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이기동 교수의 新經筵_12

醉月 2013. 3. 25. 01:30

욕심 버리고 본심 찾아 明明德 행복세상 만들기

학문하는 목표

 

이기동 |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교수 kdyi0208@naver.com

공자가 말하는 학문은 다른 학문과 구별해 ‘대학’이라 일컫는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학문의 목표는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지식의 습득에 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는 학문의 내용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마음에는 본심이 있고, 욕심이 있다. 욕심이 생기기 전에는 본심밖에 없었다. 본심은 하늘의 마음이며 자연심이다. 본심이란 배고프면 먹고 싶어지는 마음이고, 피곤하면 쉬고 싶어지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다. 하늘마음이나 자연심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배고플 때도 먹고 싶지 않고, 피곤해도 쉬고 싶지 않은 욕심이 생기고, 그 욕심이 악으로 정의되면 그 반대의 마음인 배고플 때 먹고 싶어 하는 마음과 피곤할 때 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선으로 정의된다. 선은 악이 생긴 뒤에 본마음에 붙여진 개념이다.

 

사람이 본심을 회복해 본심대로 살면 행복하지만, 욕심을 채우려 살면 불행해진다. 사람은 마땅히 본심과 욕심을 분별해 욕심을 버리고 본심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욕심을 버리고 본심을 회복하려는 노력’, 공자가 말하는 학문은 바로 그것이다. ‘중용’이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학문은 ‘學·問·思·辯·行’ 준말

“하늘마음을 회복하고 싶은 사람은 선을 골라 그 선을 굳건히 붙잡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널리 배워야 하고, 자세히 물어야 하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고, 명확히 분별해야 하며, 독실하게 수행해야 한다.”(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辯之 篤行之, ‘中庸’ 第20章)

‘학문’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널리 배워야 한다고 할 때의 배움(學), 자세히 물어야 한다고 할 때의 물음(問),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할 때의 생각(思), 명확히 분별해야 한다고 할 때의 분별(辯), 독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할 때의 수행(行). 즉 학문은 學·問·思·辯·行의 준말이다.

학문이란 마음공부다. 마음속으로 들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회복하는 것이며 욕심을 버리고 본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학문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좋은 옷을 입기 위해 욕심을 부리거나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면 학문할 자격이 없다.

 

공자가 말하는 학문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학문과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과 구별해 ‘대학(大學)’이라 한다. 공자의 학문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공자는 대학의 큰 줄거리를 명명덕(明明德), 친민(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 했다. 이 셋을 후대 사람들은 삼강령(三綱領)이라 한다. ‘강(綱)’은 ‘벼리’라는 뜻이다. 벼리는 고기 잡는 그물의 가장 윗부분에 있는 굵은 밧줄을 말한다. 손으로 그 굵은 밧줄만 잡아당기면 그물 전체가 따라 올라오기 때문에 벼리가 그물의 핵심이다. 그물 가운데 가는 줄로 촘촘하게 짠 부분을 ‘눈’이라 하고, 한자어로 ‘목(目)’이라 쓴다. 영(領)은 옷깃이란 뜻이다. 옷깃은 윗옷의 목 부분에 해당된다. 옷을 걸 때 옷깃을 잡아서 걸어야 옷 모양이 유지되니 옷깃은 옷의 핵심이다. 따라서 벼리와 옷깃을 의미하는 강령이란 말은 ‘근간이 되는 것’을 말한다.

명명덕은 ‘밝은 덕을 밝힌다’는 뜻이다. 덕(德)의 옛 글자는 ‘悳(덕)’이다. 글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덕은 ‘곧은(直) 마음(心)’이다. ‘곧은 마음’이란 말이 있는 것은 ‘굽은 마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두 마음 중에 본심은 곧은 마음이고, 욕심은 굽은 마음이다. 본심은 하늘마음이 변질되지 않고 곧게 내려온 마음이고, 욕심은 ‘내 것’ 챙기는 계산에 의해 변질된 마음이다.

