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인문학의 토대가 갈수록 무너진다고 비명만 질러대는 요즘이다. 어찌 보면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 자신이 자초한 것이 아닌가? 전공의 미명 아래 지엽말단에만 흘러, 전체를 보는 시야를 잃고 만데서 정작 우리 인문학의 위기는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7,80년 전 선배의 글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꺽꺽해서 좀체 읽히지 않는다. 읽어 보려 해도 그렇게 낯설고 생경할 수가 없다. 언어가 이리도 몰라보게 바뀌는가를 따로 실감할 필요가 없다. 그때는 대중을 염두에 두고 쉽게 쓴 글이 이제는 읽을 수 없는 글이 되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콘텐츠는 여전히 살아 있다. 지금 읽어도 소중하고 유용한 알토란 같은 정보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책만 번역할 일이 아니고, 한자말투의 옛글도 오늘의 우리말로 옮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옛날 사마천은 《사기》를 지을 적에, 《서경》의 옛글을 인용하면서도 그 당시의 표현으로 모두 바꿔 썼다. 경전의 말씀인데도 소통을 위해 글자를 바꿨다. 이런 생각이 참 소중하다.
어렵기만 한 묵은 글도 어려운 단어를 쉽게 바꾸고, 구문의 순서를 조금 조절하거나, 문장을 끊어 읽는 호흡을 가다듬으면 지금 읽기에 전혀 지장이 없다. 연암 박지원이 “먹다 남은 장도 그릇을 바꿔 담으면 새로운 입맛이 난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이 책은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 1888-1936) 선생의 《화하만필(花下漫筆)》과 《사상(史上)에 나타난 꽃 이야기》를 꽃에 따라 배열하고 오늘의 독자들이 읽는 데 아무 불편이 없도록 현대어로 고친 것이다. 내용은 하나도 손대지 않고 표현은 예외 없이 고쳤다.
예를 들어 “생이별(生離別)의 고(苦)에 우는 궐녀(厥女)로부터 충선(忠宣)에게 시를 기사(寄謝)하였는데”를, “생이별의 괴로움에 울던 그녀는 충선왕에게 시를 보냈는데”로 고쳤다. 또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천고절조(千古絶調)로 충담청원(沖澹淸遠)한 멋이 과연 동양예술(東洋藝術)의 신수(神髓)를 심득(深得)한 것이니”는 “은일 시인 도연명의 천고의 걸작 중 한 구절이다. 담백하면서도 해맑은 멋이 과연 동양 예술의 정수를 깊이 얻었다 하겠다”로 풀었다. 고쳐 쓴 후 다시 읽으니 느낌이 한결 다르다.
서점에 가면 꽃에 관한 책이 많지만, 식물학적 설명에 머문 것이 대부분이다. 꽃의 인문학적 정보를 찾을 데가 별로 없다. 이 해묵은 글은 어쩌면 우리 인문학이 까맣게 잊고 있던 부분을 소중하게 일깨워 준다. 정보야 잘못된 것도 있고, 지금 보면 충분치도 않다. 하지만 이 글 속에는 삶의 총체성이 아직 살아 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따로 놀지 않는다.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저만의 성채를 높이 쌓아두고, 남을 넘보지도 않고 그 안에서 혼자 논다. 어느 때보다 소통이 절실하다.
막힌 옛 길을 고치고 뚫어 새로 선뵈면서 여기에 김태정 선생의 아름다운 사진을 얹었다. 누런 종이 속에서 생기를 잃고 있던 꽃들이 봄비에 수런수런 깨어나듯, 고운 영상 속에서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난다. 천지가 온통 환한 꽃밭이다.
태학산문선 시리즈로 간행된 문일평 선생의 <화하만필>을 현대어로 풀어쓴 <꽃밭 속의 생각>의 본문 내용입니다.
글쓴이 : 정민 한양대 교수
일러두기
1. 《호암전집》중 《화하만필(花下漫筆)》을 현대어로 풀이한 것이다.
2. 원본의 배열을 따르되, 표제항목을 개별 꽃으로 삼아 제목을 새로 달았다.
보완적 성격의 글 몇 개는 해당 항목 꽃 내용 뒤에 부록으로 함께 실었다.
3. 《사상(史上)에 나타난 꽃 이야기》에 실린 9편 중 8편을 해당 꽃 내용 뒤에 부록으로 함께 실었다.
