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원수인 양아버지,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햄릿을 뛰어넘는 비극작품 ‘조씨고아’
- 비극(悲劇)은 약점을 가진 인간이 그 약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빚어진 결과이고, 관객은 이런 비극의 주인공에게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피치 못할 운명 속에 놓인 주인공의 비극적 결말은 관객에게 무한한 공포와 연민을 가져다주곤 하였다.
그중에서도 복수에 관한 비극은 관객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복수 비극은 파란만장한 내용과 극적인 반전, 멜로가 얽히면서 많은 작가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서양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최고의 복수 비극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덴마크의 국왕이 죽자 왕의 동생 클로디어스는 형수인 왕비 거트루드를 아내로 맞이하고 왕위에 오른다. 왕자 햄릿(Hamlet)은 어머니의 재혼에 충격을 받는데 선왕의 망령이 나타나 자신이 동생에게 독살되었다고 말한다. 햄릿은 처음에 망령의 말을 의심하였지만 왕의 범행을 확인하고 왕을 죽일 기회를 노리다가 결국 독 묻은 칼로 왕을 죽인다.
그러나 햄릿 자신도 독 묻은 칼에 찔려 숨을 거둔다는 내용이다. 중국에도 햄릿에 비견되는 비극 작품이 있으니 바로 ‘조씨고아(趙氏孤兒)’이다. 청대의 유명한 학자 왕국유(王國維)는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에서 관한경(關漢卿)의 ‘두아원(竇娥寃)’과 함께 ‘조씨고아’를 “세계의 유명한 비극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손꼽았다.
- 춘추시대 실제사건 배경
‘조씨고아’는 춘추시대의 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문학적으로 재창조한 원대 잡극(雜劇)이다. 이와 관련한 내용이 ‘좌전’ ‘사기·조세가(趙世家)’, 유향(劉向)의 ‘신서(新序)’와 ‘설원(說苑)’ 등에 실려 있다. 이 작품의 작가는 원(元)대 기군상(紀君祥·나고 죽은 해를 알 수 없음)이다. 기천상(紀天祥)이라고도 하며 대도(大都·북경) 사람이었다.
춘추시대 진(晋)의 대신 조순(趙盾)은 양공(襄公)을 보좌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이끌었다. 양공이 죽자 아들 영공(靈公)이 뒤를 이었는데, 아버지와 달리 정사를 뒤로 하고 향락을 일삼았다. 조순은 여러 차례 간언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자 조정을 떠난다. 후에 조순의 형제 조천(趙穿)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공을 살해하고 영공의 동생인 성공(成公)을 권좌에 앉힌다. 조순도 다시 부름을 받아 조정에 복귀한다.
이때 조순의 아들 조삭(趙朔)은 성공의 누이와 결혼한다. 성공이 죽자 아들 경공(景公)이 즉위한다. 당시 대부였던 도안고(屠岸賈)는 한때 영공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 영공 시해사건으로 인해 조씨 가문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경공이 즉위하자 도안고는 경공에게 영공 시해사건을 언급하며 그 주모자가 조순이라고 음해하였으며, 왕족을 능멸한 죄로 조씨 가문의 멸족을 간청하였다. 당시 조순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경공은 조순의 아들 조삭을 필두로 조씨 일가 300여명을 멸족시켰다.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다
그러나 단 한 명 조삭의 부인만은 살려두었다. 그녀가 성공의 누이라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대신에 도안고는 임신 중이던 그녀를 가두어 놓고 아이가 나오는 즉시 화근을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조삭의 친구이자 민간 의원이던 정영(程?)이 죽음을 무릅쓰고 도안고의 집에 뛰어들어 그 고아를 약상자에 숨겨 사라졌다.
