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담아올 걸망 하나 만들다
산행을 하려면 준비할 것이 참 많다. 신발과 복장은 물론 먹을 것과 비상약품 그리고 지도까지. <뚜벅뚜벅 산사기행>이란 타이틀로 일 년쯤 좋은 산 좋은 곳에 있는 산사를 기행하려 한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웬만한 절이면 차로 갈 수 있고 주변에 음식점도 있을 테니 산행처럼 복잡한 장비들이 필요하지는 않을 듯 하다.
그냥 카메라 하나 덜렁 둘러메고 메모지만 챙기면 될 듯 싶은데 막상 기행을 시작하려니 마음이 분주해 진다. 더구나 기행하고자 하는 곳이 청정도량일 산사이기 때문에 더하다.
그래서 산행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기행에 앞서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르신인 석주스님을 찾아뵈었다. 딱히 "이건 이것이고 저건 저거다"라는 식의 문답은 없었지만 그냥 뵙고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기행에 앞선 마음다짐에 좋을듯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빈손으로 왔으며 빈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을 한문으로는 '空手來空手去'라고 표현하고, 코쟁이들은'Naked we come into this world and naked we should go'라고 표현을 하지만 속뜻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우리네 인생 본연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채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닥치는 대로 붙잡는 일인 것이다.
돈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명예와 지위 그리고 권력과 지식을 탐욕하고 이성과 학력은 물론 배경을 붙잡으려 애쓴다. 그렇듯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을 무한히 붙잡으며 이 한 세상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인 듯 하다.
무한히 붙잡는 삶!
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려고 하는 '잡음' 그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버리고자 갈망하는 괴로움(苦)이 시작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그 괴로움이란 큰 힘으로 우리의 앞을 가로막게 될 것이다. 이미 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린 괴로움과 한바탕 전쟁이라도 벌여야 한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지식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유하게 되는 많은 것들은 인연 따라 잠시 나에게 온 것뿐이지 그 어디에도 내 것이란 것은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연 따라 잠시 온 것을 '내 것'이라 하여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다. 바로 '내 것'이라고 꽉 붙잡으려는 그 속에서, 그 我相속에서 괴로움은 시작된다.
'잡음'을 통하여 내 것을 늘림으로 해서는 결코 행복은 물론 참 자유와 진리도 구할 수는 없다. 도리어 그동안 내가 얻고자 했던, 붙잡고자 했던 그것을 놓음(放下着)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놓음이 전체를 붙잡는 것이라 했다.
크게 놓아야 크게 잡을 수 있다고도 했다.
'나','내 것'이라는 울타리를 놓아버려야
진정 내면의 밝은 '참 나'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놓음!
방하착(放下着)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삶과 어쩌면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듯 느껴진다. 그렇기에 선입견을 쉽게 버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放下着'그 속에 행복의 모든 체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히 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내 것'에만 끄달려 이를 붙잡으려하는 어리석은 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라고 한다. 下라는 것은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우리의 참 마음, 한마음, 본래면목, 참 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끄달림, 걸림, 집착을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내 안 참 나의 자리에 놓으라는 것이다.
"다 놓고 나면 어떻게 하지? "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저 돌처럼 바위처럼 가만히 있어야 하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방하착'이란 着心을 놓으라는 것이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저 멍 하니 바보처럼 세상을 소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놓으라는 것이다.
세상은 마땅히 적극적으로 살아갈 일이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살아갈 일이다. 다만 마음이 한 쪽에 머물러 착(着)을 두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게으르게 사는 것은 복을 까먹는 일 일 뿐 일거다. 적극적으로 복을 짓고 순간 순간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 밝은 깨침의 마음으로 늘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방하착은 사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을 하되 '집착'이 되어선 안 된다는 말이다. 그 사람을 위해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이 떠나가더라도 그 사람이 잘 된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사랑이 아닌 '집착'이라면, 나와 함께 해서 괴롭더라도 붙잡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다는 이유로 그를 증오하고 괴롭히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바로 방하착이 아닌,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이다.
'내 여자','내 남자'라고 하는 것도 다른 '아상'일 뿐이다. 상대방이 '내 것'이라는 생각, 나 좋은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아집'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맑고 순수하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렇듯 집착을 놓아버리는 일이야말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다.
방하착…
놓고 가는 이는 아름답다.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하다.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으며,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기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항상 如如하다. 일을 하며 '내가 한다'는 생각이 끼어 들면 위험하다. 그렇기에 그 마음 '내가 한다'고 하는 그 아상, 아집을 놓고 하라는 것이다.