4. 인용 한시의 번역은 새롭게 했고, 한자투의 구문과 표현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완전히 뜯어 고쳤다.
5. 일부 원전 내용의 오류는 각주를 통해 밝혔고, 사소한 오자나 불충분한 설명은 본문에서 보완하거나 바로잡았다.
차가운 아름다움, 매화(梅花)
매화(梅花)는 예나 지금이나 시인묵객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아왔다. 근래 중국에서는 모란 대신 매화를 나라꽃으로 정했다 한다. 말하자면 모란이 가졌던 왕좌(王座)를 매화가 차지한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인정(人情)의 변화를 본다. 모란의 농염(濃艶)함보다 매화의 차가운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모란의 기이한 향기 보다 매화의 은은한 향기를 사랑하는 듯 하다. 고려 때 시인 정지상(鄭知常)은 매화 그림을 잘 그렸고, 어몽룡(魚夢龍)의 매화는 조선에 으뜸으로 일컬어졌다.
초록빛 물가에는 가는 대와 맑은 매화
동풍에 봄뜻이 규방에 가득해라.
細竹淸梅綠水涯 東風春意滿香閨
이것은 보한재(保閒齋) 신숙주(申叔舟)가 화첩(畵帖)에 쓴 시구다. 풍류가 넘쳤던 왕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자신의 거처인 비해당(匪懈堂)을 노래한 48수의 연작시 가운데 〈매화 창가에 흰달[梅牕素月]〉을 가장 먼저 노래했다. 어스름 달밤에 그윽한 향기가 스며들 때, 그 향기는 고요한 주위의 공기를 청정하게 하고 신성하게 해준다.
고금에 매화를 노래한 시인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송나라 때 화정(和靖) 임포(林逋)처럼 매화의 깊은 경지를 음미할 줄 알았던 사람은 없다. 매처학자(梅妻鶴子), 즉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아들 삼던 그가 아니고는 다음 시와 같은 경지를 결코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
물은 맑고 얕은데 그림자 빗겨있어
달 뜬 황혼에는 그윽한 향기 떠다니네.
踈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
이는 실로 매화시(梅花詩)가 있은 이래로 천고에 빼어난 가락이다.
중국의 나부산(羅浮山)도 매화로 이름난 곳이고 향도(向島)도 매화로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매화로 이름난 곳이 없다. 남쪽 지방 따뜻한 곳에 매화가 있기는 해도, 겨울에 피는 동매(冬梅)가 아니라 봄에 피는 춘매(春梅)다. 서울 지역 꽃을 애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예전부터 매화를 길렀지만, 이 또한 땅에서 자라는 지종(地種)이 아니라 화분에 심은 분재일 뿐이다.
매화를 많이 재배하여 구경거리로 보려 할 때는 일종의 온실 장치를 했다. 경성방송국 자리는 바로 예전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선대로부터 이어오던 별장 터로, 아주 이름 높은 홍원매실(紅園梅室)이 있던 곳이다. 대원군의 운현궁에도 매실(梅室)이 있었고, 이 밖에도 서울에는 매실 있는 집이 흔하였다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일찍이 매화를 품평하여 이렇게 말했다. “천엽(千葉)이 단엽(單葉)만 못하고 홍매(紅梅)가 백매(白梅)만 못하다. 반드시 백매 중에 꽃떨기가 크고 근대(根帶)가 거꾸로 된 것을 골라서 심어야 한다.”
〈매화타령〉 중에 이러한 것이 있다.
매화 옛 등걸 봄 철이 돌아온다
옛 피던 가지마다 피염즉도 하다마는
춘설(春雪)이 하도 분분하니
필지 말지 하더매라.
[보충]
산중에 눈 보라 몰아치는 밤
쓸쓸히 책상에서 글을 읽는다.
주인과 매화가 함께 웃으니
봄빛은 초가집에 벌써 왔구나.
