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화산 용주사

醉月 2011. 4. 11. 08:47

화산 용주사

화산 낙락장송 옆 바위 같은 절

 

바람도 지쳐버린 듯합니다. 매미 소리는 머릿속까지 폭염을 실어 나릅니다. 염천입니다. 이런 더위에 계곡을 낀 절이 아니라 들판의 길가 절을 찾은 즐거움도 각별했습니다. 대세를 거스르니 호젓합니다.

▲ 용주사. 대웅보전 뒤에도 여느 사찰과 달리 상당히 넓고 매력적인 공간이 마련돼 있다.

용주사를 품고 있는 화산은 높이가 108미터에 지나지 않는 구릉 같은 산입니다. 하지만 이 산의 수림은 웬만한 산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화산은 숲으로 이루어진 섬나라입니다. 화산의 숲은 용주사로 하여 빛을 더합니다. 낙락장송 곁의 바위 같은 절이 바로 용주사입니다.

▲ 섬세한 조각 기법으로 예술적,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 받는 용주사 동종(국보 120호).

환히 드러난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밖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학춤을 추듯 멋스럽게 휜 소나무 사이로 부처의 세계로 향한 길이 열립니다. 무심한 손길로 툭툭 다듬은 듯한 박석을 깐 길도 소나무의 춤사위처럼 휘어져 있습니다. 실제보다 훨씬 길어 보입니다. 길의 곡선은 직선으로만 내달려온 시정의 속도를 거두어들입니다. 길 오른편은 우람한 느티나무와 팽나무들이 삼매에 들어 있습니다.


길은 용주사라는 현판을 단 내삼문(內三門)으로 이어집니다.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세 칸의 문으로 이루어져서 붙은 이름입니다. 삼문 앞에는 천진한 표정의 해태상이 서 있고 좌우로는 행랑이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내삼문을 지나면 5층석탑과 함께 2층으로 된 문루(門樓)인 천보루가 위엄 가득한 모습으로 대웅보전을 향한 길을 열어 줍니다. 천보루 좌우에는 행각(行閣)이 이어집니다. 마치 궁궐에 들어선 듯한 느낌입니다.


천보루를 지나면 껑충 키를 올린 대웅보전 영역이 펼쳐집니다. 왼쪽으로 만수리실과 범종각, 천불전이 펼쳐집니다. 오른쪽으로는 나유타료와 법고각이 이어지면서 대웅보전 앞의 네모꼴의 마당은 성스러운 분위기가 충만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 능 돌보는 능침사찰로 건립

▲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의 삼문으로 가는 길에 멋진 소나무가 참배객을 반긴다.
대웅전 왼쪽 뒤로는 시방칠등각, 오른쪽 옆과 뒤로는 효성전과 지장전, 그리고 전강선사의 사리탑이 또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듯 용주사는 네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영역은 문으로 연결돼 있으면서 독립된 공간을 이룹니다. 이런 공간 구조 때문에 대웅보전 뒤에도 여느 사찰과 달리 상당히 넓고 매력적인 공간이 마련돼 있습니다.

 

그런데 더 매력적인 것은 대웅보전 뒤 담장 너머로 마치 광배(光背)처럼 늘어선 소나무들입니다. 진입부의 소나무와는 또 다른 분위기입니다. 곧지도 심하게 구부러지지도 않았습니다. 이 소나무를 보면서 조선의 22대 임금이었던 정조와 관련된 일화를 떠올려 봅니다.

▲ 삼문에서 바라본 진입로. 박석으로 깐 길이 멋들어지게 휘어돈다.

화산 서쪽에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데, 어느 무더운 여름 불현듯 아버지가 보고 싶어 그곳을 찾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이 눈에 띄자 재빨리 잡아든 뒤 “네가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이리도 무엄할 수 있단 말이냐. 비통하게 가신 것도 마음 아픈데 어찌 너까지 괴롭히느냐” 하면서 이빨로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후로 지금까지도 사도세자의 능 주위에는 송충이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런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정조의 효성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 [좌]어떤 선사가 말했다. 풍경 소리를 일러 ‘허공의 딸꾹질’이라고. [우]사천왕문을 지나면 행랑이 좌우로 이어져 있는 삼문 영역이 나온다. 늘 고요가 잠겨 있는 공간이다.
사실 오늘의 용주사는 정조 임금과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정조를 용주사의 창건주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그 내력을 간단히 더듬어 보면 이렇습니다.

 

본디 이곳에는 갈양사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신라의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였던 가지산문의 제2세 염거 화상이 854년(신라 문성왕 16) 세웠던 절입니다. 고려시대에는 970년(광종 21) 혜거 국사가 머물며 수행했던 왕실의 원찰이었고, 조선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했으나 병자호란 때 불에 탄 뒤 폐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용주사는 갈양사의 옛터에 정조가 새로이 세운 절입니다. 1790년의 일입니다.

