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덕' 보다 무시무시한 '전거리노동교화소
북한 국방위원회는 지난 5월 초 "한 명의 탈북(脫北)도 허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뒤 대대적인 탈북자 때려잡기가 시작됐다.
국방위 명령은 핵실험 뒤 국제사회의 압력이 시작되자 대량 탈북 조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국방위는 주민 강연도 대대적으로 열었다. 골자는 "말로 탈북자를 통제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무단으로 건너면 '민족반역자'로 간주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 뒤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게 함경북도 전거리의 '전거리노동교화소'다. 이 교화소가 탈북자 전용 수용소로 개편됐다. 일반 교화소보다 노동 강도가 훨씬 세고 고문 구타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인간 생지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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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자 인권단체가 촬영한 북한 함경북도 두만강 부근의 탈북자 수용소. / MBC TV
최근 전거리 교화소에서 출소한 탈북자는 "탈북자 전용으로 바뀌면서 탈북자들이 무리로 죽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 미처 시체를 치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도 했다.
교화소 골짜기에 죽은 사람들을 매몰하는 구덩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시체가 너무 많아 소각장을 만들어 시체를 태워 처리하는데 죽은 탈북자들의 뼈가 산처럼 쌓여 그 공간마저도 부족할 지경이라고 한다.
2007년 이전까지 북한은 탈북자를 3등급으로 나눠 처벌해왔다. 1부류는 남한에 가려고 대사관에 진입했거나 그 유사한 행동을 한 자들, 기독교를 접한 자들이다. 이들은 체포되면 요덕 정치범 수용소로 수감돼 왔다. 요덕수용소 수감자는 대부분 종신형이거나 10년 이하의 형을 받은 자들로 처형 수준의 소위 '반역자'들만 수감시키고 있다.
2부류는 남한행을 기도했거나 기독교를 접하지 않았지만 북한에 돌아갈 의사가 없이 중국에 장기체류한 자들이다. 3부류는 식량난으로 인한 단순 탈북으로 분류된 사람들이다. 2부류와 3부류는 6개월의 노동단련형이나 2년 이하의 노동교화형으로 처벌됐다.
하지만 이제는 국경을 넘은 자들은 남한행이나 기독교를 접하지 않았어도 '민족반역죄'로 다스리라는 지시에 따라 무조건 3년 이하의 교화형을 받아 전거리 교화소에서 강제노역에 처하고 있다.
강은 건너지 않아도 압록강이나 두만강 가에 이유없이 접근하다 단속에 걸려든 자까지도 탈출기도자로 몰아 교화소에 수감시키는 통에 북·중(北·中) 국경 북측의 강변에는 군인들 외에는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다.
그밖에 중국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외부와 연계하는 자들도 탈북자 수준의 처벌을 받고 전거리로 끌려가고 있다. 예전에는 벌금 50만원(일반근로자 한 달 월급 3000원 수준)에 3개월 노동단련형을 받았다.
중국은 2003년부터 북·중 국경에서 통화량이 증가하자 휴대전화 중계소를 많이 만들었다. 그 결과 국경 근처 일부 산속에서만 가능하던 외부 통화가 이제는 신의주 같은 국경 부근의 웬만한 시내에서도 가능하게 됐다.
북한은 중국 휴대전화가 내부 정보를 빼돌리고 탈북을 조장시킨다는 이유로 탄압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경 지역 보위부 모든 요원에게 휴대용 전파탐지기를 지급해 24시간 감시체제에 돌입했다고 한다.
만일 휴대전화를 보유한 사람이 5분 이상 통화할 경우 바로 보위부 감시차가 들이닥치기 때문에 보위부가 접근할 수 없는 산에 올라가야 마음놓고 휴대전화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전거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탈북자는 "차라리 요덕이 나을 정도로 전거리는 사람 잡는 곳"이라고 했다. 하루 14시간의 노역에 밥은 통감자 2개나 옥수수 한 줌뿐이어서 영양실조로 죽을 판인데다 구타까지 횡행해 아무리 건강해도 석 달을 버티기 힘들다는 것이다.
탈북자가 전하는 북한의 실상
“더 나빠질 것도, 기대할 것도 없으니 전쟁이 나든, 김정일 일가가 몰락하든 빨리 끝장이 나기를 바라는 게 북한사람들 심정입니다.”
최근 60살의 노모와 20대 남동생과 함께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어 중국 땅을 밟은 김모(35)씨가 전한 북한의 실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참혹했다.
장거리 로켓발사에 이어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국제사회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북한이 ’선군정치’를 기치로 2012년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북한 주민 누구도 이를 믿지 않고 있다고 김씨는 털어 놓았다.
