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전북 익산

醉月 2012. 4. 28. 09:41

전북 익산의 왕궁리 석탑 주변에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봄비에 꽃잎이 다 떨어진 뒤에도 꽃 진 자리에서 돋는 새잎이 연초록의 신록으로 물든다. 1400여 년 전 백제의 옛 왕궁터에 사찰이 들어서면서 세워진 왕궁리 석탑은 투박한 듯 우아한 맛이 자태가 고즈넉한 주변의 풍광과 어우러진다.

무릇 이름난 여행지들은 선명한 대표 이미지를 하나쯤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남 보성은 녹차밭, 담양은 대나무, 경북 울진은 대게, 안동은 병산서원이나 하회마을을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여행자들은 대개 그런 대표 이미지를 중심으로 여정을 꾸리게 됩니다. 지역을 하나의 식당으로, 여행목적지를 음식으로 비유해본다면 이들 지역이야말로 ‘매혹적인 단품메뉴’를 보유하고 있는 맛깔난 식당인 셈입니다.

따지고 보자면 전북 익산에는 그런 단품메뉴가 없습니다. 첫눈에 여행자들의 시선을 딱 휘어잡을, 속된 말로 하자면 ‘한 방’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망할 것이 없는 것이 익산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명소들이 산재합니다. 화르르 꽃잎을 떨구고 있는 벚나무를 두른 백제 때의 석탑이 있고, 한때 한강이남에서 가장 컸다는 대숲도 있고, 그윽한 편백나무 숲도 있고, 꽃잔디 화려한 그윽한 찻집과 금강의 유장한 물줄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익산으로의 여정을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뷔페메뉴’라는 게 적당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익산에는 도처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사가들이 그럴싸하게 꾸며내거나 덧댄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을 관통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고대국가 백제의 유적인 미륵사지와 왕궁리석탑에는 물론이거니와 옛 선비가 부모를 위해 세운 제각인 영모정에도, 난데없는 판소리 공연장을 들여놓은 절집 심곡사에도 이야기들이 펄펄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나바위성당과 두동교회, 함라의 돌담마을에도 마치 대하소설과도 같은 유장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부드러운 구릉을 따라 봄의 정취와 풍경을 찾아가도 좋겠고, 짙은 향기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가도 좋겠습니다. 딱 한 곳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여정도 좋지만, 그윽한 정취를 완상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따라 여유 있게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이 제격이지 싶습니다. 요즘처럼 한껏 무르익은 봄날에는 말입니다.

익산 왕궁면의 늘푸른수목원. 수목원이라고는 하지만 개인 농원인 이곳에는 봄이면 너른 구릉을 따라 꽃잔디가 화사하게 피어난다. 수목원 입구에는 운치 있는 한옥에서 꽃을 내다보며 그윽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원이 있다. 봄날의 정취와 함께 차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시간의 깊이가 만들어낸 오층석탑의 아름다움을 보다

지난 주말의 비바람으로 화사했던 벚꽃잎이 꽃비가 돼서 다 날려가 버렸다 해도, 꽃 진 뒤의 연초록 신록이야 거기 아직 남아서 반짝이고 있겠다. 전북 익산의 왕궁리 오층 석탑. 탑 주위를 호위하듯 늘어선 아름드리 벚나무 꽃잎이 분분히 날리던 날이었다. 따스한 봄볕 속에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의 웃음소리가 1400여년의 시간을 건너온 옛 백제의 궁터 주위를 까르르 굴러다녔다.

옛 백제의 궁터 자리에 우람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 누군들 그 앞에서 ‘거 참 잘 생겼다’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균형과 비례. 당당하면서도 날렵하고,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풍모의 오층탑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의 근원은 ‘묵직함’이리라. 이런 아름다움의 무게라는 게 어디 형상만으로 빚어낼 수 있는 것일까. 미륵산의 자락이 흘러내린 자리에 서 있는 오층탑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의 팔할쯤은 아마도 건너온 시간의 깊이가 만들어내는 것이리라.

