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詩와 禪이 만나는 지점

醉月 2011. 4. 12. 08:55

1.시와 선이 만나는 지점

선(禪)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선 그 자체가 아니라 선을 지향하는 기미를 지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단서는 언어로서 선(禪)이라는 정신적 차원을 담아내는 일이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전제하에 시와 선의 관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기인된다.

 

‘언어도단’이라든지 ‘불립분자’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선적 경지의 깨우침을 전하려는 선사들의 오도송에서 또는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선시 또는 선적인 경향의 시들은 쓰여져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에 대한 부정적 견해 이면에 ‘불립문자’로 말해지기도 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여기에서 선적 통찰과 언어적 직관의 만남이라고 할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예술적 성취가 가능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선의 경지란 문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면서도 결코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는 사유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전해줄 길이 없다고 하는 이중의 문제를 함께 안고 있기 때문이다. 선시는 이러한 문제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번뜩이는 섬광이나 예기치 못한 돌발성, 침묵과 여백, 부지중에 상대의 허를 치는 기지 등을 동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유한한 도구 속에 무한의 의미를 담아내야 하는 어려움이며, 언어로서 언어의 감옥을 분쇄하고 날아오르고자 하는 자유에의 의지로 볼 수도 있다.

 

이는 곧 생명이 생명다움의 우주적 실체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자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궁극적으로 존재와 욕망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는 정신의 자유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 팽배에 따른 무한욕망 논리의 확산으로 사람의 정신적 가치가 축소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욕망의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기계화, 물질화, 자동화의 가속도 속에서 인간의 정신은 갈수록 가벼움과 자유로움을 잃어 갈 뿐 아니라 생명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적 상황에 당면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처하는 대안의 하나로 불교적 명상의 소중함과 정신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상이 역설적으로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에 와서 우리 현대시의 중요한 시적 경향이 상당부분 불교적 성향 또는 선시적 경향으로 선회하거나 그런 지향성을 뚜렷이 나타내 보이고 있는 현상은 그러한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누구나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고 해서 모두가 정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선시 또한 아무나 원한다고 쉽게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구도적 체험이 동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에 대한 지식이나 경전에 대한 해석만으로는 오히려 선이라는 본질에 문자의 해독을 덧칠하는 격이 되기 십상이라는 어려움이 놓여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와 선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 어디쯤이 되었든 선은 존재와 우주의 실체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수행의 방법으로서, 또한 시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우주만물의 실체와 만나고자 하는 성향을 본래부터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그러한 선적 지향성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된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현대물질문명의 위기 속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이 느낄 수밖에 없는 불연속성과 불확정성의 시대임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시정신의 근본이 바로 그러한 선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울러 시와 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현대시에서 선적 경향이란 특정 시인만을 분리해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시인들의 시에서 또한 주요 시인들에게서 부분적 또는 지속적으로 형상화되어 왔으며 현재도 그것은 시가 얻어 내고자 하는 한 높은 고지의 한 정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2. 만해시와 불교시의 전개

시에 있어 선적 경향의 범주 속에는 넓은 의미에서 불교시, 불교적 시를 포함하게 되며 서구의 초현실주의 시와 다다이즘과도 비논리로서 삶의 깊은 심연을 탐구하고 초월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성격상의 유사한 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현대시사에서 불교시 또는 그 중요한 속성으로서 선시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신문학 초창기 최남선과 이광수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은 신문학의 개척기에 선구적인 문학활동을 펼쳐감으로써 이 땅의 현대문학 형성에 중요한 주춧돌을 놓았다. 최남선은 특히 《백팔번뇌》(1926)라는 시조집을 창작했는데, 비록 그것이 불교적인 세계관이나 생활양식을 깊이 있게 노래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백팔번뇌라는 불교적인 개념을 현대시사에 이끌어 들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20년대 시인들로는 홍사용이나 오상순, 박종화 등을 들 수 있다.

 

《백조》 동인으로 활약한 홍사용은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것은 모다 꿈이었지마는> 등을 통해서 공(空)사상의 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수수께끼였지마는 누님이/“모른다 모른다 하여도 도무지 모를 것은, 사나희 마음이야.” 하시기에/나는 “모른다 모른다 하여도, 도무지 모를 것은, 나라는 ‘나’ 올시다”와 같이 인간의 삶을 하나의 허망한 꿈 또는 환상으로 보는 불교적 세계관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폐허》 창간호(1920)에 <시대고(時代苦)와 그 희생>이란 평론으로 데뷔한 오상순은 불교적 색채를 두드러지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오 그러나/일체가 다 소용이 없다/그러므로 나는 참(斬)하는 것이다/너희들까지도/허무의 劍 가지고/허무의 칼!”(<허무혼의 선언>에서)에는 허무의 사상이, “흐름 위에/보금자리 친/오―흐름 위에/보금자리 친/나의 혼”(<방랑의 마음>에서)에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로서의 불교적인 공(空)사상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특히 그의 시에는 우주적 감각과 연민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선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백조》로 활동을 시작한 박종화도 “천년을 지키신 沈默/萬劫도 無恙쿠나//태연히 앉으신 자세/배움직함 많사이다//동해바다 물결이 드높아/허옇게 부서져 사나우니/미소하시어 누르시다/천 년 긴 세월을/두 어깨로 받드시다/新羅의 功德이/임 때문이시라”(<석굴암대불·1>에서)처럼 불교적인 소재와 제재, 그리고 주제를 많이 형상화하였다. 20년대 최대의 불교시인 또는 선시인으로서 만해 한용운을 꼽는 데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만해는 불교사에서도 혁혁하지만 문학사에서도 하나의 금자탑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1910년 《불교유신론》을 쓰고 이어서 《불교대전》을 펴낸 만해, 그러면서도 근대사 최대의 민족운동이라 할 3·1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의 지도자 만해는 1926년 그의 치열한 독립사상과 온오한 불교사상을 탁월한 사랑의 철학으로 승화시킨 시집 《님의 침묵》을 펴냄으로써 민족 정신사·예술사에 빛나는 이정표를 이루어낸 것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알 수 없어요> 전문

