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예술이 살아있는 자연 사랑의 진앙지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화가 장경희·도예가 김영자 부부의 서산 도적골
홈스쿨링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자연에서 난 것들로 밥상을 채운다.
버려진 것들을 살려 쓰고, 흙과 생명의 소중함을 몸소 실천하며 산다.
삶 자체가 예술이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 운산리 도적골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날로 서울로 돌아올 수도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도 굳이 거기 머문 것은 그 집 식구들과 도무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군불 땐 바닥이 뜨끈뜨끈하고 반찬이 유난히 맛깔스러운 것도 이유였지만 그림 그리는 남편 장경희(51)와 그릇 빚는 아내 김영자(52)가 만들어내는 다사로운 화음에 내 안의 찬 기운과 뾰족한 모서리가 슬슬 눅여지는 경험이 신통하고 유쾌했기 때문이다.
무슨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사소하다면 아주 사소할 뿐이었다. “여보, 손님 오셨어, 나와 봐요”하고 아내를 불러내는 남편의 커다란 음성이나 칡뿌리를 캐어와 말끔히 씻은 후 말없이 문안으로 디밀어주는 손길, 냉이와 풋마늘을 조물조물 무치면서 한 저름 집어 입 안에 넣어주는 아내의 웃음 같은 것들.
그 부부는 손이 온다고 미리 낚시와 그물로 숭어와 망둥이를 잡아뒀다. 남편은 능란한 솜씨로 숭어로는 회를 치고 망둥이로는 맑은 어탕을 끓인다. 몸집은 커도 부엌일이 몸에 착 붙었다. 아내는 곁에 서서 풋마늘과 머위나물과 냉이를 제때 맞춰 데쳐서 헹군다.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찼다. 방바닥에 손을 대보고 조금 식는다 싶으면 남편은 얼른 아궁이께로 달려 나간다. 아궁이 곁엔 가지런히 패놓은 장작더미가 실팍하다. 이 모든 것이 한 100년쯤 전의 세상으로 시곗바늘을 되돌린 듯하다.
덩달아 벙싯벙싯 웃음이…
뜰 안을 다사롭게 비추는 햇살과 꽃망울을 잔뜩 매달고 선 산수유와 간간이 음전하게 우는 산비둘기 울음은 거기 깃든 사람을 두터운 평화 속에 잠기게 만든다. 흥성하고 고요했다. 이 집 막내 새벽이가 기르는 거위 ‘뭉치’의 꽥꽥대는 소리와 낯선 사람의 다리에 마구 매달리는 고양이 ‘오디’와 ‘복분자’의 애교와, 마당을 바퀴처럼 굴러다니는 강아지 ‘구름이’와 ‘깜돌이’의 경주가 자그만 소란을 일궜지만 그건 고요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본디 사람 사는 모습인 것을! 도적골 뜰에 앉아 이집 식구들처럼 나도 덩달아 벙싯벙싯 웃음이 도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 고양이 이름이 오디와 복분자라고요? 먹는 열매 이름이네요?
“예. 근디 열매 이름이 아니라 술이름인데유, 하하.”(장경희씨)
도적골 주인 장경희는 화가이기 이전에 농부이고 어부다. 서산의 갯벌에서 나고 자랐다. 낙지와 굴과 맛조개와 게가 숨는 곳을 손금 들여다보듯 환하게 안다.
“저 사람이 갯벌에 나가 한 삽만 푹 뜨면 먹을 것이 줄줄이 나와요. 만날 봐도 신기하다니깐요. 여기 갯가엔 철따라 먹을 것 투성이에요. 낼 아침에 우리 산꿜파래 뜯으러 갈 건데 같이 안 가실래요. 이 계절에 잠깐만 나오고 곧 사라지는 파래인데 달고 쌉쌀하고 시원해요.”(안주인 김영자씨)
“서울 시장에서 파는 시퍼런 파래하곤 본적부터가 달르쥬.”(장씨)
이른 아침 썰물 때 갯가에 나가 산꿜파래를 뜯자는 유혹은 강렬했다. 이튿날은 마침 새벽이의 생일이었다. 이튿날 밀물이 들어오기 전 우리는 트럭으로 곰섬(웅도)이 코앞에 보이는 가로림만(加露林灣)으로 나갔다. 서산 앞바다엔 재미있는 이름의 섬이 많기도 하다. 솔섬, 새섬, 매섬, 닭섬…. 이 중에서 제일 큰 게 곰섬이다. 만에서 섬까지 이어지는 바다는 하루 두 번씩 길을 연다. 물때를 미리 알아뒀다가 바닷물이 빠질 때 얼른 이 갯벌에 들어와 굴이니 게니 파래를 캐내야 한다.
