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23

醉月 2010. 5. 21. 08:12

오아시스 화원서 ‘3총사’ 학맥 꽃피워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22> 부하라 학풍

» 부하라의 상징인 미르 아랍 마드라사(신학교) 들머리 모습. 이슬람 부흥을 누렸던 15세기 티무르 시대에 지은 이 신학교는 청백색 모자이크 타일로 식물·문자문양을 기묘하게 조화시킨 장식은 당대 건축미술의 백미다. 과거에 많은 신학생들이 공부를 했다는 이곳은 관광객들만 드문드문 드나들며 옛 영광의 흔적만 보이고 있다.

 

1950년대 카이로 대학에 유학할 시절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서 온 무슬림 유학생 두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소련 체제 아래서 그들이 이슬람 신학을 공부했다는 게 좀 의아스러웠다. 그러나 50여년이 지난 이번 답사에서 그 의아심이 풀렸다.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이곳 부하라의 미르 아랍 마드라사(신학교)만이 공식 인가를 받아 7년간의 신학 교육 과정이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쯤 그 친구들은 어느 사원의 이맘이나 마드라사 교수 자리에 있으련만 만나지는 못했다. 그들 스스로 부하라 학맥을 잇는 후계자라고 자부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부하라 학맥,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원래 부하라는 기원전 5세기께부터 번영을 거듭해 왔지만, 학문만큼은 그리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가 8세기 이슬람화하면서 동방 이슬람 세계의 학문 중심으로 떠올랐다. 사실 이슬람은 불모지 사막에서 출현했지만, 애초부터 교육과 학문에 지대한 관심을 돌렸다. 경전 〈꾸르안〉을 보면 알라의 첫 계시가 “읽어라, 창조주이신 알라의 이름으로”란 한 절이다. 무지에서 벗어남을 절체절명의 첫 과제로 명한 구절이라고 경전 주석가들은 해석한다. ‘꾸르안’은 이 절의 명령형 동사 ‘읽어라’의 어근인 ‘읽기’나 ‘읽음’이란 뜻이다. 교조 무함마드는 문도들에게 읽고 쓰기를 배우며 지식인을 존경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전쟁 포로 한 사람이 무슬림 어린이 10명에게 읽고 쓰기를 깨우쳐주면 곧 석방했다고 하니, 배움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10세기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전후해 아랍 고유 학문과 외래 학문은 하나의 용광로 속에 녹아서 이슬람 특유의 학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 체계 속에서 학문의 다극화가 이뤄지면서 이슬람 세계 곳곳에 지역별 학문 중심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찍이 헬레니즘 문화를 맛본데다 페르시아와 인도, 중국 문화의 영향까지 받은 요충지 부하라가 바로 그런 중심지 중 하나였다. 그 선도자들이 부하라 학맥의 3총사로 불리는 성훈(聖訓) 학자 부하리와 의학자 이븐 시나, 수학자 콰리즈미다. 이들은 이슬람 세계를 두루 편답하면서 자신들의 학문세계를 개척했으며, 부하라에 돌아와서 신학교와 사원들을 전전하면서 학문을 전수했다. 이들 3총사의 학문적 업적은 이슬람 세계뿐 아니라, 유럽에도 널리 알려져 근대 학문의 기반을 닦는 데 불후의 기여를 했다.

 

① 무함마드 언행록 모은 ‘성훈학의 대가’ 부하리

이슬람 성훈학(‘하디스’)의 태두인 부하리(810~870)의 본명은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 알 주아피다. 부하리는 부하라 출신이란 뜻으로서, 무슬림들은 출신지를 강조하기 위해 가끔 이렇게 출신지를 사람이름으로 대용한다. 성훈이란 교조 무함마드의 언행록을 말하는데, 생전 무함마드가 행한 말과 행동뿐 아니라, 남의 말·행동에 대한 견해(인정, 거부, 묵과 등)까지 포함한다. 성훈은 교조의 언행록이므로 불경이나 성경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경전에 속하나, 이슬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무함마드의 언행은 어디까지나 자연인의 언행으로 절대신 알라의 계시인 〈꾸르안〉과는 동일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언행은 정도(正道)인 만큼 믿고 따라야 하므로 ‘하디스’에는 ‘준경전’의 격을 부여하고 샤리아(이슬람법)에서는 〈꾸르안〉 버금가는 법원(法源)으로 인정한다.