    男兒到處是故鄕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 ....나그네 시름에 잠긴 사람 그 얼마인가
    一 聲喝破三千界 ...한마디 버럭 질러 온세상 뒤흔드노니
    雪裡桃花片片飛 ....눈속에 복숭아꽃 펄펄 흩날리도다

    ― <悟道頌> 전문

만해의 이른바 <오도송>에는 만해 선시의 본질이 간명하게 드러나 있다. 오세암에서 좌선중에 홀연 바람에 날려 물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오랫동안 의심하던 것들에 대해 문득 깨친 바 있어 직관으로 썼다고 하는 이 오도송은 선시의 근본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이란 무엇이던가? 선이란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만이 지니고 있는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선이란 고요히 생각하는 것, 즉 생각으로서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순수한 정신의 집중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과 사물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이란 진리를 깨치기 위한 오도(悟道)의 수단 방법이자 과정이고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선시란 깨침으로서 오도의 과정이나 내용을 시의 형식을 빌어 표현한 문학의 갈래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현대시 <알 수 없어요>에서는 “∼에 ∼는 ∼은 ∼의 ∼임닛가”라는 구문형의 일정한 반복을 통해 선적(禪的) 직관과 초월을 형상화하고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의문형으로 전개되는 화두의 제시는 인간존재의 근원과 대자연의 비의에 대한 지속적인 천착을 통해 자연과 인간, 현상과 본질, 무와 존재를 하나로 연결함으로써 선적 초월과 극복의 모티브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와 사물의 근원질서에 대한 물음으로서 선적 탐구 또는 구도정신이 성공적으로 형상화된 경우라고 하겠다. 이 밖에도 만해시 <나룻배와 행인>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함께 포용하는 보살의 정신과 함께 모든 것을 참고 헌신하는 인욕의 정신, 그리고 자비의 정신을 뼈대로 하고 있다.

 

아울러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와 같이 공(空)사상과 기다림의 사상을 형상화함으로써 불교시로서 선시의 모습을 선명히 보여 준다. 또한 시 <선사의 설법> 등에서는 불교적인 역설과 선적 직관을 통해서 구속과 해방, 운명과 자유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원리, 또는 삶의 원리를 날카롭고 섬세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만큼 불교적인 세계관과 선적 지향성이 만해시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만해 시집 《님의 침묵》 88편은 그 자체가 ‘님의 떠남→떠난 뒤의 고통과 슬픔→희망으로의 전이→만남을 이루어감’이라는 기·승·전·결의 연작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김재홍, 《韓龍雲文學硏究》, 일지사, 1982).

 

그것은 무(無)와 존재(存在), 진공과 묘유의 변증법적 원리를 바탕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도 있다. 거기에는 선적 직관과 초월을 바탕으로 한 불교적인 무(無)와 공(空)의 세계관은 물론 자비사상이 짙게 깔려 있으며, 사랑의 철학이 뒷받침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자유사상과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 그리고 진보사상으로서의 불교적 보편정신과 그것의 당대 상황, 민족적 적용이 함께 어우러져 꿈틀거림으로써 불교와 문학이 탁월하게 그 이념적 모습을 성취한 것으로 이해된다.

 

불교사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문학사에 있어서도 만해 시집 《님의 침묵》은 크고 깊은 울림을 던져 준다. 불교적 세계관과 함께 불교적 감수성과 은유, 역설, 아이러니 등의 시 방법 및 어휘 표현면에서도 《님의 침묵》은 하나의 문학적 전범을 이룬 점에서 만해의 문학사적 위치와 의미를 크게 고양시켜 주었다고 하겠다. 만해 없는 이 땅의 근대불교를 생각하기 어렵듯이 만해 없는 이 땅의 문학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만해는 불교시를 이 땅의 문학사 중심 부분으로 육박시킴으로써 불교문학의 위치를 높이 이끌어 올렸다는 점에서 그 공적을 평가할 수 있겠다. 특히 근대불교에 있어 명망 있는 선사의 한 사람으로서 만해는 많은 한시(漢詩)로서 선시를 써서 남김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불교적 직관의 세계를 현대시로 형상화하는 데도 선구적 의미를 지님에 분명하다. 이러한 만해의 공적은 30∼40년대 서정주, 조지훈, 김달진, 신석초 등의 활약으로 이어짐으로써 불교문학으로서 선시가 이 땅의 문학사, 특히 시사에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게 만들어 준다.