장경희씨는 서둘러 어깨 아래까지 올라오는 비닐 옷을 갈아입더니 그물망 하나를 들고 갯벌로 내려간다. 이 갯벌은 장경희씨의 그림 소재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 안에는 갯벌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굴, 게, 낙지, 새우, 바지락, 나문재, 함초와 갯벌을 뒤집는 호미와 굴 캐는 이의 손과 주름진 얼굴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바탕화면은 뽀글뽀글 구멍만 남기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갯벌이다. 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무수한 생명이 살아서 꼼지락대는 터전이다.
튼실하고 기운찬 그림
나는 도적골 작업실에서 봤던 이런저런 갯벌의 모습들이 가로림만 안에 실재하는 풍경임을 확인한다.
“현실을 외면한 그림은 소용없다고 생각했쥬. 삶 속에서 나오는 것이 예술인 거쥬. 생활과 동떨어진 그림은 자칫하면 사기가 돼버리는 거 아니겠슈.”(장씨)
단순한 듯 들리는 이 말이 그의 예술철학이다. 장경희의 화면은 튼실하고 기운차다. 멀리 있는 아름다움을 찾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는 생활 터전을 그린다. 색도 표면에 발린 것이 아니라 갯벌 아래 깊숙한 땅속에서 품어져 올라오는 빛깔이다.
그는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화가가 아니다. 나무에 형태를 판다. 조소와 회화의 중간 지점이라고 할까. 그렇게 된 건 새로운 물성을 찾아내자는 모색이었다기보다 캔버스 살 돈이 부족해서였다. 창작욕은 넘치는데 비싼 천을 사댈 도리가 없었다. 대신 이사 가는 사람들이 곧잘 버리고 가는 헌 짐들이 있었다. 어느 초등학교가 이사하면서 낡은 책장을 버렸다. 그걸 주워서 싣고 왔다. 잘 마른 소나무 책장은 그림 그리기 좋을 만한 크기의 송판 수백 장을 제공해줬다. 10년 넘게 캔버스 없이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한 양이었다. 그 나무에 게를 파고 호미를 새겨 넣었다. 게가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고 호미가 뻘흙 속에 깊이 박히는 화면이 탄생했다.
“저는 작업에 노동이 들어가는 게 좋아유.”(장씨)
번들거리는 게 싫어 유화로 작업해도 린시드 기름은 뺀다고 한다. 그래서 장경희의 그림은 다른 유화와는 다르다. 아주 담백하다. 그림에도 ‘정직’이라는 말이 허용된다면 정직한 그림이다.
그림이 주업이지만 그는 곧잘 헌 나무를 구해와 필요한 것을 뚝딱뚝딱 잘 만든다. 처음 서산 도적골을 내게 소개했던 이가 말했다.
“그 집에 가면 집은 물론이고 옷장도 싱크대도 전부 다 남편이 만든 것 뿐이에요. 그릇은 전부 아내가 만들고! 아마 돈 주고 사 온 것은 가전제품밖에 없을 걸요.”
과연 그랬다. 살펴보면 옷장도 장식장도 그의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입화물의 나무 상자나 부서진 집의 헌 마룻장을 뜯어와 만들었다는 가구들은 그의 겉모습처럼, 그리고 그의 말씨처럼, 튼실하고 담백하고 또 정직해 보인다.