風雪山中夜 蕭然一榻書
主人梅共笑 春色在茅廬
이것은 구당(榘堂) 유길준(兪吉濬) 선생(兪先生)의 득의작으로 널리 오르내리는 작품이다. 일전 매화를 말할 때 이 시를 뺀 것은 퍽 유감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종실 중에 임포(林逋) 같은 이가 한 분 있어, 얼마나 매화를 끔찍이 아꼈던지, 평생 매화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죽을 때 머리맡에 놓인 분매(盆梅) 한 가지를 꺾어 맡아보고, 인하여 매화를 두고 절명시(絶命詩)를 지은 것이 있다. 이 로맨틱한 일화를 지난번 매화를 쓰면서 누락시킨 것은 또한 큰 실수다. 이밖에도 매화에 대한 고금의 시조가 많지만, 그것을 골라서 넣지 못하였다.
봄비에 함초롬 젖는 배꽃
살구꽃은 붉고, 버들잎은 푸르며, 배꽃은 희다. 배꽃은 살구꽃보다도 버들잎과 대조할 때 한층 더 색채가 서로 어울린다. 소식(蘇軾)의 시에,
배꽃은 담백하고 버들잎은 푸르다.
梨花淡白柳葉靑
고 한 것이 바로 이러한 느낌을 말해준다. 그는 배꽃을 보며 인생이 무상함을 느껴,
인생이 몇 번이나 청명절(淸明節)을 보겠는가?
人生看得幾淸明
라며 탄식한 일이 있다. 우리는 배꽃이 눈에 비치면 흔히 소식의 이 시를 머리 속에 떠올리곤 한다. 꼭 이 시가 뛰어난 작품이래서가 아니라, 소년 시절에 이 시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꽃에 관한 시로는 소식 이전에도 이미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 중에,
배꽃 한 가지가 봄비를 두르고서
梨花一枝春帶雨
란 유명한 구절이 있어, 사람들의 입에 널리 오르내린다. 대저 이 구절은 장편 서사시 가운데 시인의 정신이 한곳에 결집된 구절로, 비에 함초롬 젖은 배꽃에 견주어 양귀비의 너무도 어여쁜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백거이의 천재적인 필치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바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도 배꽃을 자료삼아 인생의 서글픔이나 사랑의 감정을 써낸 일이 흔히 있었다.
열 다섯 아리따운 월계 아가씨
남 부끄러 말 없이 이별하고는,
돌아와 중문도 닫아 걸고서
배꽃 달 향하여 울음 우누나.
十五越溪女 羞人無語別
歸來掩重門 泣向梨花月
이 작품은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규원(閨怨)〉이다. 수줍기만 한 순결한 처녀가 남몰래 이별의 괴로움에 애를 태우는 눈물겨운 마음자리를 그려낸 것이다.
배꽃 달 향하여 울음 우누나
泣向梨花月
에서 ‘이화월(梨花月)’이라는 표현이 무한한 애수를 자아낸다.
고려시인 김구(金坵)의 〈낙이화(落梨花)〉시도 유명하지만, 충렬(忠烈)로 천고(千古)를 울리는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백옥(白玉) 이개(李塏)는 다음과 같은 〈이화(梨花)〉시를 지었다.
뜨락은 깊고 깊고 봄 한낮은 맑은데
배꽃이 흐드러져 한창 어둑 하구나.
院落深深春晝淸 梨花開遍正冥冥
영천(靈川) 신잠(申潛)의 〈이화정(梨花亭)〉시에도,
뜰앞엔 다만 배나무만 남아 있고
그때 춤추고 노래하던 이 보이질 않는구나.
庭前只有梨花樹 不見當時歌舞人
라고 한 애끊는 구절이 있다. 여류시인으로 배꽃을 노래한 것은 신정(申晸)의 며느리가 지은 〈월하이화(月下梨花)〉와 허씨의 “봄비에 배꽃이 흰데(春雨梨花白)”의 구절이 전할 뿐이다.
향그러운 꽃지짐, 진달래
두견화(杜鵑花)는 속명(俗名)인 진달래로 부르는 편이 오히려 다정스러운 느낌을 준다. 진달래는 식물학상 철쭉과에 속하는 꽃으로 모두 37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안의 분포 지역은 자못 넓어 북으로 백두산과 남으로 제주도, 동으로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이 꽃이 없는 곳은 없다. 흔히 관상용으로 정원에 재배도 하는데, 3월 꽃다운 봄날이 되어 개나리가 노랗게 필 때는 진달래도 붉게 피어 봄빛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예로부터 이 꽃은 산옹촌동(山翁村童)에게나 시인묵객에게나 한결같이 사랑을 받아온 만큼 노래와 시에도 흔히 보인다. 어느 시인이
흰 가루 맑은 기름 진달래를 지져서
白粉淸油煮杜鵑
라고 읊은 것과 같이, 수십 년 전만 해도 거의 연중행사의 하나로 치던 3월 3일의 화전놀이에는 진달래꽃을 따서 찹쌀가루와 섞어 참기름에 얹어 지진다. 이것이 봄날의 행락(行樂) 중에 가장 운치 있는 놀이였고, 서울이나 지방 할 것 없이 일반적으로 성행하던 것이었다.
