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강원 함백산 비밀의 숲

醉月 2011. 9. 15. 06:49

진초록 이끼를 두른 참나무 고목들이 더러는 가지를 뒤틀고, 더러는 누워 자라고 있는 함백산 원시림의 서늘한 숲길. 밀려든 운무로 초록의 기운이 번지는 이 길 어딘가에 ‘숲의 정령’이 숨어 있을 것 같다.
그늘마저 초록빛으로 빛나는 오래된 숲길. 혹시 이 짙은 숲의 아름드리 고목 뒤에는 ‘숲의 정령(精靈)’들이 몸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강원 정선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두문동재(싸리재) 옛길. 거기서 함백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깊고 짙은 숲길에는 일찌감치 가을이 당도했습니다. 숲의 공기는 걷는 내내 반팔 차림이 후회될 정도로 서늘했고, 촉촉한 습기와 이끼로 가득한 청량한 길섶에는 자리바꿈을 하는 여름꽃과 가을꽃들로 온통 꽃사태가 났습니다. 마지막 비명처럼 꽃을 피워올리는 화려한 여름꽃의 뒤를 이어 작고 가냘픈 가을꽃들이 하나둘 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두문동재에서 은대봉을 지나 함백산 능선을 따라가는 4시간 남짓의 촉촉한 숲길. 그 길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걷습니다. 깊게 숨을 빨아들이자 어슴푸레 박하향이 났습니다. 운무로 가득찬 숲속의 대기는 더없이 상쾌했습니다.

숲길을 걸으며 만나는 꽃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줍니다. 둥근이질풀, 마타리, 촛대승마, 송이풀, 잔대, 오이풀, 물봉선, 구릿대…. 밑동에 진초록 이끼를 두르고 활개를 치듯 가지를 사방으로 뻗은 아름드리 참나무와 자작나무, 주목을 만나면 초록의 그늘 아래서 다리쉼도 합니다.

숲은 벌써 찌르르 찌르르 가을 풀벌레 소리로 가득하고, 길섶의 방사형 거미줄에는 운무가 지나면서 맺힌 물방울이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숲길가에는 멧돼지가 뒹굴었던 흔적이 도처에 있긴 하지만, 무섬증보다는 이런 깊고 청량한 숲 어딘가에 깃들여 사는 길들여지지 않은 산짐승들의 힘찬 근육이 먼저 떠오릅니다. 원시림 같은 숲길을 걷는 내내 그런 힘찬 근육의 기운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만항재의 낙엽송 그득한 숲에서는 멧돼지 일가족이 인기척에 놀라서 우두두두 숲속을 달려가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함백산 숲길을 다 걷고나서 부록처럼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영월 상동의 구룡산과 상동산 자락이 품고 있는 작은 이끼계곡입니다. 만항재에서 화방재 쪽으로 내려서 영월 쪽으로 31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칠량이골에 맑은 물을 보태는 짙은 이끼로 가득한 작은 물길을 만납니다.

4년 전 봄날에 우연히 마주쳤다 소개한 곳이지만 위치만큼은 알리지 않고 꼭꼭 숨겨두었던 곳인데, 어찌 알았는지 근래에 카메라를 메고 온 이들이 알음알음 찾아들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곳입니다.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행여 훼손될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만 이끼를 딛지 않고 계곡 옆으로 난 조붓한 숲 그늘을 걸으며 눈으로만 그 짙은 초록빛을 담아가기만 한다면 그 청량함이 오래도록 지켜질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조심스레 그곳을 알려드리기로 했습니다.

대신 노파심으로 당부 한마디를 보탭니다. 혹시 그곳을 찾아간다면 이제 몇 곳 남지 않은 이 땅의 이끼계곡 중 하나인 이곳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다른 사람과 나눌 것을 약속해주셔야겠습니다.