“한국 등에서 지원해주는 쌀은 모조리 군부대로 들어갑니다. 배급조차 끊겨 인민들은 강냉이 밥을 지어 겨우 끼니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앉아 기다리다 굶어 죽으나 전쟁이 나 죽으나 매한가지니 무슨 일이든 빨리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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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중 접경지역인 단둥의 압록강변에서 소년병들이 벗어놓은 옷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연합
국제사회에서 지원되는 식량은 원산항에서 내려지자마자 어김없이 자강도 군수기지로 들어간다고 김씨는 전했다.
“외부 세계를 속이기 위해 군부대 차량이 민간 번호판을 바꿔달고 군인들은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 입고 실어 나르지만 인민들에게 나눠지는 쌀은 한 톨도 없습니다. 후방 군부대에도 배급되지 않기는 매 한가지여서 민가의 가축이며 쌀 등을 빼앗아 갑니다. 식량난이 최고조에 달했던 1994년에는 사람도 잡아 먹었다는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유엔 등에서 확인차 나올 때는 배급 받는 장면을 ’연출’하지만 감시단이 돌아가면 그 순간 배급이 중단된다는 것이 김씨의 전언이다.
일터에 나가도 일감이 없고, 배급이 나오지 않은지도 오래됐다. 그럼에도 통제를 위해 출근을 엄격히 체크하기 때문에 밥벌이를 위해서는 뇌물을 주고 2--3일 휴가를 내 장사를 하거나 파지나 고철을 주워 팔아야 한다.
농촌의 협동농장 역시 오래 전에 배급이 끊긴 대신 수천㎡의 땅을 떼어주고 식량을 해결하도록 하면서 한 달 2-3일 쉬는 날에는 온 가족이 이 밭을 가꾸는데 매달린다.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넉넉지 않은 비료 확보 경쟁을 하다 보니 비료 값이 쌀 값 수준까지 치솟았다.
외신에 보도되는 평양 주민들의 ’부유한 생활’에 대해 김씨는 “평양 주민 상당수가 외국 주재원으로 나가는데 할당된 달러만 바치면 얼마를 벌어와서 어떻게 쓰든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특히 군수품 공장 일꾼들에게는 매일 쌀과 고기는 물론 김치까지 나눠주고 있으니 평양은 북한에서는 별천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것은 재일교포로 1960년대 북송선을 탔던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다.
초단파 라디오로 남한과 북한의 실상을 잘 알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 ’북한은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무슨 수를 쓰던 북한을 떠나라’는 말을 남겼다.
원산에서 살던 김씨는 이때부터 접경지역인 두만강으로 가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감자를 훔쳐 먹고 물건을 훔쳐 장마당에 팔아 노자를 마련, 노모와 동생을 데리고 지난해 어렵사리 백두산 부근에 도착해 발전소 공사 돌격대에서 수개월을 일하며 기회를 봤다.
돌격대 역시 대대장과 반장, 후방참모 같은 윗선에서 배급 식량을 빼돌리는 바람에 한 겨울에도 꽁꽁 언 보리밥 한 끼로 버텨야 했고 동상으로 퉁퉁부은 발 때문에 한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이렇게 사느니 잘못되면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말로 탈북을 주저하는 노모를 모시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밤을 택해 탈북에 성공했다는 그는 “일만 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이제야 사람이 된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의 남은 소원은 한국에 가서 부지런히 돈을 벌어 북한에 남아 있는 여동생도 빼내오는 것이다.
반공주의자면서 김일성 조문했던 '북한통'
"북 강경파, 김일성 사망당시 '수령 장례식 서울서 치르자' 움직임도…"
“김정운 시대 되면 북한 경직성 완화될 것”
박보희(朴普熙·79)가 돌아왔다. 박씨는 리틀엔젤스예술단, 유니버설발레단, 선화예고, 뉴욕시티 트리뷴, 워싱턴타임스, 세계일보 등을 경영하며 문선명 총재에 이어 명실상부한 통일교 2인자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한동안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돼 모습을 감추었던 그가 최근 ‘UN군 한국전 참전 6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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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박씨가 주도해 만든 기념사업회는 지난 6월 25일 서울 광진구 능동 유니버설아트센터(구 리틀엔젤스예술회관)에서 참전용사 4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을 갖기도 했다. 기념사업회 측은 “6·25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내년에 리틀엔젤스예술단과 함께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 16개국을 순방하며 참전용사와 가족들을 초청해 추모행사 및 기념공연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념사업회 회장으로는 백선엽(89) 예비역 대장과 미 하원의장(1999년)을 역임한 데니스 해스터트(J. Dennis Hastert·67)씨가 공동으로 선임됐다.
