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유인경_100년을 엿보다

醉月 2010. 5. 2. 11:57

[100년을 엿보다](1)토정비결

힘겨운 서민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

올해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다. 국치 이후 이 땅에선 식민, 분단, 군부독재, 산업화, 민주화의 고비고비가 이어졌다. 그 사이 우리네 생활상도 몰라보게 바뀌었다. 지난 100년간 필부필부들의 삶과 추억을 만든 풍속과 유행, 애용품을 통해 일상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1982년 토정비결 좌판을 벌여놓은 할아버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송구영신(送舊迎新). 옛것을 보냈으니, 새것을 맞아들일 일이다. 그러나 새것을 맞는 것은 설레는 만큼 걱정스럽고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정초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곤 했다. 올 한 해 우환은 없을까, 손재수는 없을까, 한 해의 신수(身數·몸의 운수)를 점쳤다. 점집에 가면 평생의 사주팔자까지 다 봐주지만 복채도 싸고 점괘도 알기 쉬운 토정비결이 신수풀이엔 그만이다.

토정비결은 신수를 점치는 책이다. 조선 중기 학자이자 기인으로 알려진 토정(土亭) 이지함(1517~78)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토정은 유학은 물론 역학·수학·천문·지리에도 능했다. 그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토정을 찾아와 굶지는 않겠는지, 병치레는 안 하겠는지, 한 해 신수를 물었다. 관직에 있을 때 민생 돌보기에 힘썼던 토정인지라 ‘이를 어엿비 여겨’ 무지렁이 백성도 쉽게 신수를 볼 수 있는 비결을 지었는데 그게 토정비결이다. 토정의 저작이 아니라 민간에 나돌던 복서(卜書)에 토정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설도 있다.

생년·월·일·시, 즉 사주(四柱)를 따져 치는 주역점과 달리 토정비결은 생년·월·일 삼주(三柱)로 신수를 본다. 따라서 주역의 64괘에 비해 토정비결은 16괘가 적은 48괘다. 토정비결의 괘는 생년과 생월, 생일(물론 음력)에 각각 숫자 하나가 주어져 3자리 숫자로 만들어진다. 한 해 신수와 다달이 초·중·하순으로 나눠 넉자 한시로 괘를 풀이했다. 넉자 한시에 담긴 뜻을 한글로 쉽게 풀어놓은 게 시중에 나도는 토정비결이다. 책마다 괘 풀이가 조금씩 다른 건 이 때문이다. 토정비결은 생년·월·일만 알면 누구든 쉽게 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들을 위해 씌여진 것이 토정비결이다.

토정비결은 산업화로 인해 농촌사회가 붕괴되어 ‘무작정 상경’이 사회문제가 됐던 1960~70년대 인기를 끌었다. 글자도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은 길거리 좌판 토정비결을 보러갔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잔돈푼에 신수를 봐줬다. 누르죽죽한 표지에 한지로 속지를 한 토정비결은 흡사 경전이나 고서처럼 보여 저절로 권위가 생겼다. 하도 들추다 보니 너덜너덜해진 책을 펴면 괘마다 붓그림이 엉성하게 그려져 있고 신수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신수풀이가 끝나면 누런 종이에 인쇄된 토정비결 신수풀이를 한 장 찢어서 줬다. 사람들은 그걸 잘 보관해 뒀다가 1년 내내 일이 잘 안풀린다 싶으면 찾아보고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60년대 작은 출판사와 인쇄소가 늘어나며 인쇄본 토정비결이 흔해졌다. 월간 여성지들도 다투어 가계부와 함께 토정비결을 신년호 부록으로 내놨다. 세밑이 되면 여성지 부록이든, 인쇄본이든 토정비결을 사서 가족의 새해 신수를 봐주는 일이 세시풍속처럼 됐다.

토정비결의 묘미는 뭐니뭐니 해도 알듯 모를 듯한 신수풀이다. ‘운수가 대길하니 도처에 춘풍이라’ ‘용이 구슬을 얻으니 조화가 무궁하다’ ‘삼월 동풍에 제비가 집을 짓는다’ ‘동쪽과 남쪽에서 귀인이 돕는다’. 상징과 비유로 이뤄진 신수풀이는 한 줄 시와 같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몰라도 어쨌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기는 하다. 나쁜 운세도 비슷하다. ‘가야 할 길이 구만리인데 서산에 해가 지는구나’ 같은 비유적 표현이 주를 이룬다. 더욱 좋은 것은 운세가 나쁘면 바로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처방을 내려준다는 점이다. ‘여색을 가까이 마라, 구설이 있다’ 라든가 ‘망령되이 행동마라, 재물을 잃는다’ 같이 대개 근신하라는 처방이다.

‘도처에 재물이 있다’는 말에 희망을 품고, ‘허욕을 부리면 재물을 잃는다’는 말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새해 첫날이 된다면 지하의 토정도 빙그레 웃음지을 것이다.

 

[100년을 엿보다](2)우유

ㆍ어린이가 먹어야 할 ‘완전식품 대명사’
함박눈이 소복이 내린 한겨울 아침이면 대문 앞에 배달된 우유를 가지러 나가기가 정말 싫었다. 일단 날이 추워 움직이기 싫은 데다 만지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우유병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우유를 들고 집안에 들어오면 아침식사 준비로 한창 바쁜 엄마 뒤로 가서 우유를 데워먹겠다고 난리법석을 부렸다. 중탕할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인 뒤, 그 물에 우유병을 데우면 끝이었지만 이따금 병이 깨져 난감할 때도 있었다.

1972년 한 우유 배달원이 자전거에 실은 짐 상자에서 배달할 우유를 꺼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1970~8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갖고 있을 추억이다. 그땐 마트에 가서 우유를 사는 것이 아니라 집집마다 보급소에서 우유를 배달시켜 먹었다. 학교에서도 급식으로 신청해 마셨다. 그 시절 우유는 어린이들이 먹고 자라야 할 완전식품의 대명사였다. 소화가 안되는데도 억지로 먹은 건 우유를 먹으면 키가 크고 뼈가 튼튼해진다고 해서였다. 어쩌다 딸기우유나 초코우유가 급식으로 나오면 진짜 딸기나 초콜릿을 먹듯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이 땅에서 음식으로서의 우유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양반가에서 소젖을 넣은 타락죽을 보양식으로 먹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우유는 사람이 아니라 농경시대 노동력을 제공하던 소의 먹거리였다.

우유가 사람이 먹는 식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기 이후다. 본격적인 낙농업은 일제시대 시작됐다. 메이지유신 후 서구를 따라잡겠다며 유제품 소비를 권장하던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우유를 마시던 일본인들의 식습관이 일본인들의 한반도 이주와 함께 유입되면서다. 일본인들이 몰려살던 충무로나 명동과 가까운 서울역 일대, 철도업에 종사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청량리 일대에는 목장이 들어섰다. 이런 수요에 맞춰 최초로 우유를 시판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청량리 농유조합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15명이 합작·설립한 조합은 각자 목장에서 짜낸 우유를 커다란 가마솥에 모아 끓인 후 냉각시켜 병에 담아 배달했다.

우유의 대량생산은 1937년 경성우유동업조합(현 서울우유 전신)이 설립되면서 이뤄졌다. 조합은 서울 정동(현 정동극장 자리)에 우유공장을 짓고 우유를 독점 생산했다. 서대문과 동대문, 남대문을 지나 우마차와 자전거 등에 실린 원유가 매일 정동으로 수송됐다. 당시 우유는 1홉(180㎖)짜리 유리병에 담겨 판매됐다. 해방과 6·25를 거친 후 60년대 정부의 낙농장려정책에 따라 젖소가 다량 수입되고 고온살균법 등 우유처리기술이 수입되면서 우유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서울우유 외에 남양유업, 매일유업, 빙그레 등 현존하는 유가공업체들이 모두 이 무렵 설립됐고 분유, 연유, 버터, 치즈, 아이스크림 등 유가공품의 대량생산도 시작됐다.

향과 맛을 더한 가공우유는 유단백을 소화시키는 효소가 부족한 한국인들의 우유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개발됐다. 서울우유가 68년 초코우유를 시작으로 커피우유, 딸기우유 등을 내놨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공우유의 베스트셀러는 바로 ‘바나나맛 우유’이다. 74년 처음 시판된 바나나맛 우유는 당시 어린이들의 ‘로망’이던 바나나를 연상시켜 마케팅에 성공했다. 출시 36년이 된 지금도 국내 가공우유 시장에서 부동의 1위이며 국내 편의점 판매상품 중 매출액이 가장 높다. 단지우유, 배불뚝이 우유 등의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독특한 용기 디자인 역시 인기의 비결이었다. 이 디자인에도 한국 근대사의 한 단면이 새겨져 있다. 70년대 산업화 바람으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이들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넉넉한 전통 항아리의 선에서 용기 모양을 착안했다고 한다.

67년 13원(180㎖)이던 흰 우유가 이제는 한 팩(200㎖)에 700원. 새벽녘이면 골목마다 자전거에 우유를 싣고 배달 다니던 고학생들은 사라지고 대형 마트의 우유 진열대에는 갖은 성분을 더하고 지방을 뺀 우유들이 손님을 기다린다. ‘우유 = 완전식품’의 신화를 깨뜨리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지만, 목욕탕에서 마시던 달콤한 바나나맛 우유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100년을 엿보다](3)전화

ㆍ1970년대 한대 가격이 서울 집값과 맞먹어

“보고 싶어요, 엄마. 하늘나라에서도 제 목소리 들리세요?”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처음으로 집 전화가 개통돼 온동네가 떠들썩하던 날, 어머니(김혜자)는 가족들이 잠든 밤에 홀로 전화기를 붙들고 돌아가신 친정엄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전했다. 새 학년이 되면 담임선생님이 “집에 전화기 있는 사람, 텔레비전 있는 사람…손들어봐요”란 가정환경조사를 할 때마다 번쩍 손드는 학생들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이장희는 히트곡 ‘그건 너’에서 헤어진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라고 노래했다. 신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불과 30여년 전의 풍경이다.

1970년대 대중의 소통수단이던 공중전화. 공중전화 부스에 사람들이 줄지어선 모습은 보기 흔한 풍경이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대한민국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6년. 이듬해 고종은 자신의 침소와 정부 각 부처를 잇는 전화를 설치했다. 당시 전화는 ‘텔레폰’을 음역한 ‘덕률풍(德律風)’ 혹은 말 전하는 기계란 의미의 ‘전어기(傳語機)’라 불렸다. 관료들은 전화가 울리면 큰절을 네 번 하고 무릎 꿇고 받아야 했다. 고종이 승하한 뒤엔 순종이 고종의 능에 전화를 설치하고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통해 곡을 올렸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1955년의 전화 가입자는 3만9000명. 인구 1000명당 2대 꼴로 고관이 아니면 집에 전화기를 설치할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70년대 정부가 전화 매매를 제한할 당시 전화 한 대 가격은 260만원. 당시 서울시내 50평 규모 집값이 230만원 안팎이었다니 장난감처럼 초등학생도 갖고 있고 ‘공짜폰’이 가득한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가격이다.

과거의 전화는 개인이나 한 가정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마을에 유일하게 전화기가 놓인 이장댁에서 “용식엄니, 서울 큰아들 전화왔슈. 빨리 와유”란 소식을 전하면 한달 만에 아들과 통화하던 엄마는 “전화비 무섭다. 편지하마”라고 아쉬워하며 끊었다. 단골다방의 전화번호를 연락처로 삼아 원고청탁이나 배역을 따내던 문인, 연기자들에겐 다방 전화가 생명줄이었다.

2010년, 전화의 정체성은 뭘까. 이젠 잠시라도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과 초조감이 엄습해 금단현상을 느낀다. 전화가 안 오거나 보낸 문자에 응답이 없으면 배신감까지 든다. 오지에 가도 한동안은 벨소리나 진동음의 환청에 시달린다. 사랑을 전하던 전화로 연인과 작별하고, 직장의 해고 통지조차 문자메시지로 받는 세상이다. 한편에선 기러기아빠가 지구 반대편의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고 무뚝뚝한 시아버지도 “아버님 싸랑해용”이란 며느리의 애교문자에 미소짓는다. 9·11 테러의 순간, 희생자들은 휴대전화로 “사랑해”란 마지막 말을 가족에게 남겼다.

요즘 청취자들이 문자로 사연을 보내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선 “6535님은…”이라며 청취자를 휴대전화 번호로 분류한다. 현대인들에게 ‘바코드’가 하나씩 달린 셈이다. 그 바코드를 통해 우린 타인의 생각·행동·감정을 이해한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이런 전화의 위력을 ‘신흥종교’로 규정한다. 애초 전화의 목적은 ‘소통’이지만, 한국에선 권력·오락의 기능을 거쳐 ‘신흥종교’로 탄생했다고 말한다.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사용자의 중독 현상을 낳으면서 주객이 전도된 숭배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새로운 동력인 ‘셀룰러 이코노미’에 홀로 저항해 독야청청 산다는 게 가능할까. 인구 100명 중 95명이 휴대전화를 가진 대한민국에서 신흥종교 신도가 되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는 이들은 경이를 넘어 연구대상 수준이다. 외국 멋쟁이들이 한국산 휴대전화를 명품처럼 든 모습은 자랑스럽지만, 이 새로운 신흥종교에 우리의 영혼마저 잠식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그나저나 차세대 스마트폰은 어떤 제품을 선택해야 편리하면서도 ‘럭셔리해’ 보일까….
[100년을 엿보다](4) 달력

ㆍ농촌선 구경조차 힘들어… 선물로 인기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기일(忌日)이나 생일은 음력으로 쇴다. 여성들은 시집 가면 시댁 식구의 음력 생일과 기일을 물려받아 챙겨야 했다. 하지만 양력으로 생활하다보니 음력은 잊고 살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특히 맏며느리는 달력에서 음력을 찾아 빨간 동그라미를 쳐놓거나 ‘할아버님 제삿날’ ‘아버님 생신’이라고 적어놓고서야 새해를 맞았다.

달력 장수들은 길거리에 달력을 전시해 놓고 팔았다. 1986년 11월 서울 거리에서 사람들이 87년도 달력을 고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달력은 70년대 말까지도 흔한 물건이 아니어서 새해 선물 노릇을 톡톡히 했다. 번듯한 회사라도 다녀야 회사 달력을 타오지, 그렇지 않으면 은행이나 업소에서 주는 달력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하루살이 서민들에게 거래 은행과 업소가 있을 리 만무하니 달력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에서는 구경조차 힘든 게 달력이어서 설 귀성객들은 부모님 선물로 달력을 돌돌 말아 싸가지고 갔다.

