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선의 황금시대’… 다시 볼 날 멀지 않았어요”-
생존한 스님 가운데 드물게 금강산에서 출가한 혜해스님. 복원불사중인 신계사에 머물며 기도 정진하고 있는 스님은 “참선은 내가 나를 찾아 부처가 되는 공부”라며 “금강산 자체가 저절로 발심하게 되는 부처님의 도량”이라고 말했다.
금강산에 비 그쳤다. 금강의 연봉마다 햇살이 하얗게 부서져 내린다. 경주 흥륜사 조실인 노비구니 혜해(慧海·86) 스님을 금강산에서 만난다. 스님은 지난 3년 동안 한해의 대부분을 금강산에서 기도하며 보내고 있다.
스님은 현재 생존한 스님들 가운데 드물게 금강산으로 출가했다. 스물셋의 꽃다운 나이로 신계사에서 파르라니 머리를 깎았던 처녀는 이제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노승이 되어 출가 본사를 찾아왔다. 스님은 말하자면 근현대 ‘금강산 선의 황금시대’를 지켜본 마지막 증언자인 셈이다.
현대 아산 직원들이 머무는 장전항 컨테이너 숙소가 스님의 주석처다. 지난 23일 아침. 신계사 복원불사 도감을 맡아 남쪽에서 파견된 제정스님이 운전하는 8인승 승합차에 올랐다. 승합차에는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차는 쭉쭉 뻗은 미인송 솔숲 아래 극락고개를 지나 신계사에 든다.
오전 8시. 오른쪽에 문필봉, 왼쪽에 세존봉·집선연봉, 뒤편에 하관음봉 등 외금강의 절경을 사방에 거느린 신계사에 도착했다. 깔끔하게 복원된 전각들 사이 대웅보전 앞 삼층석탑 양쪽에 커다란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다. 경내에 보리수 꽃향기가 진동했다.
제정스님이 대웅보전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가사를 수한 두 스님이 남측에서 온 도편수, 단청장 등 불자들과 함께 예불을 올린다. 키 150㎝도 되지 않는 자그마한 체구. 댓돌에 벗어놓은 스님의 검정고무신이 앙증맞다.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목탁소리와 반야심경 봉독 소리가 맑게 퍼져나간다. 예불을 마친 제정스님과 불자들이 불사 현장으로 나가고 노스님의 108배가 이어졌다. 한번 절하고 ‘예불대참회문’ 한 장씩 넘기면서 지극 정성으로 절을 올린다. 오랜 수행 때문일까. 얼굴에 세월의 검버섯이 피었어도 정정하고 청아한 모습이다. 작은 몸을 오체투지로 더 깊이깊이 오므리니 좌복 하나가 그렇게 클 수가 없다. 바람 한 점 없는 데도 신계사의 풍경은 뎅그렁뎅그렁 맑은 소리를 냈다,
스님은 평안북도 정주군 안흥면 안의동 농촌에서 태어났다. 1남3녀의 맏이였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나는 어른이 되면 금강산에 가서 살거야.” 그는 5살 때 어머니, 19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가난한 살림을 홀로 책임져야 하는 소녀 가장이었다. 전쟁 막바지의 일제는 허리 휘게 일을 해 걷어들인 농작들을 모두 공출로 빼앗아갔다. 서러운 세월이었다. 그는 남동생을 결혼 시키자마자 홀연히 금강산으로 떠났다. 스물 세 살 때였다.
“금강산에서 사명대사처럼 도통해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싶었어요. 그래야 동생도 징용에 끌려가지 않을 테니까. 그때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스님 노릇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어요.”
열차를 타고 외금강 역에 내려 수구넘어재를 넘어 금강산에 들었다. 밤이 깊어서야 극락고개를 넘었다. 울울창창한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 청천하늘로 별빛이 가득 쏟아져 내렸다.
노스님의 말은 나직나직하고 미소는 어린 아이처럼 해맑다. ‘헤헤’ 웃는 듯한 표정이어서 법명이 혜해인가. ‘하심’이 몸에 배어 권위 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손자뻘은 될 법한 젊은이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다. 인자함 속의 당당함이 그의 수행력인 것 같다.
