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俗離). 마티재 험한 고갯길을 굽이굽이 넘어서는 동안 탈속의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속리산 골바람이 초여름의 푸른 잎새들을 팔랑팔랑 흔들면서 남아있는 세속의 미진까지 세탁해낸다. 이런 희귀한 청량감과 환희심으로 ‘호서제일가람’인 미륵도량 법주사에 든다.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 청산의 수정봉 아래 법주사 조실 혜정(慧淨·75) 스님이 있다. 선(禪)·교(敎)·율(律)의 삼학에 두루 뛰어나다는 조계종단의 원로스님이다.
법주사 경내 금동미륵대불과 마애불이 새겨진 큰 바위 사이에 스님이 40여년 째 주석하는 사리각이 있다. 고려 공민왕 때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사리탑을 지키는 사리각은 은사인 금오스님이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날 때부터 붉은 단풍나무 한그루, 꽃 떨군 자리에 연둣빛 잎새를 피워낸 목련나무 여덟그루와 벚나무 두그루가 어깨 겯듯 한줄로 늘어서서 사리각에 맑은 그늘을 드리운다. 사리각을 두른 담장에는 담쟁이 넝쿨이 무성한 잎을 키우고 있다. 스님이 심은 담쟁이 한뿌리가 40년 동안 생사를 거듭하며 번져나가 담을 가득 덮었다고 한다.
스님은 마침 점심공양을 끝내고 돌아온 참이었다. 날마다 젊은스님들과 똑같이 대중공양하고 좌복에 앉아 화두를 든다고 한다. 평생 한결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정진, 11시 점심공양, 6시 저녁예불, 9시에 잠자리에 드는 나날을 “고정판”이라고 했다.
사리각의 스님 처소는 장식 하나 없이 깔끔하고 적요했다. 은은한 한지를 바른 작은 방에는 벽에 걸린 가사 한벌과 좌복 하나, 탁상시계를 올려놓은 서안이 있을 뿐이었다. 단정한 방은 깨끗한 모시 승복을 입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노스님의 모습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금오 스님은 평생을 참선으로 일관하신 근대 우리나라 선맥의 준봉이셨어요. ‘중은 곧 참선’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요. 글이나 염불도 못하게 했고, 주지 맡는 것은 더더구나 땡초로 여겼어요.”
스님은 은사 스님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근세 선맥을 되살린 경허-만공의 맥을 이은 금오 태전(1896∼1968) 스님은 근래 법주사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겼다. 혜정스님은 수덕사에서 만난 금오스님이 법주사에서 열반할 때까지 평생을 모셨고, 이제는 법주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스승의 뒤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스승의 뜻과 달리 1970년대 중반 법주사 주지를 지냈고, 조계종 총무원의 국장과 부장에 이어 총무원장직까지 맡았다. 그러나 소임을 놓으면 곧바로 해인사 봉암사 수덕사 불국사 등 선방으로 돌아가 다시 화두를 들었다. 총무원장을 그만두고는 월출산 도갑사의 폐사지인 상견성암 자리에 방 한칸, 부엌 한칸의 토굴을 짓고 혼자서 3년을 용맹정진했다. 충남 부여 금지암의 다 쓰러져가는 암자에서 밥짓고 나무하고 빨래하며 1년을 지내기도 했다.
“수도자는 생사해탈의 대자유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출가한 사람들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 한번의 인생을 총투자한 셈이지요. 그러다 실패하면 본전도 못건지는 거지. 허허허.”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났습니다. 도대체 부처님은 누구입니까.
“불교는 종교 가운데 유일하게 무신론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음을 닦아 ‘나’의 존재 원리, 존재 본질을 깨달으면 누구나 인격의 최고 완성자인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셨지요. 이런 말씀을 하신 분은 인류 역사상 부처님뿐이죠. 이것은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력을 가진 의식의 전환입니다. 부처님은 독보적인 대혁명가요, 대웅변가요, 대영웅입니다.”
