뺑소니 사고 후유증
사람은 인도로 다니고 차는 차도로 다닌다. 그럼 영가는 어떤 길로 다닐까? 따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영가는 확실히 인도를 선호한다. 살아생전 다니던 길이라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도에도 영가는 있다. 그러나 만나는 곳은 대충 정해져 있는 편. 차를 타고 지나가다 유난히 영가들이 많이 모여있다 싶으면 어김없이 ‘교통사고 다발지역’이란 문구가 눈에 띄고,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여자 영가와 눈이 딱 마주치고 나면, 사거리엔 “뺑소니 목격자를 찾습니다.‘는 현수막이 대문짝처럼 크게 걸려 있는 것이 다반사.
특히 뺑소니 영가들의 경우는 그 주변 도로를 떠나지 못하고 억울함을 호소해 내 마음을 울리곤 한다. 나는 그런 도로를 지날 때마다 영가들을 위해 정성껏 기도를 올려주는 것으로 마음을 다하지만 이것으로 그들의 억울함은 끝나지 않는 듯 싶다.
젊은 부부가 나를 찾아와 “법사님, 저희 집엔 유난히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분명 사연이 있을 듯 싶어 구명시식을 올리고 싶은데요.” 남편 분의 말에 나는 “집안의 여자 분들에게도 무슨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못할 문제가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며칠 뒤 그 부부의 구명시식 날짜가 잡히자마자 나는 갑자기 정신이 예민해지고 몸이 무거워지는 등 영매로서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영가가 오려고 이렇게 힘들어지는 걸까?’
그 의문은 구명시식이 시작되자마자 현실로 나타났다. ‘우당탕’ 정중한 제의를 올리는 자리에서 굉음이 나기 시작하더니, 구명시식에 초대받지 않은 채 미리 와 있던 여자 영가가 법당안에 있던 음식 등을 내팽개치며 난동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구명시식에 참석한 다른 가족들도 이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분들도 분명 제사상 쪽에서 난 굉음을 들었던 것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제사상 쪽을 향해 소리쳤다. “알았습니다. 이제 한을 풀어 드릴 테니 조용히 하고 계십시오.”
그러자 소란을 피던 여자 영가는 “내가 가만있게 생겼습니까? 저기 저 사람 아버지가 나를 치고 그 자리에서 도망갔어요. 난 그때 겨우 스물다섯이었다구요.”하고 소리치며, 젊은 부부의 아버지 영가를 향해 갖은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나는 그 젊은 부부를 불러 “아버님께서 예전에 운전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자 “네, 중부권 쪽에서 화물차를 운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인 영자 영가를 한 번 보고는 “그때 아버님께서 뺑소니 사고를 낸 모양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아버님의 차에 쳐 돌아가신 여자 영가께서 오셨으니, 사죄 드리고 한을 풀어드리십시오.”
“네?” 그는 놀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버님께선 병든 할머니를 혼자서 부양해야만 하는 처지였기에, 아마도 그런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으나 아버님께서도 지금은 돌아가셨고 저희 집안 어른들도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저희도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제 저희 집안을 용서해주시고 부디 좋은 곳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의 진심 어린 말에 여자 영가는 응어리졌던 원한을 조금이나마 풀고는 깊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원한이 풀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어야 했는지……. 순간의 실수로 저질렀던 뺑소니는 가족을 멸문 직전으로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도 차를 타고 시내로 가면 만나게 될 영가들. 그들도 복잡하고 공해 많은 차도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좋은 곳으로 천도되길 바란다.
빙의의 미스터리
빙의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빙의란 쉽게 말해 구천을 떠도는 영가가 다른 이의 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얼마 전 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빙의에 대해 추적한 바가 있는데 참 재미있는 바를 관찰했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모씨가 빙의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빙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던 환자들이 서서히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모습을 드러낸다. 목소리가 달라진다든지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비단 다큐프로그램 안에서만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다. 나에겐 빙의환자들이 꽤 익숙하기 때문이다. 빙의된 분들을 고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주로 구명시식을 통해 그 영가를 잘 달래어 천도하는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몇 년 전 내게 찾아온 J씨는 성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갖고 있었다. 마흔이 다 되도록 이 병을 고치기 위해 한의원과 비뇨기과를 제 집 드나들 듯 했건만 그 병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나를 찾아와 “법사님, 제발 남자된 보람을 찾게 해 주십시오! 저는 정말 밤이 무섭고 괴롭습니다.”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순간, 나는 그의 모에 다른 영가가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됐다. 그것도 20년 전에 죽은 그의 백부 영가가…….