박보희 위원장이 6·25전쟁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자신이 6·25 참전용사이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1일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지 채 한 달이 안 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당시 계급과 군번도 없는 일종의 학도병이었죠. 개전 직후 M-1 소총 한 자루와 실탄을 지급 받고 경기도 포천에 배치됐습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사관생도가 참전한 전쟁은 아마 6·25가 처음일 겁니다.”
사관생도로 6·25 참전… 포천서 첫 전투
미국 군사유학 후 엘리트 군인으로 승승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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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개전 초기 최신예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성난 파도처럼 진격하는 북한군을 당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북한군은 변변한 무기도 갖추지 못한 풋내기 사관생도들을 무시하다시피 수도 서울로 밀고 내려왔다고 한다.
“사관학교 동기생 333명 가운데 79명이 포천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또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적에게 떨어졌습니다. 졸지에 적 후방에 갇혀 버린 거죠. 그래도 사관생도 자존심에 ‘후퇴는 없다’는 심정으로 그곳에서 3일을 버텼습니다. 후에 경기도 시흥에 있던 육군본부로부터 ‘서울이 적에게 함락됐으니 각개격파로 수원까지 내려오라’는 명령을 받고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적에게 발각될 염려가 있어 단체행동은 불가능했죠. 분대별로 나누어서 지금 광나루에서 통나무를 붙잡고 한강을 건넜습니다.”
충남 아산의 산골에서 태어나 수영을 전혀 못하는 그였지만 통나무를 붙잡고 죽기살기로 한강을 헤엄쳐 건넜다. 그는 “당시 한강은 지금과 달리 모래사장이 넓게 펴져 있었다”며 “강 가운데 깊은 부분을 지나갈 의지만 있으면 건널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현재 그가 통나무를 부여잡고 한강을 건넌 광나루(서울 광진구)에는 그가 창설한 리틀엔젤스예술단이 둥지를 틀었다.
그 후 그는 전쟁 와중에 임시로 꾸려진 육군종합학교를 수료하고 9사단(백마부대) 28연대 장교로 배속돼 강원도 동부전선 일대를 누볐다. 특히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1951년 5월)를 막아낸 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6·25는 두 개의 전쟁이었다”며 “하나는 북한군과의 전쟁, 또 하나는 중공군과의 전쟁”이라고 강조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2년 그는 미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 유학하는 기회를 잡았다. 6·25 전쟁 당시 고급 장교 양성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이승만 대통령이 준비한 일종의 장교 양성 프로그램이었다.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미국유학을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기 전에 성냥개비 100개를 손에 움켜쥐고 영어책을 무조건 100번씩 읽었습니다. 한번 다 읽으면 성냥개비를 1개씩 손에서 내려놓는 식입니다. 밤을 새워 영어 책을 읽다 보면 성냥개비의 빨간 물이 녹아 손에 배어 들기도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같은 영어학습법은 ‘박보희의 백독(百讀)주의 학습법’으로 후일 육군사관생도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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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미 군사고문단장 메츄스 장군(왼쪽 세 번째) 전속 부관 시절의 박보희(왼쪽에서 두 번째). / 워싱턴 D.C.에 있는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 시절의 박보희.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도 처음으로 만났다. 그를 눈여겨본 백선엽 당시 참모총장이 그를 직접 불러 미 군사고문단장의 전속부관으로 추천한 것이다. 그는 6·25 때 미군보다 앞서 평양에 입성한 백 장군에 대해 지금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6·25 때는 백선엽 장군이 있었다”고 말할 만큼 높이 평가한다.
