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 땅을 ‘중원(中原)’이라고 처음 불렀던 건 신라였습니다.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충주지역을 빼앗은 뒤 거기에 지방행정구역인 ‘중원경(中原京)’을 설치했지요. 신라가 충주에다 중원, 즉 ‘국토의 중앙이자 근원’이라는 이름을 달아준 건 충주 일대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이자, 한강의 수운(水運)이 나라 힘의 원천이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자기 땅의 중심’으로 선포하기 이전부터 한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 충주 일대는 삼국이 서로 탐내던 뜨거운 땅이었습니다. 중원을 차지하는 자가 곧 한반도의 패권을 쥐었으니 왜 안 그랬을까요. 치열한 전투 속에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바꿔가며 이 땅을 차지했습니다. 먼저 백제가 이 땅의 주인이었다가 5세기 말 고구려에 빼앗겼고 이어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이 땅을 차지했습니다. 충주는 백제 영토로 450년, 고구려로 150년, 신라의 땅으로 550년의 시간을 보냈던 것이지요. 충주 일대에 고대국가의 성곽이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성은 치열했던 격전의 공간이되 경계의 공간이었습니다. 중원을 차지한 이들은 높고 험준한 산자락에 일대의 경관이 환히 보이는 능선을 따라 성곽을 지었습니다.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탁 트인 조망이 첫 번째 조건이었겠지요. 당시는 그게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침입을 막는 조건이었겠지만, 1000년이 지나 경계와 전투의 역할을 잃어버린 지금, 성은 빼어난 조망의 명소가 됐습니다. 긴 성곽의 시야가 늘 ‘밖’을 향해 있으니 딱히 어디라 할 것도 없이 성곽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경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곽이 보여주는 경관의 매력은 단순히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성곽을 받치고 있는 밑돌의 역사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충주의 성곽을 둘러보는 여정이야말로 경관과 역사가 어우러진 여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충주산성과 장미산성, 대림산성…. 여기다가 나라 땅의 중심이었다는 중원의 흔적인 고구려비와 중앙탑을 거쳐 역대 왕들이 찾았다는 수안보 온천까지 길을 이어 붙인다면 나무랄 데 없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 푸른 산 그림자가 첩첩하다…충주산성 충북 충주의 산성 중에서 가장 훌륭한 조망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충주산성이다. 충주산성은 해발 636m의 충주 남산 정상을 거대한 구렁이처럼 휘어 감고 있다. 삼한시대에 마고 선녀가 7일 만에 축성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충주산성은 백제 개로왕 때 쌓은 성이라는 게 정설이다. 삼국이 쟁패하던 충주 땅 중심에 세워진 성곽이니만큼 충주산성과 얽힌 역사 얘기가 끝이 없다. 개로왕이 이 성을 버팀돌로 삼아 도읍을 이쪽으로 옮기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고려 말 몽골군이 성을 공략하자 하늘의 도움으로 비바람에 물러갔다는 전설도 있다. 사실 이런 내력을 들먹이지 않아도 충주산성은 그 자체로 매혹적인 조망대다. 모름지기 산성이 갖춰야 할 첫째 조건이 바로 사방이 탁 트인 조망. 그러니 충주 남산의 구분 능선을 감고 도는 1.2㎞의 성곽 전체가 하나의 전망대라 해도 좋을 정도다. 대개 복원된 성곽은 낙석과 실족의 우려 때문에 석축 안쪽으로 오솔길을 내는데, 충주산성은 성곽의 석축 위로 길을 내놓았다. 이 덕분에 성곽에서의 시야는 더할 나위 없다. 충주산성에서 최고의 경관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단연 동문 일대다. 여기에 서면 발아래로는 충주호가, 고개를 들면 금수산과 월악산, 그리고 그 너머의 소백산이 첩첩이 푸른 산 그림자로 겹쳐진다. 밤새 기온이 내려간 이튿날 아침이라면 피어오른 물안개가 골짜기마다 출렁거리는 수묵화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어디 이뿐일까. 가파른 경사면을 오르내리는 산성의 석축이 그려내는 선의 미감도 더없이 빼어나다. 동문에서 북문 쪽으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충주의 도심이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진다. 다만 한 가지. 산성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다. 충주산성은 대개 남산 등산로를 따라 찾아가는 게 보통인데, 정상을 앞두고 숨 가쁜 깔딱고개를 만나게 된다. 남산 등산을 겸하는 여정이라면 모를까, 산성만 찾아가겠다면 구태여 등산로를 택할 이유는 없다. 충주시 종민동의 고갯길 마즈막재에서 직동의 석남사 쪽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임도가 충주산성에서 가장 훌륭한 경관이 펼쳐지는 동문 바로 아래로 이어져 있다. 유순한 길을 따라 산성을 산책하듯 한 바퀴 돌고 내려온다면 두 시간쯤, 걸음을 늦추고 자주 멈춰 서서 경관을 감상하며 걷는다 해도 세 시간이면 넉넉하다. 이 정도의 노고에 충주산성이 보여주는 경관의 보상은 과분할 따름이다.