그의 백부는 당시 첩과 살다가 그녀에게 남자의 심벌이 잘려 비참하게 세상을 하직했지만, 이런 억울하고 비통한 사연 때문에 구천을 떠돌다 어린 조카에게 빙의되어 천도될 날만 기다려 왔던 것.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J씨는 마음에 드는 여자와 멋진 밤을 한 번 보내고자 해도 심벌이 잘린 백부의 영가가 빙의되어 마음껏 제 뜻을 펴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여하튼 구명시식을 통해 나는 그의 백부 영가를 정성껏 천도해 드렸고, 그 이후 J씨는 “드디어 남자가 됐습니다! 법사님 덕에 멋진 성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며 나를 찾아와 그간의 성생활 경험담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이처럼 빙의 환자는 현대의술로는 고쳐지지 않는 병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 J씨의 경우도 그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이상이 있었던 것은 백부의 영가이지 그의 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빙의로 인한 병은 주위에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세칭 병원에서도 낫지 않는 병이 그것이다. 특히 정신병에 오랫동안 시달린 환자 분들의 경우는 이를 한 번쯤은 의심해보셨으면 한다. 최근 늘어나는 치매환자도 예외는 아니다.
치매에는 뇌혈관성 치매와 알츠하이머 치매가 있으나 그 원인이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다. 구명시식을 하다 보면 치매 때문에 오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 중 다른 영가가 빙의되어 치매가 발병하는 경우를 꽤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정신이 혼미하고 육체가 허약해지니 영가들이 쉽게 들어올 수밖에……. 치매 환자들을 보면 시도 때도 없이 “배고파. 밥 줘.”하며 밥을 달라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는 구천에서 떠도는 영가들 중에는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해 굶주린 영가들이 많아 환자를 통해 공복감을 달래기 위해서다.
계속해서 연구되어야 할 빙의. 영혼의 세계에 대해 무심한 의학계에서는 이를 연구조차 하려하지 않지만 만약 의학의 시발점을 육체가 아닌 영혼으로 둔다면 불치의 병은 더욱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녀 영가의 특별한 선물
5월 달엔 유난히 선물 줄 일이 많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무슨 날이 그렇게도 많은지 줄줄이 선물이다. 그렇게도 선물을 많이 사고, 또 많이 줘봐도 막상 선물 한 번 장만하려면 언제나 골칫거리. 하지만 선물 받는 사람은 뭘 받아도 기분 좋긴 매 한 가지가 아닐까.
내게도 선물에 대한 특별한 사건이 있다. 그것도 미녀 영가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받은 놀라운 사건이…….
미녀 영가인 C의 남편이 내게 찾아온 것은 몇 년 전 일이다.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 C를 그리워하다 단 한 마디라도 좋으니 그녀와 말을 할 수 있게 해달라며 나를 찾아왔다. C라는 여인은 명문가 출신으로 명문대를 나와 미술분야의 박사학위까지 있는 엘리트 여성이었지만, 결혼 후 행복을 느낄 무렵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나는 남편을 위로하며 구명시식으로 그녀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 전했고, 마침내 구명시식이 시작되자 우리는 모두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당신 잘 있었어요? 고마워요. 나를 불러줘서…….” C 영가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남편에게 그녀가 왔음을 전하자 남편은 눈물만 흘리며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면서 변함 없는 사랑을 고백했고 두 사람의 만남이 절정에 달하자 그녀는 “법사님, 정말 감사 드려요. 이렇게 행복한 적은 처음이에요. 제가 감사의 표시로 법사님께 큰 선물을 드릴게요.”하며 법당 안에 환한 향기를 뿌리는 것이었다. 그때의 그 묘한 향기는 나뿐 아니라 법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맡아 그 신비함을 더했다.
