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아직도 다녀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전남 무안의 물결치는 황토 구릉을 지나 당도하는 해제반도의 끝, 거기서 지도와 사옥도를 징검다리처럼 딛고서 다시 연륙교를 건너 들어가는 전남 신안의 작은 섬, 증도(甑島) 말입니다. 섬에도 명함이 있다면 증도가 어떤 섬인지는 내미는 명함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증도의 공식적인 직함은 이렇습니다.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 갯벌도립공원,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국가습지 보호지역, 람사르 등록습지…. 여기다가 담배연기 없는 섬, 깜깜한 밤 별 헤는 섬, 자전거의 섬 같은 비공식적인 직함도 여럿입니다. 그 섬에서 ‘개발’이 아닌 ‘진화’를 봅니다. 도시에서는 ‘변화의 가속도’가 곧 발전을 뜻하는 것이지만, 증도는 거꾸로 후진과 느린 속도가 동력이 돼서 진화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증도는 갈수록 더 느려지고 순해지면서 더 아름다워지고 있습니다. 지금 그 섬은 기분 좋은 가을볕과 ‘한적함’으로 가득합니다. 바다의 썰물과 밀물이 마치 들숨과 날숨처럼 느릿느릿 드나들고, 갯벌에는 칠면초며 함초 같은 염생식물들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피서객들이 다 돌아간 우전해수욕장의 텅 빈 백사장에서는 한낮이면 가물가물 밀려간 바다가 은박지처럼 반짝거립니다. 밤이면 가로등 드문 섬의 어디서나 고개를 들면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울음을 배경으로 별들이 가득 쏟아져 내립니다. 혹 다른 계절에 증도를 다녀갔다면 그건 다 ‘무효’입니다. 증도에서 보고 느껴야 할 것이 ‘한적함’이라면 지금보다 더 좋을 때는 없습니다.
# 증도, 가을의 초입에서 ‘절정의 시간’을 맞다 흔히 이맘때의 섬이나 바다 앞에는 ‘철 지난’이란 수식어가 붙곤 한다. 그건 뙤약볕이 이글거리는 여름의 한복판을 바다와 섬의 ‘제철’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그러나 모든 섬과 바다가 다 그렇지는 않다. 대개 섬과 바다는 여름날의 눈부신 백사장과 두근대는 청춘, 해안가의 울긋불긋 화려한 파라솔로 가장 빛난다. 그러나 전남 신안의 증도만큼은 다르다. 단언컨대 증도가 보여주는 한 해 중에서 가장 ‘절정의 시간’은 썰물처럼 사람이 빠져나간 뒤 고요하고 적막해진 이즈음이다. 증도에 당도했다면 온전히 누려야 할 것은 ‘한적함’이다. 증도에서의 한적한 시간은 여행자의 노력이나 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든 섬으로 드는 순간부터 바쁜 속도와 일상의 번잡함을 저절로 내려놓게 된다. 증도의 면적은 고작 여의도 3배 남짓의 크기. 다른 여행지처럼 ‘볼거리’를 찾아 바쁘게 발걸음을 놀린다면 증도의 명소는 반나절도 안 돼 다 돌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다녀서는 증도를 보았다 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이런 방식의 여행이란 긴 상영시간의 감동적인 영화를 단 한 줄의 줄거리로 요약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래서야 장면과 장면을 잇는 감정의 흐름과 순간순간 느껴지는 정서 같은 것들은 다 휘발하고 만다. 증도의 한적함을 제대로 누리는 방법은 ‘빈둥거림’이다. 여행이 무릇 마쳐야 할 업무나 산더미처럼 쌓인 숙제가 아닐진대 서두를 일은 없다. 해제반도 끝을 지나서 이 먼 섬까지 찾아든 것도 어차피 쉬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빈둥거리냐인데, 정답은 없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숙소에 들어 늦도록 쏟아지는 별빛을 올려다봐도 좋겠고, 밤새 파도소리를 들으며 뒤척이다가 늦잠을 자도 좋겠다. 이른 아침에 푸르게 빛나는 백사장으로 나가서 썰물에 멀리 밀려 나간 바다를 향해 무작정 걸어 보거나 갯벌로 이어지는 노둣길을 걸어 붉게 익어가는 염생식물이 그려내는 색감을 감상하는 것도 나무랄 데 없다. 노을이 지는 저물녘에 자전거를 빌려 타고 황금빛 햇살을 가르며 순백의 소금을 거둬들이는 천일염전의 일렬로 늘어선 전봇대를 따라 달려 보는 일은 또 어떨까. 이렇게 마음을 내려놓는 여정에서는 때로‘완벽한 시간’과 마주치게 된다. 지금 증도에서라면 그런 시간을 만날 확률이 높다. 일상에서의 빈둥거림은 ‘소모’의 행위에 가깝지만, 여행지에서 이렇듯 느리게 보내는 시간들은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 같은 깨달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 끝없이 펼쳐지는 염전이 보여주는 퍼포먼스 해제반도의 끝 작은 섬인 증도를 이만큼 세상에 알린 것은 8할쯤이 태평염전의 덕이다. 