-닦는 그 ‘마음’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실체는 육체와 마음이라는 이중구조로 이루어졌습니다. 육신은 호흡 한번에 소멸되지만 마음은 영원불변입니다. 몸은 임시 천막 같은 거고 마음이 ‘참 나’, 자기 자신이지요. 이 물건은 형상도 없고, 유무의 개념도 초월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마음 속에 우주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으니, 그 마음자리를 딱 붙잡아서 확인을 해야 윤회를 벗어나고 최고의 자유경지를 체득하게 됩니다. 깨친 그 마음이 나 자신이고, 내가 곧 삼라만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교가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겠는데요.
“어디 부처님이 해탈을 얻었다고 우리를 버렸습니까.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이 땅을 지상정토로 만들려고 대원력을 냈지요.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합니다. 깨치기 위한 공부는 자기를 위한 것이고, 깨친 다음에는 남을 위해 이타행을 하는 것. 그러나 모든 결과는 스스로 경험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즘 스님들은 옛날의 고승들보다 수행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불교계 원로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복이 있어서 근세의 선지식들을 거의 다 만났습니다. 어른 세대들에게 푹푹 풍겨지던 중냄새, 마음 속으로 팍 엎드려지는 존경심, 그런 것이 사라지고 있지요. 생활이 풍족하게 변한 것도 원인이겠지요. 부분적으로 전문가는 많아졌어도, 옛날처럼 전체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도인은 만나기 어렵지요. 세상이 바뀌고 정보가 많아지면서 요즘은 대통령도 옛날보다 무게감이 떨어지지요. 후학들이 우리를 볼 때도 비슷할 것입니다.”
-수행의 치열함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참선 하면 3개월 안거로 정형화된 측면이 있지요. 옛날 스님들은 하루가 저물면 오늘도 깨치지 못하고 허송세월 했다고 통곡했다고 하잖아요. 내가 젊어서 선방에 다닐 때는 자는 척하다가 몰래 일어나 참선을 하면 우르르 따라 일어나 모두가 정진하는 진풍경이 흔했어요. 탁마적인 법거량도 중요하지요. 그런 수행풍토를 회복할 때가 됐습니다. 수행자가 일생을 일반인처럼 산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번 부처님 오신날 조계사에 대선후보들이 빠짐없이 모였습니다. 이번 대통령선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크게 보면 종교든, 정치든, 경제든 모든 분야가 인간세계를 위해서, 인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지요.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각각 자기 길을 가는 겁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너무 포부가 작아요. 그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 목적이죠. 국민을 위해서 어떤 이상세계를 만들겠다는 철학이 없어요. 아집과 이기, 당리당략을 떠나서 태양이 세상 전체를 비추듯이, 바닷물이 모든 대양으로 고루고루 흘러가듯이 넓은 안목과 먼 형안을 가져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종교의 가르침을 받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떻습니까.
“종교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겁니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는 너무 광신적이지요. 종교인구가 많으니까 정치인들이 그쪽에 온갖 추파를 던지는 것도 추한 모습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했는데 정치인이 자기 종교를 배신하고 표만 쫓아다녀요. 그런 사람들이 뭘 하겠어요. 대통령감으로서는 결점이죠. 같은 종교를 믿으면 표를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정신나간 거지.”
-생활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희망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세상은 모두 다 하나의 완전세계로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 인간도 완전한 인간인 부처로 가는 과정에 있어요. 사바세계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말로 인토(忍土)를 말합니다. 참는 땅이라는 거죠. 참으면서 살면 살아갈 만한 세상이란 뜻이지요. 인간은 지옥도 아니고, 극락도 아닌 중간, 육도(六道) 중에 있어요. 노력하면 극락에 갈 수도 있고, 타락하면 지옥에 가게 되지요. 노력하면 성현 부처가 될 수 있고, 노력하지 않으면 무명 중생으로 떠돌게 됩니다. 꾸준히 노력해서 완전한 곳으로 쉬지 않고 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생에 업을 줄이고, 안되면 다음 생에 또 복을 짓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것, 싫은 것을 구분해 편을 가르는데요.