 

본심으로 사는 사람은 곧은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고, 덕 있는 사람이다. 본심은 살고 싶은 마음이므로 본심으로 사는 사람은 삶에 충실하다. 먹을 때 먹고, 쉴 때 쉬고, 잘 때 자므로 늘 건강하다. 저절로 위험한 곳을 피해 가기에 안전하다. 남과 경쟁하지 않으므로 스트레스가 없다. 모두와 하나가 되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개인의 늙음은 늙음이 아니고 개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일체의 고통은 해소되고, 영원한 즐거움이 찾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덕’에 ‘밝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명덕’이라 했다.

사람은 누구나 밝은 덕을 가지고 있었으나 욕심에 가리어져 어두워졌다. 사람이 욕심에 눈이 멀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면 온갖 문제가 생겨나고, 그 때문에 학문이 필요해진다. 학문은 살면서 겪게 되는 문제들, 그중에서도 특히 정신적인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욕심을 없애고, 밝은 덕을 다시 밝히는 것으로 귀결된다. 명명덕이 바로 그것이다. 명명덕을 한 사람은 고통이 없다. 그는 행복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다시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남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다.

 

다른 것을 살펴 앎을 이루다

욕심은 사람의 몸에만 들어 있는 것이라 욕심 덩어리의 수는 몸의 수만큼 많다. 욕심의 눈으로 보면 자기의 몸만이 자기로 보이고, 자기 이외에는 모두 남으로 보인다. 그런 사람은 남의 불행에 관심이 없다. 자기 것만 챙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명명덕을 하여 욕심이 없어지면 문제가 달라진다. 명명덕을 하여 본심을 회복하면 모두 하나가 된다.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을 ‘대학’에서는 친민(親民)이라 했다. 친(親)은 ‘하나 된다’는 뜻이고, 민은 ‘모든 사람’이란 뜻이다.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되면 남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므로 남의 고통을 해결해야 하는 새로운 숙제가 생긴다. 그렇지만 이때의 고통은 이전의 고통과 다르다. 친민이 된 뒤에 찾아오는 고통은 행복한 뒤에 찾아오는 고통이므로 행복 속의 고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을 해결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교육이다. 친민이 명명덕의 연장이듯이 교육은 학문의 연장이다. 학문을 하면 저절로 친민이 되므로 저절로 교육을 하게 된다. 학문과 교육은 하나다. 학문의 완성이 교육이고 교육의 시작이 학문이다. 교육을 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명명덕을 하면 이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군자가 되고 모두 행복한 사람이 된다. 그런 세상이 낙원이고 천국이다.

천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다 같이 행복해지는 세상이 천국이다. 이를 ‘대학’에서는 지어지선이라 했다. ‘지극히 좋은 세상(至善)’에서 ‘머물러 산다(止)’는 뜻이다. 요약하자면 학문의 길은 밝은 덕을 밝혀서 개인적으로 완전히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천국에서 다 함께 머물러 사는 데 있다.

‘대학’에서는 명명덕, 친민, 지어지선으로 설명되는 삼강령을 세분해 여덟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후대 사람들은 이를 팔조목(八條目)이라 한다. 조(條)는 나무의 가지이고 목(目)은 그물의 눈이므로, 조목은 큰 것을 자세하게 나눈 것을 말한다. 팔조목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다. 팔조목 중에서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은 명명덕에 해당하고, 제가·치국은 친민에 해당하며, 평천하는 지어지선에 해당한다.

격물(格物)의 격(格)은 ‘이른다’ ‘나아간다’ 등의 뜻이고, 물(物)은 나 이외의 모든 것을 말하므로, 격물은 다른 것에 다가간다는 뜻이다. 자기의 본심은 다른 사람의 본심과 같은 것이며 다른 모든 것의 본심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본심이 욕심에 가려져 알기 어렵다면 다른 것을 살펴 거기에 들어 있는 본심을 찾아내면 된다.

다른 것을 살피려면 우선 다른 것에 다가가야 한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다가가는 것, 즉 격물이 학문의 첫 번째 단계다. 치지는 본심에 대한 앎을 이룬다는 뜻이다. 다른 것에 다가가 다른 것들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살피다보면 모든 것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삶의 본질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이를 ‘대학’에서는 앎을 이룬다는 뜻에서 치지(致知)라 한다.