'방하착'엔 내가 한다는 마음이 없기에 설령 괴로운 경계가 닥치더라도 괴로움의 주체가 없기에 하나도 괴로울 게 없다. 내가 괴로워야 하는데 아상을 놓았으니 괴롭지 않은 것이다. 아니 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다만 '괴로움'이란 현상만 있을 뿐 내가 괴롭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나를 놓고 나면 이렇게 자유롭다.
방하착!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석주 큰스님의 법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마음, 방하착 마음으로 산사기행을 시작한다. 둘러멘 걸망에 탁발을 하듯 모아온 산사 이야기를 하나 하나 풀어놓을 때 '방하착' 의 마음으로 보아주기 바란다.
산세나 지형을 보고 "와우형=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니 "옥녀단좌형=여자가 앉아 있는 형상" 또는 "선인독서형=선비가 책을 읽고 있는 형상"등으로 주변을 연상하기에 충분한 명칭이 많다는 것에 놀랄 때가 많다.
풍수지리나 공간개념이 남다르지 못해 잘은 모르지만 보련산(寶蓮山)을 보는 순간 이름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연꽃 형상의 산임을 알 수 있다.
보련산 형상이 꼭 연꽃과 같다. 원만히 둥글둥글한 주변의 산세가 꽃잎처럼 겹겹이 빙 둘러져 있다.
이런 연꽃 산세의 꽃술자리에 3층 목탑이 자리하고 있으니 이곳이 바로 보련산 보탑사(寶塔寺)다.
보탑사가 없다면 보련산은 자칫 꽃술 없는 연꽃이 될 뻔하였는데 보탑사가 자리하므로 완전한 연꽃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차를 세우고 한 두 번쯤 묻거나 지도를 이용하여 김유신 장군 탄생지를 찾으면 이미 보탑사에 들어선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장군 탄생지는, 산사람이 살기에 제일 좋다고 하여 붙여진 "생거진천"인 진천에 있고, 그 곳에서 계곡을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위쪽에 보탑사가 있다.
숯 터에서 솟아나는 뽀얀 연기에 섞인 참숯냄새가 공해에 둔감해진 후각을 깔끔하게 닦아주며 여유가 생길 심신을 준비해 준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차를 몰다보면 좌측으로 눈길을 유혹하는 호수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솔바람에 흔들리는 노송과 계곡을 흐르는 물결소리가 하모니를 이루어 시각과 청각을 통해 마음에 넓은 마당하나 마련해 준다.
보탑사는 3년에 걸친 시공으로 1996년 6월 9일 완공되었으며 높이가 42.17m나 되는 3층 목탑으로 총 1백 51.87평 규모라고 한다. 규모에 있어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황룡사 9층탑의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보탑사가 고건축사에서 갖는 의미는 황룡사 이후 사람이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최초의 건물이란 점이다.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이어 짜 올린 이 건물은 20세기까지 축적된 한국 고건축 기법을 총망라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한다.
보탑사 경내에는 보탑 외에 500 나한님이 모셔진 영산전, 지장보살을 모셔 놓은 지장전과 와불이 모셔진 적조전 그리고 산신각이 있다. 그리고 삼베를 입은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단청이 되지 않은 전통한옥 형태의 요사채 해행당이 있다. 얼마 전 완공된 수련원 옥상에서 뱅글뱅글 돌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의 절묘함을 체험할 수 있으며 보물 404호인 백비도 함께 볼 수 있다.
재수가 좋으면 보탑사 구석구석에 손길과 눈길을 준 김 상무님을 만나 보탑에 담겨있는 고건축의 다양한 기법과 숨은 이야기를 동화처럼 들을 수 있다.
고건축을 공부하고,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한 번쯤 가 보아야 할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범종각과 법고각이 완공되는 오는 10월 3일 보탑사에서는, 10년이 훨씬 넘게 진행되었던 불사를 마무리하는 회향식을 갖는다고 한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2) 법주사
2만 1300돈중 황금 옷을 입은 미륵부처님
그런 속리산 법주사엘 가면 높이가 33m나 되는 황금 미륵불을 볼 수 있다. 이 미륵대불에 입힌 황금의 무게가 2만 1300돈중으로 공사비가 무려 12억원이나 소요되었다고 한다.
