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손은 쓸 데 없다
비 오면 꽃 피고 바람 불면 꽃 진다. 피고 짐이 비바람에 달렸다. 물은 누굴 위해 흐르는가. 낙화와 유수에 교감이 있을 턱 없지만 시인은 기어코 사연을 만든다. ‘떨어지는 꽃은 뜻이 있어 흐르는 물에 안기건만/ 흐르는 물은 무정타, 그 꽃잎 흘려보내네.’
조선 후기를 소란스레 살다 간 미치광이 화가 최북의 적막한 그림 한 점이 있다. 이름 붙이기를 ‘공산무인도’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초옥과 그 곁에 꽃망울 맺힌 키 큰 나무 두 그루, 그리고 수풀 사이로 흘러내리는 계곡물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등성이가 이 그림의 전부다. 붓질은 거칠고 서툴다. 꾸밈이 없어 적막하다.
눈길을 붙잡는 것은 화면 속에 휘갈긴 한 토막의 시다. ‘빈산에 사람 없어도/ 물 흐르고 꽃 피네(空山無人 水流花開).’ 소동파의 글을 옮겨온 최북의 속은 깊다. 산속에 사람 흔적 눈 씻고 봐도 없다. 그래도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단다. 물과 꽃은 저들끼리 말 맞추지 않는다. 인간사에 두담두지 않은 채 흐르고 핀다.
꽃 피고 물 흐르는 풍경은 유정하거나 무정하지 않다. 시 짓고 그림 그리는 이 저 혼자 겨워할 따름이다. 스스로 그러해서 ‘자연(自然)’이다. 저 빈 산, 무엇이 아쉬워 사람 손길을 기다리겠는가.
연꽃 보니 서러워라
한적한 여름날 오후 별당의 뒤뜰. 연못 가득 푸르촉촉한 잎들이 살을 부비며 연연한 티를 뽐낸다. 그 사이로 두어 송이 연꽃, 연분홍빛 봉오리가 수줍다. 꽃들의 생기는 색에서 드러난다. 붉고 푸른 태깔은 목숨붙이의 복받치는 새뜻함이다.
혜원 신윤복의 붓은 그러나 연꽃의 발랄한 생기에 멈추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 뒤편에 있다. 툇마루에 걸터앉은 여인은 기녀다. 댕기 달린 트레머리로 멋을 부렸다. 하지만 좁은 어깨가 안쓰럽고 앉음새가 방자하기 그지없다. 갸름한 얼굴에 애처로움이 남아있대도 우두망찰 넋 놓은 표정은 어여쁘기보다 수심에 그늘졌다.
그녀의 꽃다운 생기는 갔다. 한발을 주춧돌에 올린 채 털퍼덕 주저앉은 저 품새를 봐라. 조선판 ‘쩍벌녀’다. 단속곳이 훤히 보이게끔 가랑이를 벌린 꼴이 도발은커녕 남세스럽다. 환락의 한밤, 그녀는 손에 든 생황으로 한량의 여흥과 취객의 수작에 곡조를 맞췄다. 새고 나면 그녀의 허탈을 달래줄 것이 무에 남았을까. 담뱃대에 꾹꾹 눌러 담은 심심초는 간밤의 속 쓰림을 더해 줄 따름이다.
그녀가 무연히 연꽃을 본다. 환한 햇살 받아 곱다랗게 피어난 꽃.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자라도 한 점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꽃이 부끄러운 여자의 회한이 애오라지 서럽다.
가려움은 끝내 남는다
콧등이 뾰족하고 털이 부슬부슬하다. 긴 꼬리와 만만찮은 덩치로 봐 토종개는 아니다. 뒷다리로 가려운 곳을 벅벅 긁는 꼴이 우습다. 생생한 실감은 놀랍다. 터럭 한 올까지 세심하게 묘사해 촉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린 이는 김두량이다. 그는 신통한 그림 실력으로 영조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빼어난 재주가 이 그림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색칠하지 않고 먹으로만 그렸는데 개의 근골과 부피감이 또렷하고 음영이 살아 있다. 그 시대에 벌써 서양화 기법을 익힌 덕분이다.
개는 흔히 나무 아래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전문가들의 해독을 따라가면 그 까닭이 나온다. 개를 뜻하는 한자가 ‘술(戌)’이고 나무는 ‘수(樹)’인데, 이들 한자가 지킨다는 의미의 ‘수(戍, 守)’와 발음이 닮았다. 개는 모름지기 집을 잘 지켜야 한다. 나무 아래의 개는 도둑 들지 말라는 뜻이다.