이쯤 되자 나는 ‘아, 그녀가 준 선물은 바로 이런 천상의 향기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에 영매로서 뿌듯함을 느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준 선물은 이보다 더 큰 것임을 알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우연히 모 언론사 사장님 댁에 초대를 받아 그 댁 앞에서 길을 건너는데, 갑자기 작은 소형차가 내 뒤에서 끼익 소리를 내며 서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나는 그만 그 차에 발뒤꿈치를 살짝 부딪힌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 심하지 않아 운전자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아무렇지도 않게 사장님 댁에서 식사 대접을 받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발이 붓더니 종아리 부분의 근육이 놀라 경련까지 일으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근육통 마사지를 받기로 하고 전문적으로 마사지를 하는 곳을 방문해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갑자기 잠든 나를 누군가가 “법사님, 법사님.”하면서 깨우는 것이었다. 누군가 싶어 그를 보았더니 그는 당시 전주에 있는 모 호텔 사장 H씨로 아주 반가워하며, “저, 법사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별 말 아니겠지’ 싶어 말해보라 했더니, 그는 갑자기 “법사님, 지금 중부권 어디에 법당을 세우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그 법당을 위해 불사를 하고 싶습니다.”고 하는게 아닌가. 그 돈은 적지 않은 액수였다.
나는 놀라 “왜 갑자기 제게 불사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어젯밤에 어떤 미인이 나타나 ‘차길진 법사님께 불사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고 말하더니 사라지는 겁니다. 참, 살면서 그렇게 생생한 꿈은 처음 꿔봅니다.”
순간, 나는 “법사님께 큰 선물을 드릴게요.”라고 말했던 C 영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녀의 묘한 향기도……. 지금 유성 후암정사에는 그녀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 아름다운 미소와 내게 준 큰 선물을 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짜 선물이 아닐까.
내가 제일 무서웠던 영가
“법사님은 영가가 무섭지 않으세요?” 종종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웃으면서 말한다. “영가가 무서우면 영매를 어떻게 합니까? 당장 폐업해야죠.” 사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영가를 보고도 그다지 놀란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염소 풀먹이러 나갔다가 아카시아 밭에서 다리 없는 영가를 봤을 때도 놀랐다기보다는 ‘저 영가는 왜 저기 서 있을까’란 생각이 앞섰으니 말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라면 한걸음에 줄행랑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영화 <식스센스>처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가와 함께 성장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 그다지 영가가 무섭다고 느낀 적이 없는 것이다.
웬만한 공포영화를 봐도 그저 ‘허허’ 하고 웃을 뿐, 달리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니 한때 나는 일부러 공포를 체험하기 위해 깊은 산중에서 혼자 밤을 지새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 뭐하겠는가. 혼자서 밤을 지새면 여지 없이 근처 공동묘지에 거주중인 영가들이 나를 보고 다가와선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데, 이건 공포를 느낄 겨를도 없이 날이 새기가 일쑤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최근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영매인 내가, 공포를 모르던 내가 영가를 보고 놀라 심장이 멈출 뻔한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보아왔던 강력한 힘을 가진 무시무시한 영가가 아닌, 그야말로 작고 평범한 세 살짜리 사내아이 영가를 보고 놀란 것인데…….
그러니까 얼마 전의 일이다. 나는 교통사고로 죽은 일가의 영가들을 달래기 위해 구명시식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등 쪽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별거 아니겠지. 설마 구명시식 중에 나를 만지는 사람이 있을라구…….’라고 생각하며 구명시식을 진행시키는데 점점 그 묘한 느낌이 더해지는 것이었다.
얼마쯤 진행시켰을까. 갑자기 등 쪽에서 아기가 옹알옹알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이쯤 되자 나는 구명시식 중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뒤를 돌아보았는데 이게 웬일. 웬 아기 영가가 내 등뒤에서 나를 꼭 안고는 방긋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그만 “으악!” 하고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세상에 태어나 그런 공포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무섭고 원한 서린 영가만 보아오다 해맑고 초롱초롱한 영가를 구명시식장에서 보았으니,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나도 모르게 비명까지 지르게 된 것이었다.