눈치 빠른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은 연말이면 가가호호 지역구 유권자 가정에 달력을 뿌렸다. 경비를 줄이려 반지(A2용지 크기) 한 장에 1년 365일을 빼곡히 채워놓은, 말하자면 연력(年曆)이었다. 얼굴과 이름을 알리는 게 주된 목적인지라 근엄한 정치인의 사진이 한가운데를 차지했고 날짜들은 주변에 깨알처럼 박혀있었다. 달력을 구하지 못한 서민들은 그것도 감지덕지, 벽에 붙여놓고 일년 열두달 보기 싫든 좋든 정치인들과 대면해야 했다. 관공서에 들르면 꼭 마주치던 대통령 얼굴처럼.

달력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쇄소 달력’을 샀다. 인쇄소에서 대량으로 찍어 업소용으로 납품하고 남은 것들은 달력장수 손에 넘겨져 길거리로 나왔다. 달력장수들은 여성모델 사진이 실린 것들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했다. 사지 않는 이들에게도 좋은 눈요깃감이었다. 저작권료가 문제였겠지만 인쇄소 달력엔 여성이나 풍경을 찍은 사진, 한국화가 주로 쓰였다. 60년대 영화계를 주름잡은 문희·남정임·윤정희씨 같은 유명 배우가 나온 달력이 인기 있었다. 비키니 차림의 달력이 한복 차림 달력과 섞여 거리에 걸리게 된 것은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다.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일력(日曆)은 더 귀했다. 16절지(A4용지) 크기의 흰 습자지에 하루를 담은 일력은, 음력은 물론 갑자·을축 간지까지 큰 글씨로 적고 빨간 태극무늬로 국경일을 표시했다. 날짜가 주먹보다 커 노인들이 좋아했다. 노인들은 보들보들한 습자지로 만들어진-뻣뻣한 종이를 쓰면 두꺼워지니까-일력을 매일 떼어놨다 봉초(담뱃잎을 썰어 놓은 것으로 담뱃대에 넣어 피운다) 마는 데 썼다. 화장지가 귀하디 귀한 때라 화장지로 쓰려고 가족들이 다투어 떼어갔다. 그 때문에 일력의 날짜는 하루 이틀 앞서가기 일쑤였다.

천체 운행의 기록인 달력은 절기와 재해를 예측하고 대비하게 한다는 점에서 지배자들의 권력이자 의무였다. 사실(史實) 여부를 떠나, TV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과 미실도 일식을 예측하는 역법을 가지고 권력을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 중국의 새 황제가 자신의 연호를 쓰고 서양의 7월(July)과 8월(August)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름을 따온 것도 달력과 권력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우리나라 고유의 역법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조 세종 24년(1442년)의 일이다. 이전에는 중국의 역법을 따랐는데 위도와 경도가 중국과 달라 오차가 많이 났다. 세종은 정인지, 이순지 등 학자를 동원해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 <칠정산(七政算) 내·외편>을 만들었다. 칠정은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으로 요즘의 요일에 해당한다. 달력에 서기와 나란히 표기됐던 ‘단기’는 고려 말 우왕 때 처음 사용됐으나 잘 쓰이지 않다가 조선 말 단군왕검을 기리는 대종교가 부활시켜 사용했다. 광복 후 정부의 공식 연호로 지정돼 공문서에 쓰이다가 5·16 쿠데타 이후 1962년 다시 서기로 바뀌었다. 단기는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하니 올해는 단기 4343년이다.
[100년을 엿보다](5)싱크대
ㆍ주부에게 삶의 여유를 찾아준 ‘부엌의 혁명’
그 시절이었을 것이다. 코흘리개들은 할 일 없이 엄마의 치맛자락을 맴돌 듯 부엌 문턱을 수시로 오고갔다. 군것질은 물론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던 시절, 부엌이라고 특별히 맛난 게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부뚜막에 올라앉았다가 빗자루로 맞거나, 한밤중 몰래 들어가 제사 전날 기름진 음식을 훔쳐먹다 혼쭐이 난 기억…. 부엌은 아이들에게 추억의 장소였다.

1970년대 여성들의 ‘로망’이었던 싱크대가 놓인 부엌 풍경.| 에넥스 제공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에게 부엌은 징글맞은 곳이었다. 고된 시집살이가 대물림되는 혹독한 현장이었을 뿐 아니라 빈 쌀독과 마주하며 가난을 견뎌내야 하는 모진 곳이기도 했다. 더욱 서러운 것은 구부정한 허리와 관절로 힘겹게 부엌 문턱을 오르내릴 쯤이면 여자로서의 인생이 막바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옛 부엌 바닥은 마당보다도 움푹 팼다. 방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의 높이가 낮았기 때문이다. 대가족을 위한 무거운 밥상이나 설거지통을 들고 넘나들기는 고역이었다. 부엌에서 찬거리를 마련하는 일이나 설거지 등 모든 일은 잔뜩 쭈그린 자세라야 가능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부엌에선 정리되지 않은 반찬 그릇과 냄비, 솥, 찬장, 온갖 잡동사니가 공생했다. 생활이 좀 나은 집은 일본산 곤로를 일찍 들여놨다. 나무로 불을 지핀 시골 부엌의 천장과 벽에는 검은 그을음이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그런데 40여년 전 부엌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시작했을 때의 감격에 비교한다면 지나칠까. 입식 부엌이 보급되면서 싱크대가 등장했다. 여자들은 두 다리를 쭉 펴고 일하게 됐다. 싱크대가 보급되기 전에는 타일로 외장한 시멘트 개수대가 가장 세련된 것이었다. 개수대가 ‘씽크’로 불린 스테인리스로 바뀌면서 싱크대는 부엌가구의 대명사가 됐다.

국내 처음의 싱크대는 71년 나온 오리표(현재 에넥스) 싱크다. 부부애를 상징하는 오리 그림은 주부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물 위에서 노니는 오리처럼 부엌에서 편히 물일을 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당시 오리표 싱크대는 주부들의 ‘로망’이었다. 싱크대를 들여놓는 날이면 여자들은 새 집을 장만하듯 기뻐했고 친구들을 불러 자랑하기 바빴다. 오리표가 큰 인기를 끌자 ‘백곰표’ ‘원앙표’ ‘백조표’ ‘거북표’ 등 후발업체가 생겨났다. 당시 삼륜 용달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골목마다 싱크대 제조업자가 생겨나 350개가 난립했다. 덕분에 74년 무렵의 취업희망자들에게 항공사, 은행에 이어 오리표 싱크대 회사는 선망의 직장이 됐다. 80년대 초 아파트 건설 붐이 일면서 싱크대는 품귀현상까지 빚었다.

싱크대의 원조는 어디일까. 부엌 살림살이를 넣어두는 수납장과 붙박이 싱크대가 기본인 현대 부엌의 효시는 1926년 독일에서 선보인 ‘프랑크푸르트 부엌’이다. 일체형 부엌으로 건축가 그레테 쉬터-리호츠키가 만들었다. 프랑크푸르트 부엌은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일어난 예술운동 ‘바우하우스’의 산물이다. 전후 독일의 예술가들이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단순한 디자인’을 내세운 덕분에 여성들은 부엌 노동에서 삶의 여유를 찾게 됐다. 부엌이 방, 마루와 동등하게 집안에 위치하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가능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현대의 부엌 풍경은 어떨까. 온 가족의 가장 친근한 공간인 동시에 최첨단 과학기술 전시장이 되어가고 있다. 외출시 원격조정으로 전기밥솥의 시작 버튼을 누르고, 마트에서 실시간으로 냉장고 안의 식품 목록을 파악해 찬거리를 구입한다. 지능형 싱크대는 주인의 체구를 센서로 감지해 스스로 높낮이를 조정한다.

옛날 어머니들은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을 극진히 모셨다. 매일 새벽 일어나 중발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건강을 조왕신에게 빌었다. 현대 부엌에서 쫓겨난 우리의 조왕신들은 지금 어디에 가 계시려나.
[100년을 엿보다](6)미제 아줌마
ㆍ중산층 맹목적 선망 ‘움직이는 면세점’
‘아줌마’만 떴다 하면 동네엔 아연 활기가 돌았다. 주부들은 아줌마가 들고 온 커다란 가방 주위에 모여앉아 ‘별세계’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짭조름한 스팸과 리즈 크래커, 알록달록한 참스 캔디(먹고 난 캔디 깡통은 아버지의 재떨이로 쓰였다), 오렌지주스 가루 탱은 아이들을 유혹했고 엄마는 아이보리 비누와 레블론 샴푸, 맥스팩터 파운데이션, 손 튼 데 즉효던 바셀린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아내들은 남편을 위한 ‘당근’도 쇼핑 리스트에서 빼놓지 않았다. 애프터셰이브 ‘올드 스파이스’와 맥스웰 커피, 커피크림 ‘카네이션 커피메이트’ 등이었다. 이른바 ‘미제(美製) 아줌마’들은 움직이는 면세점이나 마찬가지였다.

1968년 남대문시장 내에서 외제상품을 사고팔던 도깨비시장 풍경. | 경향신문 자료사진미군 부대 구내매점(PX)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떼어다 팔던 미제 아줌마들이 ‘활약’한 시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다. 당시 국산품의 질은 조악했던 반면 산업화와 함께 형성되기 시작한 중산층의 소비욕구는 높았기 때문이다. 미국을 자유와 풍요의 상징으로 바라보던 맹목적·정서적 선망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음은 물론이다.

미제 아줌마들은 정부의 단속에 민감했다. 아줌마들은 대략 한 달에 한 번꼴로 출현했지만, 가끔은 몇달씩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속이 심할 때 ‘경거망동’했다간 가방을 통째로 압수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골목 안 집집마다 ‘비누가 떨어졌네, 바를 크림이 없네, 커피가 먹고 싶네…’ 등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83년부터 수입 자유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미제 아줌마들은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미제 사랑’마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90년대 초반에도 이런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한국의 외제상품 암시장인 소위 도깨비시장이 번창하고 있어 미국 기업들의 대한 상품판매 확대가 벽에 부딪히고 있다고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 19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인들은 스팸 등 미제 물건을 사용하는 것을 신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매일경제 1991년 7월20일)

남대문 ‘도깨비시장’은 70년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는데, 당시 미군 부대나 외국에서 배로 몰래 외제품을 들여와 팔았기 때문에 아침·점심·저녁 때마다 물건가격이 달랐다고 한다. 도깨비시장이라는 표현의 유래에 대해선 가격이 이처럼 시시때때로 바뀌어서 붙었다는 설과, 이상하고 신기한 물건이 많아서 붙었다는 설 등으로 엇갈린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Made in USA)’의 인기는 80년대 중반 이후 서서히 저물어간다. 국산제품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품질이 향상된 데다,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일본과 중국에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미국인들조차 삼성 휴대전화를 쓰고, 도요타나 혼다 자동차를 몬다. 한국의 명품족도 미국산 대신 프랑스산 샤넬 슈트와 루이 뷔통 가방, 이탈리아산 페라가모 구두에 열광한다.

이제 한국인들은 미제 사랑을 접은 것일까. 눈에 보이는 부분에선 그럴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부분에선 애정이 더 짙어졌다. 미국 영화, 미국 노래, 미국 드라마는 상한가다. 박찬호·박세리 선수 덕분에 미국 프로야구와 골프에까지 눈을 떴다. 그리고 이 모두의 바닥에 흐르는 건 ‘미국말’과 미국 교육·제도에 대한 짝사랑이다. 같은 영어라도 영국이나 호주·뉴질랜드 영어는 대접받지 못하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쓰이는 북미 영어만 우대받는다. 대학에서도 유럽이나 일본 유학파는 입지가 좁아지고 미국 유학파는 대를 이어가며 주류를 놓지 않는다. 정부는 미국 스스로 잘못된 것이라고 고백한 의료제도를 뒤늦게 흉내내겠다고 한다. 우리는 여전히 ‘미제 아줌마’의 보따리를 침 흘리며 바라보던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00년을 엿보다](7) 연애편지
ㆍ느림과 설레임, 그래서 기다려지는 러브레터
책장을 정리하다 낡은 책에서 발견한 편지 한 장.
“왜 내 사랑이 네게 짐이 되는지 모르겠다. 너의 냉정함에 난 수취인 거부의 남루한 소포 꾸러미로 전락했다.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난 너의 의미가 되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는데….”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대학 선배가 보낸 연애편지다. 당시엔 시큰둥해서 무심코 읽던 책에 꽂아두었나 보다. 하지만 연애편지는커녕 손으로 직접 쓴 연하장 하나 못 받는 지금, 그 고색창연함조차 애틋하다.

한 젊은 여성이 정성스레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누구나 한 번쯤 연애편지를 쓰고 받았다. 휴대전화도, e메일도, 메신저도 없던 시절엔 편지가 사랑의 전달수단이었다. 유치환의 ‘행복’과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등 유명한 연애시를 인용하고, 편지지만 수십 장씩 버린 뒤 새벽녘에야 겨우 완성시키지만 아침에 읽어보면 낯 뜨거워 찢어버리곤 했다. e메일과 문자메시지는 내 사랑을 광속도로 상대에게 전달하지만 연애편지는 우체통과 집배원의 손길을 통해 하염없이 느리게 전해진다. 그런 느림과 기다림 덕분에 연애편지는 사랑을 더 숙성시키고 상상 속에서 더 긴 여운을 남긴다.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 그토록 혼신을 다해 쓴 글이 있을까.

연령 제한도, 직업 구분도 없는 게 연애편지였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린다 김 사건’ 때 “보고 싶은 심정 이상으로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드오” “언젠가 너의 붉은색이 감도는 눈망울과 그 가장자리를 적셔내리는 눈물을 보고 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중략) 샌타바버라 바닷가에서 아침을 함께한 그 추억을 음미하며…”라는 뜨거운 연서를 쓴 이들은 열혈청년이 아니라 백발이 성성한 장관이나 국회의원이었다.