아직도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석탑 주변의 궁터는 잘 정비돼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게나 방치해두었던 주변이 말끔히 정돈됐다. 그렇다고 정비를 한답시며 주변을 죄다 밀어버린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솔숲을 남겨둔 채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다듬었다. 석탑 주변에는 왕궁의 건물이 들어섰던 자리마다 흙으로 돋워놓고 무엇이 들어섰던 자리인지를 설명하는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덕분에 봄볕 속에서 벚꽃잎 분분히 날리는 석탑 주변을 거닐면서 고대국가의 왕궁, 혹은 그 뒤에 지어졌다는 절집을 마음속으로 지어볼 수 있다.

왕궁 유적 입구 쪽에는 부근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유적전시관도 세워져 있다. 여기서는 꽃비 날리는 벚나무 사이에 앉아서 그저 고요하게 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반나절쯤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지 싶었다. 이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석탑이 또 하나 있었다. 경북 영양에서 만났던 봉감모전 오층석탑이 꼭 그랬다.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과 어우러져 서 있는 영양의 탑이 감나무에 감이 붉게 익은 가을에 찾아가는 게 제격이라면, 여기 왕궁리의 오층석탑은 벚꽃이 화사하게 피었을 때나 그 꽃잎이 분분히 날리는 봄에 찾아가는 게 마땅하다 싶었다.

금강을 끼고 있는 익산의 성당포구 부근의 습지에 버드나무들이 신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미륵사지에서 무너진 고대의 시간과 만나다

사실 익산에서 알려진 명소를 꼽자면 미륵사지 석탑을 가장 앞줄에 두는 게 순서겠다. 백제의 유적지라면 부여와 공주를 꼽는 게 보통이지만, 익산에도 옛 고대국가 백제의 흔적들이 적지 않다. 익산에 남아있는 백제 유적은 거의 전부가 무왕 때의 것이다. 왕궁리 석탑이 들어선 궁터의 흔적도 무왕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 무왕이 누구인가. 신라로 들어가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세기의 로맨스를 벌였던 서동. 그가 바로 무왕이다.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세운 절로 알려졌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는다면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난 2009년 해체 중이던 미륵사지석탑 안에서 전혀 다른 이름이 나온다. 뜻밖에도 ‘좌평벼슬의 딸인 왕후가 절집을 창건했다’는 요지의 글귀가 발견된 것이다. 학계와 지역주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초월한 매혹적인 로맨스와 미륵사지 석탑과의 연결고리를 과연 폐기해야 할 것인가. 혼돈은 일부 학자에 의해 이렇게 수습된다. 3개의 구획으로 이뤄진 미륵사지는 시차를 두고 지어졌으며 그 중 하나를 좌평의 딸이 지었다면 다른 둘 중 하나가 선화공주에 의해서 지어졌을 것이란 얘기다.

미륵사지에는 옛 모습의 탑은 없다. 애초에 동서쪽에 2개의 9층 석탑이 서 있었고, 그 가운데 우람한 목탑이 서 있었다지만 나무로 지은 탑은 1000년이 넘는 시간을 견뎠을 리 없으니 흔적조차 없다. 동탑도 ‘복원’이란 명분으로 다시 세웠지만 옛 부재를 쓰지 않고 새로 지어 반들반들한 모조품을 방불케 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서탑 하나뿐인데 거의 무너져 6층까지만 남았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땜질하듯 시멘트로 발라놓았다가 지난 2000년에 붕괴위기에 처하자 대대적인 해체 보수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서탑은 가림막 안에서 해체상태다. 새로 지은 동탑을 학계에서는 ‘최악의 문화재 복원’사례로 꼽고 있지만, 그렇더래도 동탑은 관광객들에게 미륵사지석탑의 옛 풍모를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만큼은 하고 있다.

서탑은 해체돼 탑을 이뤘던 돌들이 번호가 매겨져 빈터에 가지런히 놓여있을 뿐이고 동탑은 반들만들 모조품처럼 서 있지만, 미륵사지는 익산을 찾았다면 꼭 들러야 할 곳이다. 미륵산을 뒤로 두고 그 너른 공간에서 9층의 높이로 우뚝 솟았을 고대국가의 3기의 석탑과 절집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해진다. 미륵사지에 가야 할 이유를 하나 더 붙이자면 미륵사지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일찌감치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지자체들은 웬만한 유적지는 죄다 돈을 받고 들여보내지만, 익산은 그렇지 않다. 미륵사지와 왕궁리석탑을 비롯해 곳곳에 들어선 박물관도 모두 무료다. 그렇다고 정비나 시설이 소홀한 것도 아니다. 익산에서 돈을 내고 들어가는 관광지는 딱 한군데 ‘보석박물관’이 유일하다.