1944년 음력 7월 초하루. 그가 미련없이 삭발염의한 곳이 바로 세존봉 아래 신계사의 암자인 법기암이었다. ‘화엄경’에서는 금강산을 법기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여긴다. 그 법기보살이 미륵불로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 바로 법기암이다. 그는 60~70년 전의 일을 날짜와 시간까지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신계사는 대처승들이 살았어요. 법기암은 비구니 20여명이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법기암 뒤편에 효봉스님이 한 평짜리 토굴을 짓고 문을 틀어막은 채 정진중이 셨지요.”
효봉스님이 무문 토굴 수행을 할 때 하루 한 끼씩 공양을 나르며 시봉하던 임대원스님이 그의 은사였다. 낮에는 부엌일, 밭일, 빨래를 하고 밤에는 천수경을 외우면서 1년 동안 절집 먹물을 들였다. 스님은 그해 겨울에 내리던 눈을 잊지 못한다. 눈은 3일, 4일씩 펑펑 쏟아져 금강산 골짜기를 설국으로 바꿔놓곤 했다. 스님은 그동안 자신이 출가했던 법기암터를 세차례 다녀왔다. 숲으로 변해 있기는 했지만 연못터와 우물터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효봉스님의 토굴터도 찾았다. 그는 암자터에서 삼배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 울면서 가요 ‘황성옛터’를 불렀다고 한다.
스님이 법기암에서 90리 떨어진 내금강 유점사로 옮긴 것은 하루 빨리 참선정진으로 도통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당시 유점사 선방에는 안덕암스님, 선경산스님 곽보봉스님이 수행하고 있었다. 유점사에서 ‘무(無)’자 화두를 받고 정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도통 하기 전에 세상이 바뀌었고 소원이 이루어졌다. 해방이 된 것이다. 그런데 곧 삼팔선이 쳐지고 금강산에서 수행하기가 어려워졌다. 금강산을 떠나 삼팔선을 넘은 것은 1946년 가을밤이었다. 그렇게 떠난 길이 금강산과 영영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평생 금강산을 그리워했지만 갈 수 없는 땅이었다.
스님은 무자 화두 하나만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었다. 합천 해인사 국일암, 문경 윤필암, 대구 동화사 양진암 등에 머물며 당대의 선지식들인 효봉, 성철, 청담, 향곡, 구산, 자운스님에게서 법문을 듣고 화두참구 지도를 받았다.
그는 60년간 동안거와 하안거를 거른 적이 거의 없다. 올연히 납자의 길만을 걸어온 스님은 70년대 초 당시 향곡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 걸음을 멈췄다. 이차돈의 순교성지인 이곳에 천경림선원을 개원하고 선원장을 맡아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정착시켰다. 이곳에서 법랍 60세를 넘긴 스님은 현재 한국 불교 비구니계의 최고령 선승이자 생존한 비구니 스님 가운데 최고의 대덕으로 꼽히고 있다.
스님은 고령에도 시자의 시봉을 받지 않고 모든 일을 혼자 해낸다. 겨울에도 방에 불 넣는 것을 싫어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밤 11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공양때를 빼고는 늘 참선정진한다고 한다.
흥륜사 조실당의 당호는 법기암이다. 스님이 금강산에 입산할 때의 바로 그 암자 이름이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금강산에서 생을 마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영영 못볼 줄 알았던 금강산이 거짓말처럼 길을 열었다.
스님이 신계사를 다시 찾은 것은 2004년 11월. 조계종이 금강산 신계사 대웅전을 복원하고 거행한 낙성식 때였다. 스물세살 꽃다운 나이에 불연을 맺은 금강산. 스님은 북쪽과 조계종 총무원, 현대아산을 쫓아다니며 사정을 한 끝에 ‘비공식적’으로 신계사에 머물고 있다. 노구의 건강을 걱정하는 제자와 신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신계사 한복판에 떴다. 금강 연봉마다 걸린 흰구름이 그림같다. 그는 한손으로 사시공양 마지를 받쳐들고 익숙하게 계단을 올라 대웅전으로 향한다. 부처님 전에 정성스럽게 마지와 정수(淨水)를 올린 다음 향불 사르고 법당 한쪽에 놓인 종 앞에 쪼그리고 앉아 타종을 한다.
