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21

醉月 2010. 5. 11. 08:30

아랍군에 잡힌 제지기술자들, 조선 도공처럼…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21> ‘종이의 길’을 튼 ‘사마르칸드지’

자리프 무효타로브 전통제지술 보유자가 사마르칸트시 외곽 테르메스 거리에 있는 수공업 제지공장에서 종이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마른 뽕나무 가지를 잿물 속에 넣어 끓인 뒤 나온 것이다


종이제작 최적지 사마르칸트에 정착…유럽에까지 종이 전파

일찍이 중국에서 발명된 이른바 ‘채후지(蔡侯紙)’는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식물성 섬유지의 원조로서, 아직은 양피지나 파피루스 같은 원시적 서사재료를 쓰고 있던 이슬람 세계와 그를 통해 유럽에 전파되게 된 계기는 바로 고선지 장군이 이끈 탈라스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슬람-석국 연합군에 포로가 된 2만명 당군 가운데는 많은 기술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제지기술자도 더러 끼어 있었다. 이들 제지기술자들에 의해 서방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강국(康國)의 수도였던 사마르칸드에 제지소가 세워져 종이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사실은 중세 아랍-이슬람 학자들의 여러 기록에 의해 확인된다. 아랍 사학자 자히즈는 사마르칸드에서의 종이(카기드) 제조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이슬람 세계에 처음으로 등장한 종이는 이슬람력 134년(서력 751년) 아틀라흐 전투(즉 탈라스 전쟁)에서 지하드 이븐 살리흐(이슬람군 총사령관) 장군에게 잡힌 당군 포로들이 사마르칸드에서 만든 것이다. 그들은 본국에서 하던 방식대로 아마와 대마 조각으로 종이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그때부터 이를 모방함으로써 이슬람제국 여러 곳에서 양산되었고, 그것이 다시 유럽으로 돌어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유사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 세력이 승승장구 동진하면서 한창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되어 가고 있을 때, 그 중심지의 하나였던 사마르칸드는 수자원이 넉넉하고 수리관리가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로서 종이 원료인 아마나 대마를 재배하는 데 더 없는 적지였다. 새로운 문명에 대한 목마름 속에서 이곳에 진출한 아랍-무슬림들은 탈라스 전쟁에서 생포한 중국인 제지기술자들을 지체없이 활용해 처음으로 제지공장을 세워 질 좋은 종이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얼마 안 가서 이곳이 제지업의 중심지가 되고, 종이가 이곳의 주요한 교역품으로 부상한다. 당시 외지인들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종이를 산지 이름을 따서 ‘사마르칸드지’라고 부르며 선호했다. 사마르칸드지의 수출과 더불어 제지술이 점차 아랍-이슬람제국의 각지에 전파되었으며, 급기야 이슬람 세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와같이 사마르칸드지는 종이가 서방으로 전파하는 길, 이른바 ‘종이의 길’에서 관문과 고리 역할을 함으로써 동서문명교류에 큰 기여를 했다. 여기에 더해 그 출현은 고선지 장군이 쌓아올린 위업의 하나라는 사실 때문에 필자는 일찍부터 사마르칸드지의 현장추적에 큰 관심을 품어 왔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관련 유적에 관한 구체적 실증은 별로 없이, 주로 문헌기록에만 의존하다 보니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사마르칸드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번만큼은 꼭 한번 현장조사를 해보기로 작심했다. 7월 30일, 사마르칸드 역사박물관을 참관할 때, 탈라스 전쟁에 의한 제지술의 전파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한 학예연구관으로부터 전통제지술 보유자의 주소를 대략 알아가지고 찾아나섰다. 근 두 시간 동안이나 탐문을 거듭하던 끝에 어렵사리 알아낸 곳은 시 변두리에 있는 테르메스 거리에 자리한 자그마한 수공업 제지공장이다.

공장 주인이자 전통제지술 보유자는 50대 초반의 자리프 무흐타로브다. 그는 사마르칸드 수공업협회 수공업발전센터 소장으로서 1997년부터 이곳에 100여평의 공장을 차려놓고 대여섯 전수생들과 함께 전통제지술을 복원 전수하는 작업을 하면서, 마당에 시료로 뽕나무를 심어 키우고 있었다. 한편, 그는 약 20분 거리에 있는 곳에 현대식 제지공장을 세울 계획이라면서 이미 완성한 설계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최근 몇년간 ‘종이의 길’을 추적하기 위해 중국,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여러 나라들이 취재경쟁을 벌인다고 귀뜸하면서, 관련국인 한국의 관심과 협조를 요망했다.