연애편지에 무슨 문장력과 메타포가 필요할까. 불문학자 김화영이 들려주는 연애편지 사연은 진실의 힘을 증명한다. 1960년대, 군대에서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김화영에게 한 피교육자가 편지를 읽어달라며 꺼냈다. 그의 아내가 백지 위에 손바닥을 댄 채 손가락의 윤곽을 따라 연필로 서툴게 줄을 그은 그림, 그 아래에 서툰 글씨로 딱 한 줄의 글이 쓰인 편지였다. “저의 손이어요. 만져 주어요.”

아무리 현란한 미사여구와 고상한 철학으로 포장해도 연애편지는 X레이 사진처럼 우리의 본질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장 폴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유명한 시몬 보봐르가 미국작가 넬슨 앨그린에게 보낸 편지. “오세요 내 사랑, 와서 저를 당신의 힘세고 부드러우며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안아줘요.”

진심을 담은 글 모두는 연애편지가 아닐까.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모든 언어는 당신이란 절대적 타자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다. 내 언어는 타자성을 긍정하는 언어, 타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마치 연애편지를 쓰듯 섬세하고 부드럽게 다가가면서도 어떤 알 수 없는 수줍음으로 인해 다시 몸을 돌리고마는 그런 언어다.”

114에 문의전화만 걸어도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란 말을 들을 만큼 곳곳에 사랑이 넘쳐나는 시대에 왜 우리 가슴은 더 삭막한가. 일상의 안락과 출세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면서 우리는 연애편지 쓰기를 잊어버렸다. 다시 색깔 고운 종이를 꺼내 연애편지를 쓰면 두꺼워진 피부 속의 수줍고 순수한 속살이 드러날까. “사랑한다고 한 줄 쓰고 나니 아무 말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다자이 오사무 풍의 연애편지를 받는 게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세상이다.
[100년을 엿보다](8) 장
ㆍ‘약장수극장’에 시골아이들은 잔칫날
장날이다. 새벽, 아버지와 어머니 두런거리는 소리. “송아지 아침 잘 멕였구?” 어머니가 벌써 쇠죽을 쑤었는지 아랫목이 슬슬 달아오른다. 서울로 공부하러 간 큰형에게 보내려고 송아지를 팔러나갈 참이다. 어미소를 팔아야 돈이 아귀가 맞겠지만, 마을에 일소 있는 집이 몇 안 돼 마을일꾼으로 일할 어미소는 함부로 내다 팔 수도 없다. 아쉬운 대로 송아지를 팔아 급한 돈을 끄기로 했다. 어머니도 내다 팔 것을 챙기느라 부스럭거리고, 진즉 잠에서 깬 아이는 이불 속에서 송아지처럼 눈만 껌뻑였다.

장터 바깥쪽 공터에 개설된 무료극장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 전국상인연합회 홈페이지읍면(邑面)을 지나 리(里)를 거쳐 마을이름에 ‘마을’ ‘말’ ‘뜰’ ‘뜸’이 붙어 있는 곳은 대개 10여 가구가 야트막한 산에 둘러싸여 살았다. 다랑이논 물꼬 보고 아침 먹고, 콩밭·고추밭 김 매다 점심, 해 떨어지면 얼른 저녁 챙겨먹고 석유 아끼려 호롱불 끄고 누우면 하루가 갔다. 혼례나 회갑 같이 잔치가 벌어지거나 초상 같은 애사라도 생겨야 마을이 잠시 들썩일 뿐, 그나마 잔치 뒤끝의 흥도 채 하루 지나지 않아 먼지처럼 시렁에 내려앉는 생활이었다. 그날이 그날인 시골사람들은 특별한 일도 없이 장날을 기다렸다.

더구나 장날은 돈이 귀한 시골마을에서는 돈을 사오는 날이다. 쌀을 돈 주고 사오는 것을 ‘쌀 팔아 온다’고 하거나 쌀을 파는 것을 ‘돈 사온다’고 하는 언어 습관이 남아 있는 것은 그만큼 돈이 귀했기 때문이다. 옛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노천명의 시 ‘장날’에도 ‘대추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먹고사는 것이야 길러서 먹으면 된다지만 아이들 월사금을 내거나 생활용품을 장만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추곡 수매나 해야 돈을 만져볼 수 있었으니 장날은 시골사람들이 소소한 푼돈을 마련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장은 장시, 장, 전(廛), 시장으로 불렸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정기 시장인 장시는 주로 지방에 많았다. 시골의 농산품, 특산품과 도시에서 생산된 공산품의 교역이 이뤄졌다. 특별한 생산품이 없는 마을에서는 장작을 지게로 져 내오기도 했고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오기도 했다. 5일장, 10일장, 보름장, 3일장이 있었는데 5일마다 열리는 5일장이 가장 많아 ‘5일장’이 정기시장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장은 대개 읍·면 소재지 천변이나 공터에서 열렸는데 마땅한 곳이 없으면 상설시장 길가에 시골 아낙들이 모여 앉아 채소 보따리를 끌러놓고 팔았다.

장날은 시골 아이들에겐 잔칫날이나 다름없었다. 장에 가면 신기한 볼거리들이 많았다. 재수가 좋으면 튀밥장수 할아버지에게 튀밥 한 줌 얻어먹을 수 있었고, 술이 얼근한 아버지에게 동전 한 닢 얻어 눈깔사탕을 사먹을 수도 있었다. 그런 탓에 ‘뻥이오’ 소리가 나면 아이들은 튀밥장수 할아버지 주위로 몰려들었다. 더 재수가 좋으면 무료극장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극장이라고 현수막은 달아놨지만 약간의 재담과 노래를 보여주고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 극장’이지만, 그게 어딘가. ‘애들은 가라’로 시작되는 ‘몸보신제’ 장수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앞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5일장은 일제시대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상설시장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조선시대에도 광화문과 남대문, 동대문에 이르는 거리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이라는 상설시장이 있었다. 1914년 일제가 ‘시장규칙’을 공포해 공설시장을 곳곳에 세웠다. 5일장도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상설점포를 열면서 점차 상설시장으로 변모했다.

장이 파할 때가 가까워졌다. 아버지는 송아지 판 것이 못내 아쉬운지 장터 국밥집에서 이웃마을 동무들과 막걸리를 연방 들이켰다. 어머니는 팔리지 않은 채소와 곡물을 거두어 ‘비린내 거리’와 바꿀 수 있는지 장터를 두리번거리며 다녔다. 공산품은 힘들겠지만 그날 팔지 못하면 상하는 농수산품은 파는 사람끼리 말만 잘 맞추면 곧잘 물물교환을 할 수 있었다. 아이는 어머니가 사 준 양말 한 켤레를 손에 꼭 쥔 채, 팔려간 송아지와 서울 간 큰형과 장에 따라 나오느라 해놓지 못한 숙제를 걱정했다
 
[100년을 엿보다](9) 커피
ㆍ신식 멋쟁이들이 즐겨 마시던 개화의 상징
1970년대 동서식품이 ‘맥스웰하우스’라는 상표로 인스턴트커피를 우리나라에서 직접 생산하기 전까지 커피는 귀하디 귀한 물건이었다. 엄마들은 커피를 식구들 모르게 꼭꼭 숨겨 놨다가 귀한 손님이 오실 때만 한 잔씩 타 드렸다. 손님이 떠나고 나면 아이들은 커피잔 바닥에 남아 있는 커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거나 커피잔을 코에다 갖다 대고 아직 가시지 않은 커피 냄새를 맡았다. 예쁜 잔에 다소곳이 담겨 우아하고 그윽하게 향기를 피워올리는 커피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무용가이자 1920~30년대에 활약했던 대표적인 모던 걸 최승희씨가 서울의 한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 당시 커피는 개화와 문명의 상징으로 신여성들의 기호품으로 인기를 끌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커피가 없는 현대인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침이면 커피를 마셔야 눈이 뜨이고, 하루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면서 의식을 치르듯 커피를 마신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무언가 마무리하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처럼 커피는 현대 한국인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전래된 시기는 19세기 후반, 개화와 근대의 바람을 타고 커피향도 함께 실려왔다. 서양 물을 먹은 신식 멋쟁이들이 홀짝이는 커피는 말 그대로 개화와 근대의 상징이었다. 최초의 한국인 커피 애호가는 고종 황제였다.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처음 커피 맛을 본 고종은 환궁을 한 뒤에도 커피를 즐겼다. 덕수궁 안에 서양식 건물 ‘정관헌’을 지어놓고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신 마니아였다. 소설가 김탁환은 커피에 빠진 고종 황제를 모티브로 삼아 <노서아 가비>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커피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해방과 함께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다. 커피를 잘 알지 못하던 보통사람들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갈색 가루’를 접하게 됐다. 가루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손으로 찍어 맛보기도 하고, 가마솥 가득 물을 붓고 끓여 대접으로 마시다가 구토와 설사, 불면증으로 애를 먹기도 했다. 이 때문에 커피는 일부 사람들에게 뱃속의 회를 녹이는 회충약, 잠을 쫓아주는 ‘공부약’으로 음용되기도 했다. 아무 맛도 없이 쓰기만 한 커피에 얼굴을 찡그리던 사람들도 설탕과 크림(프림)을 넣은 커피에는 얼굴을 활짝 폈다. 아니, 열광했다. 이 무렵 다방에서는 커피를 주문하는 손님들에게 설탕과 프림을 어떻게 넣느냐고 묻는 게 일이었다.

1976년 커피와 크림 그리고 설탕을 한국인의 입맛에 알맞게 배합한 1회용 인스턴트커피 ‘커피믹스’가 나왔다. 커피믹스의 등장은 커피 대중화를 이끈 혁명이었다. 커피를 마실 형편이 안 되는 가난한 사람들도 손님이 오면 대접한다며, 한 봉지에 45원 하는 커피믹스를 한두 개 사곤 했다. 커피믹스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커피 입맛을 통일했다.

우리나라의 커피 문화는 80년대 중반 이후 전환점을 맞았다. 수입과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원두커피의 맛과 미국식 테이크아웃 커피 문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99년 미국식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 ‘스타벅스’가 처음으로 서울 이화여대 앞에 문을 열었다.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은 전통적 ‘다방’을 밀어내고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원두를 직접 볶아 손으로 커피를 내리는 ‘로스터리 카페’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4000원짜리 점심을 먹은 뒤 후식으로 5000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것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되었다.

‘다방 커피’에 익숙한 중·장년층엔 커피전문점의 복잡한 메뉴판이 낯설기만 하다. 노래방에 가서 신곡을 따라부르지 못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하지만 커피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마시는 이의 이성과 영혼을 조용히 어루만지는 그것 말이다.
[100년을 엿보다](10) 식모
ㆍ빈궁한 시골 언니들의 희망 품은 서울살이
순희 언니. <지붕 뚫고 하이킥>이란 시트콤을 보다 언니 생각이 났어요. 그 드라마엔 빚 때문에 아빠를 따라 산골로 들어가 살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세경이란 예쁜 소녀가 나와요. 뻥튀기 아저씨도 ‘곡물팽창업자’로 불리는 요즘, 식모란 원색적 단어가 약간 거북스러웠지만 ‘밥엄마’란 원뜻은 그리 나쁜 건 아닌 것 같아요.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식모살이하는 세경이 빨래하는 모습.내가 처음 기억하는 세상 풍경은 언니의 등에 업혀서 본 모습이에요. 언니 등에 업혀 본 동네 사람들, 골목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언니는 6남매의 밥상 차리기만도 벅찼지만 늘 막내인 날 업고 엄마를 도와 청소와 빨래도 했죠. 진공청소기도 세탁기도 없던 시절, 언니는 한겨울에 찬물에 걸레를 빨면서도 구시렁대지 않고 노래를 흥얼거렸어요.

외가 친척이 우리집에 소개해준 언니는 그때 열다섯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겨울에 보따리 하나 들고 우리집에 왔죠. 몇 푼인지 모르지만 빈약한 게 틀림없던 언니의 월급은 고스란히 시골 집에 보내져 언니네 오빠의 등록금과 아버지의 약값으로 쓰인다고 했어요. 교복 입은 오빠 사진을 보여주며 “울 오빠 대학도 내가 보내줄란다”던 언니의 표정엔 자부심이 가득했죠. 그 자긍심으로 언니는 고단하고 남루한 일상을 견뎌낼 수 있었을 거예요. 2년 후에 언니가 쌀집 아저씨 소개로 버스 차장이 되겠다고 우리 집을 떠날 때 얼마나 슬펐던지요. 바쁜 엄마 대신에 밥도 먹여주고, 헝겊인형도 만들어주고, 언제나 포근한 등을 빌려주던 언니의 부재는 한동안 어린 가슴에 상처로 남았습니다.

언니 이후로도 영자, 복순, 봉란 등등 숱한 식모 언니들이 우리집에 머물다 갔습니다. 중국집 배달아저씨와 바람나서 엄마 반지를 훔쳐 달아났던 언니, 대학생과 펜팔하며 우리 언니 사진을 보내 그 대학생이 우리집에 찾아오게 만들었던 언니, 엄마의 중매로 결혼해 쌍둥이를 낳은 언니…. 이름과 얼굴은 달라도 언니들의 환경은 비슷했어요.

1960~70년대 빈궁한 시골에서 입 하나 덜려고, 혹은 단돈 몇 푼이라도 벌어보려고 언니들은 희망을 품고 서울로 왔죠. 어떤 언니는 공장에 가고, 또 다른 언니들은 친지나 직업소개소를 통해 식모란 직업을 구했습니다. 당시엔 식모 월급이 많지 않아 웬만한 중산층은 식모를 두었고, 새로 지은 아파트 부엌 옆의 자그마한 방을 ‘식모 방’이라 부를 만큼 식모는 또다른 가족이었어요. 코미디언 구봉서가 주연을 맡은 <남자 식모>란 영화도 있을 만큼 친근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언니들만 있는 건 아니었죠. 아줌마들도 많았어요. ‘쉼터’도 없던 시절에 남편의 구타를 피해, 혹은 생활고를 해결하려고 아이 엄마들도 시간제로 오는 파출부가 아닌 입주 식모살이를 했습니다. 남편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두 아들을 친정에 맡기고 우리 집에서 식모로 있던 산청댁은 폭행 후유증인 두통 때문에 매일 ‘명랑’이란 약을 먹었어요. 음식 솜씨가 좋아 식혜며 별식을 자주 만들어주던 산청댁의 큰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그때 하필 우리 오빠가 대학 시험에 떨어져 우리 가족은 마음껏 축하도 못해줬지요.