볼거리를 조금 지나 그 웅장한 대불에 어떻게 개금을 하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1년 이상을 관심 있게 지켜보며 모아온 사진과 함께 그 궁금증의 답을 여성들 화장에서 얻었다. 법주사를 들르게 되었을 때 황금 미륵불을 보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갑자기 누군가가 곱게 화장을 한 여성이나 남성에게 "화장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뭐라고 답을 할까 참 궁금하다. 십중팔구는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 decorative function"라고 쉽게 답할 것이다. 이어서, "그리고 또?"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
법주사 청동미륵대불은 그 규모가 한꺼번에 주조를 하지 못하고 분할주조법을 이용하여야 했을 정도로 높이가 33m나 되어 산더미처럼 웅장하다.
그렇게 웅장한 대불에 금박을 입히는 어마어마한 공사가 1년이 넘게 진행되다 드디어 끝을 맺게 되는 경사스런 날이었다.
법주사 청동미륵대불 개금불사는 일반적으로 실내에 모셔지는 부처님들의 개금불사와는 달리 전해질 수용액 속에서 이루어지는 "습식도금"이라고 하는 공법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
법주사 미륵대불이 이렇게 실내에 모셔진 부처님들과는 달리 특수한 공법으로 개금이 된 것은, 아무래도 미륵대불은 사시사철 실외에 계셔야 하다보니 실내에 모셔진 부처님들보다는 비, 바람, 직사광선, 우박, 심한 일기오차 등에 직접 노출되는 혹독한 조건에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도금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용기에 도금액을 가득 채우고 그 안에 도금을 하고자 하는 물체를 담그고 여기에 전기를 통해 주면 전기화학적인 반응에 의하여 제품의 표면에 도금막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주사 미륵대불도 커다란 용기에 금 도금액을 채우고 그 안에 미륵대불을 넣어서 도금을 하였단 말인가? 그렇게 하려면 미륵대불 보다 훨씬 큰 용기가 있어야 하고, 그 용기를 가득 채울 금 도금액이 준비되었어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커다란 용기에 가득 채울 금 도금액을 만들려면 도금액의 제조에 소용될 시약이 족히 수십억에서 수백억원어치는 필요하였을 거다
그런데 미륵부처님에 대한 개금불사 기간동안 법주사를 찾았던 어느 사람도 미륵부처님이 커다란 용기에 들어가신 것을 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큰 용기가 준비되어 있는 것조차 구경을 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법주사 미륵부처님은 어떻게 개금을 하였을까?
일반적으로 화장을 하는 순서는 이럴 것이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면 세수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세수를 할 때는 그냥 물에 얼굴만을 담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을 끼얹으면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이 행동은 그냥 물에 얼굴만을 담그고 있어서는 얼굴에 묻어있는 눈곱이나 침 자국 그리고 밤새 배어 나온 유지분(기름기)들이 잘 지위지지 않거나 그 것들을 제거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기계적인 운동을 가하여 이런 것들을 빨리 제거하고자 하는 본능적 행동이다.
우리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는 것만 아니라 비누라는 것도 사용한다.
비누를 사용하는 이유 또한 비누의 검화작용(화학적 분해능)을 이용하여 얼굴에 있는 이물질을 보다 빨리 그리고 보다 깨끗하게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다.
이렇게 세수가 끝나면 이어서 클렌징이다 뭐다 해서 몇몇 과정을 더 거쳐 기초화장을 하게 된다.
하여튼 이런 저런 과정을 포함하여 기초 화장을 하게 되는 이유는 한 마디로 본 화장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이다. (화장을 잘 받게 하기 위해서.)
본 화장을 할 때는 목적과 용도에 따라서 달라진다. 화장의 목적이 일상적인 화장이냐 아니면 외출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더 나아가 맞선을 보러나간다거나 신부화장이냐에 따라 종류와 두께가 달라지듯이 말이다.
도금의 공정과 목적도 화장의 공정 및 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금하고자 하는 물체가 있으면 이 물체에 묻어 있는 이물질들을 깨끗하게 제거하여야 한다.
사람들이 얼굴에 물을 뿌리며 손으로 문질렀듯 도금을 하고자 하는 제품도 사포 등을 이용하여 표면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곱게 다듬는다. 그리고 역시 사람들이 세숫비누를 사용하였듯이 도금에서도 화공약품들을 이용하여 조그만 이물질들도 완전하게 제거한다.
그러고 난 다음에 기초화장을 하듯 제품의 표면에 하지도금(下地鍍金)을 해주고 그 위에 목적 도금을 해 주게 된다.
