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사건 창조하는 수수께끼의 영웅 실크로드 재발견 <19> 중앙아시아의 풍운아 티무르정수일의
1941년 발굴된 티무르의 묘당인 ‘구르 아미르’ 안이 모습. 앞에 보이는 관은 가짜로, 진짜는 같은 위치에서 지하로 4미터 정도 아래에 있다. 내부 사진 촬영은 돈을 받으며, 참배객들이 들러 예배를 보곤 한다.
책에는 “티무르 무덤에 손대지 말라. 손을 대면 전쟁이 일어나리라” 란 경구가…
역사에는 일세를 풍미한 영웅호걸들이 수두룩하지만 티무르(1336~1405)처럼 운세를 타고 세상에 두각을 나타낸 풍운아는 흔치 않다. 그는 선과 악, 공과 과, 행운과 불운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세파를 마술사처럼 용하게도 헤쳐나간 인물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70평생의 평가는 세월을 두고 엇갈렸으며, 늘 수수께끼의 인물로 입에 오르내렸다.
1966년 대지진 뒤 계획도시로 설계한 타슈켄트 신 시가지는 어느 길을 가던 중심부의 티무르 광장에 가닿는다. 광장 한복판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상징인양, 질주하는 말을 탄 티무르 동상이 서있다. 원래 그 자리엔 마르크스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현 대통령 카리모프가 내심 티무르 제국의 부활을 꿈꾼다고 하니, 티무르가 국부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배자, 칭기즈칸의 사위’ 자칭
티무르는 사마르칸드 남쪽으로 80km쯤 떨어진 케쉬(현 샤흐리사브즈) 부근 호쟈이루그 마을의 한 몽골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후일 제국을 세운 뒤 이곳에 궁전을 지었는데, 궁전 기둥에 “누가 내 힘을 의심하면 내가 지은 이 궁전을 보여드리라”는 티무르의 호기어린 한 마디가 아랍어로 새겨져 있다. 그만큼 화려함에는 자신만만했다. 변신과 임기응변의 능수인 티무르는 청장년 시절 여러 세력 사이를 줄타기하면서 기반을 다져갔다. 상전에 대한 모반을 다반사로 하고, 결맹한 의형제를 모살하면서까지 제국의 대권을 거머쥐었다. 왕위에 등극(1369)했지만, 칭기즈칸의 직계자손은 아니어서 감히 ‘칸’으로 일컫지는 못했다. 대신 칭기즈칸 후예의 딸을 취했다는 이유로 ‘구르간(사위)의 아미르(지배자)’라고 자칭했다.
티무르는 자신의 출신 부족들로 강력한 친위대를 꾸려 대외정복에 나섰다.약 30년간의 정복전쟁 결과 서쪽으로 소아시아와 지중해 동안의 시리아, 동쪽과 남쪽으로는 차카타이 칸국과 북인도, 북쪽으로는 카프카즈와 킵차크 칸국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그는 최후 일전인 오스만 터키와의 앙카라 전투(1402)에서 대승을 거두고 수도 사마르칸드에 개선한다. 전의에 불탄 노장은 70세 노구를 끌고 다시 동쪽의 명나라 원정을 시작했으나, 오트라르에서 급사한다. 기나긴 원정과정은 살육과 파괴로 얼룩졌다. 페르시아의 타크리트 성채를 공격할 때는 적병을 모조리 살상한 뒤 자른 머리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호라싼을 점령하고는 연와와 석회 속에 사람을 생매장해 성벽을 쌓기도 했다.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 등 그가 공략한 도시는 가차없이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이 ‘사건창조적’ 위인은 죽어서도 기행(奇行)을 멈추지 않았다. 일행은 7월 30일 사마르칸드에 온 첫날, 해가 기울어질 무렵에 그의 묘당인 ‘구르 아미르’를 찾았다. 타지크어로 ‘구르’는 ‘무덤’, ‘아미르’는 지배자(수령)’란 뜻이니 ‘지배자의 무덤’이 된다. 정문 좌우의 에메랄드빛 돔 두 개가 멀리서 봐도 유난히 반짝인다. 입구 주변에 있는 여러 그루의 굵직한 뽕나무는 긴 그늘을 드리워 더위에 지친 방문객들에게 음덕(蔭德)을 베푼다. 원래 이 무덤은 티무르가 페르시아 원정에서 전사한 손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나 그가 죽은 뒤 일가족 무덤이 되었다. 티무르의 흑갈색 연옥 관을 중심으로 주위에 스승과 아들, 두 손자들의 돌관이 놓여있다. 그런데 지상의 관들은 모두 비어있다. 가짜다. 진짜 관들은 4m 지하의 바로 그 위치에 그대로 놓여있다고 한다. 도굴을 막기 위한 연막술이었나 보다. 지하로는 통하지만, 일반인들의 참관은 불허한다.
