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전북 부안 송년여행

醉月 2016. 12. 14. 22:47

오후 나절 썰물의 바다가 밀려가면서 전북 부안 변산해수욕장의 드넓은 백사장에 규칙적인 무늬의 황금빛 이랑을 만들어냈다. 부안의 바다에서 저무는 시간이 매일 만들어내는 경관이다.


전북 부안의 바다는 차가운 겨울이면 거칠게 으르렁거리며 끓어 넘칩니다. 같은 서해라도 부안의 겨울 바다는 더 비장하고 뜨겁습니다. 겨울을 여행하는 이들이 유독 부안의 바다로 몰려드는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일 겁니다. 태안이나 안면도, 혹은 대천의 겨울 바다가 달짝지근한 서정과 낭만, 혹은 고즈넉함으로 치장됐다면, 부안의 바다는 격정과 뜨거움, 혹은 쓸쓸함이나 상실을 환기합니다. 마음 한쪽을 썩 베어낼 것 같은 비장함이, 겨울 부안의 거친 바람과 높은 파도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이제 한 해도 고작 보름 남짓. 며칠 남지 않은 한 해를 떠나보내는 곳으로 부안을 권합니다. 지난 한 해,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지요. 저마다의 사정으로 한 해를 건너온 이야기들은 더 헤아릴 수 없을 테지요. 변산 해변에 당도한 건 마침 썰물 때였습니다. 해변을 훑는 파도가 백사장에 잔무늬를 그려 넣으며 멀리 밀려가고 있었습니다. 파도가 그려 내는 물결의 자취가 저물어가는 황금빛 노을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면서 한 해 동안 걸어온 발자국을 되돌아봅니다.

채석강의 해안을 맹렬하게 물어뜯는 거친 파도 앞에서, 검은 갯벌 위로 지는 낙조가 그려 낸 환상적인 색감 앞에서 저무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저무는 것들보다 더 아름다웠던 건 저무는 풍경 앞에 선 사람들이었습니다. 내변산의 낙조대 아래 산중 암자에서 속계에서 오히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거사의 이야기와 ‘범부(凡夫)’로 자신을 낮춘 고승의 이야기가 그랬고, 곰소항의 방파제에서 아이를 안고 낙조를 오래도록 감상하고 있던 젊은 부부의 모습도 그랬습니다.

파도 뒤로 파도가 또 밀려오면서 전북 부안의 바다가 은박지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변산반도의 해안을 따라 이어진 30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햇볕이 만들어낸 이런 바다의 풍경을 수시로 만날 수 있다.



# 끓어 넘치는 채석강의 겨울 바다

중국 당나라 때 시선 이태백이 강물에 비친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빠져 숨졌다는 중국의 채석강. 전북 부안의 채석강의 지명 유래를 말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얘기지만, 겨울 부안의 바다를 가봤다면 결코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 부안 채석강의 겨울 바다는 뱃놀이나 달 그림자 뜨는 강의 서정적인 풍경과는 정반대 쪽에 있다.

부안의 겨울 바다가 보여주는 건 ‘이태백’이나 ‘뱃놀이’가 아니라 끓어 넘치는 야성의 바다다. 채석강의 풍경은 서사적이다. 정밀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서사’의 대상은 채석강의 붉은색 암반과 해식동굴도,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를 불러 모으는 부안의 바다도 아니다. 바위를 등지고 바람과 파도 앞에 선 사람들. 그들이 저마다 지나온 시간이 겨울 바다의 서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건너온 시간이 다른 만큼 채석강의 바다가 보여주는 서사도 그 앞에 선 이들마다 다르다. 누구는 그 바다에서 자신의 상처를 보고, 다른 이들은 그 바다에서 지나온 격랑의 시간과 맞닥뜨린다.