잠시동안이지만 너무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다시 구명시식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구명시식이 끝난 뒤 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온갖 무서운 영가들을 수만 명씩 보아온 내가 하필 그 작고 어린 세 살짜리 영가를 보고 놀란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까닭은 이랬다. 교통사고로 죽은 영가들을 부르면 언제가 그렇듯 그 부모 영가들만 나타날 줄 알았지 세 살짜리 아들 영가까지 나타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아이들의 영가는 대부분 카르마가 적기 때문에 죽는 즉시 빠른 시간 안에 윤회한다. 이런 이유로 보통 서너 살짜리 영가들이 구명시식에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그 확률을 깨고 이 영가가 나타난 것이다.
더구나 아기 영가들은 살아온 시간이 적은 만큼 그 부모 영가에 비해 파장이 강하지 않아 나조차도 그 영가가 바로 내 등뒤에 있었음에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렇게 화들짝 놀랄 수밖에…….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 마음에 있었다. 즉, 지금까지 원한이 맺힐 대로 맺혀 세상의 모든 저주를 품고 사는 영가들만 주로 보아왔고 나조차도 그 영가들을 만나온 만큼 마음이 탁해져 있었기 때문에 아기 영가에게서 느껴졌던 천진난만함과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 아기 영가를 보고 놀란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 아기 영가만 생각하면 등에서 소름이 돋는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어떤 무시무시한 공포가 아니라 바로 지극한 선(善)이란 생각이 든다.
크레바스 영가
여러분께선 혹시 이런 얘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수십 년 전 한 쌍의 신혼부부가 알프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그만 신랑이 빙하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이에 신부가 슬피 울자 한 늙은 목동이 그녀에게 “저 빙하는 50년 후에 녹을 것입니다.”하고 일러주어 그때부터 그녀는 50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렸단다.
마침내 50년이 흐른 어느 날 목동의 말대로 남편을 삼킨 빙하가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70세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허겁지겁 계곡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녀의 노안에 계곡 물을 따라 어떤 남자의 시체가 떠내려오는 것이 똑똑히 보이는 게 아닌가.
순간, 그녀의 입에서는 조용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여보…….” 그랬다. 그녀의 남편은 50년 전 20대의 모습 그대로 죽어 떠내려 온 것이었다. 70대 아내와 20대 남편의 50년 만의 재회는 그렇게 이루어졌다는데…….
이 믿지 못할 진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이유는 지금부터 내가 할 얘기 역시 믿지 못할 실화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은 몇 년 전 구명시식에서였다. 그날 H건설의 본부장을 지내신 분의 구명시식을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잠실 법당 안에 차가운 냉기가 흐르면서 어떤 남자 영가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섬뜩한 기분에 쳐다보니 그 남자 영가는 그야말로 냉동인간 그 자체였다. 파리한 피부에 군데군데 하얀 성에로 뒤덮였을 뿐 아니라, 심하게 다쳤는지 피와 얼음이 엉겨 덕지덕지 붙어 있어 쳐다보는 것도 끔찍할 정도였다.
나는 도저히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영가가 아니라는 생각에 “당신이 지금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라고 묻자, 그 영가는 “여기는 네팔 근방의 깊은 크레바스(빙하의 틈) 속입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H건설 본부장님께 “지금 어떤 영가가 네팔 근방 크레바스 속에 갇혀 있다면서 이 곳을 찾아오셨는데 어떤 분인지 아시는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분은 깜짝 놀라면서 “몇 년 전 동남아 국적의 비행기가 저희 회사 선배님을 태우고 네팔로 가던 중에 그만 산 절벽에 정면충돌하는 대형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사고로 선배님이 사망하신 것은 확실한데 선배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지요. 혹시 그 분께서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게 아닐까요?”
그러자 그 영가는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며 “법사님, 저 후배가 재판에서 증언을 잘 해주어 보상금 문제가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제 시신은 수천 미터 깊이의 크레바스 속에 있기에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말 매일매일이 추위와의 싸움이군요. 이 고통은 도대체 언제 끝날까요?”
나는 영가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이제 그곳에 있지 말고 당분간 후암정사에 머무십시오. 이곳이 그곳보다는 따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법당 전체에 싸한 냉기가 회오리치듯 퍼져나가더니 순식간에 법당안의 온도를 뚝 떨어뜨려 놓는 게 아닌가.
