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겨울의 한복판에 전남 장흥의 산과 바다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천관산은 가시면류관 같은 암봉들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의 형상으로 우뚝 솟아 있더군요. 그 불길의 능선을 지나 아홉 마리 용이 딛고 섰다는 구룡봉에 올랐습니다. 용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암봉 끝에 서서 느낀 탐진지맥의 기운이 어찌나 힘차던지요. 장흥의 새벽 바다는 차가운 바다에 시린 손을 담그고 매생이를 건져 내는 고된 노동으로 뜨거웠습니다. 아무리 엄동의 추위라도, 아무리 혹한의 바다라도 삶의 뜨거움마저 식힐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그 고된 노동으로 차가운 새벽 바다에서 건져 낸 매생이를 뚝배기에 담아 뜨끈하게 끓여 낸 밥상을 받았습니다. 남도 끝자락의 기운찬 암봉에서 용의 기운을 얻은 뒤에 든든하게 몸을 데우는 밥상을 물리고 나니 비로소 한 해를 살아갈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신년의 첫 여행지로 구태여 장흥을 꼽은 이유가 이렇습니다. # 아홉 마리 용이 찍고 간 발자국… 구룡봉에 서다 백두대간의 등뼈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의 힘찬 맥박이 탐진지맥으로 이어지다 남쪽 바다에 닿기 직전 거친 산 하나를 불끈 일으켜 세웠으니, 그게 바로 전남 장흥의 천관산이다. 거기에 아홉 마리 용이 딛고 간 봉우리가 있다. 이름하여 구룡봉(九龍峰)이다. 저 스스로 장대한 암릉으로 우뚝 서 있는 구룡봉 암릉에 오르면 발 아래로 모든 것을 제압하는 기운이 느껴진다. 가히 ‘용의 자리’라 할 만하다. 구룡봉 정상 암릉에는 발자국 형상의 구덩이 수십 개가 있다. 실제 그랬을 리야 없겠지만, 옛사람들은 거기서 아홉 마리 용이 찍고 간 발자국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암반 위에 어지러운 발자국이 꽃무늬처럼 찍혀 있고 발톱 자리까지 선명하다. 천관산은 본래 산자락 바로 아래 바다를 끼고 있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4㎞쯤 물러났지만 발치 아래 남해의 바닷물이 출렁이던 때로 돌아간다면, 물을 관장한다는 용이 깃들기에 이곳만 한 데가 또 있을까 싶다. 구룡봉에 올라서 장쾌하게 펼쳐진 남쪽 바다를 굽어보면서 거기에 아홉 마리 용이 딛고 선 모습을 상상한다. 상상의 배경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천관산을 묘사한 문장 한 줄을 가져온다. ‘천관산은 산세가 몹시 높고 험하여 더러 흰 연기 같은 기운이 서린다.’ 흰 연기 같은 기운이 서린 높은 암봉에 아홉 마리 용이 우뚝 서 있는 모습. 상상만으로 상서롭고 힘찬 용의 기운이 느껴진다. 구룡봉이 아니래도 천관산은 빼어나다. ‘천관(天冠)’이라면 왕이 쓰는 관을 뜻하는 말일 터. 그 이름에 걸맞게 능선을 따라 천주봉, 대세봉, 환희대, 복바위, 당바위 등의 뾰족하거나 거대한 암봉 무리가 왕관처럼 솟아 있다. 천관산의 바위가 그려 내는 왕관 형상은 화려하게 보화로 치장된 것이 아니라 뾰족뾰족한 면류관에 가깝다. 바위들이 그려 내는 선이 기름지거나 풍성하지 않고, 말랐으되 강건해 보인다는 얘기다. 여위었지만 더없이 맑은 눈매를 가진 선비의 느낌이랄까. # 천관산의 등지느러미처럼 펼쳐진 마르되 강건한 바위들
천관산은 제법 높다. 바닷가에 있으면서 해발 732m에 달하니 해발고도 0m의 수준점에서 출발하는 산행으로는 만만찮다. 산을 오르다 보면 대개 해발고도 숫자로 짐작했던 높이보다 더 높게 느껴지는 법이다. 숨이 턱에 닿고 허벅지가 팍팍해지니 그렇다. 그런데 천관산은 다르다. 막상 올라 보면 해발고도 숫자보다 훨씬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높긴 하되 산행거리가 짧기 때문이다. 천관산을 쉽게 오르겠다면 천관산 문학공원 뒤편 탑산사 쪽을 들머리로 삼게 되는데, 여기서 정상까지의 거리는 고작 1㎞ 남짓에 불과하다. 