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이창환_신의 정원 조선왕릉_07

醉月 2010. 5. 22. 10:21

무지개가 잡아준 왕릉터

우상좌하, 우왕좌비 배치(왕은 오른쪽, 왕비는 왼쪽),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국조오례의’ 양식을 따른 현존하는 최고의 왕릉인 문종의 능침.

현릉(顯陵)은 조선 제5대 문종(文宗, 1414~1452)과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의 능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형이다. 현릉은 구리시 인창동 산2-1번지의 동구릉지역 건원릉(健元陵)의 동남측 언덕에 있다. 서측 구릉에 병풍석으로 조성된 것이 문종의 능이고, 동측 언덕의 난간석 봉분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이는 우상좌하(右上左下), 우왕좌비(右王左妃)의 원칙에 따른 배치다. 이 원칙은 현재 민간 장묘문화에도 이어져오고 있다.

문종은 1414년(태종 14) 10월 3일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향(珦), 자는 휘지(輝之)다. 8세 때 세자로 책봉됐으며 각종 질병에 시달리던 아버지 세종을 대신해 37세까지 8년간 섭정을 하다 왕으로 등극했다. 세자로 있었던 기간이 무려 30년이나 정작 재위 기간은 2년 3개월밖에 안 됐다. 긴 준비 기간에 비해 매우 아쉬운 집권이었다.

 

효자였던 문종은 과로로 명 단축

문종은 효자였다. 세자 때 시선(侍膳·시식,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의 진짓상을 돌보는 일)을 신중히 하고, 동궁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열매를 세종에게 올리기도 했다. 이에 세종은 “외간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에 비할 바인가?”라고 했다 한다.

문종은 성균관에서 특별교육을 받는 등 오랫동안 왕위 수업을 했는데 특히 학문을 좋아해 학자들과 자주 어울렸으며, 측우기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천문, 역술, 산술 등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문장과 서예에도 능했다. 언로를 열어 민의를 파악했고, 문무를 중용했으며 군사제도를 개편했다.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의주석’ 같은 책을 정리·편찬하는 등 조선의 정치와 제도문화를 정비하는 한편 친히 과거 시험문제를 내기도 했다. 직언자를 좋아했으며, 형벌에는 신중을 기했고, 노인을 공경했다. 또 우(虞)나라 빈객(고려의 왕족)을 대우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정을 넘기며 일하고 새벽녘에 일어나 업무를 보고 국정계획을 세우던 문종은 세종의 3년상을 치르면서 음식과 약을 멀리한 데다 집권 초기의 과로까지 겹쳐 결국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1452년 5월 14일 오후 9시경 경복궁 강녕전에서 문종의 병환이 위급해지자 11세였던 세자(단종)는 당황해 “나는 나이가 어려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의정부 대신들이 급히 근정전에 모이고 궁궐 사문을 삼엄하게 경비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세자를 통해 죄수를 석방하는 안을 내니 문종이 “불가하다” 했다. 이것이 문종의 마지막 집무였다. 문종의 아우인 수양대군이 왜 청심환을 드리지 않느냐고 탓하자 의관이 청심환을 올렸으나 왕에게 미치지 못하고 훙서(薨逝·세상을 떠남)했다. 대신들이 왕의 안부만 묻고 어느 한 사람 나아가 진찰을 종용하지 않음에 사람들이 분개 한탄했다. 특히 백성들은 어린 세자가 안쓰러워 세종의 상사 때보다 더 슬퍼했다.

   

동원이강형의 현릉, 참도가 길게 궁(弓)자형을 이루며 배위가 홍전문 앞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승하 4개월 후인 1452년 9월 1일, 문종을 현릉에 장사 지냈다. 당시 총호사(장례위원장)는 영의정 황보인이 맡았다. 문종은 병으로 급사해 선대의 왕과 달리 수릉도 만들지 못한 데다 단종이 어리다 보니 장지 선정과 능역 조영에서도 우왕좌왕했다. 문종 승하 5일째인 1452년 5월 18일 경복궁 근정문에서 단종이 즉위했다. 일반적으로 선왕 승하 5일 이내에 새로운 왕이 즉위하고 선왕의 장례를 치른다.

수양대군과 종친, 총호사 등은 문종이 평소 희망했던 옛 영릉, 즉 세종과 소헌왕후의 초장지(서초구 세곡동) 터로 가서 현궁 자리를 물색하고 건좌곤향(乾坐坤向)의 터를 정해 공사를 했다. 그러나 전농사(典農寺) 스님인 목효지가 새 능의 터가 좋지 않다고 해 당황스러워했다. 과연 천광(穿壙·시신 묻을 구덩이를 팜)을 하니 물이 솟아났고, 다시 영릉 서혈을 파니 돌이 나왔다. 7월 24일 무지개가 구지에서 동구릉까지 이어지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태조 건원릉의 동혈을 살펴보고 이곳에 자리 잡았다. 무지개가 현릉의 자리를 잡아준 것이다.

산릉도감에서 천광의 깊이를 10척으로 하고 장삿날을 9월 1일과 17일 중 하루로 결정했다. 천광은 주척(周尺)을 쓴다. 강북 노원구의 돌을 강남 헌릉 근처로 옮겨 제작하다가 장지를 건원릉 동측으로 옮기니, 역부 8000명을 동원해 한강을 넘는 도중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래서 발인을 위한 동원인력은 선대의 왕에 비해 반으로 줄였다.