크레바스 영가가 머물었던 그 해 여름. 잠실 후암정사는 따로 에어컨을 틀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엄청 시원했다. 물론 그 시원함의 비밀병기는 극비에 부쳤지만 말이다. 여름이 유난히 더울 것이라는 기상예보만 들으면 나는 매년 크레바스 영가를 떠올린다. 영가만 생각해도 왠지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말이다.
조상의 음덕
정용준씨는 72년 봄 청주로 발령 받았다. 이후 타향살이를 하면서 청주고속터미널 부근 <털보식당>에 몇 번 들르면서 식당 주인 M씨와 친해졌고 마침내 함께 사업을 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경부고속도로 망향과 옥산 휴게소를 낙찰 받게 됐으니 경영에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M씨 형제와 회사를 창업했다.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자회사 몇 개를 거느린 털보네 그룹 부사장으로 의욕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94년 3월, 20년 넘게 청춘을 불살라가며 이뤘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참담한 현실이 되고 만 것이었다.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당장 겪어야 할 물질적 궁핍, 아무런 대책 없이 고통의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우연히 필자가 쓴 영계에 관한 책을 읽는 중에 아는 이의 글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통해 찾아왔다. 그에게 “두 달 후쯤 누군가의 도움으로 길이 열린다.”고 일러줬다. 성실하고 선량한 그의 얼굴에서 조상의 음덕을 봤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반신반의 얼떨떨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는 4월 26일까지 나가 살 집을 구해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마땅한 집도 없었다. 팔순 노모와 늦둥이로 얻은 고3 아들, 그리고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 가슴아파 했다. 부동산에 알아보니 집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전세금이 부족했다. 다른 부동산에 의뢰했더니 앞서 바로 그 집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인연인가 싶어, 여의치 못하면 계약금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마음으로 덜컥 계약부터 했다. 실상 이 부분은 단순한 ‘인연’의 차원을 넘어선 조상 누대의 공덕 때문이었다.
집을 비워야 할 하루 전날인 4월 26일, 그는 약속장소에 앉아 돈 받을 사람을 기다렸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나타날 기색조차 없었다. ‘모든 것이 허사로구나’하는 허탈감에 좌불안석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불가능하던 일이 잘 해결됐다.”면서 “오후 3시경 7천7백만 원을 찾을 수 있으니 걱정말라.”는 것이 아닌가. 잔금 300만 원이 모자라긴 했으나 주변에서 걱정해주던 스님과 주인집, 그리고 부동산이 서로 도와 현재의 보금자리로 이사할 수 있었다. 남들 보기에는 기적이 따로 없는 일이었다.
그 후 본격적으로 구명시식을 올렸다. 그런데 그의 주위에 ‘외국에서 온 영령’이 어른거렸다. 털보네 그룹이 러시아로 진출하면서 고용했던 러시아어 통역사의 아들 혼령이었다. 국내 회사에 근무하던 중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사업을 하는 그의 동생도 조상령의 도움을 받았다. 피치 못할 사정에 이르러 조상은 “내일이면 자금이 해결될 것.”이라고 필자에게 약속했다. 당시는 도저히 그리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곧바로 자금이 유입됐고 동생은 위기를 넘겼다.
이들 형제는 유독 조상을 잘 모셨다. 아무리 어려워도 기일(忌日)을 소홀히 넘기는 법이 없었다. 영혼은 결코 공짜밥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새삼스러운 경우였다.
염사된 비디오의 위력
영화 <링>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이 있었다면 그것은 죽은 영능력자 사다코의 영혼이 TV 화면 속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밖으로 기어 나오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비디오 테이프에 염사(念寫)된 ‘링 바이러스’. 이 무서운 바이러스는 자신을 퍼뜨리지 않을 시, 공포에 질려 사람들을 죽게 만들고 만다.
‘아무 비디오나 보지 말자!’ 바로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다. 그래서인지 <링>을 본 분들 중엔 가끔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 “차 법사님, 정말 비디오 테이프로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까?” 물론 가능하다. 무엇이 염사(念寫)되었느냐에 따라 비디오 테이프 한 개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이 바로 영능력의 신비인 것이다.
그래도 의심쩍어하는 분들을 위해 영능력자인 나의 비디오 테이프를 본 분의 믿지 못할 체험담을 공개할까 한다.