모든 것을 긍정한다
우린 다 함께 갯벌로 내려섰다. 말하자면 장경희 그림의 화면 속으로 들어선 셈이다. 세상에, 덩어리진 것마다 모두 굴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바위에, 돌에, 시멘트 다리의 교각에! 초등학교 6학년 새벽이는 능란하게 굴껍데기를 깨더니 제 친구의 입에 넣어준다. 그러면서 일행을 인솔해 굴 따는 시범을 한다. 금방 캐낸 굴이 향기로워 아침바다 여기저기 환호성이 퍼지는데 장경희씨 그물망은 벌써 ‘산꿜파래’로 두둑하다. 길고 검고 향긋한 파래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엔 여기저기 푹 팬 웅덩이가 있고 파래는 그 물 안에서 긴 머리를 감듯 출렁인다.
▼ 바닷가에 살면 굶주릴 일은 없겠네요?
“예. 아프지만 않으면요.”(김씨)
갯벌 여기저기 굴 따는 이들이 보인다. 대개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이다.
“그래도 나이 들면 힘들쥬.”(장씨)
파래 뜯기를 잠깐 만에 끝내고 새벽이를 위한 생일잔치가 시작된다. 장소는 곰섬을 향해 세워둔 트럭의 짐칸 위!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불어 끄고 박수를 치는 것까지는 여느 모임과 같다. 그런데 케이크를 나눌 때부터는 처음 보는 풍경이 여럿 나온다. 김영자씨는 우선 케이크의 종이 상자를 사람 수만큼 착착 잘라냈다. 즉석 접시다. 아빠 장경희씨가 얼른 숲 속으로 뛰어간다. 이건 쑥대궁, 이건 익모초, 이건 버들가지! 사람마다 재질이 다른 젓가락 예닐곱 개를 순식간에 만들어 가져왔다. 생활에 필요한 것을 즉석에서 얻고 자연에서 구하는 것에 온 가족이 능숙하다. 케이크 자르던 칼을 들고 문득 새벽이가 궁리한다.
“이걸 뭐에 쓸 수 있을까요, 나무도 잘릴까요?”(새벽)
“무른 나무기만 하면!”(장씨)
“힘만 주기만 하면!”(김씨)
이 가족에게 쓰레기란 없다. 상쾌하게 손발이 척척 맞다. 뭐든 재생해서 쓸 수 있고 필요한 것을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풍요롭고 품위 있는 것인가.
엊저녁 손님 중의 하나가 새벽이에게 물었다.
“새벽이 공부 잘해?”
21세기 한국에서 어른이 아이를 보면 누구나 하는 질문이다. 대개 무심코, 별 뜻 없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새벽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했다. 엄마가 대신 대답했다.
“새벽이, 공부 잘해요. 우린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나아지는 것이 공부라고 가르쳐요. 하하.”
아빠가 거들었다.
“성적은 안 좋아도 공부는 잘하쥬. 허허.”
그림이 맺어준 인연
공부란 무엇인가. 새벽이는 닭 9마리, 거위 1마리, 고양이 2마리, 강아지 5마리를 거뜬히 통솔한다. 부모가 집을 비우면 2박3일 정도는 혼자 군불 때며 집을 건사한다. 엄마 따라 도자기도 빚고 아빠 따라 책상과 의자도 만든다. 아버지가 그렇게 자랐듯 새벽이도 그렇게 자란다. 부모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과외도 없고 학원도 가지 않는다. 대신 칼로 나무와 흙을 빚고 산과 들과 바다에서 필요한 것을 채취하는 법을 배울 뿐!
“새벽이 나중에 뭐 되고 싶어?”
새벽이는 기다렸다는 듯 ‘시인’이라고 대답한다. 그냥 시인이 아니라 ‘농사지으면서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농사짓는 아버지처럼? 주부이면서 도자기를 빚는 어머니처럼? 그런데 모델이 따로 있단다. 나는 좀 설레ㅆ다. 심지 깊은 소년의 꿈을 만들어준 이가 누구일까.
“최은숙 선생님이요!”
최은숙씨는 근처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새벽이 집 담벼락에 그의 시가 붙어 있다. 장경희 부부는 집 지을 때 아예 벽에다 나무토막을 잘라서 시 한 편을 박아 넣었다. 최은숙 시인의 ‘흙’이란 시다. 그 작업에 어린 새벽이도 동참했다. 그러니 커서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다.
