에 일품의 집안에 잠입하여 우선 철퇴로 맹견을 제거하였고 다시 최생을 등에 업고 높은 담장을 단숨에 뛰어넘어 홍초녀의 숙소 앞에 이르렀다. 이제나저제나 초조히 기다리던 홍초녀는 최생의 등장에 기뻐하며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녀는 북방에 사는 한 부자의 딸이었는데 일품이 강제로 기녀로 삼아 이곳에 데려왔으며 겉으로는 호강하고 있지만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으니 종이 되더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밝힌다. 그리고 최생이 어떻게 들어왔을까 궁금해하자 최생은 마륵을 소개하며 그의 활약상을 알려 주었다. 마륵은 날이 밝기 전에 두 사람을 등에 지고 다시 높은 담장을 넘어 일품의 집을 빠져 나왔다. 다음 날 일품은 상황을 파악하였지만 상대가 경비가 삼엄한 집에 들어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점에 비추어 뛰어난 무술을 지닌 협객일 것으로 짐작하고 일을 조용히 덮어둔다.
- 주인 지켜주는 수호천사
2년 뒤 외출한 홍초녀를 알아보고 그녀의 뒤를 살핀 일품은 최생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최생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그간의 일을 고백하였다. 일품은 홍초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지만 마륵 같은 사람을 살려두면 후환이 생길 것이라 여기고 50명의 병사로 최생의 집을 포위해 마륵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마륵은 화살이 빗발치는 중에도 상처 하나 없이 나는 듯 최생의 집을 빠져 나와 순식간에 사라졌다. 10여년 뒤 누군가가 낙양(洛陽)의 시장에서 약을 팔고 있는 마륵을 보았는데 겉모습이 예전과 똑같았다는 말을 전하였다.
작품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곤륜노’는 아마도 중국 최초의 무협소설일 것이다. 마륵은 독특한 외모에 강한 힘과 영리함을 겸비한 협객의 이미지로, 주인의 고충을 해결하는 충성스러운 하인의 캐릭터를 잘 담보하고 있다. 현대 중국의 유명한 무협작가인 김용(金庸)도 ‘곤륜노’가 중국 최초의 무협소설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곤륜노’의 정체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예전에는 중국 서북부에 있는 곤륜산(崑崙山)과 연관 지어 실크로드와 곤륜산맥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온 아프리카 흑인이나 서역인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통념을 깨는 새로운 견해가 속속 제기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가장 많은 연구를 하는 학자는 거청용(葛承雍) 교수이다. 그는 중국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 산하 문물출판사의 부편집자로서 ‘곤륜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많은 고증과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흑인노예인 ‘곤륜노’가 결코 아프리카 흑인이 아니라 동남아시아계의 흑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관한 논문이 최근에 출판된 ‘중화문사논총(中華文史論叢)’에 실렸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지금의 시안 西安)은 당시 세계 최대의 국제도시 중 하나였다. 따라서 각종 피부색을 지닌 여러 인종이 장안의 거리를 누볐다. 당시에는 ‘곤륜의 노예, 신라의 하녀(崑崙奴, 新羅婢)’란 말이 유행하였다. 즉 곤륜의 노예는 검은 피부에 힘이 세고 성품이 온순하여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권문세가에서 앞다투어 사들였다고 한다. 또한 이런 곤륜노 2명을 보디가드로 삼아 거리를 활보하는 삶을 선망하는 풍조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신라의 하녀는 타고난 손재주로 일정한 훈련을 거쳐 귀족들의 집안일을 돌봤다고 한다.
조공으로 들어온 동남아계 흑인
그렇다면 흑인(黑人)이 어떻게 중국 대륙에 오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곤륜노’란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거청용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곤륜노’는 조공 품목으로 장안에 들어왔거나, 동남아 각지의 토착민으로 해적 등에게 잡혀 해안지역이나 내륙으로 팔려왔거나, 동남아의 사절단과 함께 중국에 들어왔다가 정착한 사람들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당대 시인 장적(張籍)의 시 ‘곤륜아(崑崙兒)’의 내용을 보면 ‘해중주(海中州)가 집이고 금귀고리에 곱슬머리, 묶지 않은 장발, 검은 피부, 드러낸 상체’로 묘사하고 있다. 현대의 고증에 따르면 ‘곤륜노’는 베트남 남부 콘손섬에서 온 아시아·말레이계 흑인이라고 한다. 콘손섬은 메콩강이 바다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12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베트남 정부에 의해 죄수를 가두는 감옥으로 쓰이기 때문에 외부에 개방되어 있지 않다. 인도 역사기록에 의하면 콘손섬은 3세기 이래 아시아 최대의 노예시장으로 주로 중국에 노예를 팔았다. 이런 상황은 명대(明代)까지 이어졌다. 즉 해적과 이탈 군인에 의해 동남아 각지에서 원주민들이 노예로 잡혀 와 이곳에서 중국으로 팔려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콘손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주달관(周達觀)이 원의 사신 자격으로 1296년 캄보디아 지역을 방문한 뒤 남긴 중요한 기행문인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보인다. 주달관은 콘손섬의 외형이 마치 곤륜산을 닮았다고 해서 ‘곤륜도(崑崙島)’란 이름을 붙였다. ‘곤륜노’가 동남아시아의 고산족이나 소수민족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여러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왜 ‘곤륜’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에도 임진왜란 당시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가 곤륜노를 데리고 왔던 기록이 남아 있다. 곤륜노에 대해 ‘선조실록’에는 “일명 해귀(海鬼)인데 누런 눈동자와 칠흑 같은 얼굴에 사지와 온몸이 모두 검고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로 검은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라고 묘사하였다. 또한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하고 수일 동안 물속에 있으면서 수족(水族)을 잡아먹을 수 있다”고 묘사했다.
- 싱가포르서도 드라마로 제작
1994년에는 싱가포르에서 20부작 TV 드라마 ‘곤륜노’를 제작 방영하여 색다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대로 약초를 캐며 생활하는 곤륜족들이 조공을 바치기 위해 장안으로 향한다. 그런데 중원의 맹주 무관(無觀)의 꼬임에 빠져 반란군에 가담해 장안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그 과정에서 마륵(摩勒)은 혼자가 되어 무관과 함께 산중에서 생활하게 된다. 마륵은 무술을 익히고 백의녀(白衣女) 장영(張穎)과 친분을 쌓지만 안타깝게 헤어진다. 마륵은 무관으로부터 자신의 생모가 장녕공주(長寧公主)이며, 위구르(回紇)와의 화친을 위해 볼모로 가던 중 안녹산(安綠山)에게 죽을 뻔하였으나 마가(摩枷)의 도움을 받았고, 그 인연으로 자신이 태어났으며, 생모가 사사명(史思明)에게 붙잡혀 죽었음을 알게 된다. 복수를 다짐한 마륵은 산을 내려와 낙양(洛陽)으로 가는 도중에 장영과 홍초(紅?)를 만난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장영과 깊은 사랑을 나눈다. 후에 마륵은 사사명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거짓 투항을 하여 복수의 칼을 간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무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모든 것을 털고 장영과 곤륜족 마을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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