겨울 채석강의 바람은 매웠고 파도는 뜨거웠다. 썰물의 파도가 검은 갯바위를 집어삼킬 듯 밀려왔다. 바다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두방망이질했다. 소용돌이치는 거친 바다를 향해 갯바위 끝에 선 젊은이 몇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이런 거친 풍경 앞에서 다친 상처를 꺼내 보는 모양이었다. 칼날 같은 바닷바람과 높은 파도가 젊은이들의 고함을 다 받아줬다. 따스하지도 푸근하지도 않지만 부안의 비장미 넘치는 바다가, 채석강의 거친 바람과 높은 파도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방식이 이렇다. 채석강은, 아니 부안의 모든 겨울 바다야말로 결핍과 상처에 대한 위안이다. 다른 바다가 가지지 못한 것들. 그래서 부안의 겨울 바다는 특별하다. 권하건대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은 날을 택해서 하늘에 낮은 구름이 드리우고 바다 위로 눈발이 날리는 날이라면 더 좋겠다.

# 저무는 해가 보여주는 풍경들

전북 부안의 바다는 30번 국도가 안내한다. 국도가 흘러가는 방향을 나침반으로 삼고, 국도에서 분기하는 잔가지처럼 펼쳐진 변산반도의 해안도로를 이어붙여 달린다면 부안의 바다가 품고 있는 진면목을 남김없이 볼 수 있다. 30번 국도의 북쪽은 부안읍이고 남쪽이 곰소항. 어디서 출발해도 좋다. 다만 기억해둘 게 있다면 오전보다는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오후 시간대에 이 길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해가 기울기 시작해야 이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눈부시게 반짝이기 때문이다.

오후에 곰소항에서 모항의 바다로 이어지는 길 위에는 검은 갯벌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번들거리는 풍경이 있다. 다시 모항에서 나와 솔섬을 지나 궁항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거친 파도 위로 다시 파도가 올라타서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첩첩한 물 이랑을 앞에 두고 있는 바닷가 마을의 풍경이 있다. 이어 변산반도의 서쪽 끝 격포와 채석강, 그리고 적벽강에 당도하면 거기서 저무는 해를 향해 정면으로 서서 반짝이는 바다를 만날 수 있다. 바다는 볕의 기울기에 따라 은박지처럼 반짝이다가 이윽고 황금빛으로, 그리고 선혈 같은 붉은빛으로 시시각각 색을 바꾼다.

해거름의 부안 해안의 경관이야 다 황홀하지만, 변산해수욕장의 경관만큼은 따로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썰물 때면 드러나는 해변의 드넓은 백사장을 걷는 맛도 좋지만, 그보다 해변 북쪽의 노을 공원에서 오후 썰물 때 백사장을 내려다보는 경관이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답다. 물러 나가는 얕은 바다가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모습은 ‘장관’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게다가 바다가 빠져나가면서 광활한 백사장에 그려 넣는 촘촘한 물결무늬와 그 이랑마다 황금빛 노을이 반사돼 반짝이는 모습이라니….

부안에서 낙조 풍경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은 전북 학생해양수련원 앞에 솔섬이 첫손에 꼽히지만, 그곳 말고도 낙조의 명소는 부안의 도처에 있다. 갯벌 끝에 어선이 묶여 있는 곰소의 포구에서도, 바위 틈으로 숨 막힐 듯 붉은 노을을 볼 수 있는 적벽강에서도, 30번 국도 아래 꼭꼭 숨어 있는 관선 마을 앞 갯벌 너머로도 가슴 뭉클할 만큼 뜨거운 해가 진다.

# 월명암에서 꺼내 든 마음 한 조각

낙조(落照)란 ‘저녁에 지는 햇빛, 혹은 지는 해 주위로 퍼지는 붉은빛’을 말한다. 부안에서는 이런 풍경이 꼭 바다에만 있지 않다. 새삼스럽지만 부안의 변산이란 이름 그대로 ‘산(山)’이다. 변산의 산 중에 기막힌 일몰의 경관을 볼 수 있는 자리가 있다. 이름부터가 ‘낙조대(落照臺)’다. 뒤로 물러나 고도를 높여서 해안선과 마을, 그리고 점점이 떠 있는 섬 너머로 붉게 물든 해가 떨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부안을 찾은 이들은 대부분 변산반도를 돌며 바다만 보고 돌아가지만, 사실 부안의 절반이 내변산의 산이고, 외변산의 바다가 나머지 절반이다. 바다는 부안이 품은 경관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산의 경관을 보려면 하서에서 변산을 잇는 736번 지방도로에 올라봐야 한다. 내변산의 바위 속살 속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내변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준다.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은 해발 506m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높이임에도 장쾌한 암봉을 드러낸 산봉우리들이 첩첩이 숲을 이루면서 압도적인 경관을 만들어낸다.