그 분이 나를 찾아 온 것은 몇 개월 전. “전쟁 때 북에 아버님만 두고 가족 모두 남쪽으로 피난와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직까지 아버님이 살아 계신지, 살아 계시다면 만나 뵐 수는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듣기에도 가슴 아픈 이산가족의 슬픔. 나는 그만 가슴이 미어져 내 비디오 테이프 한 개를 그에게 건네주며, “이 비디오를 보시면서 아버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비디오 테이프를 가져갔다.
다음 날 후암정사로 걸려온 전화 한통. “법사님, 아버님께서 법사님 비디오 속에 계십니다.” 나를 찍은 비디오 테이프에 그 분의 아버님이 계실 리 없을 터. 급하게 그와 약속을 잡고 만난 자리에서 그는 사건을 소상히 설명했다.
밤 12시경. 그는 내가 준 비디오 테이프를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모 방송국에서 방송용으로 촬영했다가 영가들이 화면에 찍히는 바람에 방송되지 못했던 화면들을 보면서 TV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버님, 뵙고 싶습니다.”라고 수십 번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들아,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TV 화면을 바라보자 그 화면 속엔 내가 아닌 아버님이 나타나 그를 향해 울고 계셨다는 것. “아버님, 살아 계셨군요!” 그 말에 아버님은 눈물을 뚝뚝 흘리시며 “나는 이미 5년 전, 모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더 이상 나를 찾지 말고 제사나 잘 지내주렴.” 그 말이 끝나자 언제 아버님이 나타났냐는 듯 다시 화면은 나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비록 TV 화면을 통해 아버님을 뵈었지만 이젠 정말 소원이 없습니다. 제사를 지내면 다시 아버님을 뵐 수 있겠지요?”
종종 내 비디오를 보고 좋은 일이 생겼다는 분들의 소식을 전해 들으면 나 또한 흐뭇해지곤 한다. 공들여 제작한 비디오가 뜻밖의 효험이 있다니 기쁠 수밖에. 그러니 여러분께서도 좋은 비디오만 골라 보시길 바란다. 비디오 안에도 엄연히 ‘염(念)’은 존재하니 말이다.
아버지와의 재회
2000년 3월 14일부터 4월 28일까지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열린 ‘21세기 한민족 대항해시대 특별전시회’는 여러모로 화제가 된 바 있다. 조선일보 창간 80주년을 기념해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짜임새 있게 기획해 이미 언론 및 관람객들에게 크게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민족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꼈다’는 관람객들의 찬사를 받은 전시회장. 나는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남다른 감회를 느끼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바로 그곳에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고 차일혁 총경과 재회하게 된 것이다.
6.25대 참전한 군인들의 사진을 확대해 입체적으로 배치한 전시회장인 ‘6.25 주역들’ 코너에는 ‘평화를 지킨 사람들’로 이승만 박사와 맥아더 장군이 선정돼 있었다. 그리고 육군으로는 유재홍 대령, 백선엽 대령, 정일권 준장, 김백일 대령, 임부택 중령, 해군으로는 손원일 제독, 공군으로는 김정렬 초대 공국참모총장과 함께 경찰로서는 유일하게 아버지 차일혁 총경이 선정된 것이다.
그와 반대로 ‘6.25를 일으킨 사람들’로는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최용권, 김책, 유남일 등등의 인물들도 함께 전시되어 전시회를 더욱 흥미롭게 해주었다.
“창간 80주년을 기념해 모든 자료를 동원, 객관적인 검증과 공정한 절차에 따라 선정되신 인물들만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 도우미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아버지의 사진 앞.
‘지리산 남부군을 평정하였으며 구례 화엄사의 소실을 면하게 해서 공덕비가 경내에 세워져 있음’이라는 간략한 내용의 약력과 함께 전시된 실사크기 상반신 사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리움이 복받쳐 “아버지!”라고 부르며 사진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빛 바랜 흑백사진 속의 나의 아버지 고 차일혁 총경. 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수호신이셨다. 1958년 8월 9일, 음력 6월 24일. 당시 열한 살이었던 내 앞에서 금강으로 몸을 던져 홀연히 이 세상과 이별하신 뒤에도 아버지께서는 어린 아들이 안쓰러워 언제나 곁을 지켜주셨던 것이다.
