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_05

醉月 2010. 5. 7. 08:33
송나라 충신 양씨 가문의 ‘잔다르크’ 소설 ‘양가장연의’의 목계영
영웅 서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남자이다. 그래서인지 간혹 등장하는 여성 영웅은 보다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잔 다르크도 그런 여성 영웅 중 한 명이다. 잔 다르크는 백년전쟁(1338~1453·영불전쟁이라고도 함)이 한창이던 프랑스에서 태어나 신의 계시를 받고 남장을 한 채 열세에 놓여 있던 조국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군에 맞서 승리를 이끌어낸 전설적인 구국(救國)의 영웅이다. 그녀는 후에 포로로 붙잡혀 영국 측의 부당한 재판을 받고 화형을 당함으로써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가상의 인물이긴 하지만 이런 잔 다르크를 닮은 여성 구국 영웅이 중국에도 존재한다. 이미 디즈니 만화영화 ‘뮬란(Mulan)’을 통해 잘 알려진 화목란(花木蘭)도 여성 영웅으로 꼽을 수 있지만, 이번호에서 다루고자 하는 인물은 바로 목계영(穆桂英)이다. 그녀는 명대 웅대목(熊大木)의 소설 ‘북송지전(北宋志傳)’과 작가 미상의 소설 ‘양가장연의(楊家將演義)’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목계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양가장연의’의 줄거리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 일러스트 이철원
‘양가장’이야기는 양씨 가문의 사람들이 수대에 걸쳐 송나라를 위해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 애국적인 이야기로서,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중국인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영웅 서사시이다. 당(唐) 말의 실존 인물인 양업(楊業)을 필두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후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창조된 경우가 많아 소설 전체에 진실과 허구가 혼재되어 있다.

양씨 가문 장수들(楊家將)이 대대로 국가를 위해 충성을 바친 이야기는 이후 사실과 전설 및 허구가 융합되면서 희곡과 영상물로 수없이 재창조되었다. 양업과 양연소의 이야기는 북송시대부터 이미 널리 전파되었다. 송의 대문호 구양수(歐陽修)와 소철(蘇轍) 등도 양씨 가문의 공적을 칭송하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남송 설화(說話)에 ‘양령공(楊令公)’과 ‘오랑위승(五郞爲僧)’이란 제목이 있고, 원 잡극에는 ‘사금오사탁청풍부(謝金吾詐?淸風府)’ ‘오천탑맹량도골(吳天塔孟良盜骨)’ ‘팔대왕개조구충신(八大王開詔救忠臣)’ ‘양육랑사하삼관(楊六郞私下三關)’ 등의 희곡이 있다.

명대 중엽 이후에는 ‘양가장연의’와 ‘북송지전’이란 통속소설이 나왔다. 가정(嘉靖) 연간에 출판된 ‘양가장연의’의 원명은 ‘양가부세대충용통속연의지전(楊家府世代忠勇通俗演義志傳)’이다. ‘양가장연의’는 송·원 이래 널리 유전되던 각종 이야기와 전설을 조합하여 많은 인물을 창조하였다. 그 과정에서 허구의 인물인 양종보(楊宗保)가 탄생되었다. 양종보는 양연소의 아들로 대두되면서 송 인종(仁宗) 당시 하북(河北)과 섬서(陝西)의 변경을 지키며 서하의 난입을 방지하던 장수로 그려졌다. 아울러 목계영을 비롯한 경아공주(瓊娥公主), 사태군(            ), 12과부 등의 여성 영웅 형상도 만들어졌다. 작품에서는 이전까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여성을 영웅으로 묘사하면서 여성의 활약을 부각시켜 변화하는 사회상을 반영하였다. 민간에서는 ‘양씨 가문의 여성들이 남성보다 뛰어나다’는 말이 성행할 정도였다.

양씨 가문 며느리로 허구의 인물

목계영은 바로 이 ‘양씨 가문의 여장수(楊門女將)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양종보(楊宗保)의 아내이자 양업(楊業)의 손자며느리이다. 그녀는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민간에는 그녀에 관한 각종 이야기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목계영은 남편인 양종보보다 무공이 뛰어나 남편과의 결투에서 이긴 것을 계기로 그와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의 전략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그녀는 요(遼)의 소태후(蕭太后)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이를 대파하여 더 이상 국경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아울러 12과부와 함께 서역 원정을 나가 큰 승리를 거두고 서하와의 화의를 이끌어내었다. 또한 광서(廣西) 농지고(?智高)가 반란을 일으키자 남편인 양종보와 함께 출정하여 남부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송 조정은 이런 그녀의 전공을 기려 후에 혼천후(渾天侯)로 봉하였다.