 

    섭섭하게,/그러나/아조 섭섭치는 말고/좀 섭섭한 듯만 하게.//이별이게,/그러나/아주 영 이별은 말고/어디 내생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蓮꽃 만나러 가는/바람 아니라/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엇그제/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한두 철 전/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木魚를 두드리다/졸음에 겨워//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부처님은 말이 없이/웃으시는데//西城 萬里길//눈부신 노을 아래/모란이 진다

    ― 조지훈, <고사·1> 전문

한용운에서 한 정점을 이루었던 현대의 불교시는 30년대에 이르러 개성적이고 능력 있는 시인들에 의해 여러 갈래로 분화되고 심화되기 시작한다. 먼저 서정주의 시는 불교적 세계관과 감수성이 한국적인 한(恨)의 미학 또는 소멸의 미학과 합일되어 빼어난 비극적 아름다움을 이루어낸 경우에 해당한다. 새삼 덧붙일 것도 없이 서정주는 해방 전과 해방 후 이 땅의 시사를 이어주는 최대 시인의 한 사람이면서 불교문학의 입장에서도 그 양과 질을 크게 고양시킨 대표적인 인물임에 분명하다.

 

특히 불교적인 입장에서 그 사상성의 깊이가 문학적인 예술성을 탁월하게 확보함으로써 바람직한 불교문학의 한 전형을 이루어 내었다. 서정주에 이르러 이 땅의 불교문학은 문학사의 중심부에 놓여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과도 더 넓고 깊은 친화력을 형성하게 됐다는 점에서 불교문학의 참뜻이 놓여진다

 

. 특히 인용시에서는 선적인 직관과 초월을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으로 형상함으로써 선시로서의 가능성을 여실하게 보여 준다고 하겠다. 또한 조지훈의 시도 불교적인 번뇌와 선감각이 아름다운 언어미학으로 고양된 한 예가 된다. 서정주와 더불어 조지훈도 이 땅의 불교문학사뿐만 아니라 시문학사에서 최대 시인의 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조지훈의 경우는 이러한 하화중생으로서 대승적인 불교사상을 4·19 이후 사회·역사적 지평으로 확대함으로써 실천불교의 바람직한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기해 준 데서 의미가 놓여진다.

 

이와 같이 이 땅의 불교 선시는 만해라는 크고 높은 봉우리에서 정점을 이루는 듯하다가 30년대에 이르러 다시 몇 가닥의 우람한 산맥으로 파장되어 감으로써 불교문학이 우리 문학의 중심부로 육박해 들어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30년대 이들 불교시인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를 연결해 줌으로써 불교문학을 오늘날 당대시에 접맥시키는 소중한 역할을 수행한 점에서도 그 의미가 놓여진다. 30년대 이들 불교시인들에서 이 땅 현대문학은 불교적인 큰 강줄기를 형성하고 굽이치기 시작했다.

 

3. 순수서정시의 선적 취향과 지평

해방 후 이 땅의 불교시는 분단 이래 시단의 중심부에 놓여진 서정주, 조지훈의 활동과 영향으로 그 맥락이 그대로 지속되었다. 먼저 해방 후 50년대 시인들로는 조병화, 이원섭, 이설주, 김관식, 이형기, 천상병, 장호, 박희진, 박재삼, 고은 등이 불교적인 세계관 내지 선적인 감수성을 보여 주었다.

조병화의 경우에 그 시가 불교적인 주제만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월은 변하는 거, 그 자췰 모르지만/시간은 세월을 깎아서 자릴 만든다//인간은 세월 속에 나와/세월 속에 사라져감에/푸른 하늘, 한 점 구름 같지만//스스로의 생각 깎아 만드는 자리/사람은 남아서 시간을 산다”(<세월은 변하는 거>에서)처럼 인생무상이라는 불가적 세계관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다. 진리를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라”라는 석가세존의 말씀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큰 절이나
    작은 절이나
    믿음은 하나

    큰 집에 사나
    작은 집에 사나
    인간은 하나

    ― 조병화, <해인사> 전문

이처럼 조병화의 시는 선적 직관을 담은 짤막한 시형을 통해 만물평등으로서 불교적인 깨달음의 시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원섭은 <향미사>를 비롯한 많은 시편에서 불가적 세계관을 기저로 한 전통서정의 세계를 집중적으로 추구하였다.

 

특히 이원섭은 수많은 선시와 불경을 번역함으로써 불교를 오늘의 삶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형기도 소멸의 미학을 바탕으로 하여 불교적 세계인식을 깊이 있게 보여 주었으며, 김관식이나 천상병은 노장적 세계관을 불교의식 속에 섭수해 들여 개성적인 시 세계를 개척한 바 있다. 박희진은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폭넓고 깊이 있는 불교시를 지속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한 세계를 개척하였다.

