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전남 고흥 연흥도의 변신

醉月 2016. 11. 24. 20:15

전남 고흥의 거금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작은 섬 연홍도 선착장에 설치된 조형물. ‘섬 속의 섬’이라고 불리는 연홍도에는 10년 전에 문을 연 작은 미술관이 있다. 연홍도는 지금 ‘미술의 섬’으로 가꿔지고 있다.


‘지붕 없는 미술관.’ 전남 고흥은 스스로를 이렇게 부릅니다. 여기서 미술관이란 진짜 미술관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이 마치 예술작품을 방불케 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흥의 자그마한 섬, 연홍도가 진짜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연홍도는 그 이름에서부터 서정이 묻어납니다. 고흥에서 소록도로, 다시 거금도로 건너간 다음 5.9t짜리 작은 배를 타고 건너가는 말 그대로 ‘섬 속의 섬’인 연홍도. 손바닥만 한 그 섬이 지금 미술 작품으로 치장되고 있습니다. 쇠락과 무관심, 그리고 불편과 소외로 무너져가고 있는 남도의 작은 섬을 미술로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시도입니다. 산업폐기물처리장이었다가 문화와 예술의 섬으로 탈바꿈해 한 해 30만 명을 끌어모으는 관광지가 된 일본 시코쿠(四國)의 섬 나오시마(直島)처럼 말입니다.

일본 나오시마에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있다면, 연홍도에는 매혹적인 빛깔의 바다를 정원으로 삼은 미술관이 있습니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은 곳. 숙소나 식당은 물론이고 구멍가게도 하나 없는 인구 80여 명의 작은 섬 안에 미술관이 있는 겁니다.

연홍초등학교 폐교 건물에 들어선 연홍미술관은 이래 봬도 역사가 10년을 헤아립니다. 지금이야 거금도까지 다리가 놓여 배를 한 번만 타면 되지만, 거금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배를 타고 거금도로, 다시 연홍도로 바다를 두 번 건너야 했습니다. 이렇게 불편한 섬마을에 미술관이 들어선 내력을 뒤지고, 섬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조형물을 살피고, 섬 이쪽에서 저쪽 끝으로 이어지는 매혹적인 산책로를 걸어봤습니다. 작은 미술관을 중심 삼아 섬 전체를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키는 연홍도 프로젝트는 미완성 상태입니다. 사실 연홍도는 이번 프로젝트 이전에도 미술관의 주도로 섬을 꾸며 왔습니다. 섬마을 골목의 낮은 담장마다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고, 섬 곳곳에 강렬한 색감의 물고기 모양 이정표를 세워두기도 했습니다. 이런 바탕 위에 전남도가 ‘가고 싶은 섬’ 사업의 일환으로 연홍도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초대받은 프랑스 작가가 1주일 넘게 연홍도에 머물며 갯바위에 흉물처럼 남아있는 김 가공공장 잔해에다가 강렬한 ‘물방울무늬’를 그려놓았습니다. 선착장의 방파제에도, 미술관 앞바다 위에도 제법 근사한 조형물이 세워졌습니다. 섬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잇는 산책로에는 더 많은 미술품이 세워질 예정이랍니다.

섬 주민들은 너무 이른 연홍도 방문을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미술관의 선호남 관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술 섬 연홍도’가 완성되는 건 겨울이 가고 매화가 필 때쯤입니다. 지금의 적요한 풍경만으로도 매력이 차고 넘쳤습니다만, 섬 곳곳의 조형물과 골목에 그려놓은 벽화, 강렬한 색감의 이정표에서 앞으로 다듬어질 미술 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배를 타고 섬에서 되돌아 나오는 길. ‘연홍’이란 이름만큼 서정적으로 가꿔질 섬의 미래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었습니다.

연홍도 해안에 서면 방파제 너머로 금당도의 전경이 펼쳐진다. 완도군에 속하는 금당도는 기암괴석이 많기로 유명한데, 연홍도 쪽에서 바위 직벽의 위용이 가장 잘 보인다.



# 손바닥만 한 섬이 품은 기억

전남 고흥의 연홍도는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한’ 섬이다. 해안선을 모두 다 이어붙여도 그 길이가 4㎞에 불과하다. 섬 주민은 50가구에 80여 명.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섬이다. 숙소나 식당은 물론이고, 섬에는 구멍가게 하나 없다.

지금이야 고흥반도에서 소록도와 거금도를 넘어가는 다리가 놓여 나아졌지만, 5년 전까지만 해도 연홍도에 가려면 고흥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거금도로, 거기서 다시 거금도 신양선착장까지 가서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다. 연홍도야말로 ‘섬 속의 섬’이었던 것이다.