장경희씨는 이곳 대산읍 출신이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내는 읍에서, 남편은 논과 갯벌이 있는 시골마을에서 자랐다. 그랬기에 서로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당에 다녔고 아내는 읍내 제재소집 딸이었기에 일찍부터 서울유학을 떠났다. 둘은 어쩌면 가는 길이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매개는 그림이었다.
남편이 진학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가난 때문이었다. 그는 간절히 그림을 배우고 싶었다. 서당 선생의 눈치를 봐가며 읽으라는 한문 대신 바깥 풍경만 긁적거리다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러 태백으로 떠났다. 그럴 때 아내는 대입을 위해 열심히 미술학원에 다녔고 마침내 이화여대 도예과에 입학한다. 장경희가 찾아간 스승은 광부를 그리는 화가 황재형이었다. 황재형은 당시 가족을 데리고 태백으로 들어가 실제로 광부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삶을 그림에 담고 있었다. 화폭 속 주인공들의 거친 호흡이 느껴지는 스승의 그림을 보며 장경희는 자신이 나고 자란 갯벌을 그리는 데 평생을 바치자고 맘먹었다. 그는 스승에게서 기법보다는 예술혼을 배웠다. 치열하게 작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서른 즈음 장경희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학교를 졸업한 김영자도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셔서 고향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두 분을 모시고 미술학원이라도 하면서 살아야지 했던 거죠. 마침 아버지에게 미술학원을 낼 만한 건물이 하나 있었어요.”(김씨)
그런데 거기 미리 화실을 열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그가 장경희였다. 재능 있고 근면하고 뚝심 있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김씨는 장씨가 비록 학력이 초교졸업이었지만 어떤 미술대생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이 ‘초등학교 졸’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해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아서 저렇게 힘차고 치열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라는 쪽과 제대로 배웠으면 훌륭한 화가가 됐을 텐데 참말 아깝다라는 식으로!”(김씨)
예술적 동지
딸에게 어려서부터 그림을 가르쳤던 김영자씨의 어머니는 전자 쪽이었다. 자기네 건물에 세 들어 그림을 그리는 청년에게 어머니는 진작 반해버렸다.
“이젤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는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고 좋더래요. 자꾸만 둘이 같이 화실을 해보라고 제게 권하시는 거예요.”(김씨)
여느 어머니와는 확실히 달랐다. 명문대를 나온 딸을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는 것이 보통 어머니의 꿈이련만 김영자씨의 어머니는 자기 딸이 평생 예술적 동지가 될 배필을 얻기를 바랐다. 곁에서 그의 사람됨을 봐왔기에 학력 따위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둘은 어머니의 권유대로 화실의 동업자가 되기 위해 만났다.
“처음 만난 날 그림을 보여준다면서 날 자기 화실로 데려가데요. 시골 아버님 밭에 비닐하우스로 지은 화실이었어요. 와아, 힘차데요! 그림을 보니까 사람이 달라 보였어요. 흙으로 지은 시골집도 어찌나 아름답던지.”(김씨)
그러나 정작 장씨는 마주 앉은 여자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그림이었다. 그렇게 둘은 같은 공간에 미술학원을 열었고 머잖아 어머니의 바람대로 연인이 된다.
“어느 날 필요한 목재를 구하지 못하고 낙담해서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저 사람이 화실 위쪽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손을 흔들어유. 나무를 못 구하겠거든 마당에 선 오동나무를 베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여유. 아, 희한하데유. 그전에는 덤덤했는데 그날부터 저 사람이 갑자기 여자로 보이데유. 이뻐 보이고, 안고 싶고!”(장씨)
서른 될 때까지 한 번도 없던 감정이었다. 장씨는 광부로, 노동자로 떠돌 때는 그림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침마다 저 사람 발소리가 계단을 밟는 소리를 기다렸쥬. 화실 물청소를 깨끗하게 해놓고 머리를 감고, 바흐 음악을 틀어놓고! 계단 밟는 소리가 가볍게 착착착 들리면 곧 저 사람이 환하게 나타나는 거쥬.”(장씨)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연애 이야기를 섬세하게도 한다. 아내가 그 무렵 무슨 옷을 입었는지 어떤 표정과 자세를 지었는지에 대해서도 다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계단을 올라가면 새날이 아빠가 머리칼에 비누냄새를 풍기면서 웃고 서 있었어요. 사실 제게 관심 없었을 땐 머리도 잘 안 감았거든요. 호호.”(김씨)
그들은 신혼여행을 태백으로 갔다. 장씨는 필사적인 심경으로 그러나 희망에 차서 그림을 배우러 찾아갔던 곳을 아내와 함께 찾고 싶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신비하다. 여럿 중에 문득 눈에 띄는 상대가 나타나고 머리를 자주 감게 되고 감정이 섬세해져 웃음과 눈물이 많아지고 그런 후엔 곧 둘만의 집을 구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런데 장경희, 김영자 부부는 집을 구한 게 아니라 직접 지었다. 차진 흙을 이겨서 벽돌을 찍어 함께 쌓아올렸다. 둘 다 엔도르핀이 솟아올라 즐겁기만 했다. 아이도 셋이나 낳았다. 한 10년은 읍내서 미술학원을 했고 10년 전엔 도적골 산속으로 아예 들어왔다. 꿈결 같은 나날이었다.