# 오누이가 쌓은 성…장미산성 충주 중앙탑면 장천리에도 백제가 지은 성이 있다. 긴장과 경계의 공간에다 어찌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장미(薔薇). 산성의 이름이 꽃 이름과 한자까지 똑같다. 장미산(340m)에 쌓은 산성이라 그럴까 싶지만 본래 산의 이름은 산자락이 길어 ‘긴 장(長)’에 ‘꼬리 미(尾)’ 자를 썼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왜 산성에는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가 보련과 장미라는 오누이가 성 쌓기 내기를 했는데, 남동생인 장미가 이기게 돼 그 이름을 땄다는 얘기다. 보련과 장미는 둘 다 장수의 기질을 타고났는데 한 집안에 장수가 둘이 있으면 하나는 희생돼야 한다는 당시 관습에 따라 성 쌓기 내기로 운명을 결정짓게 됐다. 딸 보련이 성을 쌓는 속도가 아들 장미보다 훨씬 더 빠르자 내심 아들이 이기기를 바랐던 어머니는 계책을 내서 보련에게 떡을 해주고 쉬었다가 성을 쌓으라고 권했다. 결국 어머니의 도움으로 성 쌓기는 남동생 장미가 이기고 보련은 집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후부터 보련이 성을 쌓은 산을 보련산, 장미가 성을 쌓은 산을 장미산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다. 실제로 장미산에도, 인근의 보련산에도 산성이 남아 있는데 장미산성이 팔을 걷어붙이고 싸우는 전쟁의 남성적인 성이라면, 피신처로 쓰인 보련산성은 수비와 은거의 여성적인 성이다. 이런 장황한 설화에도 불구하고 사실 장미란 이름의 내력은 다음 두 번째 설이 훨씬 더 유력하다. 다소 싱겁지만 말이다. 성을 의미하는 ‘잣’과 산을 뜻하는 ‘뫼’를 합쳐 ‘잣뫼’로 불리다가 그게 ‘장미’가 됐다는 얘기다. # 차로 단숨에 올라 성곽에 서다 장미산성은 충주에서 경기 여주에 이르는 남한강 일대의 물길은 물론이고 한강유역으로 통하는 육로까지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요지 중의 요지에 세워졌다. 우거진 숲과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들 때문에 그 경관을 온전히 감상할 수 없는 게 아쉽지만 탄금호와 남한강의 탁월한 조망은 해발 300m대의 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더욱이 감탄하게 되는 건 험준한 바위산이 아님에도 지세를 이용해 가파른 경사면에 성을 절묘하게 쌓아 놓았다는 것이다. 장미산은 부드러운데도, 그 어떤 험준한 산에 쌓은 성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난공불락의 모습이다. 삼국이 번갈아가며 중원을 점령했을 때마다 요새가 됐던 성이다. 이른 아침 성벽에서 내려다본 남한강변의 마을과 그 뒤의 산들 사이로 안개가 들러 다녔고, 탄금호의 고요한 수면 위로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장미산성은 아마도 전국의 모든 성 중에서 가장 손쉽게 가볼 수 있는 성이리라. 차로 구불구불 시멘트 도로를 달려서 단숨에 산 정상 바로 아래 성벽까지 올라갈 수 있으니 말이다. 차에서 내려 발을 딛는 곳이 산성의 석축 위다. 본래 이 길은 산성이 아니라 작은 절집 봉학사를 위해 닦아놓은 길인데 절집의 담장처럼 이어지는 산성이 복원되면서 자연스럽게 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됐다. 봉학사에서 특이했던 건 산신각이었다. 산신각에 모신 산신이 뜻밖에도 남자가 아닌 한복을 입은 여자다. 성덕 스님은 ‘남성의 기운이 워낙 강한 산이어서 산신을 여신으로 모셨다”며 성 쌓기 내기에서 누이에게 이긴 장미 얘기를 꺼냈다.