이젠 대한민국 국적의 식모들은 찾기가 어렵답니다. 한국 언니와 아줌마들은 주유소나 편의점 아르바이트, 노래방 도우미라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습니다. 대신 중국에서 온 ‘이모’들이 밥을 챙겨주고 아이에게 조금 낯선 발음으로 동화책을 읽어줍니다.

언니, 얼마 전 환갑을 앞둔 사촌언니가 “식모살이 하러 미국 간다”고 하더군요. 유학간 딸이 손자를 낳아 산후조리와 살림을 도와주러 가는 친정 엄마, 시골에 남편을 두고 홀로 서울 와서 바쁜 며느리 대신 손자를 돌보는 시어머니의 삶을 ‘21세기판 식모살이’라고 한답니다. 순희 언니, 나도 식모살이 할 날이 다가옵니다. 직장 때문에 소홀했던 딸에게 항상 “네 자식은 내가 키워줄게”라고 약속했거든요. 내가 언니처럼 훌륭한 밥엄마가 될 자신은 없어, 벌써 걱정이네요.
[그의 작은 박물관](5)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이재인 관장
ㆍ문청 시절 매혹…이광수 인장 등 1000여과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이재인 관장(65)은 무작정 상경한 문학청년이었다. 머슴살이를 피하기 위해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세 번의 가출을 시도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소설가 오영수의 막내 제자가 된다. 문학공부를 하기 위해 스승의 집을 드나들던 그는 서재에서 희귀한 인장을 발견했다. 거북이가 정교하게 조각된 인장. 하도 신기해 갈 때마다 들여다보고 쓰다듬어 보곤 했다. 그런 그를 보고 스승이 “그게 그렇게 좋으면 가져가라”고 했다. 이 관장이 지금도 애지중지 여기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인장이다.

이재인 관장그가 인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6살 문학소년 때부터다. 헌 책방에 들렀다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을 구입했다. 소월이 스승인 김안서(김억)에게 보낸 시집이었다. 소월은 책 속표지에 스승에게 드리는 글을 쓴 뒤 서명을 하고 낙관을 찍었다. 소월의 낙관은 더없이 보기 좋은 예술품이었다. 그때 이 관장은 낙관, 곧 인장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고 한다.

대원군 인장을 얻은 그는 문인 인장 수집에 나섰다. 자신이 베스트셀러 장편소설 「악어새」의 작가였던 까닭에 문인으로부터 인장을 얻기가 쉬웠다. 문단 선후배들이 자신의 인장은 물론 소장하고 있던 옛 문인들의 인장까지 선뜻 내줬다. 이광수, 염상섭, 김동인, 현진건, 박종화, 이효석, 김유정, 이상, 노천명, 오영수, 서정주, 김동리,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한국 근·현대 문학사를 주름잡은 문인들의 인장을 그렇게 모았다. 재중 소설가 고 김학철의 인장을 얻기 위해 그의 생전 옌볜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이 관장은 자신이 모은 인장 대부분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거저 얻은 것’이라고 했다. 덴마크 왕실 문장은 구구절절 편지를 써서 보내 얻었다. 그렇게 모은 인장이 1000여과에 이른다. 그가 2000년에 개관한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의 입장료를 받지 않는 연유다. 단지 문인들이 박물관에 오면 그 문인들의 인장을 ‘입장료’ 대신 받기도 한다. 요즘에는 인장 대신 문인들이 사용하던 필통이나 머그컵을 입장료 대신 받아 모아 전시해 놨다.

이 관장이 최근 모으기 시작한 독특한 인장은 문인들의 얼굴을 새긴 인장. 해마다 ‘문학과 전각과의 만남’이란 행사를 여는데 그때그때 주요 문인들의 얼굴을 새긴 인장을 만들어 모으고 있다. 월북작가들의 얼굴을 새긴 인장도 있는데 30여년 교직생활 동안 만났던 제자들 가운데 전각가들이 있어 틈틈이 찾아와 하나 둘 새겨주고 간다고 한다. 교직생활을 하며 모은 종잣돈과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개관한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의 또 다른 이름은 충남문학관이다. 해마다 문인들을 초청해 낭독회를 연다. 지역민들을 위해 ‘우리동네 책읽기, 글쓰기 사랑방’ 강좌와 마을축제를 마련하기도 한다. 경기대 교수로 재직 중인 이 관장은 대학 강의 때문에 박물관 문을 일주일에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만 열고 있다.

◇한국문인인장박물관 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당진~대전 고속도로로 갈아타 예산 수덕사 인터체인지로 나와 21-619-29번 도로를 탄다. 예산터미널에서 광시를 거쳐 청양으로 가는 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1층 전시실엔 문인들의 얼굴이나 휘호 등을 새긴 전각이 전시돼 있다. 인장은 2층 전시실에 있다. 문인들 인장 외에도 흥선대원군 인장, 추사 김정희 낙관, 고려시대 도장, 조선시대 국새, 중국 진시황 묘 부장품인 직인 등이 전시돼 있다. 2층 전시실에는 인장으로 한반도 모양의 틀을 만들어 놔 관람객들이 자신의 인장을 채울 수 있도록 했다. 5월15일 문인들의 얼굴이 새겨진 인장을 전시하는 ‘문인 얼굴전’을 연다. 금·토요일만 오전 10시~오후 5시 개방. 충남 예산군 광시면 운산리 256-2 (041)322-0592
 
[100년을 엿보다](12)담배
ㆍ1958년 첫 필터담배 ‘아리랑’ 생산
1970년대에 담배 이름을 이어 붙여 글을 짓는 게 유행한 적이 있다. 일종의 말놀이인데, 이런 식이다. ‘새마을에서 단오에 청자를 만나 거북선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 개나리 만발한 한산도에서 명승을 구경하고…’. 새마을, 단오, 청자, 거북선, 은하수, 개나리, 한산도, 명승은 70년대에 시중에서 팔리던 담배였다.

1970~80년대 시대상을 이름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담배들.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 광해군 연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은 오래됐어야 400년 전인 셈이다. 정작 광해군은 담배 냄새를 싫어해 조정 대신들이 정무를 논할 때 금연할 것을 명했다고도 한다. 효종 때 조선에 왔던 하멜의 <표류기>에는 ‘조선 사람들은 담배를 좋아해 아이들도 4, 5세만 되면 담배를 피우며 남녀노소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조선 백성들이 담배를 약으로 썼기 때문이다. 당시 담배는 횟배 앓는 데 특효라고 알려져 있었다.

‘골초’ 임금이었던 정조는 “마음과 몸에 피로가 쌓인 지 수십 년….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며 담배예찬론을 펴기도 했다. 물론 담배의 해악이 알려지지 않은 때이다. 고종도 애연가였으나 백성들이 ‘국채보상운동’을 벌이며 담배를 끊자 금연 결심을 하기도 했다.

1905년 대한제국 궁 내부에서 담배 전매를 하며 자체 기술로 만든 국내 최초 궐련 담배 ‘이글’을 생산했다. 일제강점시대에는 일본의 ‘무라이(村井)’ 사에서 내놓은 ‘히로(hero)’ 담배가 담배시장을 휩쓸었다. 무라이사는 고종의 초상화를 넣은 ‘히로’ 담배를 내놔 조선인들로부터 ‘나랏님에 대한 불경’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도 담배는 정부의 전매사업이었다. 따라서 담배 이름이 정부시책 홍보성으로 지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처음 나온 담배가 ‘승리’인 것도 그런 경우다. 조선군정청 전매국에서 내놓은 10개비들이 승리의 정가는 3원, 당시 쌀 한 가마니가 45원이었다니 무척 비쌌다. 서민들은 대나무 담뱃대에 재서 피우는 ‘쌈지담배’를 주로 피었다. 1946년에는 민족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민족의 꽃 ‘무궁화’의 이름을 딴 담배가 나왔다. 1948년 정부수립에 맞춰 새벽 닭 울음을 뜻하는 ‘계명’이 나왔다.

군용 담배로 유명한 ‘화랑’은 1949년 국군 창설 기념으로 나왔는데 81년까지 32년간 공급돼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58년 우리나라 첫 필터 담배인 ‘아리랑’이 나올 때까지 궐련은 모두 필터가 없는 막궐련이었다. 그런 탓에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피엑스를 통해 흘러나와 남대문시장 등에서 팔렸던 양담배가 ‘담배 중의 담배’ 노릇을 했다. 양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면 전매청으로 끌려가 벌금을 내고서야 나올 수 있었다. 귀한 양담배가 낱개로 팔리면서 우리나라 담배도 길거리 가판대에서 ‘까치(개비의 잘못된 말) 담배’라 해 낱개 판매를 시작했다.

60·70년대에 많은 담배가 쏟아져 나왔는데 이 또한 시대 분위기 반영이나 정부시책 홍보성이 강했다. 대표적으로 ‘새마을’ ‘새나라’ ‘희망’ ‘자유종’ ‘상록수’ ‘청자’(이상 60년대), ‘환희’ ‘한산도’ ‘거북선’ ‘남대문’(이상 70년대) 같은 담배가 있다. 새마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써 담뱃갑을 디자인했으며 ‘협동’이란 문구를 포장에 써 넣었다. 한산도, 거북선은 충무공 이순신의 애국충정을 본받자는 의미로 나온 담배다. 고급 담배인 ‘파고다’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이름을 지었다.

69년에 나온 ‘청자’는 당시 최고급 담배로 애연가들의 인기를 독차지, 발매 초기 품귀현상을 빚었다. ‘청자’가 애연가들의 인기를 끌며 전국에 ‘청자다방’이 우후죽순 생겨나기도 했다. 80년대 대표적인 것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나온 홍보용 담배 ‘88’과 80년에 나와 2005년 제조가 중단된 ‘솔’이다. ‘솔’은 국산담배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450원짜리 최고급 담배로 출시됐지만 94년 오히려 200원으로 값이 내리며 최저가 담배가 돼 농촌용으로 보급됐다. ‘솔’의 맛을 기억하는 애연가들은 읍면으로 다니며 보루째 사다 쌓아놓고 피우기도 했다. 70년대부터 시작한 담배 수출이 90년대 들어서며 본격화되자 자연히 담배 이름도 온통 외국어 투성이가 됐다.
[100년을 엿보다](13) 목욕탕
ㆍ명절이면 콩나물 시루처럼 붐비는 ‘살가운 추억’
한번씩 뜰채가 등장했다. 목욕탕 주인장은 긴 장대에 그물망이 달린 뜰채를 들고와 몇 차례 물위를 가로질러 둥둥 떠있던 ‘그것들’을 건져내곤 했다. 잠시 탕 밖에 나가있던 사람들은 다시 탕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콩나물 시루처럼 비좁은 목욕탕은 사람들로 붐벼 엉덩이 붙일 데가 없었다. 특히 설날을 앞둔 목욕탕은 대한민국 사람들 누구나 꼭 한번은 가야 하는 곳이었다. 실상은 집에 온수가 나오지 않고 목욕탕이 없기 때문이었지만 깨끗한 몸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조상을 모시겠다는 순박한 마음들이 벌거벗고 장사진을 이뤘다. 목욕탕에서 씻어낸 것이 몸만은 아니었을 터.

196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서울 북아현동 ‘능수목욕탕’ 입구. 김문석 기자요즘 아이들에게 구식 목욕탕은 체험학습 삼아 가볼 만한 곳일지도 모른다. 첨단 시설의 찜질방과 놀이기구가 가득한 워터파크, 쾌적한 수영장이 더 친근하다. 그러나 1970~80년대 대중목욕탕의 번성기를 지나온 아이들과 어른들은 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목욕탕의 살가운 추억을.

한겨울 단잠에서 깨어나 엄마의 무지막지한 손에 이끌려 목욕탕으로 향하곤 했다. 엄마는 가는 길 내내 연습시킨다. “목욕탕 주인이 물으면 몇 살이라고 했지?” “나 8살인데….” 그럴 때면 ‘꿀밤’이 날아왔다. “7살이라고 했지, 따라해봐 7살!” 드디어 매표소 앞.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7살이요”, 주인이 째려본다. “호호, 우리 애가 좀 커서….” 72년 입욕료는 7세까지 90원, 8세부터 130원이었다. 옷장 앞에 섰는데 이번엔 같은 반 남자애가 여탕에서 서성였다. 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60년대 시작된 주택 개량의 움직임은 목욕탕을 갖고 싶은 열망에서였다. 그러나 집안에 목욕탕을 두는 것은 큰 부자들이나 가능한 일이었고 대부분은 늦은 밤 부엌과 수돗가에서 몸을 씻거나 드문드문 생겨난 대중목욕탕을 찾았다. 그나마 시골에선 버스를 타고 몇 십리 떨어진 읍내 목욕탕에 가야 했다. 70~80년대 도시에는 대중목욕탕이 넘쳐났다. 특히 목욕탕은 명절이 대목이었다. 설날과 추석을 맞아 기습적으로 입욕료를 올리는 일이 잦았다. 성인 여자는 남자에 비해 입욕료가 20~30원 비쌌다. 목욕시간이 아무리 짧아도 두세 시간으로 남자들보다 길었다. 아줌마들은 몰래 빨랫감을 갖고와 말갛게 빨아갔다.

70년대 후반엔 ‘때밀이’로 불린 목욕관리사가 등장한다. 요즘 같아선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라며 반겼을 테지만 그땐 시각이 달랐다. 80년 한 신문의 칼럼에서는 때밀이의 등장을 두고 요지경 세상을 개탄한다. ‘현대인들은 번연히 자신의 손이 있는데도 남의 손을 빌려 때를 미니….’

목욕탕 얘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이태리 타월’의 출현이다. 지금도 애용되는 이태리 타월은 원조논쟁이 필요없는 그야말로 우리의 생활문화유산이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이 펴낸 ‘코리아 디자인 2008’에도 당당히 들어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이태리 타월은 62년 부산에서 직물공장을 운영하던 김필곤씨가 디자인했다. 새로운 타월 개발에 골머리를 앓던 그가 기분전환을 위해 목욕탕을 찾았고 마침 실패한 원단 조각으로 몸을 문지르다가 지금의 이태리 타월을 만들게 됐다. 묵은 때가 손쉽게 벗겨져 특허까지 냈다. 이름은 왜 ‘이태리 타월’일까. 개발 당시 원단이 이태리에서 수입한 비스코스 레이온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목욕탕은 어떤 의미일까. 90년대부터 목욕탕은 휴식을 위한 공간쯤으로 바뀌었다. 또 소통의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져 대기업 간부회의나 정치인들의 회동이 이뤄지기도 했다. 개화사상이 밀려들어온 조선시대 말, 목욕탕은 시대의 반역자와도 같았다. 중인 계급들이 조상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을 철폐하고 목욕간으로 개축(‘서울 20세기 생활·문화 변천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목욕탕의 역사에는 죽은 조상보다 기성 도덕에 반기를 들고 생활의 편리를 선택한 이들의 흔적이 배어있다.

