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가을. 오대산 월정사 가는 길은 아득히 멀었다. 오대산에 생사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줄 큰 도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새벽같이 떠난 길이었다. 경주를 출발해 며칠 동안의 북행으로 강원도 땅 진부를 지나, 울울창창 곧고 푸른 아름드리 전나무숲을 걸어, 주단처럼 깔린 단풍든 낙엽을 밟으며 오대산의 품에 들었다. 전나무숲 끝에서 만난 월정사 스님은 ‘도인’에 대해서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그쳐 물었다.
“하루에 나무 일곱짐을 하고, 그 나무로 방마다 불을 때겠느냐?”
“예, 하겠습니다.”
“날마다 물을 길어 물독을 채울 수 있겠느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종교와 인생의 문제들로 고민에 휩싸였던 스물네살 청년 김창석. 그날로부터 산비탈을 나뒹굴면서 난생 처음 나뭇짐을 졌고, 오대천의 얼음장을 깨 물을 길어날랐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눈이 소담히 내리는 날, 만화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았다. 팔각구층탑 앞에서 공양의 예를 올리는 석조보살이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그날 사미승 ‘현해(玄海)’로 다시 태어난 청년의 나이 어느덧 일흔셋. 이제는 월정사의 큰어른인 회주스님이자 조계종단의 원로의원으로 오대산문의 꼿꼿한 전나무 한그루가 되었다.
월정사, 마음의 고향
1400년 전 신라의 자장율사가 개산한 문수도량 월정사는 한국전쟁 때 작전상 불태워졌다. 현해스님이 처음 월정사에 왔을 때는 허름한 법당 겸 큰방 한 채가 전부였다. 그 월정사가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오늘의 대찰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오대산 문중 한암스님 맥을 잇는 당대의 고승 탄허스님과 제자 만화스님, 그리고 손제자인 현해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20년 동안이나 월정사 주지를 지낸 만화스님은 은사인 탄허스님을 모시고 1964년 적광전을 중창한 것을 시작으로 전각 10여동을 살려냈다. 현해스님은 12년 동안 주지를 지내며 용검루, 삼성각, 범종루, 보장각, 불이문, 성보박물관, 진부유치원, 서별당 등을 고쳐 짓거나 새로 지었다. 월정사 규모는 불타기 전보다 훨씬 커졌다.
현해스님은 지금 오대산에 없다. 3년 전 주지 소임을 놓는 날로 월정사를 떠났다. 지금은 서울 도봉구 쌍문동 북한산 자락에서 월정사 서울 포교원인 법종사를 일구고 있다. 상노스님(한암)과 노스님(탄허), 은사스님(만화)의 기일과 생일에만 진부행 고속버스에 오른다. 문중과 관련된 큰 법회에도 불려나가곤 한다.
“이제 모든 일을 내려놓고 회향을 준비해야지요. 월정사는 나의 본향입니다.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에서 월정사를 만나고, 그곳에 출가해서 일생의 스승을 만나고, 그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는 공부를 했다는 것이 너무 큰 행운이지요. 생사의 고통이 다한 뒤에도 천년 새벽 숲길과 계곡이 있는 월정사에 머물고 싶어요.”
현해스님은 5층으로 된 법종사에 딸린 요사채에 주석한다. 방은 산사의 ‘조실당’ ‘염화실’의 선기가 느껴지기보다 학자의 연구실 같은 분위기다. 그는 ‘법화경’(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연구에 관한 한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학자스님이기도 하다.
스님은 요즘 붓글씨에 빠져 있다. 그는 “방명록을 쓸 때 악필이나 면하려고 시작했다”며 쓰고 있던 ‘隨處作主’(수처작주)의 글씨와 붓과 벼루를 한 쪽으로 치웠다. 수처작주는 ‘임제록’의 한 구절로 ‘어디에 있건 그곳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다.
“이제 걸음마 단계지요. 공부란 게 다생의 습을 바꾸는 일이니 쉽게 되겠어요. 인간은 본래 부처인데 어느 순간 번뇌를 일으키고 잡념이 들어 중생이 됐거든. 글씨도 순간적으로 일념이 흐트러지면 망치는 겁니다.”