 

연애할 때 연애하라

봄날이 되어 모내기철이 되면 개구리는 밤새 개굴개굴 노래하고, 뻐꾸기는 숲에서 뻐꾹뻐꾹 노래한다. 꾀꼬리도 노래하고 종달새도 지저귄다. 모든 것이 이처럼 쉬지 않고 노래하는 것은 연애를 하는 것이다. 연애하는 것, 그것은 생명체가 삶을 이어가는 공통의 방식이다. 사람이 연애를 하는 것도 모든 생명체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한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연애해야 할 때 연애하고 싶어지는 마음은 욕심이 아니라 본심이다. 본심은 따라야 하고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연애해야 할 때 연애하는 사람은 격물치지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개구리는 가을에는 노래하지 않는다. 꾀꼬리도 그렇고 뻐꾸기도 그렇다. 이를 보면 아무 때나 연애하는 사람은 격물치지가 안 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연애해야 할 때 연애하는 사람이 격물치지가 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연애하는 것 이외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여전히 욕심에 가려 있으므로 격물치지를 계속해야 한다. 격물치지의 방법에는 생물학, 물리학, 화학, 우주과학 등의 자연과학을 비롯해 역사 공부, 경전 읽기, 고전 공부 등의 인문학이 두루 해당한다.

중요한 것은 학문을 대할 때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학문을 접하면 학문은 따분해지지만, 격물치지의 방법으로 학문에 접하면 모든 학문은 신선하고 재미있다. 학문을 통해 격물치지를 계속해가면 본심이 점점 확대되고 욕심이 차츰 줄어들다가 어느 순간 욕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온다. 그 순간을 활연관통(豁然貫通)이라 한다.

 

성의는 뜻을 정성스럽게 유지한다는 뜻이다. 격물치지를 해서 본심을 알면 본심으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정성스럽게 본심을 따를 수 있다. 이를 ‘대학’에서는 성의라 한다. 정심은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본심을 정성스럽게 따르면 마음속에는 욕심이 사라지고 본심에서 나온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 찬다. 이를 ‘대학’에서는 정심이라 한다.

  

지상천국의 평화

서울 개봉동에 문을 연 한옥어린이전용도서관에서 한복을 입은 어린이들이 한자를 배우고 있다.
 

수신은 몸을 닦는다는 뜻이다. 몸은 마음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그릇에 물이 담겨 있을 경우 물이 깨끗하면 그릇이 깨끗하지만 물이 더러우면 그릇도 더러워진다.

몸과 마음의 관계도 이와 같다. 마음이 깨끗하면 몸도 깨끗하지만, 마음이 더러우면 몸도 더러워진다. 그러므로 정심을 해서 마음이 깨끗해지면 몸은 저절로 깨끗해진다. 정심이 수신의 선행조건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학’에서 정심을 수신 앞에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가는 가정을 행복의 보금자리로 만든다는 뜻이다. 수신을 하여 몸이 깨끗해지고 몸에서 향기가 나면 주위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주위 사람들 중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족이다. 그러므로 수신이 되면 제일 먼저 가족이 행복해지고 가정이 행복의 보금자리가 된다.

치국은 나라를 잘 다스린다는 뜻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신을 하지 않은 사람은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 수신을 하고 제가를 한 사람만이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만이 나라의 어른을 섬길 수 있고, 자녀를 잘 보살피는 사람만이 나라의 어린이들을 잘 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제가가 되면 치국은 저절로 될 수 있다.

평천하는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는 뜻이다. 흔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로 정의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에 아무 걱정이 없고 하나도 긴장되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하면 마음이 푹 놓이는 상태가 평화다. 사람들이 서로 이기기 위해 경쟁하는 상태에서는 평화가 없다. 평화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모두 한마음이 될 때만 찾아온다. 진정한 평화는 이 세상이 지상천국이 될 때에만 찾아온다.

공자가 말하는 학문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 끝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학문은 정치·경제·교육 등의 사회과학과 철학·종교학·윤리학 등의 인문학, 그리고 모든 자연과학을 다 포함한다.

다만 모든 학문이 아무 연결고리가 없이 각자 다르게 추진되는 것은 공자의 눈으로 보면 학문이 아니다. 내가 행복하고 네가 행복하며 우리 모두가 행복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모아지는 것이라야 진정한 학문이다. 삼강령 팔조목이 바로 그것이다.