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공자에게 경영을 묻다_05

醉月 2010. 5. 20. 08:46

제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상대에게 베풀지 말라 그리하면 원망이 없을지니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사상 baebs@ysu.ac.kr

 

공자의 제자 중에는 대재벌로 성장한 자공이란 자가 있었다. 공자는 이재에 밝은 장사꾼으로서의 자질을 인정하면서도, 제자가 자칫 말의 신뢰를 잃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경영의 여러 요소 중 공자가 으뜸으로 꼽은 것은 단연 신뢰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이기도 하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이 경영의 ‘진리’에 대해 탐구해본다.

전하기로 공자는 72명의 제자를 두었다고 하였는데(‘맹자’), 그 제자들의 출신과 꿈도 숫자만큼 다양하였다. 가난뱅이로 살다 결국 영양실조로 요절한 수제자 안연이 있는가 하면, ‘조직폭력배’ 출신의 자로가 있었고, 부잣집 도련님인 공서화나 귀족 자제인 남궁괄도 있었다.

공자학교는 스승의 말씀을 받아 적기에 급급한 초등학교가 아니라, 자기 삶의 길을 확정한 성인들이 모인 ‘대학’이었다. 그러므로 공자학교에서 제자들은 다양한 꿈을 꾸었고, 훗날 철학자(안연), 외교관(공서화), 재정 담당관(염유), 국방 책임자(자로) 등으로 입신해나갔다.

그 가운데 자공(子貢·BC 521~450)이라는 제자는 오늘날 우리 눈길을 끌 만한 인물이다. 널리 알려진 사마천의 ‘사기열전’ 속에 ‘화식열전’ 편이 있다. 화식(貨殖)이란 무역·생산·금융을 아우르는 말이니, 화식열전은 춘추전국시대 큰 부자들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그런데 자공이 여기에 등재돼 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대재벌로 성장한 사람이 있었다니 조금은 의외로 여겨질지 모르겠다. 자공과 관련된 부분을 인용한다.

자공은 공자에게서 배움을 얻고 난 다음 위나라에서 벼슬을 살았다. 그 후 조(曹)와 노(魯)나라 사이에서 재물을 크게 모았다. 칠십 제자들 가운데 자공이 가장 부유하였다. 원헌(原憲)이 쌀겨와 지게미를 싫어하지 않고 달동네에 숨어 살았다면 자공은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매어 달고, 돈을 싸들고서 제후들을 방문하였으니 이르는 나라마다 뜰로 내려와서 그와 대등한 예를 차리지 않는 군주가 없었다. (‘사기’, 화식열전)

 

‘대재벌’ 된 공자의 제자

이번 참에는 화식열전에 실린 ‘대상인 자공’의 삶과 생각을 소재 삼아 공자의 경영철학을 살펴보기로 하자.

자공의 성은 단목(端木)이요 어릴 적 이름은 사(賜)다. 어른이 되면서 얻는 이름인 자(字)가 ‘자공’이다. 공자보다 31세 연하의 제자로서 위(衛)나라 출신이다. 상인으로서 그의 이력은 고향 땅 위나라의 환경과 관련지어볼 때 좀 더 선명해진다. ‘위’는 본래 은나라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지금의 허난성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생산이 발달했으며 상품경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은나라(따로 상(商)나라라고도 한다)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선 이후, 유민이 된 위나라 사람들은 주로 물건을 사고팔며 연명했다. 여기서부터 ‘상나라 후예=장사꾼’이라는 등식이 생겨났으며 상인(商人), 상업(商業)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고 보면 상인으로서 뛰어난 수완을 보인 자공이 위나라 사람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가노 나오사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참고)

자공의 고향 위나라는 조선시대 개성 땅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사람들이 조선이 개국한 뒤에 상업에 종사하여 개성상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듯이, 주나라가 건설된 후 은나라 후예인 위나라 출신들도 상인으로 유명했다. 상인· 상업이라는 말이 위나라의 선조인 상나라(곧 은나라)에서 비롯되었을 정도니 그 지역사람들의 상재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법가사상의 원조로 인식되는 춘추시대의 상앙(商)이라는 인물 역시 자공과 동향 출신인 것으로 볼 때, 위나라는 상업과 유통에 필요한 계약과 거래의 법률과 규칙이 체질화된 곳으로 여겨진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자공이었기에 상인으로서의 면모를 풍겼던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논어’에서도 자공은 장사꾼의 체취를 가득 품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예를 들어보자.