“대기 오염에 찌든 지구가/그래도 본디의 정하디 정한 들숨과 날숨으로/화엄경을 이룩한 곳/한국 남단의 송광사 밤 뜰//일찍이 고려 때엔 십육국사를 배출하였거니/그 드높은 靈性의 향기가 별들에 닿음일까/밤마다 어질어질 취한 별들은 이곳에 내려온다/귀신도 모르게, 은밀히, 소리없이”(<송광사 밤뜰에서>에서)라는 한 시에서 보듯이 삶과 육화된 불교의식을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 《산화가》는 그 한 성과라고 하겠다. 60∼70년대 시인들에서도 불교적 세계관과 선적 취향 내지 감수성은 그대로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60년대 시인 중 불교를 중심으로 한 동양적인 내지 전통적인 시 정신에 집중적인 관심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로는 정진규, 허영자, 임보, 박제천, 김초혜, 홍희표, 박정만, 홍신선, 문정희, 오세영, 임영조, 유자효, 국효문 등을 주요 시인으로 꼽아볼 수 있다.

오세영 시인의 한 경우를 살펴보자.

 

    산에서/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산이 된다는 것이다./나무가 나무를 지우면/숲이 되고,/숲이 숲을 지우면/산이 되고,/산에서/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나를 지우는 일이다./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너를 지운다는 것,/밤새/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초롱꽃처럼/이슬이 이슬을 지우면/안개가 되고,/안개가 안개를 지우면/푸른 하늘이 되듯/산에서/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나를 지우는 일이다.

    ― <나를 지우고> 전문

오세영의 시는 기본적으로 불교적 세계인식과 감수성을 시적 근원으로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인용시에서는 비워버리기로서 선적 초월, 즉 가벼움 지향성 또는 자유에의 길을 통해 선시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동안 꼭 불교적이랄 것이 없는 토속적 정한의 세계 또는 순수서정의 세계를 추구해온 일군의 유수한 시인들이 근년에 들어 선취의 시들을 활발히 창작하고 있는 모습이다. 전통 서정시의 한 지평이 불교적인 감수성 또는 선적인 지향을 통해 새롭게 열릴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 되겠다.

    ① 눈 오다 그친 일요일/흰 방석 깔고 좌선하는 山/아무리 불러도 내려오지 않으니/몸소 찾아갈 수밖에 딴 道理 없다/가까이 오를수록, 山은/그곳에 없다, 다만/소요하는 隱者의 처소로 남아/오랜 침묵으로 品을 세울 뿐/(중략)/잡목들이 받쳐든 푸른 하늘에/간간 水墨을 치는 구름/눈짐 진 老松이 문득/잘 마른 話頭 하나 던지듯/옛다! 솔방울을 떨군다/덤불 속 멧새들이 화들짝 놀라/재잘 재잘 山經을 읽는 소리/은유인지 풍자인지 아니면 해학인지/들어도 모를 난해시 같다

    ― 임영조, <겨울 山行> 부분

    ② 바람은 죽는다/죽어서는 오래 삭지 않는 뼈를 남긴다/단청이 다 날아간 내소사 대웅전/앙상히 결만 남은 목재를 보라/바람의 뼈가 허공속에/거대한 적멸의 집 짓고 서 있다

    ― 김영석, <바람의 뼈> 부분

    ③ 神仙圖 한장이다/해탈교를 사이에 두고/산과 마주 앉았다//아무 말없는 적막한 오후/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만 툭/지구를 울린다

    ― 이성선, <적막> 전문

    ④ 오월은 도가 풍이 찍어내는/사심없는 빈 배와 같다//저 보아라 시나브로/청청하늘에 던지는 붓 칼//어느 강마을을 넘는지/또 마른 우레소리 귀청을 찢는다

    ― 송수권, <오동꽃>

전문 먼저 시

①은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바탕으로 하여 삶과 시에 관한 신성사적 초월, 즉 선적 직관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 자연사는 <눈/산/하늘/나무/구름/솔방울> 등으로, 인간사는 <소리/침묵/난해시/은유/수묵/풍자/해학> 등으로, 그리고 신성사는 <은자/品/화두/山經> 등으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적 발상법과 상상력의 전개가 선시적 발상 및 감수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시 ②는 불교적인 세계관을 기저로 하면서 사물의 원상을 꿰뚫어 내어 그것을 초극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바람의 뼈가 허공속에/거대한 적멸의 집 짓고 서 있다”라는 구절 속에는 날카롭고 섬세한 선적 직관이 허와 공으로서 불교적 인식의 근원에 맞닿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시 ③에서도 이러한 불교적 세계인식과 그 사유방식으로서 선적 직관이 부각되어 있다.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만 툭/지구를 울린다”라는 구절 속에는 선적 초월의 세계 속에서 비로소 열려오는 어떤 정신적 개안(開眼)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특히 시인은 근작시집 《산시》의 세계를 통해 “산에 와서 문답법을/버리다//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그렇게 길을 가는 것//이제는 이것뿐//여기 들면/말은 똥이다”(<문답법을 버리다> 전문)와 같이 선의 생활화, 즉 생활선으로서 선의 일상화 또는 선의 실천화를 성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 주목된다.