# 성의 자취와 등산로가 겹쳐지다…대림산성 충주의 살미면 향산리에는 대림산성이 있다. 대림산(489m)은 새재(조령)와 하늘재(계립령)를 거쳐 충주로 이어지는 길목에 솟은 산으로 이곳에 쌓은 것이 대림산성이다. 과거에는 영남대로로 불렸던 길, 지금의 3번 국도 중원대로를 끼고 있는 산에 세운 산성이니 얼마나 요충지였을까. 거기다가 영남대로와 나란히 흐르는 달천의 물길이 그 자체로 천연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가 됐다. 다른 산성과 달리 대림산성에서는 산성의 자취를 뚜렷하게 느낄 수 없다. 산성의 들머리로 오르자마자 만나는 서문 일대에 촘촘하게 쌓은 석축이 남아 있긴 하지만, 대부분 구간을 흙으로 쌓은 토성이기 때문이다. 대림산성을 찾아간다는 것은 곧 대림산 등산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흙으로 돋워서 세운 성곽의 자취가 산의 지느러미 같은 능선을 따라 곧 등산로가 돼버린 탓이다. 토성의 흔적은 너른 흙길에 있다. 서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차 한 대가 지날 법한 너비의 흙길이 그곳이 성이었음을 보여준다. 대림산성은 일대의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성벽 길이만 5㎞에 육박한다. 산성에서 가장 낮은 서문지(100m)와 가장 높은 봉수대지(487m)와의 비고 차이가 350m가 넘으니 성곽길을 걷는 건 본격 등산이나 진배없다. 성의 자취와 등산로가 거의 정확하게 겹쳐진다.
# 창골 마을 두 개의 기적 대림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대림산성의 성안 마을인 살미면 향산리 창골 마을에서 시작한다. 산성 길을 걷는 내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성벽 안쪽 아래로 내려다보이던 창골 마을이었다. 산성이 지나가는 대림산 능선 안쪽의 비탈면에 마을이 꼭꼭 숨어 있는데, 11가구가 사는 작은 산중의 마을은 어쩐지 비밀스러우면서도 아늑하고 또 평화롭다. 5대째 이곳 창골 마을에서 살고 있는 이창근(81)·최귀선(82) 씨 부부는 “지금은 스무 명 남짓의 작은 마을이지만 6·25전쟁 통에는 이 작은 산골 마을이 피란민들로 북적였다”고 했다. 삼면을 산으로 둘러치고 있는 천혜의 조건 때문이었으리라. 이 씨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얘기를 했다. 전쟁의 와중에 B29 폭격기 4대가 떠서 일대에 폭탄을 퍼부었는데, 여기 창골 마을에도 폭탄 4개가 떨어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폭탄 4개가 모두 불발탄이었단다. 주변에 떨어진 폭탄은 남김없이 터졌는데, 창골 마을에 떨어진 폭탄은 거짓말처럼 하나도 폭발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여기가 예사 땅은 아니’라는 것이 이 씨의 설명이었지만, 쓰러져 가는 집은 옹색했고 가파른 비탈의 땅은 척박하기 짝이 없었다. 기계를 들이지 못하는 비탈진 밭에 노동으로 심어 거둔 콩도, 팥도 수확이 형편없어 보였다. 어디 올해만 그랬을까. 고된 노동과 늘 턱없이 부족한 수확에도 이 씨 부부는 이 산중에서 일곱 남매를 키워냈다고 했다. 이 마을에서 정작 믿기지 않는 것은 불발탄보다도, 이 척박한 땅에서 일곱 남매를 건사하며 살아온 세월이 아닐까. 삼국의 국운을 놓고 쟁패하던 가늠할 수 없는 저편의 시간에도 중원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왔을 것이었다. 마치 기적처럼…. 중앙탑이라 불리는 충추 탑평리의 칠층석탑 위로 자그마치 44만9315번의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간 속에서 말이다. ◇충주의 맛집=‘비원한정식’(043-843-9100)은 충주지역을 대표하는 한정식집으로 지역 주민들이 상견례를 하는 곳이다. 홍어삼합, 장어구이, 도미회, 게장, 새뱅이탕 등 스무 가지가 넘는 요리가 상을 그득 채운다. 1인분 2만∼5만 원. 칼칼한 양념으로 조려내는 북어찜을 내는 ‘북어마당’(043-851-0080)과 커다란 갈빗대를 넣은 갈비탕으로 이름난 ‘탄금대 왕갈비탕’(043-857-8577)은 식사시간이면 지역주민들이 길게 줄을 서는 곳이다. 충주시청 앞의 ‘터줏골 명가’(043-843-4408)는 충청도식 돼지고기 김치찌개인 ‘짜글이 찌개’로 이름난 곳이다. 김치찌개와 비슷하지만 국물이 더 자작하고 걸쭉해 진한 맛이 난다. ‘통나무 묵집’(043-842-5059)은 대물림으로 20년을 이어온 집이다. 가마솥에 장작을 때 도토리묵을 옛날 방식으로 쑨다. 된장도 청국장도 직접 담근다. 도토리묵밥과 시골청국장찌개가 대표메뉴. 충주식 청국장찌개는 새콤하게 익은 깍두기를 넣어 끓이는 것이 특징. 메주콩을 가마솥에 볶아 간장양념에 무쳐내 반찬으로 내놓는 메주콩조림이 독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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