자공 : 여기 아름다운 옥구슬이 있습니다. 궤짝에 넣어 숨겨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좋은 값을 구해서 팔아야 할까요?

공자 : 팔아야지, 팔아야 하고말고! 다만 나는 제값을 쳐줄 장사꾼을 기다리고 있지.

   

공자도 자공이 이재에 밝은 장사꾼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공은 전업으로 삼지 않는데도 재화를 잘 기르고, 투기를 하는 데도 잘 맞힌다니까”(‘논어’, 11:18)라며 혀를 내두르는 표현에서 그런 인식이 잘 드러난다. ‘이재에 밝은’면은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삶의 자세에서 비롯되었을 터. 이러한 실용주의적 삶의 태도는 허례허식이 되어버린 형식보다는 재물을 아깝게 여겨 곡삭(告朔)의 희생양을 없애려는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공이 곡삭례에 쓸 희생양이 아깝다고 없애려 하였다.

공자 말씀하시다. “얘야. 넌 양 한 마리가 그토록 아까우냐. 나는 이미 쓸모없이 되긴 했어도 오랜 전통을 가진 그 예(禮)가 아깝구나.”(‘논어’ 3:17)

‘곡삭례’란 매달 초하루에 건국자(노나라에선 주공(周公), 조선시대로 치자면 이성계)의 사당에 조촐하게 양 한 마리 잡아서 인사를 올리는 예다. 춘추시대가 되어 그 의의가 사라졌으므로, 자공은 이른바 ‘허례허식’을 쓸어내는 차원에서 곡삭례를 없애려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자공은 의미를 잃고 현실과 유리된 형식을 철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무엇 때문에 쓸데없이 제물을 낭비하느냐’는 것이다. 실질과 경제를 염려하는 셈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형식 아래에 깔려 있는 의미, 즉 ‘예의 정신’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천년을 이어온 예가 아무리 쓸모없기로서니 양 한 마리보다 못할쏘냐’라는 개탄이 그것이다.

 

재산으로 스승의 이름 드높여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자공이 현대 경제학의 기초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여쭈었다. “군자가 옥(玉)을 귀중하게 여기고 옥돌(珉)을 천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 때문입니까? 옥은 적고, 옥돌은 많기 때문입니까?” (‘순자’, 법행 편)

옥은 희소하기 때문에 귀하고, 옥돌은 흔하기 때문에 천하게 대접받는다고 보는 자공의 인식은 오늘날 경제학의 기초인 ‘희소성의 원칙’에 부합한다. 이렇게 재화의 운용 원리인 희소성의 원칙을 체득하고 있었기에 그는 대상인으로서 부유한 살림을 꾸릴 수 있었고, 또 그 재산을 바탕으로 공자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드높이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사마천은 이 점을 두고 “무릇 공자의 이름이 널리 천하에 떨쳐지게 된 것은 자공이 보좌하며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세력을 얻으면 더욱더 세상에 드러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사기’, 화식열전)라며 자공을 기렸던 것이리라.

상인 출신이었던 만큼 자공은 언변과 화술에 뛰어났다. 공자가 그를 두고 “언어에는 자공”(言語, 子貢. ‘논어’, 11:2)이라고 손꼽을 정도였다. 여기서 ‘언어’란 오늘날 식으로 하자면 외교능력, 표현술, 설득력, 레토릭(rhetoric) 등을 뜻한다.

실제로 공자는 조국 노나라가 제나라로부터 침공당할 위기에 직면했을 때 다른 제자들을 마다하고 자공을 내세워 제후들을 설득하도록 했다. 그 정도로 공자는 자공의 정치적 · 외교적 능력에 대해 신뢰했다. 자공이 이 임무를 수행한 결과, “그가 한번 나섬에 노나라는 국체를 보전하고, 제나라는 위기에 봉착하였으며, 오나라는 파국에 직면하고, 진(晉)나라는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월나라는 패권국이 되었다. 자공이 한 번 순회하면서 세력들을 서로 부딪치게 하여 십년간 다섯 나라에 각기 다른 변화를 초래하였다”(‘사기’, 중니제자열전)라는 평을 얻었다.

이러한 자공의 외교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 그리고 탁월한 언변으로 말미암아 공자는 제자들의 재능을 가늠하는 자리에서 자공의 ‘외교적 능력’을 특별히 인정하였던 것이리라.