낙조대는 변산의 쌍선봉 아래, 그러니까 산중 암자인 월명암 뒤쪽에 비밀처럼 숨어 있다. 낙조대를 가려면 우선 월명암까지 가야 하니 월명암 얘기부터. 736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남여치 통제소가 월명암으로 가는 출발지점이다. 여기서 ‘갈 지(之)’로 경사를 누인 산길을 따라 1시간여 오르면 월명암에 닿는다.

월명암이 들어선 자리는 그야말로 무릎을 칠 정도로 명당이다. 암자는 겨울에도 초록의 기운으로 환하다. 볕이 잘 드는 암자 주위에는 초록의 풀들이 아직 성하고 청량한 대숲도 울울하다. 무채색의 겨울 숲 터널이 이어지다가 일순 마주하게 되는 초록빛이라 더 감격하게 된다. 절집 마당의 느티나무 거목 앞에 서면 변산 일대의 거의 모든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명당 딱 한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월명암 자리를 찍을 수밖에 없겠다.

호남의 삼대 영지(靈地)로 꼽히는 월명암에는 절집의 내력에 얽힌 1300년 전 신라 때의 부설거사 이야기가 전한다. 스무 살에 출가해 수도에 전념하던 부설은 동료 두 스님과 함께 큰 공부를 위해 오대산으로 가던 중 김제에서 우연히 묵은 집주인 딸의 거듭된 간청에 혼인을 하게 됐다. 혼인으로 파계한 부설은 스님이 아닌 거사의 신분으로 암자에서 수도에 정진해 두 스님에 앞서 부인, 아들딸과 함께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지고한 가치가 말미암은 건 계율이나 외양이 아닌 마음이라는 가르침. 겨울이 깊어가는 산중에서 제 마음을 들여다보며 한 해를 보내는 후회의 마음을 위안으로 다스린다.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했다면 좋았을 일들 사이에서 길을 잃어도 종래의 뜻은 다 ‘마음’에 있는 것이니….

부안의 내변산 쌍선봉 아래 암자 월명암의 전경. 월명암 뒤쪽의 능선 위에는 부안에서 가장 거대한 일몰 풍경을 볼 수 있는 낙조대가 있다.

# 고요한 걸음으로 다녀야 하는 낙조대

월명암이란 암자의 이름은 ‘밝은(明) 달(月)’을 뜻함일 텐데 그게 진짜 달이 밝아서 붙인 직설의 이름일까, 아니면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는 은유의 뜻일까. 암자의 달빛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되 암자 뒤편 낙조대의 황홀한 해넘이 풍경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암자의 뒤편 능선에는 서해로 지는 낙조의 거대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낙조대가 있다. 암자의 부설선원 뒤쪽의 오솔길을 따라 10분쯤 오르막길을 걸으면 이내 능선인데, 그 길의 끝에 난간을 세워둔 곳이 바로 낙조대다.

낙조대에 서면 변산의 산줄기가 흘러내린 마을과 그 너머로 고사포와 하섬, 적벽강 일대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뒤로 물러서 고도를 높여 서해 일몰의 거대한 경관을 마주하고 설 수 있는 자리다. 경관이 평면적인 느낌이라는 게 아쉽긴 하지만, 풍경의 장관이 그 아쉬움을 대체한다.

본래 낙조대는 정규 탐방로가 아니다. 국립공원관리사무소가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이른바 ‘비지정탐방로’다. 그럼에도 여기를 소개하는 건 낙조대 출입 통제가 환경 훼손의 우려가 있거나 산길이 위험해서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다. 월명암에서 낙조대까지는 거리도 짧고, 길도 순하다. 닫아 둘 명분이 없어서인지 출입 통제를 알리는 표지판도 안내도 없다. 미뤄 짐작하건대 아마도 수행하는 절집을 소란스럽게 하는 등산객들을 막기 위해 스님들이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 낙조대를 탐방로에서 빼줄 것을 요청한 듯하다. 그러니 우르르 절집을 관통해 산길로 떠들썩하게 몰려가지 않고 수행 공간의 침묵 속으로 조용히 드나드는 것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다들 조용히 다녀온다면 낙조대에 이르는 길은 자연스럽게 열리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단단하게 잠겨버리고 말 것이니 명심할 일이다.