# 계절보다 먼저 당도한 가을꽃을 만나러 가는 길

함백산에서 걸어서 만항재로, 다시 차를 타고 화방재로 내려선 뒤에 31번 국도를 따라 영월 상동 쪽으로 가다 만나게 되는 이끼계곡. 진초록의 융단 같은 이끼로 물색까지 초록으로 물들었다.

두문동재에서 함백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에서 마주친 야생화들. 여름꽃이 채 지지 않은 자리에 가을꽃이 피기 시작했다.
강원 정선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포장도로가 능선을 잘라낸 두문동재(싸리재) 정상. 이곳은 ‘봄꽃을 만나러 가는 길’과 ‘늦여름 또는 가을꽃’을 만나러 가는 길을 가르는 갈림길이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금대봉을 지나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은 누가 뭐래도 ‘봄꽃의 길’이다. 해마다 봄이면 이 숲길에는 얼레지부터 노루귀, 한계령풀, 피나물, 개별꽃들이 화려한 융단을 이루며 앞다퉈 피어난다. 오래전부터 봄꽃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유명세가 덜하긴 하지만 두문동재에서 오른쪽 숲으로 들어서 은대봉을 거쳐 함백산의 능선을 따라가는 반대편의 숲길은 ‘늦여름과 가을꽃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왕복 2차로의 포장도로가 잘라놓긴 했으되 같은 자락을 잇는 산자락의 능선임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봄꽃이, 다른 쪽은 여름꽃과 가을꽃이 만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울창한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늘과 관계가 깊을 성싶다. 먼저 봄꽃의 길인 금대봉 쪽은 초지가 너른 편이고, 가을꽃의 길인 은대봉 쪽은 숲이 짙고 울창하다. 봄꽃은 초지에서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자라나고, 가을꽃은 초록의 숲그늘 양지쪽에서 꽃대를 올린다.

해발 1200m를 오르내리는 두문동재 일대에는 봄은 늦게 닿지만, 가을의 서늘한 바람은 일찍 당도한다. 마침 두문동재를 찾았을 때 도시는 수은주가 30도를 오르내리는 때늦은 폭염이었지만, 이곳의 한낮 최고기온은 22도에 머물렀다. 아침 나절의 수은주는 14도까지 내려갔다. 계절을 성큼 건너뛰어 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반팔 차림으로는 으슬으슬 추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함백산 일대는 짙은 운무까지 자욱하니 드러난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운무로 촉촉하게 젖어 초록빛이 더 선명해진 숲길을 서늘한 대기 속에 걷는 맛이라니…. 그 길에서는 꽃이 없다해도 아쉬울 것은 없다.

# 운무에 휩싸인 숲길을 가을꽃을 따라 오르다

저 아래로 38번 국도가 지나는 터널이 뚫리면서 ‘이동수단’으로서 길의 수명이 다한 두문동재옛길의 정상쯤에서 본격적인 ‘가을꽃의 숲길’은 시작된다.

은대봉과 함백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은 들머리부터 온통 늦여름꽃과 가을꽃들의 잔치다. 만발한 꽃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운무 사이로 늘어선 고사목들이 그림자처럼 서 있는 저 숲길 너머에는 또 무슨 꽃들이 환하게 피어났을까.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흙길로 들어선다. 밀려든 운무가 지나가면서 숲을 촉촉하게 적셔 초록빛이 한층 짙어졌다. 들머리에서 가장 먼저 마중나온 꽃이 오리방풀이다. 양지바른 숲길마다 보라색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날은 서늘하고 길은 유순하니 여간해서는 숨이 가쁠 일도, 땀이 흐를 일도 없다. 그저 가만가만 가을꽃이 피어난 발밑을 둘러보며 걷는다.

숲길의 양지바른 쪽이나 활엽수 너른 잎의 초록을 투과한 빛이 닿는 곳에는 어김없이 꽃이 피어 있다. 이건 층층이꽃, 이건 새며느리밥풀, 여기는 송이풀, 개쑥부쟁이…. 아직 채 지지 않은 전호와 등갈퀴나물, 물양지꽃 같은 여름꽃과 함께 얼굴을 내민 가을꽃들이 화사하다. 이끼가 촉촉하게 스민 풀섶에서는 잔대와 물봉선도 수줍은 듯 꽃잎을 열고 있다.

