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22

醉月 2010. 5. 15. 07:12

2500여년 영욕의 흔적, 떡시루처럼 층층이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22> ‘한 권의 통사책’, 우즈벡 고도 부하라

아르크 고성의 전경. 아르크 고성은 고대 부하라의 발상지이며, 부하라 왕국의 왕이 살던 곳이다. 들어가는 곳은 오른쪽에 보이는 문이 유일하며, 현재의 건물은 18세기에 복원한 것이다.

사마르칸드에서 ‘종이의 길’을 튼 사마르칸드 지의 제작 고증을 마치느라 예정보다 3시간 늦게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300km 떨어진 부하라다. 시내를 갓 벗어나자, 난데없는 소나기가 차창을 적시기 시작한다. 사막 언저리라서 1년에 몇 번 안되는 모래바람 뒤의 소나기라고 한다. 한 시간쯤 내리곤 뚝 멎는다. 삽시간에 무더위가 날아가고, 아스팔트 길엔 윤기가 돈다. 안내원 레나 양은 보기드문 일이라면서 축복이라고 반겨주었다.

아득한 사막 지평선에 황금빛 저녁노을이 뉘엇뉘엇하다. 일에 쫓겨 점심을 대충 한데다, 몇 시간 달려오다보니 모두들 얼굴에 시장기가 서렸다. 마침 길가에서 큰 물고기를 그린 식당 간판이 눈에 띄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생선요리라 호기심이 동했다. 주위에서 ‘어두일미’라고 권하는 바람에 설익은 생선 대가리를 받아먹었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며칠 동안 배탈로 고생했다. ‘일미’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어두육미(魚頭肉尾)가 제대로 익은 뒤의 얘기인 것처럼, 만사는 조건이 무르익어야 성취되는 법. 여행의 일상에는 삶의 진리가 수두룩하다.

지금껏 지구 상에 남은 역사유적은 대부분이 단대사적(斷代史的) 유적으로 한 조대나 몇 개의 조대만을 대표하는 유적들이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한 권의 통사(通史)책’처럼, 여러 조대의 역사상을 증언하는 유적 유물이 한 군데에 몰린 경우가 있다. 그곳만 보면 일국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통시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일례가 바로 우즈베키스탄의 고도 부하라다.

부하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뷔하라’, 즉 ‘수도원’이란 뜻이다. 이슬람 시대 이후에는 ‘부하라 샤리프’(‘성스러운 부하라’)로 불리운다. 이 한 마디에 부하라의 위상이 함축되어 있다. 한적에는 ‘포활(布豁)’, ‘불화랄(不花剌)’, ‘불화아(不花兒)’, ‘불합랍(不哈拉)’으로, 아랍 사서에는 부카르로 각각 음사되어 있다. 중국 수·당 시대엔 이른바 중앙아시아 소무(昭武) 9국 중의 하나인 안국(安國)을 가리켰다. 자고로 천산 산맥 북쪽 기슭을 걸쳐가는 초원로와 파미르 고원을 넘는 육로의 북도가 이곳에서 만난 뒤 다시 키질쿰·카라쿰 사막을 뚫고 페르시아와 카스피해쪽으로 이어진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부하라는 동서문명 교류의 관문 구실을 해왔다. 게다가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르는 자라프샤 강을 낀 오아시스 도시로서 물산도 넉넉하고 풍광도 빼어나다.

 

고대 아르크 고성앞 광장 노예들 처형장면 떠올라

» 중앙아시아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이슬람 건물인 사마니 묘당 안의 모습. ‘다른 곳에서는 빛이 하늘에서 내리 비치지만, 부하라만큼은 빛이 땅에서 하늘로 올려 비친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2500여년의 부하라 역사는 신비로 가득하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도시 전체는 20m의 문화층을 가진 하나의 중층적 유적군을 이룬다. 하층은 기원전 4세기~기원후 4세기의 고대문화층이고, 상층은 7~17세기의 중세문화층으로 되어 있다. 놀랍게도 지상에 노출된 여러 유물들은 원래 이런 지층에 묻혔던 것을 파헤쳐 찾아낸 것들이다.