▲ 석가세존 사리탑. 탑 주위로 팔정도를 상징하는 탑돌이 길이 깔려 있다.

다 알듯이,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당쟁의 갈등에 휘말려 8일 동안 뒤주에 갇혀 있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때 열한 살이던 정조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지울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13년이 된 1789년, 경기도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전농동)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고 그 이름을 현륭원[顯隆園·훗날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왕위의 반열에 오르면서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고 능을 돌보는 능침 사찰로 용주사를 창건한 것입니다. 전해 오는 얘기에 따르면, 낙성식 날 저녁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이름을 용주사라 했다 합니다.

다행히도 화산의 숲 건강하게 살아남아

▲ 대웅보전 옆 천불전. 전각 뒤 소나무가 광배처럼 빛나는 부처의 땅.

용주사의 창건주는 정조였지만 실질적인 창건 불사는 보경당 사일 스님이 주도하였습니다. 정조는 보경 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을 전해 받으면서 불심을 일으키게 되었다 합니다. 창건 직후부터 용주사는 승려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승풍을 규찰하는 기구인 규정소를 관장하는 도총섭이 상주하는 지위를 누렸습니다. 당시의 지배 이념이 성리학이었던 만큼 정조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용주사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 대웅보전 안. 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누구보다도 당쟁의 폐해를 뼈아프게 경험한 정조는 강력한 탕평책을 실시했습니다. 이로써 왕권의 안정을 다진 정조는 아버지의 능이 있는 수원 북쪽에 최신 공법으로 화성을 쌓고 행궁을 조성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산업과 안보의 중추 역할을 할 신도시를 건설하려 했던 셈입니다. 실제로 정조는 한강에 배다리를 띄우고, 1,700명의 수행원과 800필의 말을 거느리며 창덕궁에서 화성까지 이틀에 걸쳐 행차를 하곤 했습니다.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한껏 높인 것입니다.


용주사와 정조의 뗄 수 없는 인연은 내년부터 능행으로 재현될 예정이라 합니다. 지난 8월10일에는 정조의 기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정례화 할 모양입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사실은 절 주위가 택지로 개발되면서 화산과 용주사가 아파트로 포위될 뻔했는데, 최근 절 주위의 18만 평을 보존 구역으로 확보했고, 이어서 36만 평까지 늘릴 계획이라 합니다. 세조의 능 덕분에 광릉숲이라는 보물을 얻었듯이, 정조의 효심 덕분에 화산을 온전히 지킬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산의 울창한 수림은 정조의 명으로 20년 동안 나무를 심고 가꾼 결과입니다.


참으로 다행히도 용주사의 가람 구조는 창건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새로 지은 건물 외에 대웅보전과 천보루, 나유타료, 만수리실은 1790년에 건립된 당시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더 다행인 것은 화산의 숲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골프장이 세워질 위기도 있었으나 용주사가 그것을 지켜냈습니다.


▲ [좌]목어.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처럼 늘 깨어 있으라는 불교적 의미의 상징물이다. [우]조선시대 문인들의 시와 그림을 나무에 양각으로 조각했다.
절은 산을 지키고, 산은 절을 절답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개발과 경쟁의 핏발 선 눈길이 비켜가는 심신의 피난처를 얻습니다. 절이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영역을 넘어 존재해야 할 이유입니다. 아니, 그것이 바로 부처의 뜻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의 학교, 만생명의 휴식처가 되어야 할 절이 그렇지 못한 모습을 종종 보이기도 합니다. 부처님도 슬퍼할 일입니다.

 

화산 숲길 걷기

 

화산 숲을 제대로 느끼려면 융건릉(사적 제206호)을 찾아야 한다. 본디 융건릉은 장조(莊祖·사도세자)와 그의 비인 혜경궁 홍씨의 능인 융릉이었다. 이후 정조와 그의 비인 효의왕후가 묻힌 건릉과 아울러 융건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화산릉이라는 별칭이 있기도 하다

 

융릉과 건릉으로 가는 화산 숲길은 잘 가꾼 숲과 원시림의 분위기를 함께 느낄 수 있다. 활엽수와 침엽수의 조화도 아름답다. 정조의 효심 덕분이다. 화산과 용주사와 융건릉은 한 몸이다.

 

용주사에서 융건릉을 가려면 사천왕문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1.5Km 가면 안내판이 보인다. 가는 길의 느티나무 가로수도 운치 있다. 걸어서 가도 입구까지 20분 정도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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