땡 땡 땡- 땡 땡 땡-
종소리와 향불의 향기가 보리수 꽃향기에 섞여 아득한 금강 연봉으로 퍼져나간다. 스님은 어느새 짝짝짝 죽비를 치면서 절을 올린다. 반짝반짝 빛나는 마지그릇과 정수 그릇을 한번 더 꼼꼼하게 닦은 다음 벽을 향해 앉아 고요히 눈을 감고 입정에 든다. 그대로 10분 정도 여여부동이다. 노스님에게 금강의 고결함이 더해진 것 같았다.
그는 지난 21일 내금강 순례를 위해 금강산을 찾은 조계종 원로스님들을 반갑게 맞았다. 연신 합장배례하면서 손님을 맞는 모습이 마치 금강산의 주인 같다. 다음날 순례단과 함께 내금강으로 향했다. 내금강은 그에게도 61년 만의 첫 걸음이다. 내금강 순례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세월이 지났어도 바위, 폭포, 물빛, 나무 등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내가 이곳에 다시 오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산천은 의구하되 스승, 도반들만 떠나고 없었다.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는 등산로를 그는 젊은이 못지 않은 날랜 걸음으로 앞장 서 걸었다. 만폭동 옥빛 계곡을 따라 표훈사와 금강문, 보덕암, 묘길상을 지날 때마다 그는 깊은 회상에 잠겼다. 폐허가 된 마하연터에 멈추었을 때 그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내가 출가했을 때 성철스님, 향곡스님, 석주스님, 효봉스님이 다 이곳에서 참선 정진했지요. 이제 주춧돌과 잡초가 대신 화두 참구를 하는 모양이지….”
혜해스님은 마하연터에서 총무원장 지관스님, 원로스님들과 풀밭에 앉아 잠시 좌선을 했다. 순례의 마지막 장소인 드넓은 장안사터 개망초꽃밭에서는 순례단에 둘러싸여 또 한번 ‘황성옛터’를 구성지게 불렀다. 스님은 긴 가사를 한마디도 틀리지 않고 가슴 속 응어리처럼 풀어내고 있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스님은 땡볕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수건 하나 올려놓고 어느새 신계사 숲으로 들어가 있었다. 잡초 사이에서 고사리를 찾아내 척척 꺾어내는 손놀림이 눈 밝은 젊은이 못지 않다. 내금강으로 오르는 관광버스가 지날 때마다 하얗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속세에서도 출가해서도 평생을 오로지 금강산을 마음에 새겼던 혜해스님. 노스님의 깔끔하고 짬진 수행이 만폭동 진주담 옥수처럼 맑다. 세존봉의 부처님과 관음연봉의 관세음보살이 방광(放光)을 하는 듯 금강산 저녁 노을이 붉다.
▲ 조계종 파견 제정스님이 본 혜해스님
조계종단에서 공식적으로 도감으로 파견한 제정스님은 4년째 금강산에 머물며 복원불사를 총지휘하고 있다. 혜해스님은 남북 관계자들에게 ‘떼를 써서’ 비공식적으로 신계사에 머물고 있다.
혜해스님이 하는 일은 정해진 것이 없다. 그저 경내에서 기도하고, 예불하고, 포행하며 자유롭게 지낸다. 그러나 실제로는 법당 청소며, 부처님 예공은 모두 노스님 몫이니 중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수 86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몸도 손도 빠르다. 밖에는 기계톱소리와 망치소리, 일꾼들 웅성거리는 소리로 소란하고 먼지도 날렸지만 법당 안은 깔끔했다. 좌복 하나, 가사 하나 흐트러진 것이 없었다. 모두 노스님의 손길 덕분이다.
“예불이든 예공이든 성심과 정성을 다하십니다. 젊은이 못지 않게 부지런하지요. 내가 복원불사로 밖에서 뛰어다니는 동안 당신 혼자서 법당을 여법하게 이끌고 있지요. 수행력과 선근이 뛰어난 분입니다.”
제정스님은 “혜해스님이나 저나 숙소에서 신계사까지 오가는 것이 아쉽다”며 “앞으로 철야정진하고 새벽 도량석도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장은 법기암 복원이 힘들겠지만 흥륜사를 훌륭한 비구니 선방으로 일으켜 세웠듯이, 노스님의 원력이 금강산 신계사와 법기암에도 회광반조(回光返照)했으며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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