# 내소사에서 끝과 시작의 마음을 보다

▲ 부안의 곰소항에는 해풍에 말라가는 생선과 곰삭은 젓갈 냄새, 그리고 상인들의 뜨거운 삶이 비벼져 있다.
부안에서 가장 이름난 곳이라면 단연 내소사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더라도 내소사의 이름만큼은 익숙할 정도다. 겨울철이면 피톤치드 향이 더 알싸해지는 전나무 숲길을 지나서 당도하는 내소사는 단청이 지워져 말갛게 세수한 듯한 느낌의 대웅보전이 유독 마음을 끌어당긴다. 대웅전 문짝에 새긴 꽃살도 나무 문양으로만 남았다. 한때 화려했던 단청의 색이 모두 지워져 희미해진 자리에서 느껴지는 건 ‘품격’ 같은 것이다. 내소사에 발을 들이면 은연중에 옷깃을 여미게 되고 경건해지는 건 절집에서 느껴지는 이런 품격 때문이다.

내소사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건 비단 단청이 지워진 건물뿐만 아니라 절집을 관통하는 어떤 정신과도 같은 것이다. 전나무 숲을 걸어 절집으로 들기 전에 왼쪽으로 내소사 부도전이 있다. 고승들의 부도를 모아놓은 곳인데, 여러 기의 부도 중에서 눈길을 끈 것이 바로 ‘해안범부지비(海眼 凡夫之碑)’다.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부도밭에 웬 범부(凡夫)의 비석이 서 있는 것일까.

이 비석은 평생을 화두참구로 일관하다 30여 년 전쯤 열반에 든 선승 해안의 것이다. 생전에 토굴에서 3년간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행했던 그의 용맹정진은 전설처럼 남아 있다. 법명을 떨쳤으되 그는 스스로를 ‘범부’로 칭했다. 열반에 들기 전 해안은 법문 중 자신의 입적을 예고했다. “나는 오늘 갈란다. 이젠 손님도 다 떠났고, 조용해서 한결 좋구나.” 그러고 해안은 제자들에게 ‘사리가 나오거든 거두지 말고, 물에 띄워 없애버리고 비석 같은 것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제자가 ‘그래도 오셨다 가신 흔적은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간청하자 굳이 비석을 세우려거든 ‘해안범부지비’라고 쓰고, 뒷면에는 ‘생사어시(生死於是) 시무생사(是無生死)’라고만 쓰라고 했다. 비석 뒷면 글의 뜻은 이렇다.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는 생사가 없다’ 고승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글귀 속에서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는 부설거사의 일화를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해안도 부설거사의 월명암에 한동안 머물렀다. 비석 뒷면의 글귀처럼 끝도 시작도 다 마음이다. 한 해의 끝에서, 다른 해로 건너가는 시작 앞에서 그 마음을 떠올린다.



부안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부안나들목에서 내려 30번 국도를 따라 새만금~변산해수욕장~채석강~부안영상테마파크~내소사~곰소항의 순으로 돌아보거나, 줄포나들목에서 내려 거꾸로 둘러봐도 좋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모항과 궁항에는 전망 좋은 리조트와 펜션이 몰려 있다. 고사포 해변과 가까운 운산리에 최근 새로 문을 연 펜션이 밀집해 있다. 내소사 입구에는 다소 낡긴 했지만 주인의 인심을 느낄 수 있는 소박한 민박집이 여럿 있다. 내소사 입구의 정든민박(063-582-7574)과 제주 출신 노부부가 하는 탐라민박(010-6622-7020) 등이 평이 좋은 편. 맛집으로는 격포 버스터미널 부근의 군산식당(063-583-3234)을 추천한다. 백합요리를 특히 잘한다. 한때 부안 최고의 맛집으로 첫손에 꼽혔던 계화회관(063-581-0333)도 백합죽과 백합구이로 유명한 곳이다. 곰소항 근처에는 게장과 젓갈 등을 내는 식당이 몰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