1970년대 한국서 영화 개봉

목계영에 관한 연의와 평서(評書)와 연극은 ‘목계영전전(全傳)’ ‘목계영하산(下山)’ ‘목계영초친(招親)’ ‘목계영대파천문진(大破天門陣)’ 등 수백 종에 이른다. 1959년 중국 경극의 대가 메이란팡(梅蘭芳)은 중화인민공화국 10주년을 기념하여 ‘목계영괘수(掛帥)’를 편극하여 공연하기도 하였다.

▲ 목계영 인형
1960년에 만들어진 희곡영화 ‘양문여장’은 민간전설 ‘십이과부정서(十二寡婦征西)’와 양주극(揚州劇) ‘백세괘수(百歲掛帥)’를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다. 양업의 부인인 100세의 사태군이 손자인 양종보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온 집안이 슬픔에 잠긴다. 그런데 조정에서 서하의 군사력을 두려워하여 화친을 맺으려 하자 사태군이 목계영을 위시한 며느리들과 손자며느리, 그리고 증손자인 양문광 등을 이끌고 출정하여 서하의 군대를 대파한다는 줄거리이다. 1972년 홍콩에서 리칭 등이 출연해 ‘십사여영호(十四女英豪)’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으며 한국에는 1973년 추석 때 ‘14인의 여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돼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의 인간사다리 장면은 아직도 무협팬 사이에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양씨 가문에 관한 전설 가운데 ‘금사탄에서의 혈전(血戰金沙灘)’ 이야기는 가장 비장하고 참혹한 부분이다. 요의 천경왕(天慶王)이 송 태종에게 금사탄에서의 회담을 제안하였다. 조정에서는 요의 함정을 의심하여 평소 태종과 닮은 외모의 양연평(楊延平·양업의 첫째 아들로서 역사 기록과는 다르다. 나머지 형제의 이름들도 마찬가지다)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형제들은 형의 안위를 걱정하여 함께 가기로 결의한다. 문무백관이 이런 우애에 감동하지만 유독 반인미만은 양씨 가문을 몰살시킬 절호의 기회로 여긴다. 예상했던 대로 천경왕은 송 태종(실은 양연평)을 인질로 삼고 불평등조약을 강요한다. 이 전투에서 4명의 형제가 전사하고 2명의 형제가 포로가 되었으며, 1명이 출가함으로써 양가의 장수들 대부분이 최후를 맞이하였다.

원대엔 楊家사당도 지어져

▲ 목계영을 소재로 다룬 경극.
산서(山西)성 대현(代縣)에 있는 안문관(雁門關) 아래에는 양가사당(楊家祠堂)으로 유명한 녹제간(鹿蹄澗) 마을이 있다. 1000여명의 마을 인구 중 절반이 모두 양가의 후예들이다. 양가 사당이 처음 세워진 때는 원대이다. 양업이 죽은 뒤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후예들은 사당의 이름을 ‘양충무사(楊忠武祠)’로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양가사당’으로 일컫는다. 사당 앞에는 사슴 발굽이 찍힌 기이한 바위, 즉 녹제석(鹿蹄石)이 놓여 있다. 양가의 후예가 사냥을 나갔다가 꽃사슴을 발견하고 화살을 쏘아 맞혔는데, 그 사슴이 화살을 맞은 채 지금의 이 마을 근처에 와서 땅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에 그 자리를 파보니 화살 맞은 꽃사슴의 그림이 그려진 바위가 있고 그곳에 사슴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바위를 사당에 모셨고, 마을 이름도 그에 맞게 바꾸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마을제사를 지내며 양가의 장수(楊家將)들에 관한 연극을 공연한다. 그런데 유독 양가의 장수들이 몰살한 내용을 담은 ‘금사탄’ 연극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하는 바로는, 언젠가 ‘금사탄’을 공연하려 했을 때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바람이 몰아쳐 공연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비록 민간 전설에 불과하지만 양가의 후예들이 선조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이다.