익산 심곡사에는 해우소가 화사한 벚꽃을 두른 채 절집의 복판에 있다. ‘가장 낭만적인 화장실’이라 할만하다.


# 익산에서 건져 올린 감동의 이야기들

익산에 잠긴 이야기들을 따라가자면 숨이 다 가쁘다. 이야기의 향기도 짙고 흥미도 진진하다. 먼저 찾아갈 곳은 낭산면의 절집 심곡사다. 심곡(深谷)이니 깊은 계곡을 뜻하는 것일 터인데, 굽이굽이 벚꽃만발한 산골로 들긴 하지만 그 이름에 값할 만큼 깊은 자리는 아니다. 심곡사의 절집의 복판에는 제법 큰 원형의 공연장이 들어서 있다. 이름 하여 ‘떡목 공연장’이다. 절집 안에 큼지막한 공연장이 들어선 것도 난데 없지만, ‘떡목’이란 이름이 또 생소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공연장은 근세 5명창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정정렬 명창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 말년에 명창으로 우뚝 섰지만 사실 그는 음색도 탁하고 성량도 부족했다. 오죽했으며 ‘떡이 목에 걸린 것 같은 거친 소리’라 해서 ‘떡목’이라고 불려졌을까. 그러나 그는 평생 심곡사 등의 절집을 떠돌면서 홀로 소리 수련을 했다. 성음이 부족한 부분은 장단의 부침을 변화무쌍하게 하는 것으로 극복해냈고, 본래의 장단을 길게 늘이거나 앞당겨 부치는 것으로 약점을 가렸다. 위암으로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에도 홀로 절집을 찾아 피를 토할 정도의 극단의 수련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방법이었다. 결국 그는 전에도 없었고 남들과도 다른 독자적인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정렬제 춘향가’를 남겼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혹독한 수련으로 마침내 당대의 명창들로부터 ‘정정렬이 나고 ‘춘향가’가 다시 났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승승장구하면서 업적을 이룬 이들도 위대하지만, 이런 삶이 보여주는 감동의 농도는 더 깊고도 짙다. 그건 아마도 그가 겪었을 번민과 실의, 그리고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넣었던 고통이 느껴져서 일 터이다.

심곡사를 찾은 날에 마침 소리공연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공연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공연장이 내다보이는 무인 찻집에서 향긋한 차 한잔을 앞에 두는 것도 운치 있다. 무인 찻집 안에는 창밖으로 절집의 봄풍경이 내다보이는 자리마다 커피포트와 다기세트가 놓여있어 누구든 마음 편히 차를 골라 한잔할 수 있다.

또 한편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번에는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송영구가 세상을 뜬 아버지를 위해 지은 누각 ‘망모당(望慕堂)’이다. 망모당에서 보아야 할 것은 ‘효(孝)’보다 누각에 걸린 현판이다. 망모당의 글씨는 중국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의 솜씨다. 어찌 당대의 최고 문장가였다는 주지번의 글귀가 여기에 걸려있을까. 연유를 따라가면 한편의 소설 같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주지번이 과거에 번번이 낙방해 실의에 빠졌을 때 때마침 중국에 사신으로 온 송영구를 만났다. 송영구는 한 번의 만남에서 주지번의 글솜씨를 알아보고 그를 격려하고 공부를 할 돈을 쥐여줬다.

그때의 만남을 기억한 주지번은 명나라의 사신으로 한양에 왔다가 공식일정을 마친 뒤 송영구를 만나러 익산으로 향한다. 그러나 주지번은 함경도로 좌천된 송영구를 만나지 못하고 대신 그는 온 정성을 다해 망모당의 현판을 써주고 돌아서게 된다. 400년 전에 이뤄진 두 사람의 만남과 인연이 그 현판에 깃들어있다.