악독한 도안고는 아이가 사라진 것을 알고 사흘 안에 고아를 찾지 못하면 전국의 갓난아이를 모두 없애버리겠노라며 호통을 쳤다. 당시 정영에게도 갓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조삭의 문객으로 조삭에게 깊은 호의를 입었던 공손저구(公孫杵臼)라는 인물과 상의하여 아이를 바꿔치기하기로 입을 맞추었다. 즉 정영이 자신의 아이를 공손저구의 집으로 보낸 다음 도안고에게 공손저구가 조씨의 고아를 숨기고 있다고 밀고하기로 한 것이다. 조씨의 고아를 살리기 위해 정영은 자신의 아들을 내놓고, 공손저구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이렇게 목숨을 건진 조씨의 고아 조무(趙武)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정영의 아들로 자라났다. 심지어는 조금의 의심도 받지 않고 도안고의 양아들이 되었다. 도안고는 조씨의 마지막 씨앗인 조무를 제거했다고 여기고, 이 일에 공이 큰 정영을 우대하였으며, 그의 아들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 자신의 곁에 두고 그를 키웠다. 20여년이 지난 뒤 조무는 청년이 되었고, 어느 날 정영으로부터 사건의 진상을 듣게 되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고아는 복수의 의지를 불태웠다. 후에 도공(悼公)이 즉위하자 조씨의 고아는 대신 위강(魏絳)의 도움으로 도안고를 죽이고 마침내 조씨 집안의 원한을 갚을 수 있었다.
- 역사에 허구 가미, 진화 거듭
물론 잡극 ‘조씨고아’의 등장인물과 세부 내용은 역사서의 내용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각 문학작품에 따라 세부 내용이 다르다. 문학작품과는 달리 역사서는 조씨 일가의 멸족 시기를 기원전 583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복권 시기를 기원전 581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씨 일가의 재난도 외부의 요인이 아닌 가족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됐다고 적고 있다.
즉 조카며느리인 조장희(趙庄姬)가 숙부 조영제(趙?齊)와의 통간으로 궁지에 몰리자 자신의 아들 조무(趙武)를 적통으로 내세울 목적으로 조동(趙同)과 조괄(趙括)이 모반을 꾀하였다고 무고(誣告)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가문의 멸족이 아닌 두 형제의 죽음으로 끝난 사건이었다. 도안고란 인물은 허구의 인물이며, 조씨 가문 내부의 갈등을 틈타 당시 조씨 가문과 권력을 다투던 난(欒)씨 가문의 난서(欒書)라는 인물이 조씨 형제의 처형을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극(?)씨와 난씨, 한(韓)씨는 진(晋)의 유력 가문으로 권력을 다투고 있었다. 그리고 공손저구와 정영은 조씨 가문의 가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중국의 역사가 양백준(楊伯俊)의 경우는 사마천이 ‘사기·조세가’에서 조씨 고아의 부분을 너무 자세하고 길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야기 자체를 사실이 아닌 ‘전국시대의 전설’로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씨 가문의 이야기는 사실이며, 조씨 고아 조무는 후에 각 제후국을 소집하여 병력 감축회의를 주재함으로써 각 제후국들 간에 휴전을 이끌어내는 등 국내외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후에 조무의 증손자 조양자(趙襄子)는 한씨와 위(魏)씨 가문과 함께 진(晋)을 삼분한 뒤 조(趙)나라를 세운다.
복수·의리·반전… 흥행요소 갖춰
문학작품에서도 세부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 일부 작품에서는 한때 조씨의 보살핌을 받았던 한궐(韓厥)이 경공(景公)이 즉위하자 조씨 가문의 명예 회복을 간청하여 조무를 데려와 조씨 가문의 복권을 이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조무는 경공의 명으로 도안고를 비롯한 일가를 멸족시킨다.
‘조씨고아’는 문학작품으로 극의 이야기 전개와 극적 갈등이 뛰어나고 인물의 형상 또한 깊은 감동을 선사하여 이후 중국의 많은 문학작품에 영감을 주었으며 소설과 각종 연극 작품,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재창조되었다. 한 맺힌 도안고의 악랄한 복수, 갓난아이의 숨 막히는 구출 작전, 정영과 공손저구의 감동적인 충성과 의리, 도안고가 그렇게 죽이고자 했던 조씨의 고아를 자신의 손으로 키운다는 극적 설정, 성인이 되어 진상을 알게 된 조씨고아 조무의 고뇌와 복수 등 여러 면에서 장점을 가진 최고의 문화 콘텐츠라 아니할 수 없다.