사실 나는 이번 전시회에 아버지께서 선정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전시회가 있기 며칠 전의 일이다. 새벽에 설핏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꿈속에 아버지께서 나타나신 게 아닌가.
꿈속의 아버지는 박물관 같기도 하고 전시회장 같기도 한 곳을 한가로이 거니시며 “길진아, 이곳에 한 번 와보거라.”고 내게 말씀하시더니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 “아버지! 아버지!”하며 애타게 아버지를 부르다 깼는데 아무래도 꿈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내를 깨워 꿈 얘기를 했더니, 아내도 걱정스런 눈빛으로 “아버님의 유품이 전시된 ‘서울 경찰청 경찰박물관’에 무슨 일이 있나봐요. 오늘 꼭 그곳에 가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개장시간을 즈음해서 서둘러 경찰박물관으로 달려갔더니, 아버지의 유품이 전시된 코너가 다른 곳으로 옮겨져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이 때문에 아버지께서 꿈에 나타났나 싶어 언짢아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희소식이 전해졌다. 조선일보사 창간 80주년 기념 ‘세기를 넘어-21세기 한민족 대항해 시대’전에 아버님께서 역사를 빛낸 인물로 선정되셨다는 것이다. 그제야 꿈에 아버지께서 나타나신 연유를 알고는 빙그레 웃을 수 있었다.
어떤 분은 말한다. “차길진 법사님은 차일혁 총경에 의해 태어나셨지만 차일혁 총경은 아들인 차 법사님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고 말이다. 아마도 내가 아버님을 기념하기 위해 해왔던 모든 일들을 보고 하는 말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라는 역사를 만들고 있을 한국의 아버지들. 그 자랑스런 아버지를 위해 단 하루라도 효도에 충실해봐야 하지 않을까.
백제의 군사
최근 인기를 더해 가는 KBS 1TV 사극 드라마 <왕건>. 나 역시 이 드라마의 팬으로 주말이면 자주 TV 앞에 앉게 된다. 남성미 넘치고 실감나는 전투 장면들과 세 영웅호걸의 박진감 넘치는 세력다툼이 여간 재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진짜 까닭은 따로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나는 그 시대로 들어가, 실제로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영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럼 영능력을 통해 본 우리의 고대사는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지금처럼 4강의 틈에 끼여 제대로 국력을 펼치지 못하는 형국이 아닌, 당당하고 세련된 외교술로 동아시아의 패권다툼에 있어 그 주역을 놓친 적이 없는 강대국 중 하나였던 것이다.
특히, 백제는 대단한 국력으로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세력을 떨쳤기에 그들의 고급스런 문화는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널리 실크로드를 통해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이 정도 국력이라면 현재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놀라운 수준이 아닌가.
최근 발굴된 풍납토성이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나 역시 이 한강 일대가 백제의 수도였으며 그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역사가들은 볼 수 없는 또 다른 백제의 모습을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영능력으로 목격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문제의 장소는 바로 지금 한강의 광나루터. 당시 광나루는 현재의 모습과 달리 한강 최고의 너른 백사장이 있어 서울 시민에게 최고의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옛날 영화 중, 방성자, 박노식 주연인 <징기스칸>의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멋진 곳이었는지는 짐작이 가실 터.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장안에 소문난 문제아였던 내가 그런 장소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나를 비롯해 의리로 똘똘 뭉친 몇 몇의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 텐트를 치고 각종 오락기구를 총동원해 환상의 밤을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 유일하게 통행금지 외곽지역이 바로 이 광나루였으니 그 설레임이 오죽했을까. 맞은편 워커힐호텔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백사장에 터를 잡고 연신 통기타로 노래를 부르고 트위스트 댄스를 추다 잠이 들었는데, 워낙에 밤잠이 없던 나는 텐트에서 부스스 일어나 그 넓은 광나루 백사장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와아아아!”하는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놀라 허공을 쳐다보는 순간, 어디선가 수백 마리의 군마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었다. “으악!”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엎드렸다.