연홍도는 거금도 신양선착장의 코앞에 떠 있다. 선착장에서 연홍도까지의 거리는 500m 남짓. 이쪽에서 소리를 지르면 저쪽에서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리다. 헤엄쳐서 건너라 해도 못할 것 없어 보일 정도의 거리다. 섬과 섬이 가까워서 신양선착장에서 연홍도를 오가는 배는 여객선이라고 부르기에는 심히 민망할 정도로 작은 배다. 10명을 넘기지 못하는 승선 인원의 5.9t짜리 여객선이 운항하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있을까. 배를 타고 연홍도로 건너가는 시간이 10분도 채 안 됐다.

지금은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연홍도는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일대에서 알아주던 부자 섬이었다. 연홍도에서는 지주식 김 양식이 성했는데 주민들이 거둔 품질이 좋아 전량 일본으로 수출됐다. 섬에서 만난 한 노인은 ‘김을 말려놓으면 어찌나 윤기가 나던지 얼굴이 다 비칠 정도였다’고 했다. 마을 전체가 김 하나로 흥청거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것이 대량 양식장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김 하나만 보고 살던 연홍도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거덜’이 났다. 김 가공공장은 폐허가 됐고, 노인들만 남은 집들은 하루하루 낡아갔다. 여기까지가 섬 안에 연홍미술관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얘기다.

연홍미술관의 정원 앞바다에 설치된 물고기 모양의 조형물.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다에 반쯤 몸을 담갔다.

# 섬 속의 섬에 미술관이 들어오기까지

섬 안에 미술관이 들어선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다. 직업군인 예편 후 그림을 시작한 늦깎이 화가 김정만(작고) 씨가 열네 살 때 떠난 고향 연홍도로 돌아와 폐교를 임차해 그림을 그린 게 시작이었다. 김 씨는 당시 서울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와 고흥 민예총 사무국장 일을 맡아보던 화가 선호남(54) 씨에게 폐교 관리를 맡겼다. 2006년 폐교 운영을 맡은 선 씨는 낡은 학교를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미술관의 공식 명칭을 ‘섬 in 섬 연홍미술관’으로 정했다. 섬 속의 섬 미술관이란 뜻이었다.

이렇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오지의 섬에다 선 관장은 왜 미술관을 열 생각을 했을까. 당시만 해도 외도나 양떼목장 등 새로운 개념의 공간이 사람들의 관심과 발길을 모으던 때였다. 선 관장은 연홍도가 품고 있는 낭만적인 분위기에다 예술적인 영감을 보탠다면 훌륭한 명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게 ‘잘못 내린 판단’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작은 섬까지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섬 미술관에 반했다. 섬 속의 섬 미술관에서 10년째 전시회를 계속하며 미술관이 살아남은 건 순전히 선 관장의 헌신과 연홍도를 사랑한 예술가들의 힘 때문이었다.

선 관장은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마을 전체를 예술적인 분위기로 치장하고자 했다. 미감 넘치는 이정표를 만들고 골목의 담에 벽화를 그려 넣고, 시에 그림을 얹은 액자 형식의 작품을 집집이 걸었다. 폐교 운동장은 소박한 야생화 꽃밭의 미술관 정원으로 꾸몄다. 비로소 섬이 그림 같은 풍경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2012년 태풍 볼라벤이 모든 것을 쓸어가고 말았다. 바다가 넘치면서 정원은 쓸려나가고 미술관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1년여의 노력 끝에 겨우 미술관을 다시 열 수 있었지만, 선 관장은 지쳤고 의욕은 꺾였다. 섬 전체를 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곳으로 꾸미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참이었다. 그렇게 4년의 세월이 지나서 그 섬이 다시 예술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연홍도를 찾아간 건 그래서였다.

연홍마을 곳곳에 그려진 벽화. 오른쪽은 프랑스 작가가 들어와 버려진 김 공장을 단장한 모습.

# 연홍도, 예술의 섬으로 변신 중

고흥반도 끝에서 소록대교와 거금대교를 건너 신양선착장에서 여객선 연홍호를 기다렸다. 방파제에는 배를 타려는 손님보다 낚시꾼이 더 많았다. 선착장에 서면 연홍도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흥만 해도 남쪽이라 날이 따뜻했지만, 그중에서도 계절이 늦은 연홍도는 섬 전체가 아직 여름의 초록이 시들지 않았다. 우거진 초록의 숲이 섬 양쪽 끝에 있었고, 가운데 낮은 목에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신양선착장에서 연홍도를 오가는 5.9t짜리 배는 연안 어선보다 훨씬 더 작았다. 정원은 10명. 승선표는 없이 선장에게 직접 뱃삯을 치러야 하는데, 섬에 들어갈 때는 요금을 받지 않고 나올 때 왕복 요금을 받았다. 섬 주민은 1000원이고, 외지인에게는 3000원을 받았다. 배도 작고 승객 수도 적은 까닭에 선장은 태워준 승객들의 얼굴은 물론이고 몇 시에 배를 타고 들어왔는지까지 알았다.