이후 그는 미 군사고문단장 전속부관을 거쳐 당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전략정보과에서 근무했고 국방차관 보좌관,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을 거치며 엘리트 군인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워싱턴타임스 창간, 레이건·부시 지원
대북사업 관여, 김일성과 2차례나 회담
6·25 전쟁은 그가 후일 ‘반공(反共)주의’ 노선을 걷게 된 계기가 됐다. “전쟁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에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공산주의 집단에 대해 명확한 적대 의식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반공노선은 1957년 통일교를 접하면서 더욱 적극적인 개념인 ‘승공(勝共)노선’으로 강화됐다. 실제 그의 승공노선은 현실 정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후일 워싱턴 D.C.를 기반으로 하는 보수우익지 워싱턴타임스를 창간해 레이건, 부시 등 미국의 보수우파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특히 그는 “확고한 반공노선을 기반으로 대북문제에 대해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보다 깊게 관여했다”고 자부한다. 반공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대면을 마다하지 않고 역사적인 대북 협상 현장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지난 1991년 문선명 총재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전격적인 회담도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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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이징의 중국대반점(호텔)에서 비밀리에 열린 4자 회동. 홍콩에 있는 대북사업가 박경윤이 김정일 당시 노동당 총비서의 측근으로 활동하던 박종근을 통해 주선했다. 이후 김달현 부총리가 박보희와 회담을 통해 1991년 1차 방북을 성사시켰다. 박씨는 “언론에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라고 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박경윤, 박종근, 박보희, 김달현
“1991년 당시 홍콩에서 대북사업을 하고 있던 재미동포 박경윤(여)씨의 소개로 베이징에서 금강산 국제무역 개발총회사 사장 직함을 가지고 있던 박종근이란 자를 만나게 됐습니다. 박종근은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당시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이 살아있었지만 이미 아들 김정일이 사실상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었죠. 박종근을 만난 뒤 북한 김달현(2000년쯤 자살한 것으로 추정) 부총리와 베이징에 있는 중국 대반점(호텔)에서 만나게 됐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승공주의자’ ‘반공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당시 베이징에서 열린 4자 비밀회동자리에서 북한의 김달현 부총리는 “박보희씨는 승공운동을 하시는 분 아닙니까. 우리가 왜 만나야 합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우리가 방북해도 결국 이익을 보는 것은 오히려 북한이란 점을 설득했습니다. 특히 반공주의자 닉슨이 중공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마오타이주를 함께 마시면서 중공이 국제무대에 등장했다는 점을 예로 들었습니다. 또 임수경이나 문익환(1994년 사망)같이 그쪽에서 입맛에 맞는 사람만 데려다가 장난치지 말고 나 같은 반공주의자와 만나야 작품이 나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호기가 통했는지 그는 김달현으로부터 김정일의 방북 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1991년 11월 30일 문 총재와 함께 전격 방북을 감행했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가 안 된 상태라 그는 서울에서 홍콩과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함경남도 흥남(2005년 함흥시에 흡수)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그는 지난 1994년 김일성 사망 6개월 전에도 김일성 주석과 ‘금강산 개발 건’을 두고 단독회담을 갖기도 했다. 때문에 그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살아생전의 김일성을 두 번 만난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는 “당시 북한이 김일성을 만나는 대가로 따로 돈을 요구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일절 돈을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김일성을 만난 이후 홍콩에서 의류와 러닝셔츠, 신발과 양말 등의 구호품을 몇 번 보낸 것이 전부”라고 답했다.
안기부 묵인 아래 김일성 조문 강행
“전쟁 막기 위해 누군가는 가야 했다”
최근 그가 활동을 재개하자 ‘개성공단’ ‘핵실험’ ‘미사일’ 등으로 악화된 남북 문제를 일거에 타결하기 위한 ‘대북특사설’ ‘대북밀사설’로 그가 적임자라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실제 그는 세계일보 사장으로 있던 지난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조문사절로 방북을 감행해 상주(喪主) 김정일과 단독회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6·25 전쟁의 전범(戰犯) 김일성’을 조문하는 문제로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됐지만 그는 사실상 당시 안기부의 묵인하에 북한으로 들어갔다.