 

시 ④에서는 선적 직관이 우주적 감응을 통해 하나의 우주적 감각을 획득함으로써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야말로 선정(禪定)에서 마침내 터득된 돈오돈수랄까 선적 직관이 섬광 같은 깨달음으로 연결되어 우주적 감각과 연민을 획득하고 있는 모습이 예리하게 형상화돼 있기 때문이다. 선이란 무엇이고 정이란 무엇이던가? 선이란 정려(靜慮) 또는 사유수(思惟修), 즉 조용히 마음을 닦고 가라앉히는 일을 말하지 않던가. 또한 정이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을 말한다(고형곤, 《선의 세계》 p.165). 다시 말해 선시는 이러한 선정으로서 사유수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기에 그것은 서정시의 본질과도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서정시란 정신적 깨달음에 미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선이야말로 시인들의 서정적 사유로서 마음 닦는 일,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면과 세계에 가치와 질서를 부여하는 일에 원천적인 힘이 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현대시에서 그 기본이자 중심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서정시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적인 세계로서 선적 감각과 선지향성은 깨달음을 통해 시적 완성에 이르는 하나의 중심 화두이자 방법론으로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민족문학의 진로와 선지향성의 시

그러나 80년대에 들어 특히 불교문학의 중요한 성과는 무엇보다도 고은의 대하연작시집 《만인보》와 김지하의 연작시집 《애린》을 들 수 있겠다. 이 두 사람의 연작시는 각자의 문학 내부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은의 경우는 그의 불교사상과 민족사상의 전체가 대작 《만인보》에서 파란만장하게 전개되면서 그 진수를 보여 준다. 김지하의 《애린》도 만해의 《님의 침묵》과 대응되면서 저항문학으로서 그의 문학세계를 내면화함으로써 그의 문학이 고양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이야말로 60년대 이후 70∼80년대 이후에 특히 커다란 폭발력을 지니면서 민족문학을 이끌어온 중심인물이면서 불교문학적으로도 커다란 성취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불교문학적인 파장과 울림이 클 수밖에 없겠다. 먼저 고은은 직접 불문에 든 이후에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불교적인 세계인식을 집중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그이들끼리/살데.//골짜구니 아래도 그 우에도/그이들이 얼얼이 떠서/바람으로 들리데.//그이들은 밤 바람소리//바위 보아/비인 산허리/ 가을이 오데.//바위를 골라/나앉아 우는 추녀끝/뜰에 떨어지는 풍경소리에//그이들끼리/살데.//돌아가 한번 잊을 제/도로 가고 싶은/그이들의 얼바람진 산허리//그이들은/살데.//그이들은 살데.

    ― <천은사운> 전문

    내 아기 죽어 묻어버린 날//악아/악아/네가 벌써 하늘에 있구나/악아

    ― <초생달> 전문

이러한 시편들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교적인 세계관이자 선적인 생활감각이다. 이는 고은의 기본적인 시적 감수성이 불교적인 세계인식과 선취에 기초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불교적 세계인식은 80년대 《만인보》에 이르러 평등사상, 자유사상, 생명사상, 민족사상, 민중사상, 평화와 사랑의 철학을 확립하게 된다. 불교가 문학을 거쳐 사회·역사적 지평을 확대하고 심화해 가게 됐다는 말이다. 만인평등사상으로서 생명사상, 민족사상, 민중사상, 자유사상을 집대성하고 있는 시집 《만인보》는 고은의 불교적 세계관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만해가 그러했던 것처럼 불교가 문학을 통해 사회·역사와 일체원융을 이룸으로써 마침내 생명화엄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 것이 바로 《만인보》의 철학이다. 실상은 고은의 70∼80년대 사회·역사적인 현실참여로서 민족·민중운동도 기실은 실천적인 불교사상의 한 분출임은 물론이다. 이 점에서 고은의 문학세계는 멀리는 원효로부터 시작되어 만해·효봉에 이르는 불교적인 맥락, 그리고 미당 시에 그 태반을 둠으로써 불교적인 역사의식을 선취로서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게 된다. 김지하의 경우는 특이하다.

그는 불교적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그 밑바탕에는 불교적인 세계관이 짙게 관류함으로써 한국시인들에 있어 불교가 하나의 숙명적인 삶과 세계관의 한 원형성을 이루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이리 괴로운건 옛일 때문이다
    옛일에의 집착 때문

    한번 놓자
    놓아버리니
    먼 곳에서 희미한 고물장수 가윗소리

    ― <속·1> 전문

김지하의 시집 《애린》 에는 선취와 함께 심우(尋牛)로서의 불교적 인생관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실상 연작시집 《애린》이나 《별밭을 우러르며》 그리고 최근의 《중심의 괴로움》에 이르기까지 김지하 시세계를 관류하는 것은 자유사상, 평등사상, 생명사상, 그리고 사랑의 철학과 같은 불교적인 덕목이자 가치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시는 불교적인 세계관 또는 전통의식에 접맥돼 있다고 할 것이다.