# 곳곳의 명소에서 딸려 올라오는 이야기들

익산의 곳곳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되 매혹적인 여행지들이 즐비하다. 왕궁리의 늘푸른수목원 내의 왕궁다원은 화려한 꽃잔디로 뒤덮인 구릉을 끼고 앉은 정갈한 한옥이다. 늘푸른 수목원은 수목원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운영하는 조경농장에 가깝다. 봄이면 끝간데 없이 형형색색의 꽃잔디가 피어나 아찔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곳이다. 왕궁다원은 그 수목원의 입구 쪽에 정갈한 한옥으로 지어져 있다. 한옥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지만 운치가 그득하다.

함라면 함열리의 함라마을도 돌담의 운치가 넘치는 곳이다. 토석담과 토담을 비롯해 전돌을 사용해 동물과 식물을 새긴 화초담까지 그윽한 정취의 담장을 두르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대에 엄청난 부를 축적한 지주였던 김안균, 조해영,이배원 가옥이 있다. 이중 백두산 소나무로 지었다는 김안균 가옥은 규모가 어찌나 크고 한옥의 자태가 우람한지 개인의 집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다. 붉은 벽돌담장의 한쪽 길이만 340m가 넘을 정도다. 한 때는 대문이 12개나 됐지만 지금은 본채와 사랑채만 남아있는 조해영 가옥도 그 규모가 못지않다.

함라마을에는 또 관아가 있던 자리가 남아있는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과거시험 부정에 연루돼 유배됐던 곳으로 알려져있다. 허균은 자진해서 유배지를 함라마을로 택했는데 그 이유는 너른 들과 인근 바다에서 나는 먹거리가 풍성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서 허균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평론인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써냈다. 도문대작이란 고기 먹을 형편이 못 돼 ‘도살장의 문이나 바라보며 질겅질겅 씹는다’는 뜻이다.

여기다가 한때 국내 최대의 대나무 군락지였다는 금마면 신용리의 구룡마을 대나무숲도 빼놓으면 아쉽다. 여기서 재배되는 대나무로 만든 죽제품은 강경 5일장을 통해 충청도, 경기도 지방까지 공급됐다. 그러나 ‘생금밭’이라 불리던 대숲은 2005년 냉해를 입어 거의 고사됐으나 마을주민들과 시민단체가 나서 대숲을 복원해내고 있다. 성당면의 두동마을에는 면적도 그리 넓지 않고 나무도 굵지 않지만 알싸한 나무향을 맡을 수 있는 편백숲 산책로도 있다.

# 익산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익산나들목으로 나오면 바로 익산시 왕궁면이다. 시간 여유를 두고 익산을 다 돌아볼 요량이라면 관계없지만, 짧은 시간에 익산을 보겠다면 주제를 정해놓고 동선을 짜는 게 좋겠다. 백제시대의 유적을 찾아간다면 무왕의 왕릉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에서 시작해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연동리석불좌상 등을 돌아보는 코스를 택하는 게 좋겠고, 성지순례를 주제로 정한다면 여산 숲정이성지에서 나바위성당, 두동교회, 숭림사, 원불교총부 등의 순서로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익산시 인화동 일대는 본격 유흥가는 아니지만 모텔들이 모여 불야성을 이루는 곳. 가족 여행이라면 모텔보다는 익산비즈니스관광호텔(063-853-7171)을 추천한다. 숙소 상태는 평범하지만 비품을 잘 갖춰놓았고 다소 빈약하긴 하지만 뷔페식 조식도 제공된다. 신동의 익산유스호스텔(063-850-2000)도 괜찮은 편이다. 왕궁면 온수리의 왕궁온천모텔(063-291-5000)도 나쁘지 않다.

익산의 향토음식이라면 ‘황등식 비빔밥’이 꼽힌다. 황등식 비빔밥은 콩나물과 시금치 등을 넣고 살짝 비빈 밥 위에 육회와 달걀지단을 얹어낸다. 한일식당(063-856-3158)과 50년 전통을 앞세우는 진미식당(063-856-4422) 등이 손꼽힌다. 황등식 비빔밥을 내는 식당은 대부분 갈비전골과 육회 등의 메뉴도 갖추고 있다. 익산의 특산물인 마를 넣어 지은 밥인 약밥에다 마를 활용한 한정식 요리를 코스로 내놓는 본향(063-858-1588)도 독특하다. 칼칼한 맛의 콩나물국밥을 내놓는 별미집(063-843-2131)은 지역주민이 알아주는 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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