짧은 거리에 높이 오르자니 당연히 길은 가파르지만, 그래도 몇 번 다리 쉼을 하다 보면 금세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만나게 된다. 천관산은 여러 개의 등산 코스가 있지만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이 탑산사에서 출발해 아육왕탑과 구룡봉을 거쳐 정상까지 가는 코스다. 이쪽 길을 택해 오른대도 1시간30분 남짓이면 넉넉하게 정상에 가닿을 수 있다. 그중 오름길은 1.2㎞ 정도밖에 안 되니 1시간 남짓만 땀을 흘리면 된다. 천관산 아래 문학공원부터 들러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등 장흥 출신 문인들의 자취를 둘러보고 탑산사까지 차로 올라가면 구룡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시작된다. 이쪽 오름길을 택해 오르다 보면 거대한 암봉 아래 숨듯이 자리 잡고 있는 탑산사 큰절을 만나게 된다. 1200여 년 전 영통화상이 천관산에 처음 지었다는 절집이다. 이곳에서는 오가는 등산객들을 위해 오가피 약차를 7년째 보시하고 있다. 쓰디쓴 약차를 한잔 마시고 길을 재촉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천관산의 비경이 아육왕탑이다. 거대한 바위가 겹쳐져 일부러 쌓아 놓은 듯 5층을 이뤄 허공에 아슬아슬 서서 탑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다. 아육왕이란 2300여 년 전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 진흥을 꾀한 아소카왕을 이른다. 이런 절경에 이국 왕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천관산의 내력이 불교와 깊숙이 닿아 있기 때문이리라. 명산이 그렇듯 천관산에도 도처에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천관산은 한때 화엄종의 중심이 돼서 89개 사찰을 거느리고 있었다. 산 이름마저 ‘불두산(佛頭山)’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천관으로 바뀌어 부른 이름도 천관보살이 깃들어 있다는 데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천관보살이란 불교에서 자신의 깨달음과 더불어 중생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이타행(利他行)의 수행을 겸하는 보살이다. 불법을 지키되, 다른 이들을 돌볼 줄 아는 이타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아육왕탑과 구룡봉을 지나면 여기서부터 정상인 연대봉까지는 부드러운 능선이다. 솜털 같은 꽃은 다 지고 줄기만 남아 바람에 출렁거리는 억새밭 사이로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가면 기암괴석의 절경들이 능선마다 마치 물고기의 등지느러미처럼 펼쳐진다. 솟은 바위의 북쪽으로는 탐진지맥의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섬들이 점점이 떠 있는 남쪽 바다의 절경이 펼쳐진다. 치솟은 암봉은 암봉대로, 출렁거리는 억새는 억새대로, 또 바다는 바다대로 그 아름다움을 뽐내니 여기서 더 무엇을 바랄까. # 고된 노동으로 뜨겁게 달궈진 바다
이즈음이야 매생이가 전국적인 먹거리가 됐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가난했던 시절, 바닷가 사람들이 겨울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던 구황음식이었다. 소비는 늘었다지만, 생산은 여전히 옛 방식 그대로다. 어민들은 바다에 굵은 대나무를 꽂아 놓고 거기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만든 발을 널어 두고는 매생이를 길러 낸다. 이른바 ‘지주식 양식’이다. 발을 짜고, 지주를 박고, 그 발을 바다에 넣고, 수확하기까지 모든 작업은 손으로 다 한다. 내저마을의 서른 아홉 가구 어민들이 배를 타고 나가 일일이 손으로 꽂은 굵은 대나무 지주가 무려 1만1000개이고 거기다 넣은 매생이발이 1만 개다. 지주를 박고 매생이발을 넣는 일은, 매생이를 거두는 일에 대면 거저먹기다. 