‘동주 열국지’와 남희(南戱) ‘조씨고아원보원(寃報寃)’, 명 전기(傳奇) ‘팔의기(八義記)’, 경극의 수많은 작품 등이 모두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중국의 여작가 인리촨(尹麗川)이 동명의 현대극으로 각색하였고, 2003년에는 진하이수(金海曙)가 동명 소설을 출판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조씨고아’는 18세기부터 이미 외국에 소개되어 영어와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프랑스 선교사가 1731년 광주(廣州)에서 ‘중국비극 조씨고아’란 이름으로 프랑스어 번역본을 만들었고, 1734년과 1735년에 파리의 잡지에 이 번역본을 싣자 유럽에서 큰 반응을 얻었다. 프랑스 작가 볼테르는 이 번역본을 토대로 1753년부터 1755년까지 ‘조씨고아’를 각색하여 ‘중국의 고아(中國孤兒)’라는 이름의 극본을 완성한 뒤, 1755년 8월 20일 파리의 각 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영국 극작가 머피도 볼테르의 작품을 참고하여 새로운 ‘중국고아’ 극본을 만들어 런던에서 공연하여 성공하였다.
- 영화·드라마서 단골 소재
한국 연극계에서도 ‘조씨고아’의 비극성을 높이 평가하여 자주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극단 미추는 창단 20주년 기념작으로 ‘조씨고아’를 선택하여 중국의 차세대 여류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티엔친신(田沁?)의 각색 및 연출로 2006년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영화와 드라마 부문에서도 ‘조씨고아’ 이야기는 수차례 작품화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중국의 거장 천카이거(陳凱歌)가 ‘조씨고아’를 영화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어 화제다. 천카이거는 2008년 4월부터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작품 제작에 매진하고 있다. 천카이거는 10여년 전 ‘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 제작 당시 진왕궁(秦王宮) 세트를 건립했던 것처럼 절강(浙江)성 상산(象山)에 거대한 규모의 ‘고아성(孤兒城)’을 지어 촬영 중이다.
한동안 한국 배우 송혜교의 출연에 관한 진위 여부, 세트장의 붕괴 사고, 연이은 배우들의 탈퇴와 배역 교체 등으로 힘든 과정을 겪기도 했다. ‘패왕별희’와 ‘인생(活着)’에서 개성 넘치는 연기를 펼쳤던 연기파 배우 거여우(葛優)가 정영 역을 맡았고, 역시 ‘패왕별희’에서 패왕 역을 연기했던 장펑이(張豊毅)가 공손저구 역을 맡게 되었으며, 악역인 도안고 역에는 왕쉐치(王學圻)가, 대장군 한궐 역에는 황샤오밍(黃曉明)이, 장희공주 역에 송혜교 대신 미녀배우 판빙빙(范??)이, 조씨고아 조무 역에는 15세의 신인배우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거장 천카이거가 메가폰
천카이거는 ‘조씨고아’를 작품 소재로 선택한 이유로 기승전결이 뚜렷한 구조, 충만한 호연지기의 정신, 남성적 혈기와 격정, 충성과 의리, 사랑과 복수란 정서를 꼽았다. 천카이거라는 거장의 손에서 ‘조씨고아’가 어떻게 재탄생될지 자못 기대가 크다.
지난 3월 13일에는 ‘조씨고아’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던 산서(山西)성 우현(盂縣)에서 감독과 주요 출연진, 고위 공무원 및 지역주민이 모여 ‘조씨고아’ 촬영을 기념하는 성대한 축하연을 열기도 하였다. 현재 우현의 장산(藏山, 본명은 우산·盂山)은 정영이 조씨고아 조무를 숨겨 15년 동안 은거한 곳으로 알려지면서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장산’이란 이름도 조무가 ‘숨어살던 곳’이란 뜻으로 붙여졌다. 그곳에 가면 조무를 기리는 ‘문자사(文子祠)’를 비롯하여 정영과 공손저구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최근에는 ‘문자사’ 근처에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보여주는 ‘춘추전국성’을 지어 보다 많은 관광객 유치에 힘쓰고 있다. 중국인들은 역사와 전설을 작품화하여 여러 문화상품으로 확대 재생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경제대국을 넘어 문화대국을 지향하는 중국의 이런 행보는 자못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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