모레가 설이다. 늙은 부모의 마른 몸을 밀며 찡해하는 효자 효녀와 분홍빛 볼로 커피우유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아이들이 흔하지는 않겠지만, 깨끗한 몸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새 마음을 가지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100년을 엿보다](14) 도시락
ㆍ가난한 친구들과 나누어 먹던 ‘따뜻한 정’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수업시간보다 점심시간에 먹던 ‘도시락’의 추억이 먼저 떠오른다. 그땐 왜 그리 자주 배가 고팠을까. 점심시간에 먹어야 할 도시락을 2교시만 끝나면 허기져서 꺼내들곤 했다. 다이어트 열풍에 새처럼 조금 먹는 요즘 소녀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양은도시락통에 꾹꾹 눌러 담은 밥과 멸치볶음, 노란 무짠지, 콩자반 등 소박한 반찬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어머니는 거버 이유식병이나 맥스웰 커피병에 김치를 담아주셨다. 때론 가방 속에서 허술하게 잠긴 김치 병뚜껑이 열려 버스 안에서 냄새가 진동할 땐 하얀 옷깃의 청초한 여학생 얼굴이 김치국물처럼 벌게졌다.

겨울철에 난로에 올려 데워 먹던 양은 도시락. 반찬이 섞여 비빔밥이 되고 노릇한 누룽지까지 선물했다. | 정지윤 기자도시락의 유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시락밥과 표주박 물을 뜻하는 ‘단사표음’이란 말이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걸로 보아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거쳐 다시 일본까지 전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모든 것을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일본의 도시락 ‘벤또’가 다시 전해져 예전엔 도시락을 ‘변또’라고 부르기도 했다.

겨울엔 특히 도시락의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4교시엔 교실 중앙에 있던 조개탄이 활활 타는 난로 위에 도시락을 탑처럼 층층이 올려놓았다. 당번은 도시락이 안 타도록 수시로 바꿔놓느라 바빴고 난롯불에 반찬과 밥이 적절히 데워진 도시락을 마구 흔들어 비빔밥처럼 먹거나 살짝 타서 노릇노릇 누룽지가 된 밥을 친구들과 함께 먹는 즐거움은 또 얼마나 컸는지. 추억은 아름답게 포장되게 마련이지만 그땐 친구들 사이에 왕따도 없었고, 도시락을 못 싸온 친구들에게 “난 속이 안 좋구나. 네가 대신 먹어라”라며 자신의 도시락을 건네던 인자한 선생님들도 많았다. 아니 그렇게 기억된다.

그땐 행복이 얼마나 쉽게 찾아왔던가. 어쩌다 어머니가 달걀옷을 입은 분홍소시지나 쇠고기 장조림, 혹은 깨소금이 뿌려진 유부초밥이라도 싸주신 날은 매우 행복해 절로 콧방울이 발름거려졌다. 제삿날 다음엔 각종 전과 나물반찬을 싸와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고 친구들이 각자 다른 반찬을 싸와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도시락은 또 다른 사회교과서이기도 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남녀차별’과 ‘빈부격차’, 그리고 ‘계급의식’까지 일깨워주었다. 책은 빠뜨리고 가도 도시락은 절대 잊지 않고 챙겨갔지만 어쩌다 오빠 도시락을 잘못 들고 온 날, 내 초라한 반찬과 달리 들어 있던 계란프라이 때문에 느꼈던 어머니의 아들 선호사상으로 인한 배신감은 한참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나의 촌스럽다 못해 무식해보이는 양은도시락통과 달리 반찬칸까지 따로 있는 산뜻한 플라스틱 도시락,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과 국물을 자랑하는 보온도시락, 심지어 점심시간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막 지은 따끈한 밥과 숭늉까지 들고 왔던 부잣집 친구들을 보며 세상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1970년대 혼식장려 운동이 한창일 때는 전세가 역전됐다. 정부에선 도시락에 쌀과 보리를 7 대 3 비율로 싸오라고 지시하고 쌀밥만 싸온 학생들은 선생님께 이름을 적히거나 야단을 맞았다. 넉넉한 보리밥과 부자 친구의 장조림반찬이 교환됐다.

빈 양은도시락 속에서 젓가락이 덜그렁거리던 소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꼬마들은 이제 중년이 됐다. 가난한 살림에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학교 수돗가에서 물을 마셔 배를 채우던 학생들 가운데 출세한 이들도 많다. 그리고 대부분 급식이 실시되어 어머니들의 도시락과 반찬 스트레스도 해소됐다. 이젠 자원봉사 주부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홀로 사는 독거노인들을 위해 도시락을 싼다.

하지만 평등한 단체급식시대가 행복하지 않은 건 왜일까. 아이들 건강보다 돈을 생각하는 업자들은 불량재료로 아이들을 아프게 하고, OECD 가입국이란 말이 부끄러울 만큼 해마다 급식비를 내지 못해 굶는 결식학생들이 급증한다. 또 강남에선 수백억원짜리 동사무소가 지어지지만 올해 보건복지가족부의 결식아동 급식예산은 543억원 깎였단다. 명절엔 한 개에 100만원이 넘는 초호화 도시락이 선물로 판매된다. 초라했지만 따뜻한 정이 가득했던 옛날 도시락이 그립다.
[100년을 엿보다](15)양장점
ㆍ기성복 없던 시절, 멋쟁이들 ‘사교의 장’
요즘은 여고 졸업선물로 쌍꺼풀 수술을 해준다지만, 1970년대까지는 엄마들이 졸업하는 딸의 손을 잡고 양장점을 찾곤 했다. 칙칙한 교복 대신 산뜻한 투피스나 원피스를 입혀, 소녀에서 숙녀로 만들어주고 싶어서다. 온갖 원단과 패션잡지가 가득한 양장점에서 주인은 마법의 양탄자를 펼치듯 옷감을 펼쳐보이고 디자인을 설명했다.

1975년 양장점이 밀집된 서울의 거리. 경향신문 자료사진“처음엔 이런 감색 정장이 단정해보이지. 같은 감으로 후레아(플레어) 스커트를 하나 더 맞춰 블라우스를 잘 받쳐 입으면 여러 벌의 효과를 낸다니까. 이탈리아 원단이 좋긴 하지만 비싸니까 국산도 괜찮아요. 얼굴이 예뻐서 뭘 입어도 잘 어울리겠네….”

칭찬에 우쭐해진 모녀는 디자인을 결정하고 ‘가봉’ 날짜를 약속하고 봄햇살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간다. 변변한 기성복이 없던 시절, 패션의 첫걸음은 양장점을 통한 ‘맞춤옷’이었다. 졸업식이나 약혼식 등 행사 때면 멋쟁이들은 공식처럼 이대 앞이나 명동 등의 양장점을 찾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혼예단으로 고급 옷감을 보내는 풍습이 있어 옷감을 들고 양장점을 찾는 일도 흔했다.

<한국 최초 101장면>의 저자인 소설가 김은신씨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첫 양장 여성은 윤치호의 부인 윤고라(본명 김고라)였다고 한다. 1899년 촬영된 사진에서 그는 가슴에 레이스가 장식된 롱 드레스에 깃털과 리본이 달린 넓은 모자 등 당시 유럽 패션의 첨단을 걷는 차림새를 하고 있다.

나혜석 등 1920~30년대 ‘모던걸’들도 세련된 양장을 입었지만 한국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양장을 입기 시작한 것은 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난 후부터다. 일본에서 양재기술을 공부한 최경자·서수연씨, 최초의 미국유학파 디자이너 노라노씨 등이 폐허가 된 명동에 양장점을 차려 60년대 중반 이후까지 양장점 시대를 꽃피웠다. 송옥·아리사·노라의 집·엘리제 등의 상호를 내건 명동 양장점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이 모여들었다. ‘예쁘다 양장점’ 등 어린이 전용 맞춤복집도 있어 공주풍의 옷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팔순이 넘은 요즘도 강남 학동 사거리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는 노라노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50년대의 패션리더들은 상류층 부인이 아니라 미군부대의 연예인들이었어요. 미군부대 무대에 서던 가수들의 드레스를 만들어주면서 연예계와 인연을 맺었죠. 당시 디자이너들은 옷만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익숙지 않은 서양옷을 멋지게 입는 법을 지도해주는 등 코디네이터 역할도 했어요. 유명 배우들도 영화에 출연할 땐 무조건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죠. 60년대가 되어서야 일반 부인들이 양장점을 찾았고 사랑방처럼 모여 대화도 나누는 사교의 장소가 됐어요.”

최경자씨가 ‘국제복장학원’을 만들어 디자이너들을 배출한 후 70년대까지 서울 명동은 양장점의 메카였다. 명동 골목엔 크고 작은 양장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당시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문영자씨는 지금의 ‘부르다문’, 이철우씨는 ‘마담포라’ 등의 기성복 브랜드를 만들어 성공했고 앙드레 김씨는 지금까지 맞춤식 부티크를 운영 중이다. 지금 한국 패션을 대표하는 진태옥·설윤형·한혜자씨도 출발점은 명동 한 모퉁이의 양장점이었다.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대 근처에도 양장점들이 속속 들어섰다.

명동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양장점은 80년대 기성복 붐과 함께 급격히 쇠락했다. 이후 일부 디자이너들이 강남의 청담동·압구정동으로 옮겨 샤넬, 프라다 등 해외 명품숍 사이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양장점은 ‘사모님’들의 사교장 역할만은 놓지 않았다. 99년 고관 부인들이 ‘라스포사’에 모여 옷 선물을 하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옷로비 스캔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 남성들은 고가의 옷값에 놀랐지만 ‘패션을 좀 아는’ 여성들은 “귀부인들도 알고 보니 촌스러운 아줌마들”이라고 살짝 비웃었다.
[100년을 엿보다](16) 입학
ㆍ코흘리개들 거즈 손수건 달고 첫 등교
다음주면 각급 학교에서 입학식이 치러진다. 옛날 초등학교 입학식 땐 코흘리개들이 거즈 손수건(신입생이라는 표지이자 코를 닦는 용도이기도 하다)을 가슴에 달고 ‘앞으로 나란히’를 했다. 부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보지만 꾸중 가득한 엄마 아빠를 쳐다보고는 이내 주눅 들어 동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처음 보는 동무, 어색하던 것도 잠시. 아예 뒤돌아 장난질하느라 선생님 구령은 뒷전. 부스대는 아이들 열기에 언 땅도 제풀에 녹아 운동장은 온통 진창이다. 봄냄새 맡은 병아리처럼 아이들은 ‘하나, 둘’ ‘셋, 넷’ 선창에 후렴을 붙이며 교실로 들어갔다. 코 흘리며 동네를 쏘다니던 아이들은 봄마다 그렇게 학생이 됐다. 1960년대 말이니까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 때다.

초등학교 입학식날,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줄을 맞춰 선 1학년 어린이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국민학교는 일제 말기인 1941년 일왕의 칙령으로 생겼다. ‘국민’은 황국 신민을 뜻한다. 그러니까 국민학교는 황국신민을 육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세워졌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조선인들을 아이 때부터 황국신민으로 세뇌시켜야 했다. 교육이 ‘민족의 백년대계’가 아닌 ‘일본의 제국대계’가 된 것이다. 국민학교 전에는 소학교와 보통학교였다. 조선조 말인 1894년 친일파 내각은 국민 교육의 일환으로 소학교를 설립했다. 그해 9월 관립 교동왕실학교가 개교해 최초의 공식 근대 초등학교로 이름을 올렸다. 이보다 두 해 전 미국인 선교사가 인천에 영화학당(현 인천 영화초교)을 열었지만 1912년에서야 인가를 받았다.

일제는 1906년 보통학교령을 공포하고 1909년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바꾸며 조선합병 전 교육을 통제했다. 보통학교는 일제 말인 38년 다시 소학교가 됐다가 41년 국민학교로 개칭된다. 김영삼 정권은 일제 잔재 뿌리뽑기(95년 일제 총독부 청사로 쓰였던 중앙청을 철거했다) 시책의 일환으로 96년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꿨다.

초등학교 이름이 여러번 바뀌면서 3대나 4대가 모이면 세대마다 다닌 학교가 다르다. 할아버지는 보통학교나 소학교를 다녔고 아버지는 국민학교, 아들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노년 세대들은 여전히 초등학교를 ‘소학교’나 ‘보통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민학생이 중학생이 되려면 여러가지가 달라져야 했다. 먼저 남자 아이들은 머리를 빡빡 밀었다. 이발소에 가서 “중학교 가는데요”라고 하면 두말없이 머리기계(바리캉)질을 해줬다. 그래도 부모님 손잡고 교복을 맞추러 갈 땐 제법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교복은 3년 입을 걸 예상해 두세치 이상 크게 맞췄다. 헐렁헐렁한 검은색 교복을 목단추까지 꼭꼭 채우고 나면 아버지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치수 큰 모자는 머리 위서 빙빙 돌았다. 여자아이들은 하얀 칼라를 덧댄 교복(세일러복을 입기도 했지만)을 입고 단발머리를 했다. 귀가 보이게 잘라야 했으니 드러난 뒤통수 아래와 목덜미는 면도를 했다.