“당시 안기부에서 나의 방북을 가장 환영했습니다. 안기부 요원들이 내게 와서 조문사절로 가거든 김정일의 건강상태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후견인인 아버지(김일성)의 사망에 따라 김정일이 적지 않은 심신의 충격을 받았을 것이란 설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원인과 함께 후계자 김정일의 건강상태는 국내외 정보기관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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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미국 조지 H.W.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찍은 사진. 2. 1991년 12월 6일, 1차 방북 당시 함경남도 흥남(현재 함흥시)에 있는 마전 주석공관에서 김일성을 만났을 때. 3. 1994년 7월 20일, 김일성 사망 직후 추도식날 김정일(당시 노동당 총비서)과 함께 찍은 사진. 박씨에 따르면 그는 “김일성 사망 애도기간 중에 김정일이 만난 유일한 사람”이다. 사진 공개 후 김정일과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당시 북한 추도식장에서 무더운 여름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었는데 김정일은 2시간가량을 꼿꼿이 서서 버티더군요. 그리고 추도식 이후에도 곧바로 김용순(2003년 사망)이 배석한 자리에서 나와 단독회담을 진행했습니다. 그때 김정일이 대단히 건강한 사람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그는 “‘지금 남한을 공격하여 일주일 안에 서울까지 밀어붙이고 위대한 수령의 장례식을 서울에서 치르자’는 북한 일부 강경파들의 움직임을 남한에 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공식 통로가 막힌 극한적인 대치 상태에서 그의 막후 대북 소식통 역할은 지금도 값진 경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당시 방북으로 실정법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적용돼 3년간 원치 않는 해외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또 김일성 조문파동이 보수여론을 극도로 악화시켜 재향군인회에서 제명당하는 개인적인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초긴장 상황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북으로 가야 했다”며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또 “1994년 조문파동 이후로는 김정일을 만난 적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최근 북한의 후계 문제에 관해서도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김정일 후계자로 급부상한 셋째 아들 김정운에 관해서는 조심스러운 희망도 피력했다. “김정운은 아버지 김정일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영어를 곧잘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김정일보다는 국제성을 가진 인물로 보여집니다. 때문에 김일성·김정일 때보다는 북한의 경직성이 조금 누그러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박보희를 세상에 알린 ‘美 프레이저 청문회’ 사건
‘박동선 게이트’ 연루, 스파이 몰려… 하원서 거침없는 영어 반론, 청문회 스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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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
‘박보희’라는 이름 석 자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지난 1978년 3월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위원장 민주당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8선)가 계기였다. 이 청문회는 박정희 정부의 대미 로비사건인 ‘박동선 게이트’를 조사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로비스트 박동선에게 로비자금을 제공하고 미국 정치인들을 매수해 주한미군 철수를 막으려 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씨마저 청문회에 나와 한국 정부에 불리한 증언을 했다. 더군다나 당시 미국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공화당 닉슨 대통령이 사임(1974년)하고 베트남 패망(1975년)과 함께 좌파적 성향이 득세하던 시기라 미국의 ‘대 한반도 안보공약’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 청문회에는 미국 기득권 세력의 통일교에 대한 반감까지 가세됐다. 1965년부터 미국에 진출한 통일교는 1976년 9월 18일 워싱턴 D.C. 한복판인 모뉴먼트 광장에서 열린 종교집회에서 무려 30만명의 청중을 불러 모으며 급속히 세(勢)를 불려가고 있었다. 이는 마틴 루터킹(16만명), 빌리 그레이엄(24만명) 목사가 주최한 워싱턴 집회 기록을 능가하는 수치여서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때문에 도널드 프레이저 위원장을 비롯한 미 의회인사들은 박정희 정부와 통일교를 싸잡아 “통일교는 한국 대통령 박정희의 지원 아래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만든 위장 종교집단”이라며 “문선명과 박보희는 중앙정보부(현 국정원·KCIA)의 거물급 스파이”라는 공세를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세에 몰리던 한국은 박보희의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 증언으로 상황을 일거에 역전시켰다. 그는 청문회에 증인으로 소환된 수세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거침없는 영어로 “한국인은 매사에 혐의를 받고, 조롱 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후퇴함이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랑스런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프레이저 위원장, 귀하가 공산당이 아닌데 왜 한국을 파괴하려 하나”라고 말하며 프레이저 위원장을 도리어 ‘공산주의자’ ‘마귀의 앞잡이’로 몰아붙였다. 당시 그는 거침없는 영어 실력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며 ‘자랑스런 한국인’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반면 프레이저 의원은 청문회의 여파로 다음 하원선거에서 낙선했다.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관한 내용은 지난 2000년 그가 펴낸 자서전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전 3권)’에도 잘 나와있다.
박 보 희
·1930년 충남 당진 출생
·육군사관학교 2기
·국방부 차관 보좌관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
·리틀엔젤스ㆍ유니버설발레단 창설
·뉴욕시티트리뷴 사장
·워싱턴타임스 회장
·세계일보 사장
·현) UN군 한국전 참전 6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워싱턴 울린 탈북 여성 육성 증언
북한을 탈출한 여성들 중 일부가
중국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한 화상채팅 업체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열린북한통신 13호'가 18일 보도했다.
이 소식지는 중국의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산둥성(山東省) 칭다오(靑島)에 있는 화상채팅 업체의 직원 10명 중 6~7명은 탈북 여성"이라고 보도했다. 또 "지린성(吉林省) 옌지(延吉)의 베이다제(北大街) 지역의 한 채팅업체는 직원 6명 전원이 탈북 여성이고, 그 외 랴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 단둥(丹東)에도 탈북 여성들이 일하고 있는 업체가 다수 존재한다"고 전했다.