법주사 미륵대불 개금불사에서 기초화장에 해당하는 하지(下地)도금으론 Ni도금이 이루어 졌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자. 태산만큼이나 웅장한 미륵부처님은 어떻게 개금(도금)을 하였을까?
우리가 화장을 할 때 정상적인 상태라면 욕실에서 세면대나 세숫대야를 이용하여 세수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예를 들어 병석에 누워 있을 때처럼 특수한 경우에는 세숫대야에 물을 채우는 대신 타올이나 거즈에 물을 묻혀서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는 방법도 생각 할 수 있다.
여기서 미륵대불의 도금 공법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듯 하다.
전기도금은 도금을 하고자 하는 물체를 전기적으로 음(-)이 되게 한다. 그리고 전기적으로 양(+)을 갖는 극판을 설치한다. 양극과 음극은 도금하고자 하는 금속(금 이온)이 수용되어 있어 전기를 통하게 해줄 수 있는 전해질 수용액이 채워진 용기 안에 설치된다.
전해질 수용액에는 전기적으로 양(+)의 성질을 띤 양이온 금속(Au 양이온)이 있게 마련인데 여기에 전기를 통해주면 음(-)의 상태인 피도금체(미륵대불) 표면에 금 이온이 환원되면서 도금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도금에서 음양이 짝을 맺게 하는 통로는 전해질수용액(물)이다. 그런데 법주사 미륵대불 개금(도금)에는 물을 담을 만한 용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개금(도금)을 하였단 말인가?
좀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부부의 정상적인 생활이 아닌, 예를 들면 인공수정에 의해서도 아기를 임신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을 옮기거나 간직하는데 용기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앞에서 설명한, 병자에게 세수를 시킬 때처럼 수건이나 스폰지를 이용하여 저장하거나 옮기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왜 개금을 하였을까?
여성들이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화장을 한다"고 하듯이 미륵부처님도 건립된 지 오래되어 색이 변하고 보기 흉해지니까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만 개금을 하였을까?
그게 개금 목적의 전부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여성분들에게 다시 한 번 또 "화장을 왜 하느냐"고 묻고 싶다. 현명하게 답을 하든 못하든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보호기능 = protect function"이다.
화장을 하는 이유의 또 다른 하나의 답은 바로 이 "보호기능"이다.
즉, 어여쁘고 보드라운 피부가 거칠어지고 노화되는 것을 방지하거나 최소화시키기 위한 역할이다.
이 기능, 보호기능은 "예뻐지기 위한" 이유보다 결코 가벼이 취급되거나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다.
즉 화장을 하므로 예뻐 보이기도 하지만 화장을 하므로 그 예쁨과 탄력을 오랫동안 유지 할 수 있듯이 개금불사를 하는 이유도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미륵부처님에 개금을 하므로 우선 부처님이 존엄해 보이고 그 존엄한 외양이 변색되거나 부식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개금을 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여성들이 화장을 하는 이유, 생활용품에 도금을 하는 이유 그리고 부처님께 개금을 하는 이유를 우리에게서 찾는다면 결국 우리 모두는 상중생(狀衆生)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으로 말하고 싶다. 그 비싼 황금을,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하면서 미륵부처에 황금을 입힌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기자의 소견을 밝히고 싶다.
비록 공사금액이 12억원이나 들어갔다 하여도 그 미륵불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온을 찾고 위안을 찾는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리듬에 실린 염불소리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그런 분위기임은 분명하다.
집 한 채, 마을 하나 볼 수 없는 한적한 산길을 따라 10여분 가게 되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갈라진 길은 멀지 않게 다시 합쳐지기 때문에 관음사를 가는 길은 어느 곳으로 가도 된다.
흐르던 용암이 그대로 굳어버린, 금방이라도 다시 흐를 것 같은 형상에서부터 온갖 형태의 검은색 돌들이 천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 제주도다.
그 쌓여진 폼 새가 금방 무너질 것 같지만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 것이 제주도 돌담이다. 밭 가장자리에 쌓여진 돌담은 제주도 아낙들의 애환이기도 하단다.
지금이야 상황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생활력이 강한 제주도 아낙들이 돌무덤 같던 황무지를 밭으로 가꾸면서 밭에서 주워낸 돌을 쌓은 것이 돌담이 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제주도엔 돌이 엄청나게 많고 그 돌들은 대부분 현무암이다.