두문동재에서 은대봉까지는 금방이고 거기서 함백산 정상까지는 6㎞ 남짓. 볕이 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꽃이 피어나고 어둑한 원시림의 깊은 숲에서는 숲의 정령과도 같은 우람한 나무들이 가지를 활개치듯 하며 서 있다.

숲에서는 누군가 온통 흙을 파헤친 흔적과 자주 만난다. 필시 멧돼지의 흔적이다. 길가의 숲에서 멱을 감듯 몸을 뒤챘는지 뻘건 흙이 드러나 있다. 이런 흔적들을 보고 있으면 무섬증보다는 산 전체가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앞선다. 탄력 있는 근육의 펄떡거리는 산짐승들이 이 산중의 어딘가에서 콧김을 내뿜으며 내달리고 있을 것이다.

짧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몇번 거듭하다 보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함백산 정상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길은 함백산 9분능선의 옆구리로 나와 만항재로 이어진다. 여기까지 왔으니 함백산 정상을 딛겠다면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 950m를 숨차게 올라야 하고, 가을꽃과 숲길의 정취만 보겠다면 이쯤에서 내려서도 좋겠다.

만항재까지 2.8㎞ 남짓은 제법 긴 내리막 포장도로 구간이지만, 여기에도 길섶에는 어김없이 야생화가 피어 있으니 타닥타닥 걸어내려오는 그 길이 그다지 지루하지 않다.

# 만항재에서 가볍게 즐기는 야생화 산책, 그리고 태고의 신비 가득한 이끼계곡

함백산 자락을 넘어가는 해발 1330m의 고개인 만항재는 어느 계절이나 다 제 나름의 정취를 보여주는 곳이다. ‘산상의 화원’이란 별명답게 봄부터 가을까지는 꽃들이 만발하고, 겨울에도 설경이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함백산보다 해발고도가 낮아서인지 만항재에 펼쳐진 산상의 화원에는 아직 여름꽃들이 무성하게 남아 있다.

만항재에는 온갖 야생화들이 한데 어우러져 흐드러진 군락을 이루고 있다. 뿌려 가꾼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자라난 것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만항재에서는 고개 정상 아래쪽의 산책길을 따라 늦도록 피어난 여름꽃과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가을꽃들을 느긋하게 돌아보는 것도 좋겠고, 고개 정상의 위쪽에 조성된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낙엽송 군락지를 따라 산림욕을 하는 것도 좋다. 함백산의 산길을 걷기 버겁다면 그저 차로 만항재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발길이 만항재까지 이르렀다면 내친 김에 영월 쪽으로 화방재를 넘어 칠량이골의 지류 중 하나인 이끼계곡을 찾아가보자. 이끼계곡은 이렇다 할 이정표도, 가늠할 만한 지형지물도 없어 찾아가기가 까다롭긴 하지만, 화방재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상동 쪽으로 달리다가 장산 야영장을 지나 왼편에서 합수하는 작은 물길만 찾으면 된다.

물길 옆으로 좁은 숲길이 나 있는데 잠깐만 걸어도 온통 이끼로 가득한 계곡에 다가서게 된다. 태고의 신비로 가득한 것 같은 진초록의 이끼 계곡 바위 위에는 이제 하나둘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짙은 이끼로 가득한 계곡은 우리 땅에도 몇곳 남아 있지 않다. 한때 이끼로 이름났던 강원 일원의 계곡들도 사람들의 발길에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4년 전쯤 이끼계곡을 소개하면서 그 위치를 공개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곡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음에도 이끼계곡은 아직 예전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부디 숲길을 따라 조심조심 발길을 딛고, 그 모습을 눈에 담아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일이다. 신비로 가득한 이끼의 숲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면 말이다.