부하라의 역사현장으로 처음 찾은 곳은 아르크 고성이다. 페르시아어로 ‘성채’란 뜻이다. 고대 부하라의 발상지로서, 4.2헥타르의 면적을 지닌 큰 성채다. 7세기 여왕 훗다 하우톤이 이 성채에 기대어 이슬람군 내침에 맞섰으며, 13세기 몽골군에 의해 숱한 살육이 이뤄진 곳도 여기다. 남은 건물은 18세기 복원한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성문에 들어서면 미로 같은 갱도의 양측에 죄수들을 가둔 지하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윗층에는 옥좌가 있던 방과 왕의 거실, 줌아(금요일) 모스크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켠에는 16세기부터의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는데, 작지만 꽤 알차다. 5,000년 전 암각화부터 기원전의 각종 토기, 부하라 유리,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 교단) 신도들의 각종 용기, 심지어 일본 도자기 등도 있다. 노예들의 처참한 생활상과 가혹한 형벌 장면, 특히 성 앞 레기스탄(중앙) 광장에서 행해지는 잔혹한 처형 장면들이 소름을 돋게 했다.


중세 들어 부하라는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역사의 격랑에 휩싸여 영욕을 거듭했다. 628년께 이곳을 지난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포갈’(捕喝)이라고 지명을 부르면서, 둘레는 1600~1700리나 되고, 동서는 길죽하고 남북은 좁으며, 토질이나 풍속은 사마르칸드와 같다고 기록했다. 674년 이슬람 동정군에게 점령되자, 부하르 후다트가문의 통치는 유지되었으나, 이슬람제국의 후라산 총독부 관할 아래 들어간다. 8세기 후반에 이르러 타히르조의 치하에 들어갔다가, 9세기 말엽 다시 사만조에 예속되면서 그 수도가 되었다. 이때부터가 부하라의 첫 황금기다. 메르브와 사마르칸드, 구르칸지, 히라트 등 주변 오아시스 도시들을 연결하는 교역의 십자로에서 번영을 누리고, 중세 이슬람 문명의 어엿한 산실로 부상한다.

아르크 고성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현존 중앙아시아 최고의 이슬람 건물이라는 사마니 묘당이 자리하고 있다. 51년간(892~943) 지어진 이 건물은 일찍부터 특수한 건축기법으로 고고학계와 건축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원래 사만조의 건국자 이스마일 사마니가 선친을 기리려고 세운 묘당이나, 그가 죽은 뒤에는 그뿐만 아니라 후손들까지 묻혀 사실상 사마니조 왕족 묘당이 됐다. 이 묘당은 1925년 흙 속에서 발견되었다. 너비가 각각 9m, 벽 두께가 1.8m인 이 정방형 건물은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짓고 반구형 돔을 얹었다. 외벽은 내측을 향해 약간 구부러졌다. 벽돌을 요철(凹凸) 모양으로 쌓아 명암을 나타내고, 4개 문에 들어오는 빛의 조화로 내부의 색조를 드러내도록 했다. 묘당 안에 감도는 염분의 물기는 수로를 파 조절한다. 우주를 상징하는 돔은 둥글게, 땅을 상징하는 바닥은 네모나게 했다. 이는 경주 석굴암에서 보이는 돔 모양 ‘천원지방’(天圓地方) 우주관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티무르시대 건축미술 백미
노예들 피로 지은 마드라사

10세기 말엽 사만조를 이은 카라한조 시대에도 부하라는 번영을 누렸으나 13세기 전반, 불운을 겪게된다. 1220년 내침한 칭기즈칸의 몽골군은 모스크에 모인 무슬림들 앞에서 경전 <꾸르안>을 발로 차 내동댕이쳤다. 그는 “나는 너희들의 죄를 처벌하려고 신이 파견한 사람”이라고 호언하면서 닥치는대로 건물들을 짓부쉈다. 그러나 단 하나의 건물만은 손을 댈 수 없었다. 바로 예배시간을 알리는 첨탑(미어자나)과 캐러반들의 등대 구실을 하는 카란 마나라(미나렛)다. 기단부 지름이 9m에 높이가 무려 46m인 이 부하라의 상징물들은 1127년 카라한조 때 지은 것이다. 원통형의 탑신 벽면은 14층의 아기자기한 벽돌로 띠를 두르고, 꼭대기에는 16개의 아치형 등화창이 나있다. 탑 속에 마련된 105개의 고불고불한 나선형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곁에 1만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카란 모스크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 탑이 징기즈칸의 마수에 걸리지 않은 데 대해 다음 같은 전설이 있다. 그가 흑심을 품고 탑 앞에서 탑을 치켜보는 순간 모자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징기츠칸은 엉겁결에 허리를 굽혀 모자를 주워 쓰면서, “이 탑은 내 머리를 숙이게 한 비범한 탑이니 섣불리 파괴해서는 안된다”고 중얼거리며 물러섰다고 한다. 탑은 그 뒤 몇 차례 지진에서도 피해를 면해 오늘날까지도 카라한조 시대의 증인이자, 부하라의 상징으로 추앙 받고 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까지 꼭대기에서 죄인을 떨어뜨려 죽이는 형구로도 이용되어 ‘죽음의 탑’이란 저주를 받기도 했다. 추앙과 저주가 공존하는 아이러니의 탑인 셈이다.