그에 의하면, 당시 사마르칸드를 끼고 흐르는 씨압 강 유역에 300여소의 제지공장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어 질 좋은 ‘사마르칸드지’를 대량 생산했는데, 당시 주원료는 아마나 면화 나무였으며, 그런 전통은 1920년대까지 지속되어 왔다. 그러다가 현대적 제지술에 밀려 거의 멸적위기에 처한 것을 최근 다시 복원하고 있으며, 지금은 가끔 면화 나무를 쓰기도 하지만, 뽕나무를 주원료로 쓴다고 한다. 전통제지술의 복원에 대한 그의 자긍심이나 집념은 여간 굳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전수생들을 데리고 전통종이의 제조과정을 다음과 같이 재현해 보여주었다.

마른 뽕나무 섬유를 나무를 태워 만든 잿물 속에 넣어 6~7시간 끓인 다음 나무판 위에 놓고 거볍게 두드려 섬유질이 풀어지게 하고는 물로 깨끗이 씻는다. 씻어낸 섬유를 채에 걸러서 물기를 뺀 다음 널어서 구덕구덕 말린다. 그리고 나서 로울러나 두 널판자 속에 끼워 압축해 물기를 말끔히 빼낸 다음 나무판 위에 널어 말리면 애벌 종이가 된다. 그런 다음 조개 껍데기로 문지르면 반들반들해지고 윤이 나며, 암염 가루를 약간 뿌리면 글씨를 쓰거나 그림그릴 때 앞뒤가 비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흰 종이는 눈을 자극하기 때문에 요즘은 주로 황지를 제조하는데, 그 목적은 판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서 복원이나 전승에 있으며, 전통 그림을 그리는 데도 쓰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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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돌아와서 안 일이지만, 최근 사마르칸드지에 관한 소문이 퍼지자 이곳에 ‘전통제지술’의 복원을 자처하는 몇몇 ‘제지소’가 등장해 호객행위를 한다고 한다. 이런 곳에는 예외없이 카펫 같은 물건을 걸어놓고 사줄 것을 종용한다. 얄팍한 상술이다. 이에 반해, 전통제지술의 계승자로 자부하는 자리프의 일거일동은 자못 진지하다.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새 공장의 시공을 며칠 앞둔 분주한 현장에서 한걸음으로 달려 온 그는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고는 기꺼이 제지술의 재현을 응낙했다. 그는 모든 공정을 일일이 설명하면서 손수 최선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 것이었다. 전통을 계승하는 장인다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새 문간 평상에는 푸짐한 접대상이 차려졌다. 홍차에 갖가지 과일과 당과를 곁들며 짧지만 의미있는 만남을 서로가 축하하고 고마워했다. 헤어지면서 일행은 이 공장에서 만든 두 가지 종이와 시료인 마른 뽕나무 섬유를 선물로 받았다. 자리프는 2006년 새해를 맞아 필자에게 보낸 연하장에서도 이러한 호의를 거듭 표했다. 이것이 문명을 씨줄과 날줄로 짜서 이어가는 소박한 사람들의 한 마음이 아니련가.

 

뽕나무에 직접 재현 장인 얼굴에 자부심이 한가득

이렇게 우리는 전통제지술 보유자의 직접적인 증언과 구체적인 제조공정의 재현을 통해 사마르칸드가 탈라스 전쟁으로 인해 제지술 서전의 관문이자 첫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초보적으로나마 확인하고 고증할 수가 있었다. 선현에 대한 불초를 일말이라도 씻었다는 안위는 받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아 있다. 제지공장 자리를 비롯한 유적 유물은 미처 알아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으니 말이다.