 

1986년 3월과 6월에 연이어 연작시집 형태로 간행된 《애린 1·2》 두 권은 김지하 시의 새로운 변모를 보여 준다. 시집 《애린》은 1·2권 전체가 하나의 연작으로서 맞물리면서 온갖 수난과 역경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서 삶의 실체와 생명의 실상을 탐색하는 순례 또는 구도시집의 성격을 지닌다. 즉 시의 서정적 자아가 현실의 삶을 헤쳐가는 과정을 송나라 곽암(廓庵)의 <심우도(尋牛圖)>, 즉 소를 찾아 헤매면서 수심견성(修心見性)하는 모습과 병치시키면서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심우(尋牛), 즉 삶의 본질 ·생명의 원상을 찾아서 떠나 헤매지만 결국 입니수수(入泥垂手), 즉 삶의 현장이 바로 그러한 삶의 본질이나 생명의 실상이 놓여져 있는 곳임을 깨닫고 그곳으로 돌아온다는 원성의 내용이 심우도의 연작시 형태로 맞물려 있다. 그런가 하면 오랫동안 민족문학 계열의 시를 써오던 일군의 주요 시인들이 고은이나 김지하처럼 집중적이지는 않지만 불교적인 감수성 또는 선적 초월과 명상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어서 관심을 환기한다. 70∼80년대 민족문학운동의 한 중심권에 있던 조태일과 이시영, 그리고 박노해가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① 산들과 잠시나마
    고요히 지내려고
    산에 오르면
    산들은 저희들끼리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한 점 티끌도 안 보이게
    나를 지운다

    ― 조태일, <소멸> 전문

    ② 시계소리 시계소리 귀뚜라미 울음소리
    누군가의 무거운 발짝소리
    시계소리 시계소리
    ?  
    귀뚜라미 울음소리

    ― 이시영, <고요> 전문

    ③ 작아지자 작아지자/아주 작아지자/작아지고 작아져서/마침내는 아무것도 없어지게 하자/자신을 지키려는 수고도/작아지면 아주 작아지면 텅 비어 여유로우니/나의 사랑의 시작은 작아지는 것이요/나의 성숙은 더욱 작아지는 것이며/나의 완성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작아지자 아주 작아지자/작아져 순결로 내 영혼에 세상을 담고/ 세상의 슬픔과 희망을 담고/작아지고 작아져서/마침내는 아무것도 없어진 나

    ― 박노해, <작아지자> 부분

먼저 시 ①은 70∼80년대 <식칼론>, <국토>, <나의 처녀막> 등 강렬한 메시지를 주장하면서 민족문학운동의 한 선봉장이던 조태일의 최근 변모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광물적 심상과 민중문학이라는 거대담론의 틀에 갇혀 있던 투사시인이 근년에 이르러 불교적인 명상 또는 선적 초월지향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시 ②는 참여의식과 서정성의 조화와 균형 속에서 자신의 시세계를 모색하던 이시영 시인의 최근 현주소를 엿볼 수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그의 시적 상상력이 90년대에 들어서는 현저히 미시적 상상력으로 집중되면서 큰 것보다는 작은 것, 요란한 것보다는 고요한 것,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삶의 원상과 세계상의 본질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인용시 속에 삽입된 ‘?’라는 물음표는 본질을 들여다보려는 선적 관심을 상징적으로 요약 압축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근년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누가 마당을 쓸고 있다/낙엽 흩날리고 날은 벌써 저무는데/바람 속에서 누가 자꾸 마당을 쓸고 있다”(<십일월> 전문)와 같은 ‘쓸고 있다’의 반복적 이미져리는 마음 다스리기 또는 사유수로서 선적 탐구를 통해 가벼움 지향성, 무욕으로서 정신적인 자유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시 ③은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80년대 노동해방운동에 강렬한 기폭제가 되었던 박노해 시인의 근년 시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어 관심을 환기한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일 안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을/묻는다/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원한의 눈물로 묻는다”(<손무덤> 부분)라던 울분과 적개심, 투쟁과 반역의 세계관이 어느새 작은 영혼의 세계, 가벼운 정신의 세계가 상징하는 불교적인 세계관 또는 선적 초월과 극복의 모습으로 전환되어 있는 것이다. “작아지자 작아지자/작아지면 아주 작아지면/나의 성숙은 더욱 작아지는 것이며/나의 완성은 아무 것도 없어지는 것”이라는 구절 속에는 그의 초기시를 관류하던 계급적 세계관과 투쟁정신이 어느새 무와 공으로서 불교적인 세계관, 또는 가벼움과 투명함이 뜻하는 자유에의 길로서 선의 세계에 깊이 경사돼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불교란 무엇이던가. 결국 불교는 고통받는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웃과 함께 해탈하고자 하는 해방의 종교이자 구원의 종교가 아니겠는가. 해방과 자유를 통해서 생명과 삶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유인의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선이란 무엇이던가. 새삼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마음을 닦고 가라앉힘으로써 현실적인 구속이나 삶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방에의 길이자 자유에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러한 불교와 선시의 본성은 현실적인 해방과 정신적인 자유를 갈망하고 지향하는 민족문학의 본성과도 서로 정합성을 지닐 수 있다.