이름대로 ‘절름발이’ 주검 확인
이 무덤의 실체가 밝혀진 것은 500여년이 지난 1941년 6월 21일 옛 소련 고고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관들을 해체해 보니, 주검 한 구는 다리가 불구였고, 다른 한 구는 목이 잘려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티무르는 이란과의 시스탄 전투에서 오른손과 오른다리에 부상을 입어 평생 절름발이였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바로 ‘절름발이’란 뜻의 티무르다. 이로써 불구의 다리를 지닌 주검이 티무르인 것으로 확인되고, 잘린 목의 주인은 손자 울루그벡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발견을 놓고 뼈있는 일화가 나돌았다. 발굴 현장에 허술한 옷차림의 세 노인이 나타나 책 한 권을 펼쳐보이면서 관에 손을 못대게 했다. 책에는 “티무르 무덤에 손 대지 말라. 손을 대면 전쟁이 일어나리라”란 경구가 적혀 있었다. 발굴단은 실없는 망언이라며 노인들을 쫓아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그 이튿날(22일) 독일의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했다. 그 뒤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은 무덤에 손댄 탓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믿는다. 어쩌면 티무르에 대한 절대적 숭배에서 비롯한 수호의식이거나, 전쟁을 피하려는 간절한 염원의 반영일 수도 있을 것이다.
티무르 시대의 유물치고 그의 풍운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지만, 중앙아시아 최대 사원이라는 사마르칸드의 비비하눔 사원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깃들어 더욱 흥미롭다. 1390년 인도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사원을 짓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제국 각지에서 공장 200명과 노동자 500명을 차출하고, 심지어 대리석 운반을 위해 인도에서 코끼리 95마리까지 끌어왔다. 매일 아침 작업장에 나가 독려하고, 음식물을 주며, 주화로 포상까지 했다. 높이 3짜리 쪽빛 돔을 비롯해 50m 높이의 미나라(예배시간을 알리는 첨탑), 가로 167m, 세로 109m의 대리석 안뜰, 천장을 받치는 400개의 대리석 기둥…. 한마디로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대형 건물을 지은 것이다. 안뜰 한복판에는 대리석 설교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아홉 개의 받침 다리 사이를 세 번 기어다니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몇몇 여인들이 설교단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화려했던 건물도 지진 같은 자연재난이나 인간들의 파괴에서 벗어날 수 없어 지금은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다. 뜯은 철문을 녹여 동전을 만들기도 하고, 마굿간이나 면화상점으로도 사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30년 복구계획에 따라 보수한다고는 하지만 여의치 않은 것 같다.
