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_08

醉月 2010. 5. 26. 08:47
400년 앞선 중국판 ‘사랑과 영혼’ 죽음을 뛰어넘은 사랑 모란정
▲ 일러스트 이철원
1990년 ‘사랑과 영혼(Ghost)’이란 미국 영화가 국내에 개봉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불의의 사고로 죽은 남성(패트릭 스웨이지 분)이 영혼으로 남아 사랑하던 여성과 교감을 하고 살인사건을 해결한 뒤 저승으로 간다는 판타지 영화였다. 당시 죽음을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로 많은 청춘남녀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배경음악으로 쓰인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의 선율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될 작품으로 남아 있다.

중국에는 이미 400여년 전에 이를 능가하는 작품이 존재하였다. 1598년에 창작된 ‘모란정(牧丹亭)’이란 희곡작품으로 ‘환혼기(還魂記)’라고도 한다. 모란정은 탕현조(湯顯祖·1550~1616)가 당시 유행하던 곤곡(崑曲) 공연을 위한 대본으로 창작한 55막으로 이루어진 장편인데, 명대 화본소설 ‘두려랑모색환혼(杜麗娘慕色還魂)’의 기본 줄거리를 바탕으로 탄생되었다.  

남송 시대 남안(南安) 태수였던 두보(杜寶)에게는 열여섯 살 난 딸 여랑(麗娘)이 있었다. 두보는 딸을 끔찍이 사랑하여 품에서 놓지 않았다. 그래서 두려랑은 대문 밖을 나서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뒤뜰 정원에도 가지 못하였다. 하루 종일 시녀인 춘향(春香)과 가정교사와 함께 지낼 뿐이었다. 가정교사 또한 고리타분한 할아버지로서 경전을 낭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

어느 따스한 봄날, 두려랑은 따분한 책을 집어던지고 춘향과 함께 몰래 뒤뜰로 나가 놀았다. 정원에는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모란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여랑은 너무 기쁜 나머지 놀랍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츰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봄꽃이 피고 지듯이 자신 또한 언젠가는 젊음을 잃고 세상을 떠날 날이 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여랑은 탄식하며 방으로 돌아와 피곤함을 느끼고 침대에 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몸이 가벼워지더니 정원으로 다시 돌아온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 잘생긴 청년이 나타나 버들가지를 꺾어 그녀에게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그 후 잠시 동안 청춘남녀는 모란정에서 꿈에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니 이 모두가 꿈이었다. 

그 후로 두려랑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하루 종일 멍하니 지냈다. 몸도 하루하루 쇠약해갔다. 그녀는 자신이 오래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붓을 들어 비단에다가 자화상을 그린 다음 시를 한 수 적었다. 마지막 두 구절에는 ‘훗날 과거 급제한 선비님 뵙게 된다면, 매화 곁이 아니라 버들 곁이 되리라(他年得傍蟾宮客, 不在梅邊在柳邊)’고 썼다. 중추절이 지나고 여랑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정원에 있는 매화나무 아래에 묻혔고, 그녀의 자화상은 유언에 따라 태호석(太湖石) 아래에 묻어두었다. 오래지 않아 아버지 두보는 양주(揚州)로 발령을 받았다. 떠나기에 앞서 그는 정원 안에 매화암(梅花庵)을 짓고, 석(石)씨 성을 가진 여자 도사를 불러 딸의 묘를 지키며 명복을 빌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무덤 속에서 걸어나온 여인

3년이 흐른 뒤 유몽매(柳夢梅)라는 선비가 서울로 과거시험을 치르러 가다가 잠시 매화암에 들렀다. 바로 그날, 그는 황폐해진 정원을 거닐다가 우연히 태호석 밑에서 여자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를 발견하였다. 초상 옆에는 ‘매화 곁이 아니라 버들 곁이 되리라(不在梅邊在柳邊)’는 시구가 적혀 있었다. 시를 본 그는 문득 몇 년 전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매화나무 아래에서 유생(柳生)을 부르는 꿈이었다. 당시 유생은 그 꿈을 잊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을 몽매(夢梅)로 바꾸었다. 그런 유몽매가 여인의 초상화를 얻어 아침저녁으로 생각에 잠겼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몽매가 막 잠이 들려 할 때 아리따운 아가씨가 들어오더니 이웃집 여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두 사람은 첫 만남인데도 오랜 연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매일같이 만나며 사랑을 싹틔워 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가씨는 몽매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자신이 바로 초상화 속의 여인이며 지금 정원에 묻혀 있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무덤을 열고 자신을 꺼내주면 기사회생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몽매는 뛸 듯이 기뻤다. 그는 매화암을 지키는 여자 도사 석씨와 상의하여 길일을 택해 무덤을 열었다. 그러자 과연 여랑이 살아 나왔다. 두 사람은 함께 그곳을 떠나 임안으로 향하였다.