성인 대상 화상채팅 업체에서 일하는 탈북 여성들은 대부분 10대에서 30대 초반. 이들의 근로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이들은 하루 종일 외부출입을 할 수 없으며, 매일 할당된 업무량을 채워야 한다.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은 화상채팅을 하는 손님을 최대한 오랫동안 붙잡아 놓는 일. 만일 하루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욕설과 함께 매를 맞거나 성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또 외부에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리다 들켰을 때는 더욱 심한 학대를 받게 된다고 이 소식지는 전했다.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한 달에 중국 화폐로 약 2000~4000위안 정도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업주들은 탈북 여성들의 신분이 불안정한 점을 이용해 ‘월급을 퇴사할 때 주겠다’며 제때 주지 않는다고 한다. 또 때로는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다른 업주에게 물건처럼 팔려가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는 이들에 대한 도움의 손길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중국의 소식통은 "현재 이들의 인권상태는 말 그대로 최악인데도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 이 여성들을 가엾이 여기거나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고 이 소식지에 말했다.
‘열린북한통신’은 "북한을 바르게 알리겠다"며 관련 소식을 전해온 사회단체 ‘사단법인 열린북한’에서 올 2월부터 발행해오고 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의 탈북시인 장진성씨
"시집(詩集) 가슴에 품고 두만강 넘어… 노무현 정부에선 출판 못하게 해"
"CD 통해 남한드라마 봐 막상 와서 확인해 보니 나오는 집은 모두 회장님 집이었다"
"원산 갈마초대소에서 김정일 접견할 때 손 닦으라 알코올솜 봉투 줘"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을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원으로/ 밀가루빵 사들고 허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세간의 화제가 됐던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의 작가 장진성은 언론에 얼굴이 공개된 적이 없다. '탈북 시인'으로만 되어 있다. 구체적인 이력, 북한 내 활동, 탈북 동기와 과정 등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가 몇 살쯤 됐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그는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라는 시집을 또 냈다.
'사실'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그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 앞에 앉은 그는 예상보다 젊은 30대 후반이었다. 작고 포동포동한 체구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다가, 신분 노출의 부담을 떠올리며 "그건 안 밝힐 수 없는가" 요청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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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라는 시집을 낸 장진성씨는“권력이 아무리 절대적이 라도 인간의 마음까지는 지배할 수 없다”고 했다./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당신은 어떻게 해서 북한에서 시인이 됐는가?
"평양음악대학을 다니던 1992년 김정일을 찬양한 시 50편을 묶은 '복받은 세대의 노래'라는 시집을 올렸다.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문학과에서 해마다 한명씩 문학신인을 뽑는 제도에 내가 뽑혔다. 김정일이 그 시집을 봤다. 전학생과 교직원 앞에서 감사장을 받고 시를 낭송하게 됐다. 그 시가 김정일 생일 50돌 기념으로 노동신문에 실렸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 나오는 장면은 당신이 직접 본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들은 것인가?
"1999년 어느 날 오후 5시쯤이다. 평양의 동대원구역 시장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공개 처형이 있는 줄 알았다. 공개처형은 주민 '교양'이 목적이라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서 많이 이뤄진다. 그런데 병든 엄마가 딸을 파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안전원(경찰)이 와서 '사람을 팔고 사느냐, 정치범 감이다'고 흥분했다. 한 군인이 차마 더 볼 수가 없는 듯 백원을 주고 딸을 데려갔다. 돈을 받더니 엄마는 어딘가로 뛰어갔다. 가버리는 줄 알았는데… 그 돈으로 빵을 사 갖고 와 우는 딸에게 건네줬다. 그때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평양은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고 가본 사람들은 말하는데,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뒷골목을 가본 적은 없을 것이다. 시내에 옷 차려입고 나온 사람들은 연출된 것이다. 당(黨)에서 가두인민반 주부와 남자들을 동원한다. '고난의 행군'시기(1994~1999년)에는 '꽃제비'들이 아침밥을 짓는 시간이면 문을 두들겼다. 나는 일일 배급을 받았고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중국 단동의 무역지사에 전화해 과일, 장난감 등 아이 생일상을 배달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냥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한번 주면 더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때 내 자신이 부끄럽다."
그는 음대 졸업 후 조선중앙텔레비전총국에 내보내는 시를 검열·편집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면서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박사원(대학원)을 다녔다. 1998년부터는 '통일전선부 101연락소'에서 일했다. 이 때문에 탈북한 뒤 '안가(安家)'에서 6개월 동안 조사받았다.