스님은 “평생 처음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 같다”며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젊은 시절 고생한 탓에 약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소임을 놓으니까 몸무게가 10㎏이나 늘었다”고 껄껄 웃었다.
재물은 하루 아침의 먼지와 같다
반년이 지나서야 그렇게 뵙고 싶었던 도인 탄허스님을 만났다. 그러나 먼 발치에서 큰스님을 뵙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신 ‘초발심자경문’이 생사의 목마름을 해결해줄 한 모금 감로수로 다가왔다. ‘3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한평생 탐착한 재물은 하루 아침의 먼지와 같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초발심자경문을 읽고 또 읽었다. 당시 월정사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감자와 옥수수만으로 겨울을 났다. 스님들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어느날 모처럼 시주로 들어온 쌀 몇 톨을 땅에 흘렸다가 두시간 넘게 꼼짝 못하고 서서 은사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우리 스님은 제자들이 잘못하면 장작이든 부지깽이든 잡히는 대로 집어들고 두들겨 패는 무서운 분이었어요. 스님에게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빈도(貧道) 노릇’ 하나는 확실하게 배웠지요.”
적멸보궁에 올라가 21일간의 단식기도를 한 뒤 좀더 철저하게 공부를 하고 싶어 해인사 강원을 찾아갔다. 당시 강원에서 공부하는 학인들은 대부분 10대의 스님들이었다. 20대 후반의 그를 보고 “누구네 은사가 찾아왔다”고 수군거렸다. 도저히 공부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종단에서 학비를 대주는 1기 종비생(宗費生)으로 동국대 불교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은사스님은 ‘중이 학교 다니는 것은 환속할 준비하는 것’이라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생활비는커녕 방학 때 찾아가도 달랑 진부에서 마장동까지 갈 시외버스 차비만 줄 뿐이었다. 북한산 문수사 등에서 부전을 살며 생활비를 마련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 젊은 학생들과 경쟁하면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73년 일본 고자마와 대학 불교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일본에서 8년6개월 동안 공부했다. 고자마와대 불교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와세다 대학과 다이쇼대학에서 동양 철학과 천태학을 연구했다.
82년 조계종 중앙승가대학이 생기면서 학장을 맡은 석주스님이 그를 찾았다. 칠보사에 계시던 석주스님은 대학원 시절부터 그를 지원해준 고마운 스승이다. 석주스님이 써준 ‘處染常淨’(처염상정)은 그가 평생 머리맡에 걸어두고 되새기는 글귀다. 더러운 곳에 처하더라도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연꽃 같은 삶을 살라는 뜻. 스님은 “연꽃과 같이 중생 속에 뿌리를 박고 향기를 풍기면서 바른 가르침을 주는 것이 바로 법화경의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월정사 주지를 맡아 오대산에 돌아온 스님은 은사스님이 시작한 중창불사의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불사를 하면서 문득문득 은사를 꼭 빼닮은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랐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청빈은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지요. 수행자뿐 아니라 정치인과 공무원, 기업가들도 돈을 무섭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은 늘 중생심과 부처님 마음을 두고 선택의 싸움을 하고 있어요. 권력은 여러 사람의 행복을 위해 쓰면 보살의 지위가 되지만 사리를 채우기 위해 쓰면 마구니의 자리에 지나지 않지요.”
그는 휴지 한 장도 몇 번씩 쓰고, 양말도 기워서 신는다. 제자들에게 여비를 줄 때도 1만원짜리 한 장이면 그만이다. 움직일 때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한다. 검소함이 몸에 밴 그를 두고 스님들은 ‘왕소금’이라고 놀리곤 한다. 스님은 평생 밤나들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밤에 나돌아다녀서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며 “스님이든 일반인이든 어두운 데서 딴짓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극락 정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평화롭게 잘살면 이 땅이 극락 정토요, 갈등과 불화를 겪으면 지옥 예토지요. 우리 사회가 갈등이 심한 것은 우리 모두가 지은 공동의 업이자, 이 시대가 지은 현생업이지요. 한마음 돌이켜서 상대방을 예쁜 꽃으로 바라보고, 부처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 땅이 부처님의 세계로 바뀔 것입니다.”