유몽매는 과거시험을 치른 후 사위 자격으로 장인인 두보를 찾아뵈었다. 일찌감치 딸의 무덤이 파헤쳐졌다는 소식을 듣고 있던 두보는, 유몽매가 제 발로 찾아오자 사람들을 시켜 즉시 관아로 끌고 갔다. 한편, 수도 임안에서는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몽매가 1등 장원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장원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시각에 유몽매는 두보의 관아에서 곤장을 맞고 있었다. 두보는 시험관이 와서 유몽매의 신분을 확인한 뒤에야 몽매를 풀어주었다. 결국 황제의 주례로 몽매와 여랑은 부부가 되었고, 두보도 딸의 결혼을 인정하고 축복하는 가운데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모란정’에 심취 자살 여성 속출 

극중에서 두려랑은 감정이 풍부한 아가씨로 나온다. 안타깝게도 관료 집안에 태어나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자라났다.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봉건적인 예의 도덕이 감수성이 풍부한 두려랑을 무겁게 짓눌렀다. 오직 꿈속에서만 사랑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억압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죽음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은 생사의 한계를 초월하였다. 애타게 기다리던 임이 다가오자 여랑은 죽음을 딛고 다시 살아났다. 사랑을 위해서는 ‘산 사람도 죽을 수 있고, 죽은 사람도 살아날 수 있다(生者可以死, 死可以生)’는 것이 바로 ‘모란정’의 주제였다. 이런 주제는 지금 보면 너무 평범한 것 같지만, 봉건 예교(禮敎)를 숭상하고 인간성을 억압하던 봉건사회에서는 대단한 견해였다. ‘두려랑’은 ‘서상기(西廂記)’ 속에 등장하는 최앵앵(崔鶯鶯)의 뒤를 이어 봉건 도덕에 맞서 개인의 행복과 연애와 결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전형적인 여인상으로 후세의 문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탕현조의 ‘모란정’은 은연중에 억압받는 부녀자들의 심령을 자극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여자는 ‘모란정’에 심취하여 여랑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긴 나머지 가슴이 아파 죽었다고 한다. 이 일을 전해들은 탕현조는 ‘누강의 여인을 슬퍼하며(哭婁江女子)’란 시를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또 항주에 살던 어느 여배우는 두려랑 역을 맡아 연기하던 중에 자신이 두려랑이라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매번 공연할 때마다 눈물에 젖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비극적인 ‘꿈을 좇아(尋夢)’ 부분을 노래하며 연기하다가 그만 혼절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놀란 주위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 그녀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사건의 진위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모란정’이 봉건사회를 살던 여성들에게 끼친 영향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금오신화’와도 비슷


한편 ‘모란정’은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금오신화(金鰲新話·1470)’ 속 소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浦記)’의 내용과 많이 닮았다.

전라도 남원(南原)에 사는 양생(梁生)은 일찍이 어버이를 여읜 뒤 늦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만복사(萬福寺) 동쪽 골방에서 홀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밤 외로움을 달래고자 시 한 수를 읊자 하늘에서 배필을 찾아주겠노라는 소리가 들린다. 양생은 다음날 만복사를 찾아 주사위놀이와 비슷한 저포(樗浦)를 던지며 부처님께 소원을 빈다. 곧이어 과연 맘에 드는 아가씨를 만나 사연을 들어보니 그녀 역시 배필을 찾고 있었다. 둘은 첫눈에 호감을 느끼고 그날 밤 부부의 정을 쌓는다. 하룻밤을 지낸 뒤 양생은 그녀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가 이틀 동안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양생은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약간 의심이 갔지만 그녀의 은근한 정에 마음이 끌려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보련사로 그녀의 부모님이 오신다는 말에 길에 나가 서 있다가 그녀의 부모를 만나 그녀가 왜구에게 죽임을 당한 사정을 전해 듣는다. 결국 그녀의 영혼은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고 양생 곁을 떠난다. 양생은 괴로운 마음에 정성들여 장사를 지내고, 애타는 마음을 진혼문(鎭魂文)에 담는다. 그러자 그녀의 영혼이 나타나 양생의 정성으로 다른 곳에서 남자로 환생하였으니 그간의 인연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권한다. 그러나 양생은 그 뒤로 다시 장가를 들지 않고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고 살았다 하나, 그 뒤로는 어찌 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금오신화’는 구우(瞿佑·1341~1427)의 ‘전등신화(剪燈新話)’에 영향을 받아 지어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전등신화’ 자체가 당(唐) 전기체(傳奇體) 소설 모음집인데 그 속에 ‘등목취유취경원기(?穆醉游聚景園記)’란 작품이 실려 있다. 여자 귀신 위방화(衛芳華)가 죽음 뒤에 생전에 이루지 못한 사랑과 행복을 누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런 소재가 예부터 존재했고, 각종 형태로 전해지다가 ‘모란정’이란 작품으로 집대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우표 도안 속의 모란정. / 청춘판 모란정 100회 공연 기념.
영화·연극·드라마 단골 소재