비비하눔하면 떠오르는 것이 유명한 ‘운명의 키스’ 전설이다. 티무르의 비 9명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비였던 비비하눔은 인도에 원정간 남편이 돌아오면 줄 선물로 사원을 짓기 시작했다. 모든 공정이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아치 하나만 미완으로 남아 있었다. 비를 연모하던 이란 출신의 젊은 건축가는 공사 완성을 조건으로 비에게 키스를 요구했다. 공사가 늦어지는 데 안달이 난 왕비는 자기 말고는 누구와의 키스도 허용한다고 했으나 건축가는 응하지 않는다. 비는 각기 다르게 색칠한 40개의 달걀을 내놓고는 겉모양은 다르지만 알맹이는 같지 않는가 하는 말로 그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자 건축가는 한 그릇에는 깬 달걀(일설은 찬 샘물)을, 다른 그릇에는 꿀(일설은 하얀 포도주)을 넣어 내밀면서 겉모습은 같아도 알맹이는 다르지 않는냐고 몰아세웠다. 비는 할 수 없이 키스를 허용한다. 키스 자국이 비의 볼에 반점으로 남았다.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이 반점을 단서 삼아 사건의 내막을 알고는, 건축가는 가차없이 처형하고, 비비하눔은 미나라에서 내던져 죽게 만들었다. 이후 티무르는 제국 여성들에게 천으로 얼굴을 가리도록 특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비하눔 ‘운명의 키스’ 전설
티무르의 풍운은 살육과 파괴, 기행만이 전부는 아니다. 역사 앞에 남긴 긍정적 일면도 묵과할 수는 없다. 특히 실크로드 요로에서 문명교류에 기여한 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제국 건설 과정에서 이질적 문명의 수용에 인색하지 않았다. 정복지의 우수한 건축사나 기술자들을 사마르칸드에 불러들였다. 영내 각지에서 건축자재를 반입해 사마르칸드를 중세 세계의 가장 화려한 도시로 건설했다. 시리아 등지에서 돔(원형지붕) 건축양식을 도입하고, 자신이 즐기는 청색이 주조를 이루도록 도시를 미화했다. 그리하여 사마르칸드는 ‘푸른 도시’, ‘이슬람 세계의 보석’, ‘동방의 진주’란 찬사를 자아냈다. 뿐만 아니라, 대상로(隊商路)를 정비하고 대상의 숙박소, 보호소를 도처에 설치했으며, 교역도 적극 장려했다. 멀리 지중해 동안에서 이란을 거쳐 사마르칸드와 타슈켄트, 탈라스를 지나 몽골에 이르는 동서 대상로가 원활히 소통되었다. 몽골제국 멸망에 따라 잠깐 중단되었던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육로는 그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티무르 제국시대 동서 문명간 ‘활자의 길’이 트이면서 우리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활자 제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개연성까지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티무르시대의 문화
정벌 뒤 반드시 이슬람문화 건설
아바베스크 문양·세밀화등 만개
티무르는 열광적인 ‘건축왕’이었다.이슬람 원조인 아랍인들이 검박하고 단촐한 유목형 건축문화를 좇았던 데 반해, 그는 현란하면서도 웅장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속속 지었다. 막대한 전리품으로 쌓은 금력과 이란, 인도 , 시리아 등 정벌한 실크로드 각지의 최고 건축·공예 장인들이 이런 성가의 밑천이 되었다. 그가 세계의 수도로 키웠던 사마르칸트는 거대한 원형 돔과 정밀한 세부장식이 특징인 대형 모스크와 메드레세, 바자르 등이 마천루처럼 들어차 당대 최첨단 건축의 전시장이 되었다. 티무르의 무덤인 구르 아미르, 비비아눔 모스크, 후대 건립된 레기스탄 광장의 대형 메드레세들은 지금도 티무르 건축의 영광을 증언한다. 특히 이들 건물의 돔과 벽면은 푸른 터키옥을 비롯한 다양한 색타일들의 세부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오늘날 흔히 ‘아라베스크’라고 부르는, 푸른 빛 톤을 주조로 한 각양각색의 원색 타일과 기하학적 문양 장식은 티무르 시대 이슬람 디자인을 대표하는 양식으로 뿌리 내린 것이다.
회화에서는 작은 화폭에 섬세한 세필과 채색으로 왕실·귀족들의 삶 등을 묘사하거나 교리 내용을 필사한 세밀화(미니어처)장르가 본격적으로 나타난다.이란의 시라즈, 타브리즈,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 등은 이 세밀화의 중심지였으며 필사화의 일인자였던 베자드 등의 거장들을 배출했다. 아울러 티무르 왕조의 궁정에서는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쓰면서 품격높은 궁정 시 문학을 꽃피우기도 했다.
티무르 왕조에서 부흥한 이슬람 세속문화는 뜻밖에도 힌두교의 땅 인도에서 계승된다. 제국이 망한 뒤 티무르 후손이던 페르가나의 시인 영주 바부르가 인도 북부에 무굴제국을 세워 왕조의 문화 전통을 새롭게 이어갔기 때문이다. 티무르 문화는 이란 지역의 찬란한 고대 페르시아 문화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전래의 주술 문화, 강력한 아랍 이슬람의 전통과 어우러져 이뤄진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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