반면 능란한 표현력이 자칫 실제와 유리될 경우 신뢰성에는 금이 가게 마련이다. 이에 공자는 자공의 공교로운 구변에 대한 염려와 경고도 빠트리지 않았다. 자공이 군자(君子)의 정체성을 질문한 데 대해, “하고자 하는 그 말을 먼저 실천하고 난 다음 말이 따르는 존재”(先行其言, 而後從之. ‘논어’, 2:13)라고 퉁겨준 것은 자공의 능변을 견책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여길 만한 대목이다. 요컨대 말보다는 행동을 앞세우라는 경고다.

공자가 다른 데서 “교묘한 말과 꾸며대는 표정에는 인(仁)이 드물다”(논어, 1:3)라고 비판한 대목도 맥락을 같이한다. 공자가 보기에 자공의 언어 구사력은 충분하지만, 염려스러운 것은 자공이 언어의 신뢰성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점이었다. 공자 경영학의 핵심에는 신뢰에 대한 강조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하겠다.

   

공자 탄생지인 중국 산둥성 취푸에서 치러지는 제례 광경.

자공: 국가경영(정치)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공자: 경제(食)를 풍족히 하고, 군사력(兵)을 튼튼히 하며, 백성들이 신뢰하는(信) 것이다.

자공: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이 셋 가운데 무엇을 앞세우리까.

공자: 군사력을 버려야지.

자공: 만부득이 또 버려야 한다면, 나머지 둘 가운데 무엇을 앞세우리까.

공자: 경제를 버려야지. 예로부터 다 죽음은 있게 마련이지만, 백성들이 신뢰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논어, 12:7)

여기서 공자는 자공의 국가경영에 대한 질문에 대해 경영의 3대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가 경제(食)요, 둘째는 군사력(兵)이요, 셋째가 신뢰(信)다. 그런데 자공의 추궁 끝에 우리는 이 세 요소가 병렬 가치가 아니라 차등 가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신뢰(信)>경제(食)>군사력(兵)’의 순서가 그것이다.

공자의 경영학이 ‘신뢰’(trust)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점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2500년 전 춘추시대나,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나, 먼 훗날 2500년 뒤 ‘사이보그 시대’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사회를 구성해서 살아가는 한, 신뢰는 핵심적 가치일 수밖에 없으리라. 모든 사회활동, 기업경영, 국제무역, 국가운용의 돌쩌귀는 ‘신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우리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크레디트 카드’의 크레디트(credit)가 개인적 차원의 신뢰를 뜻한다면, 국제무역의 기초인 신용장(L/C·Letters of Credit)의 크레디트는 세계적 차원의 신뢰다. 나아가 신뢰는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이다. 10여 년 전, 우리나라의 국가 주도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허물었던 IMF 금융위기가 ‘신뢰성 위기’에서 비롯되었듯, 지지난해 미국에서 발화된 국제금융계의 파산과 세계적 불황 역시 ‘신뢰의 위기’에서 터져 나왔다.

 

경영의 핵심은 신뢰

저명한 회계학자 캐서린 쉬퍼 듀크대 교수가 2001년 벌어진 대규모 회계부정사건인 엔론(Enron) 사태의 본질을 두고 “신뢰성이 무너지면 자본주의의 근본이 흔들린다”라고 진단한 점도 방증 사례로 충분하다.

자본시장에서 신뢰를 잃는다는 것은 자본을 시장에서 조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업들도 무너지고, 결과적으로 자본시장도 생존할 수 없다. 자본시장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축이 모두 무너지는 엄청난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그만큼 자본시장에서 정보의 신뢰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캐서린 쉬퍼)

자공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변 핵심이 신뢰였듯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 역시 ‘신뢰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쉬퍼 교수의 지적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는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공자의 염려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넉넉한 이윤과 첨단의 기술력이 결코 기업(국가)의 장기적 안정을 보장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신뢰만이 조직과 기업, 그리고 국가의 영속적인 안정을 보장한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또 미래에도 동질적이라는 교훈을 얻는다.