카란 모스크 맞은편의 미르 아랍 마드라사(신학교)는 이슬람 부흥을 누렸던 15세기 티무르 시대에 지었다. 청백색 모자이크 타일로 식물· 문자문양을 기묘하게 조화시킨 장식은 당대 건축미술의 백미지만 티무르 시대의 치욕스런 일면이기도 하다. 3000명 이상의 페르시아 노예들을 팔아 얻은 자금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훗날 역사가들은 ‘그 터는 벽돌이나 점토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물과 피로 다져진 것이다’라고 기록해놓았다. 그런가 하면 시 북쪽 교외 4km 지점에 있는, ‘달과 별의 궁전’이라고 하는 시토라이 모히 코사 여름궁전은 1911년 러시아 건축가들이 지은 화려한 건물이다. 외관은 서양식이나 내장은 동양-이슬람식으로 명실공히 동서문명의 융합물이다. 지금도 왕이 쓰던 서양 가구, 중국·일본 도자기가 남아있다. 궁녀 300명을 위한 전용 풀장이 있는데, 왕은 가까운 테라스에서 무자맥질하는 궁녀들을 눈여겨보다가 마음에 드는 궁녀에게 사과를 던져 그날 노리개로 골랐다고 한다. 이렇게 여태껏 남은 부하라의 유적 유물은 영욕을 거듭한 2,500여년 역사를 ‘한 권의 통사책’처럼, 시대별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동서문물 교류 길목…경제 패권 각축

중계무역 거점, 부하라

» 부하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수도원이란 뜻이다. 이곳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칼랸 마스지드(모스크) 들머리 모습. 부하라는 서역으로 가는 좁은 ‘목구멍’이었던 둔황과 지정학적으로 비슷하다. 아랄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정수리’ 호라산 지역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 일찍부터 실크로드 간선인 초원로와 오아시스 육로의 교차점이 됐다. 동쪽의 중국과 서쪽의 페르시아·유럽쪽 문물들이 부하라에서 한데 모였다가 각지로 전파된 까닭에 숱한 지역 왕조들의 도읍이 되었으며, 이민족 상인들 사이에는 경제적 패권의 각축장이 되었다. 특히 부하라는 동유럽·중동에서 중국으로 갈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있어 실크로드가 쇠퇴하는 17세기 이후에도 중계 교역으로 쉼없이 번영을 누렸다. 오늘날 부하라가 동서 교류의 우량 박물관이 된 것은 20세기초까지 2000년 이상 유지된 교역망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5세기까지 부하라는 인도의 불교유적이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유적을 찾았던 순례자들의 중간 기착지였다. 중국사서인 <수서>서역전에는 7세기초 수나라가 서역에 파견한 사신 위절의 기행기 <서번기>의 내용 일부가 나오는데, 안국으로 불리웠던 부하라는 다섯빛깔 소금인 오색염이 중요 교역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격적인 교역거점이 된 것은 6세기 투르크족이 진출해 부하라 성과 궁전, 창고, 시장 등을 지은 데서 비롯됐다. 8세기초 아랍 이슬람 군대가 호라산을 점령한 이래 지배세력은 200~300년 단위로 바뀐다. 거란인들이 주축인 카라키타이(12세기초), 몽골인들의 차가타이한국(13~14세기), 티무르 제국(14~15세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뿌리인 우즈벡인의 샤이바니왕조와 부하라 한국시대(16~19세기)까지 교역은 끊이지 않았다. 대항해 시대인 16~17세기에는 유럽인들도 중국 진출을 위한 동방 거점으로 부하라를 점찍고 무역사절을 보낸다. 제정러시아의 거상 스트로가노프가의 에르마크나 영국 런던의 무역상 젠킨슨이 바로 그런 이들이다. 젠킨슨의 경우 1558년 12월 부하라에 도착해 현지 교역시장을 견문한 기행기를 남겼다. 당시 부하라 시장에서는 인도 벵골의 마포와 모직물, 러시아산 가죽, 페르시아 직물, 중국 비단, 견직물 등이 거래됐고, 페르시아인, 러시아인, 타타르인들을 사고파는 노예시장도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