고려 초에 시중(侍中) 최승로(崔承老)가 장생전(長生殿) 뒤의 백엽두견화(百葉杜鵑花)에 대해 지은 응제시(應製詩) 4수가 오늘 날 전하니, 이것이 진달래가 우리나라 시사(詩史)에 등장한 최초의 것인가 한다.
그러나 진달래꽃에 관해서는 여류의 시가 더 유명한 것이 많다. 다음은 판서(判書) 서기보(徐箕輔)의 부실(副室)인 죽서박씨(竹西朴氏)가 10살에 지었다고 전하는 시다.
창밖에서 우짖는 저 새야
어느 산서 잠자고 다시 왔느냐.
산 중의 일을 응당 알겠지
진달래꽃이 피었든 안 피었든?
牕外彼啼鳥 何山宿更來
應識山中事 杜鵑開未開
속어를 그대로 적었다. 창밖에서 우는 새야 어느 산에서 자고 다시 왔는가. 응당 산중 일을 알 터이니 산에 진달래가 피었던가, 피지 않았던가를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진달래꽃을 노래한 시에 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다. 김씨 성을 지닌 재원(才媛)이 지은 〈춘사(春事)〉시에 이렇게 말했다.
봄 맞아 나른해서 몸을 못 가누면서도
소약란(蘇若蘭)의 직금도(織錦圖)를 아끼어 바라보네.
굳이 눈썹 그리지만 아무런 일도 없고
진달래 가지 아래 꽃 수염을 헤이누나.
逢春柔懶不勝軀 愛看蘇娘織錦圖
强畵蛾眉無箇事 杜鵑枝下數花鬚
시의 뜻으로 보아, 산속에 자생하고 있는 진달래가 아니고, 정원에 옮겨 심은 것이거나, 화병에 꽂은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 아래 미인이 춘흥(春興)을 못 이겨서 나른히 앉아 꽃 수염을 헤아리고 있는 자태가 눈앞에 보이는 듯 하다
봄산에 절로 피는 철쭉
철쭉은 진달래와 비슷해서 얼른 분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철쭉은 꽃떨기에 주름이 잡히고, 꽃빛깔이 옅은 자주빛에 검은 점이 있다. 또 꽃 피우는 시기도 상당히 늦게 핀다. 이것으로 철쭉과 진달래가 서로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철쭉의 한자 이름은 척촉화(躑躅花)다.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철쭉에 대해 《본사(本史)》를 인용하고서,
의원의 말에 철쭉은 독이 있어, 양이 철쭉을 먹으면 죽는다. 그래서 척촉(躑躅)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어린이들이 그 꽃을 따먹더라도 중독되는 경우가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양에게는 중독되지만 사람에게는 중독되지 않기 때문일까?
하고 스스로 의아해 했다. 이것을 근거 없는 일종의 전설에 돌리고 말는지 모르겠으나, 철쭉의 한자 이름은 척촉(躑躅)을 글자 뜻으로 풀이한다면 썩 좋은 뜻이 아니다. 아름다운 꽃으로 나쁜 이름을 지닌 것이 이 철쭉만한 것은 없을 터이니, 어찌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철쭉꽃 가운데 붉은 것을 양철쭉이라 하고, 누런 것은 산철쭉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산철쭉은 없으니 중국에만 있는 별종인가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굳이 따져 물을 것이 아니요, 다만 철쭉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그뿐이다.
철쭉은 예로부터 일반인의 애호를 입어 시로 노래로 많이 찬미해 왔다.
진봉산 가운데 붉은 철쭉꽃
봄 오자 저 혼자 층층 피었네.