현대에 들어와서는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인 바이셴용(白先勇)이 쑤저우(蘇州) 곤극원(崑劇院)과 함께 고전 작품인 ‘모란정’의 명성을 현대화하는 뜻 깊은 작업을 하였다. 즉 원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만 발췌하여 29막으로 정리하고 이를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눠 각각 ‘꿈 속의 사랑(夢中情)’ ‘사람과 영혼의 사랑(人鬼情)’ ‘인간의 사랑(人間情)’으로 분류하여 사랑을 찾기 위한 서사시 구조로 재편하였다. 그리고 과감하게 젊은 배우를 기용하고 쉬운 대사를 써서 3일간 연속으로 공연되는 ‘청춘판 모란정’을 창작한 것이다. 무대와 의상 및 음악 방면에서도 영화감독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얼마 전에는 베이징에서의 4번째 공연이자 총 100번째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관중의 80% 이상이 30세 이하의 젊은이들이었다. ‘고전 작품의 현대화’에 성공한 것이다. ‘모란정’ 이야기는 지금도 TV 연속극과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심지어 대중가수 왕리홍(王力宏)은 ‘매화 곁에서(在梅邊)’란 제목으로 ‘모란정’ 이야기를 랩(rap)으로 노래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도 ‘판소리 문학’이라는 우수한 문화콘텐츠가 있는데, 현재 그것을 활용하고 현대화하는 방면으로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다양한 형식으로 고전을 현대화하는 실험정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중국의 셰익스피어’ 탕현조

明代 가장 위대한 희곡작가… 중국 연극계에 큰 족적

명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희곡 작가를 꼽으라면 당연히 탕현조를 들 수 있다. 그는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생몰연대 및 연극계에 끼친 영향 등이 비슷하여 ‘중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린다. 탕현조는 강서(江西) 임천(臨川·오늘날의 강서성 임천시) 사람으로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당시 부정이 만연했던 과거시험에서 곤혹을 치르고 어렵게 관계에 나갔고, 이후의 관직생활에서도 염증을 느껴 말년에는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더 이상 어떠한 관직에도 나가지 않았다.

탕현조는 극본 창작에 전력하는 한편 스스로 연출과 연기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의 고향 임천은 유명한 지방극인 해염강(海鹽腔)이 성행하였으며, 직업 배우만도 1000여명이나 되었다. 탕현조는 이러한 연극의 열기를 이끄는 지도자였다. 노년의 생활은 비록 궁핍하였지만 희곡 창작에서 얻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 통치자들에게 이단아로 평가 받아 불의의 죽음을 당한 이지(李贄) 등과 교유하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사상의 혁신을 추구하였다. 이런 관점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의 서재인 옥명당(玉茗堂)에는 그를 찾아와 문학과 연극에 대해 토론하는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옥명(玉茗)’이란 차나무의 일종으로 백산차라고도 한다. 탕현조가 지내던 방 앞에 그 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서재 이름으로 따왔다고 한다. 탕현조는 많은 작품을 썼지만 그중에서도 ‘자차기’ ‘모란정’ ‘한단기’ ‘남가기’ 등 4종이 유명하다. 네 작품 모두 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임천사몽(臨川四夢)’ 또는 ‘옥명당사몽’ 등으로 불렸다. ‘사몽’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은 ‘모란정’을 꼽는다. ‘모란정’은 ‘서상기’ ‘두아원(竇娥寃)’ ‘장생전(長生殿)’과 함께 중국의 4대 희곡으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