관음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본사로 제주도 제주시 아라동 387번지 한라산 중턱인 해발 65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제주도를 관광하는 많은 사람들이 빠트리지 않고 찾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도깨비 도로가 아닐까 생각된다. 과학적으로야 그것이 착시에 의한 것이든 뭐든 도깨비에 홀린 듯 분명 오르막길임에도 물이 거꾸로 올라가고 자동차가 거구로 기어올라가는 도로가 바로 도깨비 도로다.
주차장에 적당히 주차를 하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다시 한번 제주도의 현무암을 실감하게 된다. 키보다 훨씬 높게 현무암으로 쌓여진 제단 형태의 돌담에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수백의 불상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불이문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영지가 있고 그 뒤쪽으로 범종각이 있다.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우측에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은 지장전이라고도 표현하며 지장보살님이 모셔진 법당이다. 명부전 안쪽으로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가 있다.
범종각과 대웅전 사이에 있던, 얼마 전 까지만 하여도 그곳에 있었던 커다란 현무암으로 만들어 진 보현보살상과 문수보살상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삼성각이 세워져 있던 자리로 옮겨져 있다. 대웅전 왼쪽으로 조금 올라간 자리에 영산전이 있으며 그 좌측 상단으로 문수, 보현보살상이 옮겨진 것이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오른쪽으로 약간 돌아 범종각 앞길로 들어서면 일주문 쪽을 향한 길이 있는데, 그 곳에서도 높다란 제단에 모셔진 수 십 개의 현무암 불상을 대하며 걷게 된다. 오른쪽에는 스님들의 사리를 봉안해 놓은 부도가 모여 있는 부도군이 있다.
관음사를 돌아보고 나오면 산록도로(山麓道路)를 따라 어디고 이동하게 된다. 산록도로란 말 그대로 "산기슭 도로"를 말하겠지만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슴(鹿)들이 살 수 있는 수풀 속 자연 도로라고 말 할 수 있겠다.
도로의 운치를 느낄 수 있도록 도로 명을 산록으로 지정하여 사용하고 있음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지혜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산 속의 길이야 어느 곳에서도 푸르겠지만 특히 이곳 산색이 아름답기에, 명산의 푸르름이 한결 같기에 너무도 잘 어울리기에 그냥 도로명칭이 산록도로라고 설명해도 될 듯 싶다.
직접 눈으론 볼 수 없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넘실대고 있을 파도와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을 한라산 녹음 속에 자리한 관음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관음사는 제주도의 30여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다. 제주에 잡신이 많다 하여 조선 숙종 때 제주 목사였던 이형상(李衡祥)이 많은 사당과 함께 사찰 500동을 폐사 하였을 때 폐허가 되었으며 창건자 및 창건 연대는 미상이라고 한다.
현재의 관음사는 비구니 안봉려관(安逢麗觀)이 승려 영봉(靈峰)과 도월거사(道月居士)의 도움으로 1912년에 창건한 것이다. 처음에는 법정암(法井庵:관음사의 전신)이라 하였으며 창건 당시 불상과 탱화는 용화사(龍華寺)와 광산사(匡山寺)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의 12개 사찰 중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으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제주도 4·3사건(1948년) 말기 유격대와 군 토벌대의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하며, 군 주둔지로 이용되기도 하여 제주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토벌대에 의해 모두 소실된 것을 1968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마라도 기원정사
오름이란 제주화산도상에 산재해 있는 기생화산구를 말한다. 오름의 어원은 자그마한 산을 말하는 제주도 방언으로서 한라산체의 산록상에서 만들어진 개개의 분화구를 갖고 있는 소화산체를 의미한다. 오름은 분화구를 갖고 있고 내용물이 화산쇄설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산구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 임윤수
제주의 서쪽 끝에 있는 송악산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두 개의 섬이 있으니, 좀더 크며 가까이 있는 섬이 가파도이며 좀더 멀리 조그마하게 보이는 섬이 마라도이다.
마라도는 우리나라 국토의 최남단이다. 대한민국의 영토 중 흙이 존재하는, 인간들이 발로 밟고 일어설 수 있는 제일 남쪽 끝 땅이다. 마라도는 섬 전체 면적이 약10만평 정도이고 섬을 빙 돌게되는 해안선의 길이가 십리 조금 넘는, 도보로 1시간쯤이면 넉넉하게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섬이다.