그는 “그릇에다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고, 장을 담으면 장그릇이듯이 내 속에 부처를 담으면 그대로 부처”라고 했다.
현해스님의 귀는 말 그대로 ‘부처님 귀’다. 큼지막하고 두툼하게 잘 생겼다. 커다랗게 도드라진 귀를 보면 그가 평생 듣는 일로 수행을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부처님 오신날이 지나고 오대산에도 봄이 저문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천리 밖 월정사 저녁예불 그윽한 종소리를 듣는다. 초발심의 그날처럼.
-평생을 강의·연구 몰두…‘법화경요품강의’ 펴내-
현해스님은 중앙승가대학과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오랫동안 법화경을 강의했다. 대승불교 사상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는 법화경은 대승경전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45년 동안 설법하면서 마지막으로 법화경을 설했다. 법화경은 독송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경전으로 깊은 종교적 감명을 받게 된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비유나 예화가 많기 때문이다.
스님은 평생에 걸친 법화경 강의와 연구의 결과물들을 모아 지난 1996년 ‘법화경요품강의’를 펴냈다. 지난해에는 산스크리트어본·한문번역본·영문번역본·한글번역본 등 4개 국어 대조본 ‘묘법연화경’을 3권으로 완간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자료조사에 3년, 번역에만 7년을 매달렸다. 산스크리트어본은 2개 본을 참조했다. 산스크리트본과 한문본의 차이점과 같은 점을 비교하고 그 원인을 규명해내는 작업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불교계에서는 4개 국어 대조본 묘법연화경의 출간을 대조본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중요한 작업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해스님은 1935년 울산에서 아홉남매의 여덟째로 태어났다. 1958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만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92년부터 2004년 1월까지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조계종 제3·7·10대 종회의원을 지냈으며, 지난달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법화경 요품 강의’ ‘마하지관 연구’ ‘묘법연화경’ 등을 펴냈으며 논문으로는 ‘법화종요연구’ 등이 있다.
‘법화경’ 연구의 권위자인 현해스님은 “연꽃과 같이 중생 속에 뿌리를 밖고 향기를 풍기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가르침이 바로 법화경의 정신”이라고 설명한다.
“하루에 나무 일곱짐을 하고, 그 나무로 방마다 불을 때겠느냐?”
“예, 하겠습니다.”
“날마다 물을 길어 물독을 채울 수 있겠느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종교와 인생의 문제들로 고민에 휩싸였던 스물네살 청년 김창석. 그날로부터 산비탈을 나뒹굴면서 난생 처음 나뭇짐을 졌고, 오대천의 얼음장을 깨 물을 길어날랐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눈이 소담히 내리는 날, 만화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았다. 팔각구층탑 앞에서 공양의 예를 올리는 석조보살이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그날 사미승 ‘현해(玄海)’로 다시 태어난 청년의 나이 어느덧 일흔셋. 이제는 월정사의 큰어른인 회주스님이자 조계종단의 원로의원으로 오대산문의 꼿꼿한 전나무 한그루가 되었다.
월정사, 마음의 고향
1400년 전 신라의 자장율사가 개산한 문수도량 월정사는 한국전쟁 때 작전상 불태워졌다. 현해스님이 처음 월정사에 왔을 때는 허름한 법당 겸 큰방 한 채가 전부였다. 그 월정사가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오늘의 대찰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오대산 문중 한암스님 맥을 잇는 당대의 고승 탄허스님과 제자 만화스님, 그리고 손제자인 현해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20년 동안이나 월정사 주지를 지낸 만화스님은 은사인 탄허스님을 모시고 1964년 적광전을 중창한 것을 시작으로 전각 10여동을 살려냈다. 현해스님은 12년 동안 주지를 지내며 용검루, 삼성각, 범종루, 보장각, 불이문, 성보박물관, 진부유치원, 서별당 등을 고쳐 짓거나 새로 지었다. 월정사 규모는 불타기 전보다 훨씬 커졌다.