일제 때는 중학교가 따로 없었다. 고등소학교나 보통학교 고등과를 다녔고 그곳을 졸업한 뒤 고등보통학교(지금의 고등학교, 줄여서 고보라 불렀다)로 진학했다. 중학교는 38년 분리됐으며 6·3·3·4학제가 도입된 49년 이후 본격적으로 생겼다. 초등학교 시절 멋모르고 손잡고 뛰어다니던 남자, 여자아이는 중학생이 되며 남자중학교와 여자중학교로 나뉘어 생이별(?)을 했다. 물론 간간이 남녀공학인 중학교도 있었지만. 그러나 못 먹고 자란 탓에 한 반(60~70년대엔 70명 정도가 한 반이었다)에 두어 명을 빼곤 수염 난 남학생도, 교복 가슴께가 볼록한 여학생도 없었다.
[100년을 엿보다](17) 시계
ㆍ80년대까지 금·은처럼 ‘보물’ 대접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생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회중시계가 오는 10일 경매에 나온다는 보도가 있었다. 스위스의 고급 시계 브랜드인 바셰론 콘스탄틴에서 제작한 것으로, 뒷면에 대한제국 문장인 ‘이화문(李花紋)’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시계 한 개 값은 서울의 작은 기와집 한 채 값에 맞먹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회중시계 | 연합뉴스 순종은 시계에 관심이 무척 많았다.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계가 있었다. 순종은 이 시계들이 시간을 알리기 위해 각기 다른 소리로 한꺼번에 울릴 때 매우 즐거워한 반면, 하나라도 종이 앞서거나 늦게 울리는 날이면 언짢아했다고 한다. 그는 덕수궁에 머물던 고종에게 전화로 문안을 드릴 때면 꼬박꼬박 “아바마마 시계는 지금 몇 시이옵니까?”라고 물으며 고종의 시계와 창덕궁의 시계를 맞추는 것을 중요한 일과로 삼았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역법을 축으로 하는 기계식 시계가 처음 들어온 것은 1631년이다. 하지만 시간을 분할해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던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자명종이라는 이름의 기계식 시계는 일정한 시각에 소리를 내는 기이한 물건으로만 생각됐다. 오랫동안 관심 밖에 있던 서양의 기계식 시계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이다. 외래 문물이 밀물처럼 들어오는 가운데 시계가 으뜸의 귀한 물건으로 여겨진 것이다. 손목시계가 나오기 이전이었으므로 당시 시계는 모두 회중시계였다. 양복 조끼에 시곗줄을 늘어뜨리고 다니다가 회중시계를 꺼내 ‘폼 나게’ 들여다보는 신사의 모습을 누구나 부러워했다. 시계 한 개를 뇌물로 받고 일본에 이권을 넘겨준 외무대신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당시 시계는 귀물(貴物)이었음에 틀림없다.

시계는 왕실이나 고관대작 사이에선 널리 퍼져갔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여전히 낯선 물건이었다. ‘보리가 팰 때’ ‘보름달이 뜰 때쯤’ 식으로 약속을 해오던 농경시대 사람들에게 하루를 이등분하고 또 그것을 열두 개로 쪼개는 등 복잡하기 그지없는 서양식 시간 개념과 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한국 사람을 비꼬는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이 서양식 시간 개념 때문에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전차나 증기선이 시간을 정해 놓고 운행하고, 도심 곳곳에 ‘공공시계’가 등장하면서 시계는 자연스럽게 보통 사람들의 생활에 젖어들었다.

1950년대 들어 우리나라 기술로 시계가 생산되기 시작했지만, 시계는 쉽게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제조 기술도 정밀하지 못해 당시 시계는 걸핏하면 고장 나거나 늦어지기 일쑤였다. 시계를 차고 있으면서도 시간이 정확한지 자신할 수 없었다. 라디오에서 정시에 알려주는 시보에 따라 시간을 맞추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는 금·은과 함께 ‘보물’ 대접을 받으며 주로 금은방에서 판매되었다. 이런 귀한 대접은 70~80년대까지도 계속됐다. 당시 손목시계는 졸업과 입학철 최고의 선물이었고, 집들이나 개업식 선물로도 인기 만점이었다.

손목시계는 ‘현금’ 대용이기도 했다. 대학가 주점이나 전당포에는 술값이나 급전 대신 맡겨놓은 시계가 수북이 쌓였다. 대학로에서 오랫동안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던 사람이 가게 문을 닫으면서, 서울대가 동숭동에 있던 시절 학생들이 술값 대신 맡긴 시계를 서울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화제가 된 일도 있었다.

시간이 물화된 상태가 시계다. 시간의 물화가 진행되는 만큼 시계는 흔해지고 시계의 가치는 서서히 추락했다. 지금도 일부 부유층이나 멋쟁이들은 명품시계를 애호하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시계를 옷 색깔에 맞춰 바꿔 차는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한다. 아예 시계를 차지 않고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서랍 속에 팽개쳐둔 손목시계를 오랜만에 꺼내보지만 처음 시계를 찼을 때의 가슴 두근거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100년을 엿보다](18) 미니카세트 ‘워크맨’
ㆍ청소년들에 ‘꿈의 기기’…중고품도 없어 못팔아
지난해 영국 BBC 매거진에 mp3플레이어 ‘아이팟’ 대신 일주일간 미니카세트 ‘워크맨’을 써본 13살 소년의 체험기가 실렸다. 소년은 테이프의 반대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 사흘이 걸렸으며 카세트테이프의 재질에 따른 종류를 뜻하는 메탈/노멀 스위치를 이퀄라이저로 오해했다고 고백했다. 원하는 곡을 듣기 위해 되감기와 빨리감기 버튼을 마구 눌러대다 아버지로부터 “(그러다) 워크맨이 테이프를 먹는다”는 소리를 듣고 며칠간 음악 없이 지냈다고 썼다.

소니의 초기 워크맨. 버튼 하나만 누르면 손쉽게 작동되는 요즘 mp3플레이어를 사용하는 10대들에게 미니카세트는 낯설고 불편한 기기다. 그렇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청소년들에게 미니카세트는 꿈의 기기였다. 일본 소니사가 세계 최초로 초소형스테레오카세트 ‘워크맨’을 출시한 것은 1979년이다. 담뱃갑만한 크기에 무게는 390g. 실내에서만 들을 수 있던 음악을 언제 어디서나, 그것도 오디오시스템에 버금갈 정도의 음질로 들을 수 있게 해준 기기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워크맨은 전 세계적으로 1년 새 100만대가, 5년간 1000만대가 팔렸다.

당시 일제 가전제품은 수입금지 품목이었지만 세계적 워크맨 열풍은 금세 국내에도 상륙했다. 교포와 보따리무역상을 통해 음성적으로 거래되던 미니카세트는 80년대 초 영어회화 붐이 일면서 학생뿐 아니라 직장인들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당시 일간신문에서 미니카세트 중고품 시세를 기사로 다룰 정도였다. 미니카세트의 중고가는 8만원에서 12만원.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가여서, 일본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미니카세트를 사들고 왔다. 미니카세트는 보온밥통과 더불어 김포세관에서 수시로 적발되는 과다반입제한품목 중 하나였다.

기성세대의 눈에 허리춤에 미니카세트를 차고 스테레오헤드폰을 낀 젊은이들의 모습은 우주인과 다름없었지만(경향신문 1981년 6월1일 기사), 시대는 달라지고 있었다. 개인용 엔터테인먼트 기기에 대한 수요를 확인한 국내 제조사들은 서둘러 미니카세트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25개사가 난립하다 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삼성의 ‘마이마이’, LG전자의 ‘아하프리’, 대우전자의 ‘요요’로 삼파전이 굳어졌다. 국산은 모양이 다소 투박했지만 가격이 일제에 비해 저렴한 편이어서 막 음악에 눈뜬 청소년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미니카세트는 졸업과 입학 시즌 최고의 선물품목이었다. 어른들은 헤드폰 끼고 책상에 앉아있는 중·고생 자녀들에게 “음악을 들으며 무슨 공부가 되느냐”고 잔소리를 했지만 이들에게 음악은 공기와 같았다. 92년 초 미국 팝그룹 뉴키즈온더블록 내한공연 당시 참사에서 보듯, 이들을 통해 팬덤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이들의 까다로운 귀는 이후 국내 가요의 질적 성장을 꾀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90년대 초반 CD의 시대가 본격 도래했지만 타격을 받은 것은 미니카세트가 아니라 턴테이블이었다. 음질은 뛰어났지만 휴대용 CD플레이어는 미니카세트에 비해 고가인 데다 부피가 크며 결정적으로 CD음반 가격이 테이프보다 비쌌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학생들은 미니카세트를 더 선호했다. 복병은 mp3플레이어였다. 98년 세계 최초로 국내업체가 mp3플레이어의 원천기술을 개발했다. 테이프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작고 가벼운 데다 많은 곡을 저장할 수 있고 장시간 청취가 가능한 mp3플레이어는 휴대용 음악재생기기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미니카세트의 시대는 지고 있었다. 2000년대 초 한국이 mp3플레이어의 종주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LG전자와 삼성전자는 자사의 미니카세트를 단종시켰다. 그러나 국내 제조사가 갖고 있던 mp3의 원천기술 특허는 미국으로 넘어갔고 미국 애플사가 내놓은 아이팟은 mp3플레이어와 동의어로 통하며 전 세계 휴대용 음악재생기기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워크맨에서 출발한 휴대용 음악기기들은 이제 음악의 유통구조마저 바꿔놓을 정도로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변화시키고 있다.
[100년을 엿보다](19) 버스 차장
ㆍ가난 면하려 상경한 18세의 생활전사
서울시는 지난해 3월17일부터 10일간 ‘해피 버스 데이(Happy Bus Day)’란 캠페인을 벌였다. 경기침체로 고통을 겪는 시민들을 위로하고 즐거움을 주기 위해 151번 버스에 안내양을 배치해 친절 서비스를 보이는 이벤트였다. 젊은이들은 신기한 눈빛을 보냈지만 과거의 버스 안내양, 아니 ‘뻐스 차장’을 기억하는 중장년층들은 가슴 한쪽이 뜨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1970~80년대 우리가 만난 버스 차장은 ‘해피’한 직장여성이 아니라 하루하루 고단한 삶과 싸우는 슬픈 눈빛의 생활전사였기 때문이다.

충남 태안군의 버스에서 차장이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태안군은 관광 홍보와 대중교통 이용 활성화를 위해 2006년 차장(안내양) 제도를 부활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깻잎머리에 베레모를 실핀으로 고정하고 제복을 입은 버스 안내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61년. 버스가 본격적으로 서민의 발 역할을 하기 시작한 49년 이후 ‘조수’란 명칭으로 남자들이 차장 역할을 하다 손님과 자주 다투고 인건비도 비싸다는 이유로 어린 소녀들로 교체됐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버스 안내양의 평균 연령은 18세였다. 61년 1만2560명이던 안내양은 71년 3만3504명, 70년대 중반엔 5만여명까지 이르렀지만 82년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면서 급격히 줄었고, 89년 안내원을 두도록 한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가 삭제되면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73년에 발표된 조선작의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의 주인공은 버스 안내양 출신이다. 식모·봉제공 등을 전전한 끝에 버스 안내양이 된 영자. 하지만 만원버스에서의 교통사고로 한 쪽 팔을 잃고 자살을 기도하고 그마저 실패로 끝나 성매매의 늪으로 전락하는 소설은 당시 시골에서 가난을 면하려 상경했던 소녀노동자들의 잔혹한 삶을 그려 충격을 던졌다.

버스 옆구리를 탕탕 치며 “오라이~”라고 씩씩하게 외치던 안내양은 하루 18시간씩 일하고, 단체 숙소에서 겨우 4~5시간 눈을 붙인 뒤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다. 안내양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부족한 잠이나 승객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넣는 데 소모되는 체력이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또래 여학생들에게 느끼는 열등감이나 술주정하는 남자 승객의 지분거림도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안내양이 직접 버스비를 받았기에 도둑 취급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승차감시원의 승객계수와 안내양의 입금액이 차이가 나면 차액을 월급에서 까고, 돈을 숨겼다며 알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엔 수치심에 못이겨 자살한 안내양의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역임한 원로 언론인 민병욱씨는 한 칼럼에서 70년대 기자 시절의 일화를 들려준다. “중랑교 넘어 어느 종점의 버스회사 안내양들이 인격모독적인 알몸수색을 더이상 못 참겠다고 고발해서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 소녀 티를 못벗은 차장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니 ‘수치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라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문제는 그 안타깝고 슬픈 현장에서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는 거다. ‘청량리 지나 중랑교 가요~’라고 외치는 안내양의 말을 당시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라고 말하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했는데 하필 청량리 방향을 운행하는 버스 안내양이 말해버리니 나도 모르게 쿡 웃음이 새 나왔다.”

버스 안내양을 천사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중소기업 사장인 정도영씨(55)는 71년에 신촌을 운행하던 버스안내양 누나를 꼭 찾고 싶다고 한다. “버스 표를 못내 쭈뼛거리니까 안내양 누나가 날 물끄러미 보더니 그냥 내려주더군요. 그후로 몇번이나 공짜로 태워줬는데 어느날 ‘내 동생이랑 똑같이 생겼어요. 공부 열심히 해서 이담에 꼭 성공해요’라고 말한 다음날부터 안 보입디다. 다시 만나면 식사 대접이라도 하고 싶어요.”

매일 차창에 매달리는 곡예를 하고, 돈을 숨긴다는 의심까지 받으면서 너무 일찍 삶의 고단함을 체험한 버스 안내양들. 그 많은 안내양들이 지금은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순결한 영혼을 존중받아야 할 그들에게 ‘알몸수색’을 했던 어른들은 또 어떤 노후를 보내고 있을까.
[100년을 엿보다](20)강남 아파트
76년 아파트 지구로 개발 ‘부의 상징’
“강남은 그때는 시골이죠. 솔직히, 벌판이었어요. 누이동생이 와가지고 막 울더라고요. 오빠가 어떻게 돼서 이런 데 사느냐고. 시골 갔다 오면 버스에서 내려 소변 보던 데예요. 화장실이 없으니까. 그때는 강남도 아주 형편없었죠.”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고층빌딩이 빽빽이 들어찬 서울 강남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최근 출간된 <서울 토박이의 사대문 안 기억>이라는 책에서 홍순하씨(1932년 종로구 청진동 출생)는 이렇게 회고한다. 여든 가까운 어르신의 추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비슷한 기억이 있다. 서대문구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다. 조금 과장하면, 하룻밤을 자고 나면 급우 한두 명씩이 전학을 갔다. 주로, 부촌으로 손꼽히던 연희동의 마당 넓은 단독주택에 살던 친구들이었다. 이들의 행선지는 대부분 압구정동과 반포동, 서초동의 아파트였다. 울며 떠나간 친구들 가운데는, 드물지만 다시 돌아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파트 단지만 덩그렇게 들어섰을 뿐, 학교 등 기반시설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유턴한 친구들은 말하곤 했다. “비가 오면 학교 운동장이 진흙탕이 돼서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해….” ‘교육 특구’로 불리는 지금의 강남을 생각하면 ‘상전벽해’라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강남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된 것은 1963년의 일이다. 당시 강남은 인구가 3만명도 채 안되는, 배밭이 듬성듬성 흩어진 농촌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인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주거환경이 악화되자 한강 이남으로 눈을 돌렸다. 강북에 도심 기능이 집중되면 국가안보 측면에서 위험하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69년 강남과 강북 도심을 잇는 최초의 다리인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완공되면서 강남 개발에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75년 강남구가 생기고 이듬해 압구정동, 도곡동, 반포동 등이 ‘아파트 지구’로 지정됐다. 교육환경이 좋지 않아 이사를 꺼린다는 분석이 나오자, 정부는 강북의 전통적 명문고들을 대거 강남으로 이전시켰다. 경기고와 서울고가 먼저 총대를 멨고 휘문고, 경기여고, 숙명여고 등이 뒤를 따랐다. 8학군의 시작이었다.