마라도는 길쭉한 타원형으로 마치 한 척의 항공모함을 연상케 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그 둘레에 마치 운동장 트랙처럼 포장된 도로가 있다. 위에서 보면 타원형의 형체지만 옆에서 보면 마치 떡시루를 엎어놓은 듯한 형태이다. 바다 가운데 붕 떠있는 듯해 섬이 파도 따라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가져올 때도 있다.
기자가 20여년 전 마라도에서 잠시 생활을 할 때와 지금의 마라도는 영 달라져있다. 하기야 강산이 두 번은 바뀔 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제주도의 모습이 20여 년 전 마라도에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였다. 굵직한 동아 밧줄로, 마치 그물처럼 촘촘하게 얽은 지붕의 모습이 그렇고,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었을 정도로 낮은 집 구조가 그렇다. 요즘 제주도의 민속촌이나 민속마을의 그것들에선 왠지 억지부린 장사꾼 냄새가 난다.
가끔 소개되는 제주도 민속놀이 중 빠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이어도 타령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어도 타령에 나오는 전설의 섬 이어도는 마라도 앞쪽에 있다는, 말 그대로 전설의 섬이었다.
제주의 여인들에게 이어도는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혼이 잠든 곳이며 결국 자신도 님을 따라 찾아가야 될 곳으로 믿는 전설의 섬이었다. 다시 돌아오지는 못하지만 사시사철 먹거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 여겼던 이어도는 지겹도록 고달픈 이승의 삶을 떠나 제주도 여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꿈의 섬일지도 모른다.
소설 <이어도>에서는 '긴긴 세월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이어도를 말하고 있다. 그렇게 이어도는 전설의 섬이자 보이지 않는 상상 속의 섬이었다.
얼마전 이어도에 첨단 해양과학기지가 들어섬으로써 이어도는 더 이상 전설의 섬이 아닌 현실의 섬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400평에 불과한 작은 해양기지이지만 이어도는 동중국해의 어업 전진기지가 될 축복의 장소로 변했다고 한다.
전설 속에 머물던 이어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여전히 구원과 복을 주는 피안의 장소로 마라도 사람들에겐 기억될 것이다.
애환 가득한 마라도 여인네들의 한을 달래고 영혼을 구원해 주며 넉넉한 마음으로 복을 주는 피안의 장소로 인도하려는 듯 작은 섬 한국의 최남단 마라도에도 기원정사라는 절이 있다.
제대로 된 일주문 하나 없이, 바닷가를 걷던 해안 길에서 그냥 들어서게 되지만 기원정사에는 은은함과 웅장한 타음을 담은 범종이 아침저녁으로 영락없이 타종된다. 철썩이는 파도와 기암절벽을 이룬 작은 섬에서 뎅∼ 뎅∼하고 울려 퍼지는 범종소리는 마라도 사람들에게 삶의 애환을 달래 줄 어머니의 젖무덤 같은 그런 푸근함으로 느껴질 듯 하다.
범종각을 지나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게 되면 한국 최남단에 자리하고 계신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불자들과 창건주 법우스님의 기원을 담아 1987년 봉안되었으며 그 염원을 이루려는 듯 북쪽을 향하여 자비로운 모습으로 서 계신다.
대웅전에서 몇 걸음만 더 나가면 망망대해 바다뿐인 이곳에도 통일을 염원하며 서 계신 관세음보살님이 은은한 불심을 피워내고 있다.
세계적 불교계 지도자 중의 한 분인 틱낫한 스님은 화를 다스리고 행복을 찾는 방법 중의 하나로 걷는 명상을 말씀하신다. 유람선을 타고 쫓기듯 둘러보는 마라도 기원정사는 조금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루나 이틀쯤 그 곳에 머물며 아침저녁으로 섬 전체를 빙 둘러보며 명상의 시간을 갖게 된다면 속세의 모든 근심을 씻을 수 있을 것 같다.
쫓기지 않는 마음으로 뚜벅뚜벅 섬 벼랑 위를 걷는 여유에서 넉넉한 행복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산사이야기(5) 지리산 서암정사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그런 법당이 굴속에88고속도로 지리산 IC를 나와 60번 지방도를 타고 칠선 계곡 쪽으로 간다. 뭇 남정네들의 꿈이며 선망의 대상일지도 모르고, 아줌마들의 흥건한 농담에 숨겨 나올 법하여 한번씩은 꿈에서라도 흥얼거려 보았을지 모를 변강쇠타령의 발상지인 백장공원(변강쇠 옹녀공원)을 지나게 된다. 그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게 되면 개울 건너 평평한 논 가운데 느티나무와 어우러진 실상사가 보인다.