그 넓이만 자그마치 643만㎡(140여만평)에 이르는, 단일 염전으로는 국내 최대 크기의 태평염전은 오랫동안 증도의 아이콘이었다. 태평염전이 보여주는 것은 ‘소금’이 아니다. 가둬둔 바닷물이 한나절 볕에 소금결정으로 맺히고 그걸 염부들의 고된 노동으로 소금으로 거둬들이는 마술 같은 과정이 더해져 만들어내는 하나의 퍼포먼스에 가깝다. 여기다가 끝없이 늘어서 있는 소금창고와 창고를 따라 이어지는 나무전봇대의 이국적인 정취도 한몫을 해준다. 그러니 태평염전에서는 다 만들어진 소금만 기웃거릴 일이 아니다. 바닷물과 볕의 합작으로 오랜 시간을 거쳐 느릿느릿 소금이 만들지는 과정과 그렇게 만들어진 소금을 밀대로 긁어내는 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의 염부의 굵은 팔뚝까지 다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소금을 만든다는 것이 기다림과 땀을 얼마나 정직하게 거둬들이는 일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태평염전은 4대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이 운영하던 척방산업이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증도와 후증도로 나뉘었던 섬에 간척사업을 하면서 만들어졌다. 증도에 대규모 천일염전이 생기자 전쟁의 참화로 살길이 막막해진 이들이 일을 찾아 섬으로 들어왔고 소금값이 좋았던 때에는 섬 전체가 흥청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제염이 등장하면서 천일염 산업의 급속한 쇠퇴로 천일염전은 겨우 명맥만 유지해 왔고, 폐허가 되다시피한 염전을 30년 전쯤 태평염전에서 사들여 지금과 같은 소금평야를 만들어냈다. 태평염전은 지금 전혀 다른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염전 인근에 소금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을 지었고, 그 곁에는 염전에서 자라는 염생식물들이 펼쳐진 탐방로도 만들었다. 지난해 연말에는 모든 음식에 천일염을 쓰는 소금레스토랑도 냈고, 힐링 체험을 할 수 있는 소금동굴도 들여놓았다. 내년 중에는 침대며 집기 등을 모두 소금으로 만든 이른바 ‘소금호텔’도 개관할 예정이란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태평염전 측의 빼어난 안목이다. 각종 시설들을 들이면서도 자연을 파헤치거나 경관을 흐뜨리지 않는다. 소금레스토랑만 해도 갯벌 옆 염전에 늘어선 소금창고와 똑같이 지어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했고, 스파형식의 소금동굴도 번잡스러운 프로그램을 들이기보다는 그저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해놓았다. 관광지의 시설을 이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되게 가꾸는 곳은 흔치 않다. 태평염전을 찾았다면 광활한 염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낙조 전망대를 놓칠 수 없다. 소금박물관 옆으로 잘 정비된 짧은 산책로로 잠깐만 오르면 삼면이 염전으로 가득한 장쾌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해질 무렵 노을이 염전에 담긴 바닷물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모습도 장관이다. 또 염전 옆의 염생식물원에서 갯벌의 물골을 끼고 자라는 초록빛 함초와 붉은빛 칠면초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색감도 가슴이 저릿할 만큼 아름답다. 증도에 머무는 이틀 동안 시간대를 달리해 그곳을 다섯 번 오르내렸는데 그때마다 펼쳐진 풍경은 모두 달랐다. # 걷거나 자전거로 달리거나… 속도를 늦추는 방법 이즈음 증도에서는 무얼 해야 할까. 선택은 많다. 섬 곳곳을 차로 돌아볼 수도 있겠고, 자전거를 타고 내키는 대로 해안과 갯벌을 따라 달릴 수도 있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걷는 것 또한 증도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 섬을 돌다 보면 느린 시간에 금세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첫번째 추천은 걷기다. 증도에는 걷기 코스인 ‘모실길’이 섬의 해안을 따라 총 42㎞가 나 있다. 전체의 구간이 5개 코스로 구분돼 있다. 하지만 정해진 코스는 잊어도 좋다. 딱히 코스를 따라간다는 생각 없이도 어디서든 내키는 대로 걷다보면 어김없이 모실길의 구간을 만나게 된다. 