연홍도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단번에 눈을 붙잡은 건 방파제에 세워놓은 조형물이었다. 방파제 끝에 소라껍데기 조형물 두 개를 세웠고 그 뒤로 바다를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거나, 바람개비를 돌리며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원색의 철제 구조물로 형상화해 세워두었다. 노인들만 남은 이 섬에도 저렇게 아이들이 뛰놀던 때가 있었을까.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섬 안에 굴러다니던 때도 있었을까.

선착장에서 자그마한 마을을 기웃거리며 걷다 보면 이내 반대편 바다다. 이쪽에서는 완도에 속한 섬 금당도의 우람한 석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기암괴석이 많기로 이름난 금당도는 완도 쪽에서 들어갈 때보다, 이곳 연홍도에서 보는 경관이 더 훌륭하다. 연홍미술관은 금당도가 마주 보이는 해변에 있다. 미술관 정원 앞의 바닷속에는 물고기 조형물이 설치돼있다. 옥빛 바닷속에서 은빛 스테인리스스틸 물고기가 등을 드러내고 있는 형상이다. 두 칸짜리 분교 교실을 다듬어 만든 미술관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연홍도가 다시 곳곳에 조형물이 들어서면서 미술의 섬으로 거듭나고 있는 건 전남도의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 덕이다.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은 전남도가 섬 주민들이 참여하는 개발의 성공적 모델을 만들기 위해 지난해부터 진행하고 있다. 연홍도는 지난해 ‘미술관이 있는 섬’으로 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

사업이 시작되면서 마을 곳곳이 아기자기하게 단장되고 섬 남쪽 끝에서 북쪽 끝을 잇는 ‘걷는 길’이 만들어졌으며, 섬 전체에 예술적인 분위기를 불어넣는 조형물이 들어서고 있다. 미술관은 다시 다듬어지고, 섬 전체는 정원으로 조성되고 있다. 이렇게 겨울을 보내고 나면 내년 봄 연홍도는 우리가 한 번도 가지지 못한 예술의 향기로 가득한 ‘미술의 섬’이 돼 있을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 섬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 것인가.

연홍도의 서북쪽 끝단인 ‘좀바끝’으로 가는 산책로. 소나무와 난대림이 한데 우거진 숲이다.

# ‘지붕 없는 미술관’의 진짜 미술관

전남 고흥이 자랑스럽게 자처하는 ‘지붕 없는 미술관’이란 구호는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품고 있다는 은유다. 고흥군 전체가 미술관이라고 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걸 그저 과장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고흥이 품고 있는 보석 같은 경관 때문이다. 남열리의 일출과 중산의 일몰, 팔영산과 마복산, 천등산의 조망, 봉래산의 삼나무숲, 나로도·소록도·거금도의 바다 경관……. 하나하나 꼽아보자면 끝이 없다.

지붕 없는 미술관에서 ‘미술관’이란 은유로 쓰인 것이지만, 고흥에는 연홍도 미술관 외에도 ‘진짜 미술관’이 두 곳 더 있다. 문만 열고 있는 게 아니라 제법 활발하게 전시회를 하면서 관광객은 물론이고 고흥 주민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도화면 구암리의 도화헌미술관이다.

도화헌미술관은 지난 1995년 폐교된 단장분교를 2000년에 화가 박성환(56) 씨가 천연 염색을 하는 아내 김혜경 씨와 힘을 합쳐 미술관으로 만들어낸 곳이다. 도화헌이란 이름은 도화면에서 따온 것이지만, 본래 한자인 ‘도화(道化)’를 도자기와 그림을 뜻하는 ‘도화(陶畵)’로 바꾸고 추녀 헌(軒)자를 보태 미술관 이름으로 삼았다. 본래 이곳은 수 년 동안 남도의 해안을 뒤져 찾아낸 박 씨의 작업실이었다. 폐교를 작업실로 쓰면서 동료 화가들이 찾아들었고, 이들의 제안으로 미술관을 개관하기에 이르렀다.