進鳳山中紅躑躅 春來猶自發層層
이것은 유득공(柳得恭)의 〈송경회고(松京懷古)〉시의 유명한 구절이다. 가요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신라 향가에 벌써 이 철쭉꽃을 노래한 것이 있다. 암소를 끌고 가던 어떤 노인이 절벽에 핀 철쭉꽃 한 가지를 꺾어서 수로부인(水路夫人)에게 드리는 〈헌화가(獻花歌)〉는 철쭉꽃이 낳은 얼마나 아름다운 로맨스인가.
이 밖에도 철쭉꽃에 관한 시와 노래를 꼽자면 얼마든지 있지만 이것은 잠시 덮어두기로 하자. 철쭉은 진달래와 마찬가지로 산과 시내 곳곳에 자생하는 꽃이지만, 꽃 기르는 사람은 관상용으로 재배하여 여러 종류의 변종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 원래 있던 종류 외에 지금부터 4백년 전인 중종 시절에 일본에서 들여 온 속칭 왜철쭉이 있어 정원에 심거나 화분에 심었다. 근래 들어서는 특히 온실에서 기르는 서양철쭉도 있어 구경꾼의 눈을 기쁘게 한다. 어쨌든 철쭉꽃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깊은 인연이 있는, 역사가 오랜 아름다운 꽃 가운데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부록] 철쭉과 수로부인(水路夫人)
명사해당(明沙海棠)이란 노래만 들어도 서해 장연 앞바다 금사산(金沙山)의 빼어난 풍경이 그립다. 아! 눈같이 흰 가는 모래에 찬란히 구름 무늬 비단을 펼친듯한 꽃은 참으로 자연미의 극치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동경을 받아 마땅하다. 다만 해당화가 사랑받는 것에 비해서는 이를 아낄만한 특별한 인연이 드물다.
누구나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해당화보다 복사꽃과 오얏꽃이 차라리 민중적이다. 그러나 도리(桃李)도 철쭉처럼 흔하지는 않다. 철쭉은 도리와 달라 배양을 기다리지 않고 저절로 많이 자라나는 것이 특색이다. 늦은 봄 꽃다운 산에는 거의 이 꽃이 없는 곳이 없다. 유득공(柳得恭)이 노래한 붉은 철쭉은 진봉(進鳳)의 야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쪽으로 지리산과 동쪽으로 금강산 같은 명산에도 봄빛을 붉게 물들이는 꽃은 역시 이 철쭉임을 알아야 한다.
철쭉은 진달래와 비슷하다. 그러나 꼭 같지는 않다. 우선 두 꽃의 모양과 잎사귀 형태의 크고 작은 것이 다르고, 꽃피는 시기만 해도 상당히 차이가 난다. 봄바람에 진달래가 먼저 피고, 그 다음에 이어 철쭉이 피어난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자연생 화훼로 네 계절에 대표될만한 것을 찾는다면, 겨울을 제외하고는 여름의 백합과 가을의 들국화와 함께 봄에는 이 철쭉이나 진달래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진달래는 분포구역이 한층 더 넓을 뿐 아니라 봄빛을 상징하는 화전(花煎) 같은 데도 예로부터 이 꽃을 애용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봄을 대표하는 꽃은 철쭉보다 진달래라고 생각하는 이가 더 많다. 옳다. 과연 그렇다.
그러나 진달래는 이상야릇한 전설이 있기 때문에 꽃이 지닌 자체의 아름다움 이상으로 돌보아 주는 일이 없지 않다. 만일 진달래에게서 이런 전설을 뚝 떼어 버린다면 반드시 철쭉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러면 철쭉은 아무 전설도 갖지 못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진달래, 즉 두견화가 중국의 두견새 설화에 얽힌 황당무계한 전설을 가진데 반해, 철쭉은 재미있는 우리나라의 전설을 가졌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성덕왕 때 수로(水路)라는 절세미인이 강릉태수로 가는 그녀의 남편 순정공(純貞公)을 따라 강릉으로 동행할 때 따뜻한 봄날, 일행이 가다가는 쉬고 쉬다가는 가는 것이 어느덧 한 낮이 되어 해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때 여기저기 살펴보니 바로 그 곁에 높은 절벽이 병풍처럼 바닷가에 둘러있는데, 몇 백 길 되는 꼭대기에 철쭉꽃이 난만하게 피어 길손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꽃을 유난히 사랑했던 수로부인은 철쭉을 보고 웃음을 띠며 그 꽃가지를 꺾어 오라고 종자들에게 명하였으나, 너무 가파른 절벽이라 아무도 감히 꺾어 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마침 어떤 노인이 암소를 끌고 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환심을 사려 하여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되,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새도 좀체 발붙이기 어려운 절벽을 기어 올라가 철쭉을 꺾어 그 부인에게 드리고 노래까지 바쳤다고 한다.