매생이 수확이 얼마나 고된지는 매생이를 시장의 좌판 혹은 밥상에서나 보는 도회지 사람들은 짐작조차 못하리라. 지주대 사이에 배를 띄우고는 배 위에 위태위태 엎드려서 차디찬 바닷물에 손을 넣어 매생이를 훑어 낸다. 한번 훑어 낸 게 고작 반의 반 줌도 안 된다. 끝없는 반복 노동이다. 그것도 아무 때나 거두는 것이 아니다. 썰물 때면 매생이가 마르고, 밀물 때면 발이 가라앉아 작업을 하지 못한다. 물때에 맞춰 수확을 해야 하는데, 그러니 시간을 가릴 수 없다. 오후 11시에 작업을 한 뒤 다시 오전 3~4시에 나와 수확을 하고 또다시 오전 7시쯤 바다로 나가는 식이다. 이러니 잠조차 편히 잘 수 없다. 겨우내 서너 시간씩 토막잠을 자야 한다. 이뿐이 아니다. 바닷물의 온도와 일조량에 맞춰 간간이 매생이발의 수심도 맞춰 줘야 하고, 수확한 매생이도 일일이 씻어 내서 출하해야 한다. 그러니 시장에서 매생이를 살 때 행여 값이 비싸다 타박할 일이 아니다.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고된 노동의 현장이지만, 장흥의 바다를 찾은 이들에게 매생이 양식장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고요한 겨울 바다 위에 수없이 꽂힌 대나무 지주는 마치 추상미술 작품을 연상케 한다. 고된 노동으로 만들어낸 다랑이 논이 조형적인 미감으로 다가오는 것과 비슷하다. 방학을 맞아 고향의 포구로 내려왔다는 한 대학생은 “고향의 바다에 당도해 매생이 양식장의 지주가 늘어선 모습을 보면 한밤중에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2t짜리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부모가 생각나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했지만, 그런 노동을 경험해 보지 못한 여행자들 입장에서는 그 풍경이 그저 아름다운 정취로 다가올 뿐이다. # 비워진 마을을 잇는 길에서 만나는 서정적인 아름다움
이중 어디를 둘러본대도 실망할 리 없겠지만, 장흥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푸근하고 따스한 옛 마을의 정취다. 투박한 돌담과 함석지붕을 이고 있는 시골집, 그리고 처마마다 걸린 메주 같은 것들이다. 이런 풍경을 만나겠다면 구태여 찾아갈 것도 없다. 국도나 지방도를 달리다가 내키는 대로 마을로 들어서면 어디서나 이런 정취는 쉽게 만날 수 있다. 여기다가 보탤 것이 하나 더 있으니, 최근 조성된 장흥댐을 끼고 도는 슬로시티 생태탐방로다. 장흥댐 상류인 유치면 신월리에서 반월리로 이어지는 15㎞의 숲길이다. 생태탐방로는 국내 최초로 슬로시티 인증을 받은 유치면 신풍리의 신풍습지공원에서 출발한다. 수변의 갈대들이 햇살에 반짝거리는 습지를 따라 장흥댐 물길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인 길이 이어진다. 한때는 너른 들이었던 습지공원을 지나서, 물이 빠진 빈터를 버드나무들이 빼곡히 채우고 있는 덕산저수지를 지나고, 지금은 사라진 집의 울타리였을 대숲이나 소박한 시골집 마당에 서 있었을 감나무, 밤나무들을 지나다 보면 옛 마을의 흔적과 사람 살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장흥댐 담수가 이뤄진 뒤에도 마지막까지 마을이 남아 있었다던 덕산마을의 집은 다 사라졌지만, 고사리 같은 양치식물과 한때 밭을 이뤘던 뽕나무들만 남아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고사를 연상케 한다. 실개천 양쪽으로 돌담을 두른 집들이 예뻤다는 돈지마을은 문순태의 소설 ‘타오르는 강’에도 등장한다. 덤재와 피재, 빈재 등 3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손바닥만 한 땅을 갈고 살았다던 주암리와 갈두마을, 금사리를 차례로 지나면서 길은 곧 유치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진다. 이 길은 빼어난 아름다움에다, 수몰민이 떠나고 난 뒤의 애잔함까지 겹쳐져 서정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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