새벽이 위로 새날이와 새터는 지금 공부를 더 하러 서울로 올라가 있다. 둘은 아이들에게 성적을 올리라고 권하지 않았다. 많이 배워야 지혜로워지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대신 흙의 힘과 고마움을 깨닫기를 바랐다. 쌀과 채소를 기르는 논밭의 흙, 낙지와 파래를 기르는 뻘흙, 도자기를 만드는 흙, 발밑을 받쳐주고 나무를 기르는 마당의 흙을 어려서부터 실컷 주무르게 했다.
“병뚜껑 하나 분량의 흙 안에도 수백만 마리의 미생물이 산다잖아유. 흙이 곧 생명이지유. 온갖 더러운 것도 흙에 묻으면 다 깨끗해지잖아유. 흙이 곧 하나님이지유, 흙에서 난 것 아니면 우리가 하루라도 살 수 있남유. 흙이 곧 보배지유!”(장씨)
가장 큰 재산은 사람
도적골은 대산읍내를 조금 벗어난 산골에 있다. 예전엔 지금보다 훨씬 골이 깊었고 도적떼가 자주 출몰했던 모양이다. 그들이 여기 들어온 10년 동안도 도시는 야금야금 영역을 넓혀 요즘은 집앞을 지나다니는 차가 부쩍 많아졌다.
“몇 해 전만 해도 저 앞 보리밭에 고라니가 뒹굴며 놀았어요. 어미 잃은 애기 고라니를 집에서 우유 먹여가며 키운 적도 있어요. 그놈 이름을 마음이라고 지었어요. 고라니는 눈에 흰자가 없고 다 까만 동자뿐이에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얼마나 이쁜지 몰라…. 마음이는 우리가 제 부모인 줄 알았어요. 밭에서 일하면 곁에 와서 핥고 비비적대고! 첨엔 애기였는데 점점 자랐지요. 우리 아이들이 마음이를 얼마나 사랑했다고요. 어느 날 마음이가 여자 친구를 데려왔어요. 고라니 한 마리가 보리밭 가에 앉아 있길래 어째 우리 마음이하고는 좀 다르게 생겼다 싶었거든요. 곁을 보니 정작 마음이는 내 옆에 딱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 낯선 고라니를 따라 산속으로 달려가버리데요. 그리고 다시는 안 와요. 마음이가 오나 하고 만날 보리밭을 내려다보는데도!”(김씨)
도적골의 흙은 몹시 차지다. 그리고 빛깔이 붉다. 벽돌집은 그냥 프레스로 압축해서 쌓았을 뿐이라는데 센 불에 구워낸 벽돌처럼 야물다. 그들이 지은 집은 모두 세 채다. 흙벽돌로 지은 남편의 작업실 한 채와 컨테이너 박스 둘을 연결한 살림집 한 채와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아내의 도자기공방 한 채! 이곳에서 남편은 그림 그리고 아내는 도자기 빚으면서 함께 농사를 짓는다.