“미운 사람 미워하고, 좋은 사람 좋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도 만 좌중이 앉아있는 것처럼 하라는 말이 있지요. 되도록 자제하고 미운 것과 좋은 것 자체를 화두로 돌려서 그 뿌리를 캐보는 겁니다. 별 것 아니지요. 선과 악도 동전 앞뒤 같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선악의 상대성을 초월하지 못하고 호오에 끄달리면 한 순간 남의 정신에 죽는 겁니다.”
-스님은 그런 경계들을 완전히 넘어섰나요.
“아직 멀었습니다.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누구나 오십보백보, 미완성 부처입니다. 서울이 목표인데 청주갔다고 해서 얼마나 더 갔구, 수원 빨리 갔다구 해서 다 간 것은 아니잖아요. 깨달음은 결과이기 때문에 ‘돈오’라구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것이 있나요.
“바람같이 왔다가 구름같이 헤어지고, 티끌만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는 것이 수행자의 모습입니다. 다시 죽으면 전체로 들어가는 거니까, 깨닫기 전에 살았다고 상을 내보이는 게 다 허상입니다.”
노승은 사리각 담쟁이 잎새에 둘러싸인 쪽대문 앞에서 “미륵부처가 올 때 연락할 테니 그때 법주사를 다시 찾아라”고 말하면서 껄껄 웃었다. 스님은 시침을 뚝 떼고 푸른하늘 흰구름을 올려다본다. 속리산 녹음방초는 초록을 뽐내고, 수정교 아래 맑은 물은 맑게 흘러간다. 묵언패를 단 노승이 천천히 수정교를 건너고 있었다.
▲혜정스님은
1933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우연히 월간 ‘불교’를 읽고 마곡사 대원암으로 출가했다. 1953년 예산 수덕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0년대 중반 법주사 주지를 맡아 불교교리, 불교사, 각 경전,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영어, 심리학, 논리학, 비교종교학 등의 교과과정을 개설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법주사 강원은 지금도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1962~1993년 1~8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72년 중앙종회 부의장, 77년 총무원장을 지냈다. 현재 조계종 원로위원.
법주사 사리각을 지키고 있는 혜정스님. “옛날 선지식들에게는수행자의 냄새가 푹푹 풍겼다”면서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법주사(보은)
날 때부터 붉은 단풍나무 한그루, 꽃 떨군 자리에 연둣빛 잎새를 피워낸 목련나무 여덟그루와 벚나무 두그루가 어깨 겯듯 한줄로 늘어서서 사리각에 맑은 그늘을 드리운다. 사리각을 두른 담장에는 담쟁이 넝쿨이 무성한 잎을 키우고 있다. 스님이 심은 담쟁이 한뿌리가 40년 동안 생사를 거듭하며 번져나가 담을 가득 덮었다고 한다.
스님은 마침 점심공양을 끝내고 돌아온 참이었다. 날마다 젊은스님들과 똑같이 대중공양하고 좌복에 앉아 화두를 든다고 한다. 평생 한결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정진, 11시 점심공양, 6시 저녁예불, 9시에 잠자리에 드는 나날을 “고정판”이라고 했다.
사리각의 스님 처소는 장식 하나 없이 깔끔하고 적요했다. 은은한 한지를 바른 작은 방에는 벽에 걸린 가사 한벌과 좌복 하나, 탁상시계를 올려놓은 서안이 있을 뿐이었다. 단정한 방은 깨끗한 모시 승복을 입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노스님의 모습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금오 스님은 평생을 참선으로 일관하신 근대 우리나라 선맥의 준봉이셨어요. ‘중은 곧 참선’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요. 글이나 염불도 못하게 했고, 주지 맡는 것은 더더구나 땡초로 여겼어요.”