자, 그렇다면 신뢰는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 신뢰를 뜻하는 한자 신(信)이 말(言)로 구성된 글자임에 주목하자. 신뢰란 ‘언어’를 핵심요소로 하는 것, 곧 ‘언어의 경제학’에 다를 바 없다. 신뢰의 언어 경제학적 특성은 이른바 공자의 정명(正名)론 속에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이름(名)이 바르지 못하면 말(言)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事)이 이뤄지지 않고,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않는다”(논어, 13:3)라고 하여 말과 일 사이의 긴밀한 관계성을 천명한다. 이를 바탕으로 공자는 “경영자(군자)는 명분이 서면 반드시 말로 할 수 있어야 하고, 말로 표현했다면 그것을 반드시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경영자의 말은 구애받는 것이 없어야 한다”(논어, 13:3)라며 신뢰의 리더십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공자 경영학의 특성이 ‘언어와 신뢰’에 있다는 사실이 명백이 드러난다. ‘이름(名)-말(言)-일(事)-예악(禮樂)’의 점증법 제일 밑바탕에 자리 잡은 ‘이름(名)과 말(言)’은 요컨대 공자 경영학이 ‘이름의 힘’과 ‘말의 신뢰’ 위에 구축된 세계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국가경영이든, 기업경영이든 인간사회의 조건이 이름과 말로 구성된다는 공자의 인식이야말로 신뢰가 왜 그렇게 중시되는지를 반증한다.

인간세계가 말과 이름으로 구성되기에 명분(名分), 이를테면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우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움”(父父子子, 君君臣臣)을 유지하는 것이 경영의 핵심 사안이 된다. 공자는 “명분을 어기는 것은 곧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고 거듭 강조한다(논어, 9:11). 이처럼 언어로 구성된 인간사회에서 신뢰는 핵심적 중요성을 갖고 또 ‘말 한 마디’(一言)에 조직과 단체, 나아가 한 나라의 흥망도 좌우될 수 있다.

노나라 군주 정공(定公)이 물었다.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던데 정녕 그러하오?”

공자가 답했다. “어디 꼭 말대로 그렇겠습니까만, 시중에 ‘임금노릇 하기 어렵고, 남의 신하노릇 하기 쉽지 않다’는 말이 있더이다. 만일 임금노릇 하기 어려운 줄 안다면, 한 마디 말이 나라를 일으킬 실마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정공: “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 수가 있다’던데 정녕 그러하오?”

공자: “어디 꼭 말대로 그렇겠습니까만, 시중에 ‘임금 자리보다는 명령을 하면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 할 만하다’라는 말이 있더이다. 만약 명령이 선한데 누구도 어기지 않는다면 좋은 일이지 않겠습니까마는, 허나 악한 명령인데도 거역하는 자가 없다면, 한 마디 말이 나라를 망칠 실마리라 하지 않겠습니까?” (논어, 13:15)

 

‘강의 하류’에 가지 않으려면

한 마디 말에 나라의 흥망이 결정된다? 매우 날카롭고 단순한,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우화가 아니겠느냐고? 하지만 현대 조직경영론의 ‘구루’로 대접받는 제프리 페퍼 교수의 견해는 전혀 그렇지 않다. 페퍼는 저서 ‘사람이 경쟁력이다’(21세기북스)에서 도리어 공자의 정명론을 인용한 다음, 이를 근거 삼아 언어와 이름 짓기가 현대 기업경영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경험적 사례를 통해 제시한다.

디즈니랜드는 급사, 관리인, 경비원 등의 용어를 쓰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방문객들을 ‘관광객’이라 부르지 않고 ‘손님’이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손님에게 버릇없이 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렇게 바뀐 용어로 인해 종업원들이 바람직한 행동을 하게 된다.

많은 기업이 디즈니랜드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텍사스 오스틴의 외곽에 있는 LRCC의 새로운 경영진이 한 일은 낙후된 시설을 새것으로 교체한 것만이 아니다. 그들이 했던 중요한 조치들 중 하나는 ‘언어를 고치는 것’이었다.…또 청소부를 ‘객실 수행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회사는 경이로운 흑자 전환을 이뤄냈다. (제프리 페퍼, ‘사람이 경쟁력이다.’ 163쪽)

이는 ‘한 마디 말에 국가의 흥망이 달려있다’는 공자의 조언이 과장이 아니라 오늘날 기업경영에서도 핵심 사안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다. 춘추시대 대상인으로 성장한 자공 역시 공자의 가르침을 통해 언어와 이름의 중요성을 이해했던 것 같다.

자공이 말했다. “은나라 마지막 군주, 주(紂)의 악독함은 기록된 것만큼 심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므로 군자는 하류에 거처하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천하의 악이 모두 다 몰려들기 때문이지.”(논어, 19:20)

이것은 자공이 ‘이름’과 ‘말’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표지다. 한번 역사에 잘못된 이름으로 기록되면, 그것은 사실보다 훨씬 부풀려져 악인의 대명사로 굳어져버린다는 점을 주왕의 사례를 통해 증거하는 것이다. 자공의 날카로운 눈은, 전해지던 은나라 주왕의 갖은 악행이 실제로 그가 저질렀다기보다는 ‘악의 상징’이 되어 희생되었을 가능성을 짚어냈다.