‘이제 죽었구나’ 싶어 모래가 콧구멍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고개를 파묻고는 꼼짝도 안하고 있는데, 군마의 질주는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호령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슬슬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니 족히 수천은 됨직한 군인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백제군. 한밤중 나를 놀라게 한 그 수천의 군사는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채 훈련으로 밤을 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갑옷은 고구려의 것과 상당히 비슷해,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갑옷과 거의 흡사했으며 무기와 훈련 방식도 고구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백사장에 엎드려 그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친구 한 놈이 다가와 내 뒤통수를 팍 치더니 “길진아! 너 뭐 훔쳐먹었냐? 왜 여기 납작하게 엎드려 있어!”라고 말하며 웃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사라진 백제군의 환상……. 그 놀라운 백제군이 기상을 다시 한번 떨칠 날이 돌아오길 바라며, 현재 계획 중인 ‘풍납토성 문화재보존 사업’이 이루 고대사의 중요한 획을 긋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되길 기대한다.
귀신 덕에 구한 목숨
혹시 염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한 번쯤 장례를 치른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이 염이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지 잘 아실 것이다. 염을 어떻게 해 주었느냐에 따라 죽은 이의 가는 길이 정해질 정도니까.
원래 이 염(殮)이란 말은 염습(殮襲)의 줄인 말로 죽은 이의 몸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수의를 정성스레 입히고, 염포라는 베로 된 끈으로 시체를 잘 묶는 일을 말한다. 다시 말해 지상에서의 마지막 단장(端裝)이라고나 할까.
사실 말이 좋아 마지막 단장이지 한 마디로 보통 사람들은 절대 못할 공포스런 일임에 분명하다. 생각해보라. 시신과 단 둘이 한 방에? 그것도 시신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가며 수의까지……. 만약 그 시신이 교통사고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거나 토막 난 시신이라면 그 공포의 강도가 업그레이드 될 것이 뻔하지 않은가.
신비에 가려진 염 이야기. 지금까지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던 염의 신비를 공개한다. 이 엄청난 스토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우리 이종 사촌형이다. 때는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무렵. 서울 근교 수송부대 병장이었던 이종 사촌형이 말년휴가라며 우리 집으로 내려와서는 바깥출입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방에만 있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해 형의 방을 기웃거리던 어느 날. 형은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길진아, 너 귀신 본적 있다고 했지?”라고 묻는 것이었다. “응.” 내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형은 “휴!”하고 한숨을 내쉬며 “맞아, 귀신은 있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러다니 꺼내는 놀라운 얘기. “얼마 전에 내가 휴가 나온 거 기억하지? 그때 그 휴가는 이유가 있는 휴가였어. 우리 수송부대에 같이 있던 김 병장이 제대를 며칠 앞두고 그만 차량 전복 사고로 죽고 말았지. 그런데…….”
그 김 병장의 시신은 말 그대로 처참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김 병장의 시신을 염해주려 하지 않은 것. 내일 당장 김 병장의 가족이 찾아온다는 연락에 군에서는 특별휴가를 걸고 김 병장 시신을 염 해줄 사람을 찾았고, 이에 우리 사촌형이 휴가에 눈 멀어 그만 염을 해주겠다 자원을 하게 되었다 한다.
하지만 형도 무서웠던지 소주 두 병을 단숨에 들이키고 그 처참한 김 병장의 시신에 염을 시작했고, 이왕 시작한 김에 정성껏 해주자는 행각으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염에 열중한 뒤 특별 휴가를 받아 신나게 놀았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 귀대한 형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도 수송차량을 운전하던 형. 대열을 따라 한참동안 비포장 도로를 달렸을까. 갑자기 정면에 죽은 김 병장이 피를 뚝뚝 흘리며 나타나서는 “박 병장.”하고 형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끼이이익’ 형은 놀라 순간,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정신을 차려 보니 바로 코앞이 수백 미터 낭떠러지였던 것. 한 마디로 김 병장 영가가 형을 살려준 것이다. 이 사태를 목격한 중대장이 달려와 졸음운전으로 대열을 이탈한 사촌형의 뺨을 마구 때렸지만 형은 그 순간에도 죽은 김 병장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고 한다.
“휴가 때문에 김 병장 시신을 염해준 것이 후에 내 목숨까지 건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형도 이제는 귀신이 있다는 걸 믿어.” ‘죽은 이에게 잘해주면 복을 받는다’는 속설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사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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