지난 3월에는 2010년 가장 기대되는 중국어권 영화의 하나인 신작 ‘양문여장(楊門女將)’의 크랭크인과 관련하여 한바탕 파문이 일기도 하였다. 즉 홍콩의 골든 하베스트(Golden Harvest·嘉禾)영화사가 일본의 아벡스(Avex)와 합작하여 ‘양문여장’을 제작하는데, 여장수들로 당대의 기라성 같은 중국여배우들인 공리, 장쯔이, 저우쉰(周迅), 탕웨이(湯唯), 양자경(楊紫瓊) 등을 캐스팅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무인 곽원갑(?元甲)’을 감독한 홍콩 감독 우인태(于仁泰)가 메가폰을 잡고 2000만달러를 들여 5월에 촬영에 들어가는 ‘양문여장’이 말 그대로 5명의 여배우를 모두 캐스팅한다면 그것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

장가계 인근에 ‘양가계’공원

참고로 한국인이 자주 찾는 중국의 관광지 가운데 장가계(張家界) 국립공원이 있다. 이곳은 한(漢)나라 때 장량(張良)이 유방의 견제를 피해 은거하여 살았던 지역이라고 하여 ‘장가계’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가계(楊家界) 국립 삼림공원이 있다. 이곳은 바로 양가장 이야기의 기원이 되는 양업의 후손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뜻으로 명명되어진 지역으로 호남(湖南)성 장가계와 인접하여 있다.

이처럼 목계영을 비롯하여 ‘양가장’과 ‘양문여장’의 이야기는 중국 문화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되는 중요한 문화콘텐츠임에 분명하다.

양가장 3대 宋 초기 실존인물인 양업-양연소-양문광 양업은 송 초기에 실존했던 명장으로 20대에 태원(太原)을 근거지로 삼았던 북한(北漢·951~979) 정권에 몸담으면서 크게 활약했다. 송 태조 조광윤이 양업의 능력을 높이 사, 북한의 왕 유계원(劉繼元)을 사로잡고 양업에게 투항을 권유하자 울분을 토하며 송에 귀의하였다. 후에 양업은 반인미(潘仁美)와 함께 산서(山西)를 근거지로 삼고 거란(契丹)을 방어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는 주요 길목에 6개의 요새를 건설하여 거란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송 태종 태평흥국 5년(980) 3월에 거란의 10만 대군이 안문(雁門)으로 공격해오자, 양업은 기습작전을 감행해 거란군을 대파하였고 ‘양무적(楊無敵)’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거란군은 송을 침공할 수 없었다.

▲ 목계영 영화포스터
양업이 혁혁한 전공을 세우자 주위에서 시기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그러나 태종은 양업을 폄하하는 익명의 편지를 양업에게 전해줌으로써 그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옹희(雍熙) 3년(986) 1월, 태종은 거란과의 국경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세 방향으로의 북벌을 지시하였다. 반인미와 양업은 서로(西路)를 맡아 북벌을 시작하였다. 동로(東路)군과 중로(中路)군이 연이어 패하였고, 기세가 오른 거란군은 대규모 병력을 모아 서로군의 수복지를 향해 맹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양업은 당시의 상황을 파악한 뒤 거란군 점령지에서 탈출한 피란민들의 안전한 이동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로군의 책임자였던 반인미와 군감독관이었던 왕선(王先)은 양업에게 군사를 이끌고 정면 대응할 것을 명하였다. 양업은 필패를 예감하면서도 명령에 따라 출정하면서 마지막으로 거란군을 계곡으로 유인할 테니 양쪽에 궁수들을 배치하여 추격해오는 적에게 응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양업이 이끈 군대는 예상대로 중과부적으로 두 차례의 전투에서 패하였고, 양업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거란군을 계곡으로 유인하였지만, 왕선과 반인미는 이미 군대를 이끌고 계곡을 빠져 나간 뒤였다. 결국 양업은 지원도 받지 못하고 포위된 채 고군분투하다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식사를 거부하고 버티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역사 기록에는 양업에게 연옥(延玉), 연랑(延朗), 연포(延浦), 연훈(延訓), 연환(延環), 연귀(延貴), 연빈(延彬) 등 7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양육랑(楊六郞)이라고 부르는 연랑은 후에 연소(延昭)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양업의 영향으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북벌 당시 아버지와 함께 이름을 떨친 북송의 명장으로서 거란군의 연이은 침입으로 북송의 방어가 힘들어진 상황 속에서도 성 방비를 튼튼히 하여 거란군이 그의 성을 우회할 정도였다. 양업이 죽은 뒤에도 연소는 20여 년 동안 북방을 수비하며 수차례 거란군을 격퇴하였다.

양씨 가문의 3대는 양문광(楊文廣)인데 그는 선대와 필적할 만한 공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는 북송이 이미 요와 화친을 맺었고 서하(西夏)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방어 위주의 소극적인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요에 빼앗긴 땅을 수복하고 북방을 평정하고픈 큰 뜻을 품었지만 송 왕조의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 그 뜻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