스님은 은사 스님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근세 선맥을 되살린 경허-만공의 맥을 이은 금오 태전(1896∼1968) 스님은 근래 법주사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겼다. 혜정스님은 수덕사에서 만난 금오스님이 법주사에서 열반할 때까지 평생을 모셨고, 이제는 법주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스승의 뒤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스승의 뜻과 달리 1970년대 중반 법주사 주지를 지냈고, 조계종 총무원의 국장과 부장에 이어 총무원장직까지 맡았다. 그러나 소임을 놓으면 곧바로 해인사 봉암사 수덕사 불국사 등 선방으로 돌아가 다시 화두를 들었다. 총무원장을 그만두고는 월출산 도갑사의 폐사지인 상견성암 자리에 방 한칸, 부엌 한칸의 토굴을 짓고 혼자서 3년을 용맹정진했다. 충남 부여 금지암의 다 쓰러져가는 암자에서 밥짓고 나무하고 빨래하며 1년을 지내기도 했다.
“수도자는 생사해탈의 대자유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출가한 사람들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 한번의 인생을 총투자한 셈이지요. 그러다 실패하면 본전도 못건지는 거지. 허허허.”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났습니다. 도대체 부처님은 누구입니까.
“불교는 종교 가운데 유일하게 무신론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음을 닦아 ‘나’의 존재 원리, 존재 본질을 깨달으면 누구나 인격의 최고 완성자인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셨지요. 이런 말씀을 하신 분은 인류 역사상 부처님뿐이죠. 이것은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력을 가진 의식의 전환입니다. 부처님은 독보적인 대혁명가요, 대웅변가요, 대영웅입니다.”
-닦는 그 ‘마음’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실체는 육체와 마음이라는 이중구조로 이루어졌습니다. 육신은 호흡 한번에 소멸되지만 마음은 영원불변입니다. 몸은 임시 천막 같은 거고 마음이 ‘참 나’, 자기 자신이지요. 이 물건은 형상도 없고, 유무의 개념도 초월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마음 속에 우주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으니, 그 마음자리를 딱 붙잡아서 확인을 해야 윤회를 벗어나고 최고의 자유경지를 체득하게 됩니다. 깨친 그 마음이 나 자신이고, 내가 곧 삼라만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교가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겠는데요.
“어디 부처님이 해탈을 얻었다고 우리를 버렸습니까.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이 땅을 지상정토로 만들려고 대원력을 냈지요.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합니다. 깨치기 위한 공부는 자기를 위한 것이고, 깨친 다음에는 남을 위해 이타행을 하는 것. 그러나 모든 결과는 스스로 경험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즘 스님들은 옛날의 고승들보다 수행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불교계 원로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복이 있어서 근세의 선지식들을 거의 다 만났습니다. 어른 세대들에게 푹푹 풍겨지던 중냄새, 마음 속으로 팍 엎드려지는 존경심, 그런 것이 사라지고 있지요. 생활이 풍족하게 변한 것도 원인이겠지요. 부분적으로 전문가는 많아졌어도, 옛날처럼 전체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도인은 만나기 어렵지요. 세상이 바뀌고 정보가 많아지면서 요즘은 대통령도 옛날보다 무게감이 떨어지지요. 후학들이 우리를 볼 때도 비슷할 것입니다.”
-수행의 치열함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참선 하면 3개월 안거로 정형화된 측면이 있지요. 옛날 스님들은 하루가 저물면 오늘도 깨치지 못하고 허송세월 했다고 통곡했다고 하잖아요. 내가 젊어서 선방에 다닐 때는 자는 척하다가 몰래 일어나 참선을 하면 우르르 따라 일어나 모두가 정진하는 진풍경이 흔했어요. 탁마적인 법거량도 중요하지요. 그런 수행풍토를 회복할 때가 됐습니다. 수행자가 일생을 일반인처럼 산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번 부처님 오신날 조계사에 대선후보들이 빠짐없이 모였습니다. 이번 대통령선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크게 보면 종교든, 정치든, 경제든 모든 분야가 인간세계를 위해서, 인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지요.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각각 자기 길을 가는 겁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너무 포부가 작아요. 그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 목적이죠. 국민을 위해서 어떤 이상세계를 만들겠다는 철학이 없어요. 아집과 이기, 당리당략을 떠나서 태양이 세상 전체를 비추듯이, 바닷물이 모든 대양으로 고루고루 흘러가듯이 넓은 안목과 먼 형안을 가져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종교의 가르침을 받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떻습니까.