 

이 점에서 선시와 선시적 방법론은 민족문학에도 새로운 활로와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 효과적인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분단 후 이 땅 시의 새로운 주류로서 대두한 현실주의, 역사주의 참여시와 그 핵심인물로서 고은, 김지하, 조태일 그리고 이시영, 박노해 등의 시에 불교적 세계관과 감수성의 반영으로서 선적 취향이 강하고 깊이 있게 반영되고 있는 것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서 불교적인 세계야말로 현대인의 정신을 구원하고 시세계에 활로를 열어갈 수 있는 중요한 힘이자 하나의 비전 제시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겠다.

 

5. 모더니즘 또는 주지시의 선지향성

한편 근년에는 모더니즘 또는 주지계열의 현대시에서도 불교적 선취(禪趣)의 작품들이 부쩍 눈에 띄어 관심을 환기한다. 현대적 삶의 온갖 질곡과 80년대의 고통스럽고 고단한 현실 상황이 육신의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중진시인 황동규와 정현종의 시편들에는 불교적인 명상 또는 선적 취향이 짙게 드러나 있어 주목된다.

먼저 황동규의 연작시집 <풍장>은 죽음의 문제를 화두로 하여 선적 초월, 또는 자유에의 길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섭섭하지 않게/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손목에 달아놓고/아주 춥지는 않게/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군산에 가서/검색이 심하면/곰소쯤에 가서/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잠시 정신을 잃고/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손목시계 부서질 때/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살을 말리게 해다오/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바람을 이불처럼 덮고/화장(化粧)도 해탈도 없이/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바람과 놀게 해다오

    ― 황동규, <풍장·1>전문

먼저 황동규의 시는 현실로부터의 탈출, 해방의 과정,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육신의 초극 또는 자유에의 길을 보여 준다. 실상 죽음이라는 화두를 내건 것도 죽음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런 상태, 즉 영원한 무(無) 또는 본질로의 귀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연에서는 ‘가방/검색/전세 택시’ 등과 같이 현실의 구속과 물질의 질곡을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이 제시된다. 또한 제2연에서는 바다 또는 무인도라는 표상을 통해 현실을 벗어나 자유로의 지향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손목시계 부서질 때”라는 구절을 통해 물질의 구속, 육신의 무게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햇빛’과 ‘바람’은 이러한 물질로부터의 벗어남 혹은 가벼워진 정신의 자유로움을 표상하는 핵심 이미지가 된다.

 

따라서 셋째 연에서는 “화장도 해탈도 없이/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라는 구절과 같이 진정한 자유의 길을 갈망한다. 진정한 자유는 죽음마저도 초월하여 해탈조차도 없는 완전무결한 무화(無化)를 성취하는 데서 얻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이 시는 풍장, 즉 ‘바람’과 ‘죽음’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일상의 고달픔과 물질로부터의 질곡을 벗어나서 정신의 가벼움과 투명함을 성취하는 동시에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인 무인도에 도달하여 무한한 자유로 귀환하려는 자유의지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는 작품인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갈망과 지향이 바로 불교적인 사유와 상상력의 발현으로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정현종의 경우에도 선적인 사유의 세계가 짙게 드러나고 있다.

    시를 썼으면/그걸 그냥 땅에 묻어 두거나/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 불쌍하도다 나여/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
― <불쌍하도다> 전문

그의 시에는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힘으로서 자유사상이 제시돼 있다. 그것은 선적(禪的)인 자유로움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명예욕에 매달려 사는 현실적인 존재, 욕망으로서의 인생에 대한 탄식이 깃들여 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이 “불쌍하도다 나여”라는 구절이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라는 결구로 처리됨으로써 그러한 모순 또는 이율배반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선적(禪的)인 면모가 드러난다.

 

선(禪)이란 무엇이던가? 그것은 순수한 집중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을 자각하는 일, 또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마음, 즉 정신수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외적 강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스스로의 생명력에 의해 발현된다. 외적인 구속을 받지 않고 인간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자율성 또는 자발성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시 <불쌍하도다>는 선시적인 자유의 길을 갈망하고 지향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정현종의 근년의 시편들에는 불교적인 자유와 상상력이 중요한 동력으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즈음의 중견 시인들에게서도 이러한 불교적 사유 또는 선지향성은 광범위하게 또 지속적으로 나타나서 관심을 환기한다.

    ① 1 누가 이 안을 쓸고 또 쓸었을까//눌러 앉히고 싶어/이 고요 닫아건다// 2 안을 담아/밖으로 내놓는다/안을 열어놓고/활짝 대한다/안도 시끄럽다// 3 안을 열어 두고/이 고요 잠근다/밖이 가득하다

    ― 조정권, <고요시편> 전문

    ② 삐그덕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며칠째 내 몸 안에서/나기는 나는데/어디서 나는지 볼 수가 없다/이 도시의 病을 내 몸이 함께 앓는 것일까/마음이 뒤틀리고, 금이 가며, 흔들리는 물질적 열반

    ― 최승호, <물질적 열반의 도시> 전문

    ③ 잔잔한 바다처럼/쓸어놓은 빗자루 흔적/새벽 기침소리/바다 위에 뜬 작은 나뭇잎

    ― 최동호, <나뭇잎 하나> 전문

    ④ 날 새고 눈 그쳐 있다/위에 두고 온 세상/온갖 괴로움 마치고/한 집의 수의에 덮여 있다/때로 죽음이 정화라는 걸/늙음도 하나의 가치라는 걸 일러주는 눈발/살아서 나는 긴 그림자를, 그 위에 짐 부린다

    ― 황지우 <雪景> 전문

중견 시인인 이들의 경우에도 불교적인 사유와 선(禪)감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조정권의 시에는 무(無)의 천착 또는 공(空)의 응시라고 하는 사물의 근원에 대한 깊은 탐구가 담겨 있다. 이른바 무내무외(無內無外)로서 정신의 내면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력 운동이 관심을 끄는 것이다. 안과 밖이 다르면서 하나인 정신과 육신의 모습을 고요의 불성과 연결시켜 꿰뚫어보는 선적 사유의 깊이가 드러난다.