실상사는 행정구역상으로 전라북도 남원시에 속한다. 실상사 건너쪽인 60번 지방도를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알게 모르게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땅으로 들어서게 된다. 마천면은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들어서는 입구이기도 하다. 지리산이라는 웅장한 이름에 걸맞게, 자락에 거느린 수많은 계곡과 산동네 중의 하나인 칠선 계곡 쪽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면소재지를 지나 아치형 교각의 다리를 건너 오른쪽 계곡으로 조금 더 들어가게 된다. 길과 나란한 계곡이 마음을 유혹한다. 쉬었다 가라고, 큼직한 바위에 엉덩이 얹고 물에 발 한 번 담가 보라고 유혹한다. 산비탈 밭 두렁에 가지런한 벌통에서 지리산 토종꿀의 달콤함이 눈 맛으로 느껴진다. 흘끔흘끔 눈길주며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왼쪽 비탈 쪽에 벽송사 안내판이 보인다. 지리산 IC부터 이곳까지는 약 18Km가 되는 듯 하다.
차를 세워놓고 200여 미터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좌측에 <同歸大海一味水> 우측에 <百年江河萬溪流>란 글씨가 또렷하게 각인 된, 장승처럼 우뚝 선 바위기둥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몇 걸음만 더 들어가면 다시 두 개의 돌기둥이 나타난다. 왼쪽 기둥엔 <調御三千界> 그리고 오른쪽 돌기둥엔 <摩詞大法王> 라고 쓰여있다. 이 돌기둥들이 일주문이며 해탈문이나 불이문쯤 되는가 보다.
참배객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다 보면 키가 5m도 훨씬 넘는 우람한 사천왕상들이 우측 절벽에 일렬로 즐비해 있다. 여느 절들처럼 천왕문에 나란히 두 분씩 서 계신 것이 아니라 큰 바위에 입체적으로 나란히 조각되어 있다.
비록 많은 절들의 사천왕처럼 알록달록한 단청은 되어 있지 않지만 사천왕들의 부릅뜬 눈과 역동적 몸 동작 그리고 바위의 묵직함이 속세에서 묻혀온 잡된 생각과 허황 된 망상들을 다 달아나게 할 듯 하다.
합장삼배하고 고개를 드니 무지개형태의 아치형 문 위에 "대방광문(大方廣門)"이라 쓰여진 돌로 된 큼직한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협곡 같은 입구를 따라 몇 걸음 더 걸으면 대방광문을 지나 화엄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고 보니 주변이 온통 큼직큼직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쯤에서 그럴싸한 전각이 나타날 만도 한데 그렇지 않다. 멀지 않은 곳에 여염집 사랑채 같은 그런 한옥건물이 하나 보일 뿐이다.
건물 벽에 방하제연(放下諸緣)이라고 써진 팻말이 붙어 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세속의 구연과 근심, 미련과 시기심 그리고 달콤했던 유희적 감각조차 다 떨구라는 뜻인가 보다. 정면에 미타전이라고 쓰여진 편액이 걸려있을 뿐 흡사 오래된 한옥의 가정집 같은 분위기다.
미타전 편액이 붙은 한옥 앞을 지나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저만치 봉긋한 언덕 같은 곳에 극락전(極樂殿)이란 글씨가 보이고 창문이 보인다. 언덕 주변이 참 잘 가꾸어져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겨우 정신 차려 합장삼배 올리고 휘둥그레진 눈에 초점을 모아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자연 동굴을 이루고 있는 바위의 사방과 천장에조차 온통 부처님과 불보살 그리고 그 권속들이 조각되어 있고 그 부처님과 불보살님들의 눈길이 모두 내게 쏟아지는 듯 하다.
굴법당 극락전은 들어서기만 해도 환희심이 넘칠 정도로 굴 전체가 섬세한 조각으로 장엄 된 아미타세계다. 아미타부처님을 중앙에 모시고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 그리고 8대 보살님들과 10대 제자, 나한, 사천왕 등은 물론 용, 연꽃 가릉빈가(迦陵頻伽) 등이 굴법당 벽과 천장 전체를 빈틈없이 빼곡이 메우고 있다.