“종교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겁니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는 너무 광신적이지요. 종교인구가 많으니까 정치인들이 그쪽에 온갖 추파를 던지는 것도 추한 모습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했는데 정치인이 자기 종교를 배신하고 표만 쫓아다녀요. 그런 사람들이 뭘 하겠어요. 대통령감으로서는 결점이죠. 같은 종교를 믿으면 표를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정신나간 거지.”
-생활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희망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세상은 모두 다 하나의 완전세계로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 인간도 완전한 인간인 부처로 가는 과정에 있어요. 사바세계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말로 인토(忍土)를 말합니다. 참는 땅이라는 거죠. 참으면서 살면 살아갈 만한 세상이란 뜻이지요. 인간은 지옥도 아니고, 극락도 아닌 중간, 육도(六道) 중에 있어요. 노력하면 극락에 갈 수도 있고, 타락하면 지옥에 가게 되지요. 노력하면 성현 부처가 될 수 있고, 노력하지 않으면 무명 중생으로 떠돌게 됩니다. 꾸준히 노력해서 완전한 곳으로 쉬지 않고 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생에 업을 줄이고, 안되면 다음 생에 또 복을 짓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것, 싫은 것을 구분해 편을 가르는데요.
“미운 사람 미워하고, 좋은 사람 좋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도 만 좌중이 앉아있는 것처럼 하라는 말이 있지요. 되도록 자제하고 미운 것과 좋은 것 자체를 화두로 돌려서 그 뿌리를 캐보는 겁니다. 별 것 아니지요. 선과 악도 동전 앞뒤 같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선악의 상대성을 초월하지 못하고 호오에 끄달리면 한 순간 남의 정신에 죽는 겁니다.”
-스님은 그런 경계들을 완전히 넘어섰나요.
“아직 멀었습니다.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누구나 오십보백보, 미완성 부처입니다. 서울이 목표인데 청주갔다고 해서 얼마나 더 갔구, 수원 빨리 갔다구 해서 다 간 것은 아니잖아요. 깨달음은 결과이기 때문에 ‘돈오’라구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것이 있나요.
“바람같이 왔다가 구름같이 헤어지고, 티끌만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는 것이 수행자의 모습입니다. 다시 죽으면 전체로 들어가는 거니까, 깨닫기 전에 살았다고 상을 내보이는 게 다 허상입니다.”
노승은 사리각 담쟁이 잎새에 둘러싸인 쪽대문 앞에서 “미륵부처가 올 때 연락할 테니 그때 법주사를 다시 찾아라”고 말하면서 껄껄 웃었다. 스님은 시침을 뚝 떼고 푸른하늘 흰구름을 올려다본다. 속리산 녹음방초는 초록을 뽐내고, 수정교 아래 맑은 물은 맑게 흘러간다. 묵언패를 단 노승이 천천히 수정교를 건너고 있었다.
▲혜정스님은
1933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우연히 월간 ‘불교’를 읽고 마곡사 대원암으로 출가했다. 1953년 예산 수덕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0년대 중반 법주사 주지를 맡아 불교교리, 불교사, 각 경전,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영어, 심리학, 논리학, 비교종교학 등의 교과과정을 개설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법주사 강원은 지금도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1962~1993년 1~8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72년 중앙종회 부의장, 77년 총무원장을 지냈다. 현재 조계종 원로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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