 

최승호의 시세계는 뚜렷이 불교 또는 선시를 표방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그의 시는 오늘날 세속도시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욕망의 극복, 또는 선적 초월과 극복을 꿈꾸고 지향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시집 《진흙소를 타고》가 그 중요한 모습임은 물론이다.

 

최동호의 시에서도 작은 나뭇잎 하나에서 바다와 우주를 꿰뚫어보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선적 사유가 두드러진다. 이들의 시평들은 오늘날 현대인이 처한 정신의 위기를 불교적인 선적 초월로서 극복하고자 하는 갈망이 깊이 있게 아로새겨져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황지우는 80년대 이후 이른바 해체시를 통해 현실적인 투쟁과 문학적인 반역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중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세계는 특히 근년에 이르러 선적 직관과 불교적 명상을 통해 존재의 가벼움 또는 정신적인 자유의 길을 지속적으로 천착하고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특히 시집 《게눈 속의 연꽃》 이후 그의 시는 불교적 세계관을 형상화하고 있어 근래 모더니즘 또는 주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외에도 많은 주목을 받는 중견 및 신진 시인들에게서도 불교적인 세계관과 초월적 상상력 또는 선적 지향성이 드러나고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이렇게 본다면 황동규, 정현종에서 조정권, 최승호, 황지우, 최동호, 그리고 젊은 시인으로 허성욱, 이경 등에 이르기까지 요즘 우리 시단에서 주목받는 시인들에게 있어서 불교적인 사유와 선적 탐구는 중요한 시의 내용과 가치 덕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새삼 선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인간이 얼마나 세계를 새롭게, 창조적, 주체적으로 불 수 있는가, 나아가서 인간이 얼마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정신적 탐구를 보여준 시라고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선시란 기존의 관습과 낡은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감각과 표현, 창조적 형식과 사유를 형상화해 내는 데 근본 목표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 점에서 선시적 발상과 상상력은 모더니즘시 또는 주지시의 새로운 지향성 및 창조적 인식의 정신과 서로 상통하며, 나아가서 그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6. 맺음말

불확정성의 시대, 불연속성의 시대로서 현대에 있어서 정신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유의 길을 열어 주는 정신의 황금열쇠로 불교사상 및 선 지향성은 그 빛을 더해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불교적 상상력과 선 지향성이야말로 생명사상·자유사상·평등사상, 그리고 평화사상으로서 우리 시와 삶에 있어 중심부를 관통하면서 21세기 우리시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현대문학 초창기에서부터 시작된 불교시 또는 선적 취향은 90년대 시에 이르러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어감으로써 우리문학사상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불교시를 중심으로 한 우리 문학의 선적 경향은 점차로 그 양과 질을 확대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 한 세기의 우리의 현대문학이 일제 강점기 죽임의 시대와 분단 후 찢김의 시대에 있어서 정치·사회·문화적인 혼란 및 산업화의 급격한 대두로 자본주의 거대담론과의 투쟁의 연속으로 보았을 때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사적 대안으로서 인간과 생명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에 접근하고자 하는 선적(禪的) 사유의 탐구는 자리잡고 있다 하겠다. 선(禪) 또는 불교시의 개념과 범주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견해가 다소 다를 수는 있겠지만, 천여 년 이상 연면히 계승되어 오면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정신과 사상의 뿌리가 되었던 불교사상은 오늘에도 여전히 삶과 시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선(禪)이란 서구의 사상체계처럼 논리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리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속성 때문에 그 자체가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묶여 삶의 깊은 심연을 뛰어넘지 못한다. 선적 경향은 시가 지향하는 시정신의 근본으로 비논리적 상상력의 확산을 통해 논리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불교시라고 말할 수도 있는 선시는 우주의 근본실체를 파악하는 초월적 사고와 비논리의 시공관 개념을 통하여 인간정신의 진정한 자유를 성취하려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자유사상·평등·평화사상, 민족·민중사상, 생명사상 등을 실천해 가는 데 있어 주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다.

이러한 불교사상 또는 선적 경향이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로서 21세기 우리 문학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 나갈 수 있다는 데서 불교계 또는 불교문학계의 분발과 구체적인 방향제시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됨은 물론이다. 선적 세계의 천착과 지향성은 혼돈의 시대에 정신적 균형과 질서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며 동시에 온갖 반생명의 시대에 참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회복하는 최선의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재홍
서울대 국문과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현재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저서로 <한용운문학 연구><한국현대시인 연구><현대시의 사적 탐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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