“한 달에 생활비가 얼마나 들어요?” 나는 이제 그런 질문도 단도직입적으로 해버린다. 둘은 난처한 듯 마주 보고 웃더니 장씨가 “허허, 계산 안 해봤는데요”한다. 쌀은 근처에 있는 아버지 논에서 장경희씨가 직접 농사를 지어 마련하고 반찬은 바다와 밭에서 나는 것으로 족하단다. 이들은 달걀과 고기도 닭을 직접 길러서 얻는다. 아이들 학비는 학교 보내는 것말고는 따로 돈 들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고, 옷은 주변 ‘천사들’의 도움을 받는다. 안 입는 옷을 물려줄 천사들이 그들 곁에는 여러 명 있다.
“우리의 가장 큰 재산은 사람이지유.”(장씨)
“우리 곁의 사람들이 전부 천사예요.”(김씨)
이들의 말이 친구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밥과 술을 나누는 것을 즐긴다는 뜻인 줄 알았더니 실제로 이 부부가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할 때 곁의 사람들이 곧잘 수호천사로 변했다.
큰딸 새날이와 큰아들 새터가 스스로 공부를 더 하겠다고 나섰을 때의 일이다. 부모가 돈을 버는 것을 중시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진로도 알아서 스스로 정했다. 새날이 새터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다.
“그림 그리는 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자연스러운 본능 같데요. 가만히 둬도 자꾸 그림을 그리더라고요.”(김씨)
자연 벗하며 자란 아이들
새날이는 그림 외에도 악기 연주에 재주가 있었다. 학교 교육과정 중에 단소불기 강좌가 있었는데 새날이의 재주가 남다르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서양음악부터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주변엔 모조리 피아노 학원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나 어느 피아노 학원 귀퉁이에 ‘가야금’이라고 쓰인 것을 봤어요. 가야금을 전공했던 학원 선생님이 후학을 양성하기 힘드니까 피아노 학원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새날이가 그 선생님에게 가야금을 배우고 싶다니까 도리어 우리에게 고마워했어요.”(김씨)
수호천사를 만난 것이다. 그 덕분에 새날이는 큰돈 들이지 않고 가야금을 배웠다. 지금 새날이는 서울예술대학에서 가야금을 전공하고 있다. 학비는 서산인재육성재단에서 장학금으로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도 여러 수호천사가 나타났음은 물론이다.
“우리 아이들은 둘 다 고교를 다니지 않았어요. 학교 가는 대신 엄마 아빠를 거들어 농사짓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책 읽고 토론하고 그림 그리고 도자기 빚고 가야금 연습하면서 10대 후반을 보냈죠.”(김씨)
이런 홈스쿨링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모색해갔다고 한다. 부부는 아침 바닷가에서 새벽이에게 하듯 새터와 새날이에게도 격려하고 용기를 줬을 뿐이다. 둘째 새터는 올해 건축학과에 들어갔다. 부부는 자신의 아이들이 나중 반드시 비범한 인물이 될 것임을 확신하는 듯했다. 학교를 다니지 않았어도, 가난해도, 남과 경쟁하지 않아도, 훌륭하게 행복을 가꾸는 모델을 아버지가 확실하게 보여줬기 때문이고,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부모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새터 이야기를 할 때는 아버지의 입이 함박만해졌다.
“새터는 나무꾼이었시유. 하루는 나무하러 가서 하도 안 돌아와 걱정을 하고 있는데 이놈이 돌아와 늦은 이유를 이렇게 말해유. 들어보실래유? 산에 가서 하늘을 보고 누웠는데 햇볕이 너무 따뜻하고 등 뒤로 나뭇잎이 너무 푹신하고 곁에 마음이가 앉아 있으니 너무 평화롭더래유. 동아공고 1학년을 막 자퇴했을 때였는데 이만하면 됐다 싶데유. 그렇게 행복해할 줄 알면 됐지 다른 게 뭐가 중요하겠시유?”(장씨)
아이들은 산에서 철따라 고사리 취나물 으름 칡뿌리 머루 다래를, 바다에선 굴 낙지 전복 게를 채취하면서 자랐다. 모두 일부러 키우지 않아도 절로 자라는 것들이다. 요즘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있다니 듣기만 해도 흐뭇하다. 사실 그렇게 키운 부모들이 있다니 더욱 놀랍다.