 

문종 발인 때 ‘애책문(哀冊文·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에는 “풍금(楓禁·궁중에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 궁궐을 풍금이라고도 함)의 깊숙함을 등지고 백성(柏城·소나무, 전나무, 측백나무 등 침엽수가 많이 심어진 능역을 가리킴)의 아득함을 지향했다”라고 했다. 이때 효자사왕(孝子嗣王·후임 왕, 단종을 일컬음)은 하늘에 부르짖으며 슬피 사모하고 서리를 밟으며 눈물을 흘렸다.

문종의 존시(尊諡)는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시호(諡號)는 공순(恭順)이며 묘호(廟號)가 문종이다. 현궁에는 명기(明器·죽은 사람을 위해 광중에 묻는 그릇 따위의 총칭, 보통 때 것과 같이 만듦)와 복완(服玩·죽은 이를 위해 무덤 속에 넣는 의복과 완구의 총칭)을 넣고 ‘자선당’ ‘승화지당’ ‘만춘전’ 등 도서를 봉안했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조선 왕릉을 답사하면서 무덤의 내부를 공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우리 연구진은 조선 왕릉이 지금까지 후손들이 제례를 봉양하는, 효 문화의 살아 있는 문화유산임을 강조했다. 또한 ‘산릉도감위궤’를 비롯한 각종 실록에 내부 유물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을 들어 공개의 어려움과 그 정당성을 알렸다. 이를 통해 조선 왕릉은 내부를 공개하지 않고도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다. 조상의 기록문화가 남긴 업적이다.

   

승하 후 온갖 수난을 겪다가 복위돼 남편 문종의 능침을 바라보고 있는 현덕왕후의 능침.

수차례 옮겨진 현덕왕후의 무덤

문종 즉위 5개월 후인 1450년 7월 8일 의정부에서는 9년 전(세종 23년) 세손인 단종을 낳고 2일 만에 승하한 현덕빈(顯德嬪)을 추숭해 왕후라 하고 혼전을 경희전,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했다. 승하한 세자빈이 문종의 왕비로 추숭(追崇)된 것이다. 현덕왕후 권씨는 세종의 맏며느리로 안동의 세족, 즉 의정부 좌의정(화산부원군) 권전(權專)의 딸이었다. 남편 문종이 왕후 추숭 때 올린 글에 따르면 권씨는 성품이 단정하고 정숙하며 마음이 깊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러나 장손 단종을 낳고 산후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세종과 문종은 정성을 다해 능역을 조영했는데, 중국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능호인 소릉과 같은 능호를 쓴 것으로도 권씨에 대한 문종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종이 현덕왕후 승하 후 12년간 세자와 왕으로 있으면서 새로 왕후를 두지 않은 것은 지나친 애정이 아니었을까. 그로 인해 문종 승하 후 어린 단종은 기댈 언덕이 없었다. 현덕왕후는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됐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현덕왕후 친정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자 현덕왕후는 추폐돼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능은 파헤쳐져 안산 바닷가로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다. 그로부터 56년 후 종묘 소나무에 벼락이 치고 제물용 소가 사당에서 저절로 죽자, 1513년(중종 8) 3월 3일 영의정 송일 등이 “종묘의 문종 신위만 홀로 제사 받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으로 복위시켰다. 무덤은 세조 때 폐비하면서 안산 바닷가에 회삼물(灰-三物·석회, 황토, 가는 모래 세 가지를 섞어 반죽한 것)로 다지지도 않고 파묘한 것을 의녀(醫女)들이 수습해 4월 21일 현릉 동쪽 언덕에 천장해 동원이강으로 안장했다. 그리고 신주는 다시 종묘에 봉안했다. 이렇듯 현덕왕후 권씨의 능침은 여러 번 현궁을 옮긴 비운의 능묘다.

 

현릉의 문무석인은 머리 부분이 크고 눈망울과 코가 커서 이국적이며, 조각선이 굵은 것이 특징이다.

‘국조오례의’ 양식을 따른 최고의 무덤

예종(1469년) 때 서초구 세곡동에 있던 영릉(英陵)이 여주로 옮겨져, 현릉은 ‘국조오례의’ 양식을 따른 가장 오래된 능이 됐다. 현릉의 참도(參道·정자각 앞 신도와 어도의 총칭)는 굴절되어 궁(弓)자 형태다. 정자각은 중종 때 현덕왕후 능침을 동원이강으로 조영하면서 가운데로 옮겼다. 정자각 뒤의 참도는 왕후의 능침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 홍전문 앞에 참도와 배위가 있는 것이 조선시대의 왕릉으로 유일하다.

문종 왕릉의 병풍석은 구름무늬가 아름답다. 뒤편 건원릉과 비교하면 병풍석의 방울 및 방패무늬(영저와 영탁)가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왕비의 난간석은 중종 때의 양식을 따랐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이 이보다 2년 뒤 조영됐으므로 최근 밝혀진 초장지 석물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왕의 능침 공간에 있는 문무석인은 머리 부분이 크고 눈망울과 코가 커서 이국적이며, 조각선이 굵은 모습이 특이하다. 왕의 능침에 있는 혼유석 하부 고석은 5개에서 4개로 변한다.

현덕왕후의 혼유석은 특이하게도 반상 형태다. 현릉의 비석은 영조 때 조선시대 전체 능역을 정비하면서 능역을 찾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세운 것이다. 원래 기록에는 현릉의 신도비도 만들었으나 세조의 능역 간소화 정책으로 생략됐다. 문종은 현덕왕후 권씨와 두 명의 부인 사이에서 단종과 딸 둘을 두었다. 단종은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영월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