가장 인기있는 구간은 모실길 3코스다. 해송숲에 들어 나무 사이로 바다를 보며 걷는 길이다. 우전리에서 갯벌생태관을 거쳐 갯벌 위에 놓은 짱뚱어다리까지 4.6㎞의 구간이다. 숲길에는 잔모래 위로 소나무잎이 깔려 마치 스펀지를 밟는 것처럼 폭신하다. 해송이 그리 굵지는 않지만 워낙 나무들이 빽빽해서 솔향이 짙다. 이래 봬도 2009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공존상’을 받았다. 장뚱어다리에 닿기 직전의 우전해수욕장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쪽 풍경만 보자면 마치 남국의 해안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다. 섬 서북쪽의 신안해저유물 발굴기념비에서 출발해 증도면사무소 쪽으로 이어지는 1코스에는 ‘노을이 아름다운 사색의 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이름대로 낙조무렵의 정취가 빼어난 곳이다. 오르막 구간이 있긴 하지만, 고도를 높여 왼쪽에 펼쳐진 바다를 만끽하면서 걸을 수 있으니 그 정도의 수고쯤이야 대수롭지 않다. 밀물이면 끊어졌다가 썰물 때면 드러나는 화도의 노둣길을 걷는 맛도 좋다. 모실길 4코스에 속해 있는 구간인데, 굳이 코스를 다 걷지 않아도 갯벌 가운데로 난 노둣길 1.2㎞를 왕복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노둣길에 오르면 갯벌에서 짱뚱어와 농게, 칠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코앞에서 볼 수 있다. 두번째 추천은 자전거다. 자전거는 엘도라도 리조트 안의 대여점에서 빌릴 수 있다. 둥글게 바퀴를 돌리며 모실길 코스 따라 달려도 좋고, 내키는 대로 바다를 향해 페달을 저어도 좋다. 어디를 다니든 해질 무렵이 되면 태평염전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좋겠다. 해가 지면서 온통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풍경 속에서 염전과 소금창고를 따라 달리는 맛이라니…. # 여행자들과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섬 증도는 지금도 진화가 진행 중인 섬이다. 외지인이 운영하는 모텔이며 식당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여행지가 아니라 섬을 지키며 농사와 갯일을 하는 주민들과 여행자들이 ‘느림의 가치’를 자연스레 공유하며 섞이는 그런 공간을 향해서 가는 중이다. 증도의 진화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는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 성공하고 있는 것도 있고, 삐꺽이는 것들도 있다. 가령 지난 5월부터 신안군이 섬 입구에서 2000원씩의 입장료를 거두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 쓰레기 처리비나 환경보호를 위해서 쓰인다고는 하지만, 사유지가 아닌 섬으로 드는데 통행세를 거두는 것은 좀처럼 동의하기 힘들다. 관광객들의 거친 항의로 입장료는 1000원으로 내려가긴 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다. ‘담배연기 없는 섬’의 실험은 성공 중인 듯하다. 실제로 증도에서는 담배를 살 수 없다. 이틀 동안 섬에서 한 번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다. 증도는 또 ‘자동차 없는 섬’ 실험을 준비 중이다. 순차적으로 섬 안의 차를 전기차로 바꾸고, 외지인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할 생각이란다. 이런 실험을 올바른 방향으로 완성하는 책임은 현지 주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있다. 주민들의 입장에서야 가로등을 줄이는 게 불편을 의미하지만, 쏟아지는 별빛에 감동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주민들은 기꺼이 그런 불편을 참는다. 생존의 터전인 갯벌을 마구 밟는 관광객들의 극성 때문에 갯일을 하는 섬 노인네들의 갯것 농사는 표나게 줄었지만, 밝게 웃는 도회지의 아이들을 위해 그걸 감수하고 있다. 이제 나머지는 그 섬을 찾는 관광객들의 몫이다. 관광객이 주민을 배려하고 관광객 유입으로 인한 이득이 현지주민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려는 배려가 필요하다. 해제반도의 끝머리에 떠있는 자그마한 섬 증도는 언제 찾아가든 멋진 풍광과 함께 느리게 가는 시간을 선물처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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