이 부부가 새터를 서울로 보낸 이야기는 거의 비현실적일 정도다. 30년 전만 해도 아이가 서울로 진학하면 친척집에 보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남에게 신세지지 않는 것을, 내 것과 네 것 사이에 선명하게 벽을 쌓는 것을 세련된 태도로 장려해온 감이 있다. 정이 오고가는 것을 불편해하고 ‘쿨하게’ 사는 것이 도시적 삶의 가치가 된 것 같다.
“새터가 대학에 입학은 했는데 우리가 서울에 방을 얻을 방도가 없었어요. 기숙사비 정도는 감당하겠는데 우리가 사는 서산이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아이가 기숙사 배정을 받지 못했어요. 확실히 사람은 어려우면 궁리가 솟아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작년에 우리 집을 다녀가신 어떤 어른이 떠올라요. 당진 사는 한 친구의 외삼촌으로 86세 되신 어른이신데 아주 정정하고 여유가 있으셨죠.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친구가 그분을 모시고 왔었답니다.”(김씨)
‘흙을 고마워해야’
그분은 젊은 부부가 아름답게 사는 방식에 감동했고 나처럼 이집의 음식들에도 혹하셨던 모양이다. 명함을 하나 주면서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먼저 친구에게 연락해서 운을 떼었죠. 그랬더니 직접 전화해보라고 하대요. 그분은 젊어서 사방을 책으로 가득 채워놓고 다 읽을 때까진 책감옥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특히 맘에 들었어요. 그 댁에 거주하게 된다면 우리 새터가 얼마나 배울 게 많겠어요? 떨면서 전화를 했죠.”(김씨)
그런데 그 어른은 “젊은 놈이 오면 내가 더 좋지!”라며 흔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수호천사가, 친구의 외삼촌의 형상으로 숨어 있다가 이들이 필요할 순간에 때맞춰 등장한 것이다. 아니면 이 부부가 문을 두드려서 그분을 수호천사로 만들어낸 것일까.
그렇다고 이 부부가 남에게 기대기만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들 또한 수시로 남에게 수호천사가 된다. 돈 없이도 건넬 수 있는 도움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나는 도적골에 와서 새로운 진리를 하나 깨달았다. 수호천사를 가진 자만이 스스로 수호천사가 될 수 있다! 품앗이가 아니라 확장이다. 그것은 밥 한 그릇으로도 가능하고 눈길 한 번,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서산의 도덕골은 그런 사랑의 진앙지다. 여기서 퍼져나간 사랑의 기운이 세상을 조금씩 따뜻하게 만들 것을 새날이 새터 새벽이 부모가 그 아이들을 믿듯 나 또한 믿는다.
도적골은 지난해 서산시 교육청 관할의 교육농장으로 지정돼 초등학교 학생들이 특별수업을 받으러 찾아온다. 도적골을 수식하는 문구는 ‘흙과 예술이 살아 있는’이다. 아이들은 여기 와서 흙을 만지고 도자기를 빚는다. 도적골 주인 부부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흙의 가치와 소중함이다.
“우리가 흙에서 왔고 흙에서 난 것을 먹고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교육의 핵심 아닌감유. 생명을 준 흙을 고마워할 줄 알아야쥬.”(장씨)
장경희씨는 아이들에게 흙의 가치를 가르칠 그림판을 미리 나무판에 제작해놓았다. 작업실 겸 교육장 앞에는 알림판도 붙여뒀다. 쓰레기 썩는 데 걸리는 시간을 기록한 것이다.
‘유리병 1000년 이상, 알루미늄캔 500년 이상, 일회용기저귀 100년 이상, 플라스틱용기 50~80년, 종이컵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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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이 귀한 땅을 뒤덮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려서 가르치면 바닷가의 새벽이처럼 플라스틱 칼을 보고도 재활용할 궁리를 먼저 하는 아이로 자라게 될 것이다.
돌아오는 서산발 서울행 버스 좌석 등받이엔 ‘신 벗지 말구유, 발 대지 말어유’란 경고문구가 붙어 있다. 도적골 주인 말투가 생각나서 혼자 하하 웃었더니 운전기사가 ‘재밌쥬?’하고 돌아본다. 여전히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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