"남한 민중작가의 명의로 '반독재, 반미, 연방제 찬양' 내용의 책을 만들어 남한에 침투시키는 작업을 내가 했다. '돌아보는 얼굴', '낮과 밤' 같은 남한에서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이라는 것들이 우리 작품이다. '통전부 26연락소'는 '구국의 소리방송'을 통해 운동권 가요를 침투시켰다. 내가 나오기 직전 '인터넷침투 연락소'로 변경됐고, 남한 주민등록증 30만개를 확보해 '댓글심리전'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대남심리전이 주 임무이지만, 가끔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대북심리전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북심리전을 말하나?
"김정일의 '선군(先軍)정치'가 남한도 지켜준다는 심리전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래서 1999년 5월 22일 노동신문에 '영장(영용한 지도자)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라는 장문의 서사시를 썼다. '김경민'이라는 남한의 민중 시인 명의였다. 남한의 시인이 북한 체제를 찬양해 쓴 것처럼 말이다.
'남한에도 총이 있고 북한에도 총이 있다…/그이께서 쏘신 탄도를 따라 역사가 흘러왔고/목표가 명중되는 곳에 평화의 집이 있어라 정의의 집이 있어라….'
이 시가 노동신문에 나가니 '남한 사람이 쓴 글은 다르다'는 반응이 나왔다."
―북한에서는 시인이 '귀족작가'로 불린다고 당신이 말한 적 있다.
"소설은 많은 종이가 필요해 발간이 어렵다. 하지만 시는 노동신문에 실릴 수 있다. 선전선동 도구로써는 훨씬 낫다. 노동신문에 소개되는 시들은 김정일의 찬사나 사인을 받아서 게재된다. 그래서 '귀족시인'이라고 한다. 나는 '영장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는 시를 쓴 뒤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 돈 3000원 영수증을 받은 적 있다. 중앙당 재정경리부에서 운영하는 상점에 가서 상품과 바꿀 수 있었다."
―그렇게 인정받았던 당신이 탈북한 이유가 뭔가?
"통일전선부에는 남한의 신문과 시사잡지들이 있다. 통전부 구호가 '현지화'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조선일보만 30년 본 사람도 있다. 그에게 물어보면 '어느 기자는 몇 년 생이고 어떤 칼럼을 썼다'고 금방 나온다. 여기에 있는 남한 잡지를 친구들에게 몰래 보여줬다. 또 사석에서 '이게 뭐냐, 한민족에서 반(半)민족은 후진국이고 반민족은 선진국이다' 하는 식의 발언이 문제가 됐다. 곧 체포될 것이라고 누군가 귀띔해줬다. 하지만 나는 '접견자'로 분류돼, 중범죄를 범해도 바로 잡아가지 못한다. 김정일로부터 체포 사인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달아날 시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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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하면서 품고 온 시작(詩作)노트. 중국산 공책이다.
―접견자란 무슨 뜻인가?
"김정일을 접견했던 인물을 말한다. 2002년 노동신문에 '태양의 미소를 노래하노라'는 시를 실었다. 북에서는 김정일이 웃는 것을 '태양의 미소'라고 한다. 다른 시인이라면 '찬란한' 수식어를 썼겠지만, 나는 '미소 뒤로 돌아가보니/우리 수령님 고향집부터 눈물이 돌아/ 자신을 위해 웃을 줄 몰랐고/ 인민을 위해 그 웃음을 다 주었다'는 식으로 썼다. 그게 김정일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그래서 원산의 갈마초대소에 불려가 김정일을 접견하게 됐다."
―접견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
"접견자는 나 말고 두명이 더 있었다. 부동자세로 서 있는데, 초대소 호위관들이 손 닦으라고 알코올솜 봉투를 줬다. 김정일과 악수를 위해서다. 김정일이 앉을 자리에는 소독 분사를 했다. 김정일은 고영희(아들 김정철과 김정운의 모친·2004년 사망)를 대동했다. 고영희는 몹시 불편해 보였다. 김정일은 키높이 구두를 벗고 좌석 위에 양반다리를 해 앉았다. '조선의 어머니' 노래가 울리자, 기분을 전환해주려는지 부끄러워하는 고영희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크게 웃기도 했다."
―김정일을 접견한 신분인데 남한 잡지를 반출한 걸로 굳이 탈북까지 생각했나?
"접견자가 정치적 죄를 범할 때는 더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하늘이 노랬다. 자살하려고 대동강에 나갔다가, 다시 주변과 상의하니 '앉아서 죽지 말고 뛰다가 죽어라'고 했다. 그때 '왕재산경음악단(김정일의 기쁨조)'에서 일하던 친구 K도 '나도 가겠다'고 했다."
―곡절 없이 친구가 왜 따라나섰나?