문명의 전승수단이며 문명발달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종이는 자고로 중요한 교류품의 하나로서 인류문명의 공영에 큰 기여를 했다. 105년 후한의 채륜이 낙양에서 종이를 발명(일설은 기원전 서한 시대라고 하나 신빙성이 약함)한 후 제지술은 2~3세기에 서역(오늘의 신장 일대)을 거쳐 탈라스 전쟁을 계기로 8세기 중엽 사마르칸드에 전해진다. 이어 8세기 말경부터 11세기 말경까지 바그다드, 카이로, 페스(모로코)를 비롯한 아랍-이슬람제국 각지에 급속하게 퍼진 후, 그곳을 발판으로 스페인과 프랑스(12세기 중엽), 이탈리아(13세기 중엽), 독일과 영국(14세기 초엽), 스위스(14세기 말엽), 스웨덴(16세기 중반), 미국(17세기 말엽) 등지로 전파되어 결국 종교개혁을 비롯한 유럽의 문예부흥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차제에 부언할 것은, 한국으로의 종이(‘채후지’) 전입 시기 문제다. 아직 정설은 없다. 2~3세기 낙랑이나 후한 사람들이 고구려와 백제에 흘러들어오면서 종이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4세기 중반 불교의 한반도 전입을 계기로 불서의 서사를 위해 종이가 반입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610년 고구려 고승 담징(曇徵)이 종이와 먹을 일본에 전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보아, 분명한 것은 그 이전에 우리 나라에서 이미 종이가 만들어졌으며, 또한 일본은 우리 나라를 통해 종이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마르칸드지의 탄생은 분명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 ‘역사적 사건’은 뜻했건 뜻하지 않았건 간에, 역사의 맥락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대의 수요와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서 비로소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러한 ‘역사적 사건’은 큰 파급효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종이의 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사마르칸드지가 바로 그러한 일례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사건창조적 인간’이라고 하며, 역사에서는 그러한 사람을 위인이나 영웅으로 대접한다. 이 한 점으로만 미루어도 고선지는 역사의 위인 반열에 당당히 오를 수가 있다.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문명교류 ‘끌차’ 중국인 이주민

아랍 등과 무역…오늘날 ‘화교’ 공동체 조상

제지술 전파경로에서도 보이듯 중국인(한인) 이주민들은 실크로드 역사에서 유목민족과 더불어 문명교류의 중요한 끌차구실을 했다. 이재에 밝고 생활력 강한 한인들은 역대 중국 왕조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기원전후부터 육해상 실크로드 곳곳에 이주민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중국의 첨단 문명을 아랍세계와 서구에 전파했다.

사서에 나오는 본격적인 한인 이주민 공동체의 시초는 4~7세기 중국 신장성 투르판 일대에 있었던 국씨 고창왕국을 들 수 있다. 기원전 이 지역에 진출한 한나라 주둔군의 자손과 유민들로 이뤄진 고창왕국은 당시 서역의 유일한 한족 소왕국으로 640년 당나라에 복속될 때까지 독특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적극적인 서역 경영을 펼친 당나라 이후에는 한인들이 중동의 아랍세계와 인도 등지로 대거 진출한다. 특히 751년 탈라스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당나라군 포로들은 사마르칸드는 물론 대식국(압바스 왕조)수도 바드다드 등지로 끌려가 정착촌을 형성했다.

탈라스 전쟁의 포로가 되어 아랍까지 끌려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온 두환의 아랍 기행기 <경행기>를 보면 화가인 번숙, 유차, 옷감 직조공인 낙환, 여례 등 다양한 분야의 당나라 장인들이 현지에 살면서 비단 직조, 금은 세공 기법 등을 전래해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제지술과 더불어 유럽의 근대 문명을 여는 단초가 됐던 화약술의 전파도 12~13세기 아라비아해를 왕래하며 중동에 거점을 마련했던 남송 상인들이 전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더욱이 몽골제국 시대 아랍권을 지배했던 일 칸국(1258~1411)은 군주들이 중원의 원나라 황제와 혈족 관계였기 때문에 궁정에서 숱한 중국인 관료와 기술자들을 데려왔다. 중국의 대표적 발명품인 인쇄술과 나침반, 화약 등은 이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아랍과 유럽에 전래된 것이다. 15~16세기 명나라 때는 정화의 남해 대원정에 힘입어 동남아시아의 자바, 말레이 반도 등에 엄청난 숫자의 한인들이 건너가 교역에 종사하며 정착했다. 오늘날 동남아 경제권을 쥐락펴락하는 ‘화교’공동체의 조상이 바로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