석굴암과 비교를 한다는 것이 역사성으론 어불성설일지 모르나 장엄함이나 정교함과 섬세함이 석굴암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입구 제일 안쪽에 있는 지장보살님이 들고 있는 지팡이만 보아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섬세하다. 지장보살님의 손에 들려있는 구슬은 유난히 검은 색 광채를 띄고 있다. 그 옥구슬만은 다른 돌로 가공을 하여 얹어 놓은 것이려니 하였더니 그 또한 지장보살님과 일체를 이루고있는 원석에서 가공된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돌들이야 아무리 공을 들여 갈아봤자 빛이 나지 않지만 마천석재는 돌 자체가 옥 성분이라서 원하는 형상으로 가공하여 곱게 갈아주면 옥 특유의 광택을 내게 된다고 한다. 지장보살님의 손에 들고 있는 구슬은 바로 그렇게, 곱게 다듬고 갈아서 만들어 진 것이다.
굴법당이 이곳 서암정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서암정사 굴법당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되는 것은 서암의 모든 불상과 조각품들은 있는 그대로의 돌에 입체적으로 조각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른 돌로 조각을 하여 붙였거나 세운 것이 아니라 돌 하나로 부처님도 만들고, 부처님이 들고 있는 장엄물들도 조각하였다는 점이다.
불경스럽게도 의구심이 많은 기자는 구석구석을 세세히 살펴보았다. 혹시 조각을 하여 붙인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못 미더움을 떨구지 못한 채.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원석에 입체적으로 조각을 한 것일 뿐이다.
돌에도 무늬가 있다. 돌을 붙이거나 덧대면 무늬가 어긋나기 십상이며 이음 부분에는 아무래도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아무리 찾아보고 살펴보아도 완전한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음이 틀림없다. 이쯤에서 "나무 아미타불"을 경송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삼각을 이루고 있는 네 개의 커다란 자연석 제일 위쪽에 비로자나부처님이 조각되어 있고 이 돌을 받치고 있는 아래 세 개의 돌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그리고 선재동자가 조각되어 있다.
비로전 입구, 비로자나부처님 좌측 커다란 바위엔 역시 산신님과 독성님이 살아계신듯 조각되어 있다. 산신님이 거느리고 있는 호랑이의 콧수염이 움직이고, 독성님 옆 꽃사슴의 숨결소리가 들릴 듯 조각들이 섬세하다.
서암을 만들고자 원을 세우고 원력을 모은 분은 원웅(元應)스님이지만 그 일을 받들어 10여 년 동안 동굴에 부처님과 불보살 그리고 그 권속들을 조각한 사람은 홍덕희라는 분이라고 한다. 원웅스님이 밑그림을 그리면 석공 홍덕희님이 정으로 한뜸한뜸 자수를 하듯 조각을 하였다고 한다.
서암정사는 주지인 원응스님께서 1960년 초 벽송사로 오시면서 원력을 세워 현재 40여 년째 진행되고 있는 원력 불사의 결정체라고 한다.
6·25때 지리산에서 무고히 죽어간 수많은 원혼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기원하며 아직도 대치하고 있는 남북한의 화합과 통일을 기원하고자 불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좀체 수그러들지 않아 민심을 피폐케 하고 있는 동서 지역감정의 발로가 되는 모든 이기심과 분열을 없애고 부처님의 품안처럼 평안하고 자비심으로 살자는 마음에서 발원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서암엘 가면 볼 것도 많고 놀랄 것도 많다. 굴피로 지붕을 이은 토속집도 볼 수 있고 답답하고 세파에 찌들어 눅눅해진 마음을 후려하게 해줄 건너 쪽 지리산과 계곡도 한눈에 넣을 수 있다.
전문가들도 쉽게 구분하지 못 할 정도로 정교하게 위조와 복사가 가능한 것이 요즘 디지털장비이며 기술이다. 그러나 그 어떤 디지털장비와 기술로도 감히 연출하지 못할 장엄한 부처님 나라를 굴속에 새겨 넣고 혼을 불어 놓은 것은 역시 인간들의 숭고한 정신이고, 하늘도 탄복하고 부처님도 감탄시킬 수 있는 혼신을 다한 지성(至誠) 이라고 생각된다.
바람조차 술술 빠져나갈 걸망이지만 육감을 감탄케 하는 서암에 깃 든 불심과 사람들의 정성을 한 걸망 담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떨굴 수 없다. 이 또한 탐심임을 알기에 허허한 마음으로 뚜벅뚜벅 대방광문을 다시 나섰다.
반문이 끊이질 않는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 가능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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