현해스님은 지금 오대산에 없다. 3년 전 주지 소임을 놓는 날로 월정사를 떠났다. 지금은 서울 도봉구 쌍문동 북한산 자락에서 월정사 서울 포교원인 법종사를 일구고 있다. 상노스님(한암)과 노스님(탄허), 은사스님(만화)의 기일과 생일에만 진부행 고속버스에 오른다. 문중과 관련된 큰 법회에도 불려나가곤 한다.
“이제 모든 일을 내려놓고 회향을 준비해야지요. 월정사는 나의 본향입니다.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에서 월정사를 만나고, 그곳에 출가해서 일생의 스승을 만나고, 그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는 공부를 했다는 것이 너무 큰 행운이지요. 생사의 고통이 다한 뒤에도 천년 새벽 숲길과 계곡이 있는 월정사에 머물고 싶어요.”
현해스님은 5층으로 된 법종사에 딸린 요사채에 주석한다. 방은 산사의 ‘조실당’ ‘염화실’의 선기가 느껴지기보다 학자의 연구실 같은 분위기다. 그는 ‘법화경’(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연구에 관한 한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학자스님이기도 하다.
스님은 요즘 붓글씨에 빠져 있다. 그는 “방명록을 쓸 때 악필이나 면하려고 시작했다”며 쓰고 있던 ‘隨處作主’(수처작주)의 글씨와 붓과 벼루를 한 쪽으로 치웠다. 수처작주는 ‘임제록’의 한 구절로 ‘어디에 있건 그곳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다.
“이제 걸음마 단계지요. 공부란 게 다생의 습을 바꾸는 일이니 쉽게 되겠어요. 인간은 본래 부처인데 어느 순간 번뇌를 일으키고 잡념이 들어 중생이 됐거든. 글씨도 순간적으로 일념이 흐트러지면 망치는 겁니다.”
스님은 “평생 처음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 같다”며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젊은 시절 고생한 탓에 약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소임을 놓으니까 몸무게가 10㎏이나 늘었다”고 껄껄 웃었다.
재물은 하루 아침의 먼지와 같다
반년이 지나서야 그렇게 뵙고 싶었던 도인 탄허스님을 만났다. 그러나 먼 발치에서 큰스님을 뵙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신 ‘초발심자경문’이 생사의 목마름을 해결해줄 한 모금 감로수로 다가왔다. ‘3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한평생 탐착한 재물은 하루 아침의 먼지와 같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초발심자경문을 읽고 또 읽었다. 당시 월정사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감자와 옥수수만으로 겨울을 났다. 스님들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어느날 모처럼 시주로 들어온 쌀 몇 톨을 땅에 흘렸다가 두시간 넘게 꼼짝 못하고 서서 은사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우리 스님은 제자들이 잘못하면 장작이든 부지깽이든 잡히는 대로 집어들고 두들겨 패는 무서운 분이었어요. 스님에게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빈도(貧道) 노릇’ 하나는 확실하게 배웠지요.”
적멸보궁에 올라가 21일간의 단식기도를 한 뒤 좀더 철저하게 공부를 하고 싶어 해인사 강원을 찾아갔다. 당시 강원에서 공부하는 학인들은 대부분 10대의 스님들이었다. 20대 후반의 그를 보고 “누구네 은사가 찾아왔다”고 수군거렸다. 도저히 공부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종단에서 학비를 대주는 1기 종비생(宗費生)으로 동국대 불교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은사스님은 ‘중이 학교 다니는 것은 환속할 준비하는 것’이라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생활비는커녕 방학 때 찾아가도 달랑 진부에서 마장동까지 갈 시외버스 차비만 줄 뿐이었다. 북한산 문수사 등에서 부전을 살며 생활비를 마련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 젊은 학생들과 경쟁하면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73년 일본 고자마와 대학 불교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일본에서 8년6개월 동안 공부했다. 고자마와대 불교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와세다 대학과 다이쇼대학에서 동양 철학과 천태학을 연구했다.