강남 개발 초기, 강남 신드롬의 중심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있었다. 78년 당시 현대그룹 계열사이던 한국도시개발은 사원용으로 지은 아파트 900여가구 중 600여가구를 고위공직자 등에게 특혜 분양했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지만, 엄청난 프리미엄 액수가 공개되면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로 만드는 구실도 했다. 신흥 부유층은 물론 전문직 종사자와 해외 거주 경험이 있는 사람들까지 줄줄이 압구정동으로 몰려갔다. 중산층도 뒤질세라 앞다퉈 강남으로 향했고, 투기 행렬 속에 ‘부동산 졸부’니 ‘복부인’이니 하는 말들이 회자됐다. 돈이 옮겨가자 환락의 중심지도 이동했다. 80년대 나온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나 ‘신사동 그 사람’은 이런 세태 변화를 드러내는 가요다.

20년 넘게 계속되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영광은 2000년대 들어 도곡동 타워팰리스로 넘어갔다. <월급쟁이 부부의 타워팰리스 입성기>라는 책이 나올 만큼 타워팰리스는 ‘부의 표상’으로 등극했다. 최근에는 삼성동 아이파크와 대치동 동부센트레빌이 타워팰리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초고가 아파트 대열에 올랐다.

강남은 이제 단순한 지역의 이름을 넘어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누군가가 “저, 강남에 살아요”라고 말할 때, 듣는 이들은 재산은 물론 학력과 외모, 스타일, 문화적 취향까지 함께 떠올린다. 진입장벽이 높은, 완전히 새로운 계급의 출현이다.

강남과 강북 사이의 간극은, 심리적으로는 서울과 지방 사이의 간극을 능가할지 모른다. 지난 1월 초 서울에 사상 최대 폭설이 내렸을 때 ‘제설에도 강남과 강북의 격차가 난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니 말이다.
[100년을 엿보다](21)구멍가게
ㆍ서민들 정이 오가던 ‘골목길의 풍경’
“평생 계속할 것 같던 구멍가게의 문을 닫던 날, 우리 식구 중 한 명도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가족의 삶을 어떤 때는 질퍽하게, 또 어떤 때는 차지게 만들어 주었던 구멍가게…. 힘들고 고단했지만 부모님의 땀과 정성, 그리고 우리 오남매의 유년과 추억이 한데 어우러진 행복한 보금자리였다.”

구멍가게 앞의 평상에 앉아 한가로이 노는 아이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작가 정근표씨는 구멍가게 집 둘째아들이었다. 그는 구멍가게를 배경으로 자신의 유년시절을 기록한 ‘구멍가게’를 펴냈다. 책이 나오자마자 그는 구멍가게 주인이었던, 지금은 팔순이 다 된 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보여드렸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책장을 넘겨보기는커녕 아예 집에 두지도 말라고 했다. 새벽녘부터 자정이 넘도록 일에 치여 고생한 아내와 풍족히 뒷바라지 못한 자식들에 대한 기억이 불도장처럼 찍혀있는 그곳을 상기하고 싶지 않은 때문이었다.

가난한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의 응어리가 어디 구멍가게 오남매의 아버지 가슴에만 맺혀 있으랴. 구멍가게 주인 못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그곳의 손님들이었다. 연탄 두서너 장과 봉지 쌀로 근근이 ‘현금 영수증’을 끊듯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수많은 장삼이사들에게도 구멍가게는 기억 건너편의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1960~80년대 골목마다에는 고만고만한 구멍가게들이 자리해 있었다. 지역에 따라 ‘점방’으로도 불렸다. 60년대 중반부터 보급된 라면을 비롯해 성냥, 비누, 연탄, 쌀, 담배 등 생활필수품부터 야채와 생선까지 공간은 작았지만 없는 게 없었다. 특히 유리상자에 담겨있던 ‘센베이’ 과자와 ‘눈깔사탕’은 아이들을 유혹했다. 지금은 중년이 됐을 ‘녀석들’은 주인장 몰래 몇 알의 사탕을 손에 쥐고 ‘죄와 벌’을 경험해야 했다.

최근 ‘손안에 든 PC’라는 스마트폰이 나와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사실 기능면에서는 ‘원조’가 따로 있다. 구멍가게의 역할은 무궁무진했다. 동네가 낯선 이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했으며, 간밤에 누구네 집 부부가 어떤 일로 한바탕 싸움을 했더라는 ‘뉴스’와 건너뛴 TV 인기드라마 줄거리까지 알려주는 ‘정보검색’, 학교에 늑장부리는 아이들에겐 ‘알람기능’, 카드칩은 없었지만 외상거래로 이미 신용사회까지 구축했다.

그러나 재개발 광풍이 일면서 골목과 함께 구멍가게들도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80년대 슈퍼마켓이 등장하고 24시간 편의점이 불을 밝히면서 몰락의 기로에 선 것이다. 96년 국내 유통시장이 전면 개방되면서 늘어난 대형 할인마트와 몇 년 사이 등장한 기업형 슈퍼마켓(SSM)은 골목까지 파고들며 마지막 남은 구멍가게들의 숨통을 죄고 있다. 한 방송사가 만든 짧은 영상물 ‘구멍 없는 구멍가게’의 한 자막글처럼 ‘왕창 살 물건도 돈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동의 수단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형마트의 카트는 허망할 뿐이다.

구멍가게는 이대로 멸종할까. 글쎄…, 이런 이야기도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노인 인구가 늘어나고 독신자 세대가 급증하면서 인간미 넘치는 동네 구멍가게들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유쾌한 팝콘 경쟁학). 소소한 동네 얘기를 나누며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구멍가게의 경쟁력이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60~70년대 풍경 전시회에서 구멍가게가 단골로 전시되는 형편이지만, 좀 더 시간이 흘러 ‘크고 좋은 새 것’에 물린 사람들은 구멍가게 다시 세우기 캠페인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전 입적한 법정 스님이 즐겨본 책들 가운데 ‘구멍가겟집 세남매’가 들어있다고 한다. 스님 역시 가난했지만 따뜻한 정이 오간 시절의 이야기를 좋아하셨던 것 같다. 대형마트에 가면 ‘1+1’을 내걸고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신상품들이 널려있다. ‘1+정’은 이제 어디 가서 사야 할까.
[100년을 엿보다](22) 아침 조회
ㆍ일제때 시작…애국심 고취 획일화 교육
일요일을 쉰 터라 친구가 보고 싶지만 아침 조회만 생각하면 꾀병이 났다. 학습시간표에 엄연히 월요일 1교시는 조회 시간이다. 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지각이고, 결국 개근상을 받을 수 없다. 성실성이 기본 덕목이던 1960~70년대엔 우등상보다 개근상을 더 쳐줬다. 부모가 먼저 나서 ‘아파도 학교에 가서 죽으라’고 할 때였다. 제 몸 돌보지 않고 헌신하는 국민이 되게 하는 게 교육이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72년 제정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단행한 해다. 2007년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로 바뀐다. 찬찬히 비교해 보라.

1970년대 학교 운동장에서 치러지던 애국 조회 모습.
조회는 획일화 교육의 기본 과목이었다. 운동장에 모여 선생님 구령에 따라 오와 열을 맞추고 나면 교장선생님이 나오고 조회가 시작됐다. 국기에 대해 경례하고 맹세하고, 애국가 4절까지 부르고, 묵념하고, 교장선생님 훈화 듣고, 주훈을 발표하고, ‘삐라(불온전단)’ 신고자 표창을 하고, 신세계체조(뒤에 국민체조로 바뀌었다)를 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난다. 당연히 다음 수업과목은 줄여서 했다.

학교 내 조회는 대한제국 말기 근대교육을 도입하며 생겼다고 한다. 일제 침략이 시작된 때다. 조선총독부는 37년 ‘황국신민서사’를 확정해 각급 조회에서 외우게 했다. 황국신민서사는 성인용과 아동용이 따로 있었다.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우리들은 인고단련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아동용)’

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정해 학생들에게 외우게 했던 국민교육헌장을 보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8개 문장, 130여개 단어로 이뤄진 국민교육헌장은 낭독에만 3분 가까이 걸렸다.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한 12월5일은 법정기념일이었다.

조회를 애국 조회라고도 불렀다. 당시 애국은 반공과 동일시됐다. 국민교육헌장에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라고 했다. 민주보다 반공이 앞에 나오는 시대 상황이니 당시 ‘반공일(半空日), 토요일 오전만 근무해 반쪽 공휴일이라는 말)’이라는 말을 아이들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날(反共日)로 받아들인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조회 시간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왜 이리 길고 긴지. ‘에, 또…’ ‘끝으로…’ ‘마지막으로…’가 수없이 반복됐다. 아이들은 조회 내내 몸을 뒤틀며 신발로 애꿎은 땅바닥만 팠다. 여름철, 긴 시간 부동자세로 있다가 일사병으로 쓰러져 양호실에 들려가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 지금은 운동장 조회가 사라지고 교실에서 자체 조회를 한다. 시상식까지 교내 방송국에서 수상자만 불러서 하기도 한다.

부산시교육청이 지난달 ‘2010학년도 국가 정체성 교육계획’이란 협조공문을 각급 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날마다 학급 조회 시간에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하고 애국가를 제창시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군사문화의 산물’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반발이 터져나왔다. 아이들이 싫어하는 걸 반복해 시킨다고 애국심이 우러나고 국가 정체성이 확립될까. 그나마 ‘운동장 애국조회’ 부활을 지시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100년을 엿보다](23) 월급봉투
아버지의 목과 어깨에 힘 들어가는 날
요즘 최고의 안정적인 직업으로 선망받는 공무원. 1975년도 공무원의 월급은 얼마나 됐을까. 당시 경상북도 문경군청 소속 4급 을류(현재 7급 해당) 공무원으로 일했던 김병옥씨가 최근 ‘문경인터넷뉴스’에 공개한 봉급 명세서를 보면 본봉 3만690원, 수당 8500원, 여비 1만1870원, 일·숙직비 400원(계 5만1460원)에, 공제내역은 기여금 1688원, 대한교육 900원, 제일생명보험 700원, 이동조합 2346원, 직장금고 100원, 신문대금 1150원, 전별금 500원, 축의금 300원(계 7884원)으로 기록돼 있다. 실제 수령액은 4만3576원. 35년 전이긴 하나 5만원이 못되는 돈으로 저축도 하고 술도 마시며 살았다. ‘박봉’이라도 꼬박꼬박 월급받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은 처지가 다르다.

월급봉투를 열고, 받은 돈을 한 장 한 장 세보는 직장인의 모습. 지난해 정년퇴직한 강석준씨(58·서울 광장동)는 “요즘 세 끼 밥을 집에서 먹는다고 마누라가 날 ‘삼식이’라고 부르며 구박한다. 예전에 월급봉투 줄 땐 애교도 떨더니 월급이 사라지자 내 권위도 함께 사라졌다”고 서운해했다.

이렇게 ‘월급봉투’란 말에 울컥, 가슴 한 쪽이 아릿해지는 중년이 많다. 은행 계좌로 급여가 자동이체되고 명세서도 사내 전산망을 통해 확인하는 세상이 되고 보니, 월급날에 얽힌 감동이나 애환은 정겨운 옛 추억이 된 것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월급날은 아버지들의 목과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가는 날이었다. 항상 “물가는 하늘같이 오르고 애들은 콩나물같이 자라는데 쥐꼬리 같은 월급으로 어떻게 살아”라고 바가지를 긁던 어머니도 그날만은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고 반주하라며 소주까지 올려놓았다. 과자를 사들고 온 아버지는 일찍 잠든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뽀뽀를 ‘강요’하기도 했다. 그리곤 어머니에게 월급봉투를 던지며 유난히 낮게 깐 목소리로 “아껴 써”라고 말했다. 보너스라도 나와 월급봉투가 두둑한 날엔 평소 애교를 모르던 어머니가 “아유, 좋아라”라며 봉투에 입을 맞추는 걸 보며 신기해하던 기억도 있다.

월급날은 회사 풍경부터 달랐다. 사환이나 경리사원이 월급봉투를 들고 와서 나눠주면, 매달 받는 월급인데도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편지봉투보다 조금 큰 크기의 누런 마분지 봉투에 본봉, 수당, 보너스, 갑근세 등의 명세가 적혀 있었는데, 혹시라도 동전 하나라도 빠진 건 아닐까 봉투를 거꾸로 들어 탈탈 털어보기도 했다. 아내 몰래 가불해 월급을 미리 축내거나 혹은 ‘비자금’이 필요한 이들은 온갖 아이디어를 짜냈다. 경리담당자에게 읍소해 명세서를 ‘위조’하는 이도 있었다. “지난달에 유난히 결혼이랑 상이 많아서…”라는 핑계를 대던 것도 월급봉투가 있던 시절의 추억이다.

회사원 장봉수씨(54)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월급날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고 다음날 ‘쥐꼬리만한 월급밖에 못주는 내가 부끄러워 밤새 술마셨다’고 하면 아내가 어이없어 하면서도 크게 화내지는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 손에 월급봉투가 무사히 도착하기 전에 그 월급봉투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회사 앞 식당 아주머니, 단골술집 주인들이 회사에 장부를 들고 찾아와 밀린 외상값을 받아갔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의 추억담이다.

80년대 각 은행이 전산시스템을 갖추면서 금융권을 시작으로 월급봉투는 점차 사라졌다. 직장인들이 월급봉투를 흔들며 모처럼 가족에게 큰소리 한 번 치는 기쁨도, ‘삥땅’의 짜릿함도 빼앗겼다.