싸리재∼함백산 가는 길 = 정선, 태백 쪽으로 가자면 영동고속도로 IC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야 한다. 제천 나들목으로 나와서 영월로 가는 38번 국도를 탄다. 정선에서 태백으로 관통하는 두문동재터널 앞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옛길을 따라 고갯마루까지 올라가면 두문동재에서 함백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의 들머리다. 고개 정상에서 왼쪽으로는 금대봉을 지나 대덕산을 넘는 길이고, 오른쪽 길이 은대봉을 지나서 함백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무엇을 맛볼까 = 태백과 정선 일대에는 육질 좋은 한우를 내놓는 식당이 많다. 태성실비식당식육점(033-552-5287)과 경성실비식당(033-552-9356)은 잘 알려진 맛집. 고등어, 갈치조림과 두부조림을 내놓는 초막손칼국수(033-553-7388)도 추천할 만하다. 산채음식을 내놓는 태백도립공원 인근의 무쇠보리(033-553-2941)도 알려진 맛집이다. 고한읍의 낙원회관(033-591-7729)은 부드러운 육질의 한우를 내놓는다. 소면을 말아내는 된장소면도 별미다.


“글쎄요. ‘무념무상’이지요. 걷다보면 모든 생각이 다 사라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된답니다.”

두문동재에서 함백산의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에서 홀로 반대편에서 꼬박 하루를 걸어 화방재를 넘어왔다는 장운현(40)씨를 만났다. 그는 이른바 ‘백두대간’을 거슬러 올라오는 중이라고 했다. 지난 2006년 지리산의 백무동계곡에서 출발했다니 여기까지 오는 데 꼬박 6년이 걸린 셈이다.

“매년 봄과 가을에 시간을 내서 백두대간을 이으면서 산행을 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1∼2년이면 끝내는 걸 6년째 붙들고 있습니다. 올해는 어떻게든 끝내볼 생각입니다.”

그가 산행을 하는 방식은 이렇다. 매년 봄, 가을에 한두 차례 시간을 내 백두대간의 산자락을 타고 오른다. 약간의 행동식과 작은 텐트, 그리고 몇벌의 옷가지만 지고서 지칠 때까지 산을 탄다. 하루 꼬박 12시간에 20㎞ 남짓을 걷는다. 이렇게 3박4일도 좋고, 4박5일도 좋다. 어떤 때는 8박9일을 내리 산행을 한 적도 있다. 그러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 발에 물집이 잡히고 걸을 힘조차 없게 되면 그는 그제야 경기 파주시의 집으로 돌아간다.

이날 그는 두문동재에 당도해서 ‘저녁식사’라며 한줌도 안 돼 보이는 행동식을 꺼냈다. 손가락 두개 굵기만한 이른바 ‘에너지바’ 3개가 한 끼 식사란다. 간혹 주민들에게 밥을 얻어먹는 날도 있지만 보통은 이렇게 끼니를 때우며 산행을 하니 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허기도 진단다. 고행도 이런 고행이 없다.

그렇다면 그는 동행도 없이 혼자 왜 이런 고생스러운 산행을 할까. 그는 빙긋 웃으며 “글쎄요”란 답밖에 내놓지 못했다. 질문을 고쳐서 “홀로 산행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그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들머리에서는 여러 생각이 지나가는데, 걷다보면 다 잊고 그저 몸이 시키는대로 걷게 된다”고 했다.

그러더니 그는 대뜸 ‘삶의 가치’를 말했다. 흔히 삶의 가치를 돈이나 성공 여부로 재는데 자신은 그것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해마다 몇차례씩 일상을 훌훌 벗고 산중에 들어 무념무상 속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는 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누구든 도회지 일상의 지겨움으로 답답해지거나 삶의 목표가 흐릿해진다면 산을 찾아서 걸으라고 권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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