82년 조계종 중앙승가대학이 생기면서 학장을 맡은 석주스님이 그를 찾았다. 칠보사에 계시던 석주스님은 대학원 시절부터 그를 지원해준 고마운 스승이다. 석주스님이 써준 ‘處染常淨’(처염상정)은 그가 평생 머리맡에 걸어두고 되새기는 글귀다. 더러운 곳에 처하더라도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연꽃 같은 삶을 살라는 뜻. 스님은 “연꽃과 같이 중생 속에 뿌리를 박고 향기를 풍기면서 바른 가르침을 주는 것이 바로 법화경의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월정사 주지를 맡아 오대산에 돌아온 스님은 은사스님이 시작한 중창불사의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불사를 하면서 문득문득 은사를 꼭 빼닮은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랐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청빈은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지요. 수행자뿐 아니라 정치인과 공무원, 기업가들도 돈을 무섭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은 늘 중생심과 부처님 마음을 두고 선택의 싸움을 하고 있어요. 권력은 여러 사람의 행복을 위해 쓰면 보살의 지위가 되지만 사리를 채우기 위해 쓰면 마구니의 자리에 지나지 않지요.”
그는 휴지 한 장도 몇 번씩 쓰고, 양말도 기워서 신는다. 제자들에게 여비를 줄 때도 1만원짜리 한 장이면 그만이다. 움직일 때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한다. 검소함이 몸에 밴 그를 두고 스님들은 ‘왕소금’이라고 놀리곤 한다. 스님은 평생 밤나들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밤에 나돌아다녀서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며 “스님이든 일반인이든 어두운 데서 딴짓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극락 정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평화롭게 잘살면 이 땅이 극락 정토요, 갈등과 불화를 겪으면 지옥 예토지요. 우리 사회가 갈등이 심한 것은 우리 모두가 지은 공동의 업이자, 이 시대가 지은 현생업이지요. 한마음 돌이켜서 상대방을 예쁜 꽃으로 바라보고, 부처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 땅이 부처님의 세계로 바뀔 것입니다.”
그는 “그릇에다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고, 장을 담으면 장그릇이듯이 내 속에 부처를 담으면 그대로 부처”라고 했다.
현해스님의 귀는 말 그대로 ‘부처님 귀’다. 큼지막하고 두툼하게 잘 생겼다. 커다랗게 도드라진 귀를 보면 그가 평생 듣는 일로 수행을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부처님 오신날이 지나고 오대산에도 봄이 저문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천리 밖 월정사 저녁예불 그윽한 종소리를 듣는다. 초발심의 그날처럼.
-평생을 강의·연구 몰두…‘법화경요품강의’ 펴내-
현해스님은 중앙승가대학과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오랫동안 법화경을 강의했다. 대승불교 사상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는 법화경은 대승경전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45년 동안 설법하면서 마지막으로 법화경을 설했다. 법화경은 독송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경전으로 깊은 종교적 감명을 받게 된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비유나 예화가 많기 때문이다.
스님은 평생에 걸친 법화경 강의와 연구의 결과물들을 모아 지난 1996년 ‘법화경요품강의’를 펴냈다. 지난해에는 산스크리트어본·한문번역본·영문번역본·한글번역본 등 4개 국어 대조본 ‘묘법연화경’을 3권으로 완간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자료조사에 3년, 번역에만 7년을 매달렸다. 산스크리트어본은 2개 본을 참조했다. 산스크리트본과 한문본의 차이점과 같은 점을 비교하고 그 원인을 규명해내는 작업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불교계에서는 4개 국어 대조본 묘법연화경의 출간을 대조본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중요한 작업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해스님은 1935년 울산에서 아홉남매의 여덟째로 태어났다. 1958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만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92년부터 2004년 1월까지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조계종 제3·7·10대 종회의원을 지냈으며, 지난달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법화경 요품 강의’ ‘마하지관 연구’ ‘묘법연화경’ 등을 펴냈으며 논문으로는 ‘법화종요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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