‘상사에게 내어준 간과 쓸개가 들어있고/ 상사에 고개숙인 머리가 들어있고/ 상사에게 굽실거린 허리가 들어있고/ 뙤약볕에 검게 탄 얼굴이 들어있고/ 더러워도 아부했던 입이 들어있고/ 보고도 못 본 척한 눈이 들어있고/ 자신을 욕하는 소리에도 참아야 했던 귀가 들어있고/ 더러운 냄새에 마비된 코가 들어있고/ 현장에 흩뿌린 피땀이 들어있고/ 피로에 축 처진 어깨가 들어있고/ 삭막한 사회에 황폐해진 당신 남편의 마음 또한 들어있습니다/ 당신의 손아귀에 쥐여져 있는 월급봉투 … 바로 남편입니다/ 남편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은 것입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한 중년이 블로그에 올린 이 글은, 비록 월급봉투란 종이봉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월급은 직장인들에게 땀과 눈물과 자존심의 대가임을 절절히 들려준다.
[100년을 엿보다](24) 우량아 선발대회
튼실한 아기 선망…뽑히면 스타덤
1971년 제1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개최를 알리는 신문 광고.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로운 종교는 ‘S라인’과 ‘초콜릿 복근’이다. 늘씬한 몸매에 대한 선망은 어린아이들까지 다이어트로 몰아넣고 있다. 뚱뚱하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왕따 되기 십상이란다. 소아비만은 성인비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와 부모들의 불안을 키운다. 30년 전, 아들 딸의 우량아 선발대회 입상을 노리던 부모들은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을 터. ‘작게 낳아 크게 기르겠다’며 열심히 운동하는 임신부 며느리, ‘살과의 전쟁’을 벌이는 손자 손녀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는 1971년 문화방송과 남양유업 주최로 처음 열렸다. 83년까지 계속된 이 대회는 해마다 어린이날을 앞둔 4월 이맘때 시도별 예선을 거쳐 최종 결선을 치렀다. 13년 동안 참가한 연인원이 2만여명에 이를 만큼 대회의 인기는 대단했다. 아직 가난하던 시절, 엄마들은 자기 아이를 튼실하게 키워 우량아 선발대회에 내보내는 꿈을 꾸곤 했다. 적당히 배가 나와야 풍채가 좋다거나 ‘사장님’ 소리를 듣던 때다.

경향신문 75년 4월29일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국에서 15명의 금년도 우량아가 선발됐다. 금년으로 5회째를 맞는 이번 대회는 지난 27일 MBC 공개홀에서 최종 결선이 베풀어졌는데, 전국 최우량아로는 서울 태생의 21개월짜리 정상철 아기가 영광을 차지했다. 생후 6개월부터 24개월 미만의 아기들이 참가하는 이 대회의 금년 대회에는 전국에서 무려 6148명의 아기들이 출전했다. 서울에서 826명, 지방에서 5322명….’ 기사 말미에는 전국 최우량아 1명, 우량아 2명, 준우량아 12명의 명단이 실렸다.

당시 우량아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질병이 없어야 하고, 각종 예방접종을 빠뜨리지 않고 맞아야 하며, 나이 또래에 맞게 신경기능이 발달하고, 체중과 가슴둘레 등 신체발달과 영양상태가 좋아야 했다. 기준은 이처럼 다양했지만, TV 중계를 보는 시청자들 눈에는 키 크고 살집 좋은 아이들이 상을 타가는 것으로 보였다. 뽑힌 아이들은 올림픽 메달리스트처럼 목에 무거운 메달을 걸고 사진을 찍었다. 일부는 남양분유 광고모델로 발탁돼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다. 우량아 선발대회 출신 가운데는 유명인도 적지 않다. 작곡가 겸 가수 주영훈씨, 바둑기사 이창호 9단, SBS 윤현진 아나운서 등이 우량아 선발대회에 출전했거나 입상했다.

우량아 선발대회 열풍에는 ‘부국강병’을 외치던 박정희 정권 당시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튼튼한 아이는 부모의 기쁨인 동시에 미래의 국가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제1회 대회에는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석해 출전한 어린이와 부모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근대화 과정에서 어린이는 어떻게 자라왔는가’(2004)라는 논문에서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의 메시지는 ‘아이를 살찌우고 튼튼하게 길러야 한다는 것과,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유를 먹이지 말고 분유를 먹이라는 것’ 두 가지”라며 “이는 박정희식 개발주의와 과학주의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우량아 선발대회는 80년대 초반 막을 내린다. 경제성장이 가속화하면서 ‘못 먹어 마른’ 이들이 줄어든 것과 무관치 않다. 남양유업은 우량아 선발대회 대신 모자 건강에 초점을 맞춘 사회교육캠페인 ‘임신육아교실’을 열기 시작했다.

그럼 우량아 선발대회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각 자치단체들은 모유의 우수성을 알리고 모유 수유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건강한 모유수유아 선발대회’를 열고 있다. 다만 심사기준은 예전과 달리 다양해졌다. 키와 몸무게, 머리둘레 등 신체발달 정도를 측정하기는 하지만, 건강진단과 모자 애착도 검사, 모유 수유에 대한 엄마 인터뷰, 뒤집기·기어가기·혼자 오래 서 있기·걸음마 등 월령별 발달상황 검사도 병행한다. 부모들도 메달리스트를 만들겠다는 ‘비장한’ 각오는 없다. 사진 찍고 기념품도 받는, 한바탕 즐거운 축제일 뿐이다.
[100년을 엿보다](25)소풍
비가 올까봐 잠도 설치는 ‘설레는 날’
따뜻한 봄의 기운이 충만해질 무렵이면 소풍의 계절이 돌아왔다. 초등학생들이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이라면 그건 바로 방학식 하는 날과 소풍 가는 날이었다.

1987년 4월 서울 월계동 ‘드림랜드’에 소풍 온 초등학생들이 장기자랑을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소풍 날짜가 정해지면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안달복달했다. 평소 못먹던 군것질거리며 김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엄마는 소풍을 맞아 새 옷과 신발을 사주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서 새 옷을 얻어 입은 뒤에 사이다와 과자, 초콜릿 등을 집어대느라 바빴다. 엄마는 시금치와 오이, 당근, 노란 단무지와 길다란 소시지, 달걀을 샀다. 소풍 전날 밤 엄마가 김밥 재료를 밑손질하느라 바쁠 때, 아이들은 소풍가방을 싸느라 바빴다. 주머니가 잔뜩 달린 소풍가방을 꺼내서 돗자리와 과자, 초콜릿과 음료수를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그리곤 이부자리에 누워 제발 내일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소풍을 앞둔 어린이들의 심정은 그 순간만큼은 한결같았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도 날씨였다.

소풍 날 아침 부엌에 가면 김발에 밥을 펴서 갖가지 재료를 돌돌 말고 있는 엄마 옆에 이미 수북하게 김밥이 쌓여 있었다. 엄마가 은박도시락에 가지런하게 김밥을 넣고 있으면 옆에 앉아 꼬투리를 집어 먹었다. 아침밥도 먹는둥 마는둥, 김밥이 담긴 은박도시락을 받아 가방에 넣고 물통 가방까지 메면 소풍준비 완료. 아빠에게 용돈도 받았으니 이날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부모님은 평소엔 꺼내주지도 않던 카메라를 이날만큼은 특별히 만지게 해줬다.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말이다.

소풍을 어디로 가느냐는 상관없었다. 수업을 듣지 않는다는 것, 학교 밖으로 나들이를 간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웠으니까. 그러나 소풍의 목적을 자연감상과 현장학습, 심신단련에 둔 학교에서는 주로 걸어서 4~5㎞ 정도에 있는 명승고적을 목적지로 택했다. 대규모 인원이 교외로 움직이는 일이 쉽지 않아 1970~80년대 서울의 초·중·고교는 주로 창덕궁, 경복궁, 서오릉, 공릉 등 궁·능과 어린이대공원, 남산 어린이회관 등으로 소풍을 갔다. 지방에서는 인근의 사찰과 해수욕장, 산, 저수지 등이 주요 대상이었다.

아침나절 한참을 걸어 도착하고 나면 점심시간이 시작됐다. 삼삼오오 몰려 앉아 돗자리를 펼쳐놓고 도시락을 꺼냈다. 대부분 김밥을 싸오지만 간혹 유부초밥이나 볶음밥, 맨밥을 싸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김밥을 먹고 간식거리를 먹고 나면 오후에는 오락시간이었다. 초등학생들에게 소풍의 절정은 보물찾기였다. 아이들이 점심을 먹는 사이 교사들은 근처에 도장을 찍은 쪽지를 숨겨놓았다.

중·고교 소풍에선 장기자랑이 하이라이트였다. 80년대에는 포터블 카세트를 들고와서는 유행가에 맞춰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숨겨져 있던 ‘가수왕’이 그렇게 탄생했고 각 반을 대표하는 오락반장들의 숨은 개그 본능도 이날 빛을 발하곤 했다. 그러나 가장 인기를 끈 이들은 교사들의 어투와 행동을 흉내내는 친구들이었다.

90년대 들어 소풍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 마이카 시대가 도래해 가족 나들이 기회가 늘어나면서 더 이상 소풍은 특별한 행사가 아니게 됐다. 소풍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서도 이론이 제기됐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현장 체험학습’이 소풍을 대신하게 된 까닭이다.

이름이 바뀌면서 풍속도도 변했다. 궁이나 능 대신 놀이공원, 위락시설로 현장 체험학습을 가고 걷기대회나 마라톤을 하기도 한다. 특히 과중한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중·고교생들에게 ‘현장 체험학습’ 가는 날은 수업 없어 좋은 날, 학원 안 가도 되는 날과 동의어가 됐다. 엄마들도 더 이상 번거롭게 김밥을 싸지 않는다. 아이들은 용돈을 들고 가서 현장에서 음식을 사먹는다. 그러나 벚꽃 활짝 핀 이맘 때면 간절히 소풍을 기다리던 그때가 풍요로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00년을 엿보다](26) 재봉틀
ㆍ어머니와 누이의 꿈 담긴 ‘마법의 기계’
“이 재봉틀을 믿고 원주로 왔어. 이 재봉틀 믿고 <토지>를 시작했지. 실패하면 이걸로 삯바느질한다, 다만 내 문학에 타협은 없다….”

작가 공지영씨는 생전의 박경리 선생을 원주에서 만났을 때 재봉틀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하던 표정을 기억한다. 박 선생이 가장 아끼던 세 가지 물품은 재봉틀, 국어사전, 고향 통영의 목가구인 소목장이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가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라고 자랑한 것도 6·25 때도 들고 다녔다는 낡은 재봉틀이었다. 작가든, 재벌 부인이든 궁핍한 시절을 이겨온 어머니들에게 재봉틀은 옷이나 생활용품을 만드는 마법의 기계이자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는 든든한 무기였다. 밤새 침침한 눈을 비비며, 시큰거리는 어깨를 두드리며 재봉틀과 함께한 어머니 덕분에 자식들은 학교를 다니고 꿈을 이뤘다.

재봉틀은 1790년 영국의 T 세인트가 처음 기계화를 시도했고 1825년 프랑스의 시몽이 특허를 얻었다. 현대에 사용되는 재봉틀의 기초를 발명한 이는 미국의 엘리아스 하우다. 병약한 그는 신혼시절 집에 누워서 하루 종일 삯바느질에 매달리는 아내를 유심히 관찰했다. 반복적인 단순 작업인데 기계가 할 수 없을까 궁리하다 윗실과 밑실의 결합으로 바느질이 이뤄지는 재봉틀의 기초를 창안했다. 1845년 어렵사리 설명회를 열어 자신의 재봉틀을 소개했지만, 단 한 대도 팔지 못했다.

1851년 미국의 I M 싱어가 표준형 가정용 재봉기를 개발하면서 비로소 재봉틀이 대중화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의류생산의 공업화에 따라 각종 공업용 재봉기가 만들어지고 전문화·자동화되어 현재 그 종류는 5000종 이상을 헤아린다. 우리나라에서는 1938년 재봉기제작소에서 재봉기 수리를 시작한 이후 1957년 미국 국제개발처(AID) 자금으로 가정용 재봉 전용기계를 도입하며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했다. 현재 국내에서 제작되는 재봉틀은 70% 이상이 해외로 수출되고 있다.

재봉틀 소리는 한국의 산업화를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수많은 젊은이, 특히 여성들이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미싱’을 돌리며 더 나은 삶을 꿈꿨다.60~70년대만 해도 재봉틀은 훌륭한 혼수품이었다. 재봉틀질을 잘해 아이들 옷은 물론 식탁보 등을 만드는 것이 알뜰살뜰한 신부의 기본 소양으로 생각되던 시절이었다. 특히 싱어사에서 나온 튼튼한 미제 재봉틀은 ‘싱가 미싱’으로 불리며 고급 혼수품 대접을 받았다. 어머니는 해진 옷을 골라 적당히 잘라낸 후 재봉틀로 조각조각 이어서 딸아이의 예쁜 원피스를 지어주고, 초등학교 입학할 때는 헝겊 가방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당시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우리 엄마는 마술사.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을 만지면 옷도 나오고 커튼도 나와요”란 깜찍한 시를 썼다.

재봉틀 박음질 소리는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를 견인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박노해 시인은 ‘미싱’에 묶인 공장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시다의 꿈’이라는 시에 담아냈다. 수많은 청춘들이 바람도 안 통하는 공장에서, 혹은 시장통의 좁은 방에서 삶을 견뎌냈다. 재봉틀 바늘에 손이 찔려도, 공업용 재봉기에 손가락이 잘려도 조금은 더 여유로운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 믿던 이들은 어느덧 장년이 되었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해 보려던 청년 전태일은 불꽃으로 사라졌다.

경제가 급성장하고 어머니들도 세탁소나 수선집을 이용하면서 재봉틀은 한때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최근 재봉틀의 인기가 되살아났다. 그리운 시절의 향수 때문이 아니라 불경기 탓이다. 97년 외환위기 직후는 물론 2008년 국제 금융위기 이후 경기가 다시 싸늘해지면서 재봉틀을 찾는 이들이 늘어났다.

2010년 봄. 재봉틀 소리가 진동하던 동대문시장은 현대식 건물로 성형수술을 하는데, 아직도 어느 어두운 방에선 재개발 바람에 언제 쫓겨날지 몰라 마음이 타들어가는 어머니들이 재봉틀을 돌린다. 졸음을 깨려고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서로 싸우는 정치인, 뇌물 받은 검사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올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