개는 지금 심히 가렵다. 뒷다리로 부지런히 긁적거리지만 끝내 후련치 않다. 나머지 다리가 버둥거리고 어깨가 덩달아 들썩거린다. 요놈 표정도 마뜩잖은 심사다. 중국의 근대화가 치바이스가 말했다. “세상 모든 것을 그려낸 내 손으로도 가려운 곳 긁어주기는 힘들더라.” 살다 보면 일쑤 가렵다. 내남없이 시원하게 긁어주기가 어렵다.
덧없거나 황홀하거나
양귀비꽃 피는 오월이다. 아름답기로 둘째가라면 투정할 꽃이 양귀비다. 모란이 ‘후덕한 미색’이라면 양귀비는 ‘치명적인 매력’이다. 그 고혹적인 자태는 쉽게 보기 어렵다. 함부로 키우다간 경을 친다. 열매에서 나오는 아편 때문이다. 무릇 아름다운 것은 독이 있다. 현재(玄齋) 심사정이 그린 양귀비가 이쁜 짓 한다. 낭창낭창한 허리를 살짝 비틀며 선홍색 낯빛을 여봐란 듯이 들이민다. 아래쪽 봉오리는 숫보기마냥 입술을 스스럽게 빼물었다. 벌과 나비는 만개한 꽃을 점찍어 날아든다. 그들은 용케 알아차린다. 저 꽃송이의 춘정이 활활 달아올랐음을. 날벌레와 꽃의 정분이 이토록 농염하다. 청춘남녀의 사랑인들 다르랴. 끌리고 홀리기는 마찬가지다. 김삿갓은 사랑의 인력(引力)을 두둔한다. ‘벌 나비가 청산을 넘을 때는 꽃을 피하기 어렵더라.’ 하여도 안타까움이 어찌 없을손가. 꽃은 열흘 붉기 어렵고 지기 쉽다. 양귀비의 꽃말 또한 ‘덧없는 사랑’이다. 고려 문인 이규보가 한숨짓는다. ‘꽃 심을 때 필까 걱정하고/ 꽃 필 때 질까 맘 졸이네/ 피고 짐이 다 시름겨우니/ 꽃 심는 즐거움 알 수 없어라’ 나비는 꽃에서 꽃가루를 옮기고 벌은 꽃에서 꿀을 얻는다. 짧지만 황홀한 사랑이다. 사랑의 덧없음은 그저 인간사일 뿐, 독이 든 아름다움이기로서니 꽃을 탓하랴. |
나무랄 수 없는 실례
거나해진 노인이 몸을 못 가눈다. 소나무에 기댔지만 한 발이 휘청거리고 눈이 아예 감겼다. 가관인 건 갓 모양이다. 오는 길에 냅다 담벼락을 박았는지 모자가 찌그러졌고 챙이 뒤틀렸다. 망건 아래 머리칼이 삐져나오고, 귀밑털과 수염은 수세미다. 취객의 꼬락서니가 민망하기보다 우스꽝스럽다. 이 노인, 그래도 입성은 변변하다. 넓은 소매와 곧은 끝자락에 옆트임한 중치막을 걸쳤다. 이로 보건대 신분은 틀림없이 사인(士人)이렷다. 겨드랑이에 낀 지팡이는 매무새가 날렵하고 손잡이 장식에 멋 부린 티가 난다. 무늬를 넣은 갓신도 태깔이 곱다. 아무래도 모지락스런 파락호는 아닐성싶은데, 웬일로 벌건 대낮에 억병으로 취했을까. 지금 그는 느슨해진 고의 띠를 여미고 있다. 무슨 수상쩍은 짓인가. 아, 안 봐도 알겠다. 소나무 둥치에 소피 한방 시원하게 갈겼구나. 꽉 찬 방광을 비운 후련함이 입가에 흐뭇하게 남아있다. 마침 보는 눈 없기에 망정이지 들켰다면 양반 처신 쌍될 뻔했다. 18세기 어름 평양 출신 오명현이 그린 속화가 이토록 생생하다. 이 그림은 추저분하지 않다. 외려 정겹다. 지나는 이도 늙은 양반의 실례를 살짝 고개 돌려 못 본 척 해줄 것 같다. 그것이 넉살과 익살로 눙치는 조선의 톨레랑스다. 무얼 봐서 용서하라고? 코 대고 맡아봐라. 지린내가 안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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