성훈록인 ‘하디스’는 무함마드의 언행을 지켜본 제자들과 그 제자의 제자, 또 그 제자를 통해 구두나 기록으로 약 100년 동안 전승되다가 수집 정리된 뒤 다시 약 100년이 지나 비로소 성훈학자들에 의해 정본으로 엮였다. 그 대표적 학자가 부하리다. 그는 10살 때부터 성훈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6살 때 메카 순례를 계기로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등지를 16년간 돌면서 전승자 천여명을 만나 약 60만 조항의 성훈을 모았다. 그 중 ‘건전한 것’(솨히흐) 7300여개(일설은 9397개)를 엄선해 〈건전한 성훈집록〉에 실었다. 이것이 첫 성훈 진본으로 후일 모든 성훈집의 표준전범으로 금과옥조시되고 있다. 그밖에 성훈 전승자들의 전기인 〈존귀한 역사〉와 이슬람 순니파 6대 성훈집의 하나인 〈부하리의 정훈집(正訓集)〉 같은 저술도 남겼다.

 

② 심리학으로 병리현상 분석한 의학자 이븐 시나


이슬람 학문 중 유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단연 의학이다. 무슬림 의학자들은 페르시아, 그리스-로마의 의술을 임상과정에 도입해 당시 가장 수준 높은 이슬람식 의학을 개발했으며, 주요 내용을 빠짐없이 개설서, 전서에 기록했다. 그것이 곧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서 의학교재로 채택되고, 임상치료에 쓰이면서 현대의학의 밑거름이 된다. 천연두, 홍역의 병원체를 발견한 라지(865~925)에 이어 이슬람 의학의 중흥기를 선도한 의학자가 사만조 시대 부하라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이븐 시나(980~1037)다. 본명은 아부 알리 후사인 이븐 압둘라로서 유럽에서는 라틴어식 음사로 ‘아베세나’라고 부른다. 10살 때 경전을 몽땅 암송할 정도로 총명했던 그는 탁월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평생 저서 242권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이 〈의학법전〉(총 5부에 100만 자)과 〈치유의 서〉다. 의학에 철학, 심리학을 접목시킨 것은 그만의 특징이다.

 

이슬람 학문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야는 의학이다. 부하라의 대표적 의사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이븐 시나가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의학법전〉에서 그는 병리현상을 심리현상과 결부해 면밀히 분석했다. 또 이에 기초해 늑막염과 폐염, 간염을 구별하고, 폐결핵의 전염성, 피부병과 성병, 상사병(相思病), 신경병 등을 임상적으로 관찰하고, 구체적 치료법을 제시했다. 가령 상사병은 체중과 체력의 감퇴, 발열 등 만성 증상이 나타나며, 그 치료법은 사모하는 상대방과 결혼시키는 처방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그가 병리·심리현상을 아우른 ‘심신의학법’으로 한 왕자를 치료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망상증에 걸린 왕자는 자신이 소라고 믿고 소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잡아먹어 달라고 애원한다. 이븐 시나는 도살꾼으로 가장하고 왕자가 너무 여위어 앙상하니, 우선 살찌워놓아야 잡아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왕자가 마음껏 먹다 보니 ‘병세’는 어느새 말끔히 가셔지고 건강은 회복되었다. 이른바 심신의학법의 효험이다. 시나는 알코올을 소독제로 추천한 최초의 의사이기도 하다. 그의 의학 전서는 저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아(12세기) 라틴어로 번역된 뒤 15세기 밀라노에서 출간되어 16세기까지 유럽 의학교에서 주교과서로 채택되기도 했다.

중세 무슬림들은 수학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수학 발전에서 그들은 영(零: 0)의 도입, 대수학의 정립이란 특출한 기여를 했는데, 그 진두에 대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콰리즈미(780~850)가 있다. 페르시아, 인도에서 전수받은 수학 지식으로 대수학의 혁명을 일으킨 그의 본명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무사다. 출신지는 부하라 서북쪽 히바라는 설이 있으나, 주로 부하라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부하라 학맥의 3총사 중 하나로 본다. 그는 인도의 숫자 서법을 아랍어 서법에 맞게 변형시켰으며, 인도에서 받아들인 영(점으로 표시)이란 새 숫자 개념을 도입해 수학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그가 쓴 ‘집합과 분할의 서’란 논문이 12세기 ‘인도 숫자에 대한 콰리즈미의 서’란 제목 아래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유럽인들은 처음 영을 포함한 숫자를 알게 된다. 숫자에 얽힌 사연에 무지한 유럽인들은 아랍인들에게서 전수받은 이 인도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오인해 16세기 전통적으로 써오던 로마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대체해버렸다. 영어의 ‘사이퍼(cipher)’(영, 암호)는 ‘영’ 혹은 ‘공(空)’, ‘무(無)’라는 아랍어 ‘쉬프르’에서, ‘앨거리즘(algorism: 아랍식 기산법, 아라비아 숫자)은 콰리즈미의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다.