"그 체제가 너무 싫기 때문이다. 우리끼리 농(弄)으로 '인생에서 30대가 절정인데 우리는 지금 뭘 하나'라며 분노를 터뜨린다. 특히 당간부 자녀들 모임에서 그런 불만이 높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된 것은 남한의 라디오를 몰래 듣는 것이다. 또 하나는 김정일을 욕하면서 술 마시는 것이다. 단둘이 있으면 김정일을 욕하는 게 사교전략이다."
―고발과 감시체제가 그걸 용인하나?
"대학 다닐 때 주체철학 강의 시간에 선생이 '인민대중의 발전 형태를 말해보시오?'라고 물었다. '마르크스 인식론을 보면 나선형으로 발전한다'는 내 답변에, '너는 주체철학도 안 봐. 승승장구한다고 되어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사회주의 동구권이 붕괴된 것도 발전으로 봐야 됩니까?'라고 비꼬아 말했다. 배급체제가 무너지면서 주민 통제 능력을 잃었다. 남한에 1만6000명의 탈북자가 있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북한 국경을 탈출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나?
"국경여행증으로 함경북도 무산까지 왔다. 그날 밤 두만강을 뛰려고 강기슭을 걷다가, 경비대에 붙잡혔다. '당에서 근무하던 사람에게 어디 총부리를 들이대나. 간부사업 하러 왔다가 길이 헷갈렸는데 알아보라'고 큰소리쳤다. 웃기는 게, 평양까지 전화가 잘 안 됐던 모양이다. 다음 날 풀려난 뒤 밤까지 안 기다리고 대낮에 두만강을 죽으라고 뛰어넘어왔다. 강폭이 좁고 얼음이 얼었을 때다. 다른 경비초소에서 우릴 봤다. 하지만 강 중간을 건너면 중국 국경이라 총을 못 쏜다. 북한 지옥을 벗어나는 게 그렇게 가깝고 쉬운 줄 몰랐다."
그는 중국 국경의 한 민가에 들어가, '연길까지만 보내달라'며 7백달러를 내밀었다. 연길까지 와서 찜질방에 숨었다. 거기서 한국 신문을 보고 신문사를 통해 국정원과 연결됐다.
―탈북때 동행한 친구 K는 어떻게 됐나?
"연길에서 헤어진 그는 현실적 한계에 부딪혀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 '체제 선전'을 한다고 들었다. 북한에서는 내가 살인을 하고 도망간 현상수배자로 되어있다."
장진성씨는 탈출할 당시 시작 노트 2권을 품고 왔다고 한다.
"김정일 찬양시를 쓰면서 몰래 내 양심으로 썼던 것들이다. 북한 작가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가는 것은 이런 작품들이 들통났을 때다. 고발한다고 갖고 나왔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에 책을 못 내게 했다. 누군가가 정권 바뀔 때까지 기다리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작년에 출판할 수 있었다."
―김정일의 후계구도가 어떻게 될지 세계적 관심사다. 김정일의 세 아들 중 누구를 본 적 있나?
"1997년 당시에 북한 시장의 쌀 가격을 정하는 일명 '큰손'이라는 북한 특권층 자녀들과 돈 많은 귀국동포들의 모임이 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평양 '보통강호텔'에 모여 시장상황을 보면서 쌀을 비롯한 생필품들의 수입시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인맥으로 나는 그 자리에 참석했다.
하루는 김정남이 나와 '장군님께서 내게 우리 경제를 회복해 보라는 특권을 주었다. 지금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니 중국식 개혁개방을 도입해 보려고 한다. 광명성총회사를 만들려고 하는데 당신들이 계열사 역할을 해다오. 이게 잘 되면 인민들에게 쌀 정도는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다'며 진지하게 설명했다. 실제로 한 달 뒤부터 평양 대동강구역에 위치한 외화백화점인 '대성백화점' 옆에 '광명성총회사' 간판을 건 건물이 지어졌다. 하지만 얼마 뒤 그 건물은 지금의 '삼천리총회사'로 변경됐다. 김정남의 개혁개방 발언이 김정일에게 보고되어 경제권을 박탈당했다는 말이 돌았다. "
―한국으로 들어올 때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중국을 통해 남한 드라마 CD가 많이 들어와 있다. '이브의 모든 것' '가을동화' '모래시계'를 북한에서 봤다. 북한 주민들 중 한 번이라도 남한 드라마를 안 본 사람이 드물 것이다. 남한을 알게 된 것이 이런 드라마를 통해서다. 막상 와보니 드라마에 나오는 집은 다 회장님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