고흥에서도 오지로 속하는 마을의 허름한 폐교에 들어선 도화헌미술관은 의외로 도시의 번듯한 미술관보다 전시가 활발하다. 개관 이래 지금까지 200번이 넘는 전시회가 진행됐다. 여럿이 작품을 내는 회원전까지 합치면 이 미술관에 그림을 한 번이라도 걸었던 화가는 500명이 훨씬 넘는단다. 그런데 미술관 전시실의 분위기가 좀 색다르다. 마치 밴드 합주실처럼 전시장 한쪽에 기타와 건반, 드럼 등이 놓여 있다. 전시실 옆의 작업실에는 턴테이블이 딸린 낡은 오디오가 있고, LP판이 벽 하나 가득 채워져 있다. 화가들이 모이면 즉석에서 연주하거나 술판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관람객들까지 자연스럽게 끼어들곤 한단다. 미술관은 그림 감상뿐만 아니라 예술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고흥에 있는 또 하나의 미술관은 영남면 양사리에 있는 남포미술관이다. 남포미술관은 예술가가 아니라 교육자의 뜻을 이은 미술관이다. 미술관의 이름 ‘남포(南浦)’는 영남중학교 설립자인 고 곽귀동 씨의 호를 따서 지어진 것이다. 곽 씨는 고향의 후손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쾌척해 1967년 영남중의 전신인 점암중을 세웠다. 그때만 해도 양사리 일대는 첩첩산중의 오지였다. 여수에서 뱃길로 들여와 인부들이 등짐을 지고 산길을 걸어 운반한 건축자재로 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그러다 인구 감소로 소규모 학교 통폐합이 이뤄지면서 2003년 영남중이 문을 닫자, 곽 씨의 후손들이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2005년 폐교에다 남포미술관을 열었다.

팔영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남포미술관은 고즈넉한 분위기가 특히 인상적이다. 조각 작품으로 단장된 정원은 꽃밭이 가꿔져 있고, 미술관에는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교실을 다듬어 만든 전시장의 조명이나 분위기도 제법 훌륭하다. 가을날 늦은 오후에 고흥으로 향한 여정을 마무리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완주∼순천 고속도로의 동순천나들목으로 나와 17번 국도 여수·광양항 방면으로 가다 신대교차로에서 목포 방면 남해고속도로를 탄다. 남해고속도로 고흥나들목으로 나와 고흥 방면으로 우회전, 15번 국도로 갈아탄다. 고흥읍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끝까지 가면 거금대교를 건너게 되는데, 다리를 건너 금산면사무소를 지나자마자 중촌삼거리에서 배천·신양 방면으로 우회전해 2.7㎞를 가면 연홍도 가는 배가 뜨는 신양선착장이다.

선착장에서 하루 일곱 번 연홍도 가는 배가 뜬다. 오전 7시, 8시, 9시 50분, 낮 12시 30분, 오후 2시 30분, 4시 30분, 5시 30분. 배를 타면 10분이 채 안 돼서 연홍도에 도착한다.

연홍도 안에는 숙박업소도 민박집도 없다. 연홍미술관(061-844-4884)이 숙소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지금은 공사 중이어서 마땅치 않다. 고흥의 유일한 호텔인 빅토리아호텔(061-832-3711)은 발포해수욕장에 있다. 프라이빗 비치를 연상케 하는 백사장의 해변을 거느린 호텔이다. 마복산 아래 포두면 목재문화체험장(061-830-5123)은 전통한옥체험 숙소 2개 동을 숙박객들에게 내주고 있다. 취사시설 등을 갖추고 있는 4인 기준 객실이 6만 원. 연홍도로 들어가는 거금도에서는 거금도한옥민박(061-282-5327)을 추천한다. 남열리 해안도로 부근의 전망좋은창펜션(061-835-9978)은 빼어난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늦가을부터 고흥은 삼치 철이다. 갓 잡아낸 삼치를 회로 내는 식당이 나로도여객터미널 근처에 몰려있다. 순천식당(061-833-6441)이 알아주는 집이다. 녹동항에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는데, 메뉴는 다양하지만 음식 솜씨나 차림새가 고르지 않아 잘 살펴서 들어가야 한다. 녹동항에서는 장어탕을 추천한다. 아리랑산장어구이탕(061-842-7797)은 주문과 동시에 장어를 잡아 탕을 끓여내는 집이다.

남포미술관으로 향할 때 들르게 되는 영남면 금사리에는 일성식당(061-0843-7061)이 있다. 짬뽕을 내는 집인데, 맛보다 전복과 조개를 산처럼 쌓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흥으로 들고나는 길에 지나게 되는 동강면소재지에 있는 소문난갈비탕(061-833-2052)은 투박한 갈비탕을 내놓는데 고흥 사람들이 첫손으로 꼽는 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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