 

③ 유럽인에 ‘숫자 0’ 알린 수학자 콰리즈미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수학자들은 수를 단순한 영의 개념으로 본 데 반해 콰리즈미는 상호관계적 개념으로 인식해 대수학을 탄생시켰다. 그는 대수학의 문제 풀이 절차가 마치 외과의사가 부서진 뼈의 상처를 다시 원상회복시키는 수술 과정과 비슷하다고 하여 아랍어 외과 전문용어인 ‘자브르’(접골, 깁스)를 빌려 대수학을 ‘자브르’라고 했다. 바로 대수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앨지브러(algebra)’의 말뿌리다. 부하라 답사는 기름진 오아시스 화원에서 3총사가 꽃피운 부하라 학맥의 향훈을 만끽한 현장이었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찬란했던 이슬람 과학

유클리드 기하학·역법…
수학 천문학 등서 두각
근대 과학문명 새벽 열어

발달한 이슬람 과학은 실크로드 교류사가 일궈낸 값진 인류 유산 가운데 하나다. 11~15세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이슬람 과학은 최전성기를 맞는다. 당대 학자들이 밝혀낸 수학, 의학 등의 연구 성과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 유럽으로 전파되어 근대 과학문명의 새벽을 여는 디딤돌이 됐다. 과학사가들은 서구에 미친 이슬람 과학의 자장이 너무 넓어 지금도 전모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고백할 정도다.

중세 이슬람 과학의 대표적 분야로 천문학과 수학, 의학의 3대 학문을 든다. 수학의 경우 기하학적인 종교건축, 공예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더욱 고도로 발전했다. 대수학, 삼각함수, 0의 개념, 3차 방정식 등 현대 수학의 주요 개념들이 이슬람 수학자들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부하라의 알리 콰리즈미가 시작한 대수학은 시인으로도 유명한 오마르 카이얌이 뼈대를 세웠다. 중앙아시아 출신 알 비루니는 시그마 공식을 비롯한 계산학의 바탕을 닦았고, 나시르 앗딘 투시는 피타고라스 정리 등의 유클리드 기하학을 재정립했다. 삼각함수 용어 ‘사인’은 곡선을 뜻하는 아랍어 ‘자이브’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천문학 분야에서의 중요한 성과는 일년의 날, 달수를 계산하는 역법(달력) 체계다. 고대 그리스·페르시아·인도의 풍부한 관측 자료를 활용해 현대와 별 차이가 없는 역법을 만든 것이다. 아라비아 천문학에 바탕해 원나라가 만든 역법 ‘회회력’은 그 대표적 산물로 조선·일본의 역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티무르의 맏아들 울루그 벡(1394~1449)은 이슬람 천문학의 대가이자 보기 드문 과학왕으로 유명하다. 곳곳에 천문대(사마르칸트에 그가 세운 천문대가 남아있다)를 세운 이 학자군주는 1년을 365일 10분 8초까지 계산했다. 현재 첨단 기기로 계산한 1년 길이와 1분 미만의 차이밖에 없다. ‘자티쿠라간’으로 불리는 울루그벡 천문력은 17세기까지 유럽에서 계속 쓰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기실은 13~14세기 이란, 시리아 천문학자들의 연구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의학 쪽에서는 알 라지, 알 비루니, 이븐 시나 등의 의학자들이 그리스·근동·이란의 의학 전통을 계승해 임상적 관찰에 따른 절개수술, 식이요법 등의 치료법들을 개발했다. 의학백과사전인 알 비루니의 〈알 하위〉, 이븐 시나의 〈의학법전〉 따위는 의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명저들이다. 사마르칸트 레지스탄 광장의 셰도르 마드라세에는 울루그 벡을 비롯해 대수학의 아버지 알리 콰리즈미, 이븐 시나 등 5명의 과학자, 문인들의 청동상이 지구본을 중심으로 놓여 옛 이슬람 과학 문화의 위대함을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