여자의 머리칼 하나가 능히 큰 코끼리를 끌 수 있다고 하더니, 수로부인의 한 마디 말이 이처럼 노인을 이끌어 절벽 꼭대기에 핀 꽃가지를 꺾어오게 했다. 매력도 이쯤 되면 참으로 위대하다 할 것이다. 그 노인이 지었다는 노래는 이렇다.
자줏빛 바윗가에
잡은 손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
꽃을 꺾어 받자오리이다.
이것이 노인의 〈헌화가(獻花歌)〉라 하여 신라 향가 중에 하나로 오늘까지 전해온다. 우리는 철쭉을 감상할 때마다 수로부인과 〈헌화가〉의 로맨스를 떠올리게 된다.
온 산을 환히 비추는 영산홍(映山紅)
영산홍이 영산홍을 마주 했구나.
映山紅對映山紅
이것은 시로 이름난 기생인 영산홍(映山紅)이 영산홍 꽃을 노래한 한 구절이다. 미인이 이름난 꽃을 보고 그것을 아끼고 사랑하여 시 속에 그렸으니, 이것은 세상에서 만나기 힘든 아름다운 인연이다. 하물며 그 이름도 서로 같음에랴. 꽃이 사람인지, 사람이 꽃인지 분별하기 어렵다고 하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른 것이 아닐까 한다.
영산홍은 본래 경상도와 전라도의 바다 가까운 곳에 자생하는 꽃이다. 흔히 정원에 옮겨 심어 애호하는 이들의 관상용으로 사랑받기도 하고, 근래 들어서는 꽃 기르는 사람들이 이 꽃을 화분에 심어 일반 사람들에게 팔기도 한다.
영산홍의 다른 이름은 산척촉(山躑躅), 즉 산철쭉이다. 그 줄기와 잎이 진달래와 꼭 같으나, 꽃의 색깔만은 진달래보다 곱고도 붉다. 또 꽃이 피는 시기도 진달래보다 상당히 뒤지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식물학 상으로는 진달래와 철쭉과 영산홍이 모두 철쭉과에 속하는 같은 종류다. 이 셋 중에 빛깔이 곱고 선명하며 아름답기로 말하면 영산홍이 으뜸이다.
이제 시험 삼아 영산홍 화분 하나를 책상 맡에 놓아두면, 붉은 빛이 온 방에 환하게 비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원에 심을 때는 붉은 광채가 온 정원에 환히 빛나는 것을 볼 것이니,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원을 꾸미려고 이 영산홍을 흔히 재배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영산홍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옛날에는 진달래 철쭉과 구별 없이 섞어 부른 듯 하다. 영산홍이 역사 기록에 나타난 것은 지금부터 4백여 년 전의 일이다. 궁궐의 정원을 관리하는 장원서(掌苑署)에서 성종대왕께 영산홍을 바치자, 성종께서는 “겨울철에 꽃이 핀 것은 인위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으니 다시는 올리지 말라.”는 분부가 계셨다.
사관(史官)은 꽃 같이 사람들이 완호(玩好)하는 사물을 멀리 하시는 임금의 거룩한 덕을 찬송하기 위해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이 일을 적었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 장원서에서 영산홍을 재배했던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겨울철에 꽃을 피우는 일종의 온실 비슷한 것이 있었던 사실도 헤아려 볼 수가 있다.
영산홍이 조선시대 성대한 시절에 군림하셨던 성종대왕의 거룩한 덕을 나타낸 것은, 마치 모란꽃이 신라의 성대하던 시절에 군림하였던 선덕여왕의 명민(明敏)함을 나타낸 것과 같은 점이 있다. 어쩌면 이 두 꽃은 아래 위로 천년을 사이에 두고 이처럼 임금과 인연을 맺었던 것일까. 이상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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