   

세계 최대 에너지회사 엔론은 2001년 대규모 회계 부정사건으로 파산하고 말았다.

나라가 망하면 마지막 왕은 모든 책임을 다 지게 된다. 백제의 의자왕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태자 시절에는 효행이 탁월하여 ‘동방의 증자’(海東曾子)라는 칭호를 얻었던 사람이, 나라를 망치고 나니 모든 악행의 대명사로 기록되지 않던가. 맹자 역시 “임금이 그 백성을 학대함이 심하면 사후에 ‘유, 여’(幽, )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되는데, 아무리 효성스럽고 자애로운 후손이 대를 이어도 영원히 그 더러운 이름은 고칠 수 없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맹자, 4a:2).

자공은 말 한마디, 이름 하나에 군주가 직접 저지르지 않은 잘못조차 다 떠맡는 ‘무한책임’이 깃들어 있음을, 상류의 쓰레기가 몰려드는 ‘강의 하류’에 비유한 것이다. 예컨대 낙동강 하류에는 온갖 쓰레기가 모여든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을숙도에 가서 악취를 맡고 쓰레기더미를 보면 부산 사람들을 우선 탓하게 된다. 그러나 그 쓰레기는 대부분 상류로부터 모여든 것이다. 부산사람으로선 덤터기를 쓰는 셈이다.

곧 은나라 마지막 왕 주임금의 처지가 낙동강 하류에 살기 때문에 모든 쓰레기에 대한 비난을 몽땅 덮어쓰는 부산사람의 꼴과 같다는 것. 나라를 망친 잘못은 당사자에게도 있겠지만 실은 과거의 잘못이 아우러진 것이다. 그럼에도 궁극적인 책임은 당대의 지도자 한 사람에게 귀결된다는 뜻이다.

결국 자공은 경영자란 자기 책임뿐만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는, 무한 책임자임을 잊지 말기를 요구한다. 한 마디 말과 이름으로 그 사람의 존재와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두려움을 경영자들은 뼈저리게 인식해야만 한다는 뜻이리라(동시에 여기서 자공의 탁월한 비유능력을 엿볼 수 있으니, 공자가 그를 두고 ‘언어에는 자공이라’고 허락한 까닭의 일단도 짐작케 한다).

 

“도 없이 穀 먹는 것이 부끄러움”

자공에 대한 공자의 눈길은 이중적이다. 그의 표현 능력과 상인으로서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내면의 사람됨과 도덕의 중요성을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렇다고 공자가 가난을 높이 보고 부유함을 낮춰보았던 것은 아니다. 공자가 수제자 안연에 대해 “거의 다 이루었는데 가난으로 해서 망쳤다”고 안타까워하였던 데서도 그의 빈부에 대한 눈길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경영사상가로 추앙받은 시부사와 에이치(1840~1931)는 공자의 경제 인식, 빈부귀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공자 학설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부귀 관념’과 ‘화식(貨殖) 사상’입니다. 사람들은 공자가 ‘부귀한 자는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어진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반드시 부귀에 대한 생각을 버려라’는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논어’ 20편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런 뜻의 구절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부귀와 화식에 대해 그런 식의 논단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시부사와 에이치, 노민수 역, ‘논어와 주판’, 120쪽)

물론 공자가 지향한 삶은 가난함과 부유함의 갈등에서 초탈한 경지였다. 즉 가난하다고 해서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다고 우쭐하지 않는, 해맑고도 여유로운 삶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가난을 높이고 부유함을 증오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안빈낙도(安貧樂道) 역시 부자가 되려는 물질적 욕망에 휘둘리다가 도리어 사람의 참된 도리를 잃어버리는 바보가 되느니 차라리 담담하게 가난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지, 결코 가난을 숭상하고 부유함을 낮춰본 것은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거친 밥을 먹고 맹물 마시며 팔뚝 접어 베개로 삼아도 즐거움은 그 가운데 있다네. 옳지 않은 부귀는 내게 뜬구름과 같나니”(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논어, 7:15)라던 공자의 말 역시 다만 ‘불의한 부와 귀’의 추구를 염려했던 것이지 가난함 자체를 높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도가 있는 나라에 가난하고 비천한 삶이 부끄러움이요, 도를 잃은 나라에 넉넉하고 존귀하게 사는 것이 부끄러움이니라”(논어, 8:13)라고 한 지적은 그의 속뜻을 진솔하게 드러낸 대목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부유함은 마땅히 즐길 만하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은 치욕이라는 것이 공자가 가진 빈부귀천에 대한 생각이다.

이 대목은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자공과 대비되어 가장 가난한 인물로 등장하는 원헌이 부끄러움(恥)을 질문한 데 대해 공자가 “나라에 도가 있을 적에 녹(穀)을 먹고, 나라에 도가 없어도 녹을 먹는 것이 부끄러움”(논어, 14:1)이라고 답한 장면과 겹친다. 나라에 질서가 있을 때 가난한 것은 내 능력의 부족 탓이다. 나라가 혼란할 때 부유한 것은 재물 축적 과정이 추악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부귀빈천에 대한 인식을 가장 명료하게 요약한 것으로 꼽히는 다음 대목을 보자.

   

부귀(富貴)는 사람들이 다 바라는 것이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머물지 말아라.

빈천(貧賤)은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것이지만 당하더라도 애써 벗어나려들지 말아라. (논어, 4:5)

이 대목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가난을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말고, 부유하려고 억지로 노력하지 말라. 주어진 자신의 길, 예컨대 학자는 학자의 길, 가수는 가수의 길, 그리고 기업가는 기업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라. 자기 길을 걸으면서 획득한 정당한 부유함을 누려라. 그러나 가난의 질곡에 빠지더라도 자기 뜻을 실현하는 길에 맞닥뜨린 것이라면 당연하게 여기고 묵묵히 인내하라.

 

비용을 아끼고, 사람을 아껴라

동시에 우리는 여기서 가난이 부유함보다 사람의 본성을 해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리얼리즘에 대한 공자의 통찰에도 주의해야 한다. “사람이 가난할 때 남을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고, 부유할 때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子曰, “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 논어, 14:10) 그렇다면 정치 곧 국가경영의 순서는 첫째가 가난으로부터 해방이요, 그 다음은 물질이 인간됨을 해치는 교만을 걷어내는 일이 되겠다.

궁극적으로 공자에게 경영이란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 논어, 1:5)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절용’이란 곧 비용을 아끼는 것이요, ‘애인’이란 곧 사람을 아끼는 것이다. 공자 경영학의 기본 원칙은 이 두 가지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절용이애인’을 현대 언어로 번역하자면,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자원 활용과 효율적인 인사 관리’라 하겠다.

그런데 절용이애인, 특히 사람을 아끼기 위한 방법으로는 상대방 처지에서 바꿔 보기라는 ‘역지사지의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또 이것은 공자가 제시한 인(仁)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공자제자, 중궁이 사람 아끼는 법을 여쭈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제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상대방에게 베풀지 말라. 그리하면 나라에는 원망이 사라지고, 집안에도 원망이 없을지니.” (仲弓問仁. 子曰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논어, 12:2)

 

역지사지의 리더십

그런데 ‘스스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상대방에게 베풀지 말라’는 원칙은, 바로 아래에서 인용할 미국인 기업가의 ‘상대방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라’는 경영원칙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 놀랍다.

링컨 일렉트릭은 ‘기업의 강한 도덕성’을 경영방식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목사의 아들인 존과 제임스 링컨 형제는 ‘상대방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그들이 성경에 나오는 이 말을 기업의 기본 운영방침으로 적용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제임스 링컨은 ‘근로자를 비효율적이라고 비난하는 관리자가 있다면, 그 관리자의 위치를 근로자와 바꿔보아라. 그들도 아마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근로자는 별종이 아니다. 그도 관리자와 동일한 요구와 야망을 가지고, 비슷하게 행동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차별하는 프로그램에는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느 관리자가 그러고 싶어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제프리 페퍼, ‘사람이 경쟁력이다’, 포스코경영연구소, 92~93쪽)

어쩌면 이렇게 동서고금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제프리 페퍼 교수의 감회를 거듭 빌리자면, “링컨 일렉트릭의 성공사례는 1947년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인센티브와 생산성 장려금제, 종업원들의 적극적 참여, 품질개선팀 등에 관한 논문도 벌써 40~50년이 넘은 것들이다. 이런 경영정책에 대한 오랜 연구들을 고찰해보면, 그러한 정책들이 지닌 아이디어가 쉽게 변하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오래 지속되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제프리 페퍼, 98~99쪽)

하물며 2500년 전의 낡디낡은 책인 ‘논어’ 속에서 공자가 했던 말을 현대의 기업경영가나 경영